‘목욕탕 교회, 때밀이 목사’는 바로 우리들교회 김양재 목사를 일컫는 별칭이다. 우리들교회에 가면, 김양재 목사를 만나면 사람들은 위선과 체면, 인격이란 가면을 벗고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가출 직전, 부도 직전, 이혼 직전, 자살 직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서로 때를 밀어 주면서 시원함을 느끼고, 치유의 단계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난 당한 사람들의 병원이요, 안식처인 우리들교회는 “설교를 들으면 가슴이 운다더라”, “고난이 정말 부끄럽지 않은 교회더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개척 14년 만에 출석 성도 1만여 명으로 성장했다.
김양재 목사는 4대째 모태신앙인으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총신대학교 강사를 지냈다.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했고, 현재 큐티엠 대표이자 우리들교회 담임목사이다.
저서로는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홍성사), 《복 있는 사람은》, 《습관을 들이는 100일 큐티노트》, 《날마다 살아나는 큐티》, 《큐티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새 말씀 새 부대 새 노래》, 《천국을 누리라》, 《천국을 보여 주는 인생》, 《나를 살리는 회개》, 《뜨겁게 행하라》, 《절대 복음》, 《절대 순종》, 《가정아 살아나라》, 《가정아 기뻐하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럼에도 살아냅시다》, 《내 인생 최고의 선택》, 《보석》, 《상처가 별이 되어》, 《보석상자》, 《결혼을 지켜야 하는 11가지 이유》, 《면접》, 《프러포즈》, 《그 한 사람》,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100프로 응답받는 기도》, 《살피心》(이상 두란노) 등이 있다.
우리들교회 홈페이지 www.woori.cc
저자 이메일 qtyjks@hanmail.net
살피心
지은이·김양재
초판 발행·2017. 08. 28
전자책 발행·2017. 08. 31
등록번호·제1988-000080호
등록된 곳·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65길 38
발행처·사단법인 두란노서원
영업부·2078-3333FAX080-749-3705
출판부·2078-3331
ISBN 978-89-531-2952-8 03230
e-ISBN 978-89-531-2959-7 05230
편집부에서 독자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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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8-20절의 정신에 따라 첫째 목회자를 돕는 사역과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사역, 둘째 세계선교(TIM)와 문서선교(단행본·잡지) 사역, 셋째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 사역, 그리고 가정·상담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2월 22일에 창립된 두란노서원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역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Prologue
살피심은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즈음 우리들교회에서는 매 주일 요한계시록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어렵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합니다. 제가 아무리 말씀을 꼭꼭 씹어 전해도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으니 구속사가 깨달아질 리 없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모든 성도가 창세기를 잘 읽어서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 창세기 큐티 노트 네 번째 책을 발간하게 되어 감사하고, 기대가 많이 됩니다.
창세기 큐티 노트 1권 《보시기에 좋았더라》, 2권 《그럼에도 살아냅시다》, 3권 《너는 복이 될지라》에 이어 발간하는 네 번째 책 《살피心》은 창세기 16장부터 19장까지의 말씀을 묵상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뭇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16장에서 아브람은 그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을 깡그리 잊어버린 채, 사래의 종 하갈과 동침함으로 육적인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복이 될지라” 하셨음에도 그 복을 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아브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13년을 침묵하셨지만 다시 찾아오셔서 아브람을 살피시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양육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 꿈이란 바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때까지’(계 22:21) 영적 상속을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롯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고, 아들 이삭을 주셔서 예수님의 계보를 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살피십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살피심을 피하느라 사라처럼 장막 뒤에 숨어 하나님을 비웃고, 부르심을 못 들은 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는 애물단지나 다름없던 조카 롯의 구원이 평생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죄악이 가득한 소돔을 심판하신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끈질기게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롯이 구원받았습니다. 불바다가 된 소돔 성에서 롯은 사위도 아내도 잃은 채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부끄러운 구원을 얻었지만 그 후의 삶은 더욱 구차합니다.
그런 롯의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꼭 제 인생 같아서 너무 슬픕니다. 너무나 연약하여 죄악 가운데서도 제힘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신이 택한 결론이기에 그 자리에 남아 애통해하던 모습이 저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롯과 같은 영혼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고, 내 배우자, 내 자식, 내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롯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애통해하며 그들을 구원에 이르기까지 이끄는 것이 먼저 구원받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오직 영혼 구원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직 ‘기-승-전-영혼 구원’입니다. 가족을 섬기고, 직장을 다니고,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식당봉사, 주차봉사를 하더라도, 초점은 오직 한 영혼의 구원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가 남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날마다 애통해하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살피심 속에서 영적 대물림을 잘하며, 영혼 구원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7년 8월
우리들교회 담임목사 김양재
chapter_1
믿음이 연약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오늘 또 실수를 했습니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말씀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는 아브람의 인생을 통해 실수하지 않고 사는 지혜 얻기를 원합니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창세기 16장 1-6절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오직 자녀교육에 목숨을 겁니다. 유난히 한국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그렇습니다. 특히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극성입니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아무개의 부인’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는 ‘아무개 엄마’로 불립니다. 이씨 왕조 때도 자식이 왕이 되면 ‘대비마마’들이 섭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로부터 가정 안에서 여성의 권한이 그리 보장된 나라도 아닌데, 유독 자식 문제만큼은 여성의 입김이 드센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엄마들은 죄다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자식이 잘못되어도 죄다 엄마 탓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우리 엄마들의 영원한 숙제입니다. 저 역시 자식 교육에서만큼은 제대로 내려놓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일찍 철이 들어서 모범적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제 아들은 여러모로 제 기준에 못 미쳐서 날마다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를 잘했는데 아들은 죽어라고 시켜도 죽어라고 안 했습니다. 속이 터졌습니다. ‘쟤는 왜 공부해야 할 시간에 저렇게 잠을 자고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깎고 깎이며 이모저모 거룩을 이루어 감에도 불구하고 자식 문제에서만큼은 거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누구나 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식이 내 기대에 못 미치기에 그것이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아니, 자식에 대한 내 기대가 지나치기에 도저히 자식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없으니 계속 하나님 앞에 대들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자녀를 주신다고 했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안 주시니 안달이 났습니다. 자식을 못 가져서 이렇게 난리 치는 모습을 보면 그의 믿음이나 우리의 믿음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믿음도 작은 겨자씨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나는 믿음 좋고,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뻔뻔하고 중한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에서 끝까지 해방되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이 좋아졌다고 할지라도 땅을 딛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날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람도 별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넘어지는 실수를 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여전히 자식 문제 때문에
실수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창16:1)
영적 상속자를 무수한 별과 같이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우리의 관심은 늘 내가 낳은 자식에게만 가 있습니다. 내 자식이 우선입니다. 어떤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 몸에서 난 내 육적 후손이 창대케 되는 것이 내 평생소원이요, 염원이기에 오직 내 자식만 부르짖습니다. 그 육적 자식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다 보니 영적 상속자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잘난 자식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느라 정신없습니다. 배운 것이 많을수록 교묘하게 자랑하고, 배운 것이 없을수록 대놓고 자랑합니다.
어느 학교 졸업식에서 일등으로 졸업하는 아이가 상을 받고 내려가는데 그 만장하신 여러분 앞으로 엄마가 뛰어나가 아들과 사진을 찍더랍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염치도 없이 사진을 다섯 방이나 찍었답니다. ‘이 일등한 애가 내 아들이다’ 하고 온몸으로 자랑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이런 자랑할 아들이 없으니 사래가 살고 싶었겠습니까. 그 화려한 애굽에서 지질한 가나안으로 돌아왔는데, 자랑할 자식마저 없으니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내 자식 못난 것은 둘째 치고 다른 집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속상하고 배가 아픕니다. 남의 집 자녀가 예수 믿고 헌신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함께 기뻐해야 함에도 그게 내 자식이 아니라서 섭섭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식을 가지고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이 훈련만 제대로 받아도 상급이 줄줄이 쏟아질 텐데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훈련을 피해 가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니까 사래에게도 자식 고난을 피해 갈 길이 보입니다. 길이 없어야 하는데, 길이 없는 게 축복인데 사래에게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분신 같은 여종을 씨받이 삼아 자식을 얻으면 되겠다 싶은 것입니다.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점찍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퇴짜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세상적인 방법으로 상속자를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가 또다시 실수를 합니다. 자식 문제 때문에 실수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어도 금세 이렇게 실수를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 자식 자랑을 얼마나 합니까? 남들이 늘어놓는 자식 자랑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 자녀 문제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실수가 있습니까?
∞ 하나님의 방법을 외면하고 세상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실수한 것이 무엇입니까?
∞ 내가 반복해서 실수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만 때문에 ‘나도 속고 너도 속는’ 실수를 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창16:2)
사래는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후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은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고 아브람과 횃불 언약까지 체결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래가 모를 리 없잖아요. 그런데 사래는 “하나님이 계시긴 뭐가 계셔. 계시다면 왜 내게 출산을 허락하지 않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우리끼리 알아서 하나 만들자”고 나섭니다. 사래의 자존적인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우리도 사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믿음이 연약하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 아이들이 지금 이러고 있겠어?”, “내가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왜 우리 아이들이 이 모양 이 꼴이야. 하나님은 없어!” 다들 이럽니다. 그래서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자존적인 교만입니다. 그 교만은 결국 큰 실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여보, 내 여종과 동침하세요. 그러면 혹시 우리에게 자식이 하나 생기지 않겠어요?” 하고 제안합니다. 아브람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두말 않고 사래의 말을 듣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노라면 영적 상속자를 낳고 안 낳고는 여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듯합니다. 참으로 믿음의 가정에서 아내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래’란 ‘다투는 여인’, ‘나의 공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래는 완전히 공주 과科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못 낳는 문제 때문에 자존심이 엄청 구겨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자식을 못 낳는 것이 커다란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 오직 여자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사래의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이 못 낳으면 비참하고, 돈 못 벌면 비참합니다.
사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얼마나 고난이었으면 남편에게 자기 종과 동침하라고 했겠습니까? 사래는 대를 잇고자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섰습니다. 남편에게 첩을 취하라고 했으니 아이 못 낳는 아내로서 이보다 더 큰 희생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헌신은 자존적인 교만에 불과합니다.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헌신입니다. 남들이 보면 너무 멋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는 명분 속에는 ‘내가 세움을 입을까 하노라’ 하는 속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헌신은 아브람을 위한 것도, 대를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남편에게 여자를 취하라고 했으니 아브람은 물론이거니와 시댁 식구들이 감동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의 자존적인 교만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기 헌신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헌신하는 척하며 자기를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처럼 자기 헌신을 하며 자존적 교만에 빠진 중직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런 헌신을 기쁘게 받지 않으십니다.
아내가 갑자기 “내 여종하고 잠자리를 같이하라”고 하니 아브람의 눈에도 보이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준 밤하늘의 뭇별도, 약속하신 큰 상급도 다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의 믿음도 별수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곧바로 “네” 하고 순종했던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을 진정으로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람의 믿음이 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라고 했으니 아브람 당신 씨면 됐지, 씨받이면 어때요?”
사래가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교묘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자기 맘대로 갖다 붙이자 아브람도 순식간에 현혹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만 하면 안 됩니다. 문자 그대로 읽고, 내 지식으로 해석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깊은 묵상이 필요한 거에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택하셨을까?’, ‘왜 예수님은 이곳에 가셨을까?’, ‘왜 야곱은 이랬을까, 왜 다윗은 저랬을까?’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방법도, 목적도, 결과도 다 좋아야 합니다. 목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방법이 나쁘면 또 실수를 하게 됩니다.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는 사래의 태도는 ‘선악과를 따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하와의 태도와 다름없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창 3:3)라고 자기 생각을 보탰습니다. 말씀에 자기의 욕심을 가감했습니다. 그러니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꼬임에 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여호와의 낯을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류에게 원죄의 형벌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사래는 더욱 교묘합니다. 하와와 달리 너무나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보입니다. “대를 잇기 위해서 내가 자존심을 다 내팽개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분별을 못합니다. 여자는 그 재질이 뼈이다 보니 확실히 남자보다 뛰어난 데가 있습니다. 남자들이 생각 못하는 것을 생각해 냅니다. 영악합니다. 그래서 시댁에 말하는 게 다르고, 남편에게 말하는 게 다르고, 친정에 말하는 게 다릅니다.
사래는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낳으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세움을 입을까’ 해서였습니다. 그 때문에 남편에게 부정한 짓까지 허락합니다. 사래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말에 솔깃한 아브람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잘 키우려고 애쓰는 것도 다 내가 인정받기 원해서입니다. 남들 보고 손가락질하는 것도 내가 인정받길 원해서입니다. 내 자아가 세움 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결국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 이렇게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땅에서 갖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소그룹 모임에서 “신학을 하면 본인도 남도 나름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인정해 주는 부분이 있는데, 우리들교회에 오니까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헌신에 아무도 안 속더군요” 하는 나눔을 했습니다. 비단 이 목사님뿐이 아닙니다. 우리들교회의 웬만한 리더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스스로 자신들의 속임수 헌신에 대해 줄곧 회개합니다.
영적 상속은 하갈에 의해서, 종에 의해서 이어지면 안 됩니다. 영적 상속은 자유자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지, 종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28-30)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영적 상속자만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자식, 자식” 자식 타령 그만하라는 것입니다. 그만 슬퍼하고 그만 집착하라는 겁니다.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자녀가 없다고 한탄하지 말고 이제는 영적 상속자를 낳고 키우기 위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그 숫자만 셉니다. 내 자녀 몇 명 잘 키웠나 셈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앞으로 몇 명을 인도했나, 이것만 셈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굳이 하갈에 의해, 종에 의해 육적인 자녀를 얻고 육적인 세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자식을 빙자해서 세움을 받고자 하는 자존적인 교만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에 대한 헌신이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보다 앞서는 교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연민에 빠집니다. 사래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오죽하면 이러느냐.” 우리는 만날 이런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나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 별 수고를 다 하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못하니 섭섭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수고할 시간 있으면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자기 연민은 자존심이 고통에 반응하는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자기 연민은 자기희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현입니다. ‘나는 이것이 너무너무 필요해’라는 마음은 상처 받은 자아로 인해 비롯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많을수록 필요한 게 많습니다. 집착하는 게 많습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게 많습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해서 더욱 고통을 겪게 되고, 그것이 결국 자기 연민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연민은 상처 받은 자아에게 흔히 나타나는 솔직하지 못한 감정입니다.
자기 연민의 심리적 저변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영웅’으로 보아 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습니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가치를 남이 몰라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영웅이 되고 싶은데 사람들이 내 가치를 몰라줘서…’ 이것이 자기 연민의 뿌리입니다. 환영 받지 못한 자존심이 보이는 반응이 자기 연민입니다. 그래서 나도 속고 남도 속이기 쉽습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속으면 실수합니다. 결혼도, 사업도 그래서 실수합니다.
∞ 자존적인 교만으로 헌신하며 나를 스스로 세운 적은 없습니까?
∞ 자식을 잘 키우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을 믿은 이후 가치관이 달라졌습니까? 어떤 면에서 달라졌습니까?
∞ 자기 연민에 빠져 나도 속고 남도 속인 적이 있습니까?
‘묻자와 가로되’ 하지 않으니 실수합니다
창세기 16장 2절 후반부에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고 합니다. 잠시 망설이거나 갈등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원어 성경에는 그냥 ‘말을 들었다’는 정도가 아니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상속자가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나의 상속자는 엘리에셀이니이다” 했을 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을 듣고는 곧장 순종했던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하던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브람이 하나님께 물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즉시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딴 이유가 없습니다. 죽자 살자 자식 갖기를 원하고,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갖고 싶었으니 사래의 말에 혹해서 단번에 넘어간 것입니다.
아브람이 왜 이렇게 금세 넘어갔을까요? 아브람도 자기 연민이 있고, 그 점에서는 사래 못지않았습니다. 사래는 그동안 아브람에게 별로 요구한 게 없습니다. 사래가 누구입니까? 자존적인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공주’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남편 아브람을 따르느라 살기 좋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왔습니다. 바로에게 팔려 갈 뻔하고, 아브람이 롯에게 재산과 좋은 땅을 양보할 때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사래가 고마워 죽습니다. 그래서 자식 하나 못 낳아도 불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내 사래가 자신의 종 하갈과 하룻밤 동침하라고 하니 아브람은 속으로 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자식을 얻을 기회도 기회지만 그동안 하나님께 양육되느라 ‘딴 짓’ 한 번 못하고 살았던 아브람입니다. 막말로 임도 보고 뽕도 따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으로선 아내 사래의 신신당부 같은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신나지 않았겠습니까?
이럴 땐 딱 잘라야 하는데, 유혹에 휘둘리지 말아야 하는데, 어느 남자가 마다하겠습니까. 아내가 살신성인의 자세로 “여보, 하갈한테 들어가~” 그러면 “싫어!” 할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 그래, 알았어, 여보” 이러지요. 머리라도 긁적이면 다행입니다. 다들 못 이기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릅니다. 다 그렇게 넘어갑니다.
아브람이라고 별수 있었겠습니까? 싫은 척, 마지못해 하는 척하면서도 사래 맘이 변하기 전에 냉큼 사래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은 자식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습니다. 자식을 못 낳는 아내 사래를 빙자해 그 욕망을 숨기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예수회 학자인 로베르토 수사가 가톨릭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남자가 저지르는 죄의 1, 2, 3위가 정욕, 탐식, 나태라고 합니다. 여자는 교만, 시기, 분노랍니다.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여자는 자존적인 교만 때문에 날마다 내 남편과 남의 남편을 비교하고, 내 자녀와 남의 자녀를 비교합니다. 여자가 한번 비교하기 시작하면 온 집안이 파투가 납니다. 그래서 정욕보다 더 무서운 죄가 교만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정욕이 먼저입니다. 정욕에 끌려 다니다 보니 교만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의 눈에는 남자들이 미련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남자를 쓰십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이라곤 눈만 뜨면 교만하고 시기하고 분노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교만을 부리느라 얼마나 이말 저말을 퍼뜨리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저도 여자지만 정말 여자들이 그렇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멸망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미련할지언정 남자를 여자 위에 세운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사래의 교만과 아브람의 정욕이 딱 맞아떨어지다 보니 부부가 ‘힘을 합쳐’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그 누가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정말 눈물 흘리며, 이 죄의 고개를 또 한 번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묻자와 가로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이 있습니까? 무슨 일로 원망했습니까? 그 원망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 사람 말에 혹해서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까?
기다리지 못해서 실수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창16:3)
‘10’은 완전수입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에 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아브람과 사래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도 15년을 더 기다려야 아들(이삭)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의 때는 아직도 아닌데 아브람과 사래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으려는 조급함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밤하늘의 뭇별과도 같이 수많은 영적 상속자를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지조차 모릅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들 달라, 돈 달라” 합니다. 돈보다, 자식보다 더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돈 많은 우리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능력 있는 우리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열심히 교회 다니며 봉사하고, 헌신하며, 선교하는 것이 믿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헌신하며, 선교하고, 봉사해도 순종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순종만큼 찬란한 믿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순종보다 더 기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이고 성숙한 믿음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가 쓴 《소망 있는 기다림》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엄마가 일곱 살 난 아들과 바다로 가기 위해 기차 여행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얼마나 더 가야 돼요?” 하고 질문을 합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설명하기가 참 난감합니다. “400킬로미터를 더 가야 해”라거나 “서너 시간은 더 가야 해” 하며 구체적으로 말해 봤자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개념이 없는 아이는 엄마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엄마는 “네가 동화책을 세 번 읽을 만큼 간단다” 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네, 알았어요” 했습니다. 그런데 동화책을 세 번 다 읽을 때까지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으니 아이가 또 물어봅니다. 엄마는 이러고저러고 설명해 주다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엄말 믿어~!! 넌 자세한 거 신경 안 써도 돼. 쫌 있으면 바다에 확실히 도착한다니깐!”
이 엄마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두 번 다시 여쭐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지혜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설명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설명을 해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기에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기다려야 하는데, 아브람과 사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알겠습니다” 하고 분명히 대답하고는 16장에 와서 그때를 못 기다리고 하갈과 동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습니까.
우리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다리라고 하는데, 기다리지 못합니다. 우리 믿음이 그렇습니다. 다만 아브람마저 이런 모습을 보이니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자기 목숨 지키겠다고 마누라 팔고, 아들 못 가져서 안달복달하고, 아내의 여종과 동침하고… 아브람이야말로 형편없는 인간 아닙니까?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이런 인생을 살았으므로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아브람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았음에도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니 100퍼센트 죄인인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우리의 본보기가 되고, 그의 삶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무 잘나고 위대한 사람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살기에 흉내조차 낼 수 없고, 적용할 거리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구속사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셔서 나와 똑같은 성정으로 똑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처녀의 몸에서 잉태되었기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셨기에 더욱 무시 받았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났기에 태생부터 천한 신분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렇듯 남에게 멸시 천대를 받는 것입니다. 믿음생활 제대로 하려면 그런 각오부터 해야 합니다. 칭찬 받을 생각만 하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믿음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두르는 바람에 실수한 적이 있습니까?
∞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책임을 회피해서 실수합니다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창16:4-6)
아브람의 씨를 받아 임신한 하갈이 사래를 무시하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결국 하갈은 도망을 가 버립니다.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아브람은 “당신 맘대로 하세요” 하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무시와 회피, 학대와 도망이 이어집니다. 잉태를 해서 잠깐은 기뻤으나 그로 인해 불화가 시작되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인간관계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결혼하지 않으면, 불신결혼을 하면 절대로 그 관계가 바로 설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축첩한 집안치고 화목한 경우가 없습니다.
한편, 사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남편 때문에 평생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가친척이 다 있는 갈대아 우르에서 데리고 나와 갖은 고생 다 시키더니, 급기야 아내인 자기를 바로에게 팔아넘기려 한 남편입니다. 그런 지질한 남편이 대를 잇고 싶어 해서 자기가 아끼던 여종까지 침실에 넣어 줬는데, 지금 그 남편이 등을 돌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여종까지 자신을 멸시합니다. 그렇게 잘해 줬건만 돌아오는 건 멸시와 조롱뿐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다 이렇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있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셔야 진정한 도덕이고 윤리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가 주인 되어서 행하는 도덕과 윤리는 더없는 교만입니다.
그러니 사래도 여기서 바닥이 드러납니다. 세상적인 윤리의 잣대로는 사래같이 바른 여인이 없습니다. 행위가 너무 기특하고, 남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쉴 새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믿음이 없으면 항상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갈이 여주인의 허락 아래 여주인의 남편과 동침을 했는데, 아기를 가지게 됐습니다. 한 번 동침해서 덜컥 임신이 됐겠습니까? 하룻밤만 보낸 게 아니라 임신이 확인될 때까지 계속 동침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하갈은 아브람의 사랑이 자기에게로 넘어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래가 우습게 보였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비록 아브람의 본부인이었고, 자신의 주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고 착각했을 것입니다. 사래도 하지 못한 임신을 했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사람은 힘이 있으면 이렇게 교만해집니다. 힘이 좀 생기면 약한 사람을 학대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뭣 좀 안다고 교만하고, 뭣 좀 있다고 교만을 부립니다. “난 너무 겸손해” 하면서 교만을 부립니다. 인간은 그렇게 교만한 존재입니다. 누구나 자존적인 교만을 품고 있습니다.
결국 아브람의 가정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게 누구 때문입니까. 아브람 때문입니까? 하갈 때문입니까? 결국 다 사래가 저지른 일 아닙니까? 누굴 탓하겠습니까? 사래가 이것이 자기 문제인 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자기 죄를 모릅니다. 자기 잘못을 모르니 남 탓만 합니다. “얘가 이래도 되냐? 이런 앨 내버려 둘 거냐? 내가 받는 모욕을 당신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그런데 이때 아브람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당신 여종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합니다. 하갈이 자기 자식을 잉태했거나 말았거나, 사래가 하갈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자기하고는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지 않습니까?
이런 무책임한 인간이 수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지금 내 곁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피차 책임질 줄 모릅니다. 인간의 책임 회피는 아담과 하와로 그 뿌리가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왜 먹었냐?” 했을 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와가 먹어도 된다고 해서 먹었다”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책임 회피는 자신이 죄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이 죄된 본성이 있기에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합니다. 무슨 문제만 생기면 “당신 탓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변명도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 이렇습니다. “너 때문에 뭘 못 하겠다”는 말이 입에 붙은 우리입니다. 그러니 자식들로부터도 존경 받지 못합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공동체에서든 존경 받으려면 항상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책임지는 그 한 사람, 공동체에서도 책임지는 그 한 사람이 바로 진정한 리더입니다. 책임지는 한 사람이 있으면 집안이 살아나고 공동체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면 우리는 결국 아브람처럼 또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권세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학대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권세를 업고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자, 사래 역시 남편 아브람의 권세를 업고 하갈을 학대합니다. 믿음 없이 권세를 가지면 이토록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학대를 받다 보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래도 하갈에게 학대를 받다 보니 그나마 아브람이 자기편이라는 걸, 아직도 자기를 위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래와 아브람 사이에 이전보다 더 튼튼한 삼겹줄이 형성되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건강이 무너지면 그 누구도 도움이 안 됩니다. 고난당할 때 진정으로 위로해 주고 묵묵히 지켜 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돈 잃고 건강 잃으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하자 약속한 배우자도 하루아침에 떠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 곁을 지켜 줄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이 땅이 아무리 학대해도 하나님만 있으면 내게 기쁨이 됩니다. 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집니다.
환난당하고 고통당해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는 걸 믿고 가는 사람들은 그래서 늘 든든합니다. 우리는 종의 자식이 아닙니다. 자유자의 자식입니다.
우리들교회 소그룹 모임의 리더 중에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와서 한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자신이 근무하는 연구소의 프로젝트 때문에 지방의 한 국립대학으로 출장을 자주 다니는데, 그 지방의 숙소 컴퓨터에는 이전에 투숙했던 사람들이 다운로드해 놓은 음란 동영상이 있다고 합니다. 이분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자기가 포르노 중독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걸 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던 중이어서 처음엔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출장을 자주 가서 혼자 잠을 자는 일이 많다 보니 차츰 ‘볼까 말까’ 갈등하게 되었고, 마침내 유혹에 넘어져 보고 말았습니다. 환경에 장사 없다고, 출장 가면 해이해져서 번번이 시험에 넘어졌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중 자신이 섬기는 소그룹 모임에서 도박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지체를 붙여 주시는 바람에 자신의 이런 중독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의 리더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시험이 올 때마다 넘어진다.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연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절대치의 심판을 주셨다. 다시는 동영상을 안 보겠다”며 소그룹 모임에서 눈물을 쏟아 가며 죄 고백을 하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분이 또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모임에서 오픈까지 했으니 지난번처럼 절대 넘어지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고, ‘컴퓨터에 있던 음란 동영상도 다 삭제해 버리고 출장 기간 동안 이른 아침에 산에 올라가서 큐티를 해야지’ 하고 근사한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출장지에 도착하고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출장 전에 미리 한 대학원생에게 작업 지시를 해 둔 것이 전혀 진척되지 않아 일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작업에 매달렸는데, 새벽 2시가 되도록 진도가 안 나갔습니다. 아침까지 해도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왜 이런 사건을 주시는가? 내가 동영상을 안 봤더니 짠하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다, 뭐 이런 간증을 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좌절감에 빠진 채 작업도 제대로 마무리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내가 뭐 하러 힘들게 이렇게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하나’ 하면서 다시 음란 동영상을 봐 버렸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실수를 하고 또 실수를 한 것입니다.
피곤과 죄책감에 휩싸여 겨우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니 큐티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연구실에서 “작업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얼른 큐티책을 폈더니 그날 주시는 말씀이 빌립보서 2장 5-11절이었습니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인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을 읽고, 이분이 ‘내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묵상했답니다. 그리고 나눔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이번 출장을 다녀와서 포르노 중독을 다 이겼다고 소그룹 모임에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산에 올라가 맑고 정결한 마음으로 큐티를 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의인의 모습으로 드리는 큐티보다, 이렇게 지질하게 모텔 방에 누워서 드리는 죄인의 큐티를 더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시험에 넘어져서 포르노를 보았다”고 죽어도 오픈하고 싶지 않은데,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또다시 공동체 앞에서 저의 죄를 오픈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죽기보다 하기 싫은 고백인데, 이런 죄인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렇게 용기를 내어 저의 죄를 고백합니다. 여러 중독의 문제로 우리들공동체를 찾으신 여러분에게 저의 고백이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죄가 있기에 이분은 예배 때마다 웁니다.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폐부를 찌르는 설교를 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립니다. 이분은 남잔데도 말씀을 나눌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자녀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내 주 예수 여전히 날 부르사…”라는 찬송가(290장) 가사처럼 그 참되신 사랑을 베푸시는 이 주님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선한 것이 있어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 책임을 회피한 적 있습니까? 책임 회피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 멸시를 받거나 학대당한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멸시하거나 학대한 적은 없습니까?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내 탓임을 인정합니까?
∞ 내가 환난당하고 고통당해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 몇 차례 노력에도 내가 아직 끊지 못하고 있는 중독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들 묵상과 적용
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주변에 믿는 사람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미션스쿨인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나를 믿겠다”며 잘난 척을 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배우자를 고르는데 나름대로 학력 수준, 직장 경험, 부모님을 모실 것, 예쁘고 야할 것 등 10가지 기준을 정해 놓고 그에 맞는 여자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10가지 조건 중에 9가지를 만족시키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모태신앙인인 아내는 교회 출석을 조건으로 저와 결혼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약속은 결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결혼 후에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동생과 저를 친척집에 남겨 두고 어머니와 함께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돌봐주기로 한 친척들은 오히려 집에 있는 쓸 만한 물건들을 다 들고 가 버렸습니다. 저는 그때의 상처로 인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가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성공만을 위해 명절에도 회사에 출근했습니다. 제가 성공하는 것만이 실패를 보상 받고, 가족의 고생을 보상해 주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을 걸었던 회사가 부도가 나자 몹시 좌절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는데, 말씀이 들리지도 믿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분이 ‘땅 차지’라는 제목의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서 “남편이 땅이고, 가장 어려운 땅이 내 자녀라고 하는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했다는데, 저도 그랬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설교 시간에 거의 졸았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녀야 한다고 하기에 새벽예배, 주일예배, 수요예배를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매주 토요일에는 교회 청소를 하면서 행위로 열심을 냈습니다. 사래처럼 공주 같은 아내에게 영웅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성공하기 위해 벤처기업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경영이 어려워지자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줄 수가 없어서 아내 몰래 금융기관 19군데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회사 사정은 더 나빠질 뿐이었습니다. 그즈음 제가 열심히 교회 다니는 것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희생하는 것 같지만 자존적인 교만에 불과하며, 결국 나도 속고 아내도 속이며 제 자신을 세우려 했던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매로 집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서야 아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제가 집에 들어가면 다짜고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자살을 하겠다고 벽에 머리를 박고, 칼을 들고 손목을 긋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저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 공황 상태에 빠져서 모든 사고가 정지되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밤이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잠이 들곤 했습니다. 매일 싸우는 상황이 괴로워 아내가 이혼하자는 말에 상담소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이혼 상담소가 아닌 법무사에게 잘못 찾아가 상담을 해 주던 사람의 설득으로 그냥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10가지 조건 중 9가지가 맘에 들어 결혼했지만 서로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무시하고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세상 욕심에 젖어 인생을 낭비하고 방황하다가 쥐엄열매조차 주는 이가 없는 환경이 되어서야 말씀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공동체에 들어갔을 때 웃음기가 전혀 없는 저를 보고 어느 집사님이 “자폐환자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인간관계가 다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그런 저의 영혼을 하나님께서는 마가복음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으로 깨워 주셨습니다. “너를 위해서 그 길을 예비하고 갔다”는 말씀이 깨달아지며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축복이기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제게 주신 고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벤처기업을 접고 새로운 직장에 취업했습니다. 양육훈련을 통해서 영적 상속자를 낳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갈등도 없이 사래의 말을 들었던 것처럼 저도 얼마 전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저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의지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는데 최근 4개월간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실수를 한 것입니다. 돈에 집착해서 하갈에 의해 세움 받고자 한 사래처럼 하나님을 앞선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실수를 하고 또 실수를 해도 구원열차를 타고 공동체에 묶여 가는 것이 제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나는 믿음 좋고, 죄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죄인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죄성에서 좀처럼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믿음이 좋아졌다고 할지라도 땅을 딛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여전히 자식 문제 때문에 실수합니다(창 16:1)
다른 집 자식들이 예수 잘 믿고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축하는커녕 속이 상하고 배가 아픕니다. 육적 상속이 급하기에 영적 상속은 아직도 뒷전입니다. 잘난 자식 때문에 자식 자랑하기 바쁘고, 문제 자식 때문에 속이 뒤집어져서 영적 상속자를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여전히 풀지 못하는 자식 문제 때문에 실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 교만 때문에 ‘나도 속고 너도 속는’ 실수를 합니다(창 16:2)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지만 헌신을 하면서도 늘 생색이 납니다. 은근히 나를 드러내고 싶고, 내 수고와 실력을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칭찬은커녕 그 누구도 몰라주니 섭섭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존적 교만에 빠진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헌신에서 벗어나, 더욱 낮은 자세로 교회와 지체들을 섬기기 원합니다.
〓 ‘묻자와 가로되’ 하지 않으니 실수합니다(창 16:2)
돌이켜 보니 결혼을 하면서도, 사업을 하면서도 한 번도 ‘묻자와 가로되’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여쭌 적도 없고, 하나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오직 내 정욕과 탐심으로 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이제라도 사람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묻자와 가로되’의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붙잡아 주옵소서.
〓 기다리지 못해서 실수합니다(창 16:3)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라고 하시지만, 하루하루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자식은 자식대로, 배우자는 배우자대로 나날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결국엔 ‘내 맘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시는 뜻을 알기 원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성숙한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 책임을 회피해서 실수합니다(창 16:4-6)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남들한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