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온다 리쿠
1964년 미야기 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추리소설 동아리에서 소설을 쓰며 글쓰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회사원으로 재직하던 중에 틈틈이 써내려간 작품이 제3회 판타지 노벨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여섯 번째 사요코》이다. 2005년 《밤의 피크닉》으로 제2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과 제2회 서점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2006년 《유지니아》로 제59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2007년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로 제20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2017년 《꿀벌과 천둥》으로 제14회 서점대상과 제156회 나오키상을 동시 수상하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일본의 대표 작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수려한 문장력과 섬세한 묘사, 여성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작가 특유의 글쓰기는 대표작 《삼월은 붉은 구렁을》 《달의 뒷면》 《몽위》 등 미스터리, 판타지, SF, 청춘소설 등 장르를 불문한 여러 작품에서 목격할 수 있다. 그중 《몽위》는 제146회 나오키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닛폰 TV에서 ‘악몽짱(悪夢ちゃん)’이라는 이름으로 드라마화되는 등 화제를 모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기억나지 않아”라는 키워드에서 드러나듯, 인간의 무의식에 깊이 봉인되어 있던 ‘미지의 것’을 그려낸 《몽위》는 ‘온다 월드’를 가로지르는 서정적인 공포와 몽환적인 미스터리를 구현해낸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옮긴이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2005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으로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 문예번역상을 수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꿈의 도시》, 사쿠라기 시노의 《호텔 로열》 《굽이치는 달》,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험한 비너스》 《라플라스의 마녀》 《나미야 잡화점의 기억》 《악의》 등 다수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YUMECHIGAI
© Riku Onda 2011
First published in Japan in 2011 by KADOKAWA CORPORATION, Tokyo.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KADOKAWA CORPORATION, Tokyo through Eric Yang Agency Inc, Seoul.
몽위관음 夢違觀音
불길한 꿈을 꾸었을 때
이 관음보살님께 기원을 올리면
좋은 꿈으로 바꿔준다고 한다.
“그녀의 꿈을 바꿔주실 수 없을까요?”
유령을 보았다.
히로아키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연말이 코앞에 다가온 12월 어느 오후의 일이다. 햇살 없이 도시 전체가 냉기에 휘감긴 추운 날이었지만 어쨌든 백주 대낮이었다는 건 틀림이 없다.
얘기로는 들은 적이 있었다.
유령이란 축말(丑末), 즉 밤 3시쯤에 으슥한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래저래 분주한 아침 시간이나 한숨 돌리는 오후 시간에, 그리고 눈에 익숙한 잡답(雜沓)이나 일상적인 장소에 뜻하지 않게 섞여 있는 것이라고.
히로아키의 친구 중에는 아침 출근 시간에 육교 위에서 유령을 만났다는 녀석이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다.
출근하는 다른 사람들을 따라 평소처럼 역 앞의 거대한 사거리 위에 걸린 육교를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 한 귀퉁이에 웬 여자가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은 다들 육교를 건너가는데 그 여자만은 멈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유난히 키가 커서 마치 머리와 발을 잡고 위아래로 쭉 당긴 것처럼 길쭉해 보였다. 게다가 아직 따듯한 날씨인데도 흰색 코트에 하얀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는 별 이상한 여자가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문득 여자의 얼굴이 움직이는 것을 깨닫고 흠칫했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여자의 턱이 덜덜덜 위아래로 덜걱거리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등줄기가 얼어붙는 것 같아서 그는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가까스로 여자 옆을 지나쳤다. 더욱더 기묘한 것은 이쪽에서도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이 줄줄이 걸어오는데 아무도 그 여자에게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모두들 자연스럽게 여자 옆을 지나 무표정하게 육교를 건너갔다.
이런, 말도 안 돼. 아무도 저 이상한 여자를 못 보는 거야?
그는 반대편 도로에 내려섰을 때 견디지 못하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5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그가 여자 옆을 지나 뒤를 돌아보기까지 삼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삼 초 동안 여자가 건너편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고 해도 아직 뒷모습은 보여야 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무게로 이 육교는 늘 출렁거렸기 때문에 그만큼 몸집 큰 여자가 전력 질주를 했다면 육교는 분명 크게 출렁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유령이었어.”
친구는 술자리에서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허튼소리를 하는 친구도 아니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유능한 사람인 만큼 동석했던 이들 모두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서로 마주 보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건 그때 딱 한 번 본 거야?”
누군가 물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라면 그때 딱 한 번이야. 아침 시간에도 나타나는구나 싶었어. 우리가 알지 못했을 뿐이지 사실은 여기저기서 꽤 출몰하는지도 모르지.”
“그런 얘기를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면 어떡해.” 누군가 툴툴거렸다.
어색한 웃음이 터졌고 그 뒤에 화제는 좀 더 귀에 익은, 각자의 사무실에 떠도는 시시한 괴담으로 옮겨갔다.
인간은 진심으로 오싹했을 때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공포에 쥐어뜯겨 움푹 팬 부분을 평평하게 고르려고 한다. 그때 그들은 ‘진짜’ 이야기를 들은 것에 내심 동요하며 이미 손때 묻은 괴담으로 각자의 다친 마음을 평평하게 고르려고 했던 것이다.
히로아키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도 그 친구의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구나 하고 실감하고 있었다.
히로아키는 중앙도서관 2층에 있었다. 도심의 널찍한 공원 안에 자리 잡은 도서관이라서 창밖에는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바로 옆 테니스 코트의 야간 조명이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켜져 있었다.
‘연말인데’라고 해야 할지 ‘연말이니까’라고 해야 할지, 어쩌다 한 번씩 들르는 곳이라서 잘 알 수는 없지만 도서관 안은 사람들로 상당히 붐볐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는 사람이 빚어내는 독특한 피로와 권태의 공기가 묵직하게 열람석 위를 뒤덮고 있었다.
이 도서관은 2층 일부가 1층에서부터 천장까지 훤하게 뚫려 있다. 2층 엘리베이터 홀 앞이 발코니처럼 되어서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다. 2층까지 훤히 뚫린 부분을 빙 둘러싸듯이 개인실이 있었다. 발코니 맞은편의 유리창 너머로 경마장 실황 중계석처럼 컴퓨터 전용석에 줄줄이 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컴퓨터실과 맞은편을 잇는 연결 복도가 허공에 매달린 것처럼 가로놓여 있다.
히로아키는 바로 그 연결 복도에서 그녀를 보았다. 엘리베이터 옆 계단을 다 올라선 뒤에 무심코 발코니에서 1층을 내려다보니 한 여자가 그 연결 복도를 스르륵 건너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어라, 아는 사람이네?
졸지에 그렇게 생각했다.
낯익은 사람이라고 직감하기는 했지만 히로아키가 그녀를 알아보기까지 아주 잠깐의 빈틈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뇌라는 건 대단해서 아주 잠깐 쳐다본 여자의 특징에 해당하는 사람을 기억 속에서 재빨리 검색해냈다.
고토 유이코.
그렇다, 그녀였다. 고토 유이코.
그 이름과 얼굴이 일치했을 때 히로아키가 얼마나 동요했는지,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시야가 삐끗하면서 온몸이 크게 뒤흔들린 것만 같았다.
히로아키는 급히 고개를 들어 맞은편 연결 복도를 다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여자의 등이 연결 복도 끝을 돌아가는 것만 얼핏 보이고 이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가 유리창 너머로 다시 나타날 터라서 찬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여자가 개인실 앞을 지나가는 기척은 없었다. 유리창 너머 컴퓨터 전용석 뒤편은 서가니까 거기로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히로아키는 빠른 걸음으로 서가로 향했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터였다.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테이블, 줄줄이 늘어선 서가, 직원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듣고 있는 사람.
열람석은 80퍼센트쯤 메워져서 모두들 묵묵히 메모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히로아키는 발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면서 서둘러 안쪽 서가로 향했다.
서가 사이에서 책을 찾는 여자가 몇 명 있었지만 모두 조금 전에 본 그녀는 아니었다.
회색 스웨터였다. 터틀넥 스웨터와 카디건이 한 세트이고 목에 진주목걸이가 얼핏 보였었다. 스커트는 검은색으로 치맛자락이 살짝 펄럭였으니까 아마도 플레어스커트일 것이다.
서가가 가로막고 있다고 해도 여기저기 다 보였다. 금세 전체를 둘러보고 컴퓨터 전용석에 앉아 있는 여자들도 확인해봤지만 그 여자는 없었다.
없다. 설마 그럴 리가.
아까 그녀가 들어간 곳과 지금 히로아키가 걸어온 곳 말고는 이 층에 다른 출입구는 없다. 숨을 만한 곳도, 깜빡 놓쳐버릴 만한 사각도 없다.
그녀는 어디로 갔는가. 분명히 봤는데. 저 연결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스르륵 건너가는 모습을 분명히 봤는데.
사라졌는가. 그녀가 사라져버렸는가.
히로아키는 스스로도 어이없을 만큼 동요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뇌리에 친구가 이야기했던 육교 위의 여자 유령이 떠올랐다.
물론 직접 본 건 아니기 때문에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히로아키가 만들어낸 이미지다.
묘하게 얼굴이 길고 안색이 창백한 여자가 멍하니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얼굴만 거세게 떨리듯이 덜걱거리고 있어서 표정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회색 스웨터를 입은 여자. 그녀가 연결 복도에 서 있다. 이쪽을 보고 있다. 거세게 덜걱거리는 얼굴. 표정을 포착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고토 유이코가 어떤 얼굴이었던가. 생각나지 않는다. 한때는 거의 매일 가까이에서 보던 얼굴이었는데.
“뭘 찾으세요?”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어서 흠칫 놀랐다.
직원이 의아한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히로아키는 애써 얼굴 표정을 수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지간히 거동이 수상쩍었거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직원은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포기한 듯 멀어져갔다.
히로아키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태연한 척하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홀로 나갔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주위를 둘러보고 조금 전에 여자가 지나간 연결 복도를 주시했다.
역시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시야 안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목격했으니까 분명하게 그녀를 본 것이다. 혹시 반대편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뭔가 놓치고 못 봤을 가능성은 없는지 오래도록 꾸물거리며 생각해봤지만, 문득 도서관 내의 시계를 보고 어느새 한 시간 가까이나 허비한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원래의 목적이 생각난 히로아키는 또 한 층 위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했다.
3층은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공간 없이 온전히 한 층을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도 히로아키는 무의식중에 회색 스웨터 차림의 여자를 찾았다. 한바탕 둘러보고 역시 눈에 띄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떨떠름하게 원래 가려던 책장이 있는 코너로 옮겨가 몇 권의 책을 빼냈다.
히로아키는 빈자리를 찾아 책을 펼치고 앉았지만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본 여자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한 여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 여자는 어딘가로 가버렸다. 우선 그것부터 사실로서 인정해보자고 히로아키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정말로 고토 유이코였을까.
자문자답해보았다. 생각해보니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세상에는 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도 많고 솔직히 그는 젊은 여자들을 거의 구별도 못한다. 예전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면서 아이돌 가수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어른이 되고 보니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십대들의 얼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요즘에는 한 그룹의 구성원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져서 점점 더 얼굴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 딴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고토 유이코에 한해서만은 그럴 리가 없다.
히로아키는 펼쳐놓은 책장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고토 유이코는 다른 여자에게는 없는 특징이 있었다. 그 특징이 아까 그 여자에게 있었던 것이다.
왼편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옆얼굴. 그 왼편 관자놀이에 한 움큼 눈에 띄는 흰 부분.
아, 이거? 태어날 때부터 이랬어.
유이코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여기만 하얗다니까. 다른 부분은 유독 까만 편이라서 더 눈에 띄지? 왜 그런지 이 부분만 계속 백발이야. 흰색이라기보다 은빛인가?
유이코는 하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잡아서 보여주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진짜 심했어. 눈에 거슬리니까 여기만 염색하라고 생활지도 선생님까지 잔소리를 하셨다니까. 처음에는 예예 하고 고분고분 염색을 했는데, 점점 어이가 없더라. 아니,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태어날 때부터 그런걸. 그래서 나중에는 염색 안 했어. 그냥 내버려뒀어. 검정 시바견도 눈썹 부분은 하얗잖아. 그거하고 비슷한 거라고 말해버리고는 그 뒤부터 계속 이러고 다녔어.
관자놀이의 그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히로아키는 곧바로 그 여자가 유이코라고 알아본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나가는 여자에게 시선이 갈 일도 없었다. 그건 역시 틀림없는 유이코였다. 유이코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틀림없는 유이코’라고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면서도 히로아키의 손은 책장을 넘기며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한 단락을 끝내고 얼굴을 들자 창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아차, 서둘러야겠네. 히로아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반납하러 갔다.
1층 접수처에 입관증을 돌려주면서 문득 아까 고토 유이코도 입관증을 목에 걸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빈손이었다. 이 도서관은 A4 사이즈 이상의 물건을 갖고 들어올 수 없어서 짐을 로커에 맡기기 때문에 입관자 대부분은 스트랩에 카드가 달린 입관증을 목에 걸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입관증을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은 없는데 차가운 공기가 뺨을 때렸다. 도서관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발을 들이밀자 금세 묵직한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히로아키는 부르르 몸을 떨며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훤하게 밝혀둔 야간 조명 아래 테니스를 하는 남녀의 소리가 들리고 그 하얀 불빛에 그 바깥쪽의 어둠이 도드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히로아키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자꾸 누군가 따라오는 듯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두운 골목길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 검은 스타킹을 신은 가느다란 다리와 검은 플레어스커트와 함께 여자의 실루엣이 떠올라 흠칫했다.
하지만 다가온 사람은 전혀 낯선 여자였다. 여자는 히로아키가 말뚝처럼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수상쩍은 기색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이내 무표정하게 지나쳐갔다.
히로아키는 다시 걸음을 옮겨 긴 언덕길을 내려갔다. 환한 간선도로에 이르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12월의 거리는 분주한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금세 소란스러움과 네온불빛이 어둠을 지워주었다. 히로아키는 그제야 온몸이 꽁꽁 굳어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이 본 것을 마침내 인정했다.
그건 고토 유이코의 유령이다.
회색 스웨터. 관자놀이에 난 한 움큼의 은발.
그렇다, 유령.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10여 년 전에 죽었으니까.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보았다는 그 꺼끌꺼끌한 감촉은 그날 밤, 환한 레스토랑에서 한창 식사를 하는 중에도 히로아키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회사 동료 네 명과 별 부담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들 업계에서는 비밀엄수 의무가 엄격했기 때문에 이렇게 가끔 모여서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개인실을 잡는다. 모두들 평소에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일거리를 떠안고 있는지라 이런 때는 저절로 말수가 많아져 문득 깨닫고 보면 족히 서너 시간은 지나가버리는 게 보통이다.
히로아키도 대화를 즐겼지만 등줄기에 회색 그림자가 달라붙은 것 같아서 아직 자신의 의식 일부가 그 도서관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드디어 소리가 붙는 모양이던데.”
맞은편에 앉은 가마타 야스히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리자 히로아키 옆의 다이도 다마키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맞아, 나도 그 얘기 들었어요. 임상실험에 성공했다면서요?”
“캘리포니아였죠?” 히로아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마타 옆에서 오니즈카 겐지가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굉장하네요. 정말로 소리가 붙는군요. 예전에는 영상을 보는 것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잖아요.”
“요즘은 정말 빨라, 기술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게.”
“영상도 점점 선명해지고 말이지.”
이 안에서는 가마타가 가장 연장자이고 몸집도 컸지만 수더분하고 대하기 편한 인품이라서 히로아키도 다마키도 사석에서는 편하게 말을 건넸다. 한편 나이가 가장 어린 오니즈카는 다마키와 겨우 한 살 차이일 뿐인데도 공손한 말투를 고수했다.
“근데 좀 문제야.”
히로아키가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결국은 화상 처리로 보충하는 거잖아. 분명 선명해지긴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선명한 것을 보았을 리도 없고, 원래 흐릿하게 보이는 거라면 흐릿한 대로 두는 게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응, 그게 좀 어려운 점이야.”
다마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는 분석하기 위해서 보는 것이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분석하기 위해서 보는 거니까 대상이 선명해지는 건 좋은 일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영화를 보는 건 아니지.”
히로아키는 다마키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영상이 잘 그려졌는지 혹은 질이 어떤지를 평가할 입장이 아니라는 거야. 어린아이가 상담을 받으면서 그린 그림을 분석하기 위해 누군가 거기 덧칠하는 경우가 있어?”
히로아키는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는 않잖아. 마찬가지야. 그림이 선명하지 않다는 건 어른에게도 선명하지 않은 거고, 그런 식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분석에도 올바른 1차 정보가 되지 않겠어?”
“에이, 그건 아니지.”
다마키가 반론에 나섰다.
“현미경의 정밀도가 높아졌다고 해서 현미경을 나무라지는 않잖아. 관찰자의 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고 정보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좀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게 당연히 좋은 일이지.”
다마키는 동기라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전부터 히로아키의 말에 일일이 토를 다는 경향이 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오니즈카가 중얼거리듯이 조용조용 말했다.
“‘이런 식으로 보이는구나’라는 걸 알고 싶을 때도 있고, 때로는 세부의 선명한 정보를 원할 때도 있잖아요. 예를 들어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지, 대체 누구를 보고 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원할 때는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죠. 이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아닐까요?”
“흠.”
히로아키와 다마키가 동시에 나지막한 소리를 내뱉었다. 양쪽 다 불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오니즈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요즘의 영상 기술은 대단해. 지난번에 T 감독 사건도 그랬잖아.”
가마타의 말에 다들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T 감독은 2년쯤 전에 사망한, 뛰어난 영상미로 유명한 영국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다. T 감독이 사망한 후에 그가 보존하고 있던 ‘몽찰(夢札)’이 유출되었다는 사전 예고와 함께 그 영상이 인터넷상에 퍼지는 바람에 한바탕 시끄러웠다. 하지만 유가족이 조사해보니, 그의 팬이 만든 영화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마타가 말을 이었다.
“그런 거, 절대로 알 수 없어. 실제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정교한 영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볼 거라고. 더구나 CG까지 써버리면 점점 더 구별할 수가 없어. 자칫하면 그대로 계속 T 감독의 ‘몽찰’이라고 다들 믿었을 거야.”
“응, 정말 대단했어. 아주 잘 나왔잖아요. 게다가 묘하게도 그가 만년에 찍고 싶어 하던 영화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기도 했으니까요.”
T 감독의 팬이었던 다마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T 감독에게는 제작비가 제대로 모이지 않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지는 등으로 제작 중단에 내몰린 영화가 몇 편 있었다. 그가 사망 직전까지 영화 제작을 재개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뛰어다녔다는 건 그의 팬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가짜 영상을 인터넷상에 유포한 그 팬은 사장되었던 영화 필름의 일부를 보고 그걸 바탕으로 T 감독의 ‘몽찰’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에 대한 시시비비는 어찌 됐든 꿈을 시각화하는 건 역시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마타가 지그시 자신의 손끝을 응시했다.
“몽찰을 뽑는 기술의 정밀도만이 아니라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이 꾸는 꿈의 ‘영상적인’ 정밀도가 높아진 거 같지 않아?”
저마다 동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히로아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래요. 일단 눈으로 보고 확인한다는 게 아주 무서운 거예요. ‘아하, 남들은 이렇게 선명한 꿈을 꾸는구나’라고 생각해버리면 다들 점점 그런 꿈을 꾸더라니까. 옛날에는 꿈이란 모두 흑백이어서 색깔이 들어간 꿈을 꾸면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니냐고 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다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를테면 피겨스케이팅의 빌만 스핀(한 발을 뒤로 들어 손으로 잡고 도는 피겨스케이팅 회전 기술의 하나.1981년 스위스의 데니스 빌만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그의 이름이 붙었다–옮긴이) 같은 거야. 예전에는 그런 기술은 관절을 빼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다음 세대는 다들 하고 있잖아.”
“정말 그렇네.”
넷이서 웃었다.
“아무튼 다양한 의미에서 정보량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어.”
가마타는 아직도 자신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그곳에 뭔가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부턴가 선명하다느니 색채감이 넘친다느니 하는 말이 ‘정보량이 많다’는 개념으로 바뀌었어. 얼마나 화소가 늘었느냐, 얼마나 검색 수가 높아졌느냐, 얼마나 용량이 커졌느냐, 지금까지 그리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이거, 실은 상당히 중요한 전환이었어. 시각적인 이미지의 차이를 수치로 나타내는 것 말이야.”
히로아키는 문득 불안감이 솟구치는 바람에 당황스러웠다.
왜일까. 가마타의 이야기 때문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것 때문일까.
가마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옛날에는 풍경이든 인체든 좀 더 단순하고 대략적이었던 것 같아. 아무것도 없이 그저 넓기만 한 벌판을 뛰어다니고 땅을 경작해서 수확한 것을 먹고,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폐와 심장이 있고 피가 흐른다는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잖아. 근데 이제는 생태계라느니 유전자라느니,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보가 빼곡하게 차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해버렸어. 옛날에는 뭔가를 볼 때 그 당시의 흐릿하고 거친 영상처럼 상당 부분을 생략해버리고 바라봤을 거야. 하지만 디지털화가 진행되고 점점 세밀한 곳까지 보이게 되면서 인간의 눈도 디지털카메라처럼 뭔가를 보는 것이지. 정말로 ‘보이는’거야. 아까 말했던 빌만 스핀은 아니지만 누군가 100미터 달리기를 십 초 안에 돌파해버리면 또다시 그 시간 안에 달려내는 사람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야. 앞으로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어. 대체 어디까지 ‘보이게’ 될지.”
앞으로 어디까지. 대체 어디까지.
다음 순간, 히로아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옆자리의 다마키가 덩달아 함께 움찔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히로아키는 손을 내저으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그렇다, 이 배경 음악 때문이다.
이 멜로디. 아까부터 가게 안에 낮게 흐르는 피아노곡.
드뷔시의 전주곡집이다. 유명한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라는 여덟 번째 곡. 그다음 곡은 〈중단된 세레나데〉.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곡은…….
“뭔가 좀 이상한데요?”
오니즈카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똑같은 곡만 나오고 있어요.”
가마타와 다마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
“그래, 말을 듣고 보니 계속 같은 데만 나오네. 이거, 유선방송인가?”
히로아키는 오싹했다.
다들 말하는 그대로였다. 드뷔시의 전주곡집 여덟 번째 곡에서 열 번째 곡까지 세 곡만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왜 하필 고토 유이코의 유령을 본 날 저녁에.
“좀 물어볼까? 여기, 잠깐만요.”
다마키가 점원을 불러 계속 똑같은 음악이 나온다고 말하자 점원이 알아보러 갔다.
이윽고 드뷔시 음악이 뚝 끊기고 쇼팽의 피아노곡이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CD의 음이 튀었던 모양이에요.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점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려주었다.
“그런 거였어?”
“이 가게는 오디오를 사용했었구나.”
다들 금세 하던 이야기로 돌아갔지만 히로아키는 부자연스러울 만큼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보통 꿈이야.
문득 고토 유이코의 목소리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온화하고 침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누군가는 담담한 눈(雪) 같은 목소리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그냥 별것도 아닌, 평범한 꿈에서부터 시작해.
들판에서 즐겁게 뛰어놀거나 해서 처음에는 전혀 그런 기척은 없어. 골똘하게 토끼풀 머리띠 같은 걸 만들고 있어. 그러다가 문득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라는 곡이 흘러나오는 거야.
히로아키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수없이 들었던 그 이야기, 이제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이코의 목소리는 더욱더 또렷하게 머릿속에 울렸다.
아직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라는 곡이 나올 때는 그다지 경계하지 않아. 하지만 어딘가에서 ‘아아, 그 곡이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은 하고 있어. 항상 알아차리는 게 한 발씩 늦는 거야. 여기서 이대로 계속 꿈을 꾸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걸 눈치채고 얼른 눈을 떠버리면 될 텐데, 꿈속의 나는 바보 같아서 매번 태평하게 들판에서 뛰어놀고 있어. 그러다가 어느새 〈중단된 세레나데〉라는 곡으로 바뀌고, 그제야 겨우 꿈속의 경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돼.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컴컴하게 흐려지거나 함께 놀던 친구가 모두 사라지고 나 혼자 오도카니 남겨져 있는 걸 깨닫는 거야.
유이코는 결코 흥분하거나 울부짖지 않았다. 아무리 무서운 이야기라도 담담하게, 그저 흔한 세상 이야기처럼 입에 올리곤 했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깊이 절망했는지, 그즈음의 히로아키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유이코의 메마른 목소리가 이어진다.
〈중단된 세레나데〉가 끝날 때쯤에는 절망으로 가슴이 가득 차 있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가 없어. 그때부터는 끝까지 지켜보지 않고서는 잠이 깨는 일은 없다는 걸 아는 거야.
그리고 그 곡이 흘러나와. 열 번째 곡 〈가라앉은 사원〉이.
가게를 나온 뒤에도 히로아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드뷔시의 〈가라앉은 사원〉이 흐르고 있었다.
만일 유이코의 몽찰에 소리가 붙는다면 나는 이 곡을 귀로 듣게 될까.
다마키와 오니즈카는 집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택시를 함께 타고 돌아갔다.
히로아키는 가마타와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어째서 드뷔시일까 하고 유이코와 함께 얘기했던 적이 있다.
유이코는 글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가 곧잘 듣던 곡이라서 나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들었어.
드뷔시는 어린 마음에도 뭔가 특이한 작곡가라는 느낌이 들었어. 색채감이 있다고 할까, 뭔가 시각적인 느낌이 있어. 꿈속에서 듣는 음악 같아. 어쩌면 그런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다음에 하게 될 업무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한 군데 더 들렀다 가는 건 어때?”
가마타가 흘끗 히로아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좋죠.”
“괜찮겠어? 감기라도 걸렸나, 자네,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던데.”
“아니, 실은 옛날 일이 좀 생각나서요. 계속 똑같은 곡이 흘러나왔잖아요. 그래서 고토 유이코가…….”
“아하.”
가마타는 짐작 가는 일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 곡이었구나.”
물론 그 사건에 대해서는 가마타도 알고 있었다. 유이코의 몽찰은 이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다. 고토 유이코가 그 꿈을 꿀 때마다 항상 드뷔시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래, 자네는 개인적으로도 잘 아는 사이였지?”
“네, 좀.”
역시나 낮에 그녀의 유령을 봤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고토 유이코 씨는 참 딱하게 됐어. 살아 있었다면 연구가 얼마나 큰 발전을 이루었을지, 지금도 가끔 생각나곤 해.”
“하지만 역시 그게 한계였어요. 오히려 용케도 그렇게까지 견뎠구나 싶어요.”
“자네, 그녀의 몽찰을 어느 정도나 봤지?”
“거의 전부 봤어요. 그녀 때문에 이 직업에 뛰어든 셈이니까요.”
“그렇군.”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꿈의 해석.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가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꿈 자체를 영상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야말로 눈으로 ‘꿈’을 보고 진짜로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토 유이코는 예지몽을 꾸는 것으로 인정받은 일본 최초의 인물이었다.
2차로 들어간 바에서도 가마타와 히로아키는 카운터 자리가 아니라 바텐더에게 말소리가 들릴 염려가 없는 벽 쪽의 작은 테이블 자리에 마주 앉았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저절로 귀가 쫑긋해졌지만 이곳에 나지막하게 흐르는 것은 재즈 스탠더드 넘버여서 히로아키는 내심 안도했다.
“다음 업무라면 혹시 그거예요? G현에 있다는 그 초등학교의…….”
술을 주문하고 히로아키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가마타는 뜻밖이라는 듯 탐색하는 눈빛으로 히로아키를 바라보았다.
“아니, 요즘 카운슬러도 부쩍 늘었고, 우리 같은 전문 꿈 해석사 둘이 한 팀으로 나서는 것은 대상 몽찰 수가 상당히 많을 때잖아요.”
“맞아.”
히로아키의 말에 가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반 30명, 곱하기 2주일 치니까.”
“그럼 역시 그 사건과 관련된 일이군요.”
“응. 오늘 정식으로 의뢰가 들어왔어.”
“데이터가 벌써 도착했어요?”
“아니, 올해 안으로 올 예정이야. 연초에 즉시 분석에 들어갔으면 하는데, 스케줄 괜찮지?”
“현재 다른 급한 일은 없어요.”
히로아키는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역시 집단 식중독 같은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가마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아냐. 처음에는 집단 식중독이라는 식으로 보도됐지만 이런저런 정보가 뒤엉킨 데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해명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해명하고 싶었다니요?”
“원인 불명의 패닉이라고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잖아.”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에 가까웠다는 얘기인가요?”
“그런 모양이야.”
그것은 3주일쯤 전에 G현 산기슭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어느 바람 없는 온화한 오후, 점심시간이 끝나가던 때였다.
4학년 한 반 학생들이 갑작스럽게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교직원이 구급차를 불렀다. 집단 식중독인가 하고 구급차 몇 대가 달려오면서 한때 교정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들이 차츰 안정을 되찾고 그 일이 서서히 외부로 알려지면서 사건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양상을 드러냈다.
“그나저나 신문에 식중독이 의심스럽다는 기사가 실린 뒤로 더 이상 다른 기사는 나온 적이 없는데 자네는 어떻게 집단 식중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가마타가 신중하게 질문을 던졌다.
“실은 아내의 친정집이 그 근처예요. 아내와 어릴 때부터 친하던 친구가 그쪽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어요. 사건이 일어난 그 초등학교는 아니지만 동료 교사에게서 얘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마침 얼마 전에 제사 때문에 아내가 친정집에 갔었는데 우연히 그 친구를 만나 ‘이상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하더군요.”
“그랬군. 대체 어떤 얘기였는데?”
가마타가 흥미를 보였다.
“처음에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본 교직원은 ‘뭔가 고통스러워 한다’고만 생각했대요. 그런데 나중에 찬찬히 돌이켜보니 정확하게는 ‘울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히로아키가 아내에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사건의 정황은 이러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학교 서무실 여직원이 심상치 않은 울음소리를 들었다.
뭔가 발작을 일으킨 듯한 기묘한 소리였다.
여직원이 마음에 걸려 복도로 나가보니 서너 명의 아이들이 울면서 비틀비틀 걸어왔다.
여직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다들 알아듣지 못하는 기색으로 얼굴이 바짝 굳어 실내화를 신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여직원이 무슨 일인지 몰라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교실에서 나온 아이들이 차례차례 울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 뒤를 쫓아 급히 밖으로 나가자 아이들은 교정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여직원은 그중 몇 명이 토하는 것을 보고 식중독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큰일이다 싶어서 ‘많은 아이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면서 구급차를 부른 것이다.
그 즉시 구급차가 몇 대나 달려왔다.
구급대원들이 울부짖는 아이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서히 이 상황이 기묘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급식에 의한 식중독이라면 그날 같이 점심을 먹은 전교생에게 증상이 나타날 터였다. 하지만 교정에 나온 것은 4학년 한 반 아이들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울부짖기는 했지만 신체적으로 식중독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몇 명이 토하기는 했으나 그건 음식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뭔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인 것 같았다.
아이들을 돌봐주려고 달려 나온 교직원들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채 구급대원들과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패닉 상태의 아이들이 잠잠해진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쯤 지난 뒤였다. 교사들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이들은 그저 멍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교정에 뛰쳐나온 것조차 알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왜 교정으로 나왔느냐고 물어봐도 아이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무엇보다 기묘한 것은 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몇몇 학생이 증언하기는 했지만 왜 무서워졌고 왜 도망쳐야 했는지는 단 한 명의 학생도 설명하지 못했다.
한 여학생이 유일하게 힌트가 될 만한 증언을 했다. ‘뭔가 교실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수상한 사람이 침입했던 게 아니냐고 다들 깜짝 놀라 정문과 뒷문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 영상을 조사해봤지만 누군가 드나든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담장을 뛰어넘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관 바로 앞이 서무실이라서 누군가 들어왔다면 금세 알았을 터였다. 잠깐 눈을 뗀 사이를 노려 몰래 들어왔을 가능성도 물론 있겠지만 누군가 들어오거나 나간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학생의 증언은 그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닐까?”
가마타가 끼어들었다.
“그 말 그대로?”
히로아키가 되묻자 가마타가 대답했다.
“‘뭔가 교실에 들어왔다’고 했다지? ‘누군가 교실에 들어왔다’가 아니라.”
“맞아요, ‘뭔가 교실에 들어왔다’라고 했죠.”
“그렇군.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가마타가 이야기를 재촉했다.
“결국 이것저것 조사해봤지만 침입자가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대요. 아이들도 완전히 안정을 되찾아서 이틀이 지나자 평소처럼 건강하게 등교했고 사건은 종결되었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는군요.”
“하지만…….”
가마타가 히로아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네.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은 건 아이들의 부모였어요.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부터 아이들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 거예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10여 명, 아니, 그 이상이.”
“역시 그렇군.”
가마타는 히로아키의 이야기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히로아키는 말을 이었다.
“너무 심하게 가위에 눌리니까 아이를 깨웠겠죠. 어떤 꿈을 꾸었느냐고 물어봤는데 다들 기억을 못 했어요. 아니, 그보다 설명하기가 어려운 꿈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몽찰을 뽑아보기로 했군.”
“네. 이제 곧 아이들의 꿈을 검사해볼지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마 우리 쪽에 의뢰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죠.”
“그랬군.”
가마타는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우리보다 소아 정신위생센터 쪽으로 갈 거라고 예상했어요. 아이들 것은 일이 어려운 데다 내용에 따라서는 경찰이나 아동복지기관의 신세를 져야 하니까요.”
어린아이의 꿈을 해석하는 일은 어렵다. 아이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이나 감지한 것을 이미지화하는 데 아직 능숙하지 않은 데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도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꿈을 검사해본 결과 학대를 받았다든가 하는 가정적인 문제가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경찰 등과도 연대가 필요하다.
“소아 정신위생센터는 예약이 꽉 차버렸어.”
가마타가 불쑥 중얼거렸다.
“예?”
히로아키가 되물었다.
“아직 공개적으로 발표된 건 아닌데…….”
가마타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슬쩍 몸을 내밀었다.
“실은 이것뿐만이 아니야.”
“이것뿐만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에요?”
히로아키도 당혹스러워하며 가마타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일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가마타가 이런 표정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왠지 새파랗게 질린 듯한 그를 지켜보는 사이에 다시 불안이 스멀스멀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들어서 히로아키는 헉 하고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쳐들었다.
“왜 그래?”
가마타가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또다시 이 곡이…….”
히로아키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긴장한 얼굴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드뷔시의 전주곡집으로 바뀌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의 아가씨〉.
히로아키는 오싹해서 저도 모르게 바텐더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노려보는 시선이 되었는지 바텐더가 멈칫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러십니까?”
바텐더의 물음에 히로아키는 말을 더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왜 클래식 음악으로 바뀌었나 해서…….”
“아, 이거요? 가끔 돌려요, 내가 이 CD를 좋아해서.”
바텐더는 머리를 긁적이며 CD 재킷을 들어올렸다.
그 CD라면 히로아키도 알고 있었다.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것이다. 유이코도 이 CD를 듣곤 했다.
하지만 왜 오늘 하루 동안 두 번씩이나 이 곡이 나오는가. 마치 히로아키를 따라오듯이. 마치 히로아키를 향해 고토 유이코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듯이.
“우연한 일이 연거푸 일어나는군.”
가마타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히로아키의 예민한 반응이 마음에 걸렸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히로아키는 겸연쩍은 얼굴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반응은 적잖이 호들갑스러웠을 것이다.
“실은 오늘 낮에 좀…… 황당한 얘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히로아키는 머뭇거리면서도 낮에 도서관에서 고토 유이코인 듯한 인물을 목격한 이야기를 했다.
“분명 누군가 딴사람을 잘못 봤을 거예요. 설마 유령일 리도 없고.”
히로아키가 농담처럼 마무리하려고 하자 가마타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까? 나도 아까 자네와 함께 그 가게에서 그리고 지금 이 가게에서 똑같은 타이밍에 드뷔시를 들었어.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자네가 정말로 낮에 고토 유이코를 봤을 거 같아. 그게 유령인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에이, 말도 안 돼요.”
히로아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토 유이코는 죽었어요. 그렇다면 사람일 리는 없죠.”
“하지만 그 사체가 고토 유이코 본인인지 아닌지 명확히 확인된 것도 아니잖아. 그녀가 지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는 그렇겠죠. 그녀로 추정된 사체는 치아조차 대조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불에 탔고 현장에 사체 여러 구가 뒤죽박죽 엉켜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아무도 그녀를 본 사람이 없어요. 살아 있다면 당연히 가족에게 연락했겠지요. 상식적으로 보면 그때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해요.”
“상식적으로는 그렇지.”
가마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시 고토 유이코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녀가 그 사건을 이용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히로아키는 움찔했다.
그건 히로아키 스스로 줄곧 마음속에 품어온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네는 가까이에서 지켜봤으니까 고토 유이코가 몹시 힘겨운 상황이었다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언론에서 어지간히 떠들어댔잖아. 한편에서는 사기꾼 취급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이라고 떠받들고. 고토 유이코도 상당히 힘들었을 거야.”
상당히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까지도 그녀가 어떻게 그런 상황을 견뎌내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겉으로는 가느다란 몸매에 유약해 보였지만 유이코는 매우 침착한 데다 정신력도 강해서 히로아키는 항상 놀라곤 했다.
“그녀가 무슨 꿈을 꿀지 사람들이 항상 주목했어. 더구나 그게 불길한 내용이야. 그 내용에 대해 이도 저도 아니라는 억측이 난무하고, 결국 그녀가 꿈꾸는 것 자체를 원망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어. 나였어도 그런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거야. 죽었다고 생각해준다면 더 이상 내 꿈을 누가 들여다보는 일도 없을 거고 쫓기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녀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계속 그런 꿈을 꿨으니까 아예 체념한 면도 있었죠. 게다가 그녀가 자진해서 자취를 감췄다 해도 형에게만은 어떻게든 연락했을 거예요.”
그렇다, 고토 유이코는 히로아키와 여섯 살 터울의 친형 시게아키의 약혼자였다.
처음 그녀를 소개받았을 때 히로아키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그녀는 형이 다니는 도내 사립대학 의학부 후배였다.
유이코를 처음 본 순간부터 히로아키는 강하게 이끌렸다. 부드러운 분위기, 온화한 웃음, 너무도 인상적인 한 움큼의 은발.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도 있지 않나?”
가마타가 담담히 말했다.
“형님도 그 일에 휘말려들었잖아. 약혼자라는 이유로 언론에 쫓겨 다니던 것이 기억나는군. 그녀 입장에서는 그것도 정말 괴로웠을 거야.”
“그건 형도 각오한 일이었어요.”
히로아키는 마음이 뒤흔들리면서도 형을 변호했다.
뇌리에는 형의 서글픈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그녀가 그토록 꿋꿋이 견뎌내는데 내가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어.
물론 당시 형에게 유이코의 존재가 큰 부담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형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느꼈고 그런 형을 지켜보는 아버지 어머니와 히로아키도 숨을 죽인 채 살아야 했다.
“아무튼 됐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오늘 자네에게 뭔가를 알리려고 했던 거야. 그렇지? 두 번의 드뷔시도 그렇고. 나는 오컬트는 믿지 않지만 그런 징조 같은 것은 존재한다고 생각해.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던 거고.”
“네, 그야 뭐…….”
히로아키는 얼굴을 붉혔다.
물론 히로아키도 초상현상(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경험하는 신기한 현상들–옮긴이)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업무 때문에 다양한 꿈을 ‘보고’ 있노라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일이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도 실감하곤 했다. 그래서 가마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이코는 내게 무엇을 알리려고 했을까. 왜 이제야 새삼스럽게 하루에 몇 번씩이나 그 존재가 어른거리는가. 게다가 왜 형이 아니고 나인가.
형은 유이코가 사망하고 2년여 만에 결혼해서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로 평화로운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한편 히로아키는 꿈 해석사라는 일을 선택했고 그 점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토 유이코의 주박(呪縛)을 뒤에 달고 다니는 것은 히로아키라는 얘기다. 그러니 그녀가 히로아키에게 나타난 것도 그럴 법한 일이다.
유이코는 내 첫사랑, 이라고 히로아키는 인정했다. 형의 연인으로 나타난 사람이라서 첫사랑을 자각하는 동시에 실연한 셈이었지만.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 해석사라는 일로 채워보려고 했던 것일까.
문득 조금 전에 가마타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유이코가 내게 알려주려는 것이 가마타가 가져온 다음번 업무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소아 정신위생센터는 예약이 꽉 차버렸다고 했죠? 그건 무슨 얘기예요?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는 건가요?”
가마타는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응, G현의 사건만이 아니야. 그 비슷한 사건이 각지에서 일어났어.”
“예에?”
히로아키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런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도?”
가마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사이 지역이 가장 많아. 그밖에 도호쿠 지역에서 한 건, 호쿠리쿠에서 두 건.”
“나는 전혀 몰랐는데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니까. 아마 보도 자제 요청이 있었던 것 같아.”
“왜요?”
“원인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거든. 이런 일은 언론에 보도되면 반드시 거기에 영향을 받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게 돼. 언론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것과 정말로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것이 뒤섞여 혼동을 일으킬까 걱정스러웠을 거야.”
“모두 몇 건이나 되죠?”
“정확하지는 않지만 10여 건이야.”
“언제쯤부터?”
“최근 반년에서 1년 사이. 즉 지난 반년 동안 부쩍 늘어났어.”
“똑같아요? 패닉에 빠진 게.”
“모두 처음에는 식중독을 의심했어. 하지만 식중독이 아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공통점이야.”
“초등학교에서만요?”
“중학교도 한 군데 있는데, 그밖에는 모두 초등학교였어.”
으스스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떨어졌다.
아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혹시 광화학스모그 같은 건 아니겠죠? 아니면 무슨 화학물질 탓이라든가.”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히로아키는 머뭇머뭇 물어보았다.
가마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식중독의 경우와 마찬가지야. 그런 이유라면 전교에서 딱 한 반만 이상을 보일 리 없잖아.”
“그래서 몽찰을 살펴본 소아 정신위생센터에서 뭐래요?”
히로아키는 목이 바짝 탔다.
가마타는 갑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히로아키는 바텐더에게 다시 술을 주문했다. 우선 목을 축이고 싶었다.
“다들 입을 열려고 하질 않아서…….”
가마타가 띄엄띄엄 중얼거렸다.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는다는 얘기만 하더라고.”
히로아키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럴 리가요. 우리는 프로예요. 몽찰이 얼마나 다양하고 믿을 수 없는 영상의 연속인지 다 아시면서.”
“그래도 믿지 않을 거라고들 한다니까.”
가마타는 끈기 있게 되풀이했다.
“그래서 가마타 씨는 봤어요?”
“아냐. 영 안 보여줘. 이번에 보내주는 데이터 영상을 통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볼 생각이야. 선입견 없이 보고 싶어. 소문이야 익히 들었지만.”
“어떤 소문요?”
가마타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어. 그거야말로 도저히 믿기 힘든 소문이라서. 자네도 되도록 선입견 없이 이번 데이터 영상을 봐줬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히로아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꿈 해석사 일을 시작한 뒤로 여태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자네, 요즘 꿈꿔?”
가마타가 불쑥 물었다. 히로아키는 당황스러웠다.
“아뇨, 별로. 내 몽찰이라면 연수 기간에 지겨울 만큼 봤는데, 남의 몽찰을 보면서부터 막상 나는 꿈을 꾸지 않는 것 같아요. 비교적 숙면하는 타입이라서.”
“그래? 부럽네.”
“가마타 씨는요?”
“나는 요새 잠이 얕아. 자는 동안 계속 꿈을 꾸는 느낌이야. 게다가 꿈속에서 내 꿈을 계속 분석하고 그걸 또 계속 해설하고 있으니 도무지 푹 잤다는 느낌이 없어.”
“저런, 그건 정말 힘들죠.”
“일하면서 본 몽찰이 내 꿈에까지 침입하고 있어. 역시 꿈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야.”
“그거, 가마타 씨의 지론이죠.”
히로아키는 미소를 지었다.
꿈은 외부에서 온다. 그것은 가마타가 평소에도 자주 주장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잠든 동안에도 외계와 접하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외계를 감지한다. 귀로 모든 것을 듣고 코로 냄새도 맡고 다양한 것을 접한다. 잠든 사람 가까이에서 큰소리를 내면 꿈속에서도 그 소리를 듣고, 가슴에 무거운 것을 얹으면 꿈속에서도 그것을 느낀다. 잠꼬대하는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일도 있다. 즉 외부에서 꿈에 개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가마타의 말은 그런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의미였다.
아이디어가 어디선가 뚝 떨어졌다, 영감이 찾아왔다, 라는 식으로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오랜 옛날부터 어떤 영감이나 예술적인 이미지는 반드시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다들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의식 외부에 인류 전체가 공유한 거대한 무의식이 있고 거기에서 다양한 것이 나온다. 꿈도 그중 하나여서 문자 그대로 ‘외부에서’ 찾아와 인간의 뇌에 침입하는 것이다.
히로아키는 수없이 들어온 가마타의 주장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문득 그런 거대한 무의식이 의지를 가졌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했다. 인류 전체를 완전히 뒤덮는 거대한 무의식. 그것이 일정한 의지를 갖고 인간의 꿈에 침입한다면?
히로아키는 서둘러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무의식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인간이 그 일부니까.
“어쩌면 이번 업무는 그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어.”
가마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꿈이 외부에서 온다는 것 말인가요?”
“응, 그렇지.”
가마타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는 몽찰의 정밀도를 올리는 데만 에너지를 빼앗겼어. ‘보는’ 방법론만 발달하고 막상 가장 중요한 꿈 자체의 메커니즘이나 그 의미에 대한 연구는 제자리걸음이었지.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몽찰 자체의 질이 다르다는 예감이 들어. 꿈이라는 것의 개념이 질적으로 확 달라지는 획기적인 업무가 될 것 같아.”
가마타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했지만 히로아키에게는 그 기대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꿈을 바꿀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고토 유이코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뭔가 다가온다.
히로아키는 그렇게 감지하고 가만히 얼굴을 들었다. 그곳은 아무도 없는 교실이었다.
휑한 교실에 자그마한 의자와 책상이 늘어서 있다.
초등학교인 모양이다. 칠판에 분필로 날짜가 적혀 있다.
3월 14일.
그 날짜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히로아키는 맨 뒤쪽 창가 자리에 앉아 그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어른이 된 현재의 모습으로 앉아 있기 때문에 의자도 책상도 너무 작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오래 있었는지 몸의 마디마디가 아팠다.
그는 천천히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가 다닌 초등학교가 아니었다. 그가 다닌 초등학교는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창밖으로 살풍경한 빌딩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학교는 창밖에 산과 함께 넓은 공간이 펼쳐진 것처럼 보인다.
찬찬히 바라보니 책상과 의자들이 모두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그곳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왠지 오슬오슬 춥다.
교실 안에는 눅눅한 우윳빛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뺨이 싸늘할 만큼 차갑고 축축하다. 그 안개 때문에 칠판이며 교단이 흐릿해져서 진해졌다 엷어졌다 혹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을 살펴보니 맨 뒷자리의 히로아키와 가장 가까운 창이 20센티미터쯤 열려 있었다.
안개는 거기에서 흘러들었다.
창을 닫아야 해.
히로아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닫고 고리를 단단히 채웠다. 이제 안개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창밖에는 진한 안개가 뭉클뭉클 피어올랐지만 그 너머로 진하게 이어진 능선이 보였다. 산에 온통 벚꽃이 피어 있는 것도 보였다. 산꼭대기에는 거무스레한 건물이 덩그러니 서 있다.
어디일까, 이곳은.
히로아키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교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개가 옅어지면서 아까보다는 사물의 윤곽이 또렷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현실감이 떨어져 주위가 애매하기만 했다. 게다가 교실 벽이 반투명 상태여서 희미하게 복도가 내다보였다.
그래, 이건 꿈이야.
히로아키는 돌연 그렇게 의식했다.
나는 꿈속에서 잠이 깬 거야.
가마타에게서 다음 업무에 대해 듣고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초등학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또렷하게 꿈속에서 꿈이라고 인식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가마타의 이야기가 영향을 끼친 것이리라. 가마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꿈을 스스로 분석하고 있을까.
뭐, 좋아. 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자.
히로아키는 교실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뛰쳐나간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복도에도 사람은 없고 역시 안개만 부옇게 피어오른다. 복도 창문은 모두 열려 있어서 거기로 꾸역꾸역 안개가 흘러드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히로아키는 초조함을 느꼈다.
이렇게 모두 열어두면 그자들이 들어오고 만다.
히로아키는 황급히 복도를 달리며 창문을 하나둘 닫았다. 창은 무겁고 뻑뻑해서 마음먹은 대로 얼른 닫히지 않았다.
서둘러야 하는데.
마음만 급할 뿐, 일은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 게다가 복도는 길고 창문은 아직 너무 많았다. 히로아키는 절망했다.
안 돼, 도저히 못하겠어. 이대로 가다가는 그자들이 들어올 거야.
문득 꿈속의 자신을 분석하는 히로아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자들이라니, 누구? 누가 오는데?
하지만 꿈속의 히로아키는 창을 닫느라 필사적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창을 당겨보지만 삐걱거리기만 했다.
그때 쿵 하고 교사 전체가 둔하게 진동했다.
히로아키는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뭔가 몹시 무거운 것이 넘어진 듯한 울림이었다.
쿵.
잠시 틈을 두고 다시 교사가 진동했다.
유리창이 부르르 흔들렸다가 다시 조용해진다.
그자들이다. 꿈속의 히로아키는 그렇게 직감했다.
더 이상 느긋하게 창문이나 닫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다. 어디로든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아이들처럼 교정으로 뛰어나가면 될까.
히로아키는 숨을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쿵 하는 소리는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져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멀리 한 장소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소리가 나는 방향과는 반대쪽으로 도망치자. 그는 그렇게 마음먹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끝에 어슴푸레한 계단이 있고 층계참이 보였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뻐끔 뚫린 현관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의 연한 빛이 비쳐들어 그곳만 환했다. 그 빛을 보니 역시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현관을 향해 가다가 그 맞은편의 서무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알았다.
큰일이다. 저곳에 감시자가 있는데.
히로아키는 몸을 웅크리고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벽을 타고 나아갔다.
‘접수처’라는 팻말이 놓인 카운터 위는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이다. 슬쩍 들여다보니 꽤 많은 서무실 직원이 서로 잡담을 나누며 일하고 있었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자들이 바짝 다가오고 있는데 아무도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지? 지금 현관으로 나가면 틀림없이 직원들에게 들킨다. 그들이 목격하고 만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멀쩡한 사내가 대낮에 초등학교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수상쩍다. 어쩌면 그들이 우르르 덤벼들어 서무실에 붙잡아둘지도 모른다. 경찰에 신고해버릴지도 모른다.
히로아키는 카운터 바로 옆의 벽에 몸을 웅크린 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휩싸였다.
여전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과 벽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생각 탓인지 아까보다 진동이 크고 간격도 빨라진 것 같았다. 카운터 위의 창유리가 덜컹덜컹 흔들렸지만 서무실 안의 웃음소리에 지워져버렸다.
아아, 어쩌지. 식은땀이 흘렀다.
이제 곧 그자들이 온다.
그때 1층 복도 창문 밖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부근만 희끄무레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들렸다.
뭘까.
히로아키는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들키지 않게 창문 가까이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저, 저건 대체 뭐지?
창밖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울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훌쩍훌쩍 우는 아이, 뭔가 큰소리로 부르짖는 아이도 있었다. 그 주위를 작은 새가 짹짹 울면서 날고 나비가 팔랑팔랑 춤을 춘다.
아이들은 무엇 때문에 울며 탄식하는 걸까.
히로아키는 아이들 뒤쪽에서 작은 가마가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떠메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이 떠메고 있는 듯한데 떠멘 자의 모습은 회색으로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가마는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주춤주춤 다가오는 가마. 아이들은 그 뒤를 따라오며 엉엉 울고 있다.
아무래도 누군가 그 안에 있고, 아이들은 그 누군가를 위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마에는 네모반듯한 검은색 고운 발이 사방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따금 그 발이 바깥쪽으로 들썩이면서 바람이 흘러나온다.
그 순간 히로아키는 번개를 맞은 듯 직감했다.
고토 유이코다.
저 안에 고토 유이코가 있다.
그렇게 확신하자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히로아키는 창문을 넘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기묘하게도 밖으로 나와 보니 그곳은 산동네의 외줄기 길이고, 그때까지 그가 있었던 초등학교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초등학교는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토 유이코 쪽이 더 중요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과 가마는 한참 저 앞까지 가 있었다.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다.
열심히 달리는데도 좀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유이코 씨!
히로아키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기다려요, 거기 있는 거 알아요. 이것저것 물어볼 게 많아요. 당신은 그 사건 이후로 어디에 있었는지, 어째서 자취를 감춰버렸는지, 그리고 어째서 작년 연말 도서관에서 내 앞에 나타났는지.
히로아키는 가마를 향해 그런 말을 부르짖었다.
아이들의 행렬이 문득 멈췄다.
그 아이들이 겁에 질린 듯이 이쪽을 돌아보며 수군거린다.
히로아키가 큰소리를 내서 멈춘 것이 아니었다. 히로아키 쪽을 쳐다보며 뭔가 수군거리고 있지만 그 시선은 히로아키를 지나 그의 뒤쪽에서 다가오는 뭔가를 보고 있었다.
히로아키도 덩달아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이 깜깜했다. 저 먼 산맥 너머에서 거무칙칙한 구름이 뭉클뭉클 일어나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구름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부풀어서 쑥쑥 다가왔다.
히로아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 너머에 그자들이 있다. 히로아키는 그렇게 직감했다.
아이들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거미 새끼를 풀어놓은 것처럼 아이들은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 풀덤불 속으로 파고들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길 한가운데 그 가마만 둥실 떠 있었다. 그것을 떠메고 있던 회색 그림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히로아키는 가마를 향해 뛰어갔다.
유이코 씨, 도망쳐야 해. 여기는 위험해. 그자들이 올 거야. 거기서 나와야 해. 가마를 떠메고 있던 자들은 사라졌어.
그가 고운 발을 잡으려는 순간 돌연 네 군데의 발이 펄렁 열리며 돌풍이 휘몰아치더니 히로아키의 몸을 내리쳤다.
문득 깨닫고 보니 그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머뭇머뭇 고개를 들자 가마의 발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내려졌다.
돌연 귓가에 또렷하게 유이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곳에 없어.
히로아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어디야? 어디 있어?
대답은 없고 멀리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그 검은 구름에서 들려온다기보다 땅속 저 밑에서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겹겹이 겹쳐지는 기묘한 소리. 위협 같은, 주문 같은, 경문 같은, 마음을 부르르 떨리게 하는 소리.
유이코 씨!
히로아키는 정신없이 부르짖었다.
이번에는 고타쓰(무릎난로) 위에 엎드린 자세로 눈을 떴다.
한순간 히로아키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고타쓰 위에 펼쳐놓은 책, 기름이 묻은 안경, 둥근 바구니에 담긴 귤. 어깨와 등이 아팠다.
그렇구나, 본가에 돌아와 새해를 맞이했고 벌써 내일은 도쿄로 돌아갈 날이다.
이상한 꿈을 꿨네. 그는 눈을 쓱쓱 비볐다.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아직 꿈이 이어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히로아키는 내내 켜져 있던 TV에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화면 안에서 기묘한 풍경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음새를 바로잡았다.
화면 안에서는 솟구치는 불덩어리가 휘날렸다.
눈앞에 신목(神木) 가지를 쳐든 남자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조용 걸어 나온다.
그리고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신음하는 듯한, 마음속 어딘가를 술렁거리게 하는 신비한 소리.
히로아키는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