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로나와 나오미에게 바친다.
1990년대 후반 영국
1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 11년이라면 꽤 긴 세월처럼 들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올해 말까지 8개월을 더 일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 경력은 거의 12년에 이르게 된다. 이제 나는 간병사로서 그렇게 오랜 경력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안 그래도 나는 그 일을 환상적으로 해내고 있다고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주 훌륭한 간병사인데도 일을 시작한 지 겨우 2~3년 만에 그만두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고, 정말이지 공간 낭비일 뿐인 형편없는 간병사인데도 14년 동안 이 일을 계속해 온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적어도 한 명 이상 떠올릴 수 있다. 내 자랑을 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에 만족해 왔고, 나 역시 대체로 그렇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맡은 기증자들은 언제나 기대치 이상의 결과를 보였다. 그들의 회복 과정은 인상적일 정도로 양호했고, 심지어는 네 번째 기증을 앞두고서도 ‘동요 상태’로 판정받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 어쩌면 나는 지금 내 자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일을 잘 해내는 것, 특히 내가 맡은 기증자들을 통제해 ‘평온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내게 큰 의미가 있다. 나는 기증자들에 대해 일종의 본능적인 감각을 발동해 왔다. 그들 곁으로 가서 위로해 주어야 할 때, 그들을 혼자 있게 해 주어야 할 때, 그들이 하는 온갖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할 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라고 말해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무슨 대단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는 현직 간병사 중에서는 나무랄 데 없이 일을 해내고 있으면서도 당연히 받아야 할 신뢰의 반밖에는 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내가 독방과 자동차를 갖고 있고 무엇보다 돌볼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분개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나는 헤일셤 출신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종종 상대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하다. 캐시 H.는 자기가 돌볼 사람을 골라잡을 수 있어, 그 여잔 언제나 같은 부류의 사람을 선택하지, 헤일셤 출신이나 그런 특권층 말이야, 그러니 그 여자가 그렇게 대단한 경력을 갖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하고 사람들은 숙덕댄다. 나 자신이 그런 말을 물리도록 들어 온 만큼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이 들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이런 비판에 일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간병할 환자를 선택하도록 허락 받은 최초의 간병사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또한 나는 어쨌든 출신 배경이 다양한 기증자들을 선택하려 애써 왔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일을 끝낼 즈음 내 경력은 12년에 이르지만 내가 돌볼 사람을 고를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6년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일 처리가 왜 잘못이란 말인가? 간병사는 기계가 아니다. 자기가 맡은 기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 애쓰지만, 결국에는 차츰 열의를 잃게 된다. 인내와 에너지를 무한히 가질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돌볼 사람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 경우 자신과 같은 부류를 고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내가 맡은 기증자들이 처한 각 단계를 속속들이 공감하지 못했다면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이 일을 계속해 오지 못했으리라. 어쨌거나 돌볼 사람을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떻게 내가 루스나 토미와 다시 가까워질 수 있었겠는가?
당연한 일이지만 요즈음은 안면이 있는 기증자들이 점점 줄고 있어서, 실제로 선택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돌보아야 할 기증자와 깊은 유대감을 갖지 못할 경우 간병사의 일은 훨씬 더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 일을 그리워하게 되겠지만 올해 말로 간병사를 그만두는 것은 그런 점에서도 적절한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말하자면, 루스는 내가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선택하게 된 기증자였다. 당시 그녀에겐 이미 다른 간병사가 배정되어 있어서 신경이 좀 쓰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고 도버에 있는 회복 센터에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는 그녀와 나의 견해차는 그 밖의 다른 것, 다시 말해서 헤일셤에서 함께 성장했다든가 다른 이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게 느껴졌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과거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 헤일셤 출신자들을 택하려 애쓴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까지 여러 해 동안 나는 헤일셤을 과거의 갈피 속에 묻어 버리자고, 그렇게 집요하게 과거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나 자신을 타일러 왔다. 하지만 그즈음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그런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 사건은 간병사로서 3년째 되던 해에 내가 만난 기증자와 관계가 있다. 내가 헤일셤 출신이라고 말하자 그는 특별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세 번째 기증을 마친 참이었는데, 경과가 좋지 않아 결국 회복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내 쪽을 바라보고는 “헤일셤이라. 분명 멋진 곳이었겠군요.” 하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 나는 그가 어디에서 성장했느냐고 물었다. 도싯에 있는 어떤 장소를 언급하는 순간, 검버섯 핀 그의 얼굴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찌푸려졌다. 그때 나는 그가 그 시절을 떠올리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대신 그는 헤일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후 대엿새에 걸쳐 나는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말해 주었고, 그는 온몸에 훅이 채워진 채 거기에 누워 이따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나에게 크고 작은 것들, 곧 교사들에 대해, 우리가 각자 어떤 식으로 침대 밑에 자기 수집함을 갈무리해 두었는지에 대해, 축구와 라운더스1)에 대해, 본관 너머 후미지고 은밀한 곳으로 통하던 오솔길에 대해, 오리가 노닐던 연못과 우리가 먹던 음식과 안개 낀 날 아침 미술실에서 보이던 들판 풍경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때로는 이미 말한 것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듣고 싶어 하기도 했다. 바로 전날 말해 주었는데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처럼 “체육관 같은 곳도 있었나요?”, “당신이 제일 좋아한 선생님은 누구셨나요?”라고 묻는 식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가 약에 취해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의 정신이 상당히 또렷하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헤일셤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가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낸 것처럼 헤일셤을 ‘추억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삶이 곧 완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게 해서 그것들이 실제로 자기 머릿속에 서서히 자리를 잡아서는, 약 기운과 통증과 피로감으로 잠 못 이루는 그런 밤 동안 나의 기억과 자기 기억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 그러니까 토미와 루스와 나 같은 이들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동차를 몰고 시골을 돌아다니게 되면 요즘도 헤일셤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들과 마주친다. 안개 자욱한 들판의 모퉁이를 돌거나, 계곡의 경사면으로 내려오다가 멀리서 대저택의 일부가 눈에 띄면, 심지어 산허리에 특이하게 늘어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을 볼 때면, ‘아마 저기일 거야! 드디어 찾았어! 그러니까 여기가 헤일셤이 있었던 장소라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다음 순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며 그곳을 지나친다. 특히 유리창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높이 나 있어서 처마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는, 운동장 가에 서 있는 자그마한 흰색 조립식 건물 같은 것은 전국 각지에서 흔하게 마주친다. 그런 건물은 헤일셤이 그랬던 것처럼 1950~1960년대에 무더기로 지어진 것 같다. 차를 몰고 가다가 그런 곳을 만나면 나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한눈을 팔다가 언젠가는 차를 어딘가에 박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에는 우스터셔의 황량한 지역을 달리다가 헤일셤에 있었던 것과 흡사한 크리켓 경기장 옆에 있는 건물을 보고는 실제로 차를 돌려 그곳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살펴본 적도 있다.
우리는 학교의 체육관을 참 좋아했는데, 그건 우리가 어릴 때 보던 그림책에 항상 나오던 작고 예쁜 오두막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급반 시절에 다음 수업을 교실 대신 체육관에서 하자고 교사들에게 조르던 일이 기억난다. 그러다가 상급반 2학년 무렵, 우리가 열두 살이 지나 열세 살이 되어 가던 때 그 체육관은 다른 학생들로부터 벗어나 친한 친구들끼리 있고 싶을 때 가는 곳이 되었다.
헤일셤의 체육관은 두 무리의 학생들이 서로 방해 받지 않고 있을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여름이면 베란다가 또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곳을 독점하는 것이 이상적이었으므로, 종종 계략이 동원되고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사들은 그 일에 대해 언제나 우리에게 문화인답게 행동해 줄 것을 호소했지만, 실제로 휴식 시간이나 자유 시간 동안 체육관을 독점하려면 무리 내에 성격이 강한 아이들이 좀 있어야 했다. 나는 위압적인 형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렇게 자주 그곳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루스 덕분이었던 것 같다.
우리(대개는 다섯 명이었고, 제니 B.가 끼면 여섯이었다.)는 대부분 의자와 벤치를 둘러싸고 팔다리를 쭉 뻗고 드러누워서는 잡담을 나누었다. 남의 눈을 피해 체육관에 모였을 때만 나오는 특별한 화제가 있었다. 우리는 걱정거리에 대해 토론했고, 종국에는 웃음 섞인 고함을 지르거나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친한 친구들과 함께 잠시 긴장을 푸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걸상과 벤치 위에 올라가 높다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서면 운동장 북쪽이 환히 내려다보였다. 운동장에는 우리 학년과 상급반 3학년 남자애들 10여 명이 축구를 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당시에는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비가 내렸던 것 같다. 진흙 묻은 풀잎 위에 내리쬐는 햇빛이 물기 때문에 반짝이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게 구경하는 우리의 모습이 눈에 띄면 안 된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아무도 유리창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윽고 루스가 말했다. “저 앤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어. 쟤 좀 봐. 정말이지 확신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루스를 바라보면서, 이제 사내애들이 토미에게 하려는 짓을 비난하려는 기미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루스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내뱉었다. “바보 같은 녀석!”
이윽고 나는 남자애들이 이제 곧 하려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루스나 다른 친구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는 그 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터였다. 우리가 그 순간 창문 주위에 모여 있었던 것은, 토미가 또 모욕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는 적극적인 기대감에서가 아니라, 최근 들려온 그 계략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막연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자애들 사이에서 벌어지던 일이 우리에게 그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루스와 다른 친구들에게 그 일은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건이었고, 내게도 사실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지금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그 경기에 출전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팀에 다시 받아들여지리라고 확신하고 숨길 수 없는 기쁨을 얼굴에 드러낸, 실제로 누구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토미를 보고 가슴 죄는 아픔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지금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당시 토미가 연푸른 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달 판매회 때 구입한 그 옷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저 옷을 입고 축구를 하다니 정말 바보야. 옷이 엉망이 될 텐데 그럼 기분이 어떻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딱히 누구에게랄 것 없이 소리 내어 말했다. “토미가 그 셔츠를 입고 있네. 자기가 좋아하는 폴로셔츠 말이야.”
아무도 내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모두 우리 무리의 익살꾼 로라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려갈 때, 손을 내저을 때, 뭐라 외칠 때, 태클을 걸 때 토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로라는 차례로 흉내 내고 있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모두 운동장에서 준비 운동이라는 명목에 걸맞게 여유 있고 느긋한 태도로 공을 차고 있었지만, 흥분한 토미는 이미 실제 경기라도 치르듯 열을 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소리로 내가 말했다. “저 셔츠가 엉망이 되면 저 애는 몹시 상심할 텐데.” 이번에는 루스가 내 말을 들은 듯했지만 내가 농담 삼아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방심한 듯 소리 내어 웃고는 뭐라 빈정거렸다.
이윽고 남자애들은 공차기를 멈추고 진흙탕 한가운데 무리를 지어 섰다. 팀 선발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의 가슴이 가볍게 오르내렸다. 앞으로 나선 각 팀의 주장들은 상급반 3학년이었다. 그해에 가장 잘 뛴 선수가 토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주장들은 첫 번째 선발을 위해 토스를 했고, 이긴 사람이 모여 있는 아이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 애를 좀 봐. 쟤는 자기가 처음으로 뽑힐 거라고 확신하고 있어. 쟤 좀 봐!” 내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 순간 토미에게는 ‘실제로’ 뭔가 희극적인 것, 그러니까 그가 잠시 후 미쳐 날뛴다 해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은 그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가 몇 번째로 불리든 상관없다는 듯 선발 과정을 짐짓 무시하는 척하고 있었다. 몇몇은 나직하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몇은 운동화 끈을 다시 맸으며, 또 다른 아이들은 진흙땅에 자꾸 달라붙는 자기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토미는 자기 이름이 이미 불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한 눈빛으로 그 3학년 학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라는 팀 선발 과정 내내 토미의 얼굴에 떠오른 온갖 다양한 표정들을 흉내 냈다. 처음에 그가 짓던 희망에 찬 갈망의 표정, 네 사람이 선택되고 난 다음에도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자 어리둥절해하며 걱정하던 표정, 이윽고 사태의 실상을 깨달은 후의 상처 받고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하지만 나는 토미를 지켜보느라 로라에게 줄곧 눈길을 주지 못했다. 다른 친구들이 킥킥거리면서 로라를 부추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애가 하고 있는 양을 짐작했을 뿐이다. 이윽고 운동장 한쪽에 토미 혼자 남겨지고 다른 남자애들이 모두 킬킬거리기 시작했을 때 루스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될 거야. 조용히 해. 7초 남았어. 7, 6, 5…….”
루스는 나머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토미가 큰 소리로 울부짖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제 대놓고 웃어 대던 다른 남자애들은 운동장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토미는 그들을 따라 몇 걸음 옮겼다.(그런 분노의 추격이 본능적인 것인지, 아니면 뒤에 남겨지는 게 겁이 나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떤 경우든 간에 그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그곳에 서서 시뻘게진 얼굴로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저주와 욕설이 뒤섞인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쳐 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토미의 발작을 이미 여러 차례 본 적이 있었으므로, 걸상에서 내려와 둘러앉았다. 우리는 뭔가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창문 너머로 토미의 모습이 줄곧 어른거렸다. 처음에 우리는 눈알을 굴려 보이며 그의 존재를 무시하려 했지만, 결국 그에게서 관심을 거둔 지 10분은 족히 지나서 다시 창가로 다가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애들은 이제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았고, 토미는 이제 특정한 방향 없이 사방에다 뭐라 외쳐 대고 있었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가장 가까운 울타리 기둥에 대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 애가 어쩌면 ‘연극 리허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로라가 한마디 했다. 그 애가 고함을 외칠 때마다 ‘개가 오줌을 누는 것처럼’ 한쪽 발을 바깥쪽으로 들어 올린다고 또 다른 누군가가 지적했다. 실제로 나 역시 그 발동작을 보았지만,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애의 발이 다시 땅을 찍을 때마다 진흙이 그 애의 정강이에 흩뿌려진다는 사실이었다. 그 애가 아끼는 셔츠가 또다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 셔츠에 진흙이 묻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애들이 저런 식으로 저 애를 곯리는 건 좀 잔인한 것 같아. 하지만 이건 저 애 탓이야. 만약 쟤가 저런 일을 당하고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남자애들도 더 이상 놀리지 않을 거야.” 루스가 말했다.
“남자애들은 줄곧 쟤만 괴롭혀. 그레이엄 K.도 그렇게 성질이 고약하지만, 애들은 오히려 그것 때문에 그 애를 더 조심스럽게 대하잖아. 애들이 토미를 괴롭히는 이유는 걔가 야무지지 못해서야.” 한나가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토미가 창의적으로 뭔가를 만들어 낸 적이 없다는 것, 심지어는 봄 교환회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일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무렵 우리 각자는 본관에서 선생님 하나가 나와 그 애를 데려가 주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토미가 괴롭힘을 당한 조금 전의 사건에 한몫하지는 않았지만 잘 보이는 곳에서 그 전말을 줄곧 지켜본 만큼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오는 기척 같은 것은 없었으므로 우리는 토미가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할 만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윽고 루스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지만 본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별관에서 나왔을 때도 토미는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식식거리고 있었다. 본관은 우리의 왼쪽에 있었고 토미는 정면의 운동장에 서 있었으므로, 본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애 근처를 지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어쨌든 반대쪽을 향하고 있던 그 애는 우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가다가 발길을 돌려 토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이 다른 친구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루스가 다급한 어조로 돌아오라고 속삭였을 때도 나는 내처 걸었다.
토미는 그렇게 분노를 발산하는 동안 누군가의 방해를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 애는 잠시 나를 응시했을 뿐 하던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애가 한창 연기하고 있는 연극 무대에 내가 올라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토미, 네 멋진 셔츠 말이야. 그게 엉망이 되고 말 거야.”라고 말했을 때도 그의 얼굴에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표정 같은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나중에 다른 아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 애의 행동이 의도적인 것이었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애는 줄곧 두 팔을 휘둘러 대고 있었고, 내가 손을 뻗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터였다. 어쨌든 휘둘러 대던 그 애의 한쪽 팔이 내 손을 쳐 내며 내 뺨을 후려쳤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지만 내 입에서는 헉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내 뒤에 있는 여자애들도 대부분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비로소 토미는 나와 다른 여자애들과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가 운동장에서 하던 행동을 의식한 듯 약간 멍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내가 상당히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토미, 셔츠가 진흙투성이야.”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하고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애는 고개를 숙여 자기 셔츠에 갈색 반점들이 묻어 있는 것을 확인하자 깜짝 놀라 터져 나오려던 외마디 비명을 가까스로 억제하는 듯했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는 그 폴로셔츠를 자기가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침묵이 그에게 모욕으로 느껴지기 전에 내가 재빨리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지워질 거야. 네가 못하면 조디 양한테 갖다 주면 돼.”
그 애는 줄곧 셔츠를 살펴보다가 이윽고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어쨌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 애는 그런 말을 하자마자 후회하는 것 같았고, 내가 자기에게 위로의 말을 해 주기를 바라는 듯 유순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즈음 나는 그 애와 볼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자애들이 지켜보고 있는, 내가 아는 한 본관 창문에서도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이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서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무리를 지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루스가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적어도 넌 저 애를 조용히 시키는 데는 성공했구나. 너 괜찮니? 미친놈 같으니라고.” 그 애가 말했다.
2
아주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잘못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날 오후 토미에게 다가갔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당시 내가 거치고 있던 어떤 단계, 강박적일 정도로 나 자신을 도전에 노출시키려는 그런 단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며칠 후에 토미가 나를 불러 세웠을 때 나는 실제로 그 일을 거의 잊어버린 후였다.
당시 우리의 상황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헤일셤에서는 거의 매주 건강 검진 같은 것을 받아야 했다.(보통 본관 맨 위층에 있는 18호실에서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간호사 트리샤와 함께하는 일이었다.) 햇빛 찬란한 그날 오전 우리는 그녀에게 검진을 받기 위해 무리지어 중앙 층계를 올라가고 있었고, 막 검진을 마친 다른 무리는 줄지어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따라서 층계는 울림 소리로 시끄러웠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앞사람의 발꿈치만 바라보며 올라가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시!”
줄을 따라 내려오던 토미가 갑자기 멈춰 서서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자마자 짜증이 났다. 몇 살 더 어렸다면 나와 만난 누군가가 그렇게 반가워했을 때 나 역시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었으리라. 하지만 당시 우리는 열세 살이었고 이번 경우는 정말이지 공개적인 상황에서 한 남자애가 여자애에게 달려드는 격이었다. 나는 사실, ‘토미, 좀 어른스럽게 행동할 수 없니?’ 하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자제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토미, 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못 내려가고 있잖아. 나도 그렇고 말이야.”
그 애는 위쪽을 힐긋 바라보고는 내려오는 줄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그 애는 다른 아이들이 지나갈 수 있게 내 옆의 벽에 몸을 밀착한 다음 입을 열었다.
“캐시, 줄곧 널 찾고 있었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말이야. 내 말은 그러니까, 정말로 미안하다는 거야. 솔직히, 그날 널 때리려던 게 아니었어. 여자를 때린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고, 만의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적어도 ‘너’한테만은 그러고 싶지 않아. 정말로 너무 미안해.”
“괜찮아. 그건 사고였을 뿐이야.” 난 그 애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토미는 밝은 어조로 말했다.
“셔츠는 이제 괜찮아. 말끔하게 지워졌거든.”
“잘됐구나.”
“아프지는 않았지? 내가 친 거 말이야.”
“당연히 아팠지. 두개골 골절에다 뇌진탕 증세 모두 있었으니 말이야. ‘까마귀’도 눈치챌 거야. 일단 올라가서 보이면 말이야.”
“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캐시. 아프진 않았지? 너무 미안해. 정말이야.”
이윽고 나는 그 애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비꼬는 기색 없이 말했다. “이것 봐, 토미, 그건 사고였고, 이제 난 100퍼센트 잊어버렸어. 그 일로 너한테 원한 같은 거 전혀 없어.”
그 애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했지만 몇몇 상급생들이 어서 내려가라며 그를 밀어 대고 있었다. 그 애는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어린 소년에게 하듯 내 어깨를 토닥거린 다음 줄을 따라 내려갔다. 내가 다시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을 때 아래쪽에서 그 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보자, 캐시!”
나는 그 모든 일이 좀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 일로 놀림감이 되거나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는 않았다. 층계에서 그렇게 토미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그 이후 몇 주에 걸쳐 벌어진 그 애의 문제에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았으리라.
그중에는 한두 가지 내가 직접 목격한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의 입을 통해 들은 것들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어느 정도 전체적인 윤곽이 잡힐 때까지 캐물었다. 14호실에서 토미가 책상 두 개를 뒤집어엎어 내용물을 모조리 바닥에 내팽개치는 바람에 나머지 아이들이 층계참으로 도망 나와서는 그 애가 나오지 못하게 밖에서 교실 문을 막은 사건도 있었다. 축구 연습 때 레지 D.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크리스토퍼 선생님이 그 애의 두 팔을 뒤로 꺾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또 운동장을 달리는 상급반 2학년 남자애들 중에서 토미 혼자만이 짝 없이 혼자 달리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물론 그 이유는 그 애가 달리기를 잘해서 다른 아이들과 간격을 이내 10미터, 15미터 벌려 놓곤 하는 바람에 아무도 그 애와 짝지어 뛰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얼마 후에는 토미가 골탕을 먹었다는 소문이 거의 매일같이 나돌기에 이르렀다. 대개의 경우는 그 애의 침대에 괴상한 것이 들어 있었다든가 그 애의 시리얼에 벌레가 들어 있었다든가 하는 일상적인 것들이었지만, 누군가 그 애의 칫솔로 변기를 닦아 칫솔모에 온통 똥을 묻힌 채 꽂아 두었다는 것 같은 대책 없이 역겨운 것들도 있었다. 그 애의 몸집과 완력, 그리고 아마도 그 애의 성질 때문에 그 애한테 실제로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은 없었지만, 내 기억에 따르면 적어도 몇 달에 걸쳐 이런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조만간 누군가 나서서 너무 심하지 않냐고 문제를 제기하리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런 일이 계속되었다.
한번은 내가 소등 후의 공동 침실에서 직접 그 문제를 꺼내 보았다. 상급반이 되면 침실 하나당 사람 수가 여섯으로 줄었다. 꼭 여섯 명이었던 우리 무리는 불이 꺼진 다음 잠들기 전까지 은밀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어떤 곳, 심지어 별관에서도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도 그곳에서라면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나는 토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간추린 다음 정말 부당한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어둠 속에서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모두 루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좀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종종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루스의 침대 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그 애가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캐시. 그건 공정하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그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 그 애가 태도를 바꿔야 해. 그 애는 지난 봄 교환회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어. 다음 달 행사에 내놓을 만한 건 있을까? 장담컨대 없을걸.”
이 대목에서 헤일셤에서 개최되던 교환회에 대해 설명해야겠다. 1년에 네 차례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석 달 동안 만든 모든 것을 모아 대규모 전시회 겸 판매회를 열었다. 유화, 소묘, 도예품, 그리고 당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진 각종 ‘조각품’, 깡통을 두드려 폈다든지 판지 위에 병뚜껑을 붙여 만든 것 같은 것이 나왔다. 작품을 내놓으면 그 대가로 교환용 토큰을 받았고(각 출품작의 가치는 교사들이 평가했다.) 교환회 날 그 토큰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같은 학년 학생들의 작품만을 사야 한다는 규칙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석 달 동안 꽤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므로 선택의 폭은 꽤 넓었다.
이제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 교환회가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알 것 같다. 우선 교환회는 판매회(이는 다른 성격의 행사로 나중에 설명하겠다.)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개인적인 물건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다시 말해서 침대 주변의 벽을 장식하거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교실이 바뀔 때마다 책상에 올려놓을 물건이 필요하다면 교환회에서 구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제 나는 그 교환회가 우리 모두에게 왜 그렇게 미묘한 영향을 끼쳤는지도 알 것 같다. 상대가 자기가 만든 물건을, 그리고 자기가 상대가 만든 물건을 사적인 보물로 삼는 일이 어떻게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토미의 경우가 그 전형적인 예였다. 당시 헤일셤에서 어떤 대접을 받느냐, 얼마나 사랑과 존중을 받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물건을 ‘창조’하느냐에 좌우되었다.
몇 년 전 도버의 회복 센터에서 루스를 간병할 때, 나는 그 애와 함께 자연스럽게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거야말로 헤일셤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든 점이었어. 서로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도록 고무하는 것 말이야.” 어느 날 루스가 말했다.
“맞아. 하지만 이제 그 교환회를 돌이켜 보면 이상한 점도 많았어. 예를 들면 시가 그랬어. 내 기억으로 소묘나 유화 대신 시를 제출하는 것도 허용되었지. 이상한 건 우리 모두가 그게 당연하다고,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겼다는 점이야.”
“그게 왜 이상해? 시는 중요한 거잖아.”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말하는 시는 아홉 살짜리가 연습장에다 쓴 짤막하고 우스꽝스러운 오자투성이의 끼적임일 뿐이잖아. 그런데도 우리는 침대 머리맡을 장식할 정말 멋진 물건 대신 그런 엉터리 시로 가득 찬 연습장을 사는 데 귀중한 토큰을 써 버리곤 했지. 우리가 누군가의 시에 그렇게 진정으로 감동을 느꼈다면, 어느 날 오후에 그것을 빌려서 베껴 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실은 어땠는지는 너도 기억날 거야. 교환회가 열리면 우리는 수지 K.의 시를 살까, 재키의 기린을 살까 하고 서서 망설였지.”
“재키의 기린이라. 그건 정말 멋졌어. 나도 하나 샀었지.” 루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느 맑은 여름날 저녁 루스의 방에 딸린 작은 발코니에 앉아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첫 기증을 하고 몇 달째 접어든 루스는 가장 힘든 시기를 넘긴 참이었다. 저녁마다 나는 그녀를 방문해 지붕들 위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함께 30분쯤 보냈다. 눈 아래로 수많은 안테나와 위성 접시들이 보였고, 사이에 도로가 있긴 했지만 수평선이 때로는 바로 정면에서 번쩍이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지고 간 생수와 비스킷을 꺼내 놓았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당시 루스가 있던 회복 센터는 내가 좋아하는 곳 중 하나였다. 그런 곳에서라면 삶을 마치게 된다 해도 나라면 전혀 불쾌하지 않았으리라. 회복실은 작았지만 멋지게 설계되어 있었고 안락했다. 내부 전체, 곧 벽과 바닥이 번쩍이는 하얀 타일로 덮여 있었는데, 어찌나 깨끗하게 유지되었던지 건물 안으로 처음 들어서면 거울로 된 홀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대개의 경우 거울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거의 거울 같았다. 한 손을 들어 올리거나 누군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 주위의 타일에 그 움직임이 희미하고 어둑하게 비쳐 보이는 것이다. 어쨌든 루스의 방에는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있어서 침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밖을 내다볼 수 있었다. 베개를 베고 누워 있을 때도 답답하지 않게 하늘이 보였고, 날씨가 따뜻할 때는 발코니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쐴 수도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그녀를 방문하는 일이 즐거웠다. 여름이 지나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그 발코니에 함께 앉아 헤일셤과 코티지,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잡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내가 말을 이었다. “내 말은 그 나이, 그러니까 열한 살 무렵에는 서로의 시에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야. 하지만 크리스티 같은 애 기억나지? 걔는 시를 잘 쓰기로 유명했지. 우리 모두 그런 이유로 그 애한테 경도되었잖아. 루스, 넌 크리스티한테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했어. 모든 게 그 애가 시를 쓰는 데 뛰어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지. 우린 사실 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지. 이상한 일이야.”
하지만 루스는 내 말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알고도 일부러 대답을 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당시 우리가 실제보다 훨씬 세련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혹은 내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아챘지만 우리의 대화가 그런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우리 모두 크리스티의 시가 몹시 훌륭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그 시들을 지금 보면 어떨지 잘 모르겠어. 지금 그 시들이 여기에 있다면 확인해 볼 수 있을 텐데.” 그런 다음 그녀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피터 B.의 시 몇 편은 아직도 ‘갖고’ 있어. 하지만 그것들은 훨씬 나중인, 우리가 상급반 4학년 때 쓴 거지. 당시 난 피터를 좋아했던 것 같아. 그러잖으면 도대체 왜 그 애의 시를 샀는지 모르겠거든. 그 시들은 우스꽝스러운 헛소리에 지나지 않아.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기고 있지. 하지만 크리스티는 훌륭했어. 돌이켜 보건대 그랬던 것 같아.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애는 유화를 시작하면서 시에 흥미를 잃고 말았지. 그림에선 결코 뛰어나지 못했고.”
다시 토미 이야기로 돌아가야겠다. 토미가 어떻게 그 모든 문제를 자초했는지에 대해 불 꺼진 공동 침실에서 루스가 한 말은, 어쩌면 당시 헤일셤 학생들 모두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스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토미가 자기 자신을 방기해 왔다는 그런 견해가 이미 오래전 하급반 때부터 있어 왔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토미가 그런 일을 당해 온 것은 몇 주나 몇 달이 아니라 몇 년 동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오한 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전 나는 토미와 이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당시 자기가 당하던 그 어려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토미의 말을 듣고 나는 그날 밤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미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은 어느 날 오후 제럴딘 선생님의 미술 시간이었다. 그날 이전까지 자기는 그림 그리는 것을 재미있어 하는 편이었다고 토미는 말했다. 하지만 그날 제럴딘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토미는, 길게 자란 풀숲에 코끼리가 한 마리 서 있는 괴상한 수채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 그림이 모든 소동의 시발이 된 셈이었다. 자기가 그것을 그린 것은 일종의 장난에서였다고 토미는 주장했다. 그 점에 대해 나는 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사실 그것은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이 흔히 하는 행동이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특별한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하면 웃음보가 터지리라고 생각했든가, 혹은 어떤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나중에 왜 그런 일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타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았던가. 토미의 경우가 꼭 그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태는 그렇게 전개된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그날 토미가 그린 코끼리 그림은 세 살짜리가 그렸음직한 것이었다. 토미는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 그림을 그렸고, 딱히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친구들의 웃음을 불러 일으켰다. 만약 그날 수업을 맡은 교사가 제럴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 일은 그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지독한 아이러니였던 것 같다.
제럴딘 선생님은 그 나이 대의 우리 모두가 좋아하던 교사였다. 그녀는 친절했고 말투가 부드러웠고, 우리가 뭔가 나쁜 짓을 저질렀거나 다른 교사에게서 꾸중을 들었을 때조차 필요하다면 언제나 우리를 달래 주었다. 누군가를 직접 책망할 일이 생기면, 그녀는 그 후 며칠 동안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그 학생에게 과외의 관심을 기울이곤 했다. 그날 미술 수업을 제럴딘 선생님이 맡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경우처럼 교장 선생님인 에밀리 선생님이나 로버트 선생님이 맡지 않았다는 사실이 토미에게는 불행이었다. 에밀리 선생님이나 로버트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었다면, 토미는 가볍게 꾸중을 듣고 히죽 웃고 말았으리라. 최악의 경우 아이들은 그 그림이 시원찮은 유머라고 생각했으리라. 나아가 그 일로 몇몇 아이들이 토미를 진짜 웃기는 녀석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럴딘 선생님이 누군가. 사태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친절과 이해로 무장하고 토미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토미가 다른 아이들로부터 바보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지레 짐작해, 지나친 친절을 발휘해 그 그림에서 실제로 칭찬할 만한 면을 찾아내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단적 분개가 시작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온 후 나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아이들은 내 귀에 들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 토미가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내 짐작에, 토미는 그 코끼리 그림을 그리기 얼마 전부터 자기가 교과 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특히 그림에서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서, 일부러 어린아이처럼 그림을 그림으로써 최선을 다해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 버렸다. 이제 모두들 다음번엔 어떤 엉뚱한 행동을 할까 궁금해하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사태를 호전시키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뭔가를 하기 시작하면 주위에서 비웃음소리와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그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큰 비웃음이 돌아왔다. 그래서 얼마 후 토미는 원래의 방어책으로 돌아가 일부러 유치해 보이는 그림을 그렸고, 자기는 그림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사태는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동안 토미는 미술 시간에만 고통을 겪었다.(하급반에서는 미술 수업이 많았으므로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점차 심각해졌다. 그는 놀이에 낄 수 없었다. 남자애들은 저녁 식사 때 그의 곁에 앉지 않으려 했고, 공동 침실에서는 불이 꺼진 후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못 들은 체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을 지난 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토미 자신의 행동, 혹은 토미의 앙숙 중 하나인 아서 H. 같은 아이의 심술로 인해 다시 그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다.
토미가 언제부터 그렇게 분에 못 이겨 고약한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 기억으로는 어릴 때부터 그런 성질이 있었던 것 같지만, 토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를 골리는 일이 악의적으로 변질된 후부터 그랬다고 한다. 어쨌든 그런 소동으로 인해 아이들의 반응은 정말이지 심각해지고 모든 것이 확대되어, 조금 전 이야기했던 그 시기, 우리가 열세 살이었던 상급반 2학년 때는 토미에 대한 그런 박해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런 다음 그 모든 소동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룻밤 새에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성질 부리기 소동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잦아들었다. 앞서 말한 대로 당시 나는 상황을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먼저 그 조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일은 토미가 꽤 지속적으로 조롱을 당하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시기를(한 달, 아니 그 이상의 기간이리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때때로 토미는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간 듯했지만, 웬일인지 끝까지 자신을 통제하곤 했다. 말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거나, 짐짓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그의 이런 반응에 실망했다. 심지어는 토미가 자기들의 기대를 저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분개했다. 하지만 점차 심심해진 아이들은 토미를 골리는 일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 주일 동안 그런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을 퍼뜩 깨달았다.
이 일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내게는 다른 변화들도 눈에 띄었다. 알렉산더 J.와 피터 N.과 토미 셋이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며 들판 쪽을 향해 안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간다든지, 토미의 이름을 언급할 때 아이들의 어조에 미묘하지만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든지 하는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휴식 시간이 끝날 무렵 우리가 무리를 지어 풀밭에 앉아 있을 때였다. 바로 옆 남쪽 운동장에서는 평소처럼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으로는 토미를 좇고 있었다. 그는 경기에서 핵심으로 뛰고 있었다. 튀어나온 지점에서 발이 걸려 넘어진 그는 직접 프리킥을 하기 위해 공을 적당한 지점에 놓았다. 다른 아이들이 기대에 차서 사방으로 흩어지자, 토미를 가장 괴롭히던 아이 중 하나인 아서 H.가 토미의 등 뒤 1~2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다가 토미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아서는 두 손을 엉덩이에 올리고 공을 딛고 서 있는 토미의 동작을 과장해서 우스꽝스럽게 취해 보였다. 나는 주의 깊게 그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아무도 아서의 행동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모두들 토미가 공을 차기를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토미 바로 뒤에 있는 아서의 몸짓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토미는 잔디를 가로질러 공을 띄워 올렸고, 경기는 계속되었다. 아서 H.는 더 이상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모든 발전이 반갑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실제로 토미의 그림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창작’에 대한 그의 평판은 언제나처럼 형편없었다. 그가 더 이상 성질을 부리지 않게 된 것이 이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어떤 요인이 열쇠가 되었는지 꼭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토미의 태도 자체, 말하자면 그의 행동 방식, 상대의 얼굴을 직시하면서 마음을 열고 사람 좋게 이야기하는 방식에 뭔가가 있었다. 전과 달라진 그 태도가 이번에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그 모든 변화를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을 느낀 나는 다음번에 그와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오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왔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몇 사람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헤일셤에서 점심 식사를 기다리는 ‘줄’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이상적인 장소 중 하나였다. 그 대형 홀은 일종의 방음 장치가 되어 주었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높은 천장 덕택에 말소리를 낮추고 바짝 다가서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 엿듣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선택은 배반 당하지 않았다. ‘조용한’ 장소는 종종 최악의 장소이기도 했는데, 말소리가 들릴 만한 곳을 누군가 지나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슬그머니 빠져나온 듯한 모습을 포착 당하는 순간 그런 장소 전체가 이내 그 사실을 알아채는 듯했다. 그래서 적당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앞으로 몇 사람 건너에 있는 토미를 발견한 나는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앞 줄로 갈 수는 없었지만 뒤로 오는 것은 허용되었다.) 토미는 유쾌한 미소를 띠고 내게로 다가왔다.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 없이 잠시 함께 서 있었다. 어색해서가 아니라 토미가 뒤로 옮기는 것을 보고 쏠렸던 주위 아이들의 관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린 것이다. 이윽고 내가 말했다.
“너 전보다 훨씬 잘 지내는 것 같아, 토미. 상황이 너한테 훨씬 좋아진 것 같다.”
“모든 걸 유념해서 본 모양이구나, 캐시? 맞아, 다 잘되어 가고 있어. 난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니? 하느님이나 뭐 그런 걸 찾기라도 한 거야?”
“하느님?” 토미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했다. 이윽고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런, 이제 알겠어. 네 말은 내가 이제 그러니까…… 그렇게 성질을 내지 않는다는 거로군.”
“꼭 그것만은 아냐, 토미. 네 태도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바뀌었어. 난 줄곧 지켜보고 있었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토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동안 좀 자란 것 같아. 다른 애들도 아마 그럴 거고. 모든 게 줄곧 똑같을 순 없어. 그런 일은 곧 지루해지는 법이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줄곧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캐시, 넌 남의 일에 참 관심이 많구나. 좋아,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고. 원한다면 말해 줄게.”
“좋아, 말해 봐.”
“그럴게, 캐시, 하지만 소문내선 안 돼, 알았지? 두어 달 전 난 이 일에 대해 루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었어. 그 후로 몹시 좋아진 것 같아. 설명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선생님이 의견을 주셨고,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 모든 게 훨씬 좋아진 것 같아.”
“그러니까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음……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몰라. 처음엔 나도 그랬거든. 내가 그렇게 창조적으로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모든 게 아주 잘될 거라고 말씀하셨어. 그러면 잘못되는 게 전혀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게 선생님 말씀이었어?”
토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그를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 그건 대단한 생각이 아니잖아, 토미. 네가 지금 어리석게도 장난치는 거라면, 난 번거롭게 네 일에 참견하지 않겠어.”
나는 정말로 화가 났다. 왜냐하면 속내를 들을 자격이 있는 나에게 그 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몇 자리 뒤에 있는 아는 여자애를 발견하고서 토미를 내버려 두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토미는 그런 나의 반응에 당혹스럽고 허탈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애를 걱정하면서 몇 달을 보낸 참인지라 배신감에 휩싸여 그 애의 기분 같은 것에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 여자애와(마틸다였던 것 같다.) 가능한 한 명랑하게 수다를 떨면서 토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가 쟁반을 받아 탁자로 가고 있는데, 토미가 내 뒤로 다가오더니 재빨리 말했다.
“캐시, 오해한 것 같은데 널 속이거나 놀리는 게 아냐. 사실이 그런 것뿐이야. 기회를 주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줄게.”
“쓸데없는 얘기 그만둬, 토미.”
“캐시, 내가 말해 준다니까. 점심 먹은 다음 연못가로 가 있을게. 그리로 오면 설명해 줄게.”
나는 그 애를 책망하듯 바라본 다음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애가 루시 선생님에 대해 한 말이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함께 탁자에 앉으면서 나는 점심 식사 후 아이들의 눈길을 끌지 않고 어떻게 연못가로 갈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었다.
3
연못은 본관 남쪽에 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뒷문으로 나가서 초가을인데도 여전히 앞을 가로막는 웃자란 고사리들을 밀치며 좁고 꼬불거리는 오솔길을 지나가야 했다. 주위에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으면, 대황밭을 가로질러 난 지름길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일단 연못 쪽으로 나오면, 오리와 큰고랭이와 수초가 어우러진 조용한 장소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곳은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하다고 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런 면에서는 점심 식사 줄보다도 못했다. 우선 그곳은 본관에서 빤히 바라다보였다. 그리고 말소리가 연못을 가로질러 어디로 퍼져 갈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우리의 대화를 엿들으려 한다면, 바깥쪽 오솔길로 내려가 연못 반대편 풀숲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점심 식사 줄에서 토미와 대화를 일방적으로 그만둬 버린 나로서는 장소에 이의를 제기할 입장이 아니었다. 10월로 접어든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날은 햇빛이 화창했으므로, 나는 발길 가는 대로 산책하다가 우연히 토미를 만난 척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데 신경을 쓴 나머지, 실제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기도 했지만 , 나는 물가 근처에 있는 크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있는 토미를 보고서도 그 애 곁에 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날은 금요일 아니면 주말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미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는(날씨가 추워졌는데도 그 애는 늘 입고 다니던 헐렁한 축구 셔츠 차림이었으리라.)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상급반 1학년 판매회에서 산, 앞에 지퍼가 달린 갈색 방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토미 곁으로 다가가서는 연못을 등지고 본관을 향해 섰다. 그렇게 하면 본관 창문가에 아이들이 모여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마치 점심 식사 줄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던 것처럼 한동안 일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토미에 대한 배려인지 혹시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의식해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줄곧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고, 어느 시점에서는 산책을 계속할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때 토미의 얼굴에 두려움 같은 것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의도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식으로 그를 겁준 데 즉각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막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아까 얘기하던 게 뭐였지? 루시 선생님께서 너한테 뭔가 말씀하셨다고 했잖아?”
“아…… 루시 선생님. 오, 그거.” 토미는 자기 역시 그 문제를 깡그리 잊고 있었던 척하면서 내 뒤의 연못을 응시했다.
루시 선생님은 헤일셤에서 가장 운동을 잘하는 교사였지만 겉모습에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네모난 얼굴은 불도그를 연상시켰고,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은 아무리 길 때도 귀나 두툼한 목을 덮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이지 탄탄하고 건장해서 남자애들을 포함한 우리 대부분이 훌쩍 자란 다음에도 운동장 달리기에서 우리를 능가했다. 특히 하키를 잘했고, 축구 경기에서는 상급반 남자애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공을 갖고 지나가는 그녀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려던 제임스 B.가 도리어 나동그라진 적도 있었다. 하급반 시절 속상해하는 우리를 보아도 그녀는 제럴딘 선생님처럼 무슨 일이냐고 묻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하급반 시절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활달한 스타일을 좋게 여기게 된 것은 우리가 상급반에 올라온 다음이었다.
“루시 선생님이 창조적으로 되려고 애쓰지 않으면 모든 게 잘될 거라고 너한테 말씀하셨다는 거지.” 내가 토미에게 말했다.
“그 비슷한 말씀이었어. 선생님 말씀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거야. 다른 애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더군. 두어 달 전 일이야. 어쩌면 그 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본관에서 하급반 학생들 몇이 위층 창가에서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우연히 만난 척하는 것을 그만두고 토미 앞에 앉았다.
“토미, 선생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정말 우스운걸. 잘못 들은 거 아냐?”
“절대 아니야.” 토미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선생님은 그 말씀을 그냥 한번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게 아냐. 선생님 방에서 그것과 관련된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해 주셨는걸.”
토미의 설명에 따르면, 미술 감상 수업이 끝난 후 루시 선생님에게서 자기 방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 토미는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 에밀리 선생님을 포함해 이미 몇몇 교사들에게서 들은 것과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듣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선생님과 함께 본관에서 나와 교사용 숙소로 쓰이는 오린저리 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토미가 안락의자에 앉은 것을 보고 줄곧 창가에 서 있었던 선생님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조리 말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토미는 모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반도 진행되지 않았을 때 루시 선생님은 갑자기 그의 말허리를 자르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 온 학생들, 여러 해에 걸쳐 채색화, 소묘, 시 중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학생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토미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것이 토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루시 선생님의 태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뭔가 다른 얘기를 하실 생각이라는 걸 난 알 수 있었어. 뭔가 좀 다른 얘기 말이야.”
예상대로 루시 선생님은 잠시 후에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토미는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잡기가 어려웠지만, 선생님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이야기한 덕택에 이윽고 그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은, 진심으로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창의적으로 될 수 없는 토미의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점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그에게 벌을 주거나 어떤 식으로든 압력을 가한다면, 학생이든 교사든 간에 그들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건 토미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지만 실제로는 모두들 그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긴다고 토미가 대꾸하자, 루시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고는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방법이 너한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만은 잊지 마. 이곳 헤일셤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그 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적어도 난 네가 좋은 학생이고 그동안 알아 온 다른 학생들처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네가 얼마나 창의적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선생님께서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신 건 아니겠지? 널 꾸중하려 하셨다면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잖아?” 내가 토미에게 물었다.
“결코 그런 건 아니었어. 어쨌든…….” 그제야 토미는 누군가 엿들을까 걱정스럽다는 듯 어깨 너머로 본관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창가에 모여 있던 하급반 아이들은 흥미를 잃었는지 가 버리고 없었고, 우리 학년 여자애들 몇 명이 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만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토미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고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어쨌든 이런 얘기를 하시면서 선생님은 떨고 계셨어.”
“무슨 소리야?”
“떨고 계셨다고. 분노로 말이야. 나는 볼 수 있었어. 선생님은 분노에 휩싸여 계셨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 말이야.”
“누구한테?”
“잘 모르겠어. 어쨌든 나를 향한 건 아니었어. 가장 중요한 건 그거잖아!” 토미는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께서 누구한테 화가 나셨는지는 몰라. 하지만 화가 나셨던 건 분명해.”
나는 종아리가 아파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이상한 얘기다, 토미.”
“재미있는 건 말이야, 선생님과 나눈 그 대화가 나한테 도움이 되었다는 거야. 큰 도움이 되었어. 요즘 내 상황이 좋아진 것 같다고 말했었지. 음, 그건 그 대화 덕분이었어. 나중에 선생님 말씀을 생각해 보고 나는 그 말씀이 맞다는 것, 내 잘못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맞아, 난 그런 일에 유능하지 못했어.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건 내 잘못이 아냐. 그러면서 사태가 달라진 것 같아. 그 문제에 불안감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내 옆을 걸어가고 있는 루시 선생님을 눈으로 쫓곤 했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우리가 나눈 대화에 대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지만, 선생님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때때로 고개를 끄덕여 주시곤 했어. 그거면 충분했어. 전에 네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지.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하지만 캐시, 내 말 잘 들어,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
“아니 그렇지 않아, 선생님은 나한테 약속 같은 건 받지 않으셨어. 하지만 넌 그 말을 하면 안 돼. 정말 약속한 거다.”
“알았어.” 별관으로 걸어가던 여자애들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하고는 토미에게 말했다. “가 봐야겠다. 조만간 다시 얘기하자.”
하지만 토미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고는 말을 이었다. “딴 얘기도 있어. 루시 선생님께서 또 다른 말씀을 하셨는데 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 그 문제에 대해 너한테 물어보고 싶어.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을 하셨어.”
“우리에게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고? 우리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야?”
“아니, 그런 뜻 같지는 않아. 선생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에 관한 거였어. 언젠가 우리한테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이야. 기증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야.”
“하지만 우린 모든 것에 대해 들어 알고 있잖아.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궁금하네. 우리가 아직 듣지 못한 다른 얘기가 있다는 건가?”
토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는 이윽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도 아닌 것 같아. 다만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직접 우리한테 얘기해 주실 생각도 있다고 하셨거든.”
“정확히 무엇에 관해서 얘기하신다는 거야?”
“잘 모르겠어. 어쩌면 내가 모든 걸 잘못 받아들인 건지도 몰라. 캐시, 잘 모르겠어. 어쩌면 선생님 말씀은 전혀 다른 얘기였을 수도 있어. 창의적으로 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얘기 말이야. 정말이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
토미는 내가 대답해 주기를 기대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토미, 그때 일을 잘 떠올려 봐. 선생님께서 그때 화가 나 계셨다고 했지…….”
“그래, 그런 것 같았어. 선생님은 가만히 서서 떨고 계셨어.”
“좋아, 어쨌든 선생님께서 화가 나 계셨다고 하자. 선생님께서 그렇게 화나신 게 다른 얘기를 하시기 시작하면서였어? 기증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시작하면서였느냐고?”
“모르겠어.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야. 어쩌면 얘기를 하다 보니 다른 일이 생각나신 건지도 몰라. 캐시, 이제 넌 이 문제에 진짜 관심을 갖게 된 모양이구나.”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애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나는 그 생각에 완전히 골몰한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실제로 내 마음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한꺼번에 내닫고 있었다. 루시 선생님과 관련된 토미의 말을 자세히 듣고 나자 뭔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까지 루시 선생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당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일련의 사소한 사건들이었다.
“그냥 좀…….” 나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감을 잡기가 어려운 것뿐이야. 네가 말하는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다른 많은 것과 연관이 있어. 난 그런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어. 이를테면 ‘마담’이 여기 와서 우리가 그린 그림 중 가장 훌륭한 것들을 가져가는 이유 같은 것 말이야. 이유가 정확히 뭘까?”
“‘화랑’에 걸기 위해서잖아.”
“그런데 도대체 마담의 화랑이란 게 뭘까? 마담은 여기 와서 우리가 만든 최고의 작품들을 가져가지.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