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
플루타르코스 지음 | 이다희 옮김 | 이윤기 기획
1판 1쇄 발행 | 2010. 11. 22.
발행처 | Human & Books
발행인 | 하응백
출판등록 | 2002년 6월 5일 제2002-1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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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6078-103-0 04890
ISBN 978-89-6078-102-3 04890 (세트)
테미스토클레스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은 그다지 변변치 못해 명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테나이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던 아버지 네오클레스가 속한 퓔레•는 레온티스, 데모스는 프레아르리오이였다. 어머니는 바깥 나라 사람으로 다음 비문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 아브로토논은 트라키아 여자이나
헬라스의 큰 빛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테미스토클레스.
그러나 파니아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어머니가 트라키아 사람이 아니라 카리아 사람이며, 이름도 아브로토논이 아니라 에우테르페였다고 한다. 네안테스는 여기에 출신 도시 이름까지 덧붙이는데, 바로 카리아의 할리카르낫소스라고 한다.
*아무튼 그가 뤼코미다이 집안과 연결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뤼코미다이 집안 소유인 플뤼아의 사당이 바르바로이••에 의해 불타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제 주머니를 털어 복구하고 벽화로 치장했다. 이는 시모니데스의 주장이다.
태생이 미천하기는 해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급하고 천성이 영리했으며 공직 생활에 대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택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수업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나 여가 시간이 되어도, 다른 남자 아이들처럼 놀거나 느긋하게 있지 못하고 모의 연설을 쓰거나 연습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로 다른 아이를 고발하거나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테미스토클레스의 스승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보잘것없는 사람이 될 리는 없다. 분명히 큰 사람이 될 거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또 공부를 할 때면 인격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분야나, 취미나 교양을 닦는 분야는 배우는 데 망설임이 많고 게을렀다. 슬기를 함양하거나 실질적인 효용이 있는 분야에 대해서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관심했는데, 마치 선천적인 재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따라서 세월이 흐른 뒤 이른바 교양과 품격이 있는 놀이가 벌어진 자리에서 세련되었다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자, 그는 다소 무례한 방식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뤼라를 조율하거나 프살테리온을 타는 법은 배운 적 없지만, 무명의 작은 도시를 명성이 드높은 위대한 도시로 만들 수는 있다고 말한 것이다.*
아무튼 어린 시절 그의 행동은 불규칙하고 불안정했다. 본성에서 나오는 충동을 자유롭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마땅한 가르침이나 훈련이 없다면, 충동은 추구하는 목표를 따라 극에서 극으로 난폭하게 치닫고 종종 타락하는 법이다. 테미스토클레스도 훗날 이를 인정하며 아무리 제멋대로인 어린 야생마라도 적절히 길들이고 훈련시키면 훌륭한 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꾼들은 여기 덧붙이기를,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버지가 그를 버렸으며 어머니가 아들의 오명을 슬퍼하며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버지가 공직에 나서려는 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며 해안에 내팽개쳐진 낡은 함선을 가리켜 말하기를, 사람들은 임기가 지난 지도자를 저 함선과 같이 대접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회 문제들이 젊음의 정열을 미처 벗지도 못한 그를 빠르게 옥죄었고, 명예를 얻으려는 욕구도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최고가 되고자 했던 그는, 이미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권력자들의 적개심에 처음부터 과감히 맞섰다. 언제나 그의 맞수였던, 뤼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테이데스에 대해서는 특히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와의 적수 관계는 매우 유치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철학자 아리스톤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두 사람 모두 케오스 출신의 아름다운 미소년 스테실라오스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 이후 공적인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서로 경쟁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삶의 방식과 성격의 차이가 관계를 더욱 벌려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리스테이데스는 본성이 유순했고 성격도 보수적이었다. 그가 공직 생활을 한 것은 환심을 사거나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사람들을 선동해 새로운 일을 벌이고 크나큰 개혁을 선보이는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자꾸 반대하게 되고, 커가는 그의 세력에 대항해 단호한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예욕이 강하고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 컸다. 밀티아데스 장군이 마라톤에서 페르시아를 격퇴시킨 뒤 모두가 장군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 때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생각에 잠겨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고, 늘 가곤 하던 술자리에도 가지 않았다. 갑자기 생활 방식이 바뀐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밀티아데스 장군의 승전비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테나이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승리함으로써 전쟁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을 더 큰 다툼의 시작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싸움을 위해 스스로를 헬라스 전역의 보호자로 지명하고 도시를 훈련에 돌입시켰다. 먼 미래의 일이기는 해도 닥쳐올 불행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라우레이온의 은광에서 나오는 소득을 나눠 가지는 데 익숙하던 아테나이 사람들 앞에 과감히, 그것도 홀로 나섰다. 그는 소득을 나눠 갖지 말고 그 돈으로 아이기나••에 맞설 트리에레스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아이기나와의 전쟁은 당시 헬라스를 괴롭히던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고, 아이기나 섬의 사람들은 수많은 배를 앞세워 바다를 호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손쉽게 자신의 주장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그는 저 무시무시한 다레이오스•••, 혹은 페르시아 사람들을 내세워 시민들을 겁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고 침략에 대한 공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오히려 아테나이 사람들이 아이기나 사람들에게 느끼고 있던 통렬한 시기심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필요한 군비를 확보한 것이다. 그 결과 은광에서 나온 돈으로 트리에레스 1백 척을 만들 수 있었고, 이 배들을 가지고 살라미스에서 실제로 크세르크세스에 대항해 싸웠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도시의 발전 방향을 바다로 유도했다. 보병대를 가지고는 가까운 이웃을 상대하기도 어렵지만, 함대에서 오는 힘이 있다면 바르바로이를 물리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헬라스의 으뜸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 것이다. 이렇게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을,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자면 ‘꿋꿋이 제자리만 지키는 보병’에서 파도에 부대끼는 바닷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고, 다음과 같은 비난을 자초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나이 시민들로부터 창과 방패를 빼앗아 방석을 깔고 앉아 노나 젓는 이들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스테심브로토스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을, 밀티아데스를 지지하는 자들의 대중적인 반감을 무릅쓰고 이루어냈다.••••
이로써 그가 나라 체제의 고결함과 순수성에 해를 입혔는지 아닌지는 철학자가 연구할 몫이다. 아무튼 헬라스 사람들을 구한 것은 바다였고 무너진 아테나이를 다시 세운 것도 바로 그 트리에레스 선단이었다는 사실은, 크세르크세스가 증인이며 굳이 다른 증거를 댈 것도 없다. 크세르크세스는 보병대가 멀쩡했음에도 함대가 패하자 퇴각했다. 헬라스 사람들을 상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마르도니오스•••••를 뒤에 남겨두었다. 적을 누르기 위해서라기보다 추격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떤 이들은 테미스토클레스가 자유분방한 사고를 갖고 있어 돈을 버는 데 적극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잔치를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손님들을 위해 돈을 물 쓰듯 했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
반면 다른 이들은 그가 선물로 받은 음식까지 내다팔 정도였다고 그의 인색함과 지나친 검약을 비난한다. 말을 사육하는 필리데스가 그의 부탁에도 망아지를 내어주지 않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필리데스의 집을 목마木馬로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필리데스 식구들 사이에서 비난이 일도록 해서 가족 간에 법정 다툼이 일어나게 하겠다는 의지를 은밀히 암시한 것이었다.
야망으로 말하자면 테미스토클레스에 비할 자가 없었다. 예를 들어 그가 젊고 이름 없을 때 아테나이 사람들이 열렬히 좋아하던 수금 연주자, 헤르미오네의 에피클레스를 설득해 자신의 집에서 연습을 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집으로 와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또 올륌피아에 갔을 때는 연회며 잔치, 그 밖의 호화로운 자리를 열어 키몬과 경쟁하려 하다가 헬라스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키몬은 젊고 명성이 높은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치가 허용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명성도 없었고 재산도 충분하지 않으면서 부적절한 방법으로 지위를 높이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허세가 심하다는 비난을 샀다. 그뿐만이 아니다. 코레고스, 즉 연극 제작자로서 연극 경연에 비극을 출품하여 우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평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모든 시민들이 그의 이름을 편하게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적인 의무 관계가 얽힌 일에서나 법정 밖에서 조정이 필요한 경우 그가 신뢰할 만하고 공정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공직에 있던 자신에게 부적절한 부탁을 한 케오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대가 운율을 지키지 않는다면 좋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내가 법에 반하여 누구를 편애한다면 나는 영리한 관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세력을 키웠고 평민들의 호감을 샀으며, 마침내 성공적인 파벌의 수장이 되어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메디아 사람들이 헬라스를 치러 내려왔다. 아테나이는 누구를 사령관으로 앉힐지 고민했다. 눈앞의 위험을 보고 겁에 질린 다른 사람들은 사령관 자리에 앉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러나 에우페미데스의 아들로 말은 번지르르했으나 사내답지 못하고 뇌물에 약한 에피퀴데스는 사령관 자리를 원했다. 그리고 쉽게 선출될 것처럼 보였다.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런 자의 손에 지휘권이 들어가면 사태가 파멸에 이를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뇌물로 에피퀴데스를 매수하여 그가 야망을 버리도록 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왕이 보낸 통역관을 처리한 방법으로 칭송받기도 했다. 페르시아 왕은 사신使臣들을 보내 복종의 징표로 흙과 물을 요구했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사신들과 함께 왔던 통역관을 체포해 특별법에 따라 그를 사형에 처했다. 헬라스의 언어를 팔아 바르바로이의 요구 조건을 읊은 죄였다. 그가 젤레이아의 아르트미오스를 다룬 방법도 칭송을 받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메디아 사람들의 황금을 가져와 헬라스 사람들에게 권한 대가로 아르트미오스의 시민권을, 또 그의 자식과 다른 식구들의 시민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위업은 헬라스 사람들 간의 전쟁을 멈춘 것이다. 외부의 세력에 대적하는 동안만큼은 서로 간의 반목을 접어두자고 헬라스의 도시들을 설득해 화해에 이르게 한 것이다.*
지휘권을 손에 넣자마자 그는, 시민들을 트리에레스에 태우기 위한 설득을 시작했다. 도시를 뒤로 하고 헬라스와 가능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바르바로이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계획에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라케다이몬 사람들을 포함한 큰 병력을 이끌고 템페 계곡으로 갔다. 여전히 메디아의 왕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던 텟살리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군대는 곧 아무 성과 없이 그곳에서 철수했고, 이어서 텟살리아 사람들이 페르시아 왕의 편으로 넘어갔다. 뿐만 아니라 보이오티아에 이르기까지 전부 페르시아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아테나이 사람들은 해군을 키우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책에 좀 더 우호적이 되었다. 결국 그는 함대를 이끌고 아르테미시온으로 가서 해협을 지키게 되었다.
여기서 헬라스 사람들은 에우뤼비아데스가 이끄는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지휘권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테나이 병사들은 다른 모든 도시들의 배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배를 갖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남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단번에 위험을 감지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지휘권을 에우뤼비아데스에게 넘긴 뒤 부하들을 달랬다. 전쟁에서 용기를 보여주기만 한다면 전쟁이 끝난 뒤 헬라스 사람들이 기꺼이 아테나이에 복종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가 헬라스를 구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또 아테나이 병사가 적국의 병사보다 용기가 뛰어나고 동맹군의 병사보다 아량이 뛰어나다는 드높은 명성을 얻는 데 앞장선 장본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막상 에우뤼비아데스는 아페타이에 바르바로이 군대가 도착하자 마주선 함대의 크기를 보고 겁에 질렸다. 게다가 퇴로를 막기 위해 추가로 2백 척이 스키아토스 북쪽을 배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가능한 빠른 길로 헬라스로 직행하려고 했다. 펠로폰네소스로 움직여 거기 있는 보병대로 하여금 함대를 에워싸게 할 작정이었다. 페르시아 왕을 바다에서 무찌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헬라스 군대가 자신들을 버릴까 두려웠던 에우보이아 사람들은 비밀리에 테미스토클레스를 만났다. 그리고 펠라곤을 시켜 그에게 큰돈을 주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이 돈을 받아 에우뤼비아데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아테나이 사람들 가운데는 아르키텔레스가 에우뤼비아데스의 지휘를 받는 데 가장 큰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가 선장으로 있는 군함은 평시에는 종교적인 임무를 도맡아 했다. 아르키텔레스는 선원들에게 급료를 줄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오히려 선원들을 부추겼다. 우르르 몰려들어 선장의 식사를 빼앗게 만든 것이다. 그런 뒤, 낙담하고 분노한 선장에게 빵과 고기를 상자에 담아 보냈다. 상자 밑에 은화 1탈란톤•을 넣어둔 테미스토클레스는 선장에게 지체하지 말고 식사를 하라고 일렀으며 다음 날에는 급료를 주어 선원들을 기쁘게 해주라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적들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고발하리라고 덧붙였다. 레스보스 사람 파니아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당시 바르바로이의 함대를 상대로 해협에서 벌인 전투에서 뚜렷한 승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헬라스 사람들에게는 경험을 쌓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위험과 마주함으로써 달성한 실질적인 경험을 통해 배가 아무리 많아도, 뱃머리의 조각상이 아무리 화려해도, 적의 병사들이 아무리 큰 소리로 자랑을 해대고 거칠게 찬가를 불러도, 몸으로 맞붙어 싸울 용기가 있는 자들을 겁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무시하고 적의 병사들을 향해 온몸으로 달려들어 밀고 당기며 끝까지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IX.
그러나 테르모퓔라이에서 아르테미시온으로 온 전령들을 통해, 레오니다스가 쓰러졌고 크세르크세스가 길목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헬라스 안쪽으로 더 깊숙이 퇴각했다. 제일 꽁무니에는 아테나이의 함대가 있었는데 용맹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막 달성한 업적에 한껏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안가를 따라 항해하던 테미스토클레스는 적들이 잘 곳과 군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정박해야 할 곳마다 바위에 특이한 글을 새겨두었다. 때로는 이미 적절한 자리에 있던 바위를 이용했고 때로는 닻을 내리거나 물을 길을 만한 자리 곁에 일부러 바위를 놓아두었다. 바위에 새긴 글에서 그는 이오니아 사람들을 엄숙하게 타이르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들의 선조이며, 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아테나이의 편에 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사정상 그것이 어렵다면 바르바로이의 전투력에 해를 입히고 그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키라고 했다. 이로써 그는 이오니아 사람들을 확보하거나, 바르바로이로 하여금 이오니아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고자 했다.•
크세르크세스가 도리스를 통해 포키스까지 치고 올라가 포키스 사람들의 도시를 불태우고 있었음에도 헬라스 사람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보이오티아로 올라가 적과 싸우자고 다른 헬라스 사람들에게 간청한 것은 사실이다. 아테나이가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바다를 통해 아르테미시온으로 간 것처럼 그들 역시 보이오티아로 가서 진을 치고 앗티케를 방어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의 탄원을 듣지 않았다. 모두 펠로폰네소스에 철석같이 매달린 채 모든 병력을 이스트모스 내에 모으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쪽 바다에서 저쪽 바다까지 이스트모스를 가로질러 방벽을 짓기 시작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이러한 배신에 일제히 분노에 사로잡혔고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 몹시 낙담했다. 그토록 수많은 페르시아 병사들을 상대로 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처한 아테나이 사람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은 도시를 버리고 함대에 모든 것을 거는 일이었으나 이것은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 사람들은 승리를 원하지도 않았지만 승리한다고 한들 신들의 사원과 선조들의 무덤을 적에게 넘겨준 뒤라면 그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바로 이때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섰다. 그는 상식적인 논리를 통해 군중을 납득시키는 것이 절망적인 일임을 깨닫고, 마치 비극 작품을 연출하는 사람처럼 신들을 드러내 보여줄 일종의 장치를 고안했다. 그리하여 시민들에게 하늘이 내린 징조와 신탁 등을 짚어주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징조로는 아크로폴리스 내 성역에 살고 있던 뱀을 들었다. 이 뱀은 때마침 모습을 감춘 터였다. 사제들은 뱀에게 매일 바치는 음식이 먹은 흔적 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시킨 대로 시민들을 향해 선포했다. 여신께서 도시를 버리고 바다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고 계신다고 말이다.
나아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잘 알려진 신탁을 인용해 시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이 신탁에서 ‘목재 담장’은 함대를 의미한다고 했고 신께서 살라미스를 두고 이르기를 ‘거룩한’ 살라미스라고 했지 ‘두려운’ 혹은 ‘잔인한’ 살라미스라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은 그 섬이 언젠가 헬라스 사람들에게 크나큰 행운을 가져다줄 것임을 의미한다고 했다.
마침내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이 먹혀들었고 그는 도시의 안위를 ‘아테나이의 수호신 아테나 여신’에게 맡기되, 병역을 수행할 나이가 된 모든 젊은이들은 트리에레스에 태우는 법을 제안했다.•• 물론 자식과 아내, 하인을 위해 가능한 안전한 장소를 찾은 뒤여야 했다. 이 법안이 통과되자 아테나이 사람들 대부분은 자식과 아내를 트로이젠에 맡겼고, 트로이젠 사람들은 그들을 기꺼이 환영했다. 심지어 나랏돈을 써서 그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하기까지 했다. 한 가족 당 매일 두 오볼로스•••를 주었으며 남자 아이들의 경우 어디서든 햇과일을 딸 수 있게 허용하였다. 또 아이들을 위해 교사를 고용해 주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법안으로 만든 사람의 이름은 니카고라스였다.
아테나이 사람들에게는 당장 쓸 나랏돈이 없었다. 따라서 아레이오파고스 회의••••에서 배를 타는 남자들에게 각각 8드라크메를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이것이 트리에레스를 병사로 채우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클레이데모스는 이 역시 테미스토클레스가 꾀를 부린 결과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테나이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페이라이에우스로 갈 적에 아테나 여신의 신상에서 고르고•••••의 머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를 빌미로 온 피난민의 짐을 뒤졌고 그 과정에서 짐 속에 숨겨진 돈을 찾았다. 그리고 이 돈을 압수해 선원들에게 넉넉한 양식과 임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온 도시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광경을 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 꿋꿋한 과정을 놀라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족을 피난시키면서도 선원들 자신은 사랑하는 이들의 절규와 눈물, 포옹에도 아랑곳 않고 적들과 싸움이 벌어질 섬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뒤에 남겨진 노인들도 연민을 자극하였고, 집에서 기르던 동물들은 승선하는 주인을 쫓아가며 그 곁에서 간절한 소리로 울부짖는 등 애처롭고도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팁포스의 개는 주인과 헤어지는 것을 참지 못해, 바다로 뛰어들어 주인이 탄 트리에레스와 나란히 해협을 건넜다. 휘청거리며 살라미스 섬에 오른 개는 탈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일들도 물론 테미스토클레스의 위업에 속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업적은 더 나중에 오게 된다. 그는 시민들이 아리스테이데스를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아리스테이데스가 분노한 나머지 바르바로이와 동맹함으로써 헬라스의 앞길을 망칠까봐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아리스테이데스에게 정치적 패배를 안기고 그를 도편 추방한 장본인은 바로 테미스토클레스였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추방된 지 일정 기간이 넘은 자들의 경우 고향으로 돌아와 다른 시민들과 나란히 헬라스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을 만들었다.•
하루는, 스파르테의 명성에 기대어 함대의 지휘를 맡았지만 정작 위험이 닥치면 마음이 약해지곤 했던 에우뤼비아데스가, 돛을 올려 이스트모스로 항해하고자 했다. 펠로폰네소스 사람들로 이루어진 보병대가 그곳에도 소집되어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에 반대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기억에 남을 만한 대화가 오갔다. 에우뤼비아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테미스토클레스여, 경주에서는 출발이 빠른 선수가 지팡이로 매를 맞습니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가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뒤처지는 사람은 승리의 관을 쓰지 못하지요.”
에우뤼비아데스가 테미스토클레스를 때릴 기세로 지팡이를 치켜들자 테미스토클레스가 말했다.
“때릴 때 때리더라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에우뤼비아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침착함에 탄복하여 말을 해보라고 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그러자 누군가가 끼어들어 말했다. 이미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직 나라가 있는 사람에게 그 나라를 버리거나 배신하라고 조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테미스토클레스가 응수했다.
“참 딱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집과 성벽을 버리고 떠난 것은 맞습니다. 생명도 없는 그러한 것들을 지키려고 남에게 복종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나라가 있습니다. 헬라스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트리에레스 2백 척입니다. 우리들은 그대들이 원한다면 그대들을 구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이 또다시 우리를 버리고 떠난다면 헬라스 사람들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유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을, 버리고 떠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구경만 하게 될 것입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렇게 말하자 생각에 잠긴 에우뤼비아데스는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을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졌다. 그러나 곧 이 에레트리아 사람이 또다시 반대하려고 하자 테미스토클레스가 말했다.
“됐습니다! 오징어처럼, 심장이 있어야 할 곳에 긴 주머니만 있는 사람이 전쟁에 대해 뭘 안다고 나섭니까?”
어떤 이들은 테미스토클레스가 갑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 부엉이 한 마리가 함대 우측에서 날아와 밧줄 위에 앉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기꺼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바다에서 싸울 채비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 적의 병력이 앗티케의 연안을, 팔레론 항구에 이르기까지 에워쌌다. 해변이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또 왕은 몸소 보병대를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와 전 병력과 함께 선 모습을 과시했다.
적군이 이처럼 결집한 것을 보자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은 헬라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펠로폰네소스 사람들은 또다시 이스트모스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구든 다른 방법을 제안하기라도 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실제로 이들은 밤을 틈타 후퇴하기로 결정했으며 배의 조타수들에게 이와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테미스토클레스가 그 유명한 시킨노스 사건을 계획하고 꾸민 것이다. 그는 헬라스 사람들이, 다함께 좁은 해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지 모르고 도시별로 뿔뿔이 흩어지려는 것이 심히 염려되었던 것이다.
이 시킨노스라는 사람은 페르시아 혈통으로 전쟁 포로였다.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자녀들의 교육까지 맡았다. 이 사람은 비밀리에 명령을 받고 크세르크세스에게 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테나이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가 왕의 큰 뜻에 동조하여 누구보다 먼저 알리고자 하는 바, 헬라스 사람들이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으니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말고 그들이 보병대와 분리되어 혼란에 빠진 틈에 공격해 해군력을 말살하십시오.”
크세르크세스는 이를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이의 전갈로 받아들이고 기뻐해 마지않으며 그 즉시 각 군함의 선장들에게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나머지 함대에는 서두르지 말고 병력을 배치하되 먼저 2백 척을 이끌고 당장 바다로 나갈 것을, 그리하여 해협을 사방에서 에워쌀 것을 주문했다. 심지어 봉쇄 선상에 있는 섬들까지 포위하여 적이 단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뤼시마코스의 아들 아리스테이데스는 상황을 가장 먼저 파악하고 테미스토클레스의 막사로 왔다. 이미 언급했듯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 추방시킨 장본인이 테미스토클레스였던 만큼 둘이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막사에서 나오자 아리스테이데스는 페르시아의 적이 그들을 에워쌌다고 전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테이데스의 검증된 고결함을 믿었고 그가 그 시각에 나타난 것에 탄복하였기 때문에 시킨노스를 보낸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헬라스인들이 아리스테이데스의 말을 더욱 신뢰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헬라스 사람들을 붙잡아 해협에서 전투를 치르고자 하는 자신의 절박한 시도에 힘을 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아리스테이데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을 칭송했다. 그리고 다른 지휘관들과 트리에레스의 선장들을 선동했다. 그럼에도 동맹군이 여전히 미심쩍은 태도를 보이는 와중에 테노스의 트리에레스가 나타났다. 파나이티오스가 사령관으로 있던 이 배는 적진에서 이탈한 배였으며 적들이 포위하고 있음을 알렸다. 결국 헬라스 사람들은 용기를 내 위험과 마주하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바르바로이의 숫자에 관해서는 시인 아이스퀼로스가 『페르시아 사람들』이라는 비극 작품에서, 마치 직접 경험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한데, 크세르크세스가 거느리고 있는 배는 그 수가 1천 척이었다. 속도가 월등히 빠른 배들이 그 밖에도 2백하고도 일곱 척이 있었다. 함선의 수가 그러했다.”
앗티케 사람들의 배는 그 수가 180척이었고 각 함선의 갑판에서 싸우는 병사가 열여덟이었다. 그 가운데 넷은 사수였고 나머지는 중무장한 병사들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전투를 하기 위한 최고의 장소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시기 또한 철저히 계획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기편 트리에레스의 뱃머리를 바르바로이의 함선을 향해 보낼 시기로, 바람과 넘실대는 파도가 먼 바다로부터 해협을 향해 들어오는 때를 골랐다. 이 바람은 작고 나지막한 헬라스의 배에는 아무 해도 입히지 않았지만 선미가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갑판이 높은 데다 움직임도 굼뜬 바르바로이의 배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바람이 배를 때려 뱃전을 헬라스 함대가 있는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헬라스 군대는 이틈을 타 맹렬하게 공격했다. 시선은 언제나 테미스토클레스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야말로 제대로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 그의 상대가 크세르크세스 밑의 총사령관 아리아메네스였기 때문이다.
아리아메네스는 거대한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성벽 위에서 공격하듯 계속해서 화살을 쏘고 창을 던져댔다. 그는 진정 용맹한 사람으로 왕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정의로웠다. 바로 이자를 향해, 한 배에 타고 있던 데켈레이아의 아메이니아스와 파이아니아의 소클레스가 공격을 퍼부었다. 두 배의 이물이 서로 맞부딪혀 청동 뱃머리끼리 단단히 얽히자 아리아메네스가 두 사람의 트리에레스에 올라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선 두 사람은 그를 창으로 때려 물속으로 처박았다. 아리아메네스의 시신은 다른 잔해와 함께 수면을 떠다니다가 아르테미시아의 눈에 띄었고 그는 시신을 크세르크세스에게로 가져갔다.
*적군의 배를 처음으로 사로잡은 사람은 아테나이의 함장 뤼코메데스라고 전해진다.* 나머지는 수적으로 적과 동등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었는데 해협이 좁은 관계로 바르바로이의 함대는 나뉘어 공격해야 했고 자기편끼리 서로 충돌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적은 해질녘까지 버텼으나 마침내 패주했다. 헬라스 군인 시모니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싸움에 임한 이들의 사나이다운 용맹과 공통의 열의로, 또 무엇보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영리한 판단으로 저 아름답고 이름 높은 승리를 차지했으며 헬라스 사람들도 바르바로이도 바다 위에서 이보다 더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 본 적이 없었다.”
해전에 패배한 뒤 원통해하던 크세르크세스는 해협을 가로질러 둑을 만들고 그 위로 보병대를 보내 살라미스에서 헬라스인들과 맞설 계획을 꾸몄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단지 아리스테이데스를 떠볼 작정으로 진지한 척 제안을 하나 했다.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거기 가로놓인 배들을 흩어놓음으로써 “에우로페에 아시아를 가둬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아리스테이데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맞서 싸운 바르바로이의 왕은 지금은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찾지만, 우리가 그토록 큰 군대를 거느린 자를 강제로 헬라스에 가둔다면 그는 더 이상 금빛 양산 밑에 앉아 편안히 전투를 감상하지 않을 것이네. 오히려 무엇이든 시도해 볼 것이며 위험에 맞서 모든 것을 직접 지휘함으로써 부주의에서 비롯된 이때까지의 모든 실수를 바로잡고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더 좋은 방책을 협의할 것일세. 그러니 우리는 이미 지어진 다리를 부수어서는 안 되네, 테미스토클레스. 우리는 가능하다면 그 곁에 또 다른 다리를 지어 그자를 에우로페에서 서둘러 쫓아내야 하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가 대답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자를 헬라스에서 내보낼 가장 빠른 방법을 연구하고 계획해야겠네.”
이 방침이 채택되자마자 테미스토클레스는 전쟁 포로 가운데서 발견한 왕의 내관 아르나케스에게 전갈을 주어 보냈다. 바다를 장악한 헬라스 사람들이 부교浮橋가 놓인 헬레스폰토스로 가서 그 부교를 파괴하려고 벼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왕에 대한 예의로서 권하는 바이니 서둘러 병사들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추격하는 같은 편 병사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늦추어 보겠다고 덧붙였다. 바르바로이의 왕은 이 전갈을 듣자마자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서둘러 후퇴를 시작했다.*
헤로도토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전쟁에 참가한 도시 중에는 아이기나가 가장 용맹했다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개인으로 따지면 모두가 테미스토클레스를 으뜸으로 쳤으나 시기심으로 인해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휘관들이 이스트모스에 모여 그 지역 신의 제단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갖고 이 문제에 대해 엄숙한 투표를 했을 때, 각자 자신을 누구보다 용맹한 사람으로 꼽았고 그다음으로 테미스토클레스를 꼽았다. 또 라케다이몬 사람들은 그를 스파르테로 데려갔으며, 에우뤼비아데스에게는 용맹함을 기리는 상을 주었고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지혜를 칭찬하는 상을 주었다. 두 사람에게 각각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을 수여했고 테미스토클레스에게는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전차를 주었으며 그를 나라 경계까지 안내할 엄선된 젊은이 3백 명도 붙여주었다.
또, 올륌피아 경기가 돌아왔을 때 테미스토클레스가 경기장에 들어서자 모든 관객들이 선수들은 보지 않고 하루 종일 테미스토클레스만 바라보았는가 하면 존경에 넘치는 환호를 보내며 그를 모르는 바깥 나라 사람들에게 그를 짚어주었다고 한다. 이에 테미스토클레스도 매우 기뻐했고 친구들에게 털어놓기를, 그동안 헬라스를 위해 고생했는데 그제야 그 보상을 톡톡히 거두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실로 테미스토클레스는 본래 유명세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 일례로 시민들이 그를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을 때 그는 그 어떤 사적, 공적 업무도 제때 하지 않고 항해를 시작하기로 되어 있는 날까지 미루었다고 한다. 마침내 그날이 왔을 때 모든 일을 몰아서 함으로써, 또 온갖 다양한 사람들과 만남을 가짐으로써 매우 대단하고 권세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다.
하루는 해안에 밀려온 바르바로이의 시체들을 살펴보다가 시체에 황금 팔찌와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은 그냥 지나쳤으나 뒤따라오던 동료에게 이를 짚어주면서 말했다.
“가져가게. 그대는 테미스토클레스가 아니지 않나.”
또, 한때 아름다웠던 안티파테스가 전에는 자신을 멸시해 놓고 자신이 명예를 얻자 따르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여, 늦기는 했어도 결국 우리 둘 다 정신을 차렸군.”
또 아테나이 시민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버즘나무 취급하듯 한다고 했다. 폭풍우가 오면 밑으로 달려와 비를 피하지만 날씨가 화창하면 잎을 따고 가지를 자르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한번은 어느 세리포스 사람이 테미스토클레스에게 말하기를, 그의 명성이 그 자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테나이라는 도시로 인한 것이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내가 세리포스 사람이었다면 명성을 얻지 못했을 테지만 그대가 아테나이 사람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또, 자신이 도시에 꽤나 큰 봉사를 했다고 생각하는 동료 지휘관이 감히 테미스토클레스의 업적을 자신의 업적과 비교하기 시작하자 그가 말했다.
“어느 날 축제 다음 날이 축제날에게 따졌다네. ‘너는 온갖 의무로 가득해서 지루하지만 내가 가면 사람들은 모두 이미 풍족하게 마련된 것들을 한가로이 즐겨.’ 그랬더니 축제날이 이렇게 대답했다지. ‘맞아. 하지만 내가 없다면 넌 존재하지도 않아.’ 자, 내가 그날 살라미스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네와 자네 동료들은 지금 어디 있겠는가?”
한편 테미스토클레스의 아들은 어머니테미스토클레스의 아내를 쥐락펴락했고 또 어머니를 통해 테미스토클레스를 쥐락펴락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자신의 아들이 온 헬라스 땅에서 가장 막강하다고 했다. 헬라스 땅은 아테나이 사람들이 지휘하고 있고 아테나이는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데 자신이 꼼짝 못하는 아내가 아들에게 꼼짝 못하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무엇을 하든 남다르게 하고 싶은 바람이 있었기에 부지를 매각할 때도 훌륭한 이웃을 덤으로 준다는 것을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딸을 아내로 청한 두 구혼자 중에서 그는 부유한 남자 대신 미래가 유망한 남자를 골랐다. 돈 없는 사람이 사람 없는 돈보다 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놀라운 언사들은 이 정도였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위업들을 세운 뒤에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도시를 재건하고 도시의 방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테오폼포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스파르테의 에포로스•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 계획에 반대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포로스들이 눈속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아무튼 이것이 그가 스파르테로 간 진정한 목적이며 사절로서의 임무가 있다는 것은 구실일 뿐이었다. 스파르테 사람들은 아테나이가 방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아이기나 역시 일부러 폴뤼아르코스를 보내 같은 비난을 퍼부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부인하며 정 못 믿겠다면 아테나이로 사람을 보내 직접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벽을 쌓을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고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절단을 볼모로 붙잡게 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사태는 그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라케다이몬 사람들이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못했고 불쾌한 감정을 숨긴 채 그를 보내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이라이에우스••를 건설하였다. 항구로서의 유리한 입지 형태를 알아보고는 도시 전체를 바다에 붙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아테나이의 옛 왕들의 방침을 일부 거스르는 일이었다. 왕들은 아테나이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를 멀리하고 항해술이 아닌 농업을 통해 삶을 꾸리도록 하기 위해 아테나 여신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도시를 놓고 겨루고 있을 때 아테나 여신은 심판들 앞에 아크로폴리스의 신성한 올리브나무를 드러냈고 그로써 도시를 차지했다.
그러나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것처럼 테미스토클레스가 “페이라이에우스를 아테나이에 주물러 붙인” 것은 아니다. 아테나이를 페이라이에우스에, 즉 땅을 바다에 붙인 것이다. 이로써 그는 귀족들보다 평민들의 특권을 신장했고 그들에게 대담함을 심어 주었다. 이제 통제권이 선장과 갑판장, 조타수에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에서, 바다를 바라보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