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소설가이자 번역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으로 “해석과 틀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감성과 개성적인 문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2004년 『독학자』로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훌』 『올빼미의 없음』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뱀과 물』, 장편소설 『부주의한 사랑』 『에세이스트의 책상』 『북쪽 거실』 『서울의 낮은 언덕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산문집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프란츠 카프카의 『꿈』, W. G.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 『자연을 따라. 기초시』,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등이 있다.
cover photo이대원
design 표지윤종윤본문이원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어느 날 한적한 교외의 국도를 드라이브하다가 나는 운전을 하고 있던 그에게 말한다.
“너, 방금 고양이 한 마리가 차 앞으로 지나가는 것 봤니?”
“그럼.”
그는 한 손으로 더듬어 담배를 찾으면서 가볍게 대꾸한다. 늦가을 하늘은 어둡고, 밝은 커튼이 쳐진 것처럼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낙엽송 가로수가 회색빛 길의 저 끝까지 이어져 있다. 길의 끝에는 낯설고 작은 도시의 초라한 거리가 나타나고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들이 길가에 앉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한 주일 앞두고 있었다. 정말 싫은 나이였다. 나는 열다섯 살처럼 생기발랄하지도 않았고 서른다섯 살의 오후처럼 지쳐 있지도 않았다. 나는 내일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어 항상 불안하였다.
“고양이가 앞을 지나가면 재수가 없다는데.”
“그런 말이 있어?”
“불행한 일이 생긴대. 특히 아까처럼 검은 고양이일 경우에는.”
“검은 고양이라고?”
그는 양손을 핸들에서 떼고 잠시 생각한다. 길은 단조롭고 고요하다. 양옆으로 변화 없는 낮은 산과 옥수수와 호박을 심어놓은 밭들이 있을 뿐이다. 어디엔가 강물이 있을 것이다라고 스물다섯을 한 주일 남긴 나는 생각한다. 강물의 푸른빛이 그리워져서 나는 바람 부는 창밖으로 몸을 내민다.
“그건 검은 고양이가 아니었어. 네가 잘못 본 거야. 재색에 검은 얼룩이 박힌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그렇게 봤어.”
나는, 그것은 검은 고양이였어, 틀림없이,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곧, 아무러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입을 다문다. 키 큰 풀들이 바람에 눌려 낮게 누운 차창 밖은 사람이 없고 길과 그리고 또 길뿐이다. 늦가을이란 얼마나 멋진가, 결코 잊을 수 없다.
“사과 먹을래?”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조금 전 지나온 소도시의 먼지투성이 길가에서 샀던, 푸른 사과가 든 종이봉투를 가리킨다. 아, 그 사과가 있었지. 푸른 사과가.
사과를 팔러 온 여인네는 굵은 실로 짠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국도 주변에 차를 세워놓고 그는 지도를 들여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아무렇게나 떠나온 듯하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목적지라는 것이 있었다. 아주 작지도, 그렇다고 눈에 띌 정도로 크지도 않은 서해안의 한 어촌이다. 여름에는 관광지라고 불릴 수도 있는 곳이고 요즈음 같은 때는 겨울잠을 자듯이 조용한 곳이야, 하고 그는 말했다.
“그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데? 난 처음 들어보는데.”
나는 여인네의 거칠게 튼 붉은 뺨을 바라보면서 사과를 사버린다. 바삭거리는 오래되고 묵은 냄새 나는 종이봉투에. 어디엔가 과수원도 있으리라. 여인은 흐린 빛의 손으로 짠 스카프로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다. 차 안에서 볼륨을 한껏 높여놓은 피아노 음악 소리는 스산한 길가에까지 멀리 울려나간다. 라흐마니노프인가, 차이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인가. 그는 너무나 많은 테이프를 싣고 있어서 그 순간에 들려오던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낮게 가라앉아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거리와 달리 신경질적으로 한껏 높고 격렬한 파트가 연주되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죽음처럼 어두운 톤으로 가라앉아버리고 연주자는 가만히 한숨을 쉰다. 여인은 푸른 사과를 바스락거리는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국도변의 키 큰 낙엽송 가로수들이 흐린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오래된 수채화처럼 서 있는 풍경이었다. 먼지투성이 길가의 푸른 사과를 파는 여인들. 그는 지도를 쳐다보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지불한다. 어두운 푸른색 버스가 둔한 소리를 내면서 차 곁을 스쳐지나간다.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사과를 파는 여인의 메마른 입술과 눈에 내려앉았다. 건물들은 모두 낮은 키에 칠이 벗어진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다. 문이 열린 건물 안은 어둡고 천장이 낮다. 건조한 늦가을 바람에 실려 삶은 콩과 말린 생선 냄새가 난다. 나는 차에서 내려 천천히 이 거리를 걸어가보고 싶은 기분도 든다. 그래, 종이봉투에 담긴 푸른 사과를 팔면서 이 거리에서 살아도 좋겠구나. 밤이 어두워지면 무거워진 발을 질질 끌듯이 하며 낮은 산들 너머 강가의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스물다섯 늦가을 어느 날에 나는 목이 메었다.
“오래전에 한 번 왔었어. 아마 고등학교 동창들 중 하나가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거야. 고기도 잡고 피서철에는 민박도 하지, 지금도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사이가 무척 좋았으니까.”
나는 사과를 씹으면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자리에 들 때면 항상 내일은 무엇을 하나, 그런 생각이 가득한 스물다섯이었다. 내 주변의 여학교 동창들은 결혼을 하거나 대도시의 커리어우먼으로 자기 자신이 가장 확실해진 때였지만 나는 열다섯 살 때만큼이나 불안하고도 불안하였다. 그는 차를 출발시킨다. 낙엽이 태풍처럼 날아오른다. 서쪽으로만 계속 가면 돼. 마지막은 비포장이야. 그는 지도를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칠흑 같은 밤이 되었다. 길을 잘 몰라 헤매었기 때문이다. 개가 계속해서 짖어댔고 파도 소리가 높았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은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고등학교 동창은 그에게 말한다.
“이곳은 요즈음 같은 때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낚시하기에도 좋지 않은 곳이니까. 사실은 나 이곳에서 서서히 떠나고 싶어지는 중이야.”
그 고등학교 동창은 이제는 대도시로 돌아가 취직도 하고 싶고 조직 사회의 드라이함도 느껴보고 싶어진다고 하였다. 세 사람은 파도가 높은 굵은 모래가 깔린 밤의 해안을 따라 걸었다. 바위 사이에는 코카콜라나 맥주 캔이 나무젓가락과 함께 흩어져 있고 어두운 바다 위에는 고깃배의 불빛이 반짝였다. 가끔 바위에 나란히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또 그 사람들의 수많은 여자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파도에 구두가 축축해지면 다시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과 좀 떨어져서 나는 화제에도 섞이지 못한 채 맹숭맹숭하게 뒤를 따라다녔다. 가끔 생각난 듯이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 “제수씨, 발밑을 조심하세요” 하고 말을 걸었다. 새벽이 오려고 하였다.
나는 그 여행이 끝난 후 이 년 동안 그를 다시는 만난 일이 없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 그 마을을 떠나 다시 대도시로 돌아왔는지 어떤지 그런 것도 전혀 모른다. 깜깜한 밤에 도착했다가 안개가 짙게 깔린 새벽녘에 떠나왔기 때문에 개 짖는 소리와 파도 소리 이외에는 기억나는 것도 없다. 그는 새벽의 안개 속에서 조심조심 운전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보이지 않게 바다 냄새가 가득하였다.
“꿈속을 떠가는 것 같다.”
나는 축축한 안개 속으로 두 손바닥을 담그며 말하였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테이프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
바다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바다처럼 오랜 시간이란 어느 만큼인가. 모래처럼 많은 마음들, 하늘처럼 아득히 멀리 있다는 것. 나는 궁금하였다. 노래는 계속되었다.
멀리 가버려도 나는 바람처럼
너에게 머물러 있다.
나는 뒷좌석에 뒹구는 남아 있는 푸른 사과를 한입 깨물어먹었다. 시고 떫은 맛이 안개처럼 나를 가득히 차지해버린다. 너랑 헤어져도 잊히지 않겠다. 나는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애인이 생겼어.”
나중에 그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그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야. 너도 좋아할 것만 같은 그런 아이야. 네 얘기도 모두 다 했어. 그 아이는,”
여기서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너무나 익숙한 라이터 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푸른 불꽃이.
“날 아주 편안하게 해줘. 너와 있을 때랑은 달라. 아, 오해하진 마. 너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냐. 뭐랄까. 그 아이는 내가 이다음에 뭘 해야 하나 하는 그런 종류의 불안이 없을 뿐이야. 그 아이를 앞에 두고서 도저히 다른 여자아이를 만날 것 같지 않아.”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어두운 방안에서 푸른 담배 연기가 가늘게 퍼져나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의 아래층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생선을 굽는 냄새가 난다. 같이 서해안의 어느 마을에서 푸른 사과를 먹은 뒤 한 주일이 지나갔다. 나의 스물다섯번째 생일날 저녁이었다.
“네가 이런 타입이었으면 좋겠어.” 그는 계속한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울어버리고 매달리는 그런. 다른 여자아이를 만나다니, 참을 수 없어, 하고 말해버리는 그런 타입 말이야. 그러면 나는 절대로 이런 말을 네게 하지도 못할 거야. 하지만 우리, 처음에는 너무나 좋았었지. 너도 그랬지.”
그의, 너도 그랬지, 하는 말이 이상하게 애원하는 것처럼 들려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냥 응, 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도 굳이 일깨워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스물다섯번째 생일이 지나가게 되었다. 같이 사귀는 이 년 동안 그는 언제나 프레젠트하기를 좋아하였다. 생일이라든가 처음 내가 일하는 백화점 매장에 그가 와이셔츠를 사러 왔던 날, 그리고 처음 데이트하던 날. 내가 언제든지 “생일이야” 하고 말했으면 그는 반드시 요란하게 나염된 스카프라든지 아프리카풍의 목걸이 같은 것을 선물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또 그런 여자아이를 좋아하였다.
“처음에 기억나니? 난 너랑 처음에 데이트할 때 너무나 떨려서 전날 잠을 못 자버렸지. 같이 영화를 보러 갔잖아. 프랑스 영화였는데. 어두운 곳에서 네게 키스해보려는 생각이었어.”
그것은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육십년대 이태리 영화를 리바이벌하여 상영하는 소극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그와 같이 섹스를 해도 좋다는 기분으로 나갔었다. 영화가 끝났을 땐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우리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호프집에 들어갔다가 마지막 전철을 놓쳐버렸다. 이미 셔터가 모두 내려지고 검은 쓰레기 비닐봉지만이 쌓여 있는 도시의 한밤 거리를 우리는 손을 잡고 몇 시간이나 걸었다. 헌 신문지들이 바람에 날아다녔다. 그날 나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던가. 하얀 리본이 달린 푸른 원피스. 다리를 길게 보이기 위한 검은 하이힐. 손톱에는 투명한 매니큐어. 어두운 건물의 모퉁이에서 높이 올려 묶은 머리를 내가 풀어버리자 그는 내가 자기를 유혹하려 한다고 단정해버렸다.
“난 별로야. 네가 나 때문에 너무 신경쓰지 말았으면 좋겠어. 난 별로 불행하지 않아.”
초등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난다. 나는 언제나 깨끗하고 단정한 글씨로 노트를 하고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찰랑거리는 원피스 자락을 바라보았다. 지우개 자국이 깔끔한 숙제를 돌려주면서 선생님은 비누 냄새가 나는 손으로 내 머리칼을 만지며 칭찬하였다. 너는 참 착하구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라.
“넌 처음에 말했지. 아주 우울하기 때문에 날 만난다고. 언젠가는 헤어진다고. 나에게 정말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생긴다면, 그때에.”
“그래, 그랬어.”
“아주 얌전하고 정숙한 모습이 되어 나를 떠나가겠다고 했어.”
“응. 제발 나 때문에 신경쓰지 말아. 네가 걱정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수녀가 되거나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야.”
언제나 저녁 식탁에 올려지곤 하는 된장국 냄새가 저녁 시간의 셋집에 가득하였다. 주인집에서 뒤뜰에 놓아기르는 닭들의 꾸꾸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칠이 벗어진 회색빛 바깥벽의 11월 덩굴장미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방 하나짜리 셋집이 가득차 있는 전철역 주변, 집으로 돌아가는 샐러리맨 가장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가게에서 종이 상자에 담긴 포도를 사고 있는 저녁의 거리다.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영원히 변할 것 같지도 않은 일상의 저녁이다. 이 집을 처음 발견했을 때 친구 소영은 “마음에 안 들어. 참을 수 없는 것투성이야” 하고 불평하였다.
“네가 살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리고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값도 아니고.”
“참을 수 없는 건 이 셋집들 사이에 넘치는 프티부르주아적인 분위기야. 이 거리의 어디쯤인가에 적당히 나이 먹은 골목대장이라도 버티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너, 〈한 지붕 세 가족〉 문간방에라도 세 들고 싶어?” 그런 건 나도 가장 싫은 일이다. 그때까지 나와 소영이 같이 살던 그녀의 아파트는 정말이지 침몰하기 직전의 폐선같이 낡고 어둡고 더러웠다. 게다가 난간이 녹슬어 다 부서져나간 소방 층계는 아슬아슬하였고, 죽음처럼 정적이 가득한 대낮이 지나면 넥타이를 느슨하게 매고 충혈된 눈을 한 근처 오피스 타운의 샐러리맨들이 모여들어 벌어지는 포커 방과 피아노 가방을 들고 사정없는 벌레떼처럼 와글거리는 초등학생들이 찾아오는 우리 위층의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이른 저녁의 한없이 단조로운 체르니 연습곡들은 초조하게 퇴근을 기다리면서 립스틱을 다시 칠하는 근처 작은 사무실의 타이피스트에게도 들렸을 거다. 그녀는 짙은 석양을 배경으로 화장실 거울에 자기의 뒷모습을 황급히 비추어 보고는 화장품을 챙겨 사무실로 뛰어들어간다. 아직 퇴근은 십오 분이나 남았다.
다시 내가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여행했을 때, 그때의 푸른 사과 기억나니?”
왜 엉뚱하게 나는 푸른 사과 따위가 생각나는 것일까.
“푸른 사과? 아, 그 맛없는 사과. 지독하게 시고 떫었지.”
“나는 그때 푸른 사과를 팔던 여자들이 기억나. 초라한 거리였어. 가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국도를 달려오는 차들만 바라보고 있었어. 거칠게 짠 목도리로 온통 가리고서는.”
“너는 이상해, 언제나 그래. 엉뚱한 얘기를 꺼내서 내 말을 막곤 했었어. 조금도 진지하지 않구나.”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 그 거리로 찾아가서 푸른 사과를 파는 여자가 될 것 같았어.”
“백화점에서 셔츠를 파는 게 아니고?”
그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하였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몰라.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늙고 초라해져서 먼지투성이 국도에서 사과를 팔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을 뿐이야. 그것도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저녁이 되어 아무도 이 푸른 사과를 사러 오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확실해질 때까지. 내가 영원히 가지 못할 먼 데로 나 있는 길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짠 두꺼운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그렇게 있을 것 같은.”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하나도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의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
생일 다음날 오후에는 사촌을 만났다. 그녀는 넥타이를 열심히 고르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알은체를 하였다.
“너 여기서 일하는 줄은 몰랐다.”
“집에다가는 얘기 안 했으니까.”
“커피 마실래?”
그녀는 나를 붙잡고 할 얘기가 많은 듯하였다. 나는 그것이 겁나고 싫었다. 집과 가족, 자퇴한 대학, 가출한 딸. 이런 것들이 갑자기 어른거리는 기분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유를 묻고 싶어하였다. 왜 숙제를 안 했니, 하고 말하듯이 쉽게 입을 열고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저만큼 있는 재떨이를 손 앞으로 끌어다놓고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그리고 다리를 앞으로 길게 뻗고는 대답을 기다린다. 나는 싫다.
“나에게 뭐 물어볼 거니?”
“아니. 안 물어볼게. 커피만 마시자니깐.”
정말 그녀와 나는 커피만 마셨다. 내가 집을 나오고 나서 그녀는 그동안 사귀고 있던 의대생과 결혼을 하였다 한다. 그렇게 듣고 보니까 그녀에게서는 살림하는 여자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넌 결혼했니?”
“아니.”
그녀는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사는 것은 어떠니?”
“그럭저럭 괜찮아. 어디 사느냐, 집에다가 전화 좀 해라, 이런 말은 빼줘.”
“난 너 시집간 줄 알았다. 반대하는 남자랑 살려고 집 나간 걸로 알았어. 모두 그렇게 상상했어. 네가 그렇게 편지를 써놓았다며. 그런데 의외다.”
그들을 실망시킨 것 같아 나는 미안스러워진다. 그때는 그냥 그러고 싶었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사실은 은경이가 네가 남자와 차에 있는 걸 본 적이 있다더라.” 은경이는 두 살 아래인 내 동생이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쓰고 블루진 재킷을 입고 있더래. 그 옆에 네가 꽃이 달린 원피스를 입고 얌전히 앉아 있고. 바로 옆에서 지나쳤는데 너는 자길 못 봤대. 나한테만 한다고 얘길 하더라. 남자랑 잘살면서 왜 집에는 연락도 없느냐고 원망하더라, 걔가.”
“그는 그냥 친구일 뿐이야. 그리고 지금은 만나지도 않아. 너, 묻지 않기로 했잖아.”
“미안해.” 사촌은 커피잔을 달그락 소리내며 내려놓았다.
“내가 여기서 일한다는 말, 가서 할 거니?”
“네가 원한다면, 안 할게.”
그녀는 어머니의 언니의 딸로 나와 동갑이고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냈었고 대학도 같은 델 들어갔기 때문에 친구 이상으로 친했었다. 의사 와이프가 되어서 잘살고 있는 그녀는 이제 내가 딱해 보이는 듯하다.
“너 집 나간 다음에 너한테 중매가 들어왔더라. 너희 윗동네에 살던 지붕이 삼각형인 벽돌집 있지, 왜. 그 집 아들인데, 네가 이쁘다면서 결혼하자고 하더래. 이모는 할 수 없이 네가 지방에 취직해 갔다고 그랬다더라. 결혼할 맘이 아직 없다고.”
그 사람이라면 기억도 난다. 언제나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곤 하였다.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늘상 『뉴스위크』 같은 걸 보는 척하고 있었다. 나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자들의 자신 있는 아름다움에 기가 죽는 그런 여자애였다. 누군가 나를 이쁘다, 좋다 하면 나는 불안하고 믿기지 않는다. 처음 수업에서 이름을 잘못 불렸을 때 같은 불안감이다. 집을 나오는 날 저녁에 나는 식탁에서 생선을 흘렸고,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컵을 하나 깨뜨렸다. 여름방학의 막바지였는데 그날 성적표가 배달되었다. 사람들은 선풍기를 틀어놓고도 모두 땀을 흘렸다. 성적표는 A가 하나, D가 하나, 나머지는 모두 C였다. 통계학이 D였다. 은경이는 친구들과 산에 놀러갔었고 오빠는 사귀는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던 때여서 만사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는 통계학이 싫었고 오빠가 싫었고 뚱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는 부모님이 싫었다. 다음주면 방학이 끝나고 강의가 시작된다. 형형색색의 예쁜 여자아이들이 강의실과 복도에 넘칠 것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는 마당에 나와 손톱을 깎았다. 손톱 깎는 소리가 거슬렸던지 오빠가 내다보면서 조용히 하라고 골을 내었다. 아버지에게 애정이 없는 엄마는 내가 유리컵 하나를 깬 것을 알고 마땅한 구실을 찾은 듯이 부엌에서 야단을 치고 있다. 귀뚜라미가 마당 구석에서 쓰르륵쓰르륵 울고 있다. 나는 언제쯤 이 집을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수없이 나에게 물어보고 있다. 의사나 동시통역사, 하다못해 번듯한 오피스 걸조차도 나는 될 자신이 없다. 그런 여자들을 항상 나는 존경하였고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나라에 살듯이 우러러보았다. 아버지나 오빠 같은 남자와 결혼하여서 친정에서 김치를 가져다 먹으며 끊임없이 애를 낳으면서, 시집간 사촌언니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았다. 은경이처럼 귀엽고 똑똑하고 애교가 있으면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줄 텐데 싶다. 나는 몇 주일 전에 백화점 판매직에 이력서를 낸 것을 생각한다. 오빠가 방안에서 커피를 가져다달라고 소리지른다. 나는 책상에 앉아 은경이에게 메모를 쓴다.
‘은경아, 나는 집을 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 집에는 있고 싶지 않다.’
쓰다가 말고 나는 물끄러미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쓴 것을 읽어본다. 사실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그것조차도 나는 슬프다. 그러나 은경이라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이 가족 이외의 사람을 사랑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나는 날아갈 듯 기쁘다. 오빠가 커피를 재촉하고 엄마는 화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 나는 커피를 끓이러 주방으로 나간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뿌우연 회색빛이다. 나는 느릿느릿 움직여 물을 가스불에 얹고 일부러 더 느리게 커피잔을 찾는다. 오빠가 문을 열고 소리를 친다.
“너는 뭐가 그리 잘났니. 커피 하나 타주는 게 그리 기분 나쁘니. 너 여자 아니니. 시집가서 그런 거 안 할 거니. 너한테 물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시려면 온종일 불러대야 되는 거니.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왜 그렇게 뻣뻣하니.”
아버지가 엄마에게 한마디한다.
“쟤가 왜 그래. 옛날에는 착하던 애가. 당신이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여자애가 저 모양이야. 매일 시무룩하니.”
엄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이 모든 것들이 활짝 열어놓은 안방 문을 통해 보인다.
“저애는 당신 막내 여동생을 닮았어요. 당신 막내 여동생이 고집 세고 미련한 건, 당신도 알잖아. 자식을 나 혼자 낳나요. 왜 사사건건 나에게 트집이에요.”
이 세상에 나에게 다정한 남자, 어려운 강물을 손잡고 건너주는 남자, 병들었을 때 생각나는 남자는 내게는 영영 없을 듯하였다. 커피잔에 뜨거운 물주전자를 기울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남자가 있으면 메모에 써놓은 대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겠다. 모든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해서 그러한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을 가졌었나,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집 떠나기 전날의 나는 확신하였다. 나 또한 그러하게 못 가진 사람들의 편에 서게 되나보다. 오빠, 네가 아무리 우리 앞에서 잘난 척하고 닭을 잡아도 다리는 네 거고 생전 자기 양말 한 번 안 빨면서 큰소리쳐도 너는 내가 집 나가는 걸 못 막는다. 나는 녹슨 부엌문에 기대서서 오빠가 후루룩 소리내며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는 것을 마지막으로 듣는다.
다시 백화점의 커피숍이다. 사촌은 나를 안 보내주려고 작정한 듯하다. 그녀는 내가 근무중이고, 자기와는 달리 이 직장이 없으면 당장 곤란하게 되리라는 것을 고려 안 하는 듯하다.
“은경이는 대학 졸업반이고 디자인 학원도 다닌다. 걘 어쩌면 그리 야무져 보이나. 이모는 걔 공부시킬 땐 돈 하나도 안 들었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섭 오빠는 결혼 문제로 엄마랑 다투고 지금은 냉전이 한창이다.”
사촌의 창백해 보이는 하얀 손가락이 커피 스푼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다. 오후의 백화점 커피숍은 비 오는 퇴근길의 전철 안처럼 붐비고 있다. 달그락거리는 사기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멀미처럼 나른한 커피 냄새가 소음과 함께 자욱하다. 마루를 깐 커피숍 바닥을 쿵쿵 울리면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돌아다니고 나는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는, 엊그제 들어온 유선이 때문에 불안하다.
“사촌들이 모두 커가니까 옛날 같지 않다. 옛날에는 명절 때마다 모여서 사진도 찍곤 했었잖니. 변두리 그 허름하던 사진관 기억나니. 삼층까지 올라가서, 숨을 헉헉대면서 먼지가 풀썩이는 검은 비로드 휘장 앞에 서곤 했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살아 계실 때는.”
“나 늦었어. 너랑 오래 이러고 있을 시간 없다. 나중에 또 놀러와라. 다른 사람한텐 절대 말하지 마라. 말하면 난 너 다시 안 본다.”
나는 그녀에게 단단히 일러둔다. 그녀는 찻값을 내고 따라 나오면서 서운해하는 눈치다.
“너 넥타이 사려고 했잖아. 내가 골라줄게 사 가라.”
나는 그녀에게 조금은 친절하고 싶다. 너무나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내가 너무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니, 그만둘래. 그냥 심심해서 구경해본 거지. 꼭 사려던 건 아니야. 가끔 심심하면 일없이 이렇게 나와보기도 한다.”
그녀가 말했던 그 변두리의 사진관은 나도 기억이 난다. 이모네 가족과 우리 가족이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언제인가 모두가 사진 찍으러 한여름 날 그곳에 간 일이 생각난다. 나는 물방울무늬의 하얀 새 원피스를 입었다. 그때의 나는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사촌은 뺨이 타는 듯이 붉고 입술이 촉촉한 아주 예쁜 아이였다. 사촌 오빠인 섭의 생일인가 그랬을 거다. 이모는 우리들 여섯 명의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하였다. 그때가 그곳에서 사진을 찍은 마지막날일 것이다. 나와 은경과 우리 오빠와 대학생이었던 섭 오빠와 사촌과 그리고 결혼해 있던 사촌언니가 카메라 앞에 섰다. 선이 가늘고, 신경질적인 경향이 있고 식성이 귀족적인 우리 오빠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그 당시의 나는 섭 오빠를 매우 좋아하였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사촌은 견고한 어떤 것이 아니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둥글게 앉았다. 사진사는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쓴 카메라 뒤에서 폭죽처럼 번쩍이는 것을 터뜨렸다.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창문도 꼭꼭 닫아놓은 사진관은 오래된 먼지 냄새와 플래시의 열기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그 사진을 각자 한 장씩 갖게 될 거라는 약속을 들었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면서 사진관의 위태롭게 좁고 가파른 나무 층계를 뛰어내려갔다. 뒤에서 사촌이 같이 가, 같이 얼음과자 사먹으러 가자, 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두운 사진관 층계에서 바라다보이는 하얀 먼지 가득한 한여름의 거리는 눈이 부시다. 연한 빛의 파라솔을 쓰고 느리게 걸어가는 나이든 여인네들뿐이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로 달려가 딸기가 든 아이스크림을 샀다. 길 건너편 사진관에서 그제야 나머지 가족들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다. 섭 오빠가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먼지투성이인 소형 택시가 길 가운데를 휭하니 지나간다. 그 바람에 내 원피스 자락과 머리칼이 흔들리고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던 파라솔을 든 나이든 여인네가 천천히 나를 보았다. 그 순간은 나도 눈부셨다. 나는 하얀 난간에 기대어 앉아 그 여인네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탔다. 길은 다시 하얗게 텅 비어버린다. 언제인가 바로 이런 느낌의, 이런 여름 한낮이 다시 올 것만 같은 아련한 슬픔이 예감된다. 새로 맞춘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먼지투성이 길가에 함부로 앉았던 벌로 나는 원피스를 깨끗하게 빨아야만 하였다.
그는 나를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던 때의 이야기를 항상 하고 싶어하였다. 밤 두시, 단 한 번 만났던 나를 보고 싶어하면서 그는 가족들이 있는 집에서 나와 아파트 앞 공중전화 부스를 서성거리고 캔맥주를 마셨다고 하였다. 그렇게 몇 날을 고민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다시 내게 전화했을 때, 내가 화도 내지 않고 그냥 마치 사촌오빠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 것처럼 그러하여서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실망도 하였다고 한다. 나도 그리워하지만 만나지 못하는 그런 얘기가 하고 싶다. 하지만 좀 다르다. 그날 가을 오후에 여행을 마치고 도시로 다시 돌아왔을 때 깨끗하고 맑게 푸른 오후여서 푸른 사과 따위의 씁쓸하고 뒷맛이 좋지 않은 기억은 모두 다 잊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 아름답고 연휴의 마지막날 이른 오후였기 때문에 하얗게 넓어 보이는 플라타너스와 벚나무의 가로숫길은 이유 없이 다시 돌아다보고 싶은 그림이었다. 그는 스케치북을 꺼내어 데생을 하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하였다.
“차 안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니?”
“대충하는 거야. 내가 그리는 게 아니고 나도 모르는 어떤 누가 내 안에서 나를 강요해. 그러면 흔들리는 차 안에서라도 그릴 수밖에 없어.”
“너는 말을 항상 그렇게 하니.”
그는 내가 자기 엄마나 누나처럼 말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비난하였다.
“그리고 싶으면 그려야 돼. 이런 식으로는 왜 말 못하니. 넌 내가 너를 이해 못하는 것을 즐기고 있어.”
나는 스케치북을 탁 소리나게 덮었다. 이것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다. 나는 일부러 그렇게 한다. 그가 처음에 생각한 얌전하고 약간은 섹시한 키 백육십오 센티의 백화점 여점원은 어디로 갔나. 와이셔츠의 단추를 달아주지도 않고 유행하는 링 귀고리를 하기 위해 귀를 뚫지도 않고 비번일 때는 머리도 감지 않은 채 오후 내내 좁아터진 방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이젤 앞에서 쟁반에 담긴 사과를 그리고 있는 나.
“너는 화가가 아니잖아.”
처음에 그는 조용히 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과는 너무 파래. 원래는 초록에 붉은 핑크가 섞여 있을 뿐이야. 그렇게 칠하니까 어쩐지 섬뜩하게 보인다.”
그는 내가 매장에서 근무할 때처럼 상냥하게 넥타이를 매주지도 않고 생선을 굽거나 무로 장아찌를 만들거나 할 줄도 모르는 것을 알고 조금 실망했다고 언젠가 고백하였다. 나는 너무 큰 산 같은 남자를 내 인생에서 바라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은 또다른 의미로 그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그림이 좋으면 화가가 되지, 왜 백화점에서 점원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특별나게 살고 싶으면 대학을 마저 졸업하고 비슷하게 고상한 남자랑 만나 살 것이지, 왜 나 같은 건달과 만나고 다니는 거야.”
그는 차갑고 산뜻한 햇빛이 눈부시기 짝이 없는 한적한 오피스 타운으로 천천히 차를 몰면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맑은 구두 소리를 높이 울리면서 건물의 그늘과 하얗게 투명한 햇살의 경계 부분을 빠르게 걸어가는 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우리 쪽을 향하여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게 화장한 두 뺨이 아름다웠다. 여자아이의 치맛자락 근처로 아직 푸름이 가시지 않은 나뭇잎들이 사정없이 흩어지고 있다.
여자아이의 검은 머리칼도 그녀의 창백한 뺨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다. 여자아이는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바람을 피하듯 얼굴을 가리고서는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두운 그늘의 모퉁이로 사라져버린다. 다시 거리는 텅 비어버린다. 사람들은 아직도 가을 바닷가나 마지막 단풍이 미칠듯이 지고 있는 강원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쩐지 침울한 분위기가 되어 그가 물었다. 그가 내 곁으로 몸을 돌리고 앞 머리칼이 이마로 흘러내리도록 한 채 이렇게 물을 때 가벼운 오드콜로뉴 냄새가 난다. 난 가까운 전철역에서 내린다. 이유 없는 화가 가득한 듯 그와 나는 둘 다 시무룩한 표정이다. 나는 커다란 스케치북을 신경질적으로 차에서 빼내고 데생 연필을 아무렇게나 백 속에 쓸어넣는다. 천천히 속으로 열까지 세고 난 후에 뒤돌아보았다. 비어 있는 밝은 늦가을의 도로는 한 잔의 거품 많은 맥주처럼 눈부시고도 서늘하였다.
“그 존재에 치열하게 연연하지 않던 연인이라 할지라도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그렇게 생각날 수가 없더라. 전화가 기다려지고.”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이웃에 살던 사촌은 저녁을 먹으러 놀러와선 내 방에서 이렇게 속삭이곤 하였다. 사촌은 화장을 하고 수입 브랜드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나와 동갑인 그녀는 남자들이 사귀고 싶어하는 여학생이었고 날이 갈수록 거울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중이었다. 안방에는 TV에서 연속극 소리가 요란하고 오빠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은경은 저녁을 먹고 화실에 가봐야 한다며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사촌은 새로 데이트를 시작한 의대생에 관해서 쉴새없이 말한다. 그는 우등생인데다가 멋있고 키가 백팔십 센티나 되는데다가 아주 분위기 있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졌다 한다. 나는 그녀와 같이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에 관하여 같이 생각하였다.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나가면서 은경은, 나는 절대로 언니들처럼 남자애들 얘기나 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야, 하고 말한다. 커다랗게 틀어놓은 연속극 소리는 좁은 집안에 가득하였다. 한 명의 아름다운 소녀가 꿈속에 그리던 황홀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유부남이었다. 아름다운 소녀와 그 남자의 부인은 괴로워하면서도 한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는데, 남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밤에는 술을 마신다. 거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남자에게 그의 조그만 딸이 다가와, “아빠 왜 술을 마시는 거야” 하니까 “응, 괴로워서 마신다. 이 세상에 내 괴로움을 알아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너는 나중에 엄마처럼 그러지 말아라” 한다. 한 번도 본 일은 없지만 주말 저녁에는 언제나 집안에 그들의 대사가 가득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다 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여자아이들이 강의실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면서 그 연속극 얘기를 하고 있기도 하였다.
“그애와 결혼하면 참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촌은 투명한 매니큐어를 손톱에 바르면서 말한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내가 어디서 또 그런 애를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엄마도 은근히 좋아한다, 너. 전화 오면 빨리 바꿔주고 지난주에는 원피스도 사주더라. 아빠는 데모만 안 하면 누구든지 좋댄다.”
그러던 사촌은 정말로 그 남자애와 결혼하여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가 위대해 보이기도 하고 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남같이 보이기도 하였다. 그녀와 커피숍에서 헤어진 다음 매장으로 돌아가는데 이런 생각이 드니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유선이는 남자 손님에게 초록빛 셔츠를 골라주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것이 좋아요, 하고 그 손님이 대답하였다. 직장에서 입으실 건가요? 이런 연한 핑크는 어때요? 아님 이런 푸른 스트라이프는요. 얼굴이 까맣고 키가 작은 그 남자는 결국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셔츠만 두 벌을 샀다.
처음에 집을 나와서 백화점 근무를 시작했을 때 고등학교 동창인 소영이의 자취방에서 같이 지냈다. 방세를 한 달에 오만원만 내면 되었기 때문에 부담은 적었지만 가파른 철제 층계를 한참이나 올라가야 하는 그 아파트는 벽에 금이 가고 천장에서 물이 뚝뚝 새는 오래된 것이었다. 난방은 고장난 지 몇 년이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백화점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하던 소영이는 자유분방한 편이었지만 집으로 남자를 데려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밤이 되면 서울 시내의 야경이 가까이 내려다보이고 북악 스카이웨이로 드라이브를 가는 차들이 어둠을 가르고 바람처럼 바로 우리 아파트 앞을 질주하였다. 얼마간 돈을 모아서 내가 이사를 한 이후에도 소영은 그녀의 남자친구인 형준을 데리고 함께 드라이브하자며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연한 커피를 한잔 끓여 마시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소영이 털 스카프로 얼굴을 칭칭 감은 채 나를 찾아왔다.
“일어나. 우리 드라이브하려는데 너도 같이 가자.”
“트럭을 타고 간단 말이야? 싫어.”
소영의 남자친구의 형은 가스 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소영의 남자친구는 가끔 그 형의 트럭을 빌려 타고 소영과 함께 한밤의 고속도로로 무작정 달려가곤 했었다. 가끔 그들과 어울릴 때면 사정없이 흔들리던 불편한 좌석과 안개가 가득한 고속도로를 최대 속도로 달리는 그들의 열정이 불안하여서 나는 그냥 잠자고 싶었다.
“이런 바보, 그게 아냐. 다른 친구가 왔단 말이야. 너도 같이 가야 더 재미있지.” 소영은 반팔 티셔츠 차림의 내게 커다란 하얀색 면 코트를 걸쳐주고는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 싸락눈이 가늘게 내리고 있었고 매우 추웠다. 조심스럽게 길을 내려오니 골목 끝에는 처음 보는 승용차가 서 있고 소영의 남자친구인 형준과 또 한 명의 낯선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영은 무엇이 즐거운지 계속해서 깔깔 웃으면서 “얘가 나오기 싫다는 걸 억지로 데리고 왔어” 하고 형준에게 말하고 있다. 나의 커다란 코트 자락이 차 안으로 채 들어오기도 전에 차는 성급하게 출발하였다. 형준은 주유소에서 일하는 대학생이었고 외제차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 새것으로 보이는 세이블이 지금 운전을 하는 저 낯선 남자애 거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싸락눈은 바람에 섞여 조금씩 길가에 쌓이고 있었다. 소영은 뒤에서 형준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는 형준이 선물해준 금빛 팔찌가 반짝였다. 형준은 지금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소영에게 성을 내는 것 같다. 소영은 명랑하게 웃고 있지만 형준은 반응이 없고 운전을 하고 있는 낯선 남자만이 소영의 과장된 수다를 간간이 상대해줄 뿐이다. 이제 보니 소영은 약간 술을 마신 것 같기도 하다. “어디로 가는 건데, 고속도로가 아니니?” 하고 소영이 낯선 운전자에게 말했다. 나는 눈 오는 어두운 창밖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이 길은 구기동으로 가는 길이야. 이 밤에 산에 가려고?”
소영은 창을 내리고 눈발 속으로 고개를 내밀어보곤 말하였다.
“왜, 못 갈 거 없잖아. 눈 오는 겨울밤에 계곡을 못 갈 이유라도 있니?”
형준은 목에 감긴 소영의 팔을 풀면서 보통 때보다 덜 상냥하게 대꾸한다. 소영은 금방 풀이 죽는다. “왜, 내 친구 키 큰 애 있잖아. 김산경이라고. 그애를 만나기로 했어. 구기동 입구에서. 그애가 한잔 사기로 했거든. 어때요, 괜찮겠어요?” 하면서 그 낯선 운전자는 그때서야 내게 고개를 돌린다. 나는 반팔 티 위에 걸친 면 코트가 추울 것이라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소영은 입을 뾰족하니 다물고 뒷좌석에 깊이 파묻혀버린다. 차는 바람을 타고 흐르듯이 그림처럼 내리는 눈 속을 천천히 헤엄치듯 간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둥그렇고 노란 불빛만이 보이는 어둠 속을 낯선 운전자는 계속해서 운전하여 갔다.
구기동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 오는 추운 한밤의 유원지는 적막하기만 하였다. “난, 김신오라고 해” 하고 한밤의 그 낯선 운전자가 차에서 내리면서 내게 말한다. “모두 커피라도 마실래? 저기 자판기가 있어. 우리 같이 가서 뽑아 오자.” 김신오라고 말한 그는 나를 데리고 커피를 뽑으러 갔다. 차에서 내리니 조용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거리면서 들려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원 입구였다. “자판기는 저 끝에 있어.” 김신오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점들이 늘어선 거리 저편을 가리키며 말한다. “오는 도중에 소영이랑 형준이 많이 싸웠어. 너 소영이랑 같이 살았다며. 걔 성격에 무슨 문제가 있지 않은가 싶어. 형준인 말이 없고 조용한데, 소영인 변덕이 너무 심하고 여자애가 남자를 너무 밝혀.”
“형준이도 처음엔 소영이의 그런 점에 끌렸다고 생각해, 난.”
“아, 그랬겠지.” 김신오는 어깨에 내려 쌓인 눈을 털면서 주머니 속의 동전을 모두 꺼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잖아. 처음과 마지막은 항상 다르잖아. 어떻게 처음과 마지막이 같을 수가 있니. 소영이도 그걸 알아야지. 난 사실 소영이의 중학교 동창이야. 그때부터 소영일 잘 아는데, 그앤 문제 있는 여자라구. 처음엔 남자들이 그애 때문에 미치지. 하지만 마지막엔 언제나 미워하면서 떠나갔어. 그 모든 남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넌.” 그는 자판기 앞에 서서 그 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말한다. “그런데 넌 그애와 상당히 친하다고 들었는데 어째 달라 보인다. 소영이 다른 친구들하고도 달라 보여. 너, 백화점에서 일하는 애 맞지?”
“맞아.”
“애인도 있다며.”
“응. 있어.”
“뭐하는 남자야?”
“평범해. 은행 다니는 남자야.” 그와 바로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나한테도 물어봐. 그래야 공평하지.”
“넌 여자친구 있니?”
“있지. 나보다 한 살 많아. 차밍 스쿨 다니는 애야.”
“오늘 왜 안 왔어?”
“아르바이트로 밤에 편의점에서 일해.”
“사귄 지는 얼마나 됐는데.”
“육 개월 정도.”
“싸울 땐 주로 이유가 뭐니?”
“음.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거나, 내 카드를 빌려달래서 빌려줬더니 그애가 앤클라인 가을 투피스를 사버렸다거나, 내가 다른 여자애와 밤새워 술 마시거나 하는 일 때문인 것 같은데. 별로 심각한 건 아냐.”
김신오는 종이 커피잔을 들고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보이면서 웃었다.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차의 불빛이 보였다.
“산경이다. 새로 사귄 여자친구를 데려온다고 했는데.” 그는 커피를 훌쩍 마셨다. “산경이는 아주 좋은 애야. 그애는 언제나 이런 델 좋아해. 겨울밤의 산속 유원지 같은 데. 아무도 가지 않는 데서 만나기를 좋아해. 멋진 애야.”
산경이라는 남자는 안경을 쓰고 키가 컸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최소한 학교 대표 농구 선수였을 것 같다. 그가 새로운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아이는 염색한 단발머리에 귀고리를 하고 부츠를 신고 있었지만 너무나 어려 보이는 조그만 아이였다. “쟤, 초등학교는 졸업한 거니? 어디서 저런 어린애를 다 데리고 왔니?” 형준은 김신오에게 조그맣게 말하고 있었다. “나, 아무래도 형준이와도 깨질 것 같아. 이제 나에게 싫증이 났나봐. 이제 우리 회사 사장하고라도 사귀어버릴까보다. 아이 재미없어. 나 우울해.” 소영은 뒷좌석에서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가 김신오가 내미는 커피잔을 받아 들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소영은 그때 조그만 무역 회사의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산속으로 올라가서 한잔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산경이 차 안으로 고개를 쓱 내밀고 물었다.
“이 눈 오는데? 안 돼. 여자애들도 있고.” 신오가 반대하였다.
“가까운 데 어디 없을까. 눈이라도 피할 수 있는 데. 술은 차 안에 있어. 근사하지 않아? 이 눈 오는 데서 마시는 거야.”
“이 아래쪽 주차장으로 가면 건물 그늘이 있을 거야. 하지만 춥지 않을까.” 형준이 시무룩하게 대꾸하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내일 비번만 아니라면 소영에게 당장이라도 돌아간다고 말할 텐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눈 오는 고요한 밤은 성냥 파는 소녀를 생각나게 하였다. 산경은 차에서 레미 마르탱 한 병과 종이컵 뭉치를 꺼내고 있었다. 애걔, 겨우 저걸 가지고 이런 날 나와라 말아라 요란을 떨었어. 잠잠하던 소영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한마디하고 형준은 질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그녀를 외면하였다. 산경의 어린 여자친구는 무엇이 그리 행복한지 산경의 팔을 잡고 까르르까르르 웃어대서 신오가 주의를 주어야만 하였다. “여기는 주택가라구. 이 시간에는 조용히해야 하는 곳이야.” 셔터를 내려놓은 상점 앞 주차장은 비어 있고 그 위로는 건물의 이층이 나와 있는 구조여서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신오가 일요판 스포츠 신문을 한아름 갖고 나와 주차장 바닥에 폈다. 눈은 많이도 내렸지만 아스팔트에 닿는 즉시 비가 되어버리고 있었다. 그 길의 끝에는 어두운 터널이 있고 바람처럼 속력을 내면서 한밤의 차들이 계속해서 그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경의 여자친구는 바닥에 깔린 일요판 스포츠 신문의 경마 면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산경 이외의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면 찰랑거리는 결이 고운 단발머리에선 냉장고에서 갓 꺼낸 얼음에서 나는 투명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산경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세상을 도전적인 눈으로 쏘아본다. 나는 그냥 있는 것이다. 그녀의 눈은 말한다. 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냥 그렇게 있는 것뿐이야. 너는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마라. 나를 쳐다보지 마라.
“이름이 뭐야?” 신오는 종이컵에 레미 마르탱을 따르면서 그녀에게 묻고 있다. 형준은 은박지에 싸인, 완전히 식어버린 프라이드치킨을 안주 삼아 먹고 있다. 산경은 남은 신문지 뭉치에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불은 금방 마른 신문지에 타오른다. “아이 따뜻해.” 소영이 형준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두 손을 가만히 그 불을 향해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성냥팔이 소녀와 같다. 일요판 스포츠 신문이 타는 불빛에 형준과 소영의 얼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소영의 긴 머리칼이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녀는 울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배경인 양 눈이 비처럼 내리고 있다.
“가을.” 산경의 여자친구는 신오가 따라준 반 컵 넘게 들어 있던 레미 마르탱을 코카콜라 마시듯이 한 번에 마셔버리고 대답하였다.
“이름이 가을이야?”
“응. 김가을.”
“혹시 여동생 이름이 봄이 아니니?”
“여동생 없어.”
“너 혹시 중학생 아니니?”
“왜 이래. 이제 일 년만 있으면 고등학교도 졸업한다구.”
일요판 스포츠지가 이제 다 타버린다. 검은 재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려 깨끗이 청소된 스키웨어 상점 앞을 더럽히고 있다. 이제 아침 열시가 되면 가장 먼저 출근한 흰 셔츠를 입은 종업원이 투덜거리며 걸레를 빨아가지고 나올 것이다. 바람에 날리는 젖은 일요판 스포츠 신문의 컬러 화보와 찢긴 경마 페이지를 쓸어모아 휴지통에 버리고 빈 레미 마르탱 병과 담뱃재가 가득한 구겨진 종이컵들도 치울 것이다. 소영이 고개를 두 팔 속으로 묻는 것이 어둠 속에서 느껴진다. 산경은 차에서 캔맥주를 더 가지고 온다. 나는 소영이 취한 것 같아 그녀의 잔에 남아 있는 것을 마저 마셔버린다. 산경과 형준은 지난 일요일 경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건 아주 멋졌어” 하고 형준이 열띤 목소리로 산경에게 말한다. “맞아. 백오십 배나 되었어. 하지만 난 완전 뒤통수를 맞았고.” 신오는 가을에게 캔맥주를 다시 권하고 있다. 가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발로 장단을 맞춘다. 날 놔줘, 날 보내줘, 하고 시작하는 엥겔베르트 훔퍼딩크의 오래된 팝송이었다. 소영의 눈물이 그녀의 팔을 적시고 있다.
“오해하지 말아.” 소영이 나에게 중얼거린다.
“오해하지 말아. 내가 형준이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니야. 이젠 넌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너 때문에 슬프지 않고 너 때문에 기쁘지도 않아. 이런 식으로 시작하고 이런 식으로 끝나고.”
그도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나 때문에 기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느 날 새벽이슬이 축축하게 내린 강둑길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창가에서 스타킹을 신다 말고 그에게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어. 이제 너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식으로는” 하고 말할 생각도 결코 없었다.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언제 그런 걸 느꼈니?” 그가 넥타이를 매면서 물었다.
“여섯 살 때.”
“조숙한 거니, 불쌍한 거니.”
“양쪽 다였을 거야, 아마.”
“나는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그게 언제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그의 등을 보고 있다. 열어놓은 창으로는 새벽의 젖은 풀잎의 향기가 물결치면서 밀려온다. 서울로 향하는 국도에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있다. 그가 구두를 신으면서 한 손을 더듬어 테이블 위의 마시다 만 김빠진 맥주가 담긴 잔과 립스틱 묻은 담배꽁초, 어지럽혀진 냅킨들 사이에서 담뱃갑을 찾아내어 주머니에 넣는다. 섹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고등학교 2학년의 남자아이와 애정 결핍으로 영원한 불치병에 걸린 여섯 살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호텔방을 나선다.
신오가 나에게 다가와 편의점으로 맥주를 더 사러 가자고 한다.
“산경이가 가져온 게 다 떨어졌거든. 한 블록 정도 위에 편의점이 있어. 먹을 것도 좀 사고.”
나는 소영의 스카프를 빌려 머리에 감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신오와 나란히 걸었다. 셔터가 내려진 패스트푸드점과 도자기를 가스 가마에 직접 구워 파는 상점들, 골프용품 상점들이 드문드문 있고 편의점의 불빛이 보인다. 점원이 커다란 검은 쓰레기 봉지를 길가에 내다놓고 있다. 눈이 내리고 있지만 세상은 침울하게 젖어 있다. 이런 날 잠에서 깨어나 우연히 창을 열고 신오와 내가 걷고 있는 거리를 내려다보게 되면 누구라도 다시는 잠들지 못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게 된다.
“담배 있니?” 나는 신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불붙여 줄까?” 신오는 담배를 꺼내 한 모금 피우곤 내게 주었다. 나는 거리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눈이 서서히 비로 바뀌려 하고 있다.
“형준이 소영이와 헤어지게 되면 이젠 소영이와는 거의 만나게 될 일이 없을 거야. 아니, 아마 안 만나게 되겠지.” 신오는 재킷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왜 그렇게 되니? 동창이라면서.”
“동창이라도 특별히 친했던 것은 아냐. 형준이 내 친구고 또 형준의 여자친구가 소영이니까. 그것뿐이었어. 형준은 얼마 전부터 걔를 못 견뎌 했어. 요새는 언제나 화를 내면서 헤어지곤 했었어.”
신오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맞은편에서 오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에 그의 옆얼굴이 흑백의 포스터에서처럼 드러났다.
“너도 소영이 좋아한 적이 있니?”
“중학교 때 잠깐. 그때는 누구나가 걔를 좋아했으니까.”
하얀 면 코트를 입은 채 젖은 밤거리에 서서, 길 건너편 편의점 불빛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너무나 멋있다. 이제 혹독한 계절이 다가올 것이라는 불안감을 잊을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나 바닷가의 방갈로와 모래 묻은 프루트칵테일과 선글라스에 반사되는 햇빛만을 생각할 수는 있다.
“그냥 혼자서 좋아하다 말았어. 그런데 술을 마셔야 할 사람은 소영인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네가 더 마시고 있는 것 같더라.”
편의점으로 들어가면서 신오가 이렇게 말한다. 신오와 나는 여러 개의 캔맥주와 훈제 오징어와 포테이토칩, 따뜻하게 데워진 캔커피를 산다. 점원은 잠을 쫓으려고 카운터에 라디오를 조그맣게 켜놓았다. “Ne me quitte pas” 하고 노래가 시작되었다.
“여자친구가 밤에 아르바이트하면 언제 만나니.” 나는 신오가 휘파람으로 라디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들으며 묻는다.
“이제 다섯 시간만 있으면 만나게 돼. 내가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거든.”
신오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차로 집에 데려다주는 걸 좋아해, 그애는. 전철 두 코스밖에 안 되는데도 그래. 가다가 들러서 해장국 같은 걸 먹고 차 안에서 음악도 듣고 담배도 같이 피우고.”
“저어, 밤에 아르바이트 같은 걸 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 여자애는. 특히 네 여자친구는 모델 지망생이라면서, 피부에 좋지 않다든가 하는, 그런 불평은 하지 않니?”
“안 하기는, 당분간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거야. 그렇지만 내 생각에 그애는 모델로 성공하기에는 모자라. 가끔 들어오는 카탈로그 일자리라도 계속 있으면 다행인 정도야. 결론을 말하자면, 별로 안 예뻐. 그렇다고 맹렬하게 노력하는 타입도 아냐.”
“저 세이블은 니 거니?”
“아니.”
신오는 짙은 눈썹을 아래로 깔고 걸었다.
“나, 사실은 정비 공장에 다녀. 거기의 그냥 보통 직원일 뿐이야. 내 여자친구는 우리 아버지가 하는 공장이고 차도 여러 대인 줄로 알지만 사실은 안 그래. 저 차는 공장에서 수리한 차야. 내 것이 아냐. 공돌이가 무슨 세이블이냐. 웃기는 얘기지.”
“그럼 저건 뭐야, 저렇게 가지고 나와도 되는 거니.”
“걔를 집에 데려다주고 빨리 공장에 갖다놔야지. 안 그러면 훔친 게 되니까.”
“왜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 안 했니?”
“산경이가 소개시켜주었어. 처음에 소개하면서 그렇게 말해버렸대. 뭐 큰 상관 없을 거 같아서 그냥 있었어. 그것뿐이야. 하지만 영원히 공돌이로 살지는 않을 거야. 앞으로는 절대.”
“나는 그냥 평범한 은행원일 뿐이야” 하고 그는 두번째로 만나던 날 넥타이를 매면서 말하였다. 해장술을 먹으러 노동자들이 시장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반쯤 열어놓은 커튼 사이로 공장으로 아침 근무를 하러 가는 자전거의 행렬이 하얗고 넓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같은 서울이라도 이런 곳이 있었는가. 나는 잠깐 동안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한번은 로큰롤 가수가 되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끝까지 실천하지는 못했어. 대학 다닐 때는 데모 같은 것은 한 번도 못해봤어. 그래도 엄마는 내가 최곤 줄 알아. 형들이 둘이나 있는데도 언제나 내 맘대로 하도록 하고 지금도 나를 막내라고 부른다.”
나는 머리를 감고 섀도와 립스틱을 칠한다. 출근 시간까지는 좀 여유가 있다. 두 번밖에 안 만나고 나에게 너무나 열중하는 이 남자에 대해서 나는 낯섦을 느낀다.
“너에 대해서 말해줘.” 그가 차의 시동을 걸면서 물었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나는 아침에 담배 피우는 것과 커피 마시는 것을 좋아해. 그리고 비 오는 것을 넓은 유리창을 통해서 내다보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 것뿐이야?”
“응. 그런 것뿐이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든가, 그런 건 있니?”
“아, 그런 것?” 나는 러시아워가 시작되어 정체중인 원효대교를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죽음밖에 생각나지 않아.”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니?” 신오는 가볍게 내 팔을 건드렸다.
“아, 뭐라고 했는데? 차들의 불빛이 너무 눈부셔서 몰랐어.”
“너, 그림을 그린다고 들었어. 소영이가 그러더라. 앞으로 화가가 되고 싶은 거니?”
“완전히 아마추어야.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고 그냥 취미로 하는 것뿐이야.”
주차장에서는 산경과 형준이 마치 한밤의 부랑자처럼 신문지를 태우고 있었다. 소영은 다시 명랑해져서 가을이와 깔깔거리고 있다. 소영의 하얀 팔이 형준의 어깨에 환상처럼 가서 닿는다. 불빛에 금빛 팔찌가 반짝였다.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 죽음밖에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때 그에게 그렇게 말하였던가.
사촌은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CD나 사우나 후에 입는 핑크색 코튼 가운을 산다는 핑계로 백화점에 들러서는 매장에 서서 잠깐 얘기하고 가는 경우도 있고 퇴근 시간에 맞춰 찾아와 스테이크로 저녁을 같이 먹기도 하였다. 소영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형준과 헤어진 뒤 그녀는 붉은 투피스에 힐을 신고 머리를 업스타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못 알아볼 뻔하였다. 내 사촌에 대해서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TV의 〈세서미 스트리트〉 앞에 앉혀놓을 여자라고 평하였다. 그럴지도 몰라, 하고 내가 말하였다. 하지만 소영도 이제는 더이상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뒷골목의 히피처럼 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에스테틱 센터에도 다니고 있노라고 고백하였다.
“사장과는 데이트를 시작했니?” 나의 물음에 그녀는 시니컬한 웃음으로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인데, 그는?”
“속물이야.”
“부르주아의 돼지 같은 타입?”
“맞았어. 완전 샘플이야.” 대답하면서 소영은 콤팩트를 꺼내서 마스카라가 뭉치지 않았나 살핀다. 화장을 하니 그녀는 야성적이면서도 아주 예뻤다. 헝클어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치마에 농구화를 신고 형준의 트럭에 올라타곤 하던 모습이 아니다. 그녀는 스트로로 콜라를 마시고 선명한 립스틱 자국을 남겼다.
“너는 잘돼가니?”
“뭐가?”
“그 은행 다니는 남자 말이야.”
“잘 안 됐어.”
“헤어졌구나.”
“응.”
“잘됐어. 그는 너에게 안 어울렸어. 말할 수 없이 언밸런스했어. 그거 알고 있니?”
내 사촌은 조금 다르게 말하였다. “너는 너 자신을 더 돌아볼 필요가 있어.” 그녀는 먹다 만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톡톡 치면서 말하였다.
“무슨 의미냐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만 해. 그다음에 움직여야 하는 거야. 사실, 이것도 은경이가 내게 해준 말이지만.”
사촌의 결혼생활이 아주 행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녀의 ‘결혼’은 아름답고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녀의 그 멋진 의대생은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꽃과 보석을 프레젠트하고 주말에는 진보적 성향의 연극을 보러 다니는 것도 결혼하기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백화점 전용 쇼핑백을 들고 와이셔츠 매장으로 찾아오는 그녀에게서는 무엇인가 빠져나간 것이 느껴진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한여름의 거리로 뛰쳐나오던 불타는 뺨을 가진 소녀는 어느 순간엔가 죽어버린 것이다.
“집을 옮겨야겠어.” 어느 날은 소영이가 와서 새로운 디자인의 기라로슈 와이셔츠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그린피스에 기부하는 것도 그만두었고, 아무래도 나, 네 사촌인가 하는 그 여자를 닮아가는 것 같다. 선을 봤거든. 어쩌면 결혼하게 될 것 같아.” 소영은 약혼자의 와이셔츠를 사러 온 여자처럼 디스플레이된 파스텔 색조의 셔츠를 하나하나 살피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니? 축하해.” 조금 있다가 생각난 듯이 나는 물어보았다.
“어떤 남자?”
“그냥 보통 남자야. 내무부의 공무원. 서른 살이고 십칠 평 아파트를 갖고 있는 둘째 아들이야.” 그녀는 무감동하게 덧붙였다. “엄마가 좋아하고 있어. 형준이를 그렇게 싫어하더니.”
소영이 동화의 주인공이라면 이쯤에서 끝낼 수 있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공주는 마침내 왕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내무부의 공무원을 왕자로 표현한 것은 좀 뭣하지만—그렇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나는 우연히 거리에서 소영을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다. 눈 오는 밤의 유원지 거리이다. 일요판 스포츠 신문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형준의 어깨에 팔을 감고 신문지가 타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뭐 사러 온 거니? 아, 결혼 쇼핑이로구나. 내가 도와줄 건 없니?”
“결혼 쇼핑이라니, 벌써.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건 없어, 하지만.” 그녀는 주방용품 코너가 있는 위층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주방용 가위를 사려고 해.”
“주방용 가위라고?”
“응.”
“그런 걸 사러 일부러 나왔단 말이야?”
“좋은 걸로 사려고. 크고 단단하고, 은빛 나는 아주 좋은 걸로. 독일제나 스위스제로.”
그녀가 정말로 주방용 가위를 사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꽃무늬가 있는 에이프런이라든가 고기를 부드럽게 하는 도구라든가 욕실용 광택제 같은 것만큼이나 주방용 가위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단지 나는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백화점의 컬러판 광고지 속에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가 행복한 공주님 같은 표정으로 완벽하게 세트된 싱크대 사이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 여자의 뒤에 거울 같은 식탁 위에는 유리컵에 꽂혀 있는 주방용 가위가 보인다. 은빛 나고 단단하고, 아주 견고해 보였다. 어째서 시스템키친 광고에 그것이 거기에 놓여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 주방의 인테리어 효과 정도로 생각하고 연출되었을 것이다. 튤립꽃 한 송이를 꽂아놓듯이 말이다. 소영은 에스컬레이터 하단에서 그 광고지를 받고 타고 올라오면서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백화점에 오게 된 이유를 갑자기 생각해내고 대답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 사촌은 달랐다. 그녀는 정말로 커다란 쇼핑백을 몇 개씩이나 들고 있기도 하였다. 꾸러미 속에는 진짜 핑크색 욕실용 코튼 가운이 보이기도 하였다. “너 때문에 스테이크용 고기를 이 백화점에서 사는 걸로 바꾸었어”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섭 오빠가 결혼하게 되었다. 엄마가 단식투쟁까지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어. 엄마는 그 여자를 안 보겠단다. 엄마가 그러니까 그 여자도 덩달아 쌀쌀해지더라. 집안 분위기가 엉망이다.”
“왜 그렇게 이모는 그 여자를 싫어하는 거니, 혹시 집안이 아주 어렵거나, 교육을 못 받았거나, 그 여자 엄마가 무당이거나 하는 거니?”
“아니, 그런 것은 아냐.” 사촌과 나는 백화점 퇴근 후에 사람들로 물밀듯이 붐비는 시내의 거리를 걸으면서 구두 가게를 몇 군데 기웃거리다가 커피를 마시러 어느 빌딩의 라운지 카페로 들어와 있었다. 흐리고 날씨는 눈이 올 것처럼 추웠다. 비엔나커피의 휘핑크림 위에는 계피 가루가 뿌려져 있고 잔은 따뜻하였다.
“그 여자는 대학교수의 딸이고 일류 여대를 나왔어. 그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문제는 오빠의 무서운 변화였어.” 사촌의 입술에 비엔나커피의 크림이 묻었다.
“엄마는 섭 오빠가 무난하게 좋아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서 사랑을 하는, 그런 결혼을 원했던 거야. 인상이 좋고, 매니큐어는 연한 색을 쓰고 주말에는 남편을 위해서 요리를 하기 때문에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식의 그런 사랑. 하지만 그 여자는 섭 오빠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뒤흔들어놓았어. 오빠는 그 여자의 사소한 말 한마디, 무의미한 작은 몸짓 하나에 미친 사람처럼 정열적으로도 되었다가 끝도 없는 절망에도 빠졌다가 하였어. 아무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어. 언제나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 같기만 하던, 다정하고 부드럽던 그런 오빠가 아니었어. 그의 변화는 우리 모두를 당혹시켰어. 엄마는 가장 심한 배반감을 느꼈을 거야.”
나는 섭 오빠의 결혼 문제를 처음에 들었을 때 아마 그 여자가 야간 여상을 나오고 그녀의 어머니는 세 번쯤 결혼한 경력이 있는, 껌을 짝짝거리는 여자가 아닐까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섭 오빠를 너무나 좋아했어. 그건 너도 알지. 엄마가 느끼는 것은 질투라고 할 수 있겠지, 일종의. 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섭 오빠의 열정에는 어떤 비극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 그들은 아마 언젠가 헤어지게 될 거야. 엄마나 다른 가족들의 반대 때문은 아냐. 너무 지나친 관계가 그들을 괴롭힐 거야.”
섭 오빠의 결혼식에는 당연히, 나는 가지 않았다. 나중에 들었지만 그들은 사촌의 말대로 일 년을 살고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사촌은 내가 그 백화점을 그만두고서 다른 백화점으로 옮길 때까지 몇 번을 더 찾아왔었다. 직장을 옮긴 것은 더 좋은 보수라거나 매장 근무가 아니라는 점도 있었지만 어떤 스캔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젊은 유부남이었던 그 매니저와는 몇 번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의 아내가 직장까지 찾아오는 소동이 벌어지자 더이상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서 나는 이 년을 더 다니게 된다. 그곳은 비교적 근무 환경도 좋았고 또한 사소한 스캔들에는 관대한 편이었다. 이 년 동안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다가 어느 날 전화를 받게 되었다.
그날은 권태로 가득찬 수요일 아침이었다. 비가 온다거나 바람이 부는 날씨가 아니었다. 깊게 우울한 듯한 흐린 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고를 갓 졸업한 백화점의 엘리베이터 걸들이 아침의 구내식당에서 양상추 샐러드를 그릇에 담으면서 끈적끈적해지는 파운데이션과 녹아내리는 마스카라를 불평하고 있었다. 어느 남자가 옆에서 샤넬을 써보라고 권하고 있다. 방수 처리된 마스카라는 어때요, 하고 커피와 토스트를 먹던 또 한 명의 남자가 거들었다. 우울한 날은 쇼핑을 더 잘하는 법이야, 하고 누군가가 말하였다.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거든. 이건 훌륭한 기분 전환이지. 인도어 골프장에서 흐린 오후를 죽이는 것보다 더 좋아. 이 년 동안 별로 변한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엘리베이터 걸들의 핑크 재킷에 검은 플리츠스커트하며 직원들에게 디스카운트해주는 그녀들의 리리코스 향수 냄새와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조차도 조금도 변한 것이 없는 듯 생각되었다. 크레디트 상담실에 근무하던 나는 출근한 후에 수요일 자 조간신문을 뒤적이다가 커피를 끓여 마시고 옆 사람들의 잡담에 적당히 대꾸해주고 있었다.
“크레디트카드를 분실했는데요.” 걸려온 전화의 그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민등록번호는 62××××-×××××××, 이름은 김신오.”
“분실 장소는 어디입니까?”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파일함을 여는 단조로운 소리들이 사무실 안에 가득하였다. 이제 이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사무실이 금연 구역으로 묶인 것에 대하여 흡연자들은 복도에 모여 커피를 훌쩍이면서 불평하고 점심을 다이어트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서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들이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상냥하게 다시 물었다.
“분실 장소는 어디입니까?”
“구기동 유원지 앞에서 분실했습니다. 이틀 전 밤이었어요. 흐리고 아주 불쾌하게 더운 밤이었어요.”
화면에 빠르게 나타난 김신오의 인적 사항이 눈에 들어왔다. 직업은 자동차 정비공, 가족 사항은 부인 이경림과 아들 유노. 그는 옛날의 그 김신오가 맞았다. 훔친 세이블을 가지고 밤을 새워 아르바이트하는 여자친구를 데려가기 위해서 새벽을 기다리던 그 김신오. 그의 여자친구는 그가 부잣집 아들이고 자기에게 푹 빠져 있다고 굳게 믿던 모델 지망생이었다. 신오는 밤의 어둠 속에서 소영의 눈물을 읽고 포테이토칩과 맥주를 사러 나와 함께 긴 길을 걸어갔다. 나는 그와 전화를 하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던 소영의 죽음을 듣게 된다.
“오랜만이구나.” 그가 말한다.
“아직도 그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거니.”
“그때의 그 백화점이 아니야. 다른 백화점이지. 하지만 그 다르다는 것이 큰 의미는 없어.”
그는 웃었다.
“내가 아직도 정비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너에게 말했던가?”
“이미 알고 있어, 아들이 있다는 것도.”
“아아.” 그는 한숨처럼 그렇게 말했다.
“좋은 여자야, 그녀는. 일 년 전에 만나서 곧 임신하고 결혼했어.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고와. 그런데도 모델 같은 것은 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어.”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서 함께 웃었다. 그리고 그는 소영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일은 그의 중학교 동창들 사이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신문에 나거나 한 것도 아니니까. 한 달도 채 안 됐어. 아주 더운 날이었지. 불쾌지수가 그날 신문에 크게 났었지, 아마.”
나는 안다. 그는 지금 몹시 담배가 피우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라는 걸.
“손목이었어. 손목을 그었다니까. 그것도 주방용 가위로.”
“주방용 가위라고?”
“그래. 주방용 가위. 백화점에서 그날 오후에 새로 산 주방용 가위야. 몹시 단단하고 견고한 거였겠지, 은빛 나는 걸로.”
“그애는 가끔 전화를 걸어왔어. 만족스러워 보였어, 더이상의 다른 무언가는 없는 것 같았어.”
“그럴 수도 있어. 아닐 수도 있고. 그런 건 아무러면 어때. 중요한 것은,”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가위로 손목을 그었다는 거다, 이런 말이지.”
“그렇지. 이외의 것은 너무나 의미가 없어. 그녀의 남편은 그때 공항에서 돌아오는 중이었어. 지방에 출장 가 있었어.”
전화를 끊고 점심시간이 되어 구내식당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나오는 양상추 샐러드를 먹다 말고 문득 나는 주말의 어떤 약속이 떠올랐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잊어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