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N TO SAKASU
Copyright ⓒ 2019 by Nakagawa Yoshit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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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ublished by Yeamoon Archive Co., Ltd., 2019.
Original copyright ⓒ 2019 by Yeamoon Archive Co., Ltd.
일러두기
• 본문 중 괄호 안의 부연 설명은 모두 편집자주입니다.
• 본문에 등장하는 고대 로마 시대의 인명, 지명 등은 라틴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고 처음에만 알파벳으로 병기했습니다. 단, 교황의 이름은 가톨릭교회의 표기법을 적용했습니다. 그 밖의 외래어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랐습니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 한자 병기가 필요한 부분은 추가했습니다. 《성서》의 경우 공동번역 성서의 명칭으로 표기하고 개신교에서 통용되는 제목을 나란히 넣었습니다.
• 본문에 삽입한 도판 대부분은 출판권을 확보했지만 일부는 원저작권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저작권자와 연락이 닿는 대로 정당한 사용료를 지불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남아 있는 것들로 보는
사라진 로마
로마는 확실히 인류의 유산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유산의 상속자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네 번 이탈리아 출장을 다녀오면서 로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로마인의 후예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탈리아인들의 말과 태도에 놀랐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의 국수주의적 자부심의 재료로 소모되는 일 없이 지금까지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로마는 인류의 유산이 됐고, 이 책은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서 로마가 남긴 세계 유산의 증언을 다루고 있다.
로마를 이야기할 때면 꼭 로마 멸망 원인이 거론된다. 하지만 여전히 역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계속 그럴 것이다. 역사란 본래 그러니까. 지난 일이니까. 그런데 한 가지 고정관념은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으로 어떤 나라든지 융성의 정점을 찍고 나면 통치자와 국민들이 안이해지고 나태해져서 결국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는 생각 말이다. 마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처럼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로마도 그랬을까? 로마 멸망 원인이 대화 주제로 오를 때 항상 나오는 몇 가지 설(說)이 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같은 학계의 그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설’이다. 우선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부담 없이 회자되는 ‘목욕탕설’이다. 여기서 목욕탕은 ‘쾌락’의 대명사로 쓰인다. 로마인들이 너무나도 목욕을 좋아해서 결국 그들의 나태하고 향락적인 생활습관을 가속화시켰다는 얘기다. 혼욕 문화가 있던 로마 시대의 목욕은 아무래도 성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기 쉽고, 그것이 결국 문란한 성도덕으로 이어져 로마 전체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생각 말이다. 목욕을 몸에 붙은 때를 벗겨내는 청결 행위가 아닌, 일종의 관능적 쾌락 추구의 행위로 즐겼던 세태를 비판하는 관점이다.
다음은 이보다는 좀 더 과학적인 논리가 있어 보이는 주장인데, 다름 아닌 ‘납중독설’이다. 납중독이 인체에 미치는 치명적인 악영향은 상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수도 구축에 납관을 사용했고, 자연스럽게 납이 섞인 물을 마셨으며, 심지어 납으로 만든 분 등을 얼굴에 바르기도 했다. 그 결과 로마 남성들의 인체에 퍼진 납 성분이 불임을 유발해 로마 인구가 말기로 갈수록 격감했다는 논리다.
마지막으로 목욕탕설과 섞여서 흔히 회자되는 ‘극단적 타락설’이 있다. 로마가 급작스런 멸망을 초래하게 된 것은 로마 시민들의 지나친 사치와 방탕 그리고 난잡한 성생활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럴듯하긴 하지만 뭔가 엉성해 보이는 이런 설들은 여러 사료와 분석으로 그 개연성을 철저히 반박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고대 로마에는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로마가 멸망할 시점에 이르러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랬다. 로마는 태생이 그런 나라였다. 로마가 성립한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빵과 서커스’로 상징되는 문화는 지속됐다. 로마는 성적 욕망의 극단적 추구나 동성애, 변태 행각 등에 대해 오늘날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관대한 나라였다. 특히 귀족들의 향락주의는 대단해서, 매일 밤마다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그때까지 먹은 걸 토해내고 다시 먹고 마시는, 식도락과 성도락으로 점철되는 광란의 연회를 되풀이했다. 로마를 다루는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꼭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과장된 연출 같지만 대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만연된 쾌락주의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의 향락 추구는 이미 건국할 시점부터 당연한 생활습관으로서 받아들여졌으며, 오히려 로마제국의 쇠망기라고 할 수 있는 4세기 이후에는 그 방탕함도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되레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로마 국교가 된 이후 금욕주의가 급격히 로마인들에게 강요됐다. 이른바 폭군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저 유명한 네로 황제 때는 귀족은 물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하던 시대였는데도 당시 로마의 국력은 탄탄했다. 이렇게만 봐도 로마 멸망 원인을 무분별한 쾌락주의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멸망의 원인을 찾는 게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반대의 질문도 던져볼 수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로마의 쇠락은 제국의 거대한 규모가 가져온 자연스럽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은 부패를 촉진한다. 정복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파멸의 압력은 늘어난다. 흐르는 시간과 누적되는 사건들이 인위적인 지지대를 제거했을 때 제국이라는 비대한 구조물은 그 자체의 무게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로마를 로마이게 한 것은 무엇인가?”이다. 배울 만한 가치를 담고 있는 쪽은 이쪽이다. 일개 도시가 거대 제국으로 성장한 현상은 특별했던 역사적 사건을 넘어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서양의 직선적 역사관과 세계관은 인간에게 단 한 번의 기회만이 주어진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타자의 사례를 통해 번영과 멸망의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한 ‘나’에게 그것을 적용해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서양식 합리성이다.
반면 동양의 순환적 세계관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며 인간에게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전제한다. 달은 차면 기울고, 꽃의 붉음은 열흘을 가지 못하며, 와신상담은 졌다고 진 것이 아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며, 나아가 끝도 시작도 아예 없다고 한다. 다만 이런 유전(流轉) 속에서 그 연유와 인과를 밝혀 지금의 ‘나’는 그 같은 번잡함을 피하려는 것이 동양식 합리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읽힌 게 이해가 된다. 정서가 맞아서일까?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의 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객관적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주관적 관점이다. 분명히 역사가의 시선은 아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의 근거 없는 해석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역사가나 역사 애호가의 관점에서 로마를 바라보지 않는다. 저자 자신이 역사학자가 아닐뿐더러 본인의 시야를 벗어나는 주제는 일절 말도 꺼내지 않는다. 이 책은 엔지니어가 쓴 로마 이야기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로마의 유형 유산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다시 말해 ‘남아 있는 것들로 보는 사라진 로마’다. 저자는 일본 유수의 건설 기업 다이세이(大成) 건설 엔지니어 출신으로 현재는 대학 교수다. 토목 책임자로서 세계적 교각으로 평가받는 세토(瀬戸) 대교 등을 설계·시공한 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세토 대교는 일본 혼슈(本州) 지역과 시코쿠(四国) 지역을 이어주는 다리로, 5개 섬을 걸쳐 3개의 현수교(懸垂橋)와 2개의 사장교(斜張橋) 그리고 1개의 트러스교로 구성돼 있다. 교량부만 9,368미터이며, 고가부를 포함하면 길이가 13.1킬로미터로 철도·도로 병용교로서는 세계 최장이다. 사업비로 약 1조 1,338억 엔이 투입됐으며, 내진 설계가 되어 있어 리히터 규모 7 이상의 지진에도 견뎌낼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접목시켜 로마를 토목·건축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로마를 로마이게 한 요인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의 세계와 그것이 다시 복원된 역사 사이에서 유형의 증거를 찾아내고자 했다. 로마를 융성하게 만든 것들 가운데 하드웨어적으로는 수도와 가도, 원형 극장과 원형 경기장, 공공 욕장과 종교 시설 등의 형태가 남아 있다. 이 같은 유형의 유산과 우리에게 알려진 무형의 정보를 일치시키려는 작업이 바로 이 책이다.
물건이 그 사람을 말해주듯이 유산이 그 나라를 말해준다. 로마가 남긴, 지금은 세계 유산으로 보호되고 연구되는 수많은 건축물들. 방대한 지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도서관 유물, 그 시대의 문화 정보가 담겨 있는 공공 욕장과 원형 극장, 원형 경기장 유적,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것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려주는 수도와 가도 등 눈에 보이는 것들과 인문·역사적 지식을 일치시키기 위해 저자는 로마제국 영역에 오늘날까지 2,000년을 견디며 남아 있는 세계 유산의 증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우직한 작업을 계속해왔다.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을 통해 로마가 번영할 수 있었던 원인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다. 문서화·표준화와 같은 정보관리, 원천 기술의 개발과 전승 및 네트워크 구축과 같은 기술관리 측면에서 당시 로마가 이뤄낸 위업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러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런데 왜 암흑기라는 중세로 넘어갔을까?”라는 질문이 맴돌게 된다. 역사를 살펴보는 게 이래서 재미있다. “역사에서 만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숱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가정을 하게 된다.
“로마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저자는 만약 로마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실제 역사에서 르네상스와 근대 이후 인류가 접하게 될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발명이 얼마나 더 빠르게 실현됐을 것인지에 대한 합리적 추론을 전개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그렇다고 저자가 책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관철시키고자 애쓰는 것 같지는 않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고 떠벌리지도 않는다. 그저 엔지니어의 시각에서 바라본 고대 로마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로마 역사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걸맞은 텍스트는 아닐 수도 있다. 로마 역사에 관한 개괄적인 밑그림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롭게 읽힌다. 이른바 교양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 관심이 많다. 그럴 만하다.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기도 한데다 깊은 통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로마 역사에 관해 기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오랫동안 여러 질문을 품어온 교양인에게 제격이다. 지향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교양이 되는 앎을 나누고자 저자가 내미는 손이기도 하다.
속 깊고 주도면밀한 저자의 집필 의도를 곡해하고 섣불리 경박한 해석을 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역자이기 이전에 저자인 나카가와 요시타카 선생과 오랫동안 교류한 벗으로서, 그만의 진정성이 담겨 있는 이 세계 유산 속 보물찾기를 시작하기 전 독자 여러분께 약간의 힌트는 드리고 싶었다. 지루한 들여다봄과 감당하기 버거운 넓은 구역이 보물찾기 영역으로 제공되는 것은 세심한 관찰과 예기치 못한 발견이 주는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한 합목적의 수단이다. 중도에 포기하고 그늘을 찾는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끝까지 참여하면 마침내 성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면서 쓸데없는 노파심을 접는다.
아울러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된 원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 아니라, 저자가 애초에 한국에서의 출판을 목적으로 집필한 원고를 번역한 것이다. 즉, 오리지널 판권을 예문아카이브가 확보한 저작물이다. 그래서 옮긴이로서 이 책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출판권이 저자의 모국인 일본으로 역수출되는 모습도 기대해본다.
옮긴이 임해성
들어가며
로마인이라서 행복했던 시절
현대 사회는 번영과 포식이 보여주는 빛에 반해 도시로의 인구 집중과 지방 도시의 과소화, 3D 직종의 기피, 정치적 포퓰리즘(populism), 난민 문제, 종교적 갈등에 기인한 국가 분단 현상이라는 어두움이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고대 로마제국의 ‘번영과 쇠망’ 과정과 유사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 ‘데자뷰(deja-vu)’를 담아볼 생각이다. 기독교인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44)가 닦아놓은 대제국을 쇠퇴시키고 기독교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것이 나빴다는 뜻은 아니다. 로마의 번영 또한 기독교와 함께했다. 그 번영의 징표는 위대한 세계 유산으로서 남아 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27~기원후 14) 황제 때 처음 세워진 뒤 기원후 125년 경 푸블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Hadrianus, 재위 117~138) 황제에 의해 재건된 판테온(Pantheon)은 본래 다신교였던 로마의 모든 신을 모신 ‘만신전(萬神殿)’이었다. 그래서 현재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 부르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과 마찬가지로 파괴돼 성당 건축용 석재의 채석장이 될 뻔했다. 하지만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움 덕분에 609년 가톨릭 성당으로 바뀐다. 판테온은 내가 고대 로마에 평생의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약성서 마태오(마태)·마르코(마가)·루가(누가) 복음서에는 공통적으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특히 〈마태오의 복음서(마태복음)〉는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속주(屬州) 유대(Judea)에서 활동할 당시의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2장 1절의 내용에서처럼 유대인들에게는 기원전 73년 로마군에 포위돼 2년 동안 마사다(Masada, ‘요새’라는 뜻)에서 항전하다가 로마군의 총공세 전날 960명이 집단 자결했던 처절한 역사가 있다.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유대 민중의 욕구가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 용기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국방군의 입대식이 매년 이곳 정상에서 열린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힘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독립 추진파인 바리새인들로부터 “우리가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까?”라는 짓궂은 질문을 받는다. 세금을 내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 지배 체제를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신자들의 불신을 초래한다.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면 반역자로 간주돼 로마 당국에 고발될 수 있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좋은 질문이었다. 그때 예수는 세금으로 내는 금화를 가져오라면서 그 금화에 누구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 하고 말했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에서는 유명한 일화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속세의 것은 속세의 것에 따르라”, “신앙은 내면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약자나 강자나 자기 입맛대로 편하게 인용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석을 잘해야 한다.
나는 32년 동안 일본의 대형 건설사 토목 기술자로서 세토 대교, 아카시(明石) 해협 대교 등의 장대 교량 건설에 참여했다. 그리고 9년 동안은 대학 교수로서 매니지먼트를 교육하고 연구했다. 그동안 집필한 책으로는 《수도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水道が語る古代ローマ繁栄史)》《도로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交路からみる古代ローマ繁栄史)》《오락과 휴식으로 보는 고대 로마 번영사(娯楽と癒しからみた古代ローマ繁栄史)》 등이 있는데, 모두 로마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의아하게 여길 독자들을 위해 왜 내가 전문 분야도 아닌 ‘고대 로마 번영사’ 시리즈를 쓰게 됐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2004년 로마를 1주일 동안 찬찬히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그때 ‘판테온’ 실물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판테온은 서기 118년~128년경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재건한 만신전으로 안지름 43미터의 콘크리트 재질의 ‘돔(dome)’ 구조다. 오늘날의 테베레(Tevere) 강인 티베리스(Tiberis) 강 범람원, 즉 연약한 지반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철근 배근이 없는 초기 콘크리트 돔으로서는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San Pietro, 성 베드로) 대성당을 웃도는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 건축물이 1,900년 세월이 넘도록 긴 시간을, 더구나 지진이 빈번히 일어나는 이탈리아의 연약 지반 위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다.
돔의 기반은 두께 6미터의 콘크리트로 이뤄져 있고 정상부는 두께 1.5미터로 화산회를 사용한 경량 콘크리트다. 천장에는 지름 9미터의 거대한 눈, ‘오쿨루스(oculus)’라 부르는 둥근 창을 만들어 이를 통해 경량화를 실현했다. 또한 기초를 6미터로 깊게 파서 강고한 지반 위에 건축함으로써 구조 설계에 만반을 기했다. 구조의 멋스러움과 함께 오쿨루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다발이 돔 내벽의 회백색 격자무늬를 음영으로 부각시킨다. 나아가 돔을 지탱하는 30개의 기둥과 내벽의 색 대리석이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미묘한 빛깔의 농담(濃淡)을 연출한다.
로마 인근의 모든 고대 미술품에 관한 총책임자의 권한을 부여받았던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가 마지막 소원으로 훗날 자신이 누운 관을 판테온에 묻어달라고 요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판테온의 구조 설계와 미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가 경탄한 것은 그 건설 기술의 뛰어남이다. 콘크리트 돔은 콘크리트 전체가 한 몸이 아니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콘크리트는 타설 이음매가 많으면 많을수록 약해지는 법이다. 이 시대에 지금처럼 커다란 크레인이나 탄탄한 발판, 거푸집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믹서가 없어서 수작업으로 콘크리트를 반죽했을 테니 고품질이라고 할 수 없고 조금씩 타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1,900년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나는 대학에서 기계공학, 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세계 제일의 장대 현수교 아카시 해협 대교의 주탑(主塔) 기초 공사를 경험한 바 있어서 구조물의 설계 시공에 관해 매우 잘 알고 있다. 당시 주탑 공사는 깊은 수심에 급조류 그리고 국제 항로인 까닭에 늘 항해하는 선박들로 넘쳐나는 환경 속에서 진행된 세계 건설사상 유례가 없는 난공사였다. 그때 나는 공사 총책임을 맡았는데, ‘콘크리트 반죽 방법’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터라 콘크리트 지식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매니지먼트를 강의하고 연구한 경험 덕분에 건설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 데에도 자신이 있었다.
내 자랑으로 거만을 떨려는 게 아니라 당시만 해도 세상에서 내가 만들 수 없는 구조물은 없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판테온을 만나게 됐다. 순간 마음속에서 ‘너는 현대의 장비와 재료가 아닌 약 2,000년 전의 것들로 판테온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들려왔다. 나는 속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안 될 것 같다’고 대답했고 스스로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후 나는 천성적인 호기심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본격적으로 고대 로마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로마제국이 남긴 토목·건축 유산에 특히 관심이 갔다. 그래서 콜로세움(Colosseum)이나 카라칼라 욕장 등 멋진 로마 유적을 이탈리아는 물론 동쪽으로 터키, 서쪽으로 에스파냐, 남쪽으로 튀니지, 북쪽으로 스코틀랜드까지 당시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곳들을 샅샅이 둘러봤다. 그 결과물이 바로 ‘고대 로마 번영사’ 시리즈였다.
로마제국은 발군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영토의 넓이만 놓고 보면 대영제국의 3,370만 제곱킬로미터나 몽골제국의 3,300만 제곱킬로미터에 한참 못 미치는 500만 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346년, 몽골제국은 162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반면 로마는 제정 로마 시대만 따져도 500년, 지중해를 내해로 만든 카르타고(Carthago)와의 포에니(Poeni) 전쟁 종료 시점인 기원전 146년부터 따지면 무려 620년 동안 존속했다. 참고로 러시아제국(2,280만 제곱킬로미터)은 196년간 유지됐다.
고대 로마가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도 수도인 로마뿐 아니라 저 멀리 변방의 속주에서도 같은 수준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런데 왜 멸망한 것일까? 그리고 멸망 뒤에는 무엇을 남겼을까? 이 같은 관심이 계속해서 생겼다. 이 같은 의문을 풀어나가고자 한 노력이 이 책 《빵과 서커스》를 쓰게 된 동력이 됐다.
나는 이 책에서 로마제국의 역사를 그들이 남긴 성벽, 상·하수도, 가도(街道), 해도(海道), 공공 욕장, 원형 극장, 원형 경기장, 전차 경주장, 신전, 도서관과 같은 토목·건축 유산과 연결해 살피면서 다음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로마는 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대규모 시설을 지을 수 있었을까? 로마의 스승이라 불리던 그리스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1794)이 말한 것처럼 로마는 “세계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한 시대”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었을까? 또한 ‘빵과 서커스’, 이른바 포퓰리즘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나태해졌는데도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는 카이사르가 세운 로마의 시대다. 이후는 기독교의 시대가 된다. 동서로 제국이 분리된 이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을까? 더 어려운 상황이었던 동로마제국은 어떻게 1,000년을 더 존속할 수 있었을까? 서로마제국 멸망 후 왜 그 화려했던 문화와 과학 기술의 계승이 이뤄지지 않고 르네상스까지 약 1,000년 동안 중세의 암흑기를 보내야만 했을까? 현대로까지 이어진 로마 문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언제나 가장 궁금한 질문, 만약 476년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고대 로마는 다민족 국가로,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 왕정(王政) 로마가 건국된 뒤 기원전 509년 공화정(共和政), 기원전 27년 제정(帝政)이 시작됐다. 96년~180년 오현제(五賢帝) 시대에 현재의 유럽연합(EU) 432만 제곱킬로미터를 능가하는 50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확보했고, 395년 동과 서로 분열돼 476년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했다(이 책에서 로마라 함은 서로마를 일컫는 것이다). 제국 시대만 따져도 500년 넘게 유지됐으며,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만든 기원전 264년~146년 포에니 전쟁을 포함시키면 622년이나 지속한 장수 국가다.
바로 직전에서 언급했듯이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했던 대영제국(3,370만 제곱킬로미터)은 346년, 몽골제국(3,300만 제곱킬로미터)은 162년, 러시아제국(2,280만 제곱킬로미터)은 196년 동안 그 영토를 유지했다. 중국의 한족은 몽골을 무지몽매하다는 뜻의 ‘몽(蒙)’ 자를 써서 몽고(蒙古)라고 표기하며 애써 멸시했다. 그들의 생각이 옳지만은 않지만 어쨌건 역사에서 몽골제국은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한 대제국이긴 했으나 뛰어난 문명을 자랑하는 초대국(超大國)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들 제국을 경영한 황제나 국왕은 대부분 자신들 일족 출신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이탈리아 지역 출신들뿐 아니라 속주 출신자들도 많았다. 아버지가 노예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식이 황제가 된 사례도 두 번이나 있었다. 명저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의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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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최대 영토(117년)
“세계 역사상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대와 번영했던 시기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96년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재위 81~96) 황제의 죽음으로부터 180년 콤모두스(Commodus, 180~192) 황제 즉위 무렵까지의 시기를 꼽는다.”
인류의 행복과 번영의 관점에서 《로마제국 쇠망사》가 출간된 1788년까지 무려 1,300년 동안 로마제국을 넘어서는 나라는 서양 세계에 없었다는 얘기다. 행복한 시대에는 전란이 없을뿐더러 식량 걱정도 없이 오락과 문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 오락과 문화 시설이 생겨났다.
또한 행복한 시대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나태해진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아니마 사나 인 코르포레 사노, Anima Sana In Corpore Sano)”라는 어록으로 유명한 로마의 시인 유웨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 60~130)는 이렇게 탄식했다.
“시민들은 로마가 제정이 되면서 투표권이 사라지자 국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과거에는 정치와 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원천이었던 시민들이 이제는 오매불망 오직 두 가지만 기다린다. 빵과 서커스를.”
그는 포식과 오락만을 추구하는 로마의 쇠퇴가 멀지 않았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작성된 시점을 기원후 100년경으로 산정하더라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 무려 376년간이나 대제국은 유지됐다. 그러나 확실히 포식과 오락에 빠진 사람들은 힘들고 귀찮은 일을 싫어하게 된다. 점점 오락과 쾌락의 자극이 넘치는 도시로 모여드는 가운데 저출산, 지방의 과소화, 농업 생산 감소 문제가 발생했다. 그 결과 제국의 세수가 감소해 국력이 약해졌다.
이는 현대 국가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로마는 이런 문제들에 나름대로 대처하면서 370여 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종류의 문제를 고대 로마제국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쓴 목적 중 하나다.
많은 학자들은 375년에 발생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서로마제국의 결정적인 멸망 원인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로마 영토를 게르만족이 대규모로 침입한 것은 이미 기원전 2세기경부터 있어왔고, 4세기~5세기에 이동해온 이들은 최대 10여 만 명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로마제국 군단병의 수는 그 몇 배에 달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는 “훈련되지 않은 이민족을 상대로 훈련된 정규군을 이용하면 카이사르와 같은 대승을 거둘 수 있다”며 이민족 타도는 결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유게 토오루(弓削達)는 자신의 저서 《로마는 왜 멸망했는가(ローマはなぜ滅んだか)》에서 게르만족 대이동의 원인에 관해 “그들은 다만 위험하고 가혹하고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 문명이라는 과일을 맛보고 싶어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즉, 로마제국 안에서 평온하게 살고자 했을 뿐 로마제국을 멸망시킬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들에 대한 멸시와 공포 때문에 제국 내 거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그로 인한 전투가 이어지다가 476년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가 제국을 쪼개 자신의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호노리우스(Honorius)에게 나눠주면서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돼 아르카디우스(재위 395~408)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호노리우스(재위 395~423)는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이 시점의 영토 크기를 트라야누스(Traianus, 재위 98~117) 황제 때와 비교해보면 동로마제국의 영토 범위는 217년 파르티아(Parthia, 현재의 이란 북부 지역) 왕국에 패해 지금의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뺏겼고 270년경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다키아(Dacia, 지금의 루마니아) 지역을 처분했으므로 전성기 때의 8할 정도에 해당했다.
반면 서로마제국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동로마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을 자주 받아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일례로 제국을 4개로 분할해(사두정치)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황제는 스스로 동방의 ‘정제(正帝, Augustus)’가 되어 니코메디아(터키·이즈미트)에 거점을 마련했다. 동쪽이 더 위중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도 서로마제국이 불과 81년 뒤에 먼저 멸망했고 동로마제국은 오스만 튀르크(Osman Turk)가 침입해온 1453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럽은 약 1,000년 동안 이른바 ‘암흑의 중세’를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라는 이름은 신성로마제국과 루마니아의 국명으로 이어졌다. 오늘날에도 로마는 ‘로맨스(romance)’, ‘로맨틱(romantic)’ 등 여러 용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세계 유산(World Heritage)’이란 1972년 제17회 유네스코(UNESCO) 총회에서 ‘세계 문화 유산 및 자연 유산 보호 협약’에 의거 등록된 유형 유산을 말하는데, “유적, 경관, 자연 등 인류가 공유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가진 것 가운데 이동이 불가능한 부동산과 그에 준하는 것”으로 정의되며, 건축물이나 유적 등의 ‘문화 유산’, 지형과 생물 다양성 및 경관미 등을 갖춘 지역의 ‘자연 유산’, 문화와 자연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복합 유산’이라는 3개 분야로 분류되고 있다.
2016년 기준으로 세계 유산의 총수는 1,052건인데, 그중 문화 유산은 814건이고 자연 유산은 203건이며 복합 유산은 35건이다. 다음의 표와 같이 이탈리아가 가장 많은 51건이고, 다음이 중국(50건), 에스파냐(45건), 프랑스(42건), 독일(41건) 등으로 주로 유럽에 편중돼 있다.
아직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요르단의 제라시(Jerash) 유적처럼 수많은 신전, 개선문, 원형 극장, 전차 경주장 등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곳도 많다. 그렇지만 제라시가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은 이유는 유지·관리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독일 쾰른에는 1248년에 건설이 시작돼 1880년에 완성된 쾰른 대성당(Köln Cathedral)이 세계 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쾰른은 고대 로마의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레(Germania Inferiore) 속주의 주도였기에 대성당 말고도 고대 로마 시대의 상·하수도 시설이 남아 있지만 그것들은 아직 세계 유산에 등록되지 못했다. 그래서 등록의 형평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고대 로마에 관한 세계 유산은 약 2,000년의 풍상을 견디고 살아남은 구축물과 복구물, 재사용된 것, 건축재로의 활용이나 채석장으로 전락한 인위적 파괴 그리고 자연재해를 면한 것들이다. 고대 로마는 현재의 유럽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중동도 지배했다. 그래서 고대 로마와 관계가 있는 세계 유산 66건은 표에서와 같이 수많은 나라에 산재해 있다.
66건 중 많은 순서대로 정렬하면 이탈리아, 에스파냐, 터키, 이스라엘, 프랑스, 튀니지 등으로 로마제국 영토에 골고루 분포한다. 또한 이 표에서 구조물 수가 많은 도시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로마와 폼페이(Pompeii)와 윌라 아드리아나(Villa Adriana), 프랑스의 아를(Arles), 에스파냐의 메리다(Merida), 독일의 트리어(Trier)와 필리포이(Filippoi),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과 베르가마(Bergama)와 에페수스(Ephesus),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 요르단의 페트라(Petra), 튀니지의 카르타고와 두가(Dougga),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Leptis Magna)와 사브라타(Sabratha)와 키레네(Cyrene), 알제리의 제밀라(Djemila)와 티파사(Tipasa)와 팀가드(Timgad), 모로코의 볼루빌리스(Volubilis)다.
그런데 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상황에 따라 오히려 번영에서 소외된 터키와 아프리카에 세계 유산에 해당하는 로마의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상황’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다.
우선 먼저 ‘멸망’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던 전성기 로마를 상징하는 세계 유산을 중심으로 로마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도시는 문명이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 1731~1800)는 “신은 시골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지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로 산업화를 이룩한 영국이 1820년에 100만 명이 넘는 최초의 근대 산업도시를 선보인 이래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는 전세계를 통틀어 1900년에도 11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마는 2,000년 전에 인구 100만의 대도시를 운영하고 유지했다. 이제 그 원천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고대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물이 풍부하지 않으면 도시는 성립하지 않는다. 고대 로마는 도시의 물 수요를 채우기 위해 많은 수도를 부설했다. 외부의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만들어진 성곽 도시는 높은 장벽이 필수였고 인구가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상수도의 정비가 필요해졌다. 흑사병 등의 전염병을 막기 위해 위생적인 배설물 처리가 과제가 되었으므로 하수도 정비도 불가결해졌다. 이 장에서는 세계 유산으로 남아 있는 로마제국의 성곽 도시와 장벽, 수도 로마와 카르타고 등의 상·하수도 시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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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시 공방전을 묘사한 부조(영국 박물관 소장)
민족과 국가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 유럽에는 성곽 도시가 많았고 이민족의 대규모 침입을 막거나 제국의 영역을 명시하기 위해 장성(長城)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때의 장성이란 폐쇄만을 목적으로 한 차벽이 아니어서 도시 간 상거래를 위해 상인들의 통행도 가능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해 공성전에서 패하게 되면 도시 거주민들은 모두 참살되거나 노예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농성해 수성을 하려면 높고 튼튼한 성벽과 우수한 수비 병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성곽과 장성을 공격하기 위한 공성탑(攻城塔)은 고대 문명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아시리아(Assyria)에서 개발됐다. 위 사진은 기원전 701년 신(新)아시리아 센나케리브(Sennacherib, 재위 기원전 705?~681) 왕이 유대의 두 번째 도시인 라키시(Lachish) 시가지를 공격하던 당시의 공성탑 부조다. 공성탑은 경사로를 쌓고 올라가 성벽을 파성추(破城槌)로 파괴하는 무기다. 센나케리브 왕은 적대자들의 생가죽을 벗기거나 꼬챙이에 꿰어 거리에 효수했다. 이 공성탑의 모형은 로마 문명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항복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농성하기로 결심하고 성문을 열지 않았다면 점령당한 뒤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항복도 하기 싫고 점령당하기도 싫다면 반드시 도시를 방어해낼 수 있는 강성한 성벽과 수비병이 필수였다. 일반적으로 수비병은 곧 도시의 주민이었다. 역사에 남아 있는 도시 포위전의 비참한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물론 기록의 숫자는 아마도 과장됐을 것이다.
우선 페니키아(Phœnicia)의 티루스(Tyrus) 포위전을 들 수 있다. 고대 로마제국의 정치가이자 저술가 루키우스 플라위우스 아리아노스(Lucius Flavius Arrianos, 90~175)가 남긴 《알렉산드로스 대왕 원정기(Arriani de Expedit, Alex. Magni Historiarum)》에 따르면 기원전 332년 해상 요새 도시 티루스(지금의 레바논 티레 지역)가 성문을 열지 않고 저항하자,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군이 7개월에 걸쳐 최대 수심 5미터의 바다에 길이 700미터, 폭 59미터의 제방을 쌓았다. 그런 뒤 2기의 공성탑으로 해발 44미터의 성벽을 공략해 점령했다. 수비병 4만 명 중 1만 명을 살육하고 3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
다음은 기원전 149년~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카르타고 포위전이다. 3년 동안 로마군이 포위 공격 끝에 함락했고 카르타고를 불살랐다. 당시 카르타고 수비병은 9만 명이었고 시민은 21만 명이었다. 이들 중 사상자가 무려 25만 명에 달했다. 5만 명은 노예가 됐다.
아와리쿰(Avaricum) 포위전도 빼놓을 수 없다. 아와리쿰은 현재의 프랑스 부르주(Bourges) 지역을 일컫는 곳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를 보면 기원전 52년 로마군의 공격에 갈리아군 1만 명과 시민 4만 명이 6개월 동안 농성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시민 800명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대의 마사다 포위전이 있었다. 1세기 유대계 로마 정치가이자 역사가 플라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100)가 기록한 《유대 전쟁사(The Wars of the Jews)》에 따르면 서기 73년 이스라엘 마사다에서 유대인 967명이 농성전에 들어갔다.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마사다로 피신한 이들은 로마군의 공격을 3년 동안이나 견뎌냈지만, 결국 식량이 떨어진데다 로마군의 총공격 하루 전 노예가 될 것이 두려워 960명이 집단 자결(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하고 7명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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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 유적(이스라엘)
일반적으로 튼튼한 성곽 도시에서는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예컨대 수도 로마는 성벽 내 면적이 14제곱킬로미터였고 최대로 번성할 때에는 100만 명이 생활했다. 인구 밀도를 따져보면 2015년 기준 면적 605제곱킬로미터에 인구 990만 명의 서울보다 약 4배가 많았다. 폐쇄적인 초과밀 도시를 건설하고 운영하자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비가 필요했다.
첫째, 전쟁 그리고 인재에 의한 대형 화재의 위험에 대비해 도시를 불연화(不燃化)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64년 로마 대화재에서는 로마 시 14개 구 가운데 3분의 2에 해당하는 10개 구가 불에 탔다. 그중 3개 구는 잿더미로 변했고, 7개 구는 무너진 가옥의 잔해만 약간 남았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네로(Nero, 재위 54~68) 황제는 로마를 재건할 때 석조 건물 건축을 강요했다.
둘째, 불결한 상·하수에 의한 전염병을 막고자 깨끗한 물을 대량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 했고, 수세식 화장실과 하수도 등이 필요했다. 또한 상·하수도를 지하화하지 않으면 안 됐는데, 성곽 도시 내 교통 혼잡의 요인이 됐기 때문이다.
셋째, 생활 효율을 위해 고층 주택과 포장도로가 필요했다.
넷째, 폐쇄 공간 내 거주자들의 불평불만을 해소하려면 오락거리를 제공해야 했다.
다섯째, 성곽을 만들려면 고도의 건설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수도 로마의 성벽은 석재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경우 벽돌과 점토를 이용해 쌓은 판축(版築) 구조다.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고대 로마의 12곳 성벽을 살펴보자. 참고로 한국의 성벽 가운데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18세기 조선 시대 때 건립된 화성(華城)과 13~17세기를 거쳐 완성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들 수 있다. 화성은 길이 5.7킬로미터에 높이 4~6미터이며, 그 위에 높이 1.2미터의 난간이 있다. 남한산성은 길이 12킬로미터에 높이 7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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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선 영역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의 빨강선은 기존의 세르위우스 성벽
다시 로마제국으로 돌아와 오늘날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세르위우스(Servius) 성벽과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성벽부터 살펴보자. 로마 시는 고대 로마 세계의 중심 도시다. 역사에서 보듯이 수많은 이민족이 침입을 되풀이한 곳이다. 이를 막고자 세르위우스 성벽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 만들어졌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이름대로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 황제 때 건립된 것으로 383개의 탑과 7,020개의 흉벽 요철, 18개의 대문, 5개의 통문, 116개의 공공 화장실, 2,066개의 커다란 창문을 갖춘 탄탄한 성벽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에서 ‘레스티투토르 오르비스(Restitutor Orbis, 세계를 재건한 자)’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뛰어난 군주로, 분열됐던 제국을 재통일하거나 침략을 거듭하는 이민족을 물리쳤다.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건설을 시작했다. 다만 그가 재위 5년 만에 서거했기 때문에 다음 황제인 프로부스(Probus, 재위 276~282) 시대에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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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아누스 성벽(부분)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침입했다. 7개월간 점령과 약탈이 이어지자 로마는 450킬로그램의 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갈리아인들을 철수시킨다. 기원전 211년에는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Hannibal)이 로마 성벽에 대한 위력 정찰을 실시한다. 기원전 46년에는 카이사르가 로마 시를 확장하기 위해 세르위우스 성벽을 철거한다. 서기 271년~275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수도 로마 방위를 위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건설한다.
408년에는 서고트족 알라리크(Alaric, 재위 395∼410) 왕이 약 3만 명의 군대를 몰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봉쇄해 로마 시를 오고가는 모든 물자를 차단하자 결국 로마는 금 1.9톤과 은 1.1톤, 인도산 향료 1.1톤 등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물러가기를 요청했다. 4개월 전 알라리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여기며 두려워하던 로마군 총사령관 플라위우스 스틸리코(Flavius Stilicho, 365?~408)를 호노리우스(Honorius, 재위 393∼423) 황제가 반역죄로 사형시킨 바 있었다. 알라리크는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로마를 공격한 것이었다.
410년 알라리크군 10만 명이 또 다시 로마를 침략했다. 내통자가 있어 아무런 저항 없이 살라리아(Salaria) 문을 통해 로마 시를 점령하고 사흘 동안 약탈했다. 이때 호노리우스 황제의 여동생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 390~450)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455년 5월에 이르러서는 반달족(Vandals)의 왕 가이세리크(Gaiseric, 재위 428~477)가 로마 침공을 위해 함대를 파견한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us III, 재위 425∼455)를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재위 455)는 전쟁을 피해 도망치다가 성난 군중에 의해 살해된다. 반달족은 6월 로마에 도착해 봉쇄에 들어갔다. 당시 교황 레오 1세(Leo I, 재임 440~461)가 항복하는 조건으로 가이세리크 왕에게 로마에 대한 약탈과 살상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가이세리크가 이를 수락하자 로마는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가이세리크는 입성 후 그 약속을 깨버렸다. 2주 동안의 약탈이 계속됐고, 수많은 로마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이 사건 이후 파괴적이고 야만적 행위를 의미하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로마에는 튼튼한 성벽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