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jkim139@its.jnj.co.kr)
한국 얀센 홍보이사. 한국일보와 매일경제에서 20년 동안 기자로 일했다.
2000년 미국 UNC에서 커뮤니케이션 석사를 취득했으며 학부 전공은 고고미술사학이다.
저서로는 『너의 꿈 지금부터 시작이야』 『헬로 키티 성공 신화』 『이상의 시대 반항의 음악-60년대 미국 음악과 사회』 등이 있고, 공저로는 『제임스 카메론-상상하라 도전하라 소통하라』가 있다.
<< 나는 이 책을
월트 디즈니는 어릴 적부터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TV, 책, 인형 그리고 고2 때 처음 가본 디즈니랜드까지. 하지만 대학 이후 월트 디즈니는 늘 비판의 대상이었다. 월트 디즈니에 대한 광범위한 소비와 과도한 비판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생각과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많을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나 디즈니랜드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기획자이자 제작자로서 월트 디즈니의 인생을 정리분석한 책이다. 미키 마우스와 백설공주, TV와 놀이공원 디즈니랜드를 중심으로 그의 대표작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성공했는지를 밝혀 보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꿈과 도전, 의지와 열정이라는 월트 디즈니의 특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살펴보았다.
<<< 관심사와 연구 계획은
월트 디즈니 외에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 각 분야별로 큰 성과를 거둔 기획, 제작자들을 다뤄보고 싶다. 흔히 작품과 스타로만 기억되기 쉬운 엔터테인먼트가 어떻게 기획되고 팔리는 건지, 대박 작품들의 성공비결은 무엇인지 분석함으로써 문화 콘텐츠와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에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원칙과 방식을 제시해 보았으면 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어린아이를 기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디즈니 없이 아이를 키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기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디즈니 캐릭터에 둘러싸여 지낸다. 아기 곰 '푸'와 꼬마 돼지 '피글렛'이 그려진 기저귀를 차는 것부터 시작해서 푸와 친구들이 그려진 그릇과 컵으로 이유식을 먹는다. 걷기 시작하면 '미키 마우스' 신발을 신고 미키의 여자친구 '미니 마우스' 배낭을 멘다. 이 무렵 엄마들이 아기들에게 즐겨 보여 주는 DVD <베이비 아인슈타인> 시리즈도 디즈니의 작품이다.
그림책을 볼 나이가 되면 『백설공주』 『피터 팬』 『피노키오』 『밤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같은 디즈니의 고전 만화 한두 편은 필독서요, 필수품이 된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에는 '신데렐라'가 그려 있고 남자아이들이 가장 먼저 가지고 싶어 하는 로봇 '버즈' 역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의 캐릭터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해 만화영화를 볼 줄 알면 방학마다 <니모를 찾아서>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을 찾는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플로리다,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홍콩으로 가족여행을 간다면 디즈니랜드는 반드시 들려야 하는 관광코스이다. 중ㆍ고등학생, 심지어 대학생이 돼서도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티셔츠나 야구 모자를 쓰고, MP3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이들이 경험하는 이런 '디즈니 세례'는 디즈니의 나라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그 아이들이 어른이 돼 다시 아이를 낳으면 그대로 반복된다. 어릴 적, 미키 마우스를 가지고 놀았던 부모는 자연스레 자신의 아이에게 미키 마우스를 사 준다.
미키 마우스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것이 80년 전인 1928년이다. 미키 마우스 캐릭터 사업이 본격화한 1930년 즈음 미키 마우스 인형을 가졌던 소녀라면 그의 증손자가 미키 마우스 이불을 덮고 자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월이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1937년, <신데렐라>는 1950년에 만들어졌고 영국 작가 앨런 밀른(Alan Alexander Milne, 1882~1956)의 동화 『위니 더 푸』가 디즈니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은 1961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캐릭터와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 디즈니의 캐릭터들은 유독 장수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디즈니의 캐릭터는 영화ㆍTVㆍ비디오ㆍ그림책ㆍ놀이공원 등 각종 상품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받는다. 20세기 초반 디즈니는 이미 문화콘텐츠의 위력과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
디즈니 제국의 막강한 힘은 경제수치로도 입증된다. 아이들이 사는 디즈니 캐릭터 상품이나 영화표 자체의 가격은 그다지 비싸다고 할 수 없지만 전 세계에서 세대를 거듭해 팔려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디즈니가 창출하는 경제 규모와 파워는 어마어마하다.
2004년 미국 경제잡지「포브스」가 전 세계 10대 수익 캐릭터를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미키 마우스, 구피 등 디즈니의 오리지널 캐릭터가 58억 달러로 1위였다. 56억 달러로 2위를 차치한 캐릭터도 앨런 밀른의 오리지널을 포함한 '위니 더 푸'였다. 디즈니의 '푸 그림책'만 해도 이제까지 전 세계에서 2,000만 권이 넘게 팔렸다. 블룸버그 통신에 의하면 푸의 브랜드 가치는 150억 달러로 삼성(127억 달러)보다 훨씬 높다.
하지만 푸는 디즈니의 수많은 사업 영역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디즈니의 사업 영역은 실로 방대하다. 2008년 기준으로 디즈니(정식 명칭은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크게 4개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는 보통 사람들이 디즈니와 관련짓지 못할 회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디즈니의 심장부는 디즈니 스튜디오이다. '미키 마우스' 시리즈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비롯한 수많은 디즈니 만화영화와 <메리 포핀스> 같은 실사영화를 제작한다. 디즈니 스튜디오는 다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디즈니툰 스튜디오', 2006년 인수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 그리고 2007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등과 손잡고 설립한 '이미지무버스 디지털'로 나뉜다. 각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월트 디즈니 픽처스와 터치스톤 픽처스, 미라맥스 필름 등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배급되고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인터내셔널이 전 세계 배급을 담당한다. 비디오는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홈 엔터테인먼트 등을 통해 별도로 배급된다. 영화 외에도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아이스 쇼 등을 제작하는 '디즈니 씨어트리칼 프로덕션'과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음반을 제작하는 '월트 디즈니 레코드', '할리우드 레코드', '리릭 스트리트 레코드'도 모두 디즈니 스튜디오 산하에 소속돼 있다.
스튜디오와 더불어 디즈니의 양대 축인 놀이공원 부문은 1955년 개장한 캘리포니아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를 필두로 플로리다 올랜도의 '월트 디즈니 월드', 일본의 '도쿄 디즈니랜드', 프랑스의 '유로 디즈니(나중에 디즈니랜드 파리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홍콩의 '홍콩 디즈니랜드' 5개의 놀이공원이 '꿈이 이루어지는 곳(Where Dreams Come True)'라는 구호 아래 성업 중이다. 디즈니랜드와 월트 디즈니 월드만 해도 미국 놀이 공원 상위 40개 입장객의 35퍼센트를 점유하고 있을 정도다. 또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배로 바다를 여행하는 '디즈니 크루즈 라인', 총 10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 8개의 '디즈니 베케이션 클럽', 여행사 '어드벤처스 바이 디즈니'도 운영하고 있다.
수천 가지 디즈니 캐릭터 상품은 '디즈니 컨슈머 프로덕트'에서 책임진다. 1930년 미키 마우스가 그려진 어린이용 칠판을 시작으로 지금은 장난감과 옷, 음식, 인테리어 소품과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종류별로 자회사가 구별돼 있다. 또 '디즈니 라이브러리', '하이페리온 북스 포 칠드런', '점프 엣 더 선', '디즈니 프레스', '디즈니 에디션' 등에서 각종 어린이 책과 잡지를 출판하고 있으며 디즈니 퍼블리싱 월드와이드가 전 세계 75개국에 출판 배급을 맡고 있다. 게임기를 제작ㆍ개발하는 '디즈니 인터랙티브 스튜디오'와 온라인 쇼핑몰 '디즈니쇼핑닷컴', 그리고 유럽의 '디즈니 스토어'도 이곳에서 관할한다(미국과 일본의 디즈니 스토어는 라이선스 계약으로 운영된다).
제일 늦게 출범한 분야이지만 성장세가 가장 가파른 부문은 방송과 인터넷을 아우르는 미디어 네트워크이다. 미국의 3대 공중파 방송사 중 하나인 'ABC'를 비롯해 어린이 전문 방송 '디즈니 채널', 'ABC 패밀리', 'SOAPnet' 등의 채널과 '스테이지9 디지털 미디어' 등 제작사, 그리고 '라디오 디즈니 네트워크'가 여기에 속한다. 또 ABC가 80퍼센트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스포츠 전문 방송 'ESPN'도 디즈니 미디어 그룹의 일원이다. ESPN 역시 산하에 여러 개의 케이블 채널과 라디오, 인터넷과 모바일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과 모바일을 총괄하는 '월트 디즈니 인터넷 그룹'이 있다.
한마디로 디즈니는 만화ㆍ영화ㆍ캐릭터ㆍ출판ㆍ음반ㆍ놀이공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오락 분야의 콘텐츠를 제작ㆍ배급하는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그룹이며 나라와 인종ㆍ성별ㆍ나이에 관계없이 전 세계 인구를 고객으로 하는 몇 안 되는 기업이기도 하다. 브랜드 인지도로 따지면 다른 미디어 그룹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 브랜드'가 선정한 2008년 글로벌 100대 브랜드 중 디즈니는 292억 5,100만 달러로 9위에 올랐다. 베스트 10개 브랜드 중 코카콜라나 마이크로소프트, 맥도널드, 구글이 그러하듯 디즈니는 상상력과 동심이라는 긍정적인 것에서부터 현실왜곡, 무차별적 소비,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라는 부정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실제로 '디즈니화'라는 뜻의 'Disneyfication' 혹은 'Disneyization'은 미국의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즐겨 쓰는 용어이다.
이 어마어마한 일은 단 한 사람, 월트 디즈니로부터 시작됐다.
꿈은 이루어진다 - 미키 마우스
월트 디즈니가 만화영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미래를 결정하기에 아직 어린 나이였다. 더구나 애니메이터는 당시 막 생겨난 불안정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월트 디즈니에게 만화영화는 어릴 적 꿈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1901년 시카고에서 엘리아스와 플로라 디즈니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난 월트 디즈니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으로도 풍족하지 못했고 지나치게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여유가 없었다. 10세부터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문지국에서 배달 일에 매달려야 했다. 자연히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도 함께 신문을 배달하는 여덟 살 터울의 바로 위의 형 '로이 디즈니'였다.
그림 그리기는 그런 월트 디즈니에게 유일한 즐거움이자 성취감의 대상이었다. 연필을 잡기 시작한 나이부터 그림에 푹 빠진 월트 디즈니는 이후 자나 깨나 그림을 그려 댔다. 다른 것에는 별다른 소질도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1916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교지 만화가로서 그림을 그렸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적십자 운전병으로 참전했을 때도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ㆍ만화ㆍ캐리커처 등을 그렸다.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올 때 그의 장래 희망은 화가,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풍자 만화가로 굳어져 있었다.
신문에 연재만화를 그리고 싶었던 월트 디즈니는 캔자스시티에서 광고용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에 취직하면서 애니메이터로 인생의 항로를 변경했다. 애니메이션은 월트 디즈니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그림 그리는 것만큼이나 기계 만지기를 좋아했던 월트 디즈니는 후일 "필름 상에서 사물을 움직이도록 만들어 주는 기술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월트 디즈니는 애니메이션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생겨난 애니메이션은 아직 체계적인 교육기관도, 전문서적도 없었다. 그는 미술학원에서 야간 강좌를 들었고 집 뒷마당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회사에서 빌린 카메라로 밤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궁리와 실험을 거듭했다. 회사 일은 좋은 실습거리였다.
월트 디즈니는 이때부터 자신의 꿈에 대해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확신했다. 스스로에게뿐 아니라 상대방이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믿게 만드는 데도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또 한 가지에 빠지면 죽자 사자 매달리는 성격이라 웬만한 장애나 시련에는 뜻을 꺾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애니메이션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1921년 월트 디즈니는 1분짜리 풍자 만화영화 <래프-오-그램>을 완성했다. 그리고 부지런히 발품을 판 끝에 캔자스시티의 가장 큰 극장인 뉴먼 극장에 자신의 첫 작품을 걸었다. 월트 디즈니는 곧바로 대여섯 명의 또래 애니메이터들을 모아 6~7분에 달하는 애니메이션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고전 동화를 만화로 만든 이 프로젝트는 '래플릿'이라고 불렸다. 이듬해에는 아예 회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