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테레사 메디로우즈
옮긴이/석태진
펴낸이/양장목
펴낸곳/현대문화센타
주소/서울시 은평구 대조동 191-1(122-030)
전화/384-0690~1 팩스/384-0692
E-mail/HDbook@netsgo.com 천리안 ID/hdpub
Homepage : http://HDbook.co.kr
출판등록일/1992년 11월 19일(제3-448호)
초판 1쇄 인쇄일/2001년 2월 12일
초판 1쇄 발행일/2001년 2월 16일
ISBN 89 - 7428 - 158 - 9
[전자책 제작 - (주)한국이퍼브]
Breath of Magic
by Teresa Medeiros
Copyright ⓒ 1996 by Teresa Medeiros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01 by Hyundae Moonhwa Center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Jane Rotrosen Agency
Through Eric Yang Agency, Seoul, Korea.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에릭양 에이전시를 통해
Jane Rotrosen Agency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한국어 판권을 ‘현대문화센타’가 소유합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레넉스 타워 빌딩 옥상에 자리잡은 저 120평짜리 펜트하우스를 언론매체들이 요새라고 이름 붙인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이클 카퍼필드는 이미 세 번째로 옮겨 탄 엘리베이터의 숫자 판에 자신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95층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하는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열렸고, 탑승한 카퍼필드는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야경을 즐기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목적하는 층까지 다다랐다. 베이지 색조의 양탄자가 푹신하게 깔려 있는 입구를 지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게, 열려 있으니까.」
크롬제 책상 위에 다음날 아침 조간으로 나올 타임즈지를 철썩 던져놓은 카퍼필드는 손가락으로 헤드라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지금 막 시카고에서 돌아와서 봤는데, 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인 거야?」
카퍼필드의 물음에, 차가워 보이는 트리스턴의 회색 눈동자가 컴퓨터의 깜빡거리는 커서를 떠나 구겨져 있는 신문을 흘끗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뭐 대단한 설명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래. 줄곧 내 홍보 담당자였으면서, 아직 읽기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거야?」
카퍼필드는 지난 25년간을 친구로, 그리고 그 중에서 최근의 7년간은 자신의 고용주라는 관계로 지내오고 있는 그를 잠깐 돌아보고 나서 다시 신문을 들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행간(行間)까지라도 좍 꿰어낼 수는 있지. 그래 어디 좀 보자구. ‘레넉스 엔터프라이즈의 창립자이자 최대 주주이기도 한 트리스턴 레넉스 회장은,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마법의 존재를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사람에게 1백만 달러의 상금을 걸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마법 경연대회는 아침에 레넉스 타워 빌딩 정원에서 열릴 예정이며, 이 별난 소년 억만장자는 진지한 참가자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카퍼필드는 마치 눈앞에 있는 고용주의 모가지를 대신하겠다는 듯이 신문을 꽉 움켜쥐더니 사정없이 비틀어버렸다.
「진지한 참가자들이라구? 이런 제길, 보나마나 내일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각종 사기꾼과 얼간이들이 잔뜩 몰려들겠구만 그래.」
「하기는 그 삐딱한 놈들 중 하나는 벌써 연락이 왔더라구. 그래서 자네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지, 뭐.」
「어떻게 해서든지 자네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조금이라도 더 불러일으켜 보려고 내가 손가락에 불이 나도록 팩스를 쳐대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자네?」
항상 조는 듯이 보이는 트리스턴의 눈가에 익살스러운 표정이 잠깐 스쳤다.
「그나저나 말이지, 만일 자네가 언론에서 나를 ‘소년 억만장자’라고 부르는 것만 막아준다면 내가 만 달러를 주겠네. 정말이지 그 소리만 들으면 돌아버리겠다니까. 아무려면 내 나이가 벌써 서른 둘이나 되었는데 ‘소년’이라니, 도대체 가당키나 하냐구.」
트리스턴의 변덕스러운 관심이 팩스로 향하자, 표시등의 희미하고 푸르스름한 빛이 불룩 솟은 그의 광대뼈 밑의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부분을 더욱 강조하는 듯했다. 전체적으로 무뚝뚝해 보이는 그의 표정이 한결 더 오싹하게 보이며, 마치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반사되고 있었다. 익숙하게 버튼을 눌러대며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소프트웨어 복합기업체 부서 전반에 지시사항들을 입력하는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카퍼필드는 윤기가 자르르한 자신의 포니 테일(pony tail, 뒤로 땋아 드리우는 머리)을 마구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식의 광대놀음 같은 짓을 계속해댈 셈이야? 자네 신용도가 바닥을 기게 될 때까지? 아니면 뉴욕 사람들 모두가 자네 등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어댈 때까지?」
「그야, 내가 찾고 있는 걸 발견할 때까지겠지.」
「대체 그게 뭔데 그래? 사람이야?」
지난 십여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트리스턴은 카퍼필드의 질문을 무시해버리고, 콘솔의 통합스위치를 눌러 팩스와 컴퓨터를 한꺼번에 끈 후 회전의자에서 일어섰다.
트리스턴이 북쪽에 면한 벽으로 다가서자 벽의 한 귀퉁이가 스르르 열리더니, 카퍼필드의 아파트보다도 족히 두 배는 더 넓어 보이는 초대형 옷장이 그 속내를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동굴처럼 둥근 천장에 부착되어 있는 조명등에 차례로 불이 밝혀졌다. 멀리 떨어진 채로 소리를 지르며 얘기를 계속한다면 메아리라도 칠 것 같은 의구심이 들어, 카퍼필드는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채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듯 보였다.
트리스턴이 한쪽에 놓여 있는 넥타이 걸이를 자동으로 회전시키고 나자, 카퍼필드가 호흡을 고르며 말을 꺼냈다.
「사람들이 붐벼대는 장소에 있게 될 때, 자넨 좀 신중을 기울여야 하네.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 팔 길이 정도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걸 명심하라구. 공연히 예전 같은 스캔들이라도 나지 않게 하려면 말야.」
침묵 속에 한동안 넥타이 걸이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지금 입고 있는 알마니 양복에 맞추려는 듯이 트리스턴은 와인색 줄무늬 실크 타이를 골라 익숙한 손놀림으로 목에 걸고 매듭을 지으며 카퍼필드를 흘낏거렸다. 그러고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난 척하는 치들에게 망신을 주는 것이 내 취미나 마찬가진 걸 어쩌겠나. 주식으로 장난을 치거나 피카소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얘기지. 뭐 하기는 고다이바 초콜릿의 슈퍼 모델들한테 치근덕거리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친구의 말을 들으며 카퍼필드가 천천히 팔짱을 꼈다.
「이거야 원, 자네 내 아파트를 감시하기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뭘 캐내려고 수정구슬로 요술이라도 부리는 거야? 여하튼 간에 적어도 난 초콜릿 정도는 주었지만, 내 기억으로는 자네한테 얼마 전에 소개시켜주었던 슈퍼 모델 아가씨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모양이더구만 그래.」
트리스턴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더니, 마호가니 쟁반에서 백금으로 된 커프스 단추 한 쌍을 집어들었다.
「그땐 비서를 시켜 꽃다발이라도 보냈어야 했는데……. 그건 그렇다 치고, 혹시라도 자네가 걱정하는 게 그 백만 달러 때문이라면 열 받을 필요 없네. 그 상금을 받아갈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보나?」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뭐라고들 하겠어. 자네를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한 낙천주의자라고 씹어대면서, 온갖 비웃음을 다 날릴 것이 뻔하잖아.」
트리스턴은 그의 곁을 살짝 스치고 지나며 커프스 단추를 제자리에 끼우고,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가 오래 전부터 마법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고 있다는 건 아마 자네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걸.」
「자네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었지. 말은 그렇게 했다구!」
카퍼필드는 구시렁대듯 말을 받으며, 익숙한 곁눈질로 넥타이 걸이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브룩스 브라더즈의 최신 모델 하나를 양복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하지만 이미 문은 트리스턴이 나가자마자 소리도 없이 닫혀버렸다. 카퍼필드는 급히 두 손으로 문을 두드려댔다.
「문 열어, 트리스턴! 이 못된 친구야, 빨리 이 문 못 열겠어? 에이, 빌어먹을…….」
그가 어깨로 문을 힘껏 밀치려는데, 밖에서 믿기 어려울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 난 못된 친구지. 자, 그럼 오늘 일진(日辰)은 또 얼마나 사나울지 알아 보러나 가볼까?」
카퍼필드가 잠깐 멍하고 있는 사이, 오직 그 고용주의 출입 시에만 감응하여 작동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문 위의 희미한 전등이 몇 번 껌벅거리더니, 곧이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녀가 빗자루를 타고 앉자, 스커트 자락이 무릎께까지 말려 올라가면서 검은 스타킹에 휩싸인 날씬한 종아리 한 쌍이 드러났다. 때마침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잎새들을 흩날리며 머리카락마저 눈가로 미끄러뜨렸다. 머리를 위로 걷어올리는 그녀의 팔에는 소름이 쫙 끼쳤다.
음산한 하늘의 장막을 걷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빗자루를 양손으로 꽉 움켜쥔 채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외워야 할 주문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는데, 허벅지에 파르르 경련이 일면서 정신집중을 방해했다. 그러던 끝에 간신히 기억해낸 주문을 그녀가 목청껏 외쳐댔으나, 그 빗자루는 조금도 움직여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의 외침이 하릴없는 속삭임처럼 잦아들었고, 어쩔 수 없는 실망으로 목이 잔뜩 메이면서 눈물이 솟았다. 내가 철딱서니 없게 너무 자신만만했었나, 아니면 그 동안 늘 두려워하던 대로 그저 형편없는 마녀에 불과한 것일까.
그녀는 가느다란 체인에 목걸이처럼 매달고 있는 에메랄드 부적을 문지르기 위해 입고 있던 홈스펀 보디스 칼라의 가지런한 레이스를 느슨하게 풀어헤쳤다. 남들 눈을 피해 깊이 감춰놓았음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어지간한 곤경에 빠졌을 경우가 아니면 그 존재조차 잊으려고 하면서도, 그녀로서는 행운의 상징인 양 그걸 가슴에 차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사크레 브로이’, 난 그저 좀 날고 싶을 뿐이라구.」
그녀가 중얼거리자 빗자루가 앞으로 조금 움직이다가 멈추며 흔들렸고, 동시에 에메랄드가 전해주는 차갑고 불편한 기분이 콩콩 뛰는 그녀의 가슴 위로 전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조심하면서, 목에서 체인을 벗겨 내 부적을 감싸쥐고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런 다음 낡은 빗자루에 체중을 옮기며 다시 속삭였다.
「나는 날고 싶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쭉 펴면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여러 번 고개를 저었다.
순간, 버드나무 빗자루가 공중으로 조금 떴다가 멎었고, 그 바람에 그녀는 겨우 한쪽 다리로만 땅 위에 서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허벅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빗자루대가 강력한 에너지를 전달하듯 부르르 떨리자, 그녀의 목덜미에 나 있는 솜털들이 하나 같이 곤두섰다. 순간, 그녀가 짧게 명령하듯 외쳤다.
「날아라!」
그러자 으레 그래왔다는 듯이, 그녀를 태우고 공중으로 붕 떠오른 빗자루가 근처의 커다란 전나무 꼭대기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현기증이 나도록 드높게 떠올라갔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발을 뻗으면 땅에 닿을 정도로 야트막하게 내려오기도 하면서 자유자재로 허공을 오르내렸다.
기쁨에 찬 환호를 터뜨리며, 그녀는 날아오르는 가느다란 막대기를 타고 급상승하는 아찔한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소리가 커갈수록 날아다니는 속도도 빨라지면서, 이러다가는 느지막한 오후의 창공에 아스라이 매달려 있는 저 달까지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다.
헤아릴 수도 없이 수많은 노력을 쏟은 끝에, 드디어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겁도 없는 빗자루가 가장 높은 두 그루의 전나무 사이를 마치 쏘아 올려진 로켓처럼 치솟았다가 금세 똑같은 속도로 급강하하는 바람에,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더미 위로 곤두박질치면서 저만큼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그녀는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잘못 올라온 얼빠진 대구처럼 숨을 헐떡이며, 신선한 공기로 허파를 한껏 채운 뒤에 고개를 들었다. 빗자루는 몇 발자국쯤 떨어져 가로놓여 있었다. 입 속으로 들어간 썩은 나뭇잎들을 뱉어낸 그녀는 그 무생물체인 막대기를 한껏 노려보았다. 문득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체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자, 잠시 언짢았던 기분도 곧 사라져버렸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펴자, 은은하게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던 그 부적은 그녀가 놀라 입을 딱 벌릴 틈도 없이, 둘만의 비밀을 확인시키기라도 하려는 양 윙크하듯 두 번을 깜빡거리고 나더니 다시 암흑으로 돌아가버렸다.
새로운 경험이 불러일으킨 흥분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는 그때 숲의 검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섬뜩한 남자의 형상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윽고 입술을 뒤틀면서 소름끼치는 승리의 미소를 흘리며 마을로 향하는 그 남자의 관자놀이를 덮은 품위 있는 은발 위에, 그때서야 비로소 절반쯤 밝아오던 교교한 달빛이 너울거리듯 비추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미스 애리언 화이트우드에게 1689년의 매사추세츠 식민지(미국 독립 이전의 북미 동부 13개 주의 영국 식민지)에서는 마법을 행하다가 큰코 다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면, 그녀는 그들의 면전에서 스무 살짜리가 할 수 있는 온갖 듣기 싫은 상소리와 함께 비웃음이나 되돌려주려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 존경해 마지않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애정마저 품고 있는 그녀의 의붓아버지 마커스는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돌로 쌓은 벽난로 앞의 등받이의자에 앉아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포개놓고 눈이 동그래진 채로, 사탄의 종들과 흑마술(黑魔術 black magic, 악마의 힘을 빌어서 주로 못된 목적을 위하여 쓰는 마술)에 대한 마커스 화이트우드의 통렬한 비난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되풀이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애리언보다도 오히려 그 자신이 먼저 싫증이 난 모양인지, 마커스는 한 손으로 얇은 기도서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안절부절못하며 잿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도, 시선만은 고집스레 그녀의 머리 위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디 허빈스에게나 겨우 줄 수 있을까말까 한, 반쯤 엉긴 우유밖에 내놓지 못하는 징글맞은 암소를 향해 그녀의 의붓아버지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 동안, 애리언의 징 박힌 구두가 깨끗하게 모래를 깔아놓은 바닥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난로에 기대어놓은 버드나무 빗자루를 슬쩍 바라보며, 그녀가 환희로 가득 찼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입술을 씰룩거리는 것을 마커스 화이트우드의 담청색 눈동자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애리언! 내 말은 한마디도 듣지 않는 거니? 도대체 네 영혼이 지금 스스로의 무덤가를 배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냐, 응?」
「죄송해요, 아빠. 제가 잠시 정신을 딴 데다 팔았었나봐요. 기도를 계속해주세요.」
그녀가 한숨을 삼키며, 진절머리가 나지만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듯이 나오자, 마커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쪽 손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척했다.
「어제만 해도 그렇지. 굿와이프 벌크 부인은 네가 창문 옆을 지나가는 걸 보더니, 딸 체러티가 교리문답서를 읽다 말고 너를 맞으러 뛰어 나가더라고 불평을 하더구나.」
「넌덜머리나기는 저 역시 마찬가진 걸요.」
애리언은 이 한마디만 중얼거릴 뿐, 불과 이틀 전 밤중에 바로 그 말대가리 체러티가 찾아와서는 곰팡내가 폴폴 나는 찻잎을 한 컵쯤 되게 내놓으면서, 자신의 앞날을 점쳐달라고 했었다는 이야기를 차마 마커스에게만은 할 수 없었다.
「얘야, 널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만,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내가 돌봐야 하는 게 네 영혼뿐이 아니니까 말이다.」
「제가 청교도(淸敎徒, Puritan)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걸요. 전 그저 아빠를 편하게 해드리려고 그 지겨운 예배에 참석하고 있을 뿐이잖아요. 정말이지, 그 사람들은 제가 이곳 글로스터(Gloucester, 원래는 영국 남서부의 도시명이지만, 여기서는 마을의 이름으로 쓰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저를 미워했다구요.」
마커스의 이마를 가로질렀던 주름이 조금은 펴지는 듯하면서, 그의 기억은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멈추었다. 그때 그는, 벗은 모자를 엉망으로 구겨질 정도로 꽉 움켜쥐고 부두에 서 있었다. 얼마 후에 진홍색 망토를 걸치고, 마치 이런 여행 따위에는 매우 익숙하다는 듯 따분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만을 달랑거리면서 배와 부두를 연결하는 경사로를 건들건들 걸어 내려오고 있는 꼬마 아가씨를 보는 순간, 그의 입술에서 자신도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꼬마 건달 아가씨가 그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훑어보면서, 그 가냘픈 생김새보다 적어도 두 옥타브 정도는 저음으로 깊숙이 울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질문을 해오는 바람에, 그가 외워둔 환영인사는 아예 목구멍에 걸려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울 엄만 어딨죠? 또 달아나기라도 했나요?」
그때 의붓딸은 그후로 키가 자랐으나, 그 깊숙이 울리는 목소리와 탐색하는 듯한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보고 있는 사람의 말을 더듬게 만들고 있었다.
이젠 마커스도 잘 알고 있는 반항의 표시로, 그녀는 앞가슴이라도 가리려는 듯이 팔짱을 꼭 꼈다.
「그건 순전히 제 프랑스식 발음 탓이었고 구겨진 옷들도 그 사람들이 신경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구요.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혼자서 먼 여행을 하려면 옷을 잘 입어야 된다고 믿으셨던 거죠.」
「게다가 네 할머닌 마술도 믿으셨던 게지. 그분이야말로 흑마술 같은 걸로 네 순진한 마음에 해독을 끼쳐버린, 환상을 좋아하는 프랑스 노친네였던 게야.」
그가 집게손가락으로 애리언에게 삿대질을 해대며 말하자, 그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뇨, 그건 백마술(白魔術)이죠. 할머닌 크리스천이셨거든요. 저를 멀리 떠나보내고 나서 가슴 아파하시던 할머니는, 그후로 채 일 년도 못되어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구요.」
애리언은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오자, 계속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가 사랑하던 그 땅딸막한 할머니는 자신이 애리언을 그토록이나 완고한 의붓아버지에게 보내고 말았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손녀가 탄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의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계셨으리라.
마커스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난 네 엄마한테 약속했단다. 너한테 즐거운 가정과 더불어 명예로운 이름을 갖도록 해주겠다고 말이다. 네 엄마 릴리언은 얼굴이 벌개지도록 기침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아팠을 때도 늘 네 생각만 했었지. 네 엄만 우리 세 사람이 이곳에서 멋진 삶을 이뤄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갖고 계셨단다.」
잠깐 회상에 젖어든 의붓아버지의 그리움에 잠긴 듯한 미소는, 애리언에게 그녀의 섬약(纖弱)했던 어머니로 하여금 이 소박하고 금욕주의적인 남자에게 빠지게 한 애모의 편린이나마 살짝 엿보기라도 한 듯한 감상을 주고 있었다.
「애리언, 너야말로 순진하기 때문에 항상 악마의 표적이 되기도 쉬운 거란다. 실제로는 너의 순수함을 먹이로 삼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네가 알아챌 수 없도록 가장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네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단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과 달리 제멋대로인 드센 여자를 보기가 두려운 게야.」
마커스가 거칠게 기침을 해 목청을 트고 나서 나지막하게 하는 말을 나름대로 다소곳하게 듣고 있던 그녀도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갑자기 열을 올렸다.
「아시겠지만, 그래서 저두요, 아빠가 얼마 전에 제가 힘들게 모아 으깨어서 가루를 낸 새앙쥐 다리를 태우시고, 박쥐의 피를 쏟아버리신 이후로 다시는 단 한 가지도 조제하지 않고 있잖아요.」
의붓딸의 천진난만하기만 한 진술을 듣고 있던 마커스가 진저리를 치더니, 단단한 두 손바닥을 그녀의 양어깨에 얹었다.
「자, 네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자꾸나. 우리 함께 무릎을 꿇고, 네 할머니가 네 마음속에 심어놓은 흑마술의 씨앗으로부터 너를 정화시켜 주시기를, 전능하신 하나님께 빌도록 하자.」
그 말에 순종해 무릎을 꿇으면서도 애리언의 가슴속에서는 여전히 또 다른 외침이 있었다. ‘백마술이라니까요!’
대들어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는, 겹겹이 접은 스커트 단을 꿇어앉은 무릎 밑에 푹신푹신하게 대어 괴로운 시간에 대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커스는 대개 한결 같은 대사를 반복하거나 그 얇은 책에 나오는 기도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마와 양털을 섞어서 짠 거친 천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낡은 드레스 덕분에 애리언의 겨드랑이로부터 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쪽 눈을 살며시 뜨고 마커스가 고개를 숙인 채로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요즈음에 새로 늘어난 재주를 한번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난로 선반에 놓여 있는 주석(朱錫) 촛대에 온 정신력을 집중시켰지만, 촛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마치 그 생명 없는 쇠붙이가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해보기가 절망적이기는 했으나,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애리언이 마주잡고 있던 두 손으로 에메랄드 부적을 감싸쥐자, 손가락에 얼얼한 진동이 전해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촛대의 바닥이 나무 선반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것이 보이자, 애리언은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살짝 띄었다. 그리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촛대가 좌우로 흔들리며 마치 경쾌한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애리언!」
그때 갑자기 마커스가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그녀의 집중력이 무너져버렸다. 이내 그 묵직한 촛대는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바로 한두 뼘 옆의 난로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죄송해요, 아빠. 전 그저…….」
애리언이 숨을 들이마시며 다급하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진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날 해치려고 했잖니, 얘야. 이젠 정말 더는 못 참겠구나!」
소리를 치고 난 마커스가 찬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바깥으로 비틀거리며 나가버리자, 홀로 남은 애리언은 바야흐로 이 인정이 메마른 땅에서 유일한 자기편한테서마저도 따돌림을 받은 듯한 생각에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다.
낙담에 빠진 마커스의 발걸음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려온 시간은 이미 달이 밤하늘 중천에 높이 걸려 있을 때였다. 애리언은 그늘진 다락방의 거울 앞에 앉아서 풍성한 검은 곱슬머리를 빗어 내리고 있었다. 그때 마커스의 방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가 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닫히는 바람에, 그만 빗과 머리카락이 마구 뒤엉키고 말았다.
촛불을 집어든 애리언은 바깥바람에 덜렁거리고 있는 유리창 가로 걸어가, 어떤 미지의 위안이라도 찾으려는 듯이 밤하늘을 휘둘러보았다. 촛불을 옆에 내려놓고 좁다란 창턱에 쭈그리고 앉아 올이 풀어진 낡은 퀼트 숄을 어깨에 두르고 있을 때, 한 조각 구름이 달을 잠시 가리듯 흘러가자 그녀 자신도 그 구름처럼 어디론가 하염없이 날아가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끊임없이 마법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영혼이 갈망하는 바를 풀어줄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한 갈망은, 그녀가 어머니의 돈 많은 정부(情夫)들의 변덕에 따라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동안에 더욱 더 절실해졌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세 살이 되던 생일에 그때까지도 본 적조차 없었던, 할머니가 선물로 보내주신 닳아빠진 동화책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새된 웃음소리나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혹은 낯선 남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들에 중단되는 일이 없는 재미를 즐기려고, 그녀는 마법사와 마녀들, 그리고 검은 머리카락의 멋진 왕자들이 다스리는 이색적인 왕국에 열광하며 스스로 푹 빠져들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대며 말다툼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 밤이 평온한 경우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짙은 어둠 속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었다.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어렵사리 촛불을 켜고는,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그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가 있는 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누구였는지 하는 것도 겨우 떠올랐다. 아니면 최소한도 그녀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 하는 것만이라도…….
대개 그런 밤이 지나고 나면 어머니의 영묘(靈妙)한 아름다움은 그 비극적인 창백함으로 매력을 더하게 되었으며, 이는 곧 애리언이 짐을 싸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이 다 지나가기도 전에 애리언은 또 다른 집에,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또 다른 남자의 침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애리언은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갖다댔다. 소중한 동화책은 이곳 식민지로 오는 항해 도중에 잃어버렸고, 어머니는 이제 바위투성이인 매사추세츠의 뗏장 밑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다면, 그녀가 늘 자부심과 모멸감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볼품없고 시시한 에메랄드 부적뿐이었다.
그날 오후까지만 해도 서투른 주문이 실패를 거듭하였음을 기억하면서, 애리언이 잠옷 주머니에서 그 부적을 꺼내들고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새로운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마치 번개라도 치는 듯한 거칠고 낮은 진동이 그녀의 감각을 두드리는 것을 확연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 동안 수없이 읽어온 마술과 그 불가사의한 능력에 관한 이야기에 의하면, 이는 분명히 그녀의 타고난 천성이 보다 발전된 마법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하여 새로운 신뢰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하였다는 의미일 터였다.
원래 애리언의 소망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뜻대로 부릴 수 있는 마법의 능력을 많이 갖고 싶은 데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형적인 청교도의 한 사람인 마커스와의 불가피한 조우(遭遇)로 인하여, 그럴 듯한 이유 없이는 그런 시도를 해보는 것조차 어렵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애리언은 부적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분쟁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 원천이 되어 주기를 기원했다.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퀼트 숄을 바싹 조여대며 파고들자, 감고 있는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애리언은 글로스터의 어두운 마법들을 단 한번의 고결한 키스만으로도 깨뜨려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멋진 흑발의 왕자를 꿈꾸는 대신, 햇빛과도 같은 밝은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서리와도 같은 눈을 지니고 있는 남자의 꿈에 잠겨 있었다.
곁에서 다 타버린 수지양초의 심지가 타닥거리며 어둠의 심연 속으로 스르르 잦아들자, 그녀는 잠결에 가벼운 신음을 토했다.
숨막힐 듯하던 한여름의 더위가 가을 바람에 자리를 물려준 뒤라서 그런지 예배당 안은 썰렁했다. 애리언은 스커트를 매만지는 척하면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흘끗 훔쳐보았다.
아침식사 때부터 그녀가 갖은 애교를 부려가며 시도했던 대화 재개 노력이 그 무뚝뚝한 표정에 의해 퇴짜를 당한 이래, 의붓아버지의 모습은 난공불락 그대로였다. 그는 뜨거운 옥수수 죽을 그대로 남겼으며, 그 좋아하는 달콤한 당밀이 담긴 나무접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 우물에서 떠놓은 차가운 물만 한 잔 마시고 난 그가 말 한마디도 없이 일어나서 예배당으로 향하는 바람에, 애리언도 별 수 없이 하얀 보닛을 머리에 삐딱하게 올려놓고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리넷 목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설교는 어느덧 세 시간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 힘찬 음색은 조금도 갈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주먹으로 설교단을 내려치면서 불의 심판과 그 무서움을 강조하자, 그 이야기는 처음으로 애리언의 성마른 생각 속으로 파고 들었다.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전능하신 주께서는 우리를 여기 글로스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고, 우리들 스스로가 믿음의 보혈을 팔아서 안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유혹에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주셨으며, 이곳 신천지까지 무사히 항해하여 올 수 있도록 사나운 비바람과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애리언은 어머니가 심한 각혈로 인하여 끝내는 질식해 돌아가셨던 일을 골똘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신실한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또한 그들을 유혹하려는 악마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목사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는 사람들이 겨우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성경 말씀 욥기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말씀에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기 1장 6절).’」
애리언은 조금은 거북해지는 기분과 함께, 거의 극적이기까지 한 목사의 설교에서 그나마 뭔가 보람된 메시지를 발견해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시기심도 품은 채로, 몰두하여 경청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살짝 둘러보았다.
「사탄이 우리들 사이로 그의 종을 보내는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아주 교활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늘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였던 루시퍼(Lucifer, 한때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후에 타락하여 사탄이 됨. 영어 고유명사로서는 샛별, 즉 금성(金星, Venus))를 기억해봅시다. 루시퍼의 영광스러운 얼굴 앞에서는 별들마저도 빛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탄이 보낸 천사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이 추한 자를 보내어 우리를 미혹시키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가증스러운 괴물이라도 보내서 우리의 양들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순진한 자녀들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겠습니까?」
침묵이 예배당 안에 가득히 드리워지면서, 사람들은 서로 의아한 눈초리들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 사탄의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는 악마도 있습니다. 바로 이 방 안에도 그 악마가 있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목사의 외치는 소리가 침묵을 깨고 울려 퍼지자, 신도석에서는 일제히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애리언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으나, 그녀의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리넷 목사의 시선이 곧장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모른 척할 수는 없어서, 어느 사이엔가 그의 시선 속에 얼어붙고 말았다.
「사탄의 천사들이 우리의 뒤를 몰래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거칠고 사납기만 한 피조물들이 밤하늘을 횡행하면서 달을 향해 울부짖고 있으며, 평범한 일상의 도구들이 엉뚱한 생명을 얻어 춤추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사탄과 그의 종들은 마침내 이 마을 글로스터에도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자, 이제는 우리 모두 머리 숙여 주기도문을 거듭해서 외우기로 하겠습니다.」
목사가 훨씬 부드러워진 어조로 끝을 맺고 난 후에, 마커스의 고개가 결연히 숙여지는 것을 보면서 애리언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얼어 붙은 듯이 겨우 호흡만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 고개를 들고 있었으며, 오직 한 쌍의 눈동자만이 감기지 않았다. 리넷 목사는 설교단에 우뚝 선 채로 전혀 성직자답지 않은 음험한 눈초리로, 당장에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하려는 듯이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낙인을 찍는 듯한 시선에 담겨 있는 노골적인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주기도문의 구절들은 그의 입술로부터 물 흐르듯이 이어져 나오고 있었다.
애리언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자, 밀려드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목구멍이 스멀거렸다. 참다 못한 그녀는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나서 신도석 사이의 긴 복도를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신도들을 내리덮은 공허한 침묵 속에서 자비롭게도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나, 다만 마커스 화이트우드가 마주 쥐고 있는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을 뿐이었다.
이 낯선 이국 땅에서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집을 향해서 애리언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녀의 의붓아버지인 마커스의 미늘벽 판잣집은 개간지 중간쯤에 평온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저 무심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다락방 유리창만이 마음의 동요를 보이고 있는 그녀를 비웃으며 맞아주는 듯했다.
그녀는 군중들의 성난 외침이 바로 뒤를 따라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면서도,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날듯이 뛰어오르며 쑤시듯 아파 오는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창문 사이를 뚫고 들어온 한줄기 황금빛 햇살이 애리언의 차가워진 마음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자, 그녀는 비좁은 방안을 서성이면서 지난봄에 이 마을로 부임해온 그 핸섬한 목사에 관한 일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간혹 예배가 끝난 후 애리언이 밖으로 나오면, 그가 따뜻하고 보송보송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악수를 하면서 말을 걸어오곤 했었다. 그가 애리언에게 웃어 보일 때마다 체러티 벌크가 어김없이 끼여들어 선웃음을 치면서 목사의 환심을 사려고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 굿와이프 벌크 부인은 애리언에게, 목사가 글로스터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이미 여러 건의 청혼을 받았다고 수군거렸지만, 이제는 체러티가 청혼을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애리언을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분노로 애리언의 두 손이 떨려왔다. 그녀는 주기도문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리넷 목사의 설교 내용에 감복하고 있었지 않았는가 말이다. 또한 글로스터의 주민들 모두가 주기도문이 울려 퍼지는 동안에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제는 그녀가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해왔던 그 기도는 완전히 무시되어 버리고, 그 대신에 교회에서 공개된, 그녀가 하늘을 날았다는 이야기만 도처로 퍼져나가게 되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리넷 목사는 그녀를 파멸시키려고 했을까? 그는 진정으로 애리언이 사탄의 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믿고 있다는 말인가?
애리언은 침대 밑에서 꺼낸 잡동사니 상자에서 원뿔 모양의 모자를 접는 종이 한 장과 깃털로 만든 펜을 찾아냈다. 지금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었으며, 그 시간은 모래시계 속의 모래알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어떤 영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 가다가, 머릿속에서 ‘도마뱀’이라는 말과 운율이 맞는 단어를 생각하는 동안, 펜에 달려 있는 깃털을 잘금잘금 씹어대곤 했다.
마커스가 낭패감으로 축 처진 듯한 어깨를 구부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애리언은 창가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 계단에서 그의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끽 하는 마찰음과 함께 다락방의 문이 열리자 애리언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실은 내가 어젯밤에 도움을 청하려고 친절하신 목사님을 만나뵈러 갔었단다. 하지만 내가 털어놓은 얘기를 그런 식으로 공개해버릴 줄은 정말 몰랐구나.」
그는 시선을 마룻바닥에 떨군 채 양손을 힘없이 늘어뜨리며 말했다.
「그 친절하신 목사님이 우리 모두를 놀래켰잖아요.」
고개를 든 마커스의 연한 하늘빛 두 눈은 참기 힘들어하는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도 그분은, 잉거솔 치안관이 널 직접 잡으러 여기로 오겠다는 걸 말리고, 대신에 내가 너를 데려가서 심문을 받게 하도록 해주시지 않았겠니. 마을 사람들은 나를 신뢰하거든.」
그 신뢰의 짓누르는 무게가 마커스의 어깨를, 적어도 한 뼘쯤은 더 밑으로 처지게 만들었다. 애리언은 과연 어떤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인지 무척이나 두려우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빠는 제가 사악하다고 생각하세요?」
「네 엄마도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전까지는 방황했었지.」
마커스가 의붓딸의 고집스러운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리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만일 엄마의 그 많은 죄를 모두 사하여주셨다면, 하나님의 은총은 퍽이나 관대하신 거로군요.」
「그렇게 불경스럽게 굴어서는 안 된다, 얘야. 십계명을 기억해보아라. 너희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니.」
「엄마가 저를 세상에 나오게 했던 친아빠의 이름이라도 알아보려는 수고만 했어도, 저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 거라구요. 그러니까 아빠는, 제가 사악하다기보다는 엄마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방황을 하고 있는 걸로 여기고 계시단 말씀이군요.」
그녀는 해묵은 비참한 심정이 목구멍을 가득 메워오자 부적을 살짝 쓰다듬었다.
「난 네가 네 할머니가 가르쳐주셨다는 아이들 놀이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긴 한다만, 네게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런 힘은 결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아니거든. 성경 말씀에도 마법에 관한 말씀이 많이 나오잖니.」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마커스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혹시, ‘마녀가 다시 살아 나오도록 괴롭히지 말라’는 말씀도 있었던가요? 이젠 가야죠?」
애리언은 오히려 자신이 그를 위로해줘야 하는 게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쪽 손을 마커스의 팔뚝 위에 얹으며 말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 위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 얘야. 그러면 나도 견딜 수가 없을 거야.」
「그런 걱정 마세요, 아빠. 마녀는 우는 법이 없답니다.」
하지만 애리언의 떨고 있는 입술이 스스로가 하는 말을 거짓으로 만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로 북적대는 흙탕길이 보이는 데까지 오는 동안에도 애리언의 발길은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마커스는 어머니와 나란히 서 있는 체러티 벌크를 지나치면서, 천천히 애리언을 이끌었다. 그때 체러티가 자기와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걸 보면서, 애리언은 체러티도 자신의 부끄러운 흔적을 감추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닌지 자못 궁금했다.
「어디서 고개를 번쩍 들고 있어, 이 마녀야! 이제 그 탈이 모두 벗겨졌으니, 너의 사악한 짓들을 회개하라!」
구디 허빈스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애리언은 발길을 멈추고 고개를 꼿꼿이 든 채로, 적의로 가득 차 있는 노처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 마녀가 나한테 저주를 내렸다! 숨이 막혀 죽겠어! 누가 좀 도와 줘요! 저 년을 멀리 떨어지게 해줘요!」
구디 허빈스는 애리언에게서 뒷걸음질치며 자신의 늘어진 목살을 움켜쥐더니, 마침 뒤에 서 있던 미망인의 품속으로 쓰러지면서 졸도하고 말았다.
애리언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잉거솔 치안관이 그녀를 마커스의 손길로부터 낚아챘다. 이주민들의 감옥으로도 쓰이는 헛간 문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그가 쓴 챙이 높직한 모자가 햇빛을 가리우며 그늘을 드리웠다. 애리언은 그 사람이 친절하신 리넷 목사인 것을 알게 되자,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그가 헛간 문을 열어제치고 서 있는 덕분에 잉거솔은 애리언을 마치 가축처럼 곧장 그 안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었다.
애리언이 그 옆을 지나칠 때 목사가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은밀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영혼을 나한테 팔려무나, 마녀야. 그러면 내가 너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야.」
그녀 혼자만을 어둠 속에 남겨둔 채로 거칠게 문이 닫혔다.
애리언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느라고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습기 찬 지푸라기들이 여기저기에 깔려 있어서 고약한 곰팡내가 벽을 따라 감돌고 있었다. 그때 돌연, 그녀의 뒤쪽에서 야트막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애리언이 돌아서며 안쪽의 어둠 속을 둘러보니, 길다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웬 쪼글쪼글한 노파가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어슴푸레 보였다.
「무서워하지 말우, 아가씨. 난 그저 도둑일 뿐이지 살인자는 아니니 말유. 듣자허니 젊은 마녀인 게로구먼 그려.」
그제야 애리언의 귀에도 밖의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리고 헛간의 안쪽으로부터 그 쪼글쪼글한 할멈의 천연덕스러운 스코틀랜드 억양의 사투리가, 마치 계집아이처럼 킥킥 웃어대는 소리에 섞여서 들려왔다.
「아가씨 덕분에 저 사람들이 이젠 나한테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게 되었겠구먼 그려. 아침이 되면 이 늙은이를 족쇄가 달린 마차에 집어넣어 구경거리로 만들 거라구……. 아니면 목을 매달거나.」
주름투성이의 스코틀랜드 노파가 감옥에서 그 생을 어떻게 마감하게 될 것인지 상상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자신들도 역시 외고집 신앙으로 인하여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던 곳에서부터 떠나오고 말았던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그들의 편협한 견해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 노파의 모진 운명에 애리언이 동정을 보이기도 전에 문이 왈칵 열리고 마커스와 리넷이 들어왔고, 그러자 노파는 짚더미 속으로 뒷걸음질쳤다.
「친절하신 목사님께서 도움을 베풀어주시겠다는구나…….」
마커스가 모자를 벗어들고 양손으로 비틀며 말하자, 애리언은 리넷을 쏘아보면서 더는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고매하신 분이신지 모르겠군요.」
리넷이 득의에 찬 미소를 띄우는 것을 마커스는 미처 보지 못했다.
「에……, 딸이여. 그가 네게 필요한 집을 마련해주고 너를 돌보면서 네 안에 숨어 있는 악마를 몰아내줄 것이다.」
애리언의 마음속 깊이 의혹의 싹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나, 리넷은 우아하기까지 한 자비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알고 있는 동료들 중에 보스턴에 코튼 매더 목사라고 계신데, 그가 얼마 전에 자신의 집에다 뭔가에 정신이 사로잡힌 젊은 여인들을 수용하여 치료하기 위한 시설을 열었다고 하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 사람이 매우 헌신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소.」
리넷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를 훑어 내리자, 애리언은 오싹한 느낌으로 인하여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때 애리언을 향해 마커스가 입을 열었다.
「얘야, 너만 괜찮다면 우리 재판을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보았으면 한단다. 친절하신 목사님께서 네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잘 말씀해주셔서 우리편을 들어주도록 하실 테니, 얼마나 관용을 베푸시는 게냐?」
애리언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듯한 마커스의 애타는 얼굴을 지워보려는 듯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제 생각 같아서는, 그 친절하신 목사님께선 곧장 지옥으로나 가시게 될 거예요.」
일순, 마커스의 입이 딱 벌어졌고, 리넷이 턱을 악무는 듯한 으드득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리고 애리언의 귓가로 그녀 뒤의 짚더미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시오, 선한 영혼이여! 지금 사탄이 이 강퍅(剛愎)한 아이의 입을 통하여 말을 하고 있으니, 들어서는 안 되오.」
리넷이 마커스의 옷깃을 움켜잡고 문 쪽으로 밀어내면서 말했다.
마커스가 비틀거리며 나가자마자 리넷은 힘껏 문을 닫은 후에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애리언을 향했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리지 않도록 무릎을 꽉 오므렸다. 체러티 벌크는 리넷의 번지르르한 외모에 푹 빠졌으면서도, 어째서 감각적으로만 보이는 그의 입술에 스며 있는 이토록이나 잔혹한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그의 입술이 애리언의 저항에 대해 동그랗게 오므라드는 듯한 비웃음을 지었다.
「네가 감히 나를 조롱하다니. 내가 나서서 중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너에게 닥쳐올지 모르겠단 말인가? 넌 판사들 앞에서 재판을 받은 후에, 유죄임이 확정되면 그대로 교수형에 처해질 거야. 이렇게 사랑스러운 살결이 지옥 불 속에서 타 들어가야만 한다니…….」
마지막 부분은 그가 손등으로 애리언의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홱 돌려서 그 손을 피했다.
「나보다도 먼저 당신이 지옥 불에 영원히 타게 될 거예요. 내 유죄를 입증할 증거라고는 단 하나도 없을 테니 말이죠.」
리넷은 그녀를 맥빠지게 만들려는 듯이 껄껄 웃었다.
「오, 없을 거라구?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 증거를 조사하고 있는데도 말이지? 사람들이 악마의 주문일 거라고 여기게 될 동요 같은 걸 써넣은 공책,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수상쩍은 유리병 몇 개, 버드나무로 만들어진 빗자루가 하나 있지. 게다가 그들은, 프랑스인들이라면 음험하고 죄 많은 천성을 가진 탓으로 사탄의 유혹에도 매우 약한 것으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은…….」
그의 목소리가 마치 그녀를 마음속으로부터 현혹시키려는 것처럼 달콤해졌다. 그가 바짝 다가서자, 애리언은 온몸이 스멀스멀해지며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옆으로 돌려야 했다. 그의 쉰 목소리가 속삭여왔다.
「난 네가 필요해, 애리언. 오래 전부터 너를 찾아서 온 세상을 헤매었지.」
갑자기 리넷의 손이 그녀의 보디스 앞쪽을 헤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애리언은 깜짝 놀라 펄쩍뛰었다. 그 손아귀가 에메랄드 부적을 쥐고 짧고 강하게 잡아당기자, 가느다란 체인은 그대로 끊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손바닥 위에 에메랄드를 올려놓은 리넷의 두 눈에서는 불가사의한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어서 돌려주지 못해요! 이 비열한…… 그건 내 거라구요.」
애리언이 그것을 잡아채려고 하자, 그녀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손을 뒤로 빼며 그는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부적을 호주머니에 넣고 나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넌 이제 내게서 도망갈 수 없어, 이 꼬맹이 마녀야. 뭐, 그렇다고 해서 안달할 것까지도 없겠지, 미스 화이트우드. 군중들이 널 가만히 놔두더라도, 어차피 교수형을 받게 되는 것뿐이니까 말이지.」
문이 코앞에서 닫혀버리자, 애리언은 분노보다는 차라리 허탈한 심정으로 그 문을 노려보았다. 부적을 잃게 됨으로써 탈출에 대한 그녀의 희망도 강탈당하고 만 것이다.
「아가씬 대체 뭔 죄를 지었누?」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애리언은 움찔 놀랐지만, 이내 여기에 자기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세운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떨리는 손으로 턱을 감싸쥐었다.
「보름달이 뜬 밤에 하늘을 날아다녔답니다.」
애리언은 희미하게 반짝이는 하얀 가운을 걸치고 웅대한 탑 위의 난 간에 서서, 그녀를 찬미하는 군중을 향하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마녀로서의 용기를 칭송하는 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그녀가 그들을 향해 우아한 키스를 날려보내자, 아부하는 군중의 합창이 점차 커 가다가 마침내 노호로 변하고 있었다
「마녀를 죽여라!」
꿈에서 깨어나면서 애리언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여럿이 다가오는 듯한 둔중한 발걸음소리가 좁은 헛간에 울려 퍼졌다. 몇 시간 전에 리넷이 그녀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버리고 난 후부터는 계속해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던 탓으로 온몸이 쑤셔왔지만, 애리언은 애써 참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덜커덕 하고 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두 남자의 실루엣이 달빛을 등지고 나타났다. 애리언은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목구멍을 빠져 나오려는 비명을 되삼키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그들이 마침내 애리언의 두 팔을 양쪽에서 움켜잡고 문 밖으로 끌어내었을 때, 밤의 짙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희미한 작은 그림자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던 것 같았다.
그들은 군중들의 아우성이 기세를 올리고 있는 쪽을 바라보고 애리언을 좁다란 거리 사이로 끌고 갔다.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야멸차게 잡아당기는 바람에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었으나, 그 순간에 구디 허빈스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자, 급히 두 눈을 깜박거려서 그 날카로운 아픔을 날려버렸다. 그들이 마을을 벗어나 시골길로 들어 서서부터는 그녀의 두 발이 힘없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느껴지는 바닷가의 짭짤한 대기에는 임박한 폭풍우의 숨막힐 듯한 기운이 잔뜩 서려 있었다. 돌연 애리언은 이슬이 차갑게 맺혀 있는 풀 위로 거칠게 밀쳐지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바로 날아가 보아라, 이 고집 센 마녀야!」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엎어져 있는 그녀의 위쪽에서 들려오자, 애리언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코 앞의 풀섶에 버클 달린 구두 두 짝이 거들먹거리듯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움켜잡힌 팔뚝을 세차게 흔들어대며 비틀거리고 일어서서 리넷과 마주 섰다. 그의 셔츠 소매는 마치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다. 그의 등뒤로 펼쳐져 있는 밤의 어두운 심연을 보고 있으려니, 극심한 두려움이 애리언의 온몸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리넷의 지시가 떨어졌다.
「횃불을 가져오시오. 이 마녀를 시험해보기로 합시다.」
순간, 분노가 애리언의 행동을 대담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리넷이 입고 있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셔츠의 칼라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도록 끌어내렸다.
「대체 당신은 우리 아빠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그분이라면 이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실 리가 없어요!」
리넷은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서 손을 놓게 만들었다.
「마커스는 너를 재판할 판사를 불러오려고, 지금쯤 보스턴으로 부지런히 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만…….」
「어째서 이런 배신을…… 이 나쁜…….」
「이 여인을 묶으시오.」
그의 지시에 따라 한 청년이 그녀의 두 손을 밧줄로 묶는 동안 다른 남자는 발을 묶으려고 몸을 숙였다. 리넷이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야트막한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군중을 뒤덮고 있는 불온(不穩)한 침묵 사이로 그의 외침이 퍼져 나갔다.
「이런 경우에 물로 죄인을 판별하는 방법이 매우 효과적임을 모두들 잘 알고 계시리라 믿소이다만, 우리가 이 여인을 연못에 던져 넣은 후에 만일 살아서 다시 떠오른다면 그것은 사탄이 구해준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며, 가라앉은 채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여자는 무죄임이 입증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를 천치바보로 여겨서 그런 엉터리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구요.」
애리언은 묶인 손발을 풀어보려고 기를 쓰며 소리쳤다.
「여인의 입을 막으시오. 따로 말할 시간이 있을 테니까.」
리넷이 다시 지시를 내리고, 손을 묶었던 그 청년이 더러운 손바닥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자 애리언은 치미는 구역질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어젯밤에 바로 이 여인의 계부(繼父)인 마커스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찾아와서는, 집에서 의붓딸의 영혼을 위하여 같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사이에 이 여인이 무거운 주석 촛대를 떨어지게 만들어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고백을 하였소이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군중들 사이에서 공포에 떠는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다시 리넷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헌신적이고 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뻔하였던 촛대가 사람의 손으로 움직여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 촛대는, 여기 있는 이 사탄의 매춘부가 웃고 즐기면서 보고 있는 동안에 그 자체에 생명력이 깃든 상태로 춤을 추었던 것입니다.」
벌크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마침 옆에 서 있던 남편의 품으로 쓰러졌다. 애리언은 속이 메슥거리고 거북함을 느끼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청년의 손을 꽉 물어버렸다. 청년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면서 애리언을 밀쳐냈지만, 그녀가 미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리넷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어잡으며 소리쳤다.
「말해보아라, 마녀야!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니까! 저 사탄의 장난감들이 네 것이 아니라고 해보라구!」
소리를 지르며 내뿜는 그의 거칠고 뜨거운 호흡을 귓전에 느끼며 애리언은 몇몇 부인네들이 차례로 들고 지나가는 그녀의 유리병들, 좀이 쓸어 있는 그녀의 잡기장, 몇 년 동안이나 걸려 숲에서 채집해두었던 귀중한 허브 잎들을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 행렬의 마지막에 구디 허빈스가 버드나무 빗자루를 의기양양하게 흔들어대며 나타났다. 그러자 리넷이 한결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여인이 그녀의 주인인 사탄과의 랑데부를 위하여 이 악마의 도구를 타고 날아서 달을 가로지르는 것을 내가 바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증인이올시다.」
군중들 속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악마와의 교접(交接)에 관한 상소리를 외쳐대는 바람에 애리언은 낯을 붉혔고, 이어지는 야유와 비웃는 소리가 빗발치듯이 그 남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주변의 횃불들이 이제까지 친숙했던 사람들의 얼굴 위에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을 마치 악몽 속에서 만날 수 있을 귀신 같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오랫동안 공포에 맞서온 애리언은 리넷의 팔에 감기듯 잡혀 있는 채, 실낱같은 의식의 끄트머리만을 겨우 잡고 곧 쓰러질 듯이 서 있었다. 얼마 후에 리넷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찍어누르며 다시 외쳤다.
「자, 이제 말해보라구, 이 마녀야! 그럴 수만 있다면 네 무죄를 주장해보라는 말이다.」
의기소침하던 그녀에게 진정한 분노가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자, 눈을 크게 뜬 애리언의 갈라진 목소리가 개간지의 정적을 뒤덮으며 울려 퍼졌다.
「난 절대로 사탄의 종이 아니에요! 나는 아무 죄도 없다구요!」
군중들 속 어디에선가 맞받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 악마의 도구들은 도대체 무엇에 쓰려던 물건이란 말이냐? 게다가 이건 모두 네 소굴에 있던 것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것들이 뭐가 해롭다는 겁니까? 그 몇 편의 뜨내기 같은 시가 해로운가요? 아니면 그 빗자루가요? 그리고 스튜의 양념으로 쓸 허브는 또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죠?」
그러자 한 여자가 잿빛 유리병 하나를 높이 들고 마구 흔들어대면서 비꼬듯이 소리쳤다.
「난 직접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흔히들 말하는 소위 ‘살무사(殺母蛇) 혀의 가루로 만든 스튜’라는 걸 몇 가지 알고 있다우.」
참다못한 애리언은 왁자한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가, 턱을 높이 치켜들며 자신을 변호했다.
「저는 오직 백마술만 행하는 선량한 마법사일 뿐, 절대로 사탄의 종은 아니라구요.」
그녀의 말을 들은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서로 미심쩍은 눈초리들을 교환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그 백마술이라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었소. 모든 마법은 오로지 사탄에게서만 나오는 것일 뿐이란 말이오.」
리넷은 그들에게 이해할 만하다는 듯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애리언이 분을 참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어 리넷의 발가락 부분을 있는 힘껏 짓밟았으나, 리넷은 오히려 그녀를 붙잡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애리언은 확실한 항복의 표시인 양 리넷을 밀어내려고 애쓰던 동작에서 힘을 쭉 빼버렸다. 순간 리넷은 그녀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어안이 벙벙하도록 아주 완벽하게 애리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란다. 너의 모든 것을 내 손에 맡기기만 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 한다면, 이 어려운 상황을 헤치고 나갈 수도 있을 게야.」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군중들에게로 시선을 던지면서, 이번에는 영어로 빠르게 외쳤다.
「자기 변호를 위해서 더 할말이 없는가, 미스 화이트우드?」
리넷이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음을 애리언은 알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마법의 능력을 공공연히 매도하고, 그의 손에 스스로를 맡기는 최후의 기회…….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그 어떤 무서운 괴물들보다도 교활한 이 악마에게 그녀의 영혼을 팔 수도 있는 그 마지막 기회가 아니겠는가. 이윽고 마지막임을 각오한 그녀가 과감하게 외쳐댔다.
「물론, 할말이 있어요.」
시간은 멈춘 듯하나 쉬지 않고 흘러가며,
바람은 쉬는 듯하나 계속하여 불어오고,
사랑은 미워하는 듯하나 계속하여 커가며……
한줄기 뜨거운 바람이 개간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리언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부적을 이미 리넷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부적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이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아무런 효험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싸우면서도 그대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는 환상적인 것을 즐기시던 그녀의 할머니조차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이 아닌가.
리넷이 들고 있던 횃불을 옆에 있던 사람에게 넘겨주더니, 음울한 안개가 짙게 깔린 연못을 향해 팔다리가 꽁꽁 묶여 있는 애리언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문은 열려 있는 듯하나 닫히고 말며,
칼은 칼집에 들어 있는 듯하나 자를 수 있고,
마녀는 말할 수 있는 듯하나…… 그러나……
바람이 거세어지기 시작하면서 머리카락을 날려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번개가 하늘을 찢을 듯이 가로지르고, 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구디 허빈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연못 속으로 집어던지고 나서 무릎을 꿇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애리언은 가파른 제방(堤防) 위에서 리넷에게 떠밀려 차가운 물 속으로 빠져들자마자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바윗덩어리처럼 곧장 밑으로 가라앉은 그녀는 묶여 있는 두 손을 풀어보려고 비틀어대면서, 걸리적거리는 무거운 신발을 차내고 나서 가라앉아 있던 빗자루 주변에서 똑바로 일어서기 위해 바둥거렸다. 머릿속에서는 허파가 터져버리기 전에 주문의 나머지 부분을 기억해내려고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지. 그 성분이야. 박새 풀뿌리와 도마뱀의 눈. 벨라도나(가지과의 유독식물)와 생강 뿌리. 그리핀(griffi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동물로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의 몸을 가짐. 숨겨놓은 보물을 지킨다고 함)의 발톱과 물푸레나무 검댕.
아니야, 글로스터엔 그리핀이 없잖아. 애리언은 쓸쓸하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녀가 알고 있는 한, 그 웃기는 동화책 속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핀은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게다가 ‘검댕(soot)’이라는 발음은 ‘도마뱀(newt)’이나 ‘뿌리(root)’와 안 어울리는 거 아냐?
그녀는 물 속 깊이 가라앉은 채로, 조금이라도 빨리 입을 벌리고 숨을 쉬고 싶어하는 원초적 욕구와 싸우고 있었다.
만일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만일에 그녀의 그 불운한 비행을 리넷이 보지만 않았다면…….
만일에 마커스가 그녀를 믿어줄 만큼만 그녀를 사랑했었다면…….
아련한 꿈속인 양, 리넷이 누군가를 심하게 힐책하는 듯한 성난 목소리와 명랑하기까지 한 스코틀랜드 할멈의 사투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들려왔다.
「그래, 아가씬 아름다운 마녀이구, 난 아름다운 도둑이라구. 이 부적을 챙겨요, 이건 당연히 아가씨 소유라니까!」
풍덩 하고 뭔가 물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최후의 공포로 짓눌린 그녀의 감각 속으로 전해오면서, 에메랄드 부적이 그녀의 눈앞을 지나쳐 뒤쪽으로 가라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체인을 거머쥐고 에메랄드를 손아귀에 꽉 쥐었다.
만일에…….
그녀의 입은 스스로 벌어지며 숨쉴 공기를 찾고 있었으나, 거기엔 오로지 차디찬 물밖에 없었다.
애리언은 그것이 가톨릭의 것이 되었건 청교도의 것이 되었건 관계없이 기억해낼 수 있는 기도문을 무턱대고 외어댔으나, 곧이어 무의식의 세계가 그녀에게 밀어닥쳤다.
가중되는 수압이 허파에서 공기를, 혈관에서 피를, 그리고 온몸의 뼈로부터는 골수를 짜내어 갔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덜컹거리며 멈춰 가는 동안, 그녀의 무릎이 가슴께로 구부러지면서 온몸이 웅크리는 자세로 앞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목이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몇 바퀴나 굴렀다.
금세라도 온몸을 찌부러뜨릴 것처럼 수압이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주변에서 귀청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유리병들이 깨졌다. 그 충격은 그녀의 결박을 풀리게 만들었고,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마음껏 숨쉴 수 있는 자유. 손가락으로 그 정들고 익숙한 빗자루를 단단히 붙잡을 수 있는 자유. 그리고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서서히 눈을 뜬 애리언은 지금 자신이 빗자루를 타고 헝클어진 구름 조각들 위를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적의 체인은 여전히 그녀의 얼얼한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의 옷자락은 뒤쪽으로 휘날리면서 상쾌한 바람을 맞아 거의 다 말라가고 있었고, 검은 잉크를 뿌려놓은 것만 같았던 하늘도 감미로운 아침을 맞으며 서서히 밝아오는 중이었다.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의 안도감이 애리언의 모든 두려움을 한순간 잊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승리의 환호성을 길게 내질렀고, 절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돌풍이 몰아치기 전까지만 해도…….
땅과 바다가 광대한 모습으로 시야를 가득 채우면서, 빗자루가 구름을 가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빗자루를 사이에 끼운 무릎을 바짝 조이지 않으면, 공포 속에 추락할 것만 같았다.
바위투성이의 매사추세츠 벌판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지고, 드넓은 바닷가의 한쪽을 온통 뒤덮다시피 하고 있는 거대한 탑의 성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 주여, 저는 죽은 것이었군요.」
온몸에 맥이 탁 풀린 애리언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괴이하게 생긴 유리와 철강 구조물들은, 아무리 보아도 그녀가 꿈에 그리던 천국의 진주로 꾸민 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아래 저 까마득한 땅에서는 자그마한 노란색의 마차들이 거미줄같이 퍼져 있는 샛길을 따라서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믿기 어려우리만큼 높은 곳에 올라와 있다는 생각이 아찔한 현기증을 유발한 탓에, 애리언은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힘껏 빗자루를 움켜잡았다. 만에 하나 자세라도 잘못되어, 지난번 개간지에서 처음으로 빗자루를 타고 날았을 때처럼 중간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지금 이 빗자루는 그야말로 애리언의 뼛조각을 쓸어모으는 데나 쓰게 될 터였다.
빗자루가 우측으로 선회하려고 할 무렵 애리언이 눈을 살짝 떠보니, 거대한 굴뚝 꼭대기를 향해 곧장 부딪히려는 중이 아닌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잔뜩 쳐들고 연기 구름이 빨리 걷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짙은 흙빛 안개에 잠겨버린 그녀는 격렬하게 기침을 하면서 한 팔을 마구 휘둘러댔지만, 빗자루가 날아가려는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빗자루는 여러 개의 드높은 탑 중에서도, 마치 창공을 직물의 바탕으로 삼아 윤기 나는 바늘을 꽂아놓은 모양을 내보려고 만든 것 같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는 가장 높은 탑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아 있는 배짱을 있는 대로 다 끌어 모으면서 애리언은 부적의 체인을 잡고 머리 위로 벗겨내는 한편, 날아다니는 마녀에게나 어울릴 법한 촉촉한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모두 쓸어 넘겼다. 곧 죽어도, 마지막 도착지에서 자신을 맞이할 상대방이 ‘성 베드로’가 되었건 ‘마왕’이 되었건 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몇 초쯤 전에 이미 빗자루의 뒤쪽 빗살에 불이 옮겨 붙은 다음이었고, 그보다 조금 앞서서 구름을 헤치고 나온 그 무서운 용이 괴성을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꽂히고 있는 중이었다.
레넉스 타워 빌딩에 딸려 있으며 흔히들 정원이라고 부르는, 울타리를 둘러친 잔디밭에 귀청이 떨어질 듯한 헬리콥터의 굉음이 몰아쳤다. 그 덕분에 마이클 카퍼필드도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야만 했다.
「그래, 이젠 만족한 건가, 트리스턴? 자넨 성대한 매스컴 서커스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친절하신 단장 역할도 자네가 손수 맡은 셈이니까 말일세.」
스테이지 위에 놓인 회의용 테이블 뒤 가죽의자에 앉아 있던 트리스턴은 또 하나의 이름 위에 만년필로 굵은 선을 그어 지우고 나서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짧게 자른 푸들 퍼머에 꽃무늬 평상복 차림인 한 참가자가 앞으로 튀어나오면서 조막만한 핑크빛 스웨터를 흔들어댔다.
「레넉스 회장님, 제게 열 두 시간만 주신다면, 이 스웨터의 임자인 실종된 발바리개를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여성 참가자는 보도기자 하나가 팔꿈치로 자신을 밀어 제치고 앞으로 나서자 눈을 부릅뜨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기자는 트리스턴을 향해 마이크를 들이대면서 물었다.
「레넉스 회장님,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이라크의 리처드 라스타시가 염력만으로 스푼 손잡이를 1조 분의 1센티미터만큼 구부렸음이 확인되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하지만 트리스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태연하게 마이크를 옆으로 밀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다음.」
「이래봬도 난, 일 년 전에 남편이 잃어버렸던 자동차 키를 소파 쿠션 밑에서 찾아냈다구요! 빌어먹을…….」
직원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출구로 이끌려가던 그 여성 참가자는 유창한 이디시(Yiddish, 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혼성 언어, 주로 중부 유럽이나 미국 등의 유태인들이 사용함) 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어이구 이거야 원, 오늘 아침에는 평소처럼 세 알 정도로는 안 되는 걸. 적어도 초강력 아스피린으로 다섯 알쯤 삼켜야만 견뎌낼 것 같군 그래.」
카퍼필드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때 머리에 터번을 두른 스와미(swami, 인도에서는 종교가와 학자에 대한 존칭으로 쓰이나 미국에서는 흔히 요가수행자를 일컬음) 한 사람이 바구니에 들어 있는 코브라와 피리를 들고, 서로 밀쳐대고 있는 군중들 사이에서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아니지, 아닐세! 아무래도 그보다 좀더 강력한 진정제 한 병이 더 낫겠네 그려.」
카퍼필드는 별로 곱지 않은 시선으로 하늘을 쏘아보았다. 산발적인 헬리콥터의 굉음이 그의 두통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했다. 그날 꼭두 새벽부터, 글로벌 인콰이어러(the Global Inquirer, 미국의 언론사)와 프랫틀러(the Prattler, 미국의 언론사) 소속 헬기들이 마치 굶주린 독수리 마냥 빌딩 주위를 선회하고 있었고, 활짝 열려 있는 탑승구 밖에는 망원렌즈를 부착한 카메라를 움켜쥔 사진기자들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카퍼필드는 그 순간에도, 재치를 부린답시고 자기 회사 헬리콥터의 외관에 상어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려 넣게 한 프랫틀러 사 관계자의, 지독히 근시안적인 안목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다음.」
트리스턴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호명하며 이름을 지우는 한편 스와미가 스르르 밖으로 사라지려는 순간, 한 사진기자의 플래시가 번쩍하고 섬광을 발했다. 그때 코브라가 마치 그것이 저를 부르는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쉭쉭 소리를 내자, 카퍼필드가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넨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나? 자네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기고 있다구. 우리 본부에는 벌써부터 리키호수관광 예약대리점, 아메리카 오데스트 피플(The America’s Oddest People, ‘미국의 별난 사람들’이라는 뜻의 잡지사 명칭) 등등에서 전화가 쇄도하고 있단 말일세. 게다가 네 개의 주요 증권사에서는 자기네 전문분석가들한테, 이번 일이 우리 회사의 주가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추이를 예측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는군.」
트리스턴은 속기용 메모장에 발바리개의 모습을 마치 발이 달린 조각 구름처럼 끄적거리다가, 카퍼필드에게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 전문분석가라는 치들에 대해 조사해보면, 그 중에서 몇 명 정도는 자네가 써먹을 수도 있을 걸세.」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좀 봐주라구. 밤이 샐 때까지 자네 옷장 바닥에서 개기고 난 후라서 그런지, 노이로제가 아주 악화되어서 말이야.」
카퍼필드가 손바닥을 위로 들어올려 보이며 볼멘소리를 뱉어냈지만, 트리스턴은 미안하다는 기색은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난 또 그 보안장치의 해제 버튼이 있는 곳을 자네도 알고 있는 줄로만 여기고 있었거든.」
트리스턴이 건성으로 말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는 전혀 그걸 찾아낼 수가 없더라구. 오늘 아침에 자네가 나를 꺼내주라고 스벤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지금껏 자네 실크 파자마들이나 더듬거리고 있었을 걸세.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쉰 벌의 파자마를 필요로 하는 남자가 세상에 자네말고 또 있을까?」
트리스턴은 그 반격에는 모른 척하고 카퍼필드의 가슴을 흘낏거리더니, 알만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오늘은 자네 넥타이가 죽여주는데! 자네 눈빛과 아주 잘 어울려.」
치거니 받거니 하던 두 사람의 정겨운 대화는, 투명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들이 나란히 대기하고 있는 승강구 근처에서 서로 다투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거 놓으라구, 이 양반아! 옷 구겨지잖아.」
세련된 목소리로 큰소리를 치는 듯하더니, 실크 모자를 쓴 한 남자가 직원들의 제지를 뚫고 스테이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트리스턴은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경우를 겪으면서도 늘 보여주었던 그 전설적인 침착한 모습으로, 오히려 의자 등받이에 편안히 기대며 고쳐 앉았다. 군중들 사이에는 심상치 않은 침묵이 흘렀으며, 바로 근처에 모여 있던 기자들은 마치 신선한 피의 비릿한 냄새라도 맡은 포식동물처럼 코를 벌름거리면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기대에 찬 눈초리를 빛냈다.
새로 등장한 남자는 청중의 온 시선을 휘어잡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광택 나는 실크 모자를 재빠르게 벗어 젖히고, 사자 갈기와도 같은 흰 머리카락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천재적인 환상가, 와이트 리즈가 여러분을 최상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의 끝 쪽을 퉁기자, 한 다발의 카네이션 부케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런 고색창연한 트릭에 대해 그저 몇 군데에서 산발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을 뿐이었다.
헬리콥터들이 잠시 멀어진 사이에, 트리스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저 사람을 내보내시오.」
덩치 큰 노르웨이 출신의 스벤은, 드라마 촬영을 할 때마다 지나치게 카메라를 바라보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는 이유로 베이워치(Baywatch, 미국의 인기 TV 드라마 시리즈) 제작진에서 해고당하는 바람에, 소싯적부터 꿈꾸었던 액션스타의 꿈을 일찍이 접어야만 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개인 경호팀장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트리스턴 주변에 막강하게 포진하고 있는 보디가드들과 함께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한결같이 입고 있는 회색 양복의 겨드랑이 부근이 수상쩍게 불룩하고, 아무리 흐린 날씨에도 레이밴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탓으로, 그들은 군중들 사이에서도 쉽게 구별이 되었다.
난입자는 그들 몇몇을 향하여 집게손가락을 흔들며 비난조의 삿대질을 해대었다.
「신사 양반들, 나 같으면 그러지 않겠수다! 신문에 난 걸 보면, 이 대회는 공개되어 있다고 했소. 내게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상금 1백만 달러에 대한 기회가 보장되어 있다는 게 아니오. 이런 식으로 내 성질 건드리면 법대루 할 거요.」
그러고는 실크 모자에 손을 넣어서, 처음에는 머뭇머뭇하는 토끼 한 마리를, 그 다음으로는 휴대용 전화기 한 대를 그 안에서 꺼내었다. 바로 근처에서 보고 있던 여자아이 하나가 엄마 손에 매달리며 즐거운 환성을 질러댔다.
트리스턴이 그쪽을 향해 손가락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퉁겼다.
카퍼필드는 고용주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 친구가 한 점 땄군 그래. 또 한 건의 법정시비가 늘어나게 되면 결국은 대중의 감정만 상하게 만들고 말지 않겠어?」
「저 자가 한 점을 땄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금지조항이 있단 말일세. 자넨 설마 내가 직접 스벤에게 즉시 사살하라는 지시라도 내리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이보게 스벤, 리즈씨를 어서 모시고 나가게!」
카퍼필드는 경호팀장을 부르면서도, 끔찍스러운 신문기사의 제목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펼쳐졌다.
보디가드 몇 명이 마술가의 팔을 움켜쥐는 것을 본 그 여자아이가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용서받지 못할 거요, 레넉스 회장. 당신은 오직 사물이 사라지게 할 줄만 알고 있는 게 아니던가요, 안 그래요?」
보디가드들이 출구 쪽으로 끌고 가는 동안에도 리즈는 짐짓 교양 있는 척 허세를 부리며 노래하듯 입을 열더니, 기자들의 TV 카메라 렌즈를 향하여 고개를 들이밀며 덧붙였다.
「저 자에게 내 아들에 대해서 한번 물어보시오. 저 자에게 어떻게 해서 지난 십여 년 동안이나 내 아들을 사라져버리게 하고 있는지 물어보란 말이외다!」
그 악다구니는 와이트 리즈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까지 끊이지 않고 대기 속으로 울려 퍼졌으나, 트리스턴은 그저 앞에 놓인 속기장을 새로 넘기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크로스 제품의 순금 만년필을 꺼내며 다시 호명을 계속했다.
「다음.」
타닥타닥 거리는 헬리콥터의 소음이 오히려 그 답답한 정적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여자아이의 어머니는 쪼그려 앉아 아이의 볼을 토닥거려주고 나더니, 트리스턴을 비난하는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이보세요 회장님, 돌아가기 전에 꼭 한마디만 하겠는데요, 이 세상에 마법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다구요. 아무래도 레넉스 회장님으로선 그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다는 것 이외에는…….」
여인이 말하려던 나머지 부분은, 헬리콥터의 엔진소리와 회전음이 내고 있던 규칙적인 굉음마저 뚫고 들려올 정도로 엄청난 경악의 비명 소리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 여자아이가 아직 눈물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은 얼굴에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킬킬거리면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 저기 좀 봐. 심술궂은 서부의 마녀다!」
아이의 말에 트리스턴이 벌떡 일어섰다.
「세상에, 대체 저게 뭐지?」
카퍼필드는 고용주가 놀라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느라, 군중들이 탄성을 질러대는 순간까지도 미처 위를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거 참 이상한 일이로군. 난 스카이-라이터(sky-writer, 비행기 등을 이용하여 공중에 연기 따위로 글씨나 도형을 그려서 광고 및 홍보를 하는 사람)를 부탁한 기억이 없는데.」
트리스턴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연기의 궤적을 그리며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물체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중얼거렸다.
카퍼필드도 연기와 재의 꼬리를 뒤로 끌며 날고 있는 물체가 다름 아닌 빗자루임을 알아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모르고 있었다.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빗자루에는, 겁에 질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귀청이 터질 정도로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작은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 새로운 발명품일 듯한 비행물체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 헬리콥터의 회전날개와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서투른 공중제비를 돌며 내려오는 것을 쳐다보면서, 카퍼필드는 오금이 다 저리도록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천우신조의 기회다 싶어 선명한 사진을 찍으려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던 프랫틀러의 사진기자는, 흔들거리던 헬리콥터가 크라이슬러 빌딩의 치솟아 오른 뾰족탑과 충돌하기 직전, 간발의 차이로 급상승을 시도하는 바람에 카메라를 떨어뜨리고 겨우 가죽 손잡이를 움켜쥘 수 있었다.
헬리콥터의 조종사는 현명하기 그지없게도, 만용을 부리는 대신에 신중을 기하면서 일단 멀찍이 물러났다. 때마침 불어온 기이한 하강기류가 빗자루를 감싸고 아래로 떨어지는 기세를 줄여주면서, 거의 깃털처럼 서서히 맴돌아 나선형을 이루며 내려오게 만들었다. 빗자루가 흔들리며 빙빙 돌 때마다 점점 커지기만 하던 그 탑승자의 째지는 듯한 비명은, 마침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