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절 모 중앙지의 콩트인 ‘생활 속에서’를 즐겨 읽었다. 서민적이면서 나의 정서에 맞아 공감도 되고, 분량이 짧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신혼 초기 피아노교습소의 피아노를 닦으면서 문득 나도 이런 글을 써서 한번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면지에다 여러 번 쓰고 긋기를 반복하고서 초안을 완성했다. 못 쓰는 글씨지만 최대한 정성을 담아 원고지에 옮기고는 신문사로 발송했다. 날이 지나도 답신이 없자 내 글을 수없이 읽어봤고, 나는 생각했다. ‘글솜씨도 아닐뿐더러 시대적으로 정서가 맞아야 하는데 좀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다시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세상에 내놓는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문맥은 맞는 건지, 존댓말이나 부호사용은 틀리지 않았는지 등 모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맞춤법은 ‘아래한글 프로그램’에서 잡아주니 다행이었다. 8~90페이지 정도쯤 썼을 시점이다. 혹시 끝까지 잘못 쓸까 봐 고민이 되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정년을 몇 달 앞둔 친구가 생각이 나 도움을 청하기로 맘을 먹었다. 그런데 혹시 글이 너무나 어설플까 봐 친구에게 부탁하기 전에 아내에게 먼저 한번 읽어 달라고 했다. 아내가 읽어 보고는 “어이쿠 참, 이게 뭐 창피야 자랑이야?” 하고는 “거슬리는 이야기가 나오기만 해 봐라. 보이는 족족 다 찢어뿔끼다”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대충 검토를 받고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게도 망설임도 없이 이메일을 찍어주며 보내보라고 했다. 이메일을 보낸 후 다음 날, 확인차 다시 전화를 했다.
“친구야, 이메일 확인해봤나?”
“아아, 보기는 했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내가 뭘 안다고 …… 완전히 엉터리인가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공들인 게 아까워서 “친구야, 그래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는 좀 짚어 주마 안 될까?”라고 물으니 “아아, 그게 아이고” 하고는 머뭇거렸다.
“바쁘겠지만 잠시 만나서 설명을 좀 해 주면 너무 고맙겠는데.”
이렇게 해서 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소주를 한 잔씩 주고받다가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엑셀파일에다가 혼잣말인지 그냥 한 줄, 한 줄이고 무슨 내용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던데.”
조금 설명을 듣고 나니 ‘앗! 엉뚱한 걸 보냈었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파일명이 ‘회갑연’과 ‘회갑연62’로 비슷해서 ‘워드파일’을 보낸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기초 자료파일인 ‘엑셀파일’을 보낸 것이었다. ‘엑셀파일’은 긴 시간 동안,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내용을 평소에 생각날 때마다 짧게 짧게 한 줄씩 기록한 파일이다. 이 내용을 설명하고 친구도 나도 크게 한바탕 웃고는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제 잘못 보낸 걸 알았으니 지금 당장 다시 보내고 받은 이후 친구로부터 어떤 매가 돌아올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십여 일 뒤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는 “너 쓰고 싶었겠더라”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 글을 쓰면서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한 번쯤 말을 해야 좀 덜 창피하고 계속 글을 써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살면서 해온 수많은 꼴통 짓들까지 쓸까 말까 고민도 하다가 가급적이면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있는 그대로를 쓰다 보니 지난 생활들 동안 너무나 철부지였고, 건방졌고, 망나니였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이 생활 글의 자료들을 6여 년 준비하면서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자료들을 한 줄 한 줄 그으면서 구체적으로 옮겨보니 더더욱 부끄러운 마음에 ‘글 쓰는 것을 포기할까’라는 생각도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타이르며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현재가 중요한 거야’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방황의 시기를 거쳐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라고 생각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인생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 이사를 하면서 달구지 뒤를 따라가는 모습과 조그마한 초가집이 과수원 내에 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거리가 5리쯤 되었는데 운 좋은 날은 급식으로 빵을 싣고 가는 리어카를 밀어주며 빵을 하나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앙꼬도 없는 투박한 빵이었지만 그 맛은 지금도 비길 데가 없다. 하루는 엄마가 연근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 주었는데 먹고 싶은 마음에 등교하면서 돌무덤 뒤에서 해치우고는 지각을 해서 선생님께 혼쭐이 났다.
당시의 부모님들은 대체적으로는 용돈의 개념이 없었다. 과외수업비가 한 달에 400원이었는데 일찍 받고 늦게 받고 해서 두 달에 세 번을 받아서 맛있는 삭힌 감을 사 먹었다. 아마 이 짓이 부모님의 등골을 빼기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이 자그마한 과수원을 운영하였는데도 우리 집 사과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남의 집 과일을 서리해 먹는 맛이 더 좋았다. 한번은 밭 주인에게 들켜 혼쭐만 나고 말았지만 요즘 세상 같으면 어떨까? 각박한 지금보다 먹을 것은 귀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분이 우리 집에 왔다. 담배 필터가 있는 고급 담배를 피우면서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를 보고 “만섭아! 이 담배 한 개비 줄까?” 하면서 아버지를 놀렸다. 특히나 그분은 내 여자 동기의 아버지라 어린 나이인데도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까지 아끼면서도 비록 용돈은 주지 않았지만, 학비와 책값은 미루는 법이 거의 없었다.
선배들은 성적에 따라 대구 시내 학교로도 입학이 가능하였지만, 우리 때부터는 교육행정의 변화로 자치 군 내의 중학교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경쟁이 조금 있어서 떨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발표 날 아침 아버지와 나는 사과를 한 리어카 싣고서 밀고 당기며 청과시장으로 갔다. 판매를 의뢰한 후 중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벽에 붙어 있는 하얀 모조지의 합격자명단을 훑기 시작했다. 먼저 이름을 확인하신 아버지의 첫 말씀은 “너 뭐 먹고
싶노?”였다. “예, 짜장면예.” 처음 먹어보는 짜장면, 꿀맛에 비유하랴.
나를 찜(특별히 사랑해)주신 선생님이 지나친 사랑으로 나의 뺨을 때리는데 고개를 돌려버려 귀 고막이 터졌고 처음으로 시내에 있는 병원을 가게 되었다. 지나가다가 대학병원을 보고는 그 크기에 놀라 나도 모르게 “와아!” 하고 탄성이 튀어나왔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우리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그 선생님이 가장 좋았고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께서 정년이던 해에 마침 내가 동기회 일을 맡고 있어서
ㅎ호텔에서 동기들과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드렸더니 그 당시를 기억하시고는 “귀 괜찮아?” 하며 웃으시는데 옛날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와서 공부는 흥미가 없었고 짤짤이가 너무 신이 났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의 눈치를 봐가며 열심히 흔들었다. 밑천이 필요한데 돈은 없고 부모님께 샀다고 검사받은 전과나 수련장을 반값에 팔아넘겼다. 심지어는 책가방에서 책을 집어내고 사과를 가득 담아 와서 친구들에게 팔아 밑천을 만들기도 했다. 선도부에 들켜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그 시절엔 짤짤이가 그렇게도 재미있었나 보다.
친구 세 명이서 친하게 지냈다. 그 친구들은 찐빵도 잘 사 주고 비싼 교복에 씀씀이도 좋아 부자처럼 보였다. 그중 한 친구가 자기 집에 아버지가 기억하지 못하는 금고가 있는데 열쇠가 없어 열지 못한다고, 너희 공납금 낼 돈 나를 주면 그 돈으로 열쇠를 사서 금고를 열어 공납금도 내고 남은 돈으로 우리 같이 빵도 사 먹고 영화도 보고 즐기자고 했다. 너무나 솔깃해서 나를 포함한 두 친구는 그 친구에게 공납금을 전했다. 정말로 빵도 사 주고 하며 약속을 지켰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이런저런 이유로 금고를 열 수가 없다고 했다. 급기야 선생님께서 공납금을 내지 않은 우리를 의심하고는 각 가정으로 확인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학교로 찾아오신 아버지는, 공납금을 전한 친구의 아버지로 학교의 육성회장님이었다. 교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서 있던 우리의 뺨을 날렸다. 써버린 공납금을 누가 대납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성장해서 느낀 점이 있다. 정도에 넘게 이익을 보려다가는 당한다는 것, 부모·자식 간 외에는, 형제간에도 각 가정이 꾸려지면 서로 배려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부모님은 공부와는 거리가 먼 자식인데도 꼭 대학을 가야 한다며 인문계 진학을 희망하셨다. 성적이 뻔하니 지원하는 곳마다 낙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재수를 하라’고 하셨다. 이때부터 어설픈 농땡이가 시작되었다.
촌놈이 대구 시내로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보습학원에 등록하고, 고등학생인 누나의 자취방에 얹혔다. 등교 첫날 얼떨결에 앞자리에 앉았다. 실장을 뽑는데 줄반장도 못 해본 내게 “너 자세가 되었어” 하시며 실장을 하란다. 감투에 시건방이 들어 노는 것이 더더욱 재밌었다. 학원 옆에 분식 가게가 있었는데 이곳이 농땡이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등교하자마자 출석만 부르고 나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개비 담배도 사서 피우며 당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구는 너무나도 재미있었지만, 게임비가 문제였다. 눈만 뜨면 돈 속일 궁리만 가득했다.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면 잠은 오지 않고 천장에 당구대가 하나 그려지고 큐대가 왔다 갔다 한다. 이토록 치고 싶은데 돈은 없고, 주인에게 부탁해서 밤새도록 당구장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우리끼리의 단합이 이루어져 주말에는 남산동으로 원정까지 가서 남산동 내의 작은 조폭 상록파와 어울렸다. 두목이 ‘정실이’였는데 여자였다. 가끔은 이 두목의 지시에 따라 “뛰어” 하면 각목 등을 들고는 상대 적을 향해 “와아” 하고 몰려다녔다. 요즘 생각해보면 두목이 결혼한 여자라서 ‘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입학시험을 치렀다. 여기저기 다 떨어지고 최종적으로 ㄴ고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서기를 시켰고 그 명목으로 학급비를 거두어서는 다시 짤짤이 재미에 빠졌다. 누군가의 신고로 탄로가 나서 모두 근신 처분이 내려졌다. 그 벌로 화단의 흙을 파고 묻기를 반복하다가 틈만 나면 담 너머에 있는 낱담배 가게로 가서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학생과장 선생님의 불시 순찰로 화단에서 사라진 우리를 확인하고는 우리가 있는 아지트를 덮쳤다. 도망을 쳐서 매는 피했지만 바로 퇴학처분이 내려졌다. 입학한 지 불과 두 달 정도 되었을 때다. 부모님께는 말씀을 못 드리겠고 액자 속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의 비상금 오백 원짜리 지폐 석 장을 훔쳐서 집을 나왔다. 며칠이 지나니 돈도 떨어지고 집에 들어갈 자신은 없고 구인광고를 들추어 화원에 있는 ㄷ하드(아이스크림)공장에 취직을 했다. 기숙사가 있으니 먹고 자고는 해결이 되었다. ㅎ여고에서 퇴학당한 여학생도 한 명 있었다. 우리 둘은 주야 근무를 같이했고, 그 여학생이 내 옷도 빨아주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야간 근무를 둘 다 땡땡이치고 비번인 선배의 자취방으로 가서 하루를 묵었다. 당시 선배는 28살로 우리보다 열 살 정도 많았다. 세 명이 누운 배치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 여학생의 깊은 곳을 향하며 숨길을 가다듬었다. 그곳은 처음인지라 떨리는 손으로 숨을 죽여 가며 개미가 나무를 타듯이 고물고물 한참을 기어 올라갔다. 손이 잡혔다. ‘아마 막는다고 뿌리치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데 헉! 손이 투박하지 않은가. 28살 선배의 손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 몸부림치는 척 돌아누우며 그냥 잠을 청했다. 잠은 제대로 오지 않았고 어둠만이 걷히고 있었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인지 모르나 회사를 나왔다. 그 여학생이 그리웠다.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회사 사무실에 가서 수소문해 보았으나 알 길은 없고 그나마 집 주소만은 적어 나올 수 있었다. 찾아 나섰다. XX동 1084번지 OOO,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 주소와 이름이다. 이 주소로 골목골목을 누볐는데 같은 번지가 여러 집이었다. 동사무소를 찾아가서 어떤 설명을 해서 자료를 볼 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주민등록 파일철을 열람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당시에는 전산시스템은 물론이고 미성년자의 경우 사진도 붙어 있지 않아 어느 집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다. 20여 일 일한 대가를 받아 나온 터라 아직은 약간의 돈이 남아 있었지만 외롭기도 하고 집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으로 번 돈은 부모님의 속옷을 사 드리면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속옷을 준비하고 용기를 내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도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야! 이놈이 살아 있었구나. 용서하겠으니 얼른 집에 들어와서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집을 들어갔더니 어이가 없으신지 정말로 꾸중은 별로 안 하고 다른 학교에 전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며 동분서주였다. 며칠을 집에서 지내니 미안한 맘도 들고 답답하기도 하고 또다시 집을 나왔다.
침산동의 작은 공장에 프레스공으로 취직을 했다. 밥상 판 다리를 고정하기 위해 볼록한 금속판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평평한 얇은 금속판을 금형 기계에 넣어 밟으면 다리를 지탱할 수 있는 모양이 만들어졌다. 신기하고 재미도 있었지만 꽤나 힘들었고 자는 방이 골방이었는데 환경이 매우 지저분했다. 며칠을 자고 나니 사타구니에 습진이 생기고 하루가 지나고 나니 주요부위까지 번졌다. ‘아아 이러다간 장가도 한번 못 가 보고……’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집으로는 돌아가야겠는데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고민, 고민하다가 잔꾀를 내어 친구에게 나의 위치를 슬쩍 흘렸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엄마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슬며시 도망가는 척하며 붙잡혀 집으로 끌려갔다. 한참 동안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바르자 환부가 꾸덕꾸덕해졌다. 이런다고 한동안 집에 갇혀 있으니 좀이 쑤셔서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양계장의 사룟값으로 비축해 놓은 십만 원권 수표를 발견하고는 그걸 가지고 도망을 쳤다. 아마도 형이 나를 끊임없이 감시했는지 바로 알고는 나를 쫓기 시작했다.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 뒤에서 “도둑 잡아라” 하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후 누군가가 나를 쫓아왔고 단숨에 나를 잡고는 형에게 넘길 태세였다.
“아닙니다. 도둑이 아니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형인데 내가 잘못을 저질러…….”
“알았다 빨리 도망쳐라, 이놈아.”
아무리 뛰어도 대학생인 형을 따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거의 다 따라잡혔다. 골목길을 돌자마자 순간적으로 무작정 남의 집에 들어갔다. 마침 빈집인지 인기척이 없었다. 방문은 열려 있었고 농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는 바깥 동태를 살폈다. “이 새끼 어디로 간 것이야” 하는 형의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조용해졌다. 그 길로 아무런 생각 없이 부산으로 향했다.
갖고 나온 돈은 거의 바닥이 났고 앞길이 막막했다.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더니 서면의 ‘XX궁중깍두기’ 식당을 소개해 주었다. 주로 식당 청소와 배달하는 일이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다. 며칠 일을 하고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연산동의 룸살롱, 보수동의 요정, 서면의 주점(지금의 나이트클럽) 등에서 웨이터로 일을 했다.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요정은 방이 너무 커서 청소하기가 힘이 들었다. 한 푼을 얻어 볼까 싶어 수건을 들고 화장실을 따라다녔지만, 손님이 직접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아가씨가 받은 것을 조금 얻는 것이 전부였다. 수입(팁)은 주점이 가장 좋았다. 술값을 웨이터들이 직접 받고 술과 안주를 가져다주면서 잔돈을 건네는 시스템이다. 주문을 받을 때에 미리 앉은 손님들의 관계를 눈치껏 살펴보고는 연인관계다 싶으면 잔돈을 줄 때에 깊은 인사를 하며 “이 잔돈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하면 십중팔구 “응, 그래 가져”라는 말이 나온다. 이 잔돈을 일이 끝나고 정리해보면 일당보다도 오히려 많았다. 이때만 해도 번호표나 웨이터에게 지정된 테이블이 없어서 웨이터들도 이런 부류의 손님을 받으려고 때로는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이 웨이터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했다. 한번은 뒤에 들어온 박 군이 이런 팁에 욕심을 부리며 가로채다 먼저 들어온 선배 웨이터한테 직사하게 얻어터지는 일도 있었다. 웨이터 세계에서도 서열이 존재하듯, 어쩌면 세상살이는 더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서열은 평생 주어지는 것 같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 복지 관련 일을 하면서 ‘중위소득’이 복지 혜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중위소득’이란 총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긴 후 정확히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아마도 어쩔 수 없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내 자신이 청년, 중년, 장년을 지나 나이가 들었을 때,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나를 가늠하는 척도인 셈이다. 과연 나의 순위는 어디쯤일까를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충실하자.
박 군처럼 얻어맞지는 않았지만 나도 연인관계의 손님을 받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러다가 웨이터들끼리 멱살도 잡고 잡히며 험상궂은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젊은 피가 흐르는 웨이터들의 세계가 좀 거친 것도 사실이다. 내 마음이 여리긴 하지만 뿔뚝 성질이 있어서 ‘계속 이 일을 하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어떤 잔꾀를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에는 들어왔고 기죽은 듯이 한참을 지냈다. 또 몇 날 며칠을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 좀도 쑤시고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부모님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서 또 술을 퍼마셔댔다. 늦은 시간대에 한참 선배도 같이 어울려 수다를 떨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는 모두 거하게 취해서 선후배가 구분이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마도 내가 선배한테까지 말을 좀 시건방지게 지껄였는지 “이 짜쓱이 까불고 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