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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방법
일반 독자들은 읽기가 더 수고스럽겠지만, 책의 분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전문적 내용은 바로 이 단락과 같이 글자 크기를 줄여 놓았다. 되도록 많이 줄였음에도 책 분량은 여전히 엄청나고, 작은 크기의 글자로 이 긴 내용들을 전달하는 게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부디 한 번에 한 장(章) 이상은 읽지 말기 바란다.
글자 크기를 줄이고 들여쓰기 한 문단은 인용문이다. 본문의 위 첨자 숫자는 권말의 주석 번호를 가리킨다. 주석에 명시되어 있는 도서에 대해서는 참고 문헌에 보다 자세한 정보를 실어 두었다.
포틀랜드 화병
평화의 제단의 프리즈
평화의 제단의 텔루스의 프리즈
어느 어린 소녀의 초상화
물의 요정 클뤼티에
봄의 요정
베티 가의 벽화 세부 양식
파르네시나 빌라의 벽화
사포
콜로세움
콜로세움의 내부
트라야누스 원주에 새겨진 로마 병사와 다키아 병사
안티노우스
오스티아에서 발견된 제단
베네벤토의 트라야누스 개선문
팀가드의 유적
님의 퐁 뒤 가르
바알베크의 유피테르 헬리오폴리타누스 신전
바알베크의 베누스 혹은 바쿠스 신전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카라칼라 욕장 내부의 복원도
미트라와 황소
헬레나 황후의 석관
로마인들은 애초에 예술적인 태생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는 전사였고, 이후에는 통치자였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즐기기보다 통치를 통해 질서와 안전을 확립하는 것을 더 숭고하고 고귀한 작업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죽은 대가들의 작품에는 많은 돈을 지불했지만, 살아 있는 예술가들은 비천한 존재로 경멸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지를 숭배하지만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경멸한다.”1 법률과 정치, 그리고 수작업 기술 가운데 농업만이 명예로운 생활 방식처럼 보였다. 건축가를 제외하고 로마의 예술가 대부분은 그리스인 노예이거나 해방 노예, 아니면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예술가는 손으로 작업했으며 숙련공으로 분류되었다. 라틴 작가들은 예술가의 삶이나 이름을 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의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익명으로 이루어졌다. 미론, 페이디아스, 프락시텔레스, 그리고 프로토게네스가 그리스의 미의 역사에 빛을 밝힌 것처럼 어떤 생생한 인물 묘사도 로마 예술의 역사를 고상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역사가는 부득이하게 동전, 꽃병, 조각상, 돋을새김, 그림, 그리고 건물들의 목록을 만들기 위해 사람이 아닌 물건에 대해 말한다. 역사가는 이렇게 모아진 물건이 애써 로마의 파란만장한 영광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희망을 갖는다. 예술 작품은 지성이 아니라 눈이나 귀 또는 손을 통해 영혼에 호소한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생각과 말로 희석될 때 빛을 잃어 간다. 생각의 우주는 수많은 세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감각은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언어로 옮길 수 없는 특유의 전달 수단을 갖고 있다. 예술가들조차 예술에 대해 글을 쓰지만, 헛된 수고로 끝나고 만다.
특별한 하나의 불행이 로마의 예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말하자면 우리는 처음에는 원형이자 주인처럼 보이는 그리스 예술을 통해 로마 예술에 도달하게 된다. 인도의 예술이 낯선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시키듯이, 로마의 예술은 비슷한 모양의 단조로운 반복으로 우리를 낙담케 한다. 우리는 오래전에 비슷한 모양의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기둥과 기둥머리, 비슷한 모양의 세련된 돋을새김, 비슷한 모양의 시인과 통치자의 흉상, 그리고 신들의 흉상을 보아 왔다. 경탄을 자아내는 폼페이의 프레스코화조차 그리스 원본의 복제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혼합 양식(이오니아 양식과 코린트 양식의 복합체 — 옮긴이)만이 로마인의 독창적인 발명품인데, 그것은 고전풍의 통일성, 단순성, 그리고 절제와는 거리가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예술은 압도적으로 그리스풍이었다. 시칠리아와 그리스풍 이탈리아를 통해, 캄파니아와 에트루리아를 통해, 그리고 결국에는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와 그리스풍 동방을 통해 그리스의 미의 형태와 방식과 이상이 로마 예술의 일부가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리스인 예술가들이 부와 예술 후원의 중심지로 새롭게 부상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그리스인이 이룩한 위대한 성취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복제해서 로마의 신전과 궁전, 그리고 광장을 만들었다. 모든 정복자들이 그리스인의 솜씨로 만들어진 모형을 집으로 가져왔고, 모든 유력자들은 남아 있는 보물을 찾으려고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차츰 로마는 구입하거나, 아니면 훔친 그림과 조각상으로 가득 넘쳐 나는 박물관이 되어 갔고, 이것이 1세기 동안 로마 예술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로마 예술은 헬레니즘 세계 속으로 사라졌다.
위에서 말한 내용은 전부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이제 알게 되겠지만, 어떤 측면에서 로마 예술의 역사는 평방(平枋, 고대 건축에서 줄기둥이 받치고 있는 수평의 대들보 부분 — 옮긴이)과 아치가 대립하는 역사이다. 그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 로마 예술의 역사는 그리스 예술의 침입으로부터 이탈리아 고유의 사실주의를 되찾으려는 싸움이다. 그리스 예술은 인간보다는 신을, 현세의 개인보다는 표상이나 플라톤의 사상을 묘사했다. 그리고 직관과 말의 진실성보다는 형태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에트루리아인의 무덤에 인물의 모습을 새기는 데 도움이 되었던 이탈리아 고유의 힘찬 남성적인 예술이 그리스인의 로마 예술 정복과 네로의 그리스 문화 애호의 황홀경 사이에서 동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이탈리아 고유의 예술은 헬레니즘 예술과 단절했으며, 사실주의적 조각, 인상주의적 그림, 그리고 아치와 볼트의 건축에 힘입어 고전 예술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로마는 차용한 아름다움뿐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들로 1800년 동안 서구 세계에서 예술의 수도가 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로마를 여행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오스티아 항에서 테베레 강을 북쪽으로 거슬러 온 고대 여행자라면 우선 세차게 흐르는 탁한 조류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세찬 조류는 구릉과 계곡의 흙을 바다로 실어 날랐다. 이런 간단한 사실의 이면에는 서서히 진행되는 침식으로 인한 비극, 테베레 강에서 양 방향 교역의 어려움, 테베레 강어귀에 주기적으로 쌓여 가는 토사, 그리고 거의 매년 봄이면 로마의 저지대를 침수시켰던 홍수가 자리 잡고 있다. 저지대의 홍수는 주민들로 하여금 작은 배로 도달할 수 있는 위층에 살도록 제한했으며, 부두의 곡물 창고에 저장된 곡물을 자주 망쳐 놓았다. 홍수가 발생하는 경우 주택이 붕괴되었고 사람과 동물 가릴 것 없이 목숨을 잃었다.2
고대 여행자가 로마 시에 가까워질 즈음이면, 중심 상가가 그의 눈길을 끌 것이다. 이곳은 테베레 강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1000피트에 걸쳐 있었으며, 노동자, 상점, 시장, 그리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물건들 때문에 소란스러웠다. 중심 상가 너머로 기원전 494년과 449년에 성난 평민들이 농성 파업을 벌였던 아벤티누스 언덕이 솟아 있었다. 아벤티누스 언덕의 왼쪽 경사면에는 카이사르가 민중들에게 남겼던 정원이, 그리고 정원 뒤로는 야니쿨룸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멋진 아이밀리우스 다리에서 테베레 강 동쪽 기슭 가까이에 (지금도 우뚝 서 있는) 행운의 여신과 새벽의 여신에게 봉헌된 신전과 함께 보아리움 광장 또는 우시장이 자리 잡았다. 더 멀리 북쪽 오른편에는 대저택과 신전으로 가득한 팔라티누스 언덕과 카피톨리누스 언덕이 모습을 나타냈다. 왼쪽 비탈면으로 아그리파의 정원이 있었고, 그 너머로 바티카누스 언덕이 나타났다. 동쪽 강기슭 멀리 도시 중심부의 북쪽으로는 마르스 평원의 널따란 잔디밭과 장식된 건물들이 펼쳐졌다. 여기에는 발부스와 폼페이우스의 극장, 플라미니우스 원형 경기장, 아그리파 욕장,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이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서는 군단들이 훈련했고, 운동선수들이 경쟁했으며, 전차들이 경주를 벌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공놀이를 했으며,3 황제들 치하에서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민주주의 활동을 경험하기 위해 민회가 모임을 가졌다.
도시의 북쪽 경계에 발을 내딛는 방문객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성벽의 유적 일부를 보았다. 로마는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 침입 이후에 성벽을 재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군사력과 누가 보아도 확실한 수도 로마의 안전 탓에 성벽의 붕괴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까지는(서기 270년) 사라져 버린 안전의 상징물이었던 성벽을 세우지 않았다. 성벽 안쪽에서 성문이 보통 단일한 또는 삼중의 아치 길로 분리되었다. 이것이 대로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었으며, 대로의 이름을 따서 성문의 이름이 붙여졌다. 동쪽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남쪽으로 로마 시의 경계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방문객은 살루스티우스의 멋진 정원, 친위대의 먼지 쌓인 막사, 마르키우스와 아피우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의 수도교 아치, 그리고 방문객의 오른쪽에서 차례대로 핀치우스 언덕, 퀴리날리스 언덕, 비미날리스 언덕, 에스퀼리누스 언덕, 그리고 카일리우스 언덕을 보게 될 것이다. 성벽을 뒤로하고 아피아 가도 북서쪽을 따라 걷다 보면 카페나 성문을 통과해 팔라티누스 언덕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 신가도(新街道)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북쪽으로 수많은 아치와 건물의 미로를 지나다 보면 로마의 머리이자 심장부인 고대 로마 시의 포룸에 도착하게 된다.
원래 로마의 포룸은 너비 600피트, 길이 200피트가량의 시장이었다. 이제는(서기 96년) 행상들이 근처 거리나 다른 광장들로 물러갔지만, 부근 바실리카에서는 사람들이 공공 업무대행 업체의 지분을 팔고, 당국과 계약을 체결하며,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호사에게 소송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포룸 주변에는 뉴욕 월가 주변처럼 신들에게 봉헌된 몇 개의 소규모 신전, 그리고 부의 신에게 봉헌된 규모가 더 큰 신전 몇 개가 세워졌다. 수많은 조각상이 포룸을 장식했으며, 대형 건물의 줄기둥들이 가로수가 너무 적어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그늘을 제공했다. 기원전 45년부터 카이사르 때까지 포룸은 민회의 회합 장소였다. 어느 한쪽에는 로스트룸(rostrum)이라 불리던 연설자의 연단이 있었다. 이렇게 불리던 이유는 초창기의 연단을 기원전 338년 안티움에서 나포된 배의 로스트라(뱃머리)로 장식했기 때문이다. 서쪽 끝에는 금빛 이정표가 있었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몇몇 집정관 도로의 교차 지점과 시점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금박 입힌 청동 기둥이었다. 이 금빛 이정표에는 길이 닿는 주요 도시들, 그리고 로마와 그 도시들 사이의 거리가 새겨져 있었다. 남서쪽을 따라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과 사투르누스 신전으로 통했던 사크라 가도가 이어졌다. 포룸의 북쪽에서 방문객은 더 큰 광장, 즉 노후한 지역에 변화를 주기 위해 카이사르가 세웠던 율리우스 광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근처에는 아우구스투스와 베스파시아누스를 위해 설계된 광장이 추가로 더 있었다. 그리고 곧 트라야누스가 이곳을 말끔히 치우고 가장 규모가 큰 광장을 꾸밀 것이다.
아무리 서둘러서 한 바퀴를 돌아도 고대의 여행자는 로마 시의 주민들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거리가 구불구불하게 무계획적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거리로서는 부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몇몇 거리는 너비가 16피트에서 19피트까지였고, 대부분의 거리는 동방식으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이었다. 에우베날리스는 밤중에 울퉁불퉁한 포장도로 위로 덜커덕거리며 지나가는 짐수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뿐더러, 낮이 되면 서로 밀치는 군중 때문에 길을 걷는 것이 일종의 전쟁 같다고 불평했다. “아무리 서둘러도 앞에서 밀려들고 뒤에서 빽빽하게 밀어닥치는 일단의 무리들에게 막혀 버린다. 누군가가 나를 팔꿈치로 치고, 다른 누군가가 가마채로 찌른다. 그리고 누군가가 들보로,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포도주 통으로 내 머리를 세게 친다. 내 다리는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고 거대한 발들이 사방에서 내 발을 짓밟는다. 그리고 한 병사가 징 박힌 장화로 내 발가락을 정확하게 찌른다.”4 주요 도로들은 화산암으로 만든 커다란 오각형 블록으로 포장되었다. 가끔 너무 단단하게 굳어진 몇몇 블록은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가로등은 없었다. 어두워진 후에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 나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늘 손전등을 휴대하거나 횃불을 든 노예가 뒤를 따랐다. 어느 경우든 수많은 도둑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문은 자물쇠와 열쇠로 단단히 고정되었고, 밤이 되면 창문에는 빗장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1층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처럼 쇠 빗장을 걸어 자신들을 보호했다. 에우베날리스는 이러한 위험 말고도 고체이건 액체이건 간에, 위층 창문에서 내던진 물체의 위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대체로 유언장을 써 놓지 않고 저녁을 먹으러 외출하는 사람은 바보밖에 없다고 생각했다.5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집에서 작업장까지 실어 나를 공공 운송 수단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평민은 도시 중심부 근처의 벽돌로 지은 공동 주택이나 그들의 작업장 뒤, 아니면 위에 있는 방에서 살았다. 보통 공동 주택은 모든 구역에 걸쳐 있었으므로 인술라(insula), 즉 섬으로 불렸다. 인술라 대부분은 6층 아니면 7층 건물로서 너무 엉성하게 지어져, 많은 인술라가 붕괴되어 수백 명에 이르는 거주자들의 목숨을 앗아 가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건물의 정면 높이를 70로마피트로 제한했지만, 뒤쪽은 더 높이 지을 수 있게 했다. 왜냐하면 마르티알리스가 “200개 계단 위의 다락방에 사는 불쌍한 녀석”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6 많은 공동 주택에는 1층에 작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 공동 주택에는 2층에 발코니가 있었다. 그리고 소수의 공동 주택은 아치형 통로로 거리 건너편의 공동 주택들과 맨 위층이 연결되었다. 이곳 맨 위층은 특별한 평민들을 위한 위험한 옥상 주택이었다. 신가도, 팔라티누스 언덕의 승리의 언덕길, 그리고 비미날리스 언덕과 에스퀼리누스 언덕 사이의 유곽이 들끓는 수부라(Subura) 구역은 대체로 인술라로 가득 채워졌다. 인술라에는 중심 상가의 항만 노동자, 마켈룸 시장의 푸주한, 피스카토리움 광장의 생선 장수, 보아리움 광장의 목우 업자, 홀리토리움 광장의 채소 행상인, 그리고 로마의 작업장 및 사무직 노동자, 그리고 교역 업자들이 살고 있었다. 로마의 빈민가가 포룸의 가장자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포룸을 벗어난 거리를 따라 작업장이 늘어섰다. 이곳에서는 일하는 소리와 흥정하는 소리가 늘 가득했다. 과일 장수, 책 장수, 향수 상인, 여성 모자 판매인, 염색 업자, 꽃 장수, 칼 장수, 자물쇠 제조공, 약제사, 그리고 사람들의 욕구와 괴상한 취미와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던 그 밖의 사람들이 튀어나온 판매대로 통로를 막아 버렸다. 이발사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던 야외에서 장사에 힘썼다. 포도주 파는 선술집이 너무 많아서 마르티알리스의 눈에 비친 로마의 모습은 거대한 살롱과도 같았다.7 장사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지구나 거리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 장소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신발 제작자들은 산달라리우스 지구(Vicus Sandalarius)에, 마구 제작자는 로라리우스 지구(Vicus Lorarius)에, 유리 부는 직공은 비트라리우스 지구(Vicus Vitrarius)에, 보석상들은 마르가리타리우스 지구(Vicus Margaritarius)에 모여들었다.
높은 보수를 받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며 호사스럽게 살던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을 제외하고는 이탈리아의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한 작업장에서 일을 했다. 루쿨루스는 아르케실라우스에게 1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주면서 펠리키타스 여신의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으며, 제노도루스는 메르쿨리우스의 거상을 만들어 준 대가로 4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받았다.8 건축가와 조각가는 의사, 교사, 그리고 화학자와 더불어 “자유민의 기술”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로마에서 대부분의 공예물을 제작하던 계층은 노예였거나 노예였었다. 일부 주인들은 노예에게 조각과 그림, 그리고 이와 유사한 기술들을 훈련시켰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이탈리아와 외국에 내다 팔았다. 이러한 작업장에서는 분업이 이루어졌다. 즉 어떤 사람은 제대에 바칠 봉헌용 조각상을, 또 다른 사람은 장식용 처마돌림띠를 전문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조각상에 붙일 유리 눈을 잘라 냈다. 각기 다른 화가들이 똑같은 그림 위에 아라베스크 무늬나 꽃, 풍경이나 동물, 사람을 차례로 그렸다. 많은 예술가들이 수요가 많은 시대의 고미술품들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위조범이었다.9 기원전 1세기의 로마인들은 이러한 물건에 쉽게 속아 넘어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졸부들처럼 그들도 아름다움과 효용성보다는 오히려 값과 희소성에 따라 물건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제정기(帝政期)에는 부자가 된다는 것이 더 이상 영예가 아니었으므로 취향이 개선되었으며, 멋진 물건에 대한 진지한 애착 때문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그리스에서 몇 안 되는 사람만이 알던 세련된 식기와 장식품 등이 로마의 수많은 가정에 유입되었다. 예술과 고대의 관계는 산업과 근대의 관계와 같았다.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기계로 대량 생산되어 남아돌 만큼 풍부하고 유용한 제품을 마음껏 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충분히 노력만 기울인다면, 정성 들여 완성된 멋진 물건이 가져다주는 신비스러우면서도 잔잔한 행복에 둘러싸일 수 있었다.
중산 계층의 주택을 살펴보고 싶은 방문자는 로마 시의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는 주요 간선 도로변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벽돌과 치장 회반죽으로 된 주택 외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안감과 더위의 영향 때문인지 단순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졌다. 로마의 유산 계층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주택 외부를 치장하려는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았다. 2층 이상의 집을 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하실은 보기 드물었다. 그리고 지붕은 붉은 기와로 번쩍였고 창에는 덧문, 아니면 이따금 창유리가 달려 있었다. 입구는 이중문으로 두 개의 문 각각이 금속 회전축을 중심으로 반쯤 회전했다. 마루는 콘크리트나 타일, 그리고 정사각형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으며 양탄자는 없었다. 집의 중앙 홀 둘레에는 주요 방들이 모여 있었으며, 이것이 건축학적으로 회랑과 대학 캠퍼스의 유래가 되었다. 더 부유한 집에서는 한 개 또는 그 이상의 방이 목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대체로 오늘날의 욕조와 비슷한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20세기 이전의 배관 작업은 로마의 탁월한 수준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수로와 주관에서 납으로 만든 파이프를 통해 대부분의 공동 가옥과 집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부품과 파이프 마개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것은 고도의 장식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10 납으로 만든 도수관(導水管)과 지붕의 홈통이 빗물을 지붕에서 내려보냈다. 대부분의 방은 적어도 휴대용 숯 화로로 난방이 되었다. 소수의 집, 많은 별장과 대저택과 공중 목욕장은 나무나 숯을 태우는 가마로부터 타일 파이프나 마루, 그리고 벽의 통로를 통해 많은 방으로 뜨거운 공기가 공급되는 중앙난방식이었다.1)
제정 초기에 헬레니즘 방식이 부유한 로마인의 집에 추가로 유입되었다. 사생활을 누리기 위해 로마의 부자는 중앙 홀 뒤에 페리스틸리움(peristylium)이라는, 하늘이 훤히 트여 있는 안마당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꽃과 관목이 식재되었고,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분수 또는 몸을 담그는 곳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의 부자는 이러한 안마당 주위에 몇 개의 새로운 방, 즉 식당, 여성용 방, 미술품 소장실, 서재, 그리고 가정 신을 모시는 방을 만들었다. 이것들 말고도 여분의 침실과 실내 벽의 일부를 안으로 들어가게 한 작은 방도 있었다. 덜 부유한 집들은 페리스틸리움 대신에 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원조차 만들 공간이 없던 로마인들은 창에 화분을 놓거나 지붕에서 꽃과 관목을 재배했다. 세네카의 말에 따르면 몇몇 커다란 지붕에서 화초 재배 통에 포도나무, 과일나무, 그리고 녹음수가 재배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많은 집들이 햇볕에 배를 태우기 위한 일광욕실을 갖추고 있었다.
많은 로마인들이 고함 소리와 어수선함에 싫증을 냈으며 시골의 평화로움과 따분함을 찾아 로마를 벗어났다.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나 할 것 없이 고대 그리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연에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 에우베날리스는 어떤 사람이 로마의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매년 집세를 내는 대신 어느 조용한 이탈리아 마을에서 예쁜 집을 구입해 “수많은 피타고라스 교도들에게 성찬을 대접하기에 적합한 손질이 잘된 정원”으로 둘러쌀 수 있으면서도 굳이 수도 로마에서 살아가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부자들은 이른 봄에 로마에서 아펜니노 산맥의 구릉지나 호숫가, 바닷가로 이사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라티움 해안 지대의 라우렌툼에 있는 자신의 시골집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그는 자신의 시골집을 “유지하기에 비싸지 않고 내 형편으로는 충분히 커다란” 곳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갈 때, 그의 겸손한 태도는 충분히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유리를 끼운 창과 돌출한 처마의 보호를 받는 작은 현관 …… 마지막 흰 파도의 위력에 살며시 씻긴”, 그리고 “마치 세 개의 서로 다른 바다에 있는 것처럼 세 방향에서 전망”을 제공할 만큼 넓은 창이 달린 눈부신 멋진 식당, “숲과 산으로 경치가 끝나는” 중앙 홀, 두 개의 거실, “창을 통해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는 반원형 도서관”, 침실, 그리고 하인들이 거처하는 여러 개의 방을 묘사하고 있다. 반대편 날개 부분에는 “멋진 응접실”과 제2 식당, 네 개의 작은 방이 있었고 “쾌적한 탈의실”, 냉탕과 서로 다른 온도로 가열된 세 개의 풀을 갖춘 온탕, 그리고 열탕으로 이루어진 욕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욕실 전체가 뜨거운 공기 파이프를 통해 중앙난방식으로 가열되었다. 바깥에는 수영장, 구기장, 창고, 다채로운 무늬의 정원, 개인 서재와 연회장, 그리고 두 개의 방과 한 개의 식당이 딸린 전망 탑이 있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이렇듯 쾌적한 휴양지에 시간과 애정을 쏟아붓지 않을 이유가 있으면 말해 보라.” 하면서 말을 끝맺었다.
만약 어떤 원로원 의원이 바닷가에, 그리고 다른 의원이 코모에 그런 별장을 가질 수 있었다면, 하드리아누스가 곧 티부르에 세우게 될 농장은 말할 필요도 없고 티베리우스의 카프리 농장, 아니면 도미티아누스의 알바롱가 농장의 호화로움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방문자가 이러한 방들의 사치에 견줄 만한 것을 보고 싶다면, 팔라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대부호와 황제들의 대저택 입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로마인은 집이 아담했고, 신전만 규모가 컸던 고전기 그리스의 주택 건축을 모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반쯤 동방화된 헬레니즘 시대 왕들의 주거를 모방한 대저택을 짓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건축 양식이 클레오파트라의 금과 함께 로마로 들어왔으며, 황실 건축은 군주 정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했다. 궁전이 세워져 있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이름이 유래된 아우구스투스의 궁전은 황실의 행정 기능이 늘어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계승자들 대부분은 자신과 보좌관을 위한 궁전을 추가로 건립했다. 즉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궁전을, 칼리굴라는 가이우스 궁전을, 그리고 네로는 황금 궁전을 건립했다.
황금 궁전은 일시적으로 로마에게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건물만으로는 90만 제곱피트에 걸쳐 있었지만, 팔라티누스 언덕으로부터 인근 언덕들에 가득 들어찼던 1제곱마일 별장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정원, 목초지, 양어장, 조수 보호 구역, 새장, 포도원, 개울, 분수, 폭포, 호수, 황제 갤리선, 오락장, 피서용 별장, 화원, 그리고 3000피트 길이의 주랑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공원이 황금 궁전을 에워싸고 있었다. 분노에 찬 어떤 위트 넘치는 사람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황금 궁전에 대한 혹평을 벽에 이렇게 새겼다. “로마는 한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민들이여, 베이로 이주할 때입니다. 정말 베이가 네로의 집에 포함될 수 없다면 말입니다.”11 황금 궁전의 내부는 대리석과 청동과 금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코린트 양식 기둥머리의 금박 입힌 금속으로, 그리고 고전 세계에서 사들였거나 약탈해 온 수많은 조각상과 돋을새김, 그림, 그리고 예술품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그것들 중에는 라오콘 군상도 있었다. 일부 벽에는 진주와 값비싼 다양한 보석을 박아 넣었다. 연회장의 천장은 상아색 꽃으로 뒤덮였으며,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면 천장에서 향기 나는 물보라가 손님들 위로 떨어지곤 했다. 식당의 상아색 둥근 천장에는 하늘과 별을 나타내기 위해 색칠해 놓았으며, 숨겨진 장치를 통해 둥근 천장이 계속해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붙어 있는 여러 개의 방은 열탕, 냉탕, 온탕, 소금물탕, 그리고 유황탕을 제공했다. 로마의 건축가인 켈레르와 세베루스가 황금 궁전을 거의 완공하고 네로가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네로는 “마침내 내가 이곳에 머무르게 되는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세대가 지나고 로마의 베르사유 궁전인 황금 궁전은 너무 사치스럽고 위험해 주변의 빈곤에 둘러싸인 채 유지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황금 궁전은 방치되고 말았다. 황금 궁전의 폐허 위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콜로세움을, 티투스와 트라야누스는 거대한 공중 목욕장을 건립했다.
도미티아누스는 건축에 대한 네로의 광기를 이어받았다. 도미티아누스를 위해 라비리우스가 플라비우스 궁전을 세웠다. 이 궁전은 네로의 박물관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화려한 광채와 장식 면에서는 전혀 뒤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상고 사건을 심리했던 것으로 짐작되는 법정 건물인 거대한 바실리카가 한쪽 날개 부분에만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똑같은 날개 부분을 3만 제곱피트에 걸쳐 있는 페리스틸리움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것과 인접한 곳에 연회장이 자리를 잡았는데, 붉은색 반암(斑巖)과 초록색 사문석(蛇紋石)으로 포장한 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세련된 대리석 칸막이벽들과 아름답게 원주로 지탱된 창은 사라지고 없다. 이곳을 통해 손님들은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연못 위 또는 바깥쪽 분수 위로 튀기는 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도미티아누스는 이러한 연회장을 접대용과 통치용으로만 사용했다. 대체로 도미티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궁전보다 더 소박한 주거에서 살았다. 분명히 이러한 황실 건축물은 토착민, 방문자, 그리고 사절단에게 감명을 주기 위해 설계된 제국의 겉치레에 불과했다. 반면에 칼리굴라와 네로를 제외한 황제들은 이러한 의전실의 강제적인 격식으로부터 가족 숙소의 편안함과 친숙함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말하곤 했던 것처럼 “사람이 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12
이러한 궁전과 부자들의 집에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고급스럽게 만들기 위해 수많은 기술이 사용되었다. 마루는 다색 장식의 대리석, 즉 모자이크로 자주 만들어졌다. 다양한 색깔의 작은 정육면체를 짜 맞춘 모자이크는 눈에 띄게 사실주의적이고 퇴색하지 않는 그림을 낳았다. 가구는 풍부함과 안락함 면에서 오늘날에 비해 떨어졌지만, 대체로 디자인과 솜씨는 더 뛰어났다. 탁자, 의자, 긴 의자, 소파, 침대, 램프, 그리고 용구 등은 내구성이 강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최고의 목재, 상아, 대리석, 청동, 은, 그리고 금은 조심스럽게 다듬어지고 끝손질되었으며, 식물이나 동물 형상으로 장식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상아, 거북딱지, 조개껍데기, 무늬가 새겨진 청동 또는 보석으로 상감 세공되었다. 탁자는 가끔 값비싼 사이프러스 나무나 감귤류 나무를 잘라서 만들어졌고, 어떤 탁자는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탁자들이 대리석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의자는 접이식 의자에서부터 왕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가 있었지만, 오늘날의 의자에 비해 척추를 덜 변형시켰다. 침대는 나무나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가느다랗지만 견고한 다리로 지탱되었고, 끝 부분은 동물의 머리나 발로 마무리되었다. 용수철 대신에 얇은 청동 금속판이 짚이나 양모로 가득한 매트리스를 지지했다. 우아한 모양의 청동 삼각의자가 오늘날의 협탁을 대신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두루마리 책을 보관하기 위한 서랍 달린 수납장이 있었다. 청동화로가 방을 따듯하게 데웠으며, 청동 램프는 방을 밝혔다. 거울도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광택이 많이 났고, 꽃무늬나 신화적인 밑그림이 새겨 넣어졌다. 어떤 거울은 수평 또는 수직으로 볼록하거나 오목하게 만들어졌다. 이것은 거울에 비친 상을 뒤틀어 날씬하거나 뚱뚱하게 보이도록 했다.13
스페인 광산에서 산출되는 풍부한 광물로 작업한 캄파니아의 작업장들이 대량으로 은그릇을 생산해 광대한 시장에 내놓았다. 이제 중산 계층과 상층 부류에서 은 식기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1895년 보스코레알레에 있는 별장의 저수 탱크에서 은 식기가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서기 79년 베수비오스 화산의 잔화로부터 미처 도망하지 못했던 은 식기의 주인이 그곳에 넣어 둔 것으로 추정된다. 열여섯 개의 컵 가운데 하나에는 간단한 잎 무늬 장식이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두 개의 컵에는 돋을새김으로 줄기가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컵에는 인류의 경쟁자 신이었던 베누스와 마르스 사이에서 왕좌에 앉아 있는 아우구스투스가 그려져 있다. 가장 익살맞은 컵에는 스토아 철학자 제논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제논이 엄청나게 큰 케이크 한 조각을 집어먹는 에피쿠로스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하고 있으며, 동시에 돼지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고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달라고 정중히 부탁하고 있다.
제정 초기의 주화와 보석을 통해 조각공의 기술이 발전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주화와 보석은 평화의 제단과 똑같이 표현 양식이 세련되고 이따금 디자인도 똑같다. 아프리카, 아라비아, 그리고 인도에서 수입된 보석용 원석을 잘라 반지, 장식 핀, 목걸이, 팔찌, 컵, 그리고 심지어 벽에까지 촘촘히 박아 넣었다. 최소한 손가락 하나에 반지 하나가 사회적으로 필요했다. 일부 멋쟁이들은 한 손가락을 제외하고 모든 손가락에 반지를 끼었다. 로마인은 자신의 반지로 서명했으므로 인장을 개별적으로 디자인하고 싶어 했다. 로마에서 최고의 보수를 받는 예술가 가운데 일부는 아우구스투스의 인장을 만들던 디오스쿠리데스처럼 보석 연마사였다. 카메오를 절단하는 기술은 황금시대에 정점에 도달했다. 비엔나의 아우구스투스 보석은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멋진 보석에 속한다. 보석과 카메오를 수집하는 것이 로마의 부자, 즉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취미가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 비용으로 충당하기 위해 팔기 전까지 황제의 보석 상자는 상속을 거치면서 늘어났다. 황제 인장과 보석의 공식 수호자로부터 잉글랜드가 옥쇄를 물려받았다.
그 사이에 카푸아, 푸테올리, 쿠마이, 그리고 아레티움의 도공들이 다양한 도자기 공예술로 만든 도기로 이탈리아 가정을 가득 채워 가는 중이었다. 아레티움은 1만 갤런 용량의 혼합 용기를 생산했다. 붉은 광택이 났던 아레티움산(産) 식기는 한 세기 동안 가장 널리 확산된 이탈리아 제품이었다. 이 식기의 견본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다. 각각의 꽃병, 램프, 또는 타일에 제작자의 이름을, 또한 가끔씩 그해 집정관들의 이름을 날짜처럼 새기기 위해 양각으로 도려낸 철 인장이 사용되었다. 고대인들의 인쇄술은 이 정도 수준에 머물렀다. 더욱이 노예 필경사들의 몸값이 쌌기 때문에 인쇄술이 발전하지 못했다.14
쿠마이, 리테르눔, 그리고 아퀼레이아의 숙련공들이 도기 생산에서 예술적인 유리 제품 생산으로 전환했다.2) 대표적인 유리 제품은 포틀랜드 유리 꽃병이다.3) 이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제품은 폼페이에서 발견된 “푸른 유리 꽃병”으로, 여기에는 바쿠스의 포도 수확 축제가 생동감 넘치고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15 플리니우스와 스트라본의 말에 따르면16 티베리우스 치세에 유리 세공 기술이 시돈 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로마로 전해졌고, 곧 섬세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여러 가지 색채 장식의 작은 유리병, 컵, 사발, 그리고 그 밖의 제품이 생산되면서 잠시 동안 예술품 수집가들과 백만장자들이 가장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사냥감이 되었다고 한다. 네로 치세에는 오늘날 “천 개의 꽃”으로 알려진 유리 세공으로 만든 작은 컵 두 개에 6000세스테르티우스가 지불되었다. 이것은 각기 다른 색깔의 유리 막대를 함께 녹여서 만든 것이었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던 유리 꽃병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입된 머린(Murrhine) 꽃병이었다. 이것은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흰색과 자주색 유리 섬유를 나란히 놓고 불에 굽거나 여러 조각의 채색 유리를 투명한 흰색 물체에 끼워 넣어 만들었다.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에게 승리한 후에 머린 꽃병 몇 개를 로마에 가져왔다. 그리고 비록 클레오파트라의 금 식기류를 녹였다고는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머린 유리로 만든 받침과 굽이 있는 술잔을 자기 몫으로 차지했다. 네로는 그러한 유리컵 하나에 1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불했다. 그리고 죽어 가는 순간에 페트로니우스는 네로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또 하나의 유리컵을 깨 버렸다. 대체로 로마인들의 유리 제품 제작에 견줄 만한 상대는 없었다. 게다가 세계의 어떤 예술 소장품도 영국 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로마 유리 제품보다 더 값지지 않다.
점토를 구우면서 도기가 조각으로 바뀌어 갔다. 테라코타 돋을새김과 작은 조각상, 장난감, 과일 모조품, 포도, 생선, 그리고 마침내 실물 크기의 조각상이 만들어졌다. 유약을 바른 테라코타, 즉 마졸리카는 폼페이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신전 박공(牔栱)과 처마가 테라코타 종려나무 잎 무늬와 조각상 받침대, 괴물 석상, 그리고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장식을 비웃었으며, 제정기에는 유행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점토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로마가 돋을새김과 조각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걸작과 견줄 만큼 탁월할 수 있었던 원인은 로마의 아테네 취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세대 동안 로마의 예술가들은 로마의 돋을새김을 세계의 예술 걸작으로 평가받게 해 준 세련된 느낌, 정확한 기법, 차분하고 품위 있는 형식, 어느 정도의 입체감과 균형감으로 분수, 묘비, 아치, 그리고 제단을 조각했다. 기원전 13년 원로원은 스페인과 갈리아를 평정하고 로마로 개선하는 아우구스투스를 축하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을 마르스 평원에 세울 것을 선언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의 제단은 로마의 모든 조형물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이 기념비는 페르가몬의 제단에서 형태를, 그리고 파르테논의 프리즈(frieze, 띠 모양 장식)에서 행렬 모티프를 빌려 왔다. 그리고 울타리 안쪽 연단에 제단이 세워졌으며, 울타리 주위의 벽에 부분적으로 대리석 돋을새김이 새겨졌다. 이러한 벽에서 나온 평판이 조각의 잔해로 남아 있다.4) 어떤 평판에는 두 아이를 팔에 안은 대지의 여신, 여신 옆에서 자라나는 곡물과 꽃, 그리고 여신의 발밑에서 행복해 하며 누워 있는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것이 아우구스투스 개혁을 이끌어 간 생각, 즉 가족은 혈통으로, 백성들은 농업으로, 그리고 제국은 평화로 복귀하는 것이다. 중심인물인 대지의 여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실제로 성숙한 모성애와 여성미, 다정함, 그리고 우아함이 결합되어 파르테논의 위풍당당한 여신들도 견줄 수 없는 부드러운 완벽함이 존재한다. 외벽 프리즈의 아래쪽 판에는 아칸서스 잎의 소용돌이무늬, 넓은 꽃잎이 있는 작약과 양귀비, 그리고 아이비 베리(ivy berry) 다발들이 있었다. 이것 또한 견줄 대상이 없다. 다른 평판에는 평화의 여신 제단 앞에서 만나기 위해 정반대 방향에서 움직이는 두 개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무리 속에 귀족, 신관, 베스타 신전의 신녀, 아이들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그리고 황실 가족으로 보이는 엄숙하고 차분한 모습을 한 인물들이 보인다. 이들 인물 중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는 의식을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한 아기가 아장아장 걷고 있고, 다른 사내아이 하나는 자신의 나이를 뽐내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작은 소녀로서 꽃다발을 갖고 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사내아이로 장난을 친 뒤에 어머니에게 부드럽게 훈계를 받고 있다. 이제부터 이탈리아 예술에서 아이들의 역할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로마 조각은 결코 다시는 거장다운 드레이퍼리(drapery, 조각 등에서 주름을 잡은 천이나 옷, 그리고 그 표현 방법 — 옮긴이),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배치, 빛과 그늘의 조절을 보여 주지 못할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에게서 드러난 것처럼 로마의 조각도 선전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에서 이러한 돋을새김과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대상은 개선하는 장군들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아치에 새겨진 조각이다. 현존하는 가장 멋진 개선문은 예루살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해서 도미티아누스가 완공한 티투스의 개선문이다. 한 돋을새김에는 불타는 도시, 폐허가 된 성벽, 겁에 질려 흥분한 예루살렘 사람들, 로마 군단 병사에게 약탈되는 예루살렘의 부가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돋을새김에는 병사, 동물, 정무관, 신관, 그리고 포로들에 둘러싸여 전차를 타고 로마에 입성하는 티투스와 그 뒤를 따르는 예루살렘 신전의 신성한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와 다양한 전리품들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예술가들은 대담한 실험을 했다. 즉 그들은 서로 다른 인물들을 서로 다른 높이에서 잘라 내어 다른 평면에 배치시켰다. 그리고 깊이에 착각을 불러일으키려고 배경을 끌로 파냈다. 게다가 그들은 풍부한 색조와 거리를 추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전체를 색칠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프리즈처럼, 그리고 나중에 트라야누스와 아우렐리우스의 원주에서처럼 개개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동작을 그려 넣었다. 따라서 동작과 생명의 의미가 더 잘 전달되었다. 인물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평화의 제단에서처럼 아테네의 평화 분위기로 이상화되지도 않고 부드럽게 표현되지도 않았다. 인물들은 하찮은 실제 인간들로부터 받아들여졌고, 이탈리아의 사실주의와 생명력이라는 세속적 전통에 따라 조각되었다. 주제는 완벽한 신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들이었다.
이와 같이 생동감 넘치는 사실주의야말로 로마 조각을 그리스 조각으로부터 구별하게 해 준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성향에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로마인들은 예술에 전혀 힘을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원전 90년 무렵 남부 이탈리아 출신의 그리스인 파시텔레스가 로마로 건너가 60년 동안 살았는데, 그는 은, 상아, 그리고 금으로 뛰어난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은거울을 소개했고, 그리스 걸작들을 숙련된 솜씨로 모방했으며, 예술의 역사에 관해 다섯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당대의 바사리(Vasari)이자 첼리니(Cellini)였다. 또 한 명의 그리스인 아르케실라우스는 카이사르를 위해 그의 먼 친척 베누스 게네트릭스의 유명한 조각상을 만들었다. 아테네의 아폴로니우스는 아마도 로마에서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된 「벨베데레의 토르소(Torso Belvedere)」를 조각했던 것 같다. 이 작품은 불거져 나온 근육을 전혀 보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건강한 힘으로 충만한 한 남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절제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잠시 작업실은 이탈리아 신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운명과 정절 같은 추상적 개념에 그리스인의 외형을 부여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아마도 이 시기에, 그리고 로마에서 아테네의 글리콘이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를 조각했다. 「벨베데레의 아폴로」가 어느 시대 또는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은 아테네의 레오카레스가 조각한 원본을 로마인이 복제했을 것이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그 잔잔한 아름다움이 빙켈만(Winckelmann)을 무아경에 빠지게 할 정도로 흥분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17 이제 유노 여신은 두 개의 유명한 화신, 즉 냉혹하면서 엄한, 공정하면서 정의로운 나폴리 박물관의 파르네세의 유노와 테르메 미술관의 루도비시의 유노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유피테르의 방랑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든 것과 카피톨리누스 박물관에 전시된 우아한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는 이상화된, 그리고 지루할 정도로 신적인 그리스 양식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더 끄는 것은 폼페이우스에서 콘스탄티누스까지 청동과 대리석으로 조각한 흉상으로서, 여기에서는 로마인의 얼굴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 중 일부, 특히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상들은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다. 하지만 만약 로마인들이 강하게 보였다면, 예전 에트루리아의 사실주의, 그리고 항상 존재하는 실물에 충실한 데스마스크(사람이 죽은 직후에 그 얼굴을 본떠 만든 안면상 — 옮긴이)의 모형이 그들을 볼품없게 표현하도록 했다. 너무 많은 로마인들이 공공장소에 자신들의 조각상을 남겼으므로, 이따금 로마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에게 속해 있는 곳처럼 보였다. 질투심 많은 황제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일찍 자신들의 조각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할 때까지, 일부 명사들은 죽음을 기다릴 수 없어서 죽기 전에 직접 자신들의 조각상을 세웠다.
가장 규모가 큰 흉상은 베를린에 소장된, 검은 현무암으로 만든 카이사르의 두상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정확히 누구를 묘사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숱이 적은 머리와 뾰족한 턱, 마르고 야윈 얼굴, 생각으로 지쳐 있는 생기 없는 얼굴 윤곽, 환멸감을 주는 단호함이 전승으로 내려오는 카이사르의 특징과 잘 부합된다. 두 번째로 큰 흉상은 나폴리에 소장된 카이사르의 거대한 두상이다. 이 흉상은 위대한 인물이 마침내 자신의 지성으로는 세상을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더욱이 세상을 통치하기에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가졌을 괴로움으로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다. 코펜하겐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흉상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실적이다. 이것을 살펴보다 보면 기가 꺾인 인간의 둔한 비만 때문에, 젊은 시절 폼페이우스가 거둔 용맹스러운 승리가 한순간 잊힌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는 50개의 조각상이 그를 묘사하고 있다. 진지하고, 예리하며, 품위 있는 소년 아우구스투스(바티칸 박물관 소장)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실제 젊은이의 흉상들 중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서른 살의 아우구스투스(영국 박물관 소장)는 청동 인물상으로 강렬한 결단력을 묘사하고 있다. 이 흉상을 찬찬히 보면 황제란 한 번의 눈길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수에토니우스의 말이 생각난다. 신관 아우구스투스(테르메 미술관 소장)는 드레이퍼리의 감옥에서 벗어나 지적인 깊이가 있고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프리마 포르테에 있는 리비아의 별장 유적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 중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조각상이 있다. 이 유명한 인물상의 가슴받이는 난해하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돋을새김으로 덮여 있고, 자세는 뻣뻣하며, 다리는 병약자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대하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기량과 정열을 드러내듯 머리는 차분하고 자신감 넘치는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을 보다 보면 폴리클레이토스의 도리포로스(Doryphoros, ‘창을 쥔 사람’이라는 뜻 — 옮긴이)가 좀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현재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는 두상이 예술가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리비아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머리카락은 위엄이 넘치고, 구부러진 코는 로마인의 기질을 드러내며, 눈은 생각에 잠겨 있고 다정하며, 입술은 사랑스럽지만 단호해 보인다. 바로 이 여인이 아우구스투스의 권좌 뒤에 말없이 앉아 자신의 모든 경쟁자와 적을 타도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굴복시켰다. 티베리우스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비록 이상화되어 있긴 하지만 라테라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티베리우스의 좌상은 섬록암으로 만들어진 카이로의 케프렌을 조각했던 솜씨에 견줄 만한 걸작이다. 클라우디우스는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조각가가 클라우디우스를 뚱뚱하고, 상냥하며, 어리석고, 불안해 하고 있는 유피테르처럼 조각했을 때 조각가는 그를 비웃고 있었거나, 아니면 세네카의 얼간이 만들기를 실제로 보여 주고 있었다. 네로는 미적 감각을 키우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진심으로 열망하던 것은 명성과 크기였다. 그리고 네로는 당대의 스코파스(기원전 4세기의 조각가 — 옮긴이)였던 제노도토스에게서 117피트 높이의 자신의 거상을 만드는 데 시간을 소비하는 것보다 더 나은 역할을 보지 못했다.5) 하드리아누스는 네로의 거상을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의 가장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옮기도록 지시했다. 거기에서 콜로세움(Colosseum)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18
솔직한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조각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거친 용모와 주름진 이마, 대머리, 커다란 귀를 가진 진정한 평민의 모습으로 솔직히 표현하게 했다. 테르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흉상은 더 자상한 모습이다. 이것은 국정에 지친 한 인물, 즉 업무에 충실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폴리의 거대한 두상을 보여 준다. 티투스는 비슷한 정육면체 두개골과 세련되지 않은 용모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뚱뚱한 거리의 행상인을 인류의 총아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사실주의적인 플라비우스 시대에 도미티아누스는 생전에 미움 받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으므로 사후에 자신의 모든 조각상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예술가가 궁전을 떠나 거리를 배회했을 때, 그는 해학적인 표현으로 이탈리아의 악동 기질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즉 도미티아누스를 마음껏 해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네카에 비해 지혜와 재력이 떨어졌음에 틀림없는 한 노인이 한때 세네카라고 불리던, 머리가 헝클어진 허수아비 자세를 취했다. 유명한 예술가들은 운동선수들의 근육에 잠시 불멸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조각상들과 마찬가지로 검투사들도 귀족의 별장에서부터 파르네세의 대저택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집으로 들어갔다. 로마의 조각가들은 여자 인물상을 다룰 때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화를 잘 내는 입이 험한 여자를 조각했다. 하지만 또한 영국 박물관의 클뤼티에(물의 요정)처럼 상냥함의 화신으로 우아한 위엄을 갖춘 베스타 신전의 일부 신녀들과 와토 또는 프라고나르의 여인들처럼 가냘픈 매력을 지닌 귀부인들도 조각했다.19 조각가들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청동 소년이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인노켄차에서처럼 아이들의 묘사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다. 그들은 1929년 네미에서 발견된 늑대들의 두상이나 산마르코 광장의 기마상에서처럼 놀라우리만큼 생생하게 동물의 형상을 조각하거나 틀에 넣어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페리클레스 학파의 부드러운 완벽함을 좀처럼 성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유형보다는 개체를 사랑하고, 현실의 불완전함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모방에도 불구하고 조각가들은 초상 예술의 역사에서 우뚝 솟았다.
고대의 방문자는 로마의 신전과 집, 그리고 주랑 현관과 광장에서 조각보다 훨씬 더 인기 있는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르네상스 미술품들이 부유한 미국에 소중한 것처럼 호사스러운 로마 제국에 소중한 예전 대가들, 즉 폴리그노투스, 제욱시스, 아펠레스, 프로토게네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작품과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고대의 방문자는 더 잘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학파가 남긴 풍부한 성과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벽에 장식이 필요했다. 한때는 로마의 귀족들마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헬레니즘이 침투하면서 그림은 그리스인의 것이자 비천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파비우스 픽토르가 창피를 무릅쓰고 건강의 여신 신전에 벽화를 그려야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20 물론 예외는 있었다. 즉 공화정 말경 아렐리우스는 매춘부를 고용해 여신들의 자세를 취하게 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벙어리 귀족 퀸투스 페디우스는 장애로 인해 대부분의 직업을 가질 수 없었으므로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 게다가 네로는 자신의 황금 궁전 실내를 장식하려고 아물리우스라는 인물을 고용했다. 아물리우스는 “항상 토가를 입고 대단히 진지하게 그림을 그렸다.”21 하지만 로마, 폼페이,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그리스나 이집트를 주제로 그리스의 그림을 모방하고 변형하던 그리스인들 무리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미술은 실제로 프레스코화와 템페라화에 국한되었다. 프레스코화는 갓 칠한 회벽에 물로 적신 물감으로 그린 것이었고, 템페라화는 그림물감을 접착성 있는 아교와 섞어 마른 표면에 덧칠한 것이었다. 초상화가들은 이따금 뜨거운 밀랍에서 색조가 용해되는 납화법을 사용했다. 네로는 자신의 초상을 120피트 높이의 캔버스에 그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캔버스의 사용이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림은 조각상, 신전, 무대 배경에 적용되었으며, 리넨에 그린 대형 그림은 개선식이나 포룸에서 전시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림이 그려졌던 인기 있는 장소는 외벽이나 내벽이었다. 로마인들은 가구를 벽에 기대어 배치하거나 그림을 벽에 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 공간에 그림 하나, 아니면 그림과 관련된 디자인을 선호했다. 이렇게 해서 벽화는 주택의 일부이자 건축 디자인에 꼭 필요한 것이 되었다.
베수비오스 화산에 대한 신랄한 해학이 대략 3500개에 달하는 프레스코화에 보존되어 왔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 세계의 나머지 모든 지역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그림이 폼페이에서 발견되었다. 폼페이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벽화들이 고전기 이탈리아의 집과 신전을 얼마만큼 빛나게 했을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유물들은 나폴리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심지어 박물관 안에서도 유물들의 유연한 우아함이 감명을 준다. 하지만 고대인들만이 각 그림에 맞는 기능과 장소를 부여하던 유물들의 한창때 색깔과 건축 구조를 알았을 뿐이다. 베티 저택에서는 벽화들이 본래의 장소에 남아 있었다. 즉 식당에서는 디오니소스가 잠자고 있는 아리아드네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리고 반대쪽 벽에서는 다이달로스가 나무로 만든 암소를 파시파이에게 보여 준다. 더 멀리 끝 쪽에는 헤파이스토스가 고통을 가하는 바퀴에 익시온을 결박하는 모습을 헤르메스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방에서는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해학적인 프레스코화에서 태평한 큐피드들이 베티 가문의 와인 사업을 포함해 폼페이의 사업을 풍자하며 비꼬고 있다. 시간의 상처로 인해 한때 화려하게 눈부셨던 이러한 벽화 표면이 부식되었지만, 방문자를 깜짝 놀라게 하여 겸손하게 만들 만큼 충분한 유물이 남아 있다. 그리고 초상은 완벽에 가깝게 그려졌으며, 실물에 가까운 화려한 색채 때문에 여전히 초상은 살아 있는 혈관 속에서 피가 활기차게 움직이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폼페이의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고대 이탈리아 회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시기와 양식을 분류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법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폼페이는 라틴적이라기보다는 그리스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와 그 주변 지역 고전 미술의 유물들은 폼페이의 발전과 상당히 일치한다. 제1기, 즉 양피 껍질 양식에서는(기원전 2세기) 폼페이의 “살루스티우스 저택”에서처럼 상감 세공을 한 대리석 평판들과 비슷해지도록 벽이 채색되었다. 제2기, 즉 건축 양식에서는(기원전 1세기) 건물이나 정면 또는 줄기둥을 흉내 내기 위해 벽이 채색되었다. 종종 원주들은 내부에서 내다본 것처럼 묘사되었으며, 원주들 사이로 훤히 트여 있는 시골이 그려졌다. 이렇게 해서 화가는 아마도 창이 없는 방에 나무와 꽃, 들판과 개울, 평화롭게 또는 장난기 많게 뛰노는 동물들의 시원한 전망을 제공했다. 그리고 집에 갇혀 있는 사람은 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루쿨루스의 정원에 머무는 것처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낚시를 하거나 배를 젓거나 사냥을 할 수 있었다. 아니면 시기적으로 때 이른 새들에 대한 사랑에 푹 빠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을 집 안으로 맞아들였다. 제3기, 즉 장식 양식에서는(서기 1~50년) 순전히 장식을 위한 건축 형식을 사용했으며, 풍경보다 인물에 더 치중했다. 제4기, 즉 복합 양식에서는(서기 50~79년) 화가가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환상적인 구조와 형태를 고안하고, 진지함을 무시한 채 그것들을 제멋대로 배치하고, 정원과 원주, 별장과 부속 건물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어지럽게 뒤섞어 쌓아 올렸다.22 그리고 이따금 무의식중의 기억으로 보완되고 빛으로 가득 찬 그림으로 인상주의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모든 유사한 양식에서 건축은 회화의 시녀이자 첩이었고, 회화에 봉사하고 회화를 사용했으며, 1600년이 지나 니콜라스 푸생(Nicolas Poussin)이 다시 일깨운 전통을 구현했다.
현존하는 주요 회화들의 주제가 그리스 신화를 과감히 넘어서려고 좀처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감이다. 우리는 똑같은 신과 사티로스, 영웅과 죄수, 즉 제우스와 마르스, 디오니소스와 판(Pan),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이피게니아와 메데이아에 싫증 나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난이 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정적인 삶을 묘사하는 몇 편의 그림이 있으며, 여기저기에 천을 다듬는 직공, 여인숙 주인, 아니면 푸주한이 폼페이의 벽에서 빛난다. 종종 사랑이 장면을 압도한다. 한 소녀가 옆에 서 있는 에로스에게 전해지도록 간절히 바라며 어떤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며 앉아 있다. 젊은 남녀가 풀밭 위에서 사랑스럽게 뛰놀고 있다. 마치 마을이 사랑과 포도주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프시케와 큐피드가 장난치고 있다. 벽화에 그려진 이러한 그림으로부터 판단해 볼 때 폼페이 여인들이 자신들의 예쁜 용모를 삶의 중심에 두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우리는 벽화에서 “구슬치기 놀이”에 푹 빠져 있는, 아니면 리라에 우아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아니면 입에 철필을 물고 골똘히 생각에 빠져 시를 짓는 여인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은 성숙함으로 평온하고 몸매는 건강하게 풍만하며, 옷은 페이디아스의 넉넉함과 율동으로 주위로 늘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헬레네처럼 자신들의 신성을 의식한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난데없이 바쿠스 축제의 춤을 춘다. 그녀의 오른팔과 손, 그리고 발은 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사랑스럽다. 이러한 걸작들에는 반드시 남성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미노타우루스에게 승리한 테세우스, 데이아니라를 구출하거나 텔레푸스를 양자로 삼은 헤라클레스, 화가 나서 저항하는 브리세이스를 인도하는 아킬레우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 마지막 그림에서 모든 초상은 완벽에 가깝고 폼페이의 회화는 정점에 이른다. 해학 또한 나타난다. 즉 머리가 덥수룩한 현학자가 지팡이를 짚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거나하게 취한 사티로스가 비웃듯 환락에 빠져 자신의 정강이를 흔들어 대고 대머리인 야비한 실레누스가 음악의 황홀경에 빠져 있다. 선술집과 유곽이 적절히 장식되어 있고, 어떤 열광적인 관광객도 여전히 프리아포스가 폼페이의 벽에서 엄청난 힘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을 들을 필요가 없다. 이템(Item) 별장의 한쪽 끝에 그려져 있는 일련의 종교화는 이곳이 디오니소스 비의(秘儀)를 거행하는 장소임을 암시해 준다. 즉 한 프레스코화에서 경건한 반신불수의 작은 소녀가 경전을 골라 읽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프레스코화에서 소녀들이 피리를 불고 희생 제물을 가져오면서 행렬을 지어 지나간다. 세 번째 프레스코화에서 벌거벗은 숙녀가 발끝으로 춤을 추고, 그 사이에 새롭게 개종한 사람이 의식에 따라 채찍을 맞고 기진맥진한 채 무릎을 꿇고 있다.23 이상에서 언급한 것보다 더 뛰어난 벽화가 스타비아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은 보티첼리(Botticelli)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봄(Spring)”으로 불렸다. 한 여성이 꽃을 따면서 천천히 정원을 지나간다. 그녀의 등과 우아하게 머리를 돌리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어떠한 미술도 이런 간단한 주제의 시를 그렇게 감동적으로 전달하지 못했다.
이러한 유적에서 복원된 모든 그림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은 헤르쿨라네움에서 발견되어 나폴리 박물관에 소장된 「메데이아(Medea)」이다. 이 그림에서는 화려한 옷을 걸치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들을 살해하려고 계획 중이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비잔티움의 티모마쿠스라는 화가에게 40탈렌트(14만 4000달러)를 지불했던 그림을 모방했음에 틀림없다.23a
그렇게 뛰어난 그림들은 로마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마 포르테에 있는 리비아의 교외 별장에서 지금까지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능가했던 최고의 풍경화 그림이 발견되었다. 마치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것처럼 대리석 격자 울타리에 눈이 매료된다. 울타리 너머로 식물과 꽃으로 뒤덮인 밀림 지대가 있다. 이곳은 너무 정확하게 그려져 있어서 오늘날의 식물학자들이 그것들을 확인하고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꼼꼼히 그려지고 채색되어 있다. 새들이 마치 잠깐 동안인 것처럼 여기저기 횃대에 앉아 있고, 곤충들이 잎에 둘러싸여 기어가고 있다. 이보다 덜 뛰어난 작품이 1606년에 에스퀼리누스 언덕에서 발견되어 루벤스(Rubens), 반다이크(Vandyke), 그리고 괴테(Goethe)에 의해 열정적으로 연구된 “알도브란디니가(家) 결혼식”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리스인의 작품을 모방한 것으로, 원작자는 로마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 즉 정숙하고 소심한 신부, 그녀에게 조언하는 여신, 결혼식 준비에 여념 없는 신부의 어머니, 리라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기 위해 대기 중인 소녀들이 모두 섬세하고 민감하게 그려졌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벽화는 고전 미술의 걸출한 유물 가운데 하나이다.
로마의 회화는 독창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모든 곳에 똑같은 전통과 방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림들에서 나타나는 모호한 인상주의마저도 알렉산드리아의 기술로부터 파생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섬세한 선과 풍부한 색채 덕분에 아펠레스와 프로토게네스 같은 화가들이 폴리클레이투스와 프락시텔레스 같은 조각가들처럼 높은 평판을 받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따금 색채는 마치 조르조네(Giorgione)가 주장했던 것처럼 풍부하다. 그리고 가끔 섬세한 농담법은 렘브란트(Rembrandt)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가끔 투박한 초상은 반 고흐(Van Gogh)의 볼품없는 사실주의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원근법은 종종 불완전하고, 조급한 기량이 성숙한 개념 뒤에서 절뚝거린다. 하지만 신선한 활력이 이러한 결점을 상쇄하고, 드레이퍼리의 규칙적인 반복이 눈을 매료하며, 삼림 풍경은 복잡한 도시에 사는 주민들에게 기쁨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고대인에 비해 현대인의 취향이 더 제한되어 있다. 현대인은 벽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겨 두고 싶어 하며 얼마 전까지 벽에 그림 그리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에게 벽은 감옥이었고, 창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가 아니었다. 즉 그는 장벽을 잊고 싶었으며 미술을 통해 초목으로 뒤덮인 평화에 현혹되고 싶었다. 아마도 이탈리아인이 옳았던 것 같다. 즉 하늘을 욕하고 햇빛에 괴로워하면서 수많은 손질되지 않은 지붕에 대해 마법의 창을 기대하기보다 벽에 그려진 나무 하나가 더 낫다.
이제 우리는 잊힌 방문자의 의식을 최고조로 고양시키기 위해 로마가 그리스의 침입에 맞서 스스로를 훌륭하게 방어했으며, 로마의 모든 독창성과 용기와 힘을 보여 주었던 로마의 예술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부분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독창성이란 단성 생식이 아니다. 그것은 혈통처럼 기존 요소들이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교육이 모방으로 시작하듯이 모든 문화는 초기에 절충적이다. 하지만 정신이나 국가가 성년에 이르면 모든 작품과 말에 자신의 성격을 드러낸다. 다른 지중해 도시처럼 로마도 이집트와 그리스로부터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그리고 코린트 양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또한 로마는 아시아로부터 아치와 볼트와 돔을 받아들였으며, 그것들을 이용해 지구상에서 아직까지 못 보던 대저택, 바실리카, 원형 경기장, 그리고 목욕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만들었다. 로마의 건축은 로마의 정신과 국가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즉 대담함, 조직, 웅장함, 그리고 무자비한 힘이 로마를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언덕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조형물들을 세웠다. 그것들은 돌로 된 로마의 정신이었다.
로마의 걸출한 건축가들 대부분은 그리스인이 아닌 로마인이었다. 그들 가운데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가 『건축에 관하여』라는 세계적인 고전을 썼다.(기원전 27년경)6)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의 공병으로,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치하에서 건축가로 복무했던 비트루비우스는 노년에 로마의 가장 명예로운 예술의 원리를 체계화하기 위해 은퇴했다. 그는 “자연은 내게 키를 허락하지 않고, 얼굴은 세월이 흐르면서 보기 흉해지며, 병은 내게서 힘을 앗아간다. 따라서 나는 지식과 책으로 사람들의 총애를 받고 싶다.”라고 고백했다.25 키케로와 퀸틸리아누스가 철학을 웅변가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처럼 비트루비우스는 건축가에게 철학을 요구했다. 과학이 건축가의 수단을 향상시키는 사이에 철학은 건축가의 목적을 향상시킬 것이다. 철학은 건축가를 “고상하면서 세련된, 공정하면서 성실한, 그리고 탐욕 없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성실함과 정직함 없이는 어떠한 일도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26 비트루비우스는 건축 재료, 기둥 양식과 원리, 그리고 로마에서 다양한 건물 유형을 묘사한다. 게다가 그는 기계 장치, 물시계, 속도계,7) 수로, 도시 계획, 그리고 공공 위생에 관한 글을 추가했다. 히포다무스가 많은 그리스 도시에서 확립했던 장방형 설계에 맞서 비트루비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그리고 오늘날의 워싱턴에서) 사용된 혁명적인 배치를 권장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계속해서 장방형 진지 설계에 따라 도시를 설계했다. 비트루비우스는 여러 지방에서 이탈리아의 음료수가 갑상선종을 초래했다고 이탈리아에 경고했으며, 납으로 인한 중독이 발생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소리를 진동하는 공기의 움직임이라고 설명했으며, 건축 음향학에 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을 썼다. 르네상스 시기에 재발견된 그의 책은 레오나르도, 팔라디오,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비트루비우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나무, 벽돌, 치장 회반죽(벽토), 콘크리트, 돌, 그리고 대리석으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벽돌은 성벽, 아치, 그리고 볼트에 흔하게 사용되는 재료였으며, 콘크리트 외장으로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치장 회반죽은 종종 외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것은 모래, 석회, 대리석 가루, 그리고 물로 만들어졌고, 광택이 잘 났으며, 여러 번 칠을 해서 두께가 3인치에 달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치장 회반죽은 콜로세움의 일부에서처럼 1900년 동안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의 제조와 사용 면에서 오늘날까지 로마인들과 견줄 만한 상대는 없었다. 그들은 나폴리 근처의 풍부한 화산재를 사용했고, 거기에 석회와 물을 혼합했으며, 벽돌과 도기, 대리석, 그리고 돌 조각을 주입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경부터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의 모든 형태로 사용이 가능한 시멘트를 생산했다. 로마인들은 오늘날처럼 판자로 만들어진 틀에 넣어 콘크리트를 만들었다.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지받지 못한 대규모 공간을 아치형 지붕 측면의 누르는 압력이 없는 단단한 돔으로 덮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인들은 판테온과 대규모 목욕장에 지붕을 씌웠다. 대부분의 신전과 허세 부리는 집에서는 돌이 사용되었다. 카파도키아에서 들여온 돌은 너무 반투명이어서 그것으로 건립된 신전은 모든 틈새를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빛이 났다.28 그리스 정복은 대리석 취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취향은 처음에는 원주(圓柱)를, 그 다음에는 대리석을 수입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나 근처의 카라라 채석장을 경영함으로써 충족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전에 대리석은 대부분 원주와 평판에 국한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대리석은 벽돌과 콘크리트 외장으로 사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렇게 피상적으로만 로마의 이곳저곳을 대리석의 로마로 만들었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만든 성벽은 드물었다. 로마인들은 똑같은 건물에 이집트의 적색과 회색 화강암, 에우보이아의 녹색 운모 대리석, 그리고 누미디아의 검은색과 노란색 대리석을 그들 자신의 카라라산(産) 흰색 대리석과 현무암, 설화 석고(雪花石膏), 그리고 반암과 혼합하는 것을 좋아했다. 건축 재료가 그렇게 복잡하거나 다채로웠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에 로마는 투스카니 양식과 혼합 양식, 그리고 일정한 변형을 추가했다. 원주는 북 모양의 석재들을 겹쳐 놓는 것 대신에 돌 하나로 만든 기둥이었다. 도리아 양식의 기둥은 이오니아 양식의 기단을 받아들였으며, 새롭고 홈을 새기지 않은 가느다란 형태를 취했다. 이오이아 양식의 기둥머리에는 사방에서 같은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 네 개의 소용돌이무늬가 새겨 넣어졌다. 그리고 코린트 양식의 기둥과 기둥머리는 그리스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발전했지만, 나중에 수십 년 동안 코린트 양식은 정교함이 지나쳐 망쳐 버렸다. 정도가 지나친 비슷한 사례로서, 티투스의 개선문에서처럼 혼합 양식의 기둥머리를 만들기 위해 이오니아 양식의 소용돌이무늬에 꽃을 쏟아붓는 경우가 있었다. 가끔씩 소용돌이무늬는 괴물 상을 암시하고 중세적인 형상의 전조가 되는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으로 끝났다. 사치스러운 로마인들은 마르켈루스 극장에서처럼 동일한 건물에 여러 기둥 양식을 혼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다음 다시 절약을 잘못해 님(Nîmes)의 메종 카레(기원전 1세기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건립된 신전-옮긴이)에서처럼 신상 안치소에 추가로 측면 기둥을 설치했다. 아치의 발전으로 인해 예전에 원주가 가졌던 지탱하는 역할이 사라졌을 때에도 로마인들은 원주에 기능 없는 장식의 역할을 추가했다. 이러한 관행은 확실히 알 수 없는 오늘날의 일정 시점까지 살아남았다.
로마는 거의 모든 신전에 그리스의 상인 방식(上引枋式) 원리, 즉 원주에 의해 지지되고 지붕을 떠받치는 평방(平枋, 고대 건축에서 줄기둥이 받치고 있는 수평의 대들보 부분 — 옮긴이)을 받아들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모든 것에서처럼 예술에서도 보수적이었다. 그의 지시로 건립된 대부분의 신전은 보수적인 전통을 지켰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무렵부터 황제들은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수용 시설을 늘렸으며, 자신들의 호색을 건축의 경건함으로 감추기 위해 타일을 붙이고 금박을 입힌 신전으로 언덕을 가득 메우고, 거리를 막았다. 물론 유피테르가 황제들의 총애를 받았다. 유피테르는 천둥의 신(Jupiter Tonans)이자 전투 중에 로마인들의 도망을 멈추게 했던 머무는 신(Jupiter Sta-tor)이었다. 게다가 유피테르는 유노, 미네르바와 함께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정상에서 로마의 성역 가운데 가장 신성한 곳을 공유했다. 3층의 코린트 양식 줄기둥의 측면에 위치한 중앙의 작은 방에 금과 상아로 만든 가장 위대하고 뛰어난 신 유피테르의 거상이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러한 로마 최고의 신전을 최초로 건립한 사람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였다. 이 신전은 여러 차례 전소되고 재건되었다. 스틸리코(서기 404년)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하기 위해 금박 입힌 청동 문을 강탈했으며, 반달족은 금박 입힌 지붕의 타일을 빼앗아 갔다. 포장한 바닥의 일부 파편들은 지금도 남아 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북쪽 정상에는 훈계자 또는 수호자 여신 유노(Juno Moneta)의 신전이 세워졌으며, 여기에는 로마의 조폐소가 있었다. 모네타(Moneta)라는 명칭에서 많은 야심의 근원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 ‘머니(Money)’가 유래한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남쪽 측면에는 가장 오래된 사투르누스 신의 신전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투르누스 신에 대한 최초의 봉헌 연대를 기원전 497년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여덟 개의 이오니아 양식 기둥과 평방(平枋)이 남아 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기슭에 위치한 포룸에는 모든 시작의 신 야누스의 작은 신전이 있었다. 신전의 문은 전시에만 열려 있었으며, 로마의 고대사에서 세 번만 닫혀 있었다. 포룸의 남동쪽 모퉁이에는 기원전 495년에 건립된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신전이 있었다. 세 개의 가느다란 코린트 양식의 원주가 티베리우스의 재건으로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그것이 로마에서 가장 멋진 원주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필리피 앞에서 맹세했던 복수자 마르스(Mars Ultor)의 신전을 자신의 포룸에 추가했다. 신상 안치소의 한쪽 끝에 반원형의 후진(後陣, 교회(성당) 건축에서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는 부분으로서 내진(內陣) 뒤에, 주 복도에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 — 옮긴이)이 있었으며,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성상 안치소가 될 운명이었던 건축 형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전투에서 아폴로 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팔라티누스 언덕에 온전히 대리석으로만 화려한 아폴로 신전을 건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전을 미론과 스코파스의 건조물로 장식했고, 웅장한 도서관과 미술관을 신전 구내에 추가했으며, 사람들에게 로마를 향해 그리스를 떠났던 아폴로가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문화적 지도력을 가져왔다고 느끼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어머니가 탈 없이 죽었으므로 아우구스투스의 친구들마저 민첩한 뱀으로 변장한 아폴로가 신비로운 군주 아우구스투스를 자식으로 보았다고 소곤거릴 정도였다.
로마 시의 북서쪽에는 거대한 이시스 신전이 있었으며,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웅대한 키벨레 여신의 성소가 있었다. 의인화된 추상적 개념, 즉 건강, 명예, 덕, 조화, 신념, 운, 그리고 더 많은 것에 화려한 거처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거처에는 거의 모두 조각상과 그림을 전시하는 곳이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거대한 평화의 신전에 네로 황금 궁전의 수많은 값진 미술품과 예루살렘의 일부 유물을 모았다. 보아리움 광장의 포르투나 비릴리스 신전은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 이전 시기의 건물들이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수도 로마의 숙녀들이 그곳을 자주 숭배했다. 왜냐하면 포르투나 비릴리스 여신이 남성들로부터 자신들의 결점을 숨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고전기 장방형 양식의 이러저러한 많은 신전에 다양한 원형 신전을 추가했다. 이러한 원형 신전의 건립은 둥근 지붕이 제기했던 문제에 새롭게 정통했음을 드러냈다. 전승에 따르면 이러한 원형 신전 양식은 수 세기에 걸쳐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경건하게 보존되었던 로물루스의 둥근 오두막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것만큼 오래된 것이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근처에 세워진 멋진 베스타 신전이었다. 흰 대리석으로 표면이 마감 처리된 베스타 신전의 신상 안치소는 당당한 코린트 양식의 원주에 둘러싸여 있었고, 지붕은 금박 입힌 황동으로 만든 둥근 지붕이었다. 베스타 신전 인접 지역에 신녀들이 거주하는 대저택이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줄기둥으로 둘러싸인 베스타 신전의 안마당 주위에 회랑식으로 만든 84개의 방이 있었다. 판테온은 아직까지 원형 신전이 아니었다. 아그리파가 건립했을 때처럼 장방형이었지만, 신전 앞에 원형 광장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의 건축가들이 원형 광장 위에 원형 신전과 거대한 둥근 지붕을 세웠다. 이것은 여전히 인간이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로마는 종교적인 건축보다 세속적인 건축에서 더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왜냐하면 로마는 현세에서 전적으로 자신의 방식에 따라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 공학을 예술과 결합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와 형식에 효용과 힘이 결합되었다. 수직의 기둥과 수평의 평방, 그리고 삼각형의 박공에서 보듯이 그리스 건축의 원리는 직선이었다.(파르테논 신전에서처럼 정교하게 조절되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로마 건축의 원리는 곡선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로마인들은 웅장함과 대담함과 크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로처럼 세워져 있어서 방해가 되는 원주들을 제외하고 직선과 상인 방식 원리로는 거대한 건물을 지붕으로 덮을 수 없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대체로 둥근 모양인 아치로, 아치를 연장한 볼트로, 그리고 아치를 회전시킨 돔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아마도 로마의 장군들과 부관들이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아치 모양에 정통한 지식을 가져왔으며, 오랫동안 정통 그리스 양식에 압도되었던 로마와 에트루리아의 초기 전통을 다시 깨웠다. 이제 로마는 아치를 대규모로 사용했으며, 전체 건축술이 아치 방식이라는 새롭고 영속적인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다. 로마인들은 지붕의 나무틀에 콘크리트를 쏟아붓기 전에 팽팽한 줄을 따라 거미줄 모양의 벽돌 늑재(肋材)를 설치함으로써 연결식 볼트를 발전시켰다. 두 개의 원통형 볼트를 직각으로 교차시킴으로써 더 무거운 상부 구조를 지탱할 수 있고 더 많은 측면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늑재와 궁륭(穹窿)을 촘촘히 연결한 망을 만들어 냈다. 이것이 로마의 아치 혁명의 원리였다.
아치의 완성은 대규모 목욕장과 원형 경기장이었다. 아그리파, 네로, 그리고 티투스의 목욕장을 시작으로 연속되는 오랜 과정을 통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욕장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이러한 목욕장은 치장 회반죽이나 벽돌로 표면을 마감 처리하고 위풍당당한 높이를 자랑하는 기념비적인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실내는 대리석과 모자이크 포장 면, 다양한 색깔의 원주, 정간(井間)이 있는 천장, 그림, 그리고 조각상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목욕장에는 탈의실, 온탕과 냉탕, 따뜻한 공기의 중간 방, 수영장, 체육관, 도서관, 독서실, 열람실, 휴게실, 그리고 아마도 미술관이 갖추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방은 마루 밑과 벽 내부로 이어지는 커다란 토관(土管)을 통해 중앙난방식으로 가열되었다. 이러한 공중 목욕장은 이제까지 세워진 건물 가운데 가장 널찍하고 화려했으며, 탁월함에서 견줄 만한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공중 목욕장은 원수정이 증대하는 독재 군주권에 대해 변명했던 오락 사회주의의 일부였다.8)
이러한 온정주의의 연장선에서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극장들이 건립되었다. 로마의 극장은 오늘날 수도들의 극장 수보다 훨씬 적었지만 규모는 훨씬 더 컸다. 가장 규모가 작은 극장은 코르넬리우스 발부스가 마르스 평원에 건립했던 것으로 7700명을 수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1만 7500명을 수용하는 폼페이우스 극장을 재건축했다. 그는 2만 500명을 수용하는 마르켈루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또 하나의 극장을 완공했다. 그리스 극장과 달리 로마의 극장은 벽으로 가려졌고, 객석은 언덕의 경사면에 놓여 있는 대신에 아치와 볼트의 석조 건축으로 지탱되었다. 무대만 지붕으로 덮었을 뿐이지만, 종종 관객은 리넨으로 만든 차양으로 햇빛을 차단했는데, 폼페이우스 극장을 덮었던 차양은 폭은 550피트에 달했다. 극장의 입구 위에는 고위 인사들과 유력자들을 위해 칸막이 좌석이 마련되었다. 어떤 무대에는 연극이 시작되었을 때 위로 높이 올리지 않고 홈으로 내렸던 커튼이 있었다. 무대는 지면보다 대략 5피트 높았다. 무대의 배경은 좌우로 펼쳐져 배우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관객을 향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뱉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정교하게 지은 건물 모습을 취했다. 세네카는 “저절로 위로 높이 올라가는 비계(飛階), 즉 바닥 부분이 소리 없이 공중으로 떠오르도록 고안한 무대 수리공”에 대해 말하고 있다.28a 무대는 각기둥을 회전시키거나, 아니면 무대 장치를 좌우나 높은 곳으로 옮겨서 교체되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 무대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속이 텅 빈 단지를 무대의 바닥과 벽에 박아 두는 것으로 음향 효과를 거두었다.28b 객석은 통로를 따라 흐르는 실개천의 물 덕분에 시원해졌다. 이따금 물, 포도주, 그리고 크로커스(crocus) 주스의 혼합물이 관을 타고 가장 높은 층까지 운반되어, 그곳에서 향기 나는 물보라처럼 관객 위로 뿌려졌다.28c 조각상이 극장의 내부를 장식했고, 거대한 그림이 무대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현대 세계의 어떤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도 폼페이우스 극장의 크기와 화려함에 견줄 수 없을 것이다.
훨씬 더 인기 있었던 것은 원형 극장, 경기장, 그리고 원형 경기장이었다. 로마에는 주로 체육 경기에 사용되던 경기장이 여러 개 있었다. 말이나 전차 경주, 그리고 일부 볼거리들이 마르스 평원의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아니면 더 자주 팔라티누스 언덕과 아벤티누스 언덕 사이에 카이사르가 재건축했던 전차 경기장에서 제공되었다. 전차 경기장은 삼면에 나무 의자를 갖추고 길이 2200피트, 너비 705피트로 1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타원형 경기장이었다.29 트라야누스가 대리석으로 좌석을 개축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 로마의 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콜로세움은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 구조물이었다. 콜로세움에 대한 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훨씬 전에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에는 원형 경기장이 있었다. 쿠리오가 기원전 53년에, 카이사르가 기원전 46년에, 그리고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가 기원전 29년에 원형 경기장을 건립했다. 로마가 콜로세움이라고 부르던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해서 티투스가 완공했다.(서기 80년) 건축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건설 부지로 카일리우스 언덕과 팔라티누스 언덕 사이 네로의 황금 궁전 정원에 있는 호수를 선택했다. 콜로세움은 둘레가 1790피트인 타원형 석회 화석으로 건립되었다. 외벽은 높이가 157피트로 세 개 층으로 나누어졌다. 1층은 부분적으로 투스카니·도리아 양식의 기둥으로, 2층은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으로, 3층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으로 지탱되었다. 각각의 기둥 사이의 공간은 아치 양식이었다. 주요 회랑은 원통형 볼트로 지붕을 얹었으며, 이것은 가끔씩 중세 수도원 안뜰을 둘러싼 회랑식으로 교차되었다. 콜로세움 내부도 세 개 층으로 구분되었다. 각 층은 아치로 지탱되었고, 칸막이 좌석이나 좌석의 내벽 동심원으로 나뉘었으며, 계단에 의해 쐐기 형태로 분리되었다. 오늘날 콜로세움 내부의 모습은 위대한 숙련공들이 아치문, 통로, 그리고 좌석을 만들던 다수의 석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조각상들과 그 밖의 실내 장식이 콜로세움 전체를 장식했고, 열을 지어 늘어서 있는 많은 좌석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콜로세움에는 80개의 입구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두 개는 황제와 수행원을 위해 마련되었다. 입구와 출구가 많았으므로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순식간에 텅 빌 수 있었다. 시합이 벌어지는 경기장은 너비 287피트, 길이 180피트였다. 짐승 취급을 받는 인간들을 야수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쇠로 된 격자로 덮개를 씌운 15피트 벽으로 경기장을 둘러쌌다. 콜로세움 자체는 아름다운 건물이 아니며, 거대한 규모 자체가 원대하면서도 동시에 어느 정도 난폭한 로마인의 기질도 드러낸다. 콜로세움은 고전 세계가 남긴 모든 유적 가운데 가장 웅장한 건물에 불과하다. 로마인들은 거인들처럼 건설했다. 따라서 그들이 보석 세공인들처럼 끝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로마의 예술은 아티카와 아시아,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양식을 혼란스럽게 절충한 것으로서 절제되고, 거대하며, 우아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아름다움의 필수 조건인 유기적인 통일성으로 결합하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로마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투박한 힘에는 동방적인 무언가가 있다. 로마의 건물들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하드리아누스의 판테온마저 예술적인 통일체라기보다는 건축상의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돋을새김과 유리 제품에서처럼 특정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여기에서 섬세한 느낌이나 세련된 기법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안정성과 유기적 통일, 그리고 효용의 완성, 거대함과 장식에 대한 벼락부자의 열정, 사실주의에 대한 병사의 고집, 전사의 압도적인 힘의 기술을 추구하는 공학자의 기술을 기대해야 한다. 로마인들은 보석 세공인들처럼 끝마무리를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복자란 보석 세공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정복자들처럼 끝마무리를 했다.
로마인들이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매력적인 도시를 창조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조형, 회화, 건축술, 그리고 모든 시민이 이용할 수 있었던 도시를 만들었다. 자유민 대중들은 빈곤했지만 어느 정도 로마의 많은 부를 소유했다. 즉 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곡물을 먹었고, 거의 무료로 극장, 원형 경기장, 그리고 경기장을 이용했다. 그들은 운동했고, 원기를 회복했으며, 즐겼고, 공중 목욕장에서 독학했다. 그들은 수많은 줄기둥이 만들어 낸 그늘을 만끽했으며, 수 마일의 거리와 3마일의 마르스 평원에 걸쳐 있었던 장식된 주랑 현관 아래를 걸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대도시를 결코 본 적이 없었다. 도시 중심부에는 업무로 분주하고, 웅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제국을 뒤흔드는 토론으로 활기가 넘치는 시끌벅적한 포룸이 있다. 그 다음에는 유례없이 많은 웅장한 신전, 바실리카, 대저택, 극장, 목욕장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활발하게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가게와 사람으로 가득 찬 공동 주택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일단의 집과 정원이 있고, 다시 한 번 신전과 공중 목욕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시민을 시골로 밀어붙이고 산을 바다와 묶어 주는 일단의 별장과 농장이 있다. 요컨대 이것이 황제들이 통치하는 위풍당당하고, 강력하고, 화려하고, 물질주의적이고, 잔혹하고, 사악하고, 무질서하고, 장엄한 로마였다.
로마인의 주거, 신전, 극장, 그리고 욕장으로 들어가 보자. 그 다음 로마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자. 우리는 로마인에게서 그들의 예술보다 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로가 통치할 무렵 로마인은 지리적으로만 로마인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처음부터 상기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억제하는 데 실패했던 상황들, 즉 구(舊) 인종들 사이에서의 독신, 무자식, 낙태, 유아 살해와 신(新)인종들 사이에서의 노예 해방과 상대적인 다산이 로마인의 인종 형질과 도덕적 기질, 그리고 심지어 얼굴 생김새마저 바꾸어 놓았다.
예전에는 로마인들이 성(性) 충동에 의해 혈통에 빠져들고 자신들의 사후 무덤 관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혈통에 끌렸다면, 이제 상층과 중산 계층은 성(性)과 혈통을 분리시킬 수 있게 되었고 내세에 회의적이었다. 예전에는 자녀 양육이 여론에 떠밀린 국가에 대한 명예로운 의무였다면, 이제는 냄새가 날 정도로 북적대는 도시에서 더 많은 출산을 요구한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였다. 이와는 반대로 유산을 갈망하는 아첨꾼들이 계속해서 부유한 독신 남자들과 무자식 남편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에우베날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만큼 당신을 친구들에게 사랑 받게끔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오.”30 페트로니우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한 등장인물은 “크로토나에는 아첨하는 사람과 아첨을 받는 사람의 두 부류 주민들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유일한 죄악은 당신의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전쟁터와 같다. 그곳에는 시체와 시체를 쪼아 먹는 까마귀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31 세네카는 하나뿐인 아이를 잃어버린 한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이제 그녀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더 많은 권한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32 그라쿠스 형제 가족에게는 열두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네로 시대에 로마의 귀족이나 기사 계층에서 그렇게 많은 아이를 가진 가족을 다섯 이상 찾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예전에는 평생에 걸친 경제적 결합이었던 결혼이, 이제는 10만 명의 로마인들 사이에서 영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시적인 모험이자 생리적인 편의나 정치적인 원조를 상호 조건으로 하는 느슨한 계약이 되었다. 미혼자는 유언을 남길 수 없다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 일부 여성들이 환관을 피임용 남편으로 맞아들였다.33 그리고 일부 여성들은 아내가 자식을 낳을 필요가 없으며 원하는 만큼의 연인을 가질 수 있다는 조건으로 빈곤한 남자들과 위장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34 피임은 물리적 방식뿐 아니라 화학적 방식으로도 행해졌다.35 이러한 방식이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낙태를 위한 다른 방법이 많이 있었다. 에우베날리스는 “빈곤한 여성들은 출산의 공포와 양육의 모든 고통을 견뎌 낸다. …… 하지만 금박 입힌 호사스러운 침대가 얼마나 자주 임신한 여성의 거처가 될 수 있을까? 낙태 시술자의 기술이 대단히 뛰어나고, 약은 대단히 강력하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편들에게 “즐겨라. 그리고 그녀에게 약을 주어라. ……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당신은 에티오피아인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한다.36 이 정도로 계몽된 사회에서 유아 살해는 드물었다.9) 부유한 계층의 불임은 이민자와 빈민의 다산으로 충분히 상쇄되었으며, 로마와 제국의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벨로흐(Beloch)는 제정 초기 로마 인구를 80만 명으로, 기번(Gibbon)은 120만 명으로, 그리고 마르카르트(Marquardt)는 160만 명으로 추산했다.10) 벨로흐는 제국 인구를 5400만 명으로, 기번은 1억 2000만 명으로 추정했다.38 귀족의 숫자는 예전과 같이 매우 많았지만, 혈통은 거의 완전히 바뀌었다. 아이밀리우스 가문, 클라우디우스 가문, 파비우스 가문, 발레리우스 가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듣지 못한다. 코르넬리우스 가문만이 늦어도 카이사르 때까지는 자신들의 로마를 자랑하듯 드러내 보이는 당당한 씨족으로 남아 있었다. 일부 가문은 전쟁이나 정치적 사형 집행으로 사라졌으며, 다른 일부 가문은 산아 제한, 생리학적 타락, 아니면 그들을 평민 집단으로 떨어뜨린 빈곤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그들의 자리를 로마의 기사 계층, 이탈리아 도시의 지위 높은 사람들, 그리고 속주 귀족들이 차지했다. 서기 56년에 한 원로원 의원은 “대부분의 기사와 많은 원로원 의원이 노예들의 후손이었다.”라고 단언했다.39 한두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옵티마테스(Optimates, 벌족파)는 전임자들의 방식을 채택했고, 아이의 숫자는 더 적어지고 사치는 더 늘었으며, 동방에서 밀어닥치는 사람들에게 굴복했다.
맨 먼저 그리스인들이 왔다. 그들은 그리스 본토보다는 키레나이카,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에서 온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들은 열정적이고 영리하고 솜씨 좋은, 반쯤 오리엔트인이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소상인이나 수입상이었다. 그중 일부는 과학자, 저술가, 교사, 미술가, 의사, 음악가, 배우였다. 일부는 진지하게, 일부는 타산적으로 철학에 전념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유능한 행정가이고 재정가였으며, 상당수에게서 양심의 가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두에게는 종교적 신념이 없었다. 그리스인 대부분은 노예로 왔으며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그들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면 외면적으로는 노예 상태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고대 그리스가 남긴 문화적 찌꺼기로 지적인 체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로마인을 혐오하고 경멸했다. 이제 수도 로마의 거리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수다스러운 그리스인들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로마에서는 라틴어보다 그리스어가 더 자주 들렸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쓴 글을 모든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만들려면, 그리스어로 써야 했다. 로마에서 대부분의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그리스어를 말했다. 시리아인, 이집트인, 그리고 유대인도 마찬가지로 그리스어를 말했다. 대규모 무리를 지은 이집트인, 즉 상인, 숙련공, 예술가들이 마르스 평원에서 살았다. 마르고, 붙임성 있고, 빈틈없는 시리아인들이 수도 로마 도처에서 교역, 수공예, 비서 업무, 금융, 그리고 책략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유대인은 이미 카이사르 시대에 수도 로마 인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수의 유대인이 기원전 140년 초에 로마에 왔다.40 그리고 많은 유대인이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원정 이후 로마에 전쟁 포로로 잡혀 왔다. 유대인은 때로는 근면함과 절약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주민들을 불편하게 했던 자신들의 종교 관습에 대한 엄격한 집착 때문에 빠르게 해방되었다. 기원전 59년 무렵 키케로는 민회에 유대인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에 반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무모하다고 말했다.41 대체로 공화파는 유대인에 적대적이었지만, 민중파와 황제들은 우호적이었다.4211) 1세기 말경 수도 로마에서 유대인의 숫자는 2만 명 정도였다.45 그들은 대부분 테베레 강 서쪽 지역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주기적으로 홍수를 겪었다. 그들은 인근 항만에서 일했고, 수공예와 소매업에 종사했으며, 로마 시를 돌아다니며 행상했다. 그들 중에는 부자도 있었지만, 소수만이 대상인이었다. 시리아인과 그리스인이 국제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로마에는 수많은 유대 교회당이 있었고, 각각의 교회당에는 학교, 율법 학자, 장로회가 있었다.46 유대인의 분리주의, 극장과 경기에 대한 참석 거부, 낯선 도덕과 종교 의식, 빈곤과 그로 인한 불결함이 일상적인 인종적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에우베날리스는 유대인들의 다산을, 타키투스는 일신교를,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마늘 사랑을 비난했다.47 예루살렘의 유혈 점령으로 악감정이 고조되었으며, 유대인 포로들과 신성한 전리품의 행렬이 티투스의 개선식과 그의 개선문 돋을새김의 특징을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이 예루살렘의 신전 유지를 위해 매년 납부해 오던 2분의 1셰켈(이스라엘 화폐 단위)을 이제부터는 매년 로마의 재건을 위해 바쳐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것은 유대인의 상처에 모욕을 얹어 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양 있는 많은 로마인들이 유대인의 일신교를 찬양했다. 그리고 일부는 유대교로 개종했으며, 심지어 명문가의 많은 로마인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예배와 휴식의 날로 지켰다.48
로마의 인종은 이질적이고 세계 시민주의적이었다. 예컨대 로마에는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 유대인, 아프리카 출신의 몇몇 누미디아인, 누비아인, 그리고 에티오피아인, 아시아 출신의 소수 아랍인, 파르티아인, 카파도키아인, 아르메니아인, 프리기아인, 그리고 비티니아인, 달마티아, 트라키아, 다키아, 그리고 게르마니아 출신의 강력한 이방인, 갈리아 출신의 콧수염 기른 귀족들, 스페인 출신의 시인과 소농들, 그리고 “브리타니아 출신의 문신한 이방인들”이 있었다.49 마르티알리스는 로마의 매춘부들이 이렇듯 다양한 다국적 고객에 부응해서 자신들의 언어와 매력을 능숙하게 가다듬은 솜씨에 경탄했다.50 에우베날리스는 시리아의 거대한 오론테스 강이 테베레 강으로 흘러들고 있다고 불평했으며,51 타키투스는 수로 로마를 “세계의 정화조”로 묘사했다.52 동방에서 유입된 외관, 풍습, 옷, 말, 몸짓, 말다툼, 생각, 그리고 신앙이 로마 시의 삶 대부분을 요동치게 했다. 3세기 무렵 로마 궁정은 동방의 군주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4세기 무렵 로마의 종교는 동방의 종교가 될 것이고, 세계의 주인이 노예의 신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잡다한 군중 사이에 일단의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원로원 의원들이 분노를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네로의 정부(情婦)인 포파이아를 경멸했으며, 노예들을 대량 학살한 페다니우스 세쿤두스에 항의하기 위해 원로원 의사당으로 돌격했다.53 이러한 귀족들에게 평민의 소박한 미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유대인의 가족 생활은 모범적이었으며, 소규모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그들의 경건함과 관대함으로 쾌락에 미쳐 있는 이교 세계를 난처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마 시에 유입된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그들의 토착 환경, 문화, 그리고 도덕률로부터 뿌리 뽑힌 사람들로 인해 타락해 있었다. 수년간의 노예 신분으로 단정한 품행을 지지해 준 자존감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상이한 관습들과 매일 충돌함으로써 그들의 맞춤 도덕을 훨씬 더 닳게 만들었다. 만약 로마가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외국인 혈통을 빨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러한 신참자 모두를 빈민굴 대신에 학교를 통해 들어오게 했더라면, 그들을 수많은 잠재적 우월성을 가진 사람으로 다루었더라면, 그리고 인종 간의 동화가 침입에 뒤지지 않도록 가끔씩 성문을 닫았더라면, 로마는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인종적, 문학적 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서방의 대변자이자 요새인 로마인의 로마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 일은 방대한 작업이었다. 승리한 도시 로마는 거대함과 잡다한 정복 때문에 운이 다했고, 로마의 순수 혈통은 셀 수 없이 많은 예속민들로 약해졌으며, 로마의 지식인층은 한때 로마의 노예였던 사람들의 문화에 수적으로 압도되어 끌려다녔다. 대량 번식이 우량종의 번식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자식을 많이 낳는 피정복민들이 자식을 낳지 않는 로마의 주인집에서 주인이 되었다.
로마인의 유년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로마의 예술 작품과 비문을 통해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신중하게 사랑받은 것이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이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에우베날리스는 분노를 멈추고 아이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좋은 본보기, 아이들이 멀리해야 할 사악한 광경과 소리, 그리고 도가 지나치는 사랑의 경우일지라도 아이들에게 표현해야 할 존중에 관해 애정이 듬뿍 담긴 구절을 썼다.54 파보리누스는 한 담론에서 어머니들에게 자신들의 아이를 직접 양육하라고 부탁했다.55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도 동일한 취지로 말했지만 실제로 내용은 보잘것없었다. 아이를 유모의 손에 양육시키는 것은 그렇게 할 만한 여유가 있는 모든 가족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여기에서는 주목할 만한 비극이 뒤따르지 않았다.12)
조기 교육은 보통 그리스인이었던 유모가 담당했다. 동화의 첫머리는 “옛날에 왕과 여왕이 ……”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은 여전히 민간 업체가 맡아서 했다. 부자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종종 가정 교사를 고용했지만, 에머슨처럼 퀸틸리아누스도 아이에게서 성격 형성에 중요한 우정을 빼앗아 가고 경쟁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가정 교사 고용을 경고했다. 대체로 사내아이와 여자아이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무상 교육을 받았다. 아이들의 안전과 도덕을 돌보며 학교에 데리고 다니는 노예가 있었다. 그러한 학교는 제국의 모든 곳, 심지어 작은 시골 마을에도 있었다. 폼페이의 벽에 새겨진 낙서를 통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교육은 당시에 그 이전과 그 이후 어느 때 보다 더 광범위하게 지중해 세계에 확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돌보며 학교에 데리고 다니는 노예와 교사는 모두 그리스인 해방 노예나 노예였다. 젊은 시절 호라티우스의 고향에서는 학생 각자가 교사에게 매달 8아세스(48센트)를 지불했다.57 그리고 350년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초등학교 교사에게 지불할 최대 급여를 학생당 매달 50데나리우스(20달러)로 정했다. 이것으로 교사의 지위가 상승했고 아세스 주화의 가치가 저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략 열세 살에 남녀 어느 쪽이건 합격한 학생은 중등학교에 진학했다. 로마에는 서기 130년에 중등학교가 스무 개 있었다. 여기에서는 학자들이 대체로 고전 시인들에 대한 강의 해설을 통해 문법, 그리스어, 라틴 문학과 그리스 문학, 음악, 천문학, 역사, 신화, 철학을 더 많이 연구했다. 이 단계까지 여자아이들은 사내아이들과 똑같은 강의를 받았던 것 같지만, 종종 추가로 음악과 무용 교육을 받으려고 애썼다. 중등학교 교사들은 거의 항상 그리스인 해방 노예였으므로, 그들이 그리스 문학과 역사를 강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로마의 문화는 그리스 색채를 띠었고, 2세기 말 무렵까지 거의 모든 고등 교육은 그리스어로 이루어졌으며, 라틴 문학은 당대에 공통된 그리스어인 코이네(koiné)와 문화에 흡수되어 버렸다.
오늘날의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 교육에 상응하는 로마의 교육은 웅변술 교사들의 학교에서 제공되었다. 제국은 법정에서 의뢰인을 변호하거나, 의뢰인을 위해 연설을 써주거나, 공개 강연을 하거나,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기술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이상의 네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던 웅변가들로 가득했다. 많은 웅변가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여행하며 문학, 철학 또는 정치에 대해 말했으며, 웅변 실력으로 모든 주제를 다루는 방법을 과시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당시 63세이던 그리스인 이사에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토론을 위한 여러 문제를 제안하고, 청중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때때로 청중이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 말할 수 있는 자유마저 준다. 그 뒤 그는 일어나서 겉옷을 입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 그는 대단히 예의 바르게 자신의 주제를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명쾌하고, 논쟁은 독창적이며, 논리는 설득력이 있고, 웅변은 탁월하다.58
웅변가들은 학교를 열고, 조교를 고용하며, 많은 수의 학생을 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은 대략 열여섯 살에 입학해 강좌당 2000세스테르티우스까지 수업료를 납부했다. 주요 과목은 웅변술, 기하학, 천문학, 철학이었다. 즉 오늘날 과학이라고 부르는 많은 과목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과목으로 “교양 교육”이 구성되었다. 이것은 육체노동을 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자 자유민들을 위해 기획된 교육이었다. 페트로니우스는 모든 세대가 불평하는 것처럼 교육이 젊은이에게서 성숙의 기회를 박탈했다고 불평했다. 즉 “학교는 젊은이들을 총체적으로 어리석게 만든 것에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는 젊은이들이 일상생활의 모든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보거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59 학교는 근면한 학생에게 모든 시대를 통틀어 법률가의 직업을 특징 지우던 사고의 명쾌함과 민첩함, 그리고 로마의 웅변가들을 돋보이게 해 주던 거리낌 없는 웅변 능력을 부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학교에서는 어떤 학위도 수여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학생은 원하는 만큼 오래 머무를 수 있었으며 원하는 만큼 강좌를 수강할 수 있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25세까지 학교에 머물렀다. 여성들도 학교에 다녔다. 일부 여성들은 결혼 후에 학교에 다녔다. 그 이상의 교육을 받고 싶은 사람들은 철학을 배우기 위해 철학의 뿌리인 아테네로, 의학을 배우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웅변술의 중요한 세부 사항을 배우기 위해 로도스로 갔다. 키케로는 아테네의 대학에서 자신의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데 1년에 4000달러를 지출했다고 한다.
대략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웅변술 학교가 수적으로나 영향력에서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으므로 약삭빠른 황제는, 국가가 주요 교사들에게 급여를 지불함으로써 수도 로마의 더 중요한 웅변술 학교들을 당국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가장 높은 급여는 1년에 10만 세스테르티우스(1만 달러)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러한 국가 교부금을 얼마나 많은 교사나 도시로 확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소(小)플리니우스가 코뭄에 설립한 것처럼 고등 교육을 위한 개인들의 기부 소식이 전해진다.60 트라야누스는 두뇌가 명석한 것에 비해 돈이 부족한 5000명의 사내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했다.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무렵 중등학교에 대한 국가의 자금 제공이 제국 전역의 수많은 시 당국에서 채택되었다. 그리고 은퇴한 교사들을 위해 연금 기금을 따로 떼어 두었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는 각 도시의 주요 교사들에게 세금과 그 밖의 시민 의무를 면제했다. 미신이 증가하고, 도덕이 타락하며, 문학이 쇠퇴한 것에 비해 교육은 최고조에 달했다.
젊은 여성들의 도덕 생활은 조심스럽게 억제된 반면에 젊은 남성들은 관대하게 관리되었다. 그리스인처럼 로마인도 남성들이 매춘부들에게 자주 드나드는 것을 기꺼이 눈감아 주었다. 매춘부 직업은 합법화되었고 제한되었다. 그리고 법률은 도시 성벽 바깥에서 유곽이 밤에만 영업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매춘부는 조영관(造營官)에 의해 등록되었고 스톨라(stola, 남자 복장인 토가에 해당하는 여성 옷으로, 소매가 있거나 없는 길고 헐거운 옷 — 옮긴이) 대신 토가를 입어야 했다. 일부 여성들은 간통이 발각되어 법적인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매춘부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매춘부에게 지불하는 요금은 재정 형편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조정되었다. 우리는 “4분의 1아세스의 여성”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 시, 노래, 음악, 춤, 그리고 세련된 대화로 고객을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교양 있는 고급 매춘부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여성을 찾아 쉽게 성을 매수하기 위해 성벽 바깥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오비디우스는 그러한 여성들을 주랑 현관 밑에서, 경기장에서, 극장에서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 많이”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61 그리고 에우베날리스는 성을 파는 여성들을 신전들, 특히 사랑에 관대한 여신인 이시스 신전 주변에서 발견했다.62 그리스도교도 저술가들은 신상 안치소 내부에서, 그리고 로마 신전의 제단 사이에서 매춘이 행해졌다고 비난했다.63
남창들도 이용할 수 있었다. 법률적으로 비난받았지만 관습적으로 용인되던 동성애가 자유분방함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난 다정함에서 어떤 여성도 견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리키스쿠스를 향한 사랑의 화살로 괴로워한다.” “어떤 매력적인 아가씨나 호리호리한 젊은이를 향한 다른 사랑의 불꽃으로만” 이러한 열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64 마르티알리스는 가장 정선된 짧은 풍자시에서 남색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펴낼 만한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에우베날리스의 풍자시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경쟁에 대해 불평하는 한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65 가치와 성별에 무관심한 호색적인 시 「프리아페이아(Priapeia)」는 교양 있는 젊은이들과 치기 어린 성인들 사이에서 거리낌 없이 유포되었다.
결혼은 이러한 경쟁적인 성의 배출구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으며, 걱정하는 부모들과 결혼 중매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거의 모든 미혼 여성들이 적어도 일시적인 남편을 찾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19세 이상의 미혼 여성은 “노처녀”로 간주되었지만, 그 수는 드물었다. 약혼한 남녀는 좀처럼 서로를 보지 못했으며 구혼은 없었다. 세네카는 다른 모든 것은 구입하기 전에 조사해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신랑이 신부를 조사해 볼 수는 없다는 사실에 투덜거렸다.66 결혼 전의 감상적인 결합은 보기 드물었다. 그리고 애정 시는 기혼 여성들이나 결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중세와 근대 프랑스의 상황과 비슷하게 결혼 이후에 찾아왔다. 대(大)세네카는 로마 여성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간통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며,67 철학자였던 그의 아들은 두 명의 정부(情夫)에 만족하는 기혼 여성을 정절의 본보기로 생각했을 정도였다.68 냉소적인 오비디우스는 “순결한 여성은 남성의 요구를 받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더욱이 아내의 통정에 분노한 남성은 시골뜨기에 불과하다.”라고 노래했다.69 이러한 표현은 문학적인 비유일 수 있다. 퀸투스 베스필로가 자신의 아내에게 바친 다음의 수수한 비문에 더 신뢰가 간다. 즉 “죽을 때까지 이혼 없이 결혼 생활이 계속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은 41년 동안 행복하게 계속되었다.”70 에우베날리스는 5년 동안 여덟 번 결혼한 어느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71 사랑보다는 재산이나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일부 여성들은 지참금을 남편에게, 그리고 몸을 정부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에우베날리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한 간통 여성은 예기치 않게 간통 현장에 들이닥친 남편에게 “우리 둘 다 서로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합의를 보지 않았나요?”라고 말했다.72 당시 여성들의 “해방”은 참정권의 형식적 의례와 사문화된 법률의 문구를 제외한다면 지금처럼 완벽했다. 입법은 여성들을 종속시켰지만, 관습은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
수많은 경우에 여성 해방은 오늘날처럼 산업화를 의미했다. 일부 여성은 가게나 작업장에서 특별히 직물업 분야에 종사했으며, 일부는 변호사와 의사가 되었다.73 그리고 일부 여성은 정치적으로 강력해졌다. 속주 총독의 아내는 군대를 사열했고 연설했다.74 베스타 여신전의 신녀들은 친구들을 위해 정치적 지위를 확보해 주었으며, 폼페이 여성들은 벽에 자신들의 정치적 선호를 나타냈다. 보수주의자들은 만약 여성들이 평등을 획득한다면 평등을 지배력으로 바꾸려 할 것이라는 카토의 경고가 실현된 것에 한탄했다. 에우베날리스는 여자 배우와 운동선수, 검투사, 그리고 시인을 발견하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75 마르티알리스는 경기장에서 야수들, 심지어 사자들과 싸우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76 더욱이 스타티우스는 그러한 싸움에서 죽어 가는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한다.77 귀부인들이 “자신을 사방에 노출시키면서” 의자 가마를 타고 거리를 지나갔다.78 그들은 주랑 현관, 공원, 정원, 신전 안마당에서 남자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남자들을 따라 사적, 공적 연회에, 원형 경기장과 극장에 갔다. 오비디우스는 그곳에서 “여러분은 그들의 드러난 어깨에 매혹되어 빤히 쳐다본다.”라고 전한다.79 이렇듯 들뜨고 화려하고 다중적인 성(性)의 사회는 페리클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을 놀라게 했을지도 모른다. 봄에는 상류 사회의 여성들이 보트, 해안, 바이아이와 다른 휴양지의 별장을 웃음과 당당한 아름다움, 요염한 대담성, 그리고 정치적 음모로 가득 채웠다. 노인들이 그들을 간절히 원하며 비난했다.
경박하거나 부도덕한 여성들은 소수였으며, 지금처럼 당시에도 남의 시선을 끌었다. 비록 항상 눈에 띄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많은 여성들이 미술, 종교 또는 문학에 심취했다. 술피키아의 시는 티불루스의 시와 더불어 후세에 전해질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술피키아의 시는 무척 관능적이었지만, 남편에게 전해졌을 때는 고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80 마르티알리스의 친구 테오필라는 철학자로서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 실질적인 대가였다. 일부 여성들은 자선과 사회 봉사에 몰두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도시에 신전, 극장, 주랑 현관을 제공하는 한편 여성 후원자로서 조합에 기부했다. 라누비움의 한 비문은 “여성 민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로마에는 부인 협의회가 있었다. 아마도 이탈리아에는 전국 여성 동호인 연합회가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마르티알리스와 에우베날리스를 읽고 나면 로마에 훌륭한 여성들이 무척 많았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된다. 옥타비아는 모든 배신을 뚫고 안토니우스에게 충실했으며 그가 외부에서 데려온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양육했다. 안토니아는 옥타비아의 사랑하는 딸이자 드루수스의 정숙한 미망인이었으며, 게르마니쿠스의 흠잡을 데 없는 어머니였다. 말로니아는 티베리우스의 사악함을 공공연히 비난한 다음 자살했다. 아리아 파에타는 클라우디우스가 카이키나 파에투스에게 죽으라고 명령했을 때 단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찔렀고, 죽어 가면서 확신을 갖고 “다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단검을 남편에게 건네주었다.81 파울리나는 세네카와 함께 죽으려고 했다. 폴리타는 네로가 자신의 남편을 처형했을 때 굶기 시작했고, 아버지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는 함께 자살했다.82 여자 해방 노예 에피카리스는 피소의 음모를 폭로하기보다는 모든 고문을 견뎌 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여성들이 살생부에 올라 있는 남편들을 숨겨 보호했고, 그들과 함께 추방된 신세가 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헬비디우스의 아내 판니아처럼 엄청난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남편들을 지켰다. 즉 이러한 여성들만이 마르티알리스의 경구와 에우베날리스의 풍자에 등장하는 모든 타락한 여자들에 맞서 자신들에게 유리한쪽으로 저울을 기울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여걸들 뒤에는 아내로서의 정절과 어머니로서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로마인의 삶 전체 구조를 지탱하던 이름 없는 부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마의 옛 미덕,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헌신적인 사랑, 진지한 책임감, 사치와 과시의 기피가 로마 가정에서 계속 살아남았다. 플리니우스의 서한에서 묘사된 품위 있고 건전한 가족들은 네르바와 트라야누스의 등장과 함께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제 군주 시대 동안 줄곧 은밀히 존재했다. 그리고 황제들의 첩보 활동과 무기력한 대중들의 타락과 화류계의 천박함에도 살아남았다. 우리는 배우자가 배우자에게, 그리고 부모가 자식에게 남긴 비문에서 그러한 가정들을 얼핏 엿볼 수 있다. 한 비문에는 “이곳에 프리무스의 아내 우르빌리아의 시신이 잠들어 있다. 그녀는 내 목숨보다 소중했다. 가장 사랑하는 그녀는 스물세 살에 죽었다. 안녕, 내 연인이여!”라고 씌어져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비문에는 “18년간 행복하게 살았던 나의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녀의 사랑을 위해 맹세코 재혼하지 않겠소.”라고 씌어져 있다.83 우리는 가정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그들은 털실을 잣고, 자식들을 꾸짖고 교육하며, 하인들을 감독하고, 얼마 되지 않은 자금을 관리한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과 함께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가정 신들에 대한 숭배에 참여한다. 부도덕에도 불구하고 고대 세계에서 가족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리스가 아닌 로마였다.
몇백 개의 조각상들로부터 판단해 볼 때 네로 시대의 로마 남성은 외관과 얼굴 생김에서 공화정 초기의 남성에 비해 더 뚱뚱하고 부드러웠다. 세계 지배가 그들 대부분을 호감을 주는 존재가 아닌, 억세고 단호하며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음식과 포도주와 나태함이 스키피오 부자를 분개시킬 정도로 다른 많은 사람들을 통통한 모습으로 살찌웠다. 로마 남성들은 여전히 면도를 했고, 아니면 더 자주 이발사로부터 면도를 받았다. 젊은이의 최초 면도는 그의 생애에서 축제일이었다. 그는 종종 경건하게 자신의 최초 수염을 신에게 바쳤다.84 보통의 로마인들은 공화정의 전통을 이어 나갔으며 머리를 짧게 잘랐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많은 멋쟁이들이 머리를 곱슬곱슬하게 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도미티아누스는 여기에 해당된다. 많은 남성들이 가발을 썼고, 일부 남성들은 정수리를 머리카락 비슷하게 색칠했다.85 이제 실내와 실외에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간단한 튜닉이나 블라우스를 입었다. 토가는 공식 행사에서만, 그리고 원로원이나 경기 대회에서 귀족들이 입었다. 카이사르는 관직의 표시로 자주색 토가를 입었다. 많은 고위 인사들이 그를 모방했지만 얼마 안 지나 자주색 의복은 황제의 특권이 되었다. 입기 번거로운 바지, 찾기 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