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tanbul Istanbul by Burhan Sonmez
Copyright © Burhan Sonmez – Kalem Agency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0 Taurus Books
Published in agreement with Kalem Agency through Greenbook Literary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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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감옥 배치도
첫째 날 _ 학생 데미르타이의 이야기 : 철문
둘째 날 _ 의사의 이야기 : 흰 개
셋째 날 _ 이발사 카모의 이야기 : 벽
넷째 날 _ 퀴헤일란 아저씨의 이야기 : 배고픈 늑대
다섯째 날 _ 학생 데미르타이의 이야기 : 밤의 불빛
여섯째 날 _ 의사의 이야기 : 시간의 새
일곱째 날 _ 학생 데미르타이의 이야기 : 회중시계
여덟째 날 _ 의사의 이야기 : 칼처럼 날카로운 마천루들
아홉째 날 _ 이발사 카모의 이야기 : 모든 시 중의 시
열째 날 _ 퀴헤일란 아저씨의 이야기 : 노란 웃음
학생 데미르타이의 이야기
철문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이스탄불에 그렇게 눈이 많이 온 적은 없을 거예요. 한밤중에 수녀 두 명이 안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카라쾨이의 성 조지 병원을 출발해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가고 있었어요. 처마 밑에 새 수십 마리가 죽어 있는 것이 보였어요. 그때는 4월이었는데, 유다나무 꽃들은 얼어서 갈라지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바람 때문에 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들은 추위에 진저리를 칠 정도였어요. 의사 아저씨, 4월에 눈이 온 적 있다는 걸 아세요?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눈보라를 맞으면서 구르고 넘어지던 수녀 중 한 명은 젊은 수녀였고, 나머지 한 명은 나이가 든 수녀였어요. 수녀들이 갈라타 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젊은 수녀가 같이 가던 나이든 수녀에게, 어떤 남자가 계속 자신들 뒤를 따라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어요. 나이든 수녀는 이렇게 깜깜하고 눈보라가 치는데 남자가 따라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어요.”
멀리서 철문 소리가 들리자 나는 이야기를 멈추고 의사를 쳐다보았다.
감방은 추웠다. 내가 의사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발사 카모는 콘크리트 바닥에 오그리고 누워 있었다. 덮을 것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강아지처럼 서로의 몸을 붙여 온기를 유지해야만 했다. 며칠 동안 시간이 멈춰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낮인지 밤인지조차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고통이 무엇인지는 잘 알았다. 매일매일 고문을 당하러 끌려갈 때마다, 우리는 심장을 조여오는 공포를 새롭게 겪어내고 있었다. 끌려가는 짧은 순간 동안 우리는 고통 당할 준비를 했다. 인간과 동물, 정상인과 미친 인간, 천사와 악마는 모두 똑같은 것이었다. 철문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자 이발사 카모가 일어나 앉아 말했다. “날 끌고 가려고 오는 거야.”
일어나 감방 문으로 가서 작은 쇠창살 사이로 밖을 살펴보았다. 철문 쪽에서 누가 오는지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복도에 불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아무도 없었다. 아마 그들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불빛 때문에 잘 안 보여 눈을 깜빡거렸다. 맞은편 감방을 흘낏 보았다. 상처 입은 동물처럼 그들이 내던져 놓은 여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했다.
복도에서 나던 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다시 앉아서 발을 의사와 이발사 카모의 발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맨발을 서로 더 바짝 붙여 온기를 유지하려 애썼고, 입에서 나오는 뜨거운 바람을 서로의 얼굴 가까이에 계속 뿜어 주었다. 기다리는 데도 일종의 기술이 필요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벽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짤랑 소리와 덜커덕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 감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의사는 갇힌 지 2주째였다. 그때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다음날 깨어보니 의사가 계속 내 상처를 봐주고 있었다. 또 자기 윗옷을 나한테 덮어주기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매일 다른 심문조가 우리 눈을 가려 어디론가 데려가고 몇 시간 뒤 의식이 반쯤 나간 상태의 우리를 감방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발사 카모는 사흘 동안이나 불려가지 않고 대기 상태로 있었다. 이발사 카모는 이 방에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심문 받으러 끌려가지 않았고, 그들이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크기 감방은 처음에는 좁아 보였지만 우리는 곧 익숙해졌다. 바닥과 벽은 콘크리트, 문은 주철로 돼 있었다.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다리가 저리면 일어나서 감방 안을 걸었다. 가끔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올 때면 우리는 고개를 들어 복도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에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잠을 자거나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항상 추웠고 날이 갈수록 우리는 수척해졌다.
녹슨 철문이 삐걱대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심문자들은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귀를 기울이며 기다렸다. 철문이 닫히자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복도는 다시 텅 빈 상태가 됐다. “빌어먹을 놈들이 나를 안 끌고 갔군. 아무도 안 끌고 갔어.” 이발사 카모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고개 들어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던 그는 다시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누웠다.
의사는 내게 하던 얘기를 계속 해보라고 재촉했다.
“수녀 두 명이 눈보라를 맞으며 가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발사 카모가 내 팔을 갑자기 움켜잡았다. “이봐, 꼬마. 그 얘기 말고 다른 재미있는 얘기는 없나? 이 바닥도 이렇게 빌어먹을 정도로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인데 꼭 눈보라치는 얘기를 해야겠어?”
이발사 카모는 우리를 친구로 생각했을까, 적으로 생각했을까? 지난 사흘 동안 자기가 자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우리가 얘기해서 화가 난 걸까? 그래서 우리를 그토록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본 걸까? 그들이 이발사 카모의 눈을 가리고 끌고 가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면, 양 팔을 묶어 몇 시간 동안 매달아 놓았다면, 이발사 카모는 우리를 믿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는 우리가 하는 말과 우리의 두들겨 맞은 몸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것이다. 의사는 이발사 카모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잘 자게, 카모.”라고 말했다. 다시 누우라는 뜻이었다.
나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스탄불이 그렇게 더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한밤중에 수녀 두 명이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카라쾨이의 성 조지 병원을 나와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출발했을 때였어요. 수십 마리 새들이 처마 밑에서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지요. 유다나무의 꽃봉오리들은 한겨울인데도 꽃을 피우려고 했고, 길거리의 개들은 더워서 녹아 증발할 지경이었어요. 한겨울인데 사막처럼 찌는 듯이 덥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그렇게 강렬한 더위 아래 비틀비틀 걷던 수녀 중 한 명은 젊은 수녀였고, 다른 한 명은 나이가 든 수녀였어요. 수녀들이 갈라타 탑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젊은 수녀가 같이 가던 나이든 수녀에게, 어떤 남자가 계속 자신들 뒤를 따라 언덕을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어요. 나이든 수녀는 어둡고 인적이 없는 거리에서 남자가 따라오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거라고 했어요. 강간하기 위해서라는 거지요. 수녀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덕을 올라갔어요. 사람이라곤 한 명도 보이지 않았어요. 갑자기 닥친 더위로 사람들은 갈라타 다리로 몰려가 금각만 해변에서 햇볕을 쪼였고, 늦은 밤이 되자 거리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지요. 남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기 전에 잡힐 것 같다고 젊은 수녀가 말했어요. 나이든 수녀는 뛰자고 했어요. 긴 치마와 거추장스러운 의복이 방해가 됐지만 수녀들은 간판가게, 음반가게, 서점을 지나 전속력으로 질주했어요. 가게는 전부 문을 닫은 상태였어요. 젊은 수녀가 뒤를 돌아보더니 남자도 뛰고 있다고 말했어요. 수녀들은 벌써 숨이 차고 등에서는 땀이 흘러내렸어요. 남자가 따라잡기 전에 둘로 갈라지자고 나이든 수녀가 말했어요. 적어도 한 명은 도망칠 수 있다는 계산이었지요. 수녀들은 갈라져 다른 길로 뛰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태로 말이지요. 젊은 수녀는 뛰면서 뒤를 돌아보고 싶었어요. 젊은 수녀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생각했어요. 멀리서 도시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뒤를 돌아보던 사람들의 운명을 맞지 않기 위해 좁은 거리에서 앞을 보며 계속 달렸어요. 젊은 수녀는 어둠 속에서 계속 방향을 바꾸면서 달렸어요. 오늘은 저주받은 날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맞았어요. 한겨울의 무더위를 재앙의 전조로 받아들인 무당들이 TV에 나와 떠들었고, 길거리 건달들은 하루 종일 깡통을 두드려 댔지요. 잠시 후 젊은 수녀는 자기가 뛰는 소리밖에는 안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구석에서 속도를 낮췄어요. 낯선 거리에서 벽에 기댄 젊은 수녀는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발치에서 뛰어다니는 개와 함께 젊은 수녀는 아주 천천히 벽을 따라 살금살금 걸어갔어요. 실은 긴 얘기지만 짧게 할게요. 젊은 수녀가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도착해 보니 나이든 수녀는 없었어요. 자신이 당한 불행에 대해 얘기해 성당을 시끄럽게 만들 시간이 없었어요. 사람들이 나이든 수녀를 찾아 막 나서려고 할 때 문이 열리고 나이든 수녀가 흐트러진 머리로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섰어요. 나이든 수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물 두 잔을 마셨어요. 젊은 수녀는 너무나 궁금해 나이든 수녀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어요. 나이든 수녀는 거리 여기저기를 뛰어다녔지만 남자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고 말했어요.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젊은 수녀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어요. 나이든 수녀가 길거리 구석에 멈춰 섰고 그 남자도 멈춰 섰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나이든 수녀는 치마를 위로 걷어올렸어요. 그리고 어떻게 됐을까요? 남자가 바지를 내렸지요. 그러고 나서는? 나이든 수녀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됐겠어요? 빤하지요. 치마를 걷어올린 여자가 바지를 내린 남자보다는 빨리 뛰지 않겠어요?”
이발사 카모는 누운 채로 웃기 시작했다. 카모가 그렇게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카모의 몸은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꿈을 꾸면서 이상하고 신기한 존재와 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얘기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말했다. “치마를 걷어올린 여자가 바지를 내린 남자보다는 빨리 뛰지 않겠어요?” 이발사 카모가 큰 소리로 웃자 나는 몸을 기울여, 누워 있는 그의 입을 막았다. 갑자기 이발사 카모가 눈을 뜨고 나를 쏘아보았다. 간수들이 우리 소리를 듣는다면 구타하거나 몇 시간 동안 감방 벽 앞에 일렬로 늘어서 있도록 벌을 줄 것이다. 다음에 고문 당하기 전까지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발사 카모는 일어나서 벽에 기대 앉았다. 한숨을 쉬고 난 그의 표정은 예의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전날 밤 술에 취해 도랑에 빠져서 자다 깬 후 그곳이 어디인지 분간을 못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카모가 말했다. “내 몸이 불에 타는 꿈을 오늘 꿨어. 지옥의 맨 아래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불에서 막대기를 꺼내 나를 태우는 불에 집어넣었지. 그런데 제길, 몸이 계속 추운 거야. 다른 죄인들이 비명을 질러서 내 고막이 터졌다가 다시 낫기를 수천 번이나 반복했어. 불이 점점 세졌는데도 나는 잘 타지 않았어. 당신네들은 거기 없었어. 죄인들 얼굴을 죄다 살펴봤지만 의사 선생이나 학생은 안 보였어. 불이 더 필요했어.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애원했지. 부자들, 목사들, 삼류시인들, 비정한 엄마들이 내 눈 앞에서 불에 타면서 불길 사이로 나를 노려봤지. 내 마음속 상처는 타서 재로 변하지 않았어. 내 기억도 녹아서 망각 속으로 가는 것을 거부했지. 금속을 액체로 만드는 불길에서도 나는 저주 받은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어. 회개하라. 그들이 말했지.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한 건가? 회개만 하면 영혼이 구원을 받았던가? 지옥의 모든 죄인들! 빌어먹을 놈들! 나는 그냥 평범한 이발사였다고. 자식은 없었지만, 집에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발사였어. 우리 인생이 엉망이 됐을 때도 아내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어. 차라리 아내가 그러길 바랐지만 아내는 자신이 받은 저주조차 내게로 옮겨갈까 봐 조심했어. 술에 취했을 때 아내에게 내가 제정신일 때 생각한 것을 말했어. 어느 날 밤 나는 아내 앞에 서서 나란 인간은 형편없는 놈이라고 말했지. 아내가 나를 모욕하고 내게 소리치기를 기다렸어. 나를 경멸적으로 쳐다보는지 살펴봤지. 하지만 아내는 뒤로 돌아섰고, 그때 아내의 얼굴에는 슬픔밖에 없었어. 여자들이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 항상 남자들보다 낫다는 거야. 우리 엄마도 포함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난 상관없어.”
이발사 카모는 턱수염을 만지더니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빛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흘 동안 못 씻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처음 감방에 들어오던 날의 지저분한 머리, 긴 손톱, 썩은 빵 냄새로 미루어 볼 때 카모는 밖에서도 씻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 같았다. 나는 의사의 냄새에 익숙해진 상태였고 내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꽤 조심했다. 카모의 냄새는 마치 자신의 영혼을 압도하는 불길한 징조처럼 쉼 없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사흘 간의 침묵이 지난 지금 카모를 말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내를 만난 건 ‘카모 이발소’라는 간판을 창에 달고 이발소를 처음 열던 날이었지. 아내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남동생의 머리를 깎아주려고 데려왔어. 난 그 아이에게 이름을 묻고는 내 이름도 말했어. 내 이름은 카밀인데, 사람들은 다 카모라고 부르지. 아이는 ‘네, 카모 아저씨.’라고 말했어. 난 아이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학교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줬지. 이발소 구석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던 미래의 아내에게 말을 건네자 자기는 고등학교를 막 마치고 집에서 재봉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어. 아내는 내 시선을 피해 벽에 걸린 처녀의 탑 사진, 그 사진 밑에 있는 바질, 파란색 테두리 거울, 면도날과 가위를 바라다봤어. 아이의 머리에 발라준 향수를 아내에게 건넸을 때 아내는 작은 손을 코 높이로 올리고 숨을 들이쉬다가 손을 펴고 눈을 감았어. 그 순간 나는 아내가 눈꺼풀 아래에서 보고 있는 대상이 나이기를 바랐지. 시선이 필요한 건 아니었어. 다만 내가 사는 동안 나를 한 번이라도 다시 쳐다봐 줄 두 눈이 필요했던 거야. 레몬 향 향수를 뿌리고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이발소를 나갈 때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녀가 가는 것을 지켜봤어. 아내에겐 이름도 묻지 않았어. 마히제르. 조그만 손으로 내 삶을 열고 들어와 결코 내 삶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믿었던 아내의 이름이야.”
“그날 밤 난 오래된 우물로 돌아갔어. 메넥셰 근처 내가 자란 집의 뒷마당에 있던 우물이야.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나는 우물 가장자리에 기대 우물 안의 어둠을 보곤 했어. 그렇게 보노라면 해가 지는 줄도 몰랐어. 우물과 연결되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어. 어둠은 고요함이지. 어둠은 신성한 거야. 난 축축한 냄새에 점점 취하게 됐어. 너무나 즐거워 어지러울 정도였지. 한 번도 못 본 아버지와 내가 닮았다고 누군가 말할 때마다, 엄마가 나를 카모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인 카밀로 부를 때마다, 난 우물로 달려갔어. 숨을 헐떡이면서 말이지. 어둠 속의 공기를 듬뿍 들이마시면서 나는 몸을 우물 안으로 기울여 우물에 빠지는 상상을 했어. 엄마, 아버지, 어린 시절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던 거지. 제길! 엄마의 약혼자는 엄마를 임신시키고 자살했어. 엄마는 나를 낳았지. 나를 낳는다는 것은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는 의미였지만, 엄마는 그렇게 했어. 그리고 내게 자기 약혼자의 이름을 붙여 주었지. 내가 밖에 나가 놀 정도로 자랐을 때에도 엄마는 내게 젖을 먹이곤 했어. 젖꼭지를 내게 물리고 엄마는 울곤 했어. 나는 엄마 젖이 아니라 눈물을 먹은 거지. 눈을 감고 손가락을 헤아렸어. 곧 끝날 거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야. 어느 날 어둑해질 무렵이었어. 내가 우물에 기대 있는 걸 본 엄마가 내 팔을 잡아채 우물 밖으로 나를 밀어냈지. 바로 그 순간 엄마가 딛고 있던 돌이 갑자기 밑으로 빠져버렸어. 지금도 엄마가 우물에 빠질 때 지르던 비명 소리가 들려. 엄마가 죽은 뒤 나는 다뤼샤파카 고아원에서 살았어. 그곳,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끝도 없이 하는 사람들이 모인 기숙사에서 나는 혼자 몽상에 빠져 잠들곤 했지.”
카모는 우리가 자기 얘기를 듣고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했다.
“마히제르와 약혼을 한 뒤 나는 소설책과 시집을 선물하곤 했어. 학교 다닐 때 문학 선생님은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 그 언어 중 어떤 것은 꽃으로 이해하고, 어떤 것은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거야. 마히제르는 집에서 천을 오리고 바느질을 해서 드레스를 만들었어. 어떤 때는 조그만 종잇조각에 시를 써서 동생을 시켜 내게 전하기도 했지. 시가 적힌 종잇조각들은 이발소 제일 아래 서랍에 있는 상자에 향비누와 같이 모아두었지. 장사는 잘 됐어. 단골이 꾸준히 늘었어. 손님 중 한 명인 기자가 와서 머리를 깎고는 활짝 웃고 나간 날이었어. 이 손님은 문을 나서자마자 총에 맞았어. 습격자 두 명은 땅에 쓰러진 기자에게 달려가 머리에 한 발을 더 쏘고는 사랑하지 않을 거면 떠나라고 소리쳤어. 다음날 아직도 피로 얼룩진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자를 추모했어. 나도 거기에 있었지. 내가 그 기자의 머리를 깎았기 때문이야. 장례식에도 갔어. 난 정치를 신뢰하지 않아. 내가 가깝다고 느낀 유일한 정치적인 사람은 하야틴 선생님이었어. 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지. 선생님이 정치에 대해 말한 적은 없지만, 사회주의 성향 잡지가 선생님의 서류 더미에서 비어져 나와 눈에 띄곤 했어. 내 비판은 보편적인 거야.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게 정치인데 어떻게 정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친절함이 사회를 구원하고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한 거야. 그들은 인간에게 이기심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어. 멍청한 놈들이지. 인간 속성의 기본은 자신의 이익 추구, 탐욕, 그리고 경쟁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손님들은 반박하면서 내 생각을 바꿔보려고 치열하게 주장을 펼쳤지.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 중 하나는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말하기도 했어. 이 손님은 거울 옆에 앉아서 내가 거기다 둔 《악의 꽃》 시집을 소리 내 읽고 있던 사람이었어. 폭력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근처 거리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는 소리가 들렸어. 어느 날 젊은 손님 하나가 엉망인 상태로 이발소에 뛰어들어서는 경찰에 잡히기 전에 총을 숨겨 달라고 내게 부탁했어. 가끔 손님들을 도와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치에 관심 있는 것은 아니었어. 내 유일한 일상은 집 살 돈을 모으고 아이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고 마히제르와 밤을 보내는 것뿐이었어.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 결혼한 다음해에 의사를 찾아갔어. 나한테 문제가 있어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어느 날 밤, 이발소 문을 닫으려는데 거리에서 세 사람이 한 남자를 공격하고 있는 거야. 하야틴 선생님이었어. 학교 때 문학 선생님 말이야. 칼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어나갔지. 놈들의 손과 얼굴에 칼을 휘둘렀어. 공격자들은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하자 뒤로 물러나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선생님은 나를 안아줬지. 우리는 걸으면서 쉬지 않고 얘기를 했어. 우리는 사마티아에 있는 선술집으로 들어갔어. 선생님과 나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다뤼샤파카 고아원 이후로 선생님은 학교를 두 번 옮겼고, 수업도 줄였다고 했어. 이제는 정치적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는 거야. 선생님은 나라의 미래에 걱정이 많았어. 선생님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 불어불문학을 공부한다는 걸 들었다고 말하셨지. 하지만 2학년 때 중퇴했다는 얘기는 못 들으신 모양이야. 난 일을 해야만 했거든. 선생님이 내 얘기를 듣고 슬퍼하셨어. 선생님은 아직도 시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선생님의 수업시간에 외웠던 보들레르의 시 몇 줄을 웅얼거렸어. 선생님이 자랑스럽게 나를 보더니 내가 시낭송 대회에서 1등상을 받았을 때를 얘기했어. 우리는 라키(터키의 국민 술-옮긴이) 술잔을 부딪쳤어. 선생님이 내 결혼생활 얘기를 듣고는 기뻐하셨지. 선생님은 여전히 혼자 살고 계셨어. 그 몇 해 전에 선생님은 제자와 사랑에 빠졌던 것 같은데, 표현을 하지 않으셨어. 그 제자가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선생님은 자신을 완벽한 고독 상태로 몰아넣었지. 우리는 새벽까지 마셨어. 나는 시를 암송했고 선생님은 자신이 사랑했던 소녀를 위해 쓴 시를 큰 소리로 읽었지. 집에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어. 마히제르의 이름이 선생님이 쓴 시에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것은 이튿날 술이 깨고 나서였어.”
“한 달 뒤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난 장례식에 가지 않았어. 학교에서 퇴근하다가 머리에 총을 한 방 맞으셨지. 선생님의 서류 더미에서 내게 바쳐진 시가 발견됐어. 폭풍 속에서 말을 달리는 사람들에 관한 시였지. 선생님의 친구 중 한 분이 내게 그 시를 가져다 줬어. 그날 밤 나는 마히제르에게 매달려 나를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어. 바보 같은 사람, 내가 왜 당신을 떠나겠어요? 마히제르는 말했어. 그날 난 이발소에 있는 향비누 서랍에 몇 년 동안 간직했던 상자를 가져왔지. 상자를 열어서 우리가 약혼한 후 마히제르가 쓴 시들을 꺼내 읽어 달라고 했어. 시가 쓰인 종잇조각들에서 장미 향과 라벤더 향이 났어. 마히제르가 시를 읽는 동안 난 마히제르의 블라우스를 벗기고 그녀의 가슴을 빨았어. 나는 젖이 먹고 싶었는데, 가슴을 타고 내려온 눈물을 맛봐야 했지. 석 달이 지났어. 어느 날 밤 마히제르는 내게 질문을 쏟아내며 다시 울기 시작했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어. 마히제르는 누가 선생님을 쏘았는지 물었어. 마히제르는 ‘선생님은 한 번도 내게 함부로 대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어. 며칠 밤을 내가 잠꼬대를 했다는 거야. 그 사람은 죽어도 싸다고 말했다더군. 다른 누군가를 두고 그렇게 잠꼬대한 거겠지. 내가 말했어. 선생님 말고도 죽어야 할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인가요? 마히제르가 물었어. 엄마를 걸고 맹세하는데, 난 그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강조했어. 꿈꾸면서 한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난 코트를 입고 추운 곳으로 나왔어. 망상이야! 피곤한 내 영혼! 바보 같은 늙은이라고. 불의 날개를 가졌던 내 영혼! 조금만 자극을 줘도 날아오를 내 영혼. 숨가쁜 병자. 쓸모없어진 일. 세상에 재로 끝나지 않을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내 영혼, 비참하고 노쇠하고 피를 흘리는 불쌍한 존재. 삶의 열정도, 사랑의 분출도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 돼버린 거지. 시간은 숨가쁘게 흐르지. 숨을 쉴 때마다 내가 방향을 잃으면서 녹아내리는 게 느껴져. 우물가에 내가 어떻게 가게 됐을까? 어떻게 내가 돌을 치우고 우물 뚜껑을 들어올렸을까? 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우물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난 소리쳤어. 엄마! 엄마가 내게 강제로 젖을 빨도록 했을 때 왜 젖이 아니고 눈물을 먹인 거지요? 엄마! 내 보잘것없는 몸에 엄마가 매달렸던 때 왜 엄마는 내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을 그토록 애타게 부른 거지요? 엄마가 카모 대신에 카밀이라고 나를 부를 때 아버지를 생각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 밤에도 엄마는 카밀을 소리쳐 불렀어요. 난 엄마가 밟고 선 돌이 헐겁게 놓인 걸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우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엄마는 내가 아버지 덕분에 태어났다고 말했죠. 내 목숨을 아버지에게 빚진 거라고 말이야. 빌어먹을!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이제 없잖아! 엄마는 빛이 얼마나 잔인한지 몰랐던 거예요. 빛은 외부에서만 사물을 보여줄 뿐, 정작 빛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잖아.”
이발사 카모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카모가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더니 다시 뒤로 젖혀 벽을 들이받았다. “간질 발작이야.” 의사가 말하면서 재빠르게 카모를 바닥에 눕혔다. 의사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새 동료를 위해 아껴둔 빵 조각을 카모의 이 사이에 물렸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하려는 거였다. 나는 카모의 발을 붙들었다. 카모는 몸을 통제하지 못한 채 경련을 일으켰다. 입에서는 거품이 일었다.
감방 문이 열렸다. 간수는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야?”
“이 친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의사가 부탁했다. “의식을 되돌리려면 강한 냄새가 나는 뭔가가 필요합니다. 향수나 양파 같은 것 말예요.”
간수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이 자식이 죽으면 말해. 그래야 시체를 치우지.” 그러면서도 간수는 카모 쪽으로 몸을 수그려 얼굴을 살폈다.
간수에게서 피, 곰팡이, 축축한 물기 냄새가 역겹게 났다.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의 악취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 간수는 근무 전에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간수는 곧바로 일어나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간수가 문을 닫을 때 오늘 들어온 여자의 얼굴이 맞은편 감방 쇠창살 사이로 보였다. 여자의 왼쪽 눈은 감겨지고, 아랫입술은 찢어져 있었다. 여자는 오늘 처음 여기에 들어왔지만 상처의 색깔로 봤을 때 오랫동안 고문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문이 닫히자 나는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카모의 다리를 잡은 채 얼굴을 콘크리트 바닥에 붙여 문과 바닥 사이 틈으로 간수의 발을 보았다. 간수는 여자에게로 다가가 멈추어 섰다. 간수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그런 게 틀림없었다. 여자가 어둠 속으로 틀어박히지 않았다면 아직 쇠창살 앞에 있는 거겠지? 간수는 욕을 하지도, 여자의 감방 문을 두드리면서 위협하지도 않았다. 감방 안으로 밀고 들어가 여자를 벽에 내던지지도 않았다. 그 사이 카모의 몸은 안정을 찾았다. 가끔 경직을 반복할 뿐이었다. 카모는 다리를 내 손아귀에서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카모가 양 팔을 뻗어 감방 벽을 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련을 일으킨 후 발작이 멈추더니 쌕쌕거림도 사라졌다. 맞은편 감방을 살펴보던 간수는 여자를 혼자 남겨두고 가버렸다. 간수의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나는 일어나 밖을 보았다. 쇠창살 뒤에 있는 여자가 보였을 때 나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쯤 지난 후 여자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의사는 벽에 기대 다리를 펴고, 카모의 머리를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자세면 한동안 잘 수 있을 거야.” 의사가 말했다.
“우리 이야기하는 게 들릴까요?” 내가 물었다.
“이런 상태에서 들을 수 있는 환자도 있고, 못 듣는 환자들도 있어.”
“자기 얘기를 이렇게 많이 하는 거는 별로 좋지 않을 듯해요. 말해주는 게 좋겠어요.”
“자네 말이 맞네. 이제 그만 얘기해야 돼.”
의사는 이발사 카모를 환자가 아니라 마치 아들을 재우는 듯한 눈길로 바라다보았다. 의사는 카모의 이마에서 땀을 닦고 머리칼을 매만졌다.
“맞은편 감방에 있는 여자는 어때?” 의사가 물었다.
“얼굴이 온통 오래된 상처투성이예요. 여러 날 동안 고문을 당한 게 틀림없어요.”
카모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카모의 손님들이 카모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당연해 보였다. 카모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카모는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 난 후 곯아 떨어진 어린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눈을 감은 카모는 이제 우물에 기대 어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모는 축축한 돌에 매달려 본 경험이 많기 때문에 돌이 안전하다고 믿지 않았다. 카모는 로프의 도움을 받아 우물 아래로 내려간 다음 물에 몸을 맡겼다. 거기에서 카모는 북쪽, 남쪽, 동쪽, 서쪽 모든 방향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우물 바깥의 자기 존재는 깨끗이 사라졌다. 카모는 우물 안의 우물, 물 안의 물이 된 것이다.
“내가 얼마나 의식이 없었지?” 카모가 웅얼거렸다. 눈을 반쯤 뜬 상태였다.
“30분.” 의사가 대답했다.
“목이 타.”
“천천히 일어나 앉아봐.”
카모는 일어나 앉아 벽에 등을 기댄 다음 의사가 건넨 플라스틱 물병의 물을 마셨다.
“좀 어떤가?” 의사가 물었다.
“제길,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피로가 풀린 거 같기도 해. 간질이 있다는 걸 얘기했어야 하는데. 병이 나타난 건 엄마가 죽고 난 다음의 봄이었어. 오래 가지는 않았고, 몇 주가 지나자 나아졌어. 하지만 한 번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길 수 있지. 마히제르가 떠나자 발작이 다시 시작됐어.”
“데미르타이와 내가 여기서 당신을 보살펴 주지. 카모, 중요한 얘긴데 대화를 하는 건 좋지만 감방에는 규칙이 있어. 누가 고문에 굴복해 비밀을 털어놓을지, 또 누가 심문자들에게 여기서 들은 얘기를 할지는 아무도 몰라. 소소한 얘기를 하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도우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있지만, 스스로의 비밀은 스스로가 지켜야 돼. 알겠나?”
“서로에게 진실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건가?” 카모가 물었다. 방금 전의 거친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자리에는 이제 고분고분한 환자만 남았다.
“비밀은 혼자 간직하라는 말이지.” 의사가 답했다. “당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 우리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나?”
“이봐, 카모. 우리가 밖에 있었다면 난 당신을 만나지 않았거나 당신과 같은 장소에 있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고통의 손아귀 안에 있어. 항상 죽음을 껴안고 있단 말이지.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아. 그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자고. 이 안에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간, 고통을 당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
“당신들은 나를 몰라.” 카모가 말했다. “난 아직 당신들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의사와 나는 서로를 바라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발사 카모는 말을 하기 전에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세심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투덜거리면서 쏟아낸 내 기억은 이를테면 탐욕스러운 대부업자 같은 거야. 그 기억은 모든 말을 쌓아놓지. 이봐 학생, 학생이 아까 이야기에서 한 말은 원래 공자가 했어야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나? (학생의 이야기에 나온 말은 ‘치마를 걷어올린 여자는 바지를 내린 남자보다 더 빨리 뛸 수 있다’로, 앞에 생략된 말을 포함한 원문은 ‘There is no such thing as rape; Woman run faster with skirt up than Man with pants down.’ 즉 강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하지 않는다. ‘치마를 걷어올린 여자는 바지를 내린 남자보다 더 빨리 뛸 수 있기 때문이다’로, 영어권에 공자의 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공자의 저작 《논어》에서는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망하기 때문이다.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近之則不孫,遠之則怨.’라는 말만 나온다. 공자가 여성을 비하했다는 서양인들의 편견의 소치로 보인다-옮긴이) 내 이발소 거울 위에는 국기와 같은 줄에 반쯤 벗은 여인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지. 그 포스터 아래쪽에 학생이 했던 말이 쓰여 있었어. 여인은 밝은 색 치마를 치켜 올리고 있었지. 자신의 긴 다리를 최대한 이용해 빠르게 달리는 여인의 모습이었어. 여인은 나와 기다리는 손님들 방향인 앞쪽으로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지. 여인의 다리 사이에 ‘치마를 걷어올린 여자는 바지를 내린 남자보다 더 빨리 뛸 수 있다.’는 말이 적혀 있었어. 내 손님들은 여인의 미모를 보며 실제로 그런 미모는 없다고 생각하고는 했지. 그런 여인과 혹시라도 함께 있게 된다면 너무나 행복해서 다른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도 하면서. 어느 날 작가 손님이 와서 포스터를 보더니 ‘아, 소냐!’라고 탄식을 하는 거야. 우리 모두 그 소리를 들었어. 소냐가 이 젊은 여인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작가 손님의 이발 차례가 되자 그는 의자에 앉아 긴 이야기를 시작했지. 결국 그 손님의 이야기는 나에게로 향했어. 손님은 내가 러시아인 같은 영혼을 지녔다고 말했어. 놀라는 내 모습을 보면서 손님은 그동안 자신이 내 이발소에 왔을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되풀이했어.”
“내가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면 카라마조프 가의 일원이 되거나 지하생활자처럼 살았을 거야. 아니면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처럼 형편없이 살았을지도 모르지. 작가 손님이 도스토옙스키의 작중인물들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나에게도 해당돼. 도스토옙스키는 이 인물들 모두가 같은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지. 처음에는 《죄와 벌》의 마르멜라도프, 다음에는 부분적으로 《지하생활자의 수기》 일부, 마지막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전부가 그렇지. 이 인물들 사이에 큰 차이는 없어. 하지만 그들 간 사소한 차이점은 그들의 삶에서 놀라운 여행을 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지.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는 파산한 사람이었어.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을 맘껏 비난하는 사람이었지. 자기 운명의 희생자가 된 한심한 실패자였어. 소냐는 이 한심한 아버지를 존경했어. 아, 소냐, 아름답고 가난한 매춘부! 소냐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누군들 소냐를 위해 잔인한 살인을 하지 않을까?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비참함을 드러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비참함을 노출시키고 그 비참함을 분노로 드러내지. 거울을 사람들의 얼굴 앞에 대고 자신과 같은 사람을 찾겠다는 집착은 지하생활자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게 돼. 반면 카라마조프 가의 여행은 완전히 달랐어. 이들은 자신들, 다른 사람들, 심지어 삶 자체와 불화를 겪었지. 마르멜라도프처럼 절박함을 느끼지도 않는 데다 지하생활자처럼 자신의 비참함을 다른 사람들을 노출시키는 도구로 삼지도 않았어. 그들의 비참함은 자신의 운명, 다시 말해 곪아가기만 하는 상처를 피할 수 없다는 데 있었지. 이들은 삶을 인정하는 대신 반박하려고 애를 썼어. 고통을 겪으며 흘리는 피를 삶의 얼굴에 바르려고 했어. 이런 삶은 지금 내게도 새로운 장을 열어주지. 제길! 그런 표정 짓지 마. 지옥 불에서 타고 있는 사람 바라보듯 날 쳐다보지 마. 사흘 동안 내 귀를 당신들한테 빌려줬잖아. 난 당신네들 얘기를 들어주고, 당신네들이 고문당한 후에 내는 신음 소리를 참아줬어. 이제 당신들이 나한테 귀를 빌려줄 차례야.”
카모는 우리를 경멸하듯이 바라보고는 물병을 입술에 갖다 대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난 몰라. 저들이 나를 풀어줄까? 당신네들처럼 끌려가 고문을 당할까? 고문은 몸을 고통의 노예로 만들지. 두려움은 영혼에 똑같은 일을 해. 그리고 사람들은 몸을 구하기 위해 영혼을 팔지. 나는 무섭지 않아. 그래도 나는 고문자들에게 당신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비밀을 털어놓게 될 거야.”
“난 저들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말할 거야. 내 모든 영혼을 저들의 손에 맡기고 저들의 질문에 답할 거야. 재단사들이 양복윗도리에서 안감을 뜯어내듯이 내 간을 뜯어내 저들 앞에 내놓을 거야. 난 저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얘기할 거야. 처음에는 저들이 관심을 보이겠지. 혹시 유용한 정보가 될 수도 있으니 저들은 내 얘기를 다 받아 적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한 말이 저들을 불편하게 만들겠지. 저들은 내가 자기들이 알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지. 사람들이 인생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건 자기 자신이야. 저들은 마침내 두려워서 내 입을 다물게 하려고 나서겠지. 내 입을 열기 위해 나를 고문했던 그들은 이제 내 팔을 늘려 매달고 전기충격을 가하고, 내가 흘린 피에 나를 담가 내 입을 막으려 들 거야. 저들은 나만큼이나 내가 말하는 진실에 몸서리를 치겠지. 난 저들에게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얘기해서 저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도록 만들 거야. 저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보내겠지. 마치 자신의 모습을 처음 거울로 마주하는 나병환자처럼 말이야. 저들은 뒤로 물러서다 벽에 부딪힐 거야. 그리고 저들은 어떻게 해도 자신을 바꿀 수 없으므로 거울, 다시 말해서 내 얼굴과 뼈를 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내 혀를 잘라도 저들에게는 별 도움이 안 돼. 내 신음 소리로 인해 저들의 귀는 멀고, 저들의 마음은 하나의 진실에 갇히겠지. 빌어먹을! 저들은 집에서도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어나 독한 술을 병째 들이키게 되겠지. 탈출구는 없어. 진실은 경정맥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지. 저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손목을 그어야 할 테니까. 저들에게는 자신을 품에 안아주고, 담배에 불을 붙여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 끼워 줄, 사랑하는 아내가 있을 거야. 하지만 저들은 자신만의 진실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치명적인 두려움을 안은 채 살아가지. 저들이 지난 사흘 동안 왜 나를 데려가 심문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았어. 저들은 내가 무서운 거야.”
이발사 카모는 가장 깊은 구덩이부터, 그 구덩이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부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 부서지고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를 입어서 카모가 숨은 것인지, 카모가 숨어서 상처를 입은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카모에게 그토록 소중했던 어둠이 내게는 목을 조이는 존재였다. 눈을 가려서 나를 철문 밖으로 데리고 나갔을 때, 그들은 내가 알던 세상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간 것이었다. 나는 방향의 가치를 그제야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 나는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떠오르는 말들에 힘겹게 매달렸다. 어둠 속에서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삶은 바로 내 옆에 있었고 나는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카모는 피곤한 눈을 반쯤 뜬 채 앉아 있었다. 감방에 들어오는 아주 가느다란 빛줄기에도 카모는 불안해했다. 아마 그래서 카모는 계속 잠을 자려 했던 것 같다.
“내가 우물 위에 서 있는 걸 가지고 야단을 치지 않은 적이 딱 한 번 있었지.” 카모가 말했다. “그날 엄마는 불타는 막대기 꿈을 꿨어. 그 꿈은 엄마가 자신을 괴롭히는 무엇인가를 극복한다는 신호였어. 이상하게도 내가 이 감방에서 불타는 막대기 꿈을 처음 꾼 거야. 내 과거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데, 도대체 내가 뭘 극복할 수 있을까?”
“이 시간도 지나갈 거야, 카모. 옛날이 지나간 것처럼 그렇게.” 의사가 말했다. “당신이 꾼 꿈은 당신이 곧 여기서 나가 자유의 몸이 되리라고 말해주는 거야.”
“자유라고? 마히제르가 떠난 뒤 모든 것은 변했어. 내 안에 있는 돌이 전부 흔들리고 있다고.”
“당신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야. 누구든 살다 보면 그런 일을 겪게 돼.” 의사는 잠시 말을 멈춘 뒤 계속했다. “이 안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돼. 카모, 우리 모두 밖에 있다고 생각해보게나. 가령 우리가 오르타쾨이 해변에서 얘기를 하면서 건너편 해변을 바라다본다고 상상하는 거지.”
의사는 우리를 여기서 끌어내 바깥세상으로 데려가기를 좋아했다. 의사가 내게도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현재의 힘든 상황에 대해 생각하기보다 바깥세상을 꿈꾸는 것이 더 나았다. 시간, 우리 몸이 갇혀 있으므로 정지했던 시간이, 우리 마음이 바깥으로 나가면 다시 째깍거리며 돌아갔다. 우리의 마음은 몸보다 강했다. 의사는 의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이 안에서 우리는 바깥세상을 자주 상상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해변을 걷는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오르타쾨이 해변 인근에서 배를 타고 시끄러운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팔을 서로에게 두른 연인들을 지나 걸어가기도 했다. 해가 수평선으로 떨어질 때 의사는 노점상에게서 초록색 자두를 봉지 가득 샀다. 의사는 웃으면서 내게 먼저 자두 하나를 건넸다.
그들이 의식이 반쯤 나간 나를 여기에 처넣은 것은 지난 주였다. 입술이 말랐던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의사는 내가 목이 말라 그런다고 여기고는 일으켜 앉혀서 물을 주고, 눈을 뜨게 독려했다.
“물은 필요 없어요. 초록색 자두가 먹고 싶어요.” 내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내가 한 그 말 때문에 이틀을 웃었다.
의사는 카모에게도 초록색 자두가 먹고 싶은지 물었다.
카모는 자두 얘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카모의 마음은 우리 마음과는 다른 궤에 자리했던 것이다. “과거라고, 의사 선생.” 카모가 말했다. “우리의 과거….”
의사는 마치 카모에게 자두를 주는 것처럼 허공에서 손 모양을 만든 다음 아래로 내렸다. “우리의 과거는 닿기에는 너무 먼 어딘가에 있어. 과거 대신 우리는 내일에 집중해야 돼.” 의사가 말했다.
“의사 선생, 그거 아시오? 신이라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 전능한 신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지. 하지만 과거는 어쩔 도리가 없어. 신조차 과거를 바꿀 힘이 없을 때 과거는 우리를 어떻게 만들까?”
의사는 그때 처음 연민의 눈빛으로 카모를 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이발사는 모두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이발사들은 축구나 여자 얘기를 해. 그런 것들을 왜 얘기할까? 내가 당신 손님이라면 당신 이발소에 다시는 가지 않을 거야. 이발사는 대학을 다니면 안 될지도 몰라. 이발사들이 대학에 다니면, 우리 남자들이 어디 가서 축구나 여자 얘기를 하겠나?”
“대학을 다니지 않았어도 난 똑같은 질문을 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해보게, 카모. 엄마와 함께 보낸 당신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어. 하지만 당신은 아내를 만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지.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거야. 미래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는다면 지난날은 잊어버릴 거야.”
“새로운 행복?”
의사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자신의 찬 손을 비볐다. 의사는 마치 진료실에서 까다로운 환자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듯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철문의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심문자들이 들어오면서 가벼운 잡답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들이 복도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불었나?”
“하루 이틀이면 불겠지.”
“오늘은 어땠나?”
“전기충격, 매달기, 물고문을 했지.”
“이름하고 주소 알아냈어?”
“그건 알고 있었어.”
“거물이야, 피라미야?”
“이 영감태기, 거물이야.”
“감방 번호가 어떻게 되지?”
“40번.”
우리 감방이었다.
우리는 차가운 발을 서로 모아 최대한 온기를 유지하려고 했다. 언제라도 우리는 이 감방을 나가서 못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맨정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