펴낸날 초판 1쇄 2012년 11월 15일
지은이 오 헨리 | 옮긴이 전하림
펴낸이 신형건 | 펴낸곳 (주)푸른책들 | 등록 제321-2008-001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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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8-89-6170-300-0 04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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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 | 르누와르 作 '큰 가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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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광장 서쪽의 한 조그마한 구역은 길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나 있는 데다 중간중간 ‘플레이스’라고 불리는 작은 골목길들로 이어져 있다. 이 ‘플레이스’는 하도 여기저기 꺾이고 미로처럼 돌아 나 있어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까 왔던 길이 한두 번 겹치는 것은 예사인 곳이었다. 일찍이 한 화가가 이 길에 들어섰다가 매우 기똥찬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수금원이 물감이나 종이, 캔버스의 외상값을 받으러 이곳에 왔다고 치자. 이런 길에서 한참 헤매다 보면, 결국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다시 밖으로 돌아 나가기 십상이지 않겠는가?
그래서인지 이 특이하고 예스러운 그리니치빌리지*에는 차츰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북향 창문, 18세기풍 담벼락, 네덜란드식 다락방, 그리고 값싼 월세를 찾아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6번가에서 백랍 컵이나 식탁용 풍로 같은 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곳은 점차 ‘예술인촌’이 되어 갔다.
*그리니치빌리지:미국 뉴욕 시 워싱턴 광장 일대에 있는 한 지역. 20세기 들어 예술가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갖게 됨. ‘아메리카의 보헤미아’라고 부르기도 함.
수와 존시도 한 나지막한 3층 벽돌 건물의 꼭대기에 화실을 꾸몄다. ‘존시’는 조안나의 애칭이었다. 수는 메인 주 출신이었고 존시는 캘리포니아 주 출신이었다. 둘은 8번가에 있는 ‘델모니코’라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우연히 처음 만나서, 예술이나 치커리 샐러드, 비숍슬리브* 등 공통된 취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은 공동 화실까지 열기에 이르렀다.
*비숍슬리브:소매 모양의 하나로 주교들이 입는 예복의 소매와 비슷함. 긴소매에 손목을 향해 감에 따라 부풀게 되고 소매 끝에 주름을 잡아 밴드나 커프스로 조이게 한 것.
그때가 지난 5월이었고, 시간이 흘러 어느덧 11월이 되었다. 찬바람이 불자 (의사들이 폐렴이라고 부르는)눈에 보이지 않는 불청객이 찾아와 그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으로 예술인촌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이 악당은 이미 건너편 동쪽 구역에서 가차 없이 돌아다니며 희생자들을 수십 명씩 내고 다녔지만, 여기 이 ‘플레이스’의 이끼 끼고 비좁은 미로에 들어와서는 걸음걸이가 한결 느려졌다.
폐렴 씨는 기사도를 갖춘 점잖은 노신사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싸늘한 숨결을 거침없이 내뿜고 다니는 이 거친 악당은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미풍 속에서 곱게 자라온 가냘픈 숙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결국 그의 공격을 받은 존시는 페인트칠 된 철제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조그만 네덜란드식 창문 너머로 옆집의 밋밋한 벽돌 담벼락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느 날 아침, 바쁜 의사가 숱이 많은 반백의 눈썹으로 눈짓을 해 수를 복도로 불러냈다.
“저 아가씨가 살 확률은…… 어디 보자, 열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가 체온계를 흔들어 수은주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확률은 저 아가씨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때에나 소용이 있어요. 지금처럼 저세상으로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 어떤 약도 무용지물이거든요. 아가씨의 친구는 이미 자신이 낫지 못할 거라고 체념한 상태네요. 혹시 저 아가씨가 마음속에 꿈꾸고 있는 것이라든가 할 만한 게 있나요?”
“존시는…… 존시는 언젠가 나폴리 만을 그려 보고 싶다고 했어요.”
수가 답했다.
“그림이라고요? 저런, 말도 안 돼! 저 아가씨가 마음에 두고 있는, 예를 들어 남자 친구라든지 나쁜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 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요?”
“남자 친구요?”
수는 유대인의 하프 소리 같은 콧소리로 되물었다.
“남자 친구가 중요하다면…… 아니요, 없어요, 선생님. 제가 알기론 전혀 없어요.”
“그래요. 그렇다면 바로 그게 문제였군요.”
의사가 말했다.
“나는 나대로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환자가 자기 장례 행렬에 따라올 마차 수를 세기 시작하면, 그 순간 의학이 병을 치료할 가망은 반을 접고 들어가야 합니다. 행여나 아가씨가 저 아가씨를 잘 구슬려서 겨울에 유행할 새로운 소매 스타일이 무엇이라든가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들면, 그때는 회복 가망성이 열에 하나가 아니라 다섯에 하나로 배가 늘어난다고 보면 돼요.”
의사가 돌아간 뒤 수는 작업실로 들어가서 종이 냅킨이 흠뻑 젖도록 혼자 펑펑 울어 댔다. 그러고 나서는 일부러 더욱 씩씩하게 기분 좋은 표정으로 휘파람까지 불며 화판을 들고 존시의 방으로 갔다.
존시는 아무런 기척 없이 이불을 푹 덮어 쓰고 얼굴을 창문 쪽으로 향한 채 누워 있었다. 수는 존시가 잔다고 생각하고는 휘파람을 멈추고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방 안에 화판을 세워 놓고 잡지 기사에 삽화로 들어갈 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작가들이 문학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잡지에 소설을 기고하듯, 젊은 화가들이 예술의 길에 들어서려면 으레 그런 소설에 함께 들어가는 삽화를 그려야 했다.
수가 한참 말 위에 올라탄 아이다호 주 카우보이에게 멋들어진 승마 바지와 외알 안경을 그려 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존시가 눈을 크게 뜨고 창문 밖을 바라보며 숫자를 거꾸로 하나씩 세고 있었다.
“열둘.” 그러고는 잠시 후 “열하나.”를 세었다.
다시 조금 더 있다가 “열.”, 그리고 “아홉.”을 세더니 이번에는 거의 동시에 두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여덟, 일곱.”
수가 걱정스런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대체 밖에 뭐가 있기에 저렇게 숫자를 세고 있는 거지? 수의 눈에 비치는 거라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황량하고 쓸쓸한 뜰과 6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는 벽돌집의 텅 빈 벽뿐이었다. 벽 중간쯤에는 뿌리가 비틀리고 썩어가는 해묵은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올라가 붙어 있었다. 싸늘한 가을의 입김에 잎사귀가 얼마 남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들만이 허물어져 가는 벽돌담에 매달려 있었다.
“존시, 뭐야?”
수가 물었다.
“여섯.”
존시가 거의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는 떨어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어. 사흘 전만 해도 잎이 거의 백 개나 돼서 세고 있으려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는데. 그렇지만 이제는 쉬워. 어, 저기 또 하나 떨어진다. 이제 딱 다섯 개 남았어.”
“뭐가 다섯 개란 말이야? 나한테도 좀 말해 줘.”
“잎 말이야. 담쟁이덩굴에 달려 있는 잎. 마지막 잎이 떨어지면 나도 가는 거야. 나는 벌써 사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말해 주시지 않던?”
“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봐.”
수가 깜짝 놀라며 나무라듯 투덜댔다.
“오래된 담쟁이덩굴 잎사귀하고 네가 병에서 낫는 것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 그리고 넌 저 담쟁이덩굴을 무척 좋아했잖니, 이 못난 녀석!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 있지, 오늘 아침에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는데 네가 조금 있으면 회복될 거라고 하셨어. 그게 말이지, 정확히 뭐라고 하셨냐 하면 열에 하나랬어! 그건 있지, 뉴욕에 살면서 전차를 타거나 새로 지은 건물을 지나면서도 괜찮을 확률만큼이나 확실한 거잖아, 알지? 자, 이제 수프를 좀 먹어 봐. 나는 다시 가서 그림을 좀 그릴게. 그래야 그걸 잡지사에 팔아서 아픈 어린아이 같은 널 위해 포도주도 사고, 너무 잘 먹어 탈인 내가 먹을 고기도 살 것 아니야.”
“포도주는 더 이상 안 사도 돼.”
존시가 여전히 창밖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또 하나 떨어진다. 아니, 수프도 필요 없어. 이제 딱 네 잎 남았네. 어두워지기 전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어. 그러면 나도 가는 거야.”
“존시, 얘야.”
수가 존시를 향해 몸을 굽히고 말했다.
“약속해 줘. 잠시 눈을 감고 있겠다고. 그리고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바깥을 보지 않겠다고. 나 저 그림 내일까지 보내야 한단 말이야. 그것만 아니면 커튼을 닫겠는데, 그림을 그리려면 빛이 필요해서 그럴 수 없거든.”
“다른 방에서 그리면 안 돼?”
존시가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네 곁에 있고 싶어. 그리고 그게 아니라도 나는 네가 저 망할 담쟁이덩굴만 쳐다보고 있는 게 정말 맘에 안 들어.”
“그럼, 그림을 다 그리는 대로 알려 줘.”
존시가 쓰러진 조각상처럼 미동도 없이 창백하게 누워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는 정말로 저 마지막 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싶거든. 이제는 기다리는 데 지쳤어. 생각하는 것도 지쳤어. 모든 걸 내려놓고 저 가엾고 고달픈 잎들처럼 저 밑으로, 저 아래로 떨어지고 싶어.”
“잠을 좀 자도록 해 봐, 존시. 나는 베어먼 할아버지를 모시고 와서 세상을 등진 늙은 광부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 좀 해야겠어. 금방이면 돼. 그러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베어먼 씨는 같은 건물 1층에 사는 화가였다. 나이는 족히 예순이 넘었고, 땅딸막한 꼬마 도깨비 같이 뭉툭한 몸에, 사티로스 같은 얼굴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모세의 수염 같은 곱슬곱슬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었다. 베어먼은 실패한 예술가였다. 40년 동안이나 그림을 그렸지만 한 번도 예술가라 불릴 만한 작품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늘 걸작을 그리겠다고 호언장담해 왔다. 하지만 그런 그림은 시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은 광고지에 이따금씩 서투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작품 활동의 전부였다. 아니면 전문 모델을 쓸 돈이 없는 젊은 화가들의 모델을 서 주고 돈을 약간씩 벌기도 했다. 툭하면 과하게 진을 마셔 댔고, 머지않아 걸작을 그릴 거라는 말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해 댔다. 그는 왜소하지만 성격이 거칠고 불같은 노인으로 누구든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사정없이 비웃어 댔다. 그러나 위층 화실에 사는 두 명의 젊은 화가들에겐 그들을 지키는 감시견 노릇을 자처하고 다녔다.
아래층에 내려가니 베어먼이 어두컴컴한 방에서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앉아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걸작이 되기 위한 첫 붓놀림을 25년 동안 기다려온 텅 빈 캔버스가 이젤 위에 놓여 있었다. 수는 그에게 존시가 가지고 있는 망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존시가 세상을 향해 잡고 있는 끈이 느슨해지면 정말로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잎사귀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릴 것 같아 너무도 두렵고 걱정된다고 말했다.
베어먼은 벌겋게 충혈된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어디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조롱과 조소의 말을 마구 퍼부었다.
“쳇!”
그가 소리쳤다.
“이 세상에 담쟁이덩굴에서 이파리가 떨어진다고 자기도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 같은 녀석이 어디 있담?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긴 생전 처음 들어 보는구먼. 아가씨들 같은 바보 머저리들을 위해서는 모델을 서지 않겠어. 어째서 아가씨는 존시 양이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게 그냥 내버려 둔 거야? 어이쿠, 가엾은 존시 양 같으니라고.”
“걔는 많이 아프고 나서 부쩍 약해졌어요. 거기다 열이 많이 나다 보니 자꾸만 더 이상하고 불길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알겠어요, 할아버지. 제 모델을 서 주기 싫다면 하지 마세요! 전 할아버지를 아주 못되고 못된 변덕쟁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수가 말했다.
“아가씨도 별수 없는 여자로구먼, 그래.”
베어먼이 외쳤다.
“누가 모델 안 서 준대? 우선 올라가 있어.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나는 벌써 30분 전부터 모델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이지. 허, 이것 참! 여기는 존시 양 같이 착한 아가씨가 아파서 누워 있을 곳이 못 되는데. 언젠가는 내가 꼭 걸작을 그리고 말겠어. 그러면 우리 모두 다 같이 이곳을 떠나는 거야. 허, 참! 정말이라니까.”
둘이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존시는 잠들어 있었다. 수는 커튼을 창 끝까지 내리고, 베어먼에게 다른 방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그 방에서 둘은 두려운 마음으로 창문 밖의 담쟁이덩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늘에선 눈발 섞인 차가운 빗줄기가 끈질기게 내렸다. 베어먼은 낡은 파란색 셔츠를 입고서 바위 대신 엎어 놓은 커다란 솥 위에 올라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늙은 광부의 포즈를 취했다.
다음 날 아침, 수가 한 시간쯤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존시가 닫혀 있는 초록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커튼을 열어 줘. 보고 싶어.”
존시가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수는 마지못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보라! 밤새도록 쉬지 않고 몰아친 강풍과 세찬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벽에는 아직 하나의 잎이 또렷이 살아서 붙어 있었다. 담쟁이덩굴의 마지막 잎새였다. 비록 가장자리는 거센 비바람 때문에 울퉁불퉁한 톱니 모양으로 헤어지고 색도 누렇게 바랬지만, 아직도 줄기 부근엔 푸른색이 짙게 남아 있는 틀림없는 잎이었다. 그 잎은 지상 6미터 높이의 가지에 꿋꿋하게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 잎새네.”
존시가 말했다.
“밤새 틀림없이 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바람 소리를 들었거든. 오늘은 떨어지겠지. 그러면 나도 따라 죽는 거야.”
“얘, 얘!”
수가 수심 가득한 얼굴을 베개에 파묻으며 말했다.
“네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거라면 내 생각이라도 좀 해 줘. 나는 대체 어떡하라고?”
그러나 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릇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는 곧 알 수 없는 곳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영혼인 법이다. 죽음에 대한 환상은 이 세상과 우정에 묶여 있는 끈이 조금씩 느슨해져 갈수록, 존시를 더욱더 강하게 사로잡고 있는 듯했다.
날이 저물었다. 그리고 석양이 찾아올 때까지도 외로이 남은 마지막 담쟁이 잎은 꿋꿋하게 벽 위의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나서 밤이 되자 북풍이 몰아쳤다. 오늘도 빗방울은 사정없이 창문을 두들기며 나지막한 처마를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날이 밝자 존시는 냉정하게 수에게 커튼을 올려 달라고 주문했다.
잎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존시는 한참 동안 그 잎사귀를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가스레인지 위의 닭고기 수프를 젓고 있던 수를 불러 말했다.
“수, 그동안 내가 나빴어. 저 마지막 잎새도 저렇게 끝까지 살려고 애쓰는데……. 그걸 보고 내가 얼마나 못됐었는지 깨달았어. 죽고 싶어 하는 건 죄를 짓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수, 나한테도 수프를 조금 가져다줄래? 포도주를 조금 탄 우유도 주고. 아, 아니다. 먼저 손거울을 좀 가져다줘. 그리고 뒤에 베개 좀 몇 개 받쳐 줘. 일어나 앉아서 네가 요리하는 걸 보고 싶어.”
한 시간 후에 존시가 다시 말을 꺼냈다.
“수, 나 언젠가는 나폴리 만을 꼭 그려 보고 싶어.”
오후에 의사가 다녀갔다. 수가 방에서 나가는 의사를 따라 복도로 나갔다.
“살아날 희망이 반반으로 늘었습니다.”
떨고 있는 수의 가냘픈 손을 부여잡고 의사가 말했다.
“간호만 잘해 주면 충분히 나을 수 있어요. 자, 이제 전 아래층 환자를 보러 가야겠군요. 이름이 베어먼이라고 무슨 예술가라고 하던데, 아마. 그 사람도 폐렴이더군요. 그런데 워낙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한 데다 급성이라 나을 가망이 없어요. 그렇지만 가는 길이라도 조금 편할 수 있도록 오늘 병원으로 옮길 예정이에요.”
다음 날 의사가 수에게 말했다.
“고비는 넘겼어요. 이겨 낸 거예요. 이제 잘 먹고 푹 쉬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그날 오후, 수가 존시의 침대로 다가갔다. 존시는 흐뭇한 표정으로 별로 필요도 없을 것 같은 파란색 털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수가 다가가 존시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존시,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베어먼 할아버지가 오늘 병원에서 폐렴으로 돌아가셨대. 병에 걸린 지는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그저께 아침에 수위 아저씨가 발견했을 때 글쎄 방에서 끙끙 앓고 계셨다지 뭐야. 신발이랑 옷이 흠뻑 젖은 데다 몸이 완전 얼음장이셨대. 날씨가 그렇게 험한 밤에 대체 어디를 갔다 오신 건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런데 할아버지 옆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램프하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끌어 내린 사다리랑 붓 몇 자루, 그리고 초록색 물감하고 노란색 물감이 섞여 있는 팔레트가 있었대. 자, 존시, 저기 창밖을 봐. 저 벽에 붙어 있는 마지막 잎새 말이야. 너, 바람이 부는데도 저게 왜 한 번도 펄럭이거나 움직이지 않는지 이상하지 않아? 아아, 존시, 저게 바로 베어먼 할아버지의 걸작이야. 원래 있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던 날 밤, 할아버지가 바로 저기에 그려 놓으신 거야.”
1달러 87센트, 그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그중 60센트는 모두 1센트짜리 동전이었다. 이 동전은 식료품 가게나 채소 가게, 정육점에서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물건 값을 악착같이 깎고 깎다 젊은 여자가 정말 지독하다는 따가운 눈살을 감수하며 한 푼, 두 푼 모아온 돈이었다. 델라는 세 번이나 돈을 세고 또 셌다. 여전히 1달러 87센트였다. 그리고 당장 크리스마스가 내일이었다.
낡아 빠진 조그만 소파에 주저앉아 펑펑 우는 일 말고는 이 상황에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델라는 그렇게 했다. 인생은 흐느낌과 훌쩍거림과 미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훌쩍거림인 법이다.
이 집 여주인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점차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잠시 집 안을 한번 살펴보자. 가구가 딸린 주당 8달러짜리 아파트에, 딱히 무일푼 거지 수준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살림살이이다. 그러나 거지나 노숙인들을 단속하는 경찰관들이 가히 요주의 대상으로 점찍을 만했다.
아래층 현관에는 편지가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우체통이 덩그러니 달려 있고, 아무리 눌러도 울리지 않는 고장 난 초인종이 있다. 그 옆에는 ‘제임스 딜링햄 영’이라는 이름이 적힌 명패가 달려 있다.
‘딜링햄’이라는 멋진 이름은 일찍이 이 집 주인의 주급이 30달러로 살림이 풍족했던 시절에는 자랑스럽게 바람에 휘날렸다. 그러나 수입이 주당 20달러로 줄어든 지금, ‘딜링햄’이라는 단어를 구성하고 있는 문자는 모두 희미해 보였다. 마치 이제는 ‘딜링햄’에서 한결 평범하고 겸손해 보이는 이니셜 ‘D’로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닌지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듯 말이다. 그래도 제임스 딜링햄 영 부인은 언제나 제임스 딜링햄 영 씨가 퇴근하여 아파트 위층 집에 올라오면, 단숨에 달려가 ‘짐’이라는 애칭으로 그를 부르며 따뜻한 포옹으로 맞아 주었다. 이 부인은 이미 앞에서 ‘델라’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바 있다. 어찌됐든 아직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델라는 울음을 멈추고 볼에 파우더를 두드려 발랐다. 그리고 창가에 기대서서 우중충한 잿빛 마당의 잿빛 담장 위로 잿빛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일이 당장 크리스마스인데 짐에게 선물을 사 줄 수 있는 돈이 고작 1달러 87센트뿐이었다. 몇 달째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모으고 모은 돈이었는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것뿐이라니. 20달러로 일주일을 나는 일은 매우 빠듯했다. 지출은 예상을 한참 웃돌았다. 정말이지 항상 그랬다. 짐에게 선물을 사 줄 돈이 고작 1달러 87센트밖에 없다니. 사랑하는 짐에게……. 짐에게 어떤 좋은 걸 사 줄 수 있을까 행복한 궁리를 하면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던가. 진귀하고 값진 무언가를, 짐의 소유가 되는 큰 영광을 누릴 만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사 주고 싶어서.
집 안의 창문과 창문 사이 좁은 벽에는 기다란 거울이 있었다. 어쩌면 여러분은 집세 8달러짜리 아파트에 달려 있는 전신 거울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주 마르고 민첩한 사람만이 그 가느다랗고 세로줄무늬 같은 거울에 재빨리 자기 모습을 얼추 비춰 볼 수 있다. 다행히 가녀린 몸매의 델라는 그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델라는 돌연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눈빛은 살아서 반짝였지만 이십 초도 안 되어 얼굴은 핏기를 잃고 창백해졌다. 델라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긴 머리를 풀어 내리고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딜링햄 부부에게는 두 사람 모두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소유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내려온 짐의 금시계였다. 다른 하나는 델라의 머리카락이었다. 혹시라도 시바의 여왕이 옆집에 살았다면, 델라가 잠시 창문을 열어 머리를 내밀고 말리는 것만으로도 여왕의 미모와 찬란한 보석을 모두 무색하게 만들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솔로몬 왕이 지하에 모든 값진 보물을 쌓아 놓고서 그 건물의 관리인 노릇을 했다면, 짐이 지나가면서 그 시계를 꺼내는 것을 보고 부러움에 못 이겨 자신도 모르게 수염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그처럼 아름다운 델라의 머리카락이 광채를 발하며 마치 갈색 물결이 넘실대듯 찰랑거리면서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의 길이는 무릎 밑까지 올 정도로, 그것만으로도 거의 옷을 걸친 것처럼 풍성했다. 델라는 초조한 듯 빠른 몸짓으로 머리를 다시 묶어 감아올렸다. 그러고는 잠시 비틀거리다가 바로 섰다. 낡아서 헤진 붉은 카펫 위로 눈물 한두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델라는 낡은 갈색 재킷을 걸치고, 낡은 갈색 모자를 찾아 썼다. 여전히 두 눈에 반짝이는 빛을 담고서 치마를 펄럭이며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델라의 걸음이 멈춘 곳에는 ‘마담 소프로니 상점 - 모든 미용 제품 취급’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단숨에 층계를 뛰어올라간 델라는 숨을 고르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가게 주인은 ‘소프로니’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게 몸집이 컸고, 피부는 지나치게 하얀 편에 인상은 쌀쌀맞았다.
“제 머리를 사지 않으시겠어요?”
델라가 물었다.
“머리카락을 사기는 합니다만, 우선 모자를 벗어 봐요. 어디 한번 봅시다.”
마담이 답했다.
갈색 물결이 넘실거리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20달러를 드리지요.”
마담이 익숙한 솜씨로 가위를 들며 말했다.
“빨리 해 주세요.”
델라가 말했다.
아, 그리고 그 다음 두 시간은 장밋빛 날개를 달고 흘러갔다. 아니, 쓸데없는 비유는 잠시 접어 두도록 하자. 델라는 짐의 선물을 찾아 시내 상점이란 상점은 다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마땅한 선물을 발견했다. 정말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짐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 같았다. 다른 상점도 모두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만한 물건은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백금으로 만든 시곗줄로, 디자인이 단순하면서도 고상했다. 진정으로 좋은 물건은 요란한 장식 따위로 멋을 내지 않아도 품질만으로 빛이 나는 법이다. 그리고 그 시곗줄은 ‘짐의 시계’에 달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 시곗줄을 보자마자 델라는 그것이 짐의 것이 될 운명이라는 걸 알았다. 딱 짐과 같은 물건이었다. 수수하고 값진 것, 바로 시계와 짐 둘 모두에게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델라는 21달러를 내고 그 시곗줄을 샀다. 그리고 나머지 87센트를 가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 시곗줄만 달면 짐은 옆에 누가 있다 해도 당당하게 시계를 꺼내 볼 수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는 시계가 아무리 훌륭해도 시곗줄 대신 낡은 가죽 끈을 달아 놓은 탓에, 가끔씩만 남몰래 시계를 꺼내 보곤 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자 조금 전까지는 마냥 황홀하기만 했던 델라의 기분이 조금씩 분별과 이성을 찾기 시작했다. 델라는 머리 인두기를 꺼내서 불에 달구고, 사랑에 더해진 관대함과 아량의 결과로 깡총해진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시 여러분이 모를까 해서 하는 이야기지만, 이는 힘과 기술이 엄청나게 소요되는 거대한 공사나 다름없는 일이다.
델라의 머리가 곧이어 말썽꾸러기 남학생 같이 짧고 자잘한 곱슬머리로 탈바꿈하는 데는 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델라는 한참 동안 수심이 가득 찬 눈으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짐이 보자마자 날 죽이지 않고, 다시 한 번 바라봐 준다면…….”
델라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도 내 이런 모습을 보고 코니아일랜드의 합창단 소녀 같다고 말하겠지. 그렇지만 아아! 나도 어쩔 수 없었잖아! 1달러 87센트를 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저녁 일곱 시가 되었다. 커피가 보글보글 끓고 가스레인지 위의 프라이팬은 고기 요리를 위해 뜨겁게 달구어졌다.
짐은 절대 늦는 법이 없었다. 델라는 시곗줄을 잘 접어 손에 꼭 쥐고 짐이 늘 들어오는 현관문 옆 구석의 탁자 의자에 가 앉았다. 곧이어 밑에서 짐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델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델라는 늘 별것 아니어도 무슨 일만 생기면 속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게 속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발 하느님, 그이가 아직도 나를 예쁘다고 생각하게 해 주세요.”
문이 열리더니 짐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짐은 부쩍 야위어 보였고 표정도 매우 심각했다. 가엾은 친구, 고작 스물두 살에 벌써부터 가족을 부양하는 짐을 안고 살아가야 하다니! 짐은 새 외투가 필요했고, 손에는 장갑도 없었다.
집 안에 들어선 짐은 메추라기 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곧 그의 눈이 델라에게 가서 멎었고, 도무지 뭐라고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델라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델라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것은 노여움도, 놀람도, 꾸지람도, 공포도, 그 밖에 델라가 마음속으로 각오하고 있던 그 어떤 종류의 감정도 아니었다. 짐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특이한 표정을 하고 델라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델라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짐에게 다가갔다.
“여보.”
델라가 외쳤다.
“날 그렇게 보지 말아요. 네, 머리를 잘라서 팔았어요. 크리스마스인데 당신한테 선물 하나 주지 못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거든요. 머리는 다시 자랄 거예요. 당신 괜찮은 거죠, 그렇죠? 저,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내 머리는 엄청 빨리 자라요. 짐, 이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해 줘요. 그리고 우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안 되나요?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정말이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선물을 준비했는지 모르죠?”
“머리를 잘랐다고요?”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그 명백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짐이 물었다.
“네, 잘라서 팔았어요. 그렇다 해도 당신, 나를 전처럼 좋아해 줄 거죠? 머리채가 없다 해도 내가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잖아요.”
델라가 대답했다.
“머리카락이 다 없어졌단 말이에요?”
짐이 멍하게 물으며 아직도 영 갈피를 못 잡겠다는 표정으로 방 안을 살폈다.
“찾으려 애쓸 필요 없어요, 여보. 아까 말했듯이 머리카락은 이미 팔았거든요. 팔아서 이제 없어요. 여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예요. 상냥하게 대해 줘요.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니까요. 비록 내 머리카락은 셀 수 있을지 몰라도요.”
갑자기 말을 멈춘 델라가 진지하고 애정 어린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누구도 셀 수 없을 거예요. 자, 짐, 이제 그만하고 고기 요리를 데워도 될까요?”
짐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돌아온 듯 델라를 덥석 끌어안았다. 자, 이제 한 10초 동안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다른 각도에서 다른 문제 하나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자. 주당 8달러와 연간 백만 달러…… 이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이에 대해 수학자나 현자가 내놓는 대답은 정답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동방 박사는 아기 예수를 위해 값진 선물을 가지고 왔을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답은 가져오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짐이 외투 주머니에서 선물 꾸러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오해하지 말아요, 델라.”
짐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죠, 당신이 머리를 어떻게 자르든, 아예 박박 밀어버리든, 머리를 감든 안 감든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그 어떤 것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어떻게 하지 못하거든요. 다만 당신이 이 선물을 열어 보면, 내가 처음에 왜 그렇게 한참을 당황했는지 알게 될 거예요.”
델라의 하얀 손이 재빨리 포장을 풀었다. 그러고 나서 곧 황홀함에 도취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나! 기쁨의 탄성은 이내 갑자기 터진 눈물과 흐느끼는 울음으로 바뀌었다. 그 바람에 짐은 있는 힘을 다해 델라를 달래야 했다.
탁자 위에 놓인 건 머리빗이었다. 델라가 오래전부터 브로드웨이에 있는 진열장에서 보고는 너무도 갖고 싶어 하던 바로 그 머리빗 세트였다. 거북딱지 몸체에 모서리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는,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델라의 아름다운 머리에 완벽히 어울렸을 그야말로 아름다운 머리빗이었다. 그게 매우 값비싼 물건이라는 걸 델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가져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안타깝게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원하던 값진 머리빗이 자신의 것이 되었는데, 그것이 아름답게 장식해 주어야 할 머리카락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델라는 그 선물을 가슴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눈물이 글썽이는 눈을 들어 짐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짐, 내 머리는 무척이나 빨리 자라요.”
그러더니 불에 털이 그슬린 새끼 고양이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 맞다!”
짐이 아직 자기 몫의 멋진 선물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델라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선물을 손바닥 위에 놓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 선물은 그녀의 절실하고 찬란한 영혼의 빛에 반사되어 더욱더 아름답게 반짝였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여보? 이걸 찾느라 온 시내를 다 뒤졌어요. 당신, 이제는 하루에 시계를 한 백 번은 봐야 해요, 알겠죠? 시계 좀 이리 줘 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