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명
김진명은 대한민국 작가이다.
이 소설 바이러스 X는 출현과 동시에 인류를 멸종시킨다는 최악의 바이러스가 과연 실제로 나타날 것인지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이미 치사율 60%를 보이는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나타난 지금 그의 예측은 섬뜩하다. 사태가 이런데도 백신에만 의존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체외에서 바이러스와 싸우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최고의 치사율과 최고의 전파력이 합쳐져 출현과 동시에 지구상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바이러스를 의과학자들은 X라 명명했다. 과연 이 바이러스 X가 실제 출현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그 전조를 목도한 적이 있다.
2003년 동남아에서 최초로 인간 감염이 보고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무려 60%의 치사율을 보였다. 치사율 0.01%도 되지 않는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변이를 거듭하다 이런 괴물로 합성되었다는 사실은 바이러스 X의 출현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사태가 이렇듯 급박한데도 인류가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방법은 안타깝기만 하다. 치료약이나 백신이 현재의 유일한 대처법인데 이걸로는 바이러스의 변이 속도를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게다가 유력한 백신 후보 물질이 있어도 임상 시험에 수년, 심지어는 십 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왜 인간은 바이러스와 반드시 체내에서만 싸워야 하는가.
나는 이런 화두를 던지고 싶다.
바이러스는 몸 안에서는 처치 난망의 괴물이지만 몸 밖에서는 비눗물에도 죽고 가만 버려두어도 죽기 때문에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여하히 체외에서 바이러스를 인식해 피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기실 바이러스는 네 종류의 염기가 한 줄로 이어진 약 3만 바이트의 데이터일 뿐이다. 이렇게 인식하는 순간 문제는 대단히 쉬워진다. 현대의 과학기술로 체외에서 3만 바이트짜리 데이터를 인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는 데이터 인식의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이 뛰어들어야 한다. 바이러스의 전기량이나 염기서열을 반도체에 기억시킨 후 센서로 이를 포착하는 일은 IT와 레이저 등 데이터 인식을 전문으로 하는 분야에서 오히려 훨씬 잘해낼 수 있다.
나는 인류가 이러한 인식의 전환만 이루면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손쉽게 이긴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이 글을 썼다.
또한 나는 이 책을 통해 인류의 나아갈 길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같이하고 싶다.
치명적 바이러스들이 불결한 환경에 노출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코비드19를 통해 우리는 바이러스가 지구 어느 곳에서 생기든 순식간에 전 세계로 전파되는 걸 여실히 보았다.
그러므로 열악한 지역의 환경을 외면한 채 우리 자신의 안전만 도모하는 이기적 행태로는 위험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류문명의 붕괴와 인간성의 상실을 초래할 뿐이다.
팬데믹은 약자와의 동행만이 인류가 나아갈 길임을 가리키는 마지막 이정표인 것이다.
2020년 가을
제천 세명대에서
김진명
열한 시간이 넘는 긴 비행 끝에 푸른 물결이 쉴 새 없이 굽이치는 태평양을 건넌 보잉 747은 휑뎅그렁한 인천 공항의 활주로를 짧게 구른 후 한 줌을 겨우 넘기는 승객을 텅 빈 게이트에 멋쩍게 토해놓았다.
예전 같으면 대륙 간 여객기 특유의 웅장한 엔진 소리를 내뿜으며 게이트가 빌 때까지 계류장에서 으르렁거렸을 로스앤젤레스발 항공기였지만 팬데믹 와중이라 다른 비행기와 착륙 시간이 겹칠 이유도, 관제탑의 지시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승객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인천 공항의 화려하고 널찍한 공간이 부담스러운지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이들은 앞으로 어떤 과정을 밟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내딛는 발자국에는 여행자의 활기 대신 낯선 상황에 다가서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이쪽으로요!”
짐을 찾은 승객들은 누군가의 외침에 따라 검정 마스크 위에서 번득이는 눈동자를 굴려대는 검역관과 역학조사관들 앞으로 죄인처럼 걸어가 섰다.
“여러분은 예외 없이 두 주간 격리됩니다. 아시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의 잠복 기간이 그 정도라 처하는 조치이니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격리에 응하지 않거나 격리 시설을 무단으로 벗어나게 되면 처벌되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간결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잠깐요.”
한 사람이 조사관 앞으로 다가섰다.
“여기 병리의가 있어요?”
“병리의? 병리학 하는 의사 말이오?”
“네.”
“당연히 있죠. 그런데 왜요?”
“그 의사를 불러줘요.”
역학조사관은 뜻밖의 요구를 받자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선 사람을 아래위로 훑었다. 비록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일부 드러난 깔끔한 피부와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고급 재킷으로 미루어 보아 성공한 30대 사업가이거나 좌우간 돈푼 있는 사람이라 짐작했다. 승객들은 대부분 지시대로 잘 따라주었으나 개중에는 간혹 강한 유감을 내비치며 격리 조치에 격렬히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곤 했다.
“무슨 일이오?”
“설명할 게 있어요.”
“무얼 설명한단 말이오? 격리 장소로 못 갈 사정이 있어요?”
“일단 불러요.”
“내게 설명해요. 의사보다 내게 설명하는 게 더 빨라요. 나는 공무원이고 의사는 조력자일 뿐이니 의사에게 할 말이라면…….”
역학조사관이라는 명칭이 적힌 명찰에 힐끗 시선을 던진 상대는 말을 잘랐다.
“병리의가 아니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역학조사관은 자존심이 상했는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격리 조치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거요?”
“따를 필요가 없다는 거요.”
역학조사관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가소롭다는 웃음을 지었다.
“따를 필요가 없다? 웃기는 소리 마시오. 당신이 대통령 아들이라도 예외는 없어요.”
“사연을 들어는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말하란 말이오.”
“의사가 아니면 이해를 못 한다니까. 말을 들으려면 의사를 부르란 얘기예요.”
스스로 잘났다 생각하는 승객들이 흔히 부리는 억지였다. 이 살벌한 팬데믹 상황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자칫하면 나라가 결딴날 판인데 사소한 개인 사정을 내세우며 책임자나 의사를 만나야 한다는 자들이 드물게 있었고 그럴 때마다 조사관은 치미는 분노를 억제해야 했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어오는 놈들 사이에서 일사불란하게 코로나에 대응하는 모범 방역국 한국을 비하해 인권을 억누른 대가니 뭐니 잔말이 있어온 터였다.
“당신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길은 하나뿐이오.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격리 장소로 가는 거요. 다른 어떤 예외도 없소. 부모·형제가 죽었을 때나 산자부에서 중요한 사업상의 용무라 인정한 증서를 제출할 때만 격리 면제요. 일개 의사가 면제해주고 말고 할 일이 아니란 말이오.”
“어쨌든 의사를 불러줘요. 의사를 못 불러주겠다면 당신네 책임자라도 불러줘요.”
“의사든 책임자든 불러서 뭘 하겠다는 거요?”
“내 사정을 얘기하겠단 겁니다.”
“내게 얘기하라니까!”
“아무에게나 얘기할 수 없다니까.”
역학조사관은 이제 치미는 부아를 더 이상 참아낼 수가 없어 고함을 질렀다.
“아무도 못 불러줘. 버스 안 타면 경찰은 불러주지. 탈 거요? 경찰에 갈 거요?”
누구든 이쯤 되면 포기하고 버스를 타기 마련이었지만 상대가 차라리 경찰을 부르라는 듯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자 역학조사관은 워키토키에 입술을 일그러지도록 밀어붙이고는 분노의 목소리를 토해냈다.
“격리 거부자 발생! 경찰 조치 바람!”
지구대를 거쳐 인천중부경찰서로 연행된 청년은 사안의 특수성 때문에 형사반장 앞에 앉혀졌다.
“이정한, 37세. 그런데 왜 격리 조치를 거부했어요?”
“의사를 불러달라 했을 뿐이에요. 상대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중에는 책임자를 보자 했던 거고요.”
“의사는 왜요?”
“격리와 관련해 상의할 일이 있어요.”
“격리되지 않겠다는 얘기예요?”
정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사정이 있나요? 다른 병이 있다든지?”
“특수 체질입니다.”
“검역관에게 말하면 되잖아요?”
“의사가 아니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럼 나도 이해 못 하나요?”
정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시 잘 알지도 못할 당신에게 복잡하게 설명하기 싫다는 투였다. 나이 지긋한 형사반장은 수많은 피의자를 다루어본 경험이 있어 그런지 젊은 역학조사관과는 달리 팩팩거리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정한은 대답 없이 자신의 요구를 반복할 뿐이었다.
“의사하고만 대화할 수 있어요.”
반장은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전화기를 들었다.
인천 공항검역소의 한 비좁은 공간에서 종일 별 하는 일 없이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던 연수는 책상 위 전화기의 신호음이 들리자 혹시 잘못 온 건 아닌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면서도 얼른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수고하십니다. 중부서 박 주임인데 한 격리 거부자가 한사코 의사를 찾아요. 이 사람과 통화 한 번 해보세요.”
무슨 사정인지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기가 건네졌고 흘러나온 남자의 목소리는 엉뚱하기만 했다.
“전화로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이니 이리 와주시면 좋겠어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지원 닥터에게 전화한 게 맞나요?”
인천 공항검역소에서는 연수를 지원 닥터라 불렀다. 코비드19의 비상 검역을 위해 대규모로 편성된 특별방역단에는 바이러스 진단 전문가도 예비적으로 포함되었고 이에 따라 질병관리청에서 진단 업무를 관장하는 연수가 파견된 것이었다.
“병리의시죠? 그러면 맞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죠? 입국과 관련한 일인가요?”
“그래요.”
“격리 면제를 받으려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전염병이 있으세요?”
“그건 아닙니다.”
“격리를 견딜 수 없을 정도의 다른 병변이 있나요? 공황 장애라든지.”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냥 격리 장소로 가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설사 본인이 치명적 병환을 겪고 있어도 무조건 가셔야 해요. 두 경우만 예외가 있는데 하나는 부모·형제의 상이고 또 하나는 중요한 사업상의 일인데 이 경우는 정부 기관의 증명서가 있어야 해요.”
“오셔서 저와 잠시 얘기를 나누면 선생님께서 격리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불가능해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도저히 격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가지셨다면 그건 출입국사무소 측과 얘기하셔야 해요.”
“제 일을 판단하는 데는 공무원이 아니라 의사가 필요해요.”
“여하튼 격리 장소에 가셔야 해요. 거기 가시면 의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 끊습니다.”
“아니, 부탁입니다. 잠깐만 오시면 되는 일인데요.”
상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실함이 연수로 하여금 냉정하게 전화를 딱 끊지는 못하게 했다.
“그럼 일단 전화로 설명해보세요.”
“안 됩니다. 전화로는 절대 얘기할 수 없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아야 가든 말든 하잖아요. 일단 얘기를 해보세요.”
“그냥 아주 심플하게 의사를 애타게 찾는 환자가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나요?”
“저는 질병관리청 소속이라 의사라기보다는 공무원이에요. 법과 규칙에 따라서만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설사 제가 선생님의 타당한 이유에 공감한다 하더라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모·형제의 상을 당한 경우나 중요한 사업상 방문의 경우만 격리 면제가 가능해요.”
“이 사람은 환자다. 모든 걸 떠나 의사를 찾는 환자다 생각해주세요. 지금 내가 가지 않으면 이 환자는 죽는다고 말이에요.”
“아프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몸이 아프지는 않지만 의사를 간절히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환자예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 생각하면 오시는 게 맞는다는 걸 아실 텐데요.”
연수는 그제야 이 사람이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일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장면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히포크라테스를 들먹이는 거로 보아서는 영리한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아집에 가득 찬 온갖 언사로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관철시키려 드는 걸로 보아 성격장애자일 수 있었다.
“죄송해요.”
연수는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마지막 말은 비록 상투적이긴 했으나 오래전 잃어버렸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의사 시험에 합격한 날 남몰래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모든 것의 최우선에 두겠다 맹세했던 자신을 스스로 배신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의사의 도움을 원하는 상대에게 자신을 공무원이라는 식으로 말해버린 것이 계속 앙금처럼 남았다.
“혹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전화를 끊고 난 연수가 불편해하는 걸 느낀 옆자리의 사무관이 친절을 보이자 연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경찰서로 같이 가주실래요?”
한사코 격리를 거부하는 정한을 입건해 검역법 위반으로 진술조서를 작성하던 형사반장은 연수가 나타나자 크게 반색했다.
“의사 선생님이 결국은 오셨군요. 이 양반 불량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처벌하지 않을 도리는 없고 해서 어정쩡하던 참이었는데.”
“저분과 둘이서만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정한의 말에 형사반장은 주위를 둘러보다 건물 한 모퉁이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나무를 가리켰다.
“지켜볼 테니 밖으로 나가 저 나무 밑에서 얘기하세요.”
소나무 밑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자 정한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연수는 정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신병 환자일 거라는 추측이 확 달아났다. 환하고 밝은 얼굴에 한편으로는 신사적인 느낌의 청년이었다. 침착한 말투는 신뢰감을 주는데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어딘지 격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차림새 또한 흐트러짐이 없었다.
“먼저 말씀드리자면 제게 격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정을 할 권한은 없어요. 여기 온 건 순전히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서예요.”
정한은 연수의 가슴에 달린 신분증을 보며 가볍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의사시네요.”
“얘기해보세요.”
“코비드19는 염기 약 3만 개로 이루어져 있어요. 정확히는 29,903개예요. 사진을 찍으면 네 종류의 염기가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게 보이죠.”
“그런데요.”
연수의 대답은 퉁명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리학 개론을 들어야 하나.
“즉 코비드19란…….”
정한은 말을 맺지 않고 잠시 멈추었다. 강렬한 그의 눈길이 답답함과 지루함을 머금은 연수의 눈에 한동안 머무르다 멀리 하늘가로 날아갔다.
“3만 바이트 용량의 USB예요.”
정한의 목소리가 USB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귀에 남기고 떠나는 순간 연수의 뇌리에 번쩍하고 번개가 친 듯했다. 뭐라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3만 바이트짜리 USB라고. 그렇다면.
“그러니 반도체로 읽어내 정복할 수 있어요.”
분명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하지만 무섭게 끌렸다. 그간 네 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염기서열을 수없이 들여다보면서도 왜 그 염기의 배열이 데이터란 생각을 못 했던 것일까. 그러나 처음 보는 청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속마음을 내비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연수는 입술을 앙다물고 물었다.
“바이러스가 3만 바이트짜리 데이터란 발상이 기발한 건 인정할게요. 그런데 USB는 컴퓨터에 꽂아야 정보가 뜨잖아요. 어떤 방법으로 바이러스라는 USB를 컴퓨터 포트에 꽂죠? 어떻게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를 반도체가 인식하느냔 말이에요?”
정한은 연수의 두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모았다.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바이러스의 전류량을 재는 겁니다. 또 하나는 레이저의 회절 현상을 이용하는 거예요.”
진지한 표정에 비해 정한의 설명은 지나치게 간단했다.
“그게 다예요?”
“네.”
연수는 핵폭탄과도 같은 화두를 던져놓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린 이 정체 모를 사람이 혹시 자신을 놀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는 건 마음이 내키지 않아 속셈을 다 안다는 투로 말했다.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코비드19를 종식시킬 엄청난 기술을 가졌으니 격리 면제를 해달라는 건가요?”
정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갑니다.”
“네?”
“미국으로 돌아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생뚱맞은 답변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역학조사관인가 뭔가 하는 인간이나 병리학 의사라는 조연수 씨나 다 똑같아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질 않는군요. 코비드19로 미국이 하도 요동쳐 내 조국에서 한 달쯤 푹 쉬려 했는데 역학조사관은 고압적이고 병리학 의사는 의심 일변도니 기대했던 인간미라는 건 찾아볼 수조차 없네요. 그래서 돌아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세계 어디를 가도 이렇게 경찰서까지 달려와 얘기를 들어주는 의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감은 없어요. 내 성격이 본래 좀 변덕스럽기도 하니. 어쨌든 생각이 달라졌어요. 한 달 쉬러 왔는데 보름을 격리당할 순 없어요.”
“그건 처음부터 계산에 넣으셨어야죠. 어떤 경우든 격리 면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여하간 내 얘기를 잘 기억해요.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3만 바이트짜리 데이터를 읽어내는 게 관건입니다. 그건 반도체가 하는 일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한국은 반도체 왕국입니다. 나라면 이 어마어마한 정보를 즉각 삼성전자에 알려주고 한밑천 잡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에게 석 달의 시간만 주세요. 석 달 뒤에는 이 정보를 세상에 다 퍼뜨려요.”
상대는 추방당하듯 돌아가는 게 억울한지 얼토당토않은 말을 마구 주워댔다.
“뭐 하는 분이시죠?”
“저는 미국에 살아요.”
“하시는 일이 뭐냐니까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디지털 쪽이거나 아니면 바이오 쪽이거나 어쩌면 둘 다일 것이었다.
“뭐 생각해보니 지금 하신 말도 맞네요. 경찰서까지 얘기를 들으러 와주는 의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겠네요. 우리 악수나 한 번 하고 헤어져요.”
연수는 상대의 손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 수 없는 작자였다. 검역 현장에 나와 있는 의사에게 악수를 청하다니.
“유감스럽지만 잘 돌아가세요.”
연수는 며칠이 지나도록 그날의 강렬한 기억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 말은 병리학자라는 자신의 존재를 뿌리에서부터 흔들어놓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이정한이라는 이름의 그 청년은 세상 모든 의료시스템의 주체인 의사와 병리학자와 미생물학자를 해체해버릴 위험성을 가진 자였고 따라서 자신은 그의 이상한 얘기를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이 최상이었다.
- 나는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모든 것의 최우선에 두겠노라. -
연수는 그가 들먹였던 바로 그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 있는 다짐을 떠올렸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이 선서문에서 동업자를 형제처럼 생각한다는 맹세 또한 요구했으니 이는 목숨을 걸고 환자를 위하는 사람들 간의 의리와 신뢰 또한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말에 끌리는 자신에게 분명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수는 자신이 분명 새로운 사상을 접했고 그 사상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거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의사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그의 말을 거부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짐한 길이 아니다. 사실 연수는 레지던트 시절 잠시 어느 전공 분야를 택해야 할지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대세는 성형외과나 피부과였고 특히 여성으로서는 속 편하게 피부과를 선택하면 의료 사고도 없고 목 좋은 곳에서 외제 레이저 기기나 렌탈해서 손님만 잘 붙잡으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3년 정도 하면 작은 병원 하나를 살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강남에 빌딩 하나를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수는 성적순으로 성형외과와 피부과가 먼저 채워진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그녀는 의과 대학에 가기 위해 날밤을 새울 때나 원하던 의대에서 공부와 실습으로 녹초가 될 때나 ‘나는 왜 의사가 되려고 하는가’ 진지하게 반문하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한 사회의 최고 엘리트인 의사의 인생 목표가 고작 돈을 많이 벌어 강남 건물주가 되는 것일 수는 없었다.
연수에게는 남다른 목표가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접한 영국 BBC방송의 《10대 인류 멸망 시나리오》에서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과 미지의 바이러스 출현이 인류에게 가장 위협적이란 사실을 듣고 난 후 연수는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물론 병리학을 선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성적이 나빴나 보다, 그것도 의사냐, 돈벌이는 글렀다는 말들을 해댔을 때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연수는 표피를 자극하는 유혹을 버리고 병리학을 선택했고 스스로 택한 길이니만치 실험실에서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수행할 때 마음이 가장 편했다. 인류와 바이러스 간의 오랜 싸움. 그것은 이 세상 어느 전쟁사보다 치열했고 장엄했으며 드라마틱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연수가 전력을 다해 종사하는 일은 인기도 없고 재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일의 연속이었다. 표본을 배양하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일이 일상의 거의 전부였고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하간 단조롭고 평화로웠던 병리학자로서의 길은 며칠 전 갑자기 나타난 젊은 남자로 인하여 깨지고 말았다.
연수는 고뇌 끝에 평소 말이 잘 통하던 대학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이러스가 3만 개의 바이트를 가진 데이터라! 그 바이트란 염기를 말하는 거겠지?”
“네.”
“좀 말장난 같은데? 염기서열을 데이터로 본다, 쏘 왓, 그래서 뭘 어쩌겠단 말이야?”
한 줄기 실낱같은 기대조차 사라지자 연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매사에 열린 사람이라 어느 정도는 호응할 것이라 믿고 마음을 터놓았는데 이 사람조차도 부정적이라면 의학계에서는 받아들일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쉬운 게 지금까지 안 됐단 건 아예 상상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란 거야. 그게 가능하다면 그 친구가 들먹였던 삼성전자에서 왜 아직 아무것도 안 했겠어? 그리고 생각해 봐, 진짜 기업체에 전화 한 통화만 해주어도 엄청난 돈을 버는 일이라면 왜 지가 직접 안 하고 공항에 와서 병리의를 불러달라는 둥 지랄을 떨며 조박에게 떠벌리고 갔겠냐구?”
선배의 말에 그와의 대화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되씹어볼수록 그는 정말 너무나 이상한 사람이었다. 격리 면제를 요구하며 병리의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 피우다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그가 정작 자신을 만나서는 격리 면제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돌아가는 이유 또한 전혀 상식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역학조사관은 고압적이고 의사는 의심 일변도라고. 세상에 그런 이유로 미국에서 인천까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날아왔다 그냥 돌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대며 돌아간 건 처음부터 검역망을 통과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모든 것이 어떤 계획의 일환이었다면. 연수의 뇌는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렇다면.
‘왜 왔다 간 것일까.’
알 수 없는 미스터리였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종일 생각하던 연수는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게 공상일 뿐이었다. 쫓겨날 계획을 세우고 미국에서 한국까지 날아오는 사람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하하, 하하하.”
연수는 몸에 스민 팬데믹의 망령을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소리 내 웃고는 편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래, 진짜 팬데믹의 망령이야. 종일 마스크를 쓰고 지내니 미치지 않을 수 없잖아. 자, 어서 한 잔 쭉 넘겨. 이런 미친 시대에는 술이 최고야.”
친구의 권유에 따라 연수는 퇴마 의식이라도 하듯 잔에 가득 채워진 붉은빛의 와인을 한 번에 다 넘겨버렸다. 금세 취기가 오른 연수의 입술을 타고 정한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정한. 여하간 되게 웃기는 놈이었어. ‘기대했던 인간미라는 건 찾아볼 수조차 없네요. 그래서 돌아가요.’ 호호호, 야. 그럼 내가 너랑 팔짱 끼고 공항 검역대를 통과시켜야 하는 거니.”
연수를 가만히 바라보던 친구가 웃음기를 머금고 물었다.
“너 혹시 그 남자 마음에 든 거 아니니?”
“미쳤어?”
하지만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자 연수는 삼성전자에 전화를 걸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이상하게 그의 말이 종일 귓속에 뱅뱅 돌아다녀 다른 일을 하나도 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질병관리청 소속 의사라는 신분 덕분에 연수는 어렵사리 삼성전자의 임원과 통화할 수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착안하진 못하고 있었는데……. 염기서열을 잘 모르긴 하지만 그게 네 개의 알파벳으로 표시되는 거라면 어차피 정보 개념이라 할 수도 있겠고……,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라 낯설긴 합니다. 여하튼 전체 기술회의에서 얘기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연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전문가라는 사람이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은근히 화가 났다.
“그렇게 느슨하게 하시면 안 돼요. 저는 3개월밖에 시간을 못 드리니까요.”
“네?”
“3개월 후에는 전 세계 사람이 다 알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럼 오늘 우리 삼성에 처음 이 아이디어를 공개하시는 겁니까?”
“네, 처음이에요. 왜 거기냐면 좀 더 책임감 있게 하시라는 거예요. 이런 발상은 반도체 최고를 자부하는 그런 데서 먼저 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3개월의 시간은 삼성이 다른 기업보다 3개월 빨리 출발하시라는 거예요. 시스템반도체도 만들고 가전제품도 만들고 얼마든지 남들과 격차를 낼 수 있는 시간이잖아요.”
전화를 끊고 난 연수는 갑자기 달라진 자신을 스스로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연수는 다시금 몇 번이나 이정한과의 대화를 곱씹어보았다.
그러자 그의 이해할 수 없는 출현에 대한 연수의 추측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연수는 정한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자가 추방이 애초에 계획된 것이라는 가정을 해보았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스스로 추방당할 목적으로 한국에 왔다. 그가 한사코 병리의를 만나려 한 건 바로 그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병리의를 만나 반도체로 바이러스를 잡는다는 아이디어를 전하려 한 것이다. 또한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두 가지 할 일을 암시했다. 하나는 삼성전자에 그 발상과 원리를 전달하라는 것. 아마도 한국에서는 오직 삼성전자만이 할 수 있다 생각했을 터였다. 또 하나는 오직 3개월의 시간만 주라는 지령 아닌 지령. 이것은 3개월이면 삼성전자가 경쟁자와 격차를 내는 데 충분하다 보았기 때문이리라.’
연수는 그날의 기억에 대해 이런 방향의 의미를 애써 부여했다. 정신병자를 포함한 다른 어떠한 해석도 그날의 그가 보인 언행이나 인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석하면 마지막으로 하나 남는 의문이 있었다.
‘그는 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방식으로 했을까.’
연수는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부딪힐 때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걸 떠올렸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물었을 때 그는 미국에 사는 사람이라며 대답을 피했고 재차 물었을 때는 아예 말을 돌려버렸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석 달이 지났을 때 연수는 선배를 찾아갔다.
“이상하게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반도체로 바이러스를 잡는다는 거 말이에요.”
“잊어버려. 모든 분야에는 전문가가 있는 법이야. 나도 조박의 말을 계속 생각해보았지만 이건 의사의 경계를 넘는 일 같아. 자칫하면 의료계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게 될 거야.”
연수는 선배의 입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을 위험이 있다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오기가 꿈틀대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는 문득 그게 왜 불가능해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망상이랄까 공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의사들이 자기네 밥그릇 지키려 외면한다면 의협에서 내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에 한 번 확 던져볼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흐흐, 밥그릇 때문이 아니야. 의사라는 존재를 그리 가볍게 보아선 안 돼. ‘국경없는의사회’를 봐. 전쟁터는 물론이고 새로운 전염병이 터지면 그야말로 목숨 던져놓고 달려들잖아. 코비드19에도 의사들이 가장 많이 죽었어. 그 방법이 진정 환자를 위해 도움이 된다면 이 세상 의사들은 병원 문을 모조리 닫아걸고라도 조박을 지지해. 다만 현재로선 나부터도 조박이 사이비로밖에 안 보여.”
“사이비 맞아요. 실은 나 자신도 때때로 헷갈리는걸요.”
연수가 심하게 풀죽은 모습을 보이자 선배는 안됐다는 마음이 들었는지 아니면 연수를 완전히 단념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한 음계 높인 톤으로 제안을 내놓았다.
“좋은 방법이 있어.”
“뭔데요?”
“논문을 써봐. 아니, 논문은 실험을 한 게 없으니까 쓸 수 없을 테고 에세이를 말이야. 세계 최고 권위의 의학저널 《NEJM》에 풋내기 중의 풋내기 조박이 에세이를 쓰는 거야. 그 공포의 바이러스가 고작 3만 바이트짜리 USB에 불과하다. 반도체로 읽어들이기만 하면 사스, 메르스, 코비드19, 인플루엔자 할 것 없이 종류별로 바이러스를 싹 잡아낼 수 있다. 우와, 신나잖아.”
“논문도 아니고, 이런 공상 같은 에세이를 《NEJM》에서 실을까요?”
“그러니까 보내보라는 거지. 보내보고 그쪽에서 아무 소식이 없으면 조박의 미련도 싹 달아날 거 아니야.”
연수는 처음에는 자신을 단념시키기 위해 그냥 해본 말처럼 들렸던 선배의 제안이 시간이 지날수록 타당하게 다가왔다. 아니 뭐가 됐든 최소한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채로 이 생각을 묻어버리기에는 그 자신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연수는 세계 최고의 의학저널에 에세이 형식으로 투고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고는 반도체를 이용한 새로운 기제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각 분야의 관련 기술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사이비 판정을 받든 어떻든 이 새로운 시각은 그간 어딘지 모르게 허송세월하는 것 같았던 연구실 인생에 활력과 의미를 더해주었고 연수는 밤을 새워 이 새로운 분야에의 도전을 이어나갔다.
마터호른.
구름 한 점 없는 투명한 파란 하늘을 단숨에 찢고 거대한 새 부리 모양으로 거칠게 치솟은 알프스의 영봉. 그 발밑으로는 거대한 알레치 빙하가 침묵 속에서 바람과 빛의 시간을 한없이 쌓아가고 있다. 110억 톤의 얼음을 품은 그레이트 알레치 빙하는 융프라우로부터 미끄러져 내려 알프스 계곡의 남쪽으로 장장 23킬로미터나 강처럼 뻗어 있다.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과 얼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고산 지대를 지칠 줄 모르고 찾아든다.
- 왜 산을 오릅니까? -
- 거기 산이 있으니까요. -
누군가의 대답처럼 사람들은 높은 산을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이 도전이든 응전이든 사람들은 산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야 만다.
눈을 보면 마음이 순결해지고 얼음을 보면 머리가 차가워진다는 환상을 품은 채 관광객들 또한 오르고 또 오른다. 그 모든 산들 중에서도 알프스는 단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다. 그런데 알프스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가장 웃음 짓게 하는 명물은 뜻밖에도 ‘볼리’라고 불리는 양이다. 꼬불꼬불한 하얀 털로 전신이 덮였지만 얼굴에만 검은 털이 나 있어 앙증맞은 인형 같은 이 양은 알프스의 마스코트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마터호른의 도시 체르마트의 젊은이들은 목동이라는 직업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21세기에 목동이라는 단어가 좀 의외일 수도 있지만 목축과 낙농이 주요 생업인 알프스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직업이다. 알프스의 목동들은 농부들이 위탁한 소나 양들을 여름풀이 자라기 시작하는 5월부터 알프스의 높은 산록에서 방목하여 키우다가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초가 되면 다시 마을로 데리고 내려온다.
목동들이 수백 마리의 양떼를 높은 고산 지역으로 몰고 가 풀어놓으면 양들은 알레치 빙하를 따라 이동하며 부드럽고 연한 풀을 찾아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그동안 목동들은 양에서 갓 짜낸 신선한 양젖을 치즈로 만든다.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진한 양젖이 방울방울 스며 나올 것처럼 신선한 이 치즈들은 하산하는 날 농부들이 맡겨놓은 양의 숫자에 따라 배분된다.
8년째 목동 일을 하는 펠릭스는 그동안 각별한 성실성을 인정받은 덕분에 올봄에는 무려 800마리나 되는 양을 산록으로 데리고 올라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건강하게 키워냈다.
드디어 4개월간의 고된 작업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9월 첫 번째 일요일인 오늘, 펠릭스는 여름내 만든 치즈를 가지고 양떼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는 중이었다. 바로 이날 마을에서는 전통에 따라 각지에서 귀환하는 목동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몰고 내려오는 소와 양, 그리고 여름내 만들어진 치즈를 분배하는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체르마트의 볼리 축제에는 마을 주민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이미 오래전부터 스위스를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펠릭스! 너 야위었구나!”
“그래, 미하엘! 너는 좀…….”
“그래, 살쪘어. 후후, 게임에 빠져 지냈거든. 이제 목동일 그만두고 게임숍 차릴 거야.”
목동들은 각자 맡은 고산 지역에서 내려오다 편평한 구릉에서 동료들을 만나면 먼저 살이 쪘는지 야위었는지 살핀다. 물론 살이 쪘다면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얘기라 양의 상태가 좋을 리 없는 것이다.
펠릭스에게 오늘은 정말 고된 하루였다. 토요일인 어제 흩어져 있는 800여 마리의 양떼를 한 마리도 빠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