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른바 ‘사법농단’으로 사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정권과 재판 거래를 했다는 의혹에 사법부 고위층 인사들이 관련됐다는 충격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특별재판부 설치’, ‘법관 탄핵소추’ 등 헌정사상 보기 드문 논란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를 바라보며 올바른 법관상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 참담한 순간 반세기 전에 타계한 가인 김병로가 떠오르는 것은 어째서일까.
가인 김병로는 새롭게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수립하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했다. 어떠한 외부 세력과 정권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대통령의 헌법 파괴에 맞서 의연하고 당당한 기개를 보였다. 또한 양심과 정의에 따른 법관의 자세를 강조하고 공직자로서 법관윤리의 정립과 실천을 주장하여 청렴강직하고 지공무사한 법관상을 제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몸소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격변기 와중에는 독재 및 군정의 종식, 문민정권의 수립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오늘날 김병로가 ‘헌법 수호자’, ‘법조성인’으로 현창되고 평가받고 있음은, 현재 대법원에 있는 그의 흉상이 웅변한다.
그러나 김병로가 해방 후 이룬 업적과 평가는 근본적으로 일제강점기의 활동과 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가인은 법학교수로서 경성전수학교·보성전문학교 등에서 다년간 강의했다. 잠시 조선총독부 판사로 나가 재판실무 경험을 하고 약 1년 만에 사직했다. 이후 김병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무료변론하며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설파했다. 민족과 민중이 살 길이 오직 ‘독립’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는 좌우의 모든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항일변론에 분투했다. 법정투쟁으로 맺은 인간적 신뢰는 동지애로 진화하여 김병로를 사회운동·민족운동의 지도자 반열로 끌어올렸다. 법정을 나와 직접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좌우합작으로 건설된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일제 말기에는 노골화한 친일 요구에 낙향과 은둔으로 맞서며 최후까지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이러한 항일변호사와 민족지도자로서의 역할과 경험이 해방 전부터 모든 면에서 최고의 법조인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해방 후 친일청산과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사법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가 요구되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친일경력이 없고 법률가로서의 전문성과 경험을 가진 최적의 인물로 가인 김병로가 지목된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이 책은 가인 김병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을 위한 교양서이다. 때문에 기존의 연구를 섭렵하고 되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하면서도, 항일변호사로서 김병로의 전후 삶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가인의 전 생애를 살펴볼 때, 일제강점기 김병로의 삶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의 의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는 한인섭 선생의 『가인 김병로』, 김학준 선생의 『가인 김병로평전』, 김진배 선생의 『가인 김병로』 등의 저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가인 김병로에 관한 기왕의 저서들은 하나하나가 기본 자료의 성격을 갖는다. 특히 기존의 연구 성과와 관련 자료를 집대성하여 방대한 분량으로 출판된 한인섭 선생의 저서는 이 책의 길잡이가 되었음을 밝힌다.
끝으로 강릉에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이승일 교수와 동료들에게 감사드린다. 일상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학문적 토론은 필자의 연구 활동에 자양분이 되었다. 더불어 책이 나오기까지 정성을 다해준 역사공간의 선우애림 님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18년 12월
강릉에서 전병무
글을 시작하며
• 항일변호사로서의 삶을 선택하다
일제강점기의 항일변호사란? | 항일 법정 투쟁의 한계
독립을 열망한 거리의 사람
• 국권 상실의 시대, 질풍노도의 청년 시절을 보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불우한 소년 | 간재 전우에게 사사
항일의병투쟁 참여 | 구국계몽운동으로의 전환과 창흥학교 창립
• 일본으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다
망국 직전의 일본 유학 | 메이지대학에서 수학
유학생 자치활동과 『학지광』 발간
• 법학 교수, 판사 그리고 항일변호사로 활동하다
후학 양성과 법학 교육 | 판사 임용 경위와 활동
변호사 개업 및 첫 항일운동 사건의 변호
• 항일변호사의 구심점,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창립하다
경성조선인변호사회와 조선인변호사협회 창립
베이징 국제변호사대회 참가 | 형사변호공동연구회 창립
• 식민지 법정에서 조선 민중과 독립을 변호하다
조선 민중의 권익을 위한 투쟁 | 무장독립운동 사건 변호
사회주의운동 사건 변호 | 학생운동 사건 변호 | 민족주의자 사건 변호
• 법정에서 사회로, 신간회에 참여하다
민족단일당운동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 신간회 해소 논쟁
• 암흑의 시대, 창동에서 은둔하다
창동 이주 | 김병로·이인 합동법률사무소 | 항일 변론권 박탈
창동 생활과 일제의 패망
• 신국가 건설과 사법부 독립의 초석이 되다
해방공간과 정치활동 |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
대한민국 기본 법률 기초 | 민법 편찬 | 형법과 형사소송법 편찬
• 민주주의를 수호하다가 영면하다
대법원장 퇴임과 3·15부정선거 | 정계 은퇴와 영면
김병로의 삶과 자취
참고문헌
일제강점기 조선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에 조선인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목숨을 건 항일민족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항일민족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대한 사건이자 반역행위였다. 따라서 일제는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을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체포·구금·고문했고 재판소라는 사법기관을 이용하여 강력하게 처벌했다. 그리고 이때, 구금되어 재판을 받던 항일민족운동가들의 무료변론을 도맡아 항일민족운동을 지원하던 변호사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법복을 입은 변호사들 가장 앞줄에 있는 사람이 김병로다.
항일민족운동가의 투쟁은 대개 지하나 해외에서 이루어졌으므로, 그 실상을 조선 민중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불행히 체포되면 일제 경찰과 사법당국은 외부와 접촉을 차단했다.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변호사뿐이었다. 무료변론을 자처한 변호사들은 옥중 접견을 통해 얻은 정보를 신문기자에게 알리고, 기자는 이를 기사화하여 전국에 알렸다. 공판일자가 가까워지면 피고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민중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법정이 열리면 이들은 법률투쟁의 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피고인들도 진술을 통해 국내외의 독립운동 실상을 알리려고 했다. 피고인들의 진술이 대개 제한되고 비공개로 처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변호사의 변론까지 제한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특히 고문이나 경찰권의 남용의 사례일 경우 공포와 불안감으로 극도로 위축된 피고인의 용기를 북돋우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는 데는 변호인의 역할이 컸다. 고문은 일상적 수사수단으로 애용되었지만, 법률적으로 고문 사실은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항일변호사의 열렬한 변론과 특유한 논리는 피고인뿐 아니라, 방청객, 전 조선인에게 독립운동의 대의를 역설하는 장이 되었다. 기자들은 보도라는 형식을 통해 피고인과 변호인의 법정투쟁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의 사실과 대의를 널리 전파했다. 이렇게 항일변호사들이 항일민족운동가·기자 등과 연대하며 전개한 활동은 독립운동 사건의 파장을 증폭시켜 일제를 당혹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법정투쟁을 변호사들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했다. 1920년대 이후 신문지상에 늘 등장하던 이들을 당시 사람들은 뭐라고 부르고 어떻게 평가했을까? 1932년 잡지 『동광』에 실린 이들에 대한 평판을 통해 알아보자.
김병로 군
변호사 노릇을 하여가지고 번 돈을 사회운동에 얼마간이라도 쓴 이는 김병로 군일 것이다. 김군은 전수학교 교수로 부산지방법원 판사를 지내고 1922년 봄에 재야법조계의 일원이 되었다. 군은 성격이 호담하여 자기를 누가 비난하던지 군은 자기의 주장대로 나아가는 기질을 가졌다. 군은 금일까지 맡아본 사건이 약 500~600건에 달하는데, 그 7~8할은 사상사건이 점령하였다. … 크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키에 두 볼이 홀쭉 빠진 김군 ― 그는 조선 좌경변호사로 첫 사람이 될 것이다.
이인 군
절늠뱅이 변호사 ― 이군은 변호사로도 특징을 가진 인물이거니와 육체적으로도 다리 저는 특징을 가져 변호사계의 독특한 존재를 가졌다. 이군은 대정 11년 10월에 동경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동경 적판구에서 개업을 하였다가 경성으로 옮겨 온 사람이다. 이군이 오늘까지 맡아본 사건은 600여 건인데 8할은 사상사건이다. 공산당사건의 피고로 이군의 얼굴을 법정에서 보지 않은 사람이 드믈 것이다. 소장변호사로 또는 좌경변호사로 사회운동이 죄가 아니 된다고 열렬히 주장한 이는 이군일 것이다. 재작년 12월 6일 이군은 8개월 정직을 받았다. 수원고농학생사건 변호 시에 XX(독립–필자 주)사상은 XXX(조선인–필자 주)이 전부 가지고 있는 사상이니 이에 관한 글을 써서 일반에게 보였다고 할지라도 치안을 어지럽게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일이었다. … 무슨 일이든지 남아답게 처하는 그 태도 ― 절름절름하는 그 모양과 함께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이창휘 군
조선의 사상변호사로 일존재를 굳게 점령하고 있는 이로는 이창휘 군을 망각할 수 없다. 몸이 뚱뚱하고 눈이 둥그렇고 커다란 목소리로 법정에서 검사와 불이 날듯이 논전을 바꾸는 이는 이창휘 군이다. 군이 대정 14년도에 동경서 변호사 시험에 「파쓰」를 하고 개업한 이래 전후 담당한 사건은 약 800건가량인데 이것의 6할은 사상사건이다. … 이러니 저리니 하여도 이군은 조선변호사계에서 특색을 이루고 있는 변호사의 한 사람이다.
이 글에서는 김병로金炳魯, 이인李仁(1896~1979), 이창휘李昌輝(1897~ 1934) 변호사의 신체적 특징을 묘사하는 한편 이들이 맡아본 전체 사건 중 사상사건이 6~8할이 된다고 기록한다. 본래 ‘사상’이라는 단어는 1925년 시점부터 사회주의 색채가 가미된 각종 운동, 특히 공산당 관련 사건에서 널리 쓰이던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넓게 보면, 일제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이념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모두 중대한 ‘사상사건’으로 판단했다. 이인은 수원고농학생 사건 변호 시에 독립사상은 조선인이 전부 가지고 있는 사상이라고 했다. 즉 조선인이라면 누구든지 품었던 ‘민족독립’이라는 당연한 신념도 ‘사상사건’이 되었던 세상이 일제강점기라는 시절이었다.
허헌
이인
김병로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변호사들을 가리키는 단어들이다. 첫째가 ‘사상변호사’이다. 이창휘에 대해 “조선의 사상변호사로 일존재를 굳게 점령하고 있는 이”라고 했다. 둘째, 그와 비슷한 지칭이지만 ‘좌경변호사’이다. 김병로는 “조선 좌경변호사로 첫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고, 이인은 “좌경변호사로 사회운동이 죄가 아니 된다고 열렬히 주장한 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들의 변호 활동은 당시 신문지상에 자주 소개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표현이 ‘무료변호’ 혹은 ‘자진변호’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사상변호사’·‘좌경변호사’·‘무료변호사’ 등으로 불렀다. 이들이 이렇게 불렸던 이유는 ‘사상사건’ 의뢰인, 즉 독립운동가의 재판에 자진하여 무료변론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었지만, 자신의 영달과 안위에 안주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늘 일제의 감시가 따라다녔을 것인데도, ‘사상사건’의 법정에서 검사와의 논전을 마다하지 않고 항일민족운동을 지원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은 이 변호사들 가운데 김병로를 비롯한 허헌許憲(1885~1951), 이인을 일컬어 ‘삼인 변호사’로 애칭하며 존경했다. ‘삼인 변호사’로 지칭한 까닭은 가인街人 김병로, 긍인兢人 허헌, 그리고 이인李仁의 호와 본명에 모두 ‘인’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삼인 변호사’는 사건 의뢰인이 좌파든 우파든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며 법정투쟁을 준비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도 결코 사회주의사상에 깊이 경도되지도 않았다. 당시 회자되던 ‘경부선의 비유’로 설명하자면, “경부선 기차를 타고 가는데, 우리(‘삼인 변호사’)는 대구 가는 승객이고 사회주의자는 부산까지 가겠다는 승객으로, 기차를 함께 탔으니 그들과 동행하는 것은 분명한데 목적지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삼인 변호사’는 민족독립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사회주의자들을 공동전선의 동지로 이해하는 특유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변호사법 제1조에는 변호사의 사명을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지금의 기준에서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요즘의 인권변호사보다 더 차원이 높았다.
‘삼인 변호사’를 포함한 이 변호사들은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들의 활동을 봉쇄하려고 했다. 일제는 변호사 징계제도를 통하여 “변호사의 품위 및 신용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과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명분 등으로 이들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결국 이인과 김병로는 변론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 등으로 한때 정직당했고, 이인은 끝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허헌은 민중대회사건으로 구속되어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다. 이창휘는 과로와 신병으로 급서했는데 일제의 손에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모든 변호사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자신의 사회적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출세 욕망에 따라 치열한 시험 경쟁에 뛰어들었다.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재판소나 군청 서기로, 일반 민중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출세를 위해 시험 대열에 참여했다. 당시 변호사는 소수였고, 조선인 변호사 숫자는 더욱 적었기 때문에, 사회적 대우와 직위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판사·검사·변호사
* ( )는 조선인 수
* 출처: 『조선총독부통계연보』(각년판)
변호사 시험에 합격만 하면 바로 ‘영감’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이름 있는 집안에서 ‘혼담’이 들어왔으며, 지방에서는 마을잔치가 벌어지기도 했다. 변호사가 된 후로는 강고한 동료의식과 엘리트의식을 바탕으로 ‘법률전문가’ 역할을 하며, 명망가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안정적 경제생활을 영위했다. 이들은 사안에 따라 일제에 타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맞서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면 점차 일제의 사법체제에 안주하여 보신주의로 흐르거나 친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일부 변호사들은 인권옹호와 정의실현의 길은 조선 독립에 있다고 보고, 항일민족운동가의 무료변론을 도맡아 식민지 법정에서 조선 독립을 변호하며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항일독립운동사에 기여했다. 자신의 안위와 안정적인 생활은 접어둔 채 스스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변절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일군의 변호사들을 ‘항일변호사’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런데 아직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제국의 법률 아래 통제되던 사회였는데, 과연 일본법으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예컨대 선비의 절개와 지조로 혁신유림계를 이끌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은 변호사의 도움을 단연코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변호를 거절하는 것은 엄중한 대의이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김창숙은 일본인 재판장이 본적이 어디냐고 물으면 “없다”고 대답하고, 왜 없냐고 물으면 “나라가 없는데 본적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 등 재판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다. 또한 1927년 참의부 소속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이수흥李壽興(1905~1925)은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독립군의 일원으로 일제와 전쟁을 치르다 포로가 된 후 시종 당당한 자세로 재판에 임했다. 재판장이 항소 여부를 묻자 “포로가 된 것만도 수치이거늘 하물며 어찌 목숨을 구걸하란 말인가”라고 일갈하며 항소를 거부했다. 그는 변호사의 자진변론도 거부했다. 이처럼 이들의 드높은 기백과 절개는 우리에게 끝없는 감동을 준다.
김창숙의 “일본법률론자가 일본법률에 따라 독립운동가를 변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전체 조선인 변호사들은 ‘일본법률’을 공부하고 시험에 합격하여 일제에게서 변호사자격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조선총독부 법정에서 일본어를 쓰고 일본법의 조문을 인용하면서 변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일본법률론자’인 변호사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민중과 독립운동가들의 시선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김창숙
특히 ‘항일변호사’ 역시 ‘일본법률론자’로 아무리 항일의 취지를 갖고 변론을 하더라도, 재판 자체를 부정하는 김창숙에게는 대의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창숙의 근본적 의문에 ‘항일변호사’들은 어떻게 답했는가? ‘항일변호사’들은 변호사로서 보장된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독립운동가들의 무료변론을 도맡아 최선의 법정투쟁을 전개하다가, 변호사 자격을 정직 혹은 박탈당하거나 심지어 자신이 구속되는 것으로 답했다.
이처럼 독립운동가의 입장에 따라 항일변호사조차도 대하는 자세가 한결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많은 독립투사와 애국지사들은 항일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어떤 때는 본인보다 가족이 변호사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가족으로서는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 제대로 소식을 듣기도 어렵고, 법적 변론을 통해 형량을 낮추거나 석방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김병로 인물평
(『혜성』 제2권 제1호, 1932년 1월)
일단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 혹독한 수사를 거쳐 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일련의 과정은 일제의 법령 및 일제의 재판소, 일제의 형사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러한 법적 환경 아래에서는 변호사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일제도 근대적 법적 외양을 갖고 지배하고자 했으므로, 변호인의 주장이 일본법에 따라 정당화될 때는 일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의 대의를 지키되 재판을 통해 불이익한 재판을 방지하거나 시정하고, 양형상의 다툼을 하기 위해 변호사를 활용하는 유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변호인 활용 및 상소권 활용이 그들의 독립운동의 대의를 훼손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조선 좌경변호사로 첫 사람”인 김병로는 일제강점기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한 자세로 살아왔을까. 그 단서를 그의 자호自號인 가인街人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인이란 거리의 사람이라는 뜻인데, 달리 말해 집 없는 사람이고, 속되게 말해 거지라는 뜻이다. 왜 그런 호를 택했을까? 그 호를 쓴 지 몇 십 년이 지난 1957년 『동아일보』에 쓴 「가인의 변」을 통해 별호의 내력을 밝히고 있다.
「수상단편」(『경향신문』 1959년)
이에 따르면, “글을 읽고 공부할 무렵에 별호를 소석小石이라 했다. 옛글에 남자란 담은 크되 마음은 작게 하여 몸을 귀히 하라는 데에서였다. 더구나 나 자신 체구도 크지 못한 데서 소심, 신소하되 적어도 돌과 같이 강해야만 하리라는 생각에서 돌 석石자를 택하여 소석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는 망해 절망적이고, 개인적으로도 쪼들리는 상태에서, “이미 잃어버린 땅과 좀먹어가고 있는 경제를 회복시켜 나라를 찾고 독립을 얻기 전에는 어느 한 곳 거처할 곳이 없이 거리를 방황하는 거지와 같은 사람이 된 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독립을 희구하는 마음과, 현실을 개탄하는 뜻에서 가인이라고 별호를 고쳐버렸다”고 했다. 즉 김병로의 호 속에는 절망적인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김병로는 왜 변호사가 되고자 했는가. 그에 대해 1959년 『경향신문』에 「수상단편」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회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원래,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기에 유의하였다는 것은 생활 직업에 치중한 것도 아니요, 재산을 축적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다만 일정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함에 있었다. 변호사라는 직무가 그다지 큰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 첫째, 가장 우리에게 잔혹하던 경찰도 변호사라면 용이하게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어려웠다는 것, 둘째로 그 수입으로써 사회운동의 자금에 충당할 수 있는 것, 셋째로 공개법정을 통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것 등이 약자인 우리에게는 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생각하기를 변호사라는 직무가 자기의 생활 직업으로만 하지 아니한다면 인권옹호와 사회정의에 실로 위대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곧 동지를 규합하여 집단활동을 추진한 바도 있고, 비밀계획을 시도한 바도 있어 미력이나마 해방 직전까지 30년이란 기간을 끊임없이 시련한 바 있었다.
그는 왜 변호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선 변호사를 생활 직업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특히 재산을 축적할 뜻이 전혀 없었음을 못 박았다. 이어 일제의 박해에 신음하는 억울한 동포를 구해내자는 것이 변호사가 된 근본 동기이고 대의였다고 밝혔다. 이 입장은 비록 해방 후의 회고이지만, 항일변호사로 살아가겠다는 초심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변호사는 다음의 3가지 장점이 있었기 때문에, 약자인 조선 동포들에게 하나의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변호사 김병로가 이 장점을 어떻게 활용해서 ‘위대한 사업’을 전개했는지 살펴보자.
첫째, 변호사의 상대적 특권적 지위를 지적했다. 잔혹했던 일제 경찰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호사는 지위가 특별했다. 당시 변호사는 수가 매우 적었고, 적어도 공인된 특권의 지위를 향유했던 직업이다. 그러나 김병로는 그 특권의 지위를 개인적 영달이 아니라, 사건의 피고인, 나아가 약자인 조선 민중을 위해 활용했다. 예컨대 1929년 갑산甲山 화전민火田民 사건에 대한 현지조사이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화전정리사업을 추진하면서 화전민들을 화전지대에서 축출하는 시책을 주로 폈다.
1927년 조선공산당 사건 시 변호인 김병로
(『조선일보』 1927년 10월 18일자)
앞줄 우측에서 첫 번째가 김병로다.
이때 갑산의 삼림을 책임지고 있던 혜산영림서營林署는 대표적 화전지대인 갑산군 보혜면 대평리의 펑펑물마을의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키려 했다. 대상 주민들은 모두 1,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애원하고 반항하며 저항하자 영림서 직원들은 경찰을 대동해 화전민가 몇 십 호를 불태워버리고 강제로 축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병로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기자들을 대동하고 현장에 직접 내려갔다.
주민들을 상대로 실지조사를 하는 한편, 경찰서·영림서 관계자들을 면담하고 추궁하는 등 활동을 펼친 후 진상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만나 이를 제시하며 경찰의 만행을 논박하고 피해를 당한 화전민의 구호대책을 요구했다. 이처럼 변호사라는 지위는 일제 경찰이나 영림서로도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으며, 나아가 조선총독부 당국에까지 항의할 수 있는 무기였던 것이다.
1930년대 김병로(『동아일보』 1932년 1월 1일자)
둘째, 변호사로서 일정한 수입이 있었다. 그 수입은 아마도 민사사건을 맡아 처리하고 받은 보수일 것이다. 변호사가 극히 드문 일제하에서 변호사의 법적 조력은 의뢰인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고, 수입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수입을 개인적 치부를 위해 축적하지 않았다. 형사사건, 특히 항일운동에 관여한 전국의 피고를 접견하고 위로하기 위해 출장비 및 사식 차입비 등으로 썼으며, 이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자처하기까지 했다. 또한 피고의 가족이나 출옥 인사들의 정착을 위해 많은 돈을 썼다. 예컨대 1931년 1월 신간회新幹會 간부로 활동하다가 신간회 대전지회大田支會 사건으로 서울에서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구금된 김항규金恒奎(1881~1948)를 면회하기도 했는데, 다음은 당시 두 사람의 대화다.
김병로: 몸을 무사하였소?
김항규: 네. 무사하였소.
김병로: 사식私食을 시켰으니 오늘부터 드시오.
김항규: 고맙소.
김병로: 재판 때에 변호는 내가 하겠소.
김항규: 고맙소.
김병로: 서울에 있는 집안사람과 사회 여러분도 다 잘 있소.
김항규: 안심하였소.
김항규는 1930년 11월경에 체포되어 서울의 가족과 떨어져 멀리 대전형무소에서 예심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 떨며 외로운 독방에서 고독과 싸울 때, 멀리 서울에서 김병로가 찾아왔다. 5분간의 짧은 면회였지만, 김병로는 그의 건강을 묻고, 서울의 집안 소식 등을 전하며 위로했다. 물론 무료변론도 약속했다.
그리고 김병로는 각종 사회운동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썼다. 특히 허헌과 함께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단체의 활동 비용은 모두 김병로와 허헌이 부담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독립운동 하는 분이나 신간회 관련자들이 김병로의 변호사사무실에 수시로 왕래하다 보면 식사를 하게 되는데, 사무실 근처 설렁탕집에 외상을 달아놓기 일쑤였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정리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었으며,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당시 돈으로 6,000원이라는 큰돈을 썼다고 한다.
셋째, 변호사는 공개법정을 통하여 정치투쟁을 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김병로가 변호사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공개법정을 통한 정치투쟁”이라고 인식한 자체가 매우 의미 있는 자세이다. 변호사로서 김병로는 법률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전환해 자신만의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공개법정을 통한 정치투쟁은 피고인, 즉 독립운동가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김병로 자신 역시 항일 독립투쟁의 일환으로 보았다.
김병로 흉상(현 대법원 소재 )
법정은 종종 독립운동의 사건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알리고, 그 대의를 옹호하는 합법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김병로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재판의 공개를 항상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과 달리 비공개 밀실재판으로 수많은 독립운동의 실체가 차단되었지만, 김병로는 변론투쟁을 통해 사건의 내용과 의미를 일제와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즉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교묘한 법적 논리로 포장하면서 정치투쟁을 해왔다. 법정에서 김병로의 열렬한 변론과 거침없는 논리는 방청객은 물론 전 조선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한편 김병로는 “동지를 규합하여 집단 활동을 추진한 바”가 있는데, 그 한 예가 바로 형사변호공동연구회이다. 김병로는 1923년 허헌 등 당시 명망 있는 변호사들과 함께 서울 종로 인사동 75번지에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조직했다. 그 취지는 형사사건의 경우 ‘한 사람에 대한 보수로 5명이 공동연구하여 변호한다’는 것으로 항일변호사의 공동전선을 도모했다. 항일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을 내걸 수 없었던 상황에서 사상사건 등이 모두 형사사건에 속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형사변호공동연구회라고 했다.
실제로는 무료 변론의 법정투쟁을 통해 조선인 항일민족운동의 무죄를 주장하고 형무소에 구금된 동지들에게 사식을 넣어주고 유족을 돌봐주는 등 실질적으로 독립운동 후원단체 같은 역할을 했다. 김병로는 이 단체를 항일변호사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 형사변호공동연구회의 창립과 활동은 항일변론을 조직화하고 장기적인 활동이 가능한 인적 유대와 물적 기반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
그의 회고를 다시 보면, 그가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첫째 일제의 박해에 신음하는 억울한 동포를 구할 수 있다는 것, 둘째 인권옹호와 사회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초심을 잃지 않고,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변론과 인권옹호, 사회정의를 위한 옹호자로서의 삶으로 일관했다. 김병로는 그러한 자세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풍요가 보장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과 동포를 위해 헌신하고자 항일변호사의 길을 선택했음을 명백히 입증했다.
김병로는 1888년 1월 27일(음력 1887년 12월 15일)에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중리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상희金相熙(1865~1894)와 모친 장흥고씨長興高氏의 1남 2녀 중 둘째다. 본관은 울산蔚山이고 호는 가인街人이며, 조선 전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의 16대손이다. 김병로의 증조부는 김건중金建中이고 조부는 김학수金學洙이다.
부친 김상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