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잘 키우고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생활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내 뜻대로 안 되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가 조용히 지나가는 평범한 일상이길 바랐다.
하지만 근심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불쑥 튀어나왔다. 늘 해결해야 할 일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가진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열심히 뛰어도 늘 제자리인 느낌, 그 허탈감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고통스러운 날들이 이어졌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침이면 눈 뜨는 게 싫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하루가 막막했다. 뭘 하며 또 하루를 살아 내야 할지. 삶이 그대로 지속되는 게 두려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햇살이 좋아 눈물이 났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두가 잘 사는데 나만 행복하지 않은 걸까.
어디선가 ‘마흔은 늦은 게 아니라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라는 글귀를 읽었다. 과연 좋은 나이가 맞을까, 뭔가를 하기도 전에 두려움이 먼저 생겼다. 그럴 용기도 없었고 체력은 언제나 바닥이었다.
그동안 별다른 계획 없이 눈 뜨면 똑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육아는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었고 단 하루도 쉽지 않았다. 모든 일상이 아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를 챙기는 일은 언제나 뒷전이었다.
하루 종일 좁고 작은 공간에 있다 보면 그 크기만큼이나 마음이 나약해진다. 늘 의욕 없이 누워 있고 싶은 날이 많았다. 기분이 좋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질 때가 있다. 온탕과 냉탕을 드나드는 것 같은 감정의 변화를 수없이 겪는다.
이게 정상적인 걸까,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집 근처 도서관을 찾았다. 낯선 도시에서, 만날 친구도 갈 곳도 없었다. 그때 서가에 있는 책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스치며 제목만 훑어 봐도 위안이 되는 책들이 많았다.
집에 와서 틈나는 대로 읽었던 육아 서적들 덕분에 버티는 힘도 길러졌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누구로 살아왔는가. 아이를 돌보는 게 내 생활의 전부는 아닌데,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냥 주어진 것을 하다 보니 여기에 있구나. 언제쯤 나는 나로 살 수 있을까.’
혼자 묻고 대답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답은 떠오르지 않고 마음만 허전했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먹어도 허기지는 생활이 아닌 조금은 채워지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아,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없겠구나.’
이제는 나에게 더욱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틈나는 대로 강좌들을 찾아 기웃거렸다. 몇 개월 하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데 집에 오면 할 시간이 없었다.
미뤄지고 실력이 늘지 않자 의욕도 사라졌다. 시도하다 그만두는 일이 반복되면서 취미마저도 만만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의지가 없었나, 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이 씁쓸했다.
‘어영부영하다가 똑같은 일상 속에 후회만 한 줄 더 늘어나겠지.’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스쳤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친 나를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일단 밖에 나가서 그냥 걸었다. 복잡한 동네를 벗어나 여기저기 구경하며 다녔다. 거리와 공원에는 활기가 넘쳤고 싱그러운 꽃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하늘도 예뻤고 공원에 스며드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이런 곳이 가까이 있었다니. 그동안 뭘 하느라 놓치고 살았을까 싶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다정한 연인들과 산책 나온 가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꽃을 피우며 걷는 사람들마다 즐거워 보였다. 뭐가 그토록 즐거운지.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저마다 사연은 다르고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저렇게 웃어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그렇게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잠깐 걷고 돌아오니 집을 나서기 전과는 달랐다. 답답하고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아무것도 한 건 없었다. 특별한 목적도 없었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햇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린 이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졌다. 그날 이후 우선 걷기부터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걸어온 날들의 기록이자 걷기를 통해 변화된 삶에 관한 기록이다. 걸으면서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걸으면 어떤 게 좋은지 느낀 것들을 담았다.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일들이 참 많다.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면 한걸음만 움직여 보자. 일단 나가서 잠시라도 걸어 보자.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질 것이다.
일상을 걷는 사람이 되어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루를 축복 속에서 보내고 싶다면,
아침에 일어나 걸어라.
_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의 일상은 웬만해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결심을 해도 매일은 똑같고 큰 변화가 없다. 지치고 지루한 일상에 변화를 주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우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본다. 그 작은 성취의 경험이 쌓이면 변화가 일어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보상을 해 준다.
하루를 평소와 다르게 시작해 보는 것도 좋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몸이 기억했고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새벽 기상에 적응이 되니 그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졌다.
창밖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다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그렇게 아침 시간이 자연스럽게 걷기로 연결되었다. 걷기로 하루를 시작하면 매일이 새롭다. 그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걸으면서 주로 전화를 했다. 평소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이들과 통화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이른 아침 시간이니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연락할 곳이 차츰 줄어들자 음악을 들었다. 가끔은 조용하게 주변 소리만 들으며 걷기도 한다. 오롯이 고요하게 떠오르는 생각에만 집중하며 걷게 된다. 상쾌하고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한다.
주변 풍경들을 구경하며 걷는 게 가장 좋다. 걸으면서 보게 되는 아침 풍경은 새롭다. 시장 상인들, 청소하는 분들, 일터로 향하는 직장인들까지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보면 뭉클하다. 가족을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터로 나와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사람들. 그들의 하루가 고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때론 라디오를 듣는다. 아침에는 진행자들의 목소리가 경쾌하고 기운이 넘친다. 흘러간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옛날 생각에 감성이 촉촉해지기도 한다. 특히 학창 시절에 듣던 노래들이 나오면 마냥 흥겹다. 퀴즈도 풀어 보고 감동 사연에 훌쩍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는 혼자 걷는 게 아니다. 주변은 고요하지만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평일에는 아침 시간이 등교 준비로 바쁘다. 아침 일찍 나가서 걷기도 하지만, 바쁜 날에는 주로 오후나 저녁에 걷는다.
일요일에는 여유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아침에 걷는다. 어둠이 걷히고 창밖이 서서히 밝아지면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준비를 한다. 아침의 감격과 설렘을 가득 안고 집을 나선다.
조금만 걸으면 어느새 환해진다. 산책로 옆으로 난 밭둑길 위에 멈춰 서서 눈을 감고 잠시 기도를 한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분명한 소명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침 일찍 걸으면
뭐가 좋을까
아침에 맑은 새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신선한 공기와 함께 상쾌함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구시가지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걷는다.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지난 한주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바빠서 놓치고 있던 것들이 걷는 동안 생각나기도 한다. 해가 떠오를 즈음에 집을 나섰는데, 걷다가 일출을 보기도 한다.
같은 길을 수년째 걸어도 매번 같지 않다는 게 신기하다.
집 주변에 있는 자연에 이렇게도 민감해질 수 있을까. 조금만 바뀌어도 변화를 금세 알아차린다. 여기에 이런 게 있었나, 잠시 서서 눈길을 주기도 한다. 길 어디쯤에 뭐가 있는지,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주말 아침이라고 다를 건 없다. 매일 주어지는 시간은 똑같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침 걷기를 하고 적당한 휴식을 취하면 된다. 몸과 마음을 길들이지 않으면 목표는 금방 멀어진다. 마음을 항상 다잡고 살아야 한다.
아침 일찍 걸으면 뭐가 좋을까. 하루를 걷기로 시작하면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우선 삶의 태도가 바뀐다. 아침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많이 생긴다. 공기의 신선도가 달라 다른 시간에 비해 상쾌함을 더 느낄 수 있다. 동네를 시작으로 숲길과 강변을 걷고 있으면 마음까지 평온해진다.
자연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등 세상의 온갖 소리들을 듣는다. 자연의 소리에는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쌓인 피로들이 사라지는 것 같다. 그 비워진 공간이 긍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다.
일찍 걷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하루의 중요한 일을 끝냈을 때의 든든함이 느껴진다. 언제 나가서 걸을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무슨 일을 하건 집중이 더 잘 된다. 무뎌진 감각과 생각을 깨우고 집에 돌아오면 활기가 넘친다. 그 기운으로 하루를 더욱 풍요롭게 보낼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났고 걸었기 때문에 만나게 된 풍경과 좋은 생각들 덕분에 하루가 즐겁다. 아침 걷기가 일과에 미치는 영향을 온몸으로 경험한다.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
_영국 속담
일상을 살아 내는 힘은 체력에서 나온다. 사실 체력이 전부다. 좁은 곳을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삶의 질은 달라진다.
그런데 종일 집안을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금방 힘이 빠진다. 예전에는 잘 돌아다녔는데 이 정도에 지치다니. 이렇게 저질 체력이었나 싶다.
나이가 들어서인 것 같진 않은데, 자주 피로를 느꼈다. 시간에 비해 표시도 잘 안 나는 집안일, 간단한 일들을 미루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들과 잠시만 놀아도 힘이 없어 자주 헉헉거렸다. 체력이 전부라는 걸 실감했다.
맛을 느끼기보다 생존을 위해 이것저것 먹었다. 먹는 양은 늘어나는데 그만큼 운동은 안 하게 된다. 필요성을 자각하지만 마음처럼 잘 안 될 때가 많다. 운동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게 참 어렵다. 우선순위에 두지 않으면 자연스레 밀려나는 게 운동이다.
엄마의 하루는 더욱 그렇다. 아이들까지 챙겨야 하니 매순간 바쁘다. 정신을 놓고 있으면 일주일이 금방 흘러간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운동이라는 걸 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무슨 운동을 할지 고민하다 동네 주민 센터에 있는 강좌들을 기웃거렸다. 저렴한 가격으로 들을 수 있는 에어로빅을 신청해 한 달을 다녀 봤다.
몸치는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질 않아 수업이 힘들었다. 항상 맨 뒤에 서서 따라 하기 바빴다. 앞자리로 옮겨 봐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수업을 끝내고 나면 한숨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다들 오래 다녔는지 편해 보였고 무리 지어 차를 마시거나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운동하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게 즐거움인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실력은 늘지 않고 스트레스는 더해졌다. 그만두고 바로 옆 반 헬스장에 다시 등록을 했다. 그곳 역시 코치가 있긴 해도 시간이 정해져 있어 맞추는 게 만만치 않았다. 개인 트레이닝을 받으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다니다가 등록을 포기했다.
주 3회 걷기에서
매일 걷기로
뭔가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어디선가 ‘주 3회, 하루 30분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문구를 봤다. 하루 30분 걷기라니, 다른 운동은 못해도 걷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걷는 게 힘들 수도 있으니 일주일에 3일 정도 걸어 보기로 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거리와 공원을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 마음이 편해졌다. 걷는 일이 즐거워 계속했다.
집 근처에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어 산책 같은 등산을 자주 갔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에 40분 정도만 걸으면 정상에 도착하니 딱 좋았다. 중간에 계곡도 있고 평지 길을 걷는 코스가 무난했다. 복잡한 동네를 벗어나 산길을 걷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트에 들르면 장을 보는 게 훨씬 수월했다. 운동의 연속인 것 같아 더 잘 걸어졌고 집에 와서도 상태가 유지되었다. 무료한 일상에 조금씩 활력이 생겼다.
주 3회 운동의 힘을 실감했다. 가끔은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걷기도 했다. 혼자 다닐 때는 빠르게 걷느라고 정신이 없다.
아이들은 역시 다르다. 심심할 것 같은 산에서도 보이는 모든 게 놀이였다. 유일하게 필요한 건 엄마의 인내심뿐이다.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다람쥐를 보느라 걸음을 멈췄고 물소리를 듣느라 한참을 서 있었다. 막대기를 들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밤송이를 까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도토리를 누가 더 많이 줍나 내기를 하며 꽃 구경, 단풍 구경까지 즐긴다. 더 이상 할 게 없어지면 ‘끝말잇기’를 하며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수첩과 달력에 표시해 뒀다. 운동한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걸은 곳을 간단하게 적었다. 계속 쓰면서 체크하다 보니 ‘주 3회 걷기’에 익숙해졌다. 기본적으로 ‘월, 수, 금 세 번 걷기’라고 정해 뒀다. 때론 요일을 바꿔 가면서 걷기도 했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세 번이라고 한정하고 이번 주에는 언제 걸었나를 확인하는 게 번거로웠다. 하루가 밀리면 계속 체크하느라 바빠졌다.
또 주말에는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점점 횟수를 채우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기면 더욱 힘들어졌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어렵다. 눈을 뜨면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진다. 그중 나를 위한 30분의 시간을 내기도 힘들다니.
살기 위해 먹는 일을 하루도 거를 수 없다. 하지만 운동은 안 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러니 바쁜 일에 밀려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러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구나 싶었다.
즐겁게 운동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도하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일주일에 세 번이라는 카운팅 자체가 귀찮았다. 그래서 매일 걷기로 결심했다. 그러면 조금 수월하게 관리가 될 것 같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걷기’로 목표를 다시 수정했다. ‘매일 조금씩 즐겁게 걷는 것’,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체크하는 게 이전보다 훨씬 편했다. 오늘 하루 걸었는지, 그것만 신경 쓰면 됐다.
걷기 체크 표에 동그라미가 늘어 가자 재미도 더해졌다. 하루의 미션을 달성하는 기분을 느끼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덕분에 걸음에 힘이 생겨 계속해 나가게 된다.
아무 목적 없이 산책하러 나서면,
어찌된 영문인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한다.
_다니구치 지로
3월의 첫 주가 지나자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분주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다소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봄 햇살이 너무 좋아 그냥 있기에 아까운 날이었다. 문득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좋은 햇살을 느끼며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의욕이 충만해져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본다. 가장 넘기 힘든 게 집 안에 있는 문턱이라고 했던가. 늘 그렇듯 집에서 나서는 일부터 쉽지가 않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어디든 가는데 그 좁은 공간에서 한 뼘 움직이는 일이 가장 힘들다.
걷기를 실천하기로 한 날 아침에 한창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언제 나갈까, 바뀌는 숫자를 의식하며 시계만 계속 쳐다본다.
11시에 운동하기로, 전날 밤에 대충 시간을 정해 두긴 했다. 10시 50분이 되자 집중이 안 됐다. 손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지만 신경이 온통 시계에 가 있다. ‘나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하고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길 반복한다. 10시 55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창 집중하고 있던 것들을 접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렇게 앉아 있느니 일어서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몰두하고 있다가 중간에 끊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겠다던 나와의 약속이 자꾸 마음을 괴롭혔다. ‘그래, 일단 나가 보기나 하자’ 싶은 생각에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집을 나서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잘 아는 길도 없고 해서 가끔 갔던 집 근처 등산로가 생각났다. 그 길을 따라 쭉 걸어 볼까. 등산로 입구에 서고 보니 여러 갈래 길에서 고민이 된다. 모처럼 나왔으니 가 보지 않은 길로 가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택한 코스는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숨을 고르며 오르는 동안 평소에 운동을 얼마나 안 했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오르막과 경사진 길이 힘들긴 해도 땀도 나고 흥미로웠다. 험한 길 덕분에 걷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집에서 하고 있던 작업이 잘 안 되어서 답답했었다. 하지만 곧 뭘 하다가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걷기에 빠져 들었다. 쉽지 않은 길 덕분에 첫날 빡센 훈련을 했고 돌아오는 길에 웃음이 날 정도로 즐거웠다. ‘운동을 위해 편한 길로만 다니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매일 걷기로 결심한 지 둘째 날 아침이 되었다. 오전에 할 일도 많고 챙겨야 할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걸 언제 다 하나 생각하니 갑자기 조급해졌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어느새 시계가 11시를 가리킨다. 11시의 마법에 걸린 듯 숫자를 보니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또다시 갈등이 시작됐다.
‘어제도 이러다가 나갔고 걸어서 좋았잖아. 오늘도 나가 보자.’
혼자 중얼거리다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주섬주섬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집을 나선다.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어제 갔던 산길을 떠올려 보니 완만한 평지길이 걷고 싶어졌다.
잠깐의 걷기로
이토록 채워지다니
집 주변을 한번 돌아보기로 한다. 기억을 되살려 보니 집 근처에 의외로 명소가 많았다. 작은 터널까지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재 보니 딱 10분이 걸렸다. 매번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길인데 두 발로 걷는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주변에 보이는 것들이 마냥 신기해 걷다가 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여기 이런 곳이 있다니, 길에서 본 작은 것에도 눈길이 갔다.
걷다 보니 어느덧 백운대라는 고분에 이르렀다. 안내 표지판을 자세히 읽어 본다. 6세기의 토기들이 출토된 곳이다. 그 옛날 역사의 현장을 이렇게 산책하고 있다니, 마치 답사를 온 사람마냥 여기저기 카메라를 눌러 댔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과 파란 하늘이 너무 예뻤다. 곳곳에 벤치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냥 지나친다. 햇살이 너무 좋았고 좀 더 부지런히 걷고 싶어졌다.
고분을 빠져 나가는 길에 지름길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어디선가 개들이 심하게 짖어 댔다. 옆으로 난 텃밭을 따라 작은 집이 보였는데, 거기서 들리는 소리였다. 도망치듯 벗어나느라 5분을 허비했다.
고분을 지나 높은 지대를 내려오니 원룸과 예쁜 전원주택 들이 즐비했다. 남향의 볕이 잘 드는 곳에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로 70년대를 연상시키는 허름한 담벼락과 원색의 철문을 간직한 집도 보였다. 다 쓰러져 가는 지붕과 철 대문, 그 앞에 폐지 가득 실린 리어카까지 세워져 있었다. 아직도 이런 집들이 있다니.
반면 세련된 건물에 정원을 잘 가꿔 놓아 지나는 이의 눈길을 끄는 예쁜 집들도 많았다. 집에서 불과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이런 데가 있다는 게 그저 놀라웠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에 양쪽으로 빼곡하게 늘어선 집들과 초록 파랑 대문들을 보니 어릴 적이 떠올랐다. 학교 갔다 와서 할 일이 없으면 골목을 구경하며 다녔다. 그곳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호기심 가득했고 온 동네를 걸어 다니며 둘러보는 게 흥미로웠다. 골목길을 지나며 옛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비로소 잊고 있던 나를 만났다. 몸은 현재를 살고 있는데 시간을 거슬러 어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언제 나이를 먹었을까 생각하니 뭉클해진다.
명소에 잠시 들르니 문이나 장식에 온통 거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얼마 전 한자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거북 ‘구’ 자가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길에 세워진 가로등 밑동 무늬가 온통 거북이 모양인 것도 보였다. 이 동네가 거북이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 곳이라니. 동 이름에 ‘구’ 자가 들어간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눈으로 보니 확연하게 새겨졌다. 스스로 뭔가를 발견한 기쁨, 그 재미가 쏠쏠했다. 아파트와 상가들을 따라 걸으며 방앗간, 분식집 등 좋은 가게들을 발견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동네에 좋은 곳들이 참 많구나 싶었다. 차를 타고 가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래 살아도 동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구경하고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져 걸으니 내가 사는 동네가 다르게 보였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는 게 이런 걸까. 평소 가 보지 못한 길을 걸으며 색다른 것을 탐색하고 발견하는 기쁨, 걸으면서 내면 가득 채워지는 충만한 경험을 했다.
걷기를 하고 온 건지 유적지 답사를 하고 온 건지 잠시 헷갈렸다. ‘살기 좋은 도시’라고 늘 외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만의 명소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역시 걷기의 힘은 위대하다. 돈도 안 들이고 잠깐의 걷기로 이토록 채워지다니. 햇볕 좋은 날 아이들과 이곳까지 걸어오기로 다짐해 본다. 소풍 나온 어린 아이마냥 주변 모습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일상에서 그런 설렘과 즐거움을 자주 느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걷던 그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마음이 흐린 날에 꺼내 볼 수 있도록.
나는 천천히 걷지만
절대로 뒷걸음질하진 않는다.
_에이브러햄 링컨
매일 걷기로 결심한 지 3일째가 되니 마음이 무겁다. 몸은 더 무겁게 느껴졌다. 작심삼일만 넘겨 보고 싶은데, 마음만큼 발걸음이 쉽게 안 떨어진다. 집안일을 하다가 자꾸 시계만 힐끔 보게 된다. 어떻게든 나가야 하는데 문을 열고 나서는 게 생각만큼 잘 안 된다.
‘지금 나갈까, 나중에 시간 봐서 나갈까’ 하고 또다시 갈등이 시작된다. 고민을 시작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집중해서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영부영하다가 나와의 약속이 한참 밀릴 것 같았다.
집안은 엉망이지만 모든 걸 그대로 멈추고 일어선다.
제법 편한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으니 역시 나오기 잘했구나 싶다. 그런데 걸은 지 5분 정도 지나니 갑자기 걸음에 힘이 빠졌다. 그동안 운동을 너무 안 해서 체력이 떨어진 건가, 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힘든 코스를 걸었을 땐 편한 길이 생각났다. 하지만 지금은 편한 길마저도 쉽지가 않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겨우 정상까지 걸어갔다. 벤치가 보이자 바로 누웠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흘러가는 구름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대학 시절 책을 베개 삼아 벤치에 눕곤 했는데, 이렇게 하늘을 본 게 언제였던가 싶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구름처럼 흘러갔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동안 나를 돌보지도 않고 흘러가는 대로 살았구나 싶었다. 이제는 나를 좀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몸을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시 달콤한 휴식 시간을 가지고 상쾌해진 마음으로 가볍게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