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히로시마 레이코(廣島玲子)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물 요정의 숲』으로 제4회 주니어 판타지 소설 대상을 수상했고,
『여우 영혼의 봉인』으로 아동문학 판타지 대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세계 일주 기상천외 미식』,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시리즈, 「귀신의 집」 시리즈 등이 있다.
그림 사다케 미호(佐竹三保)
SF, 판타지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시리즈,
『아서왕 이야기』, 『착한 괴물 쿠마』, 『로완과 마법 지도』, 『야마타이국 전기』 등이 있다.
옮김 이소담
동국대학교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가 일본어의 매력에 빠졌다. 읽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책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옮기는 것이 꿈이고 목표이다. 옮긴 책으로 『양과 강철의 숲』, 『하루 100엔 보관가게』, 『당신의 마음을 정리해 드립니다』,
『오늘의 인생』, 『같이 걸어도 나 혼자』,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이사부로 양복점』, 『쌍둥이』, 『십 년 가게 』시리즈등이 있다.
첫 번째 발자국은, 들판에서 막 피어나는 꽃의 색.
두 번째 발자국은, 바다에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색.
세 번째 발자국은, 산을 수놓는 나뭇잎의 색.
네 번째 발자국은, 황야가 불러들이는 바람의 색.
다섯 번째 발자국은, 숲을 채우는 이끼의 색.
여섯 번째 발자국은, 낮에 내리쬐는 해님의 색.
일곱 번째 발자국은, 밤을 지키는 달님의 색.
무지갯빛 발자국은 색깔 가게로 가는 이정표.
당신에게 색을 찾아 드릴게요.
사나는 자기 방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썰렁하고 차가워 보이는 방이다.
꼭 필요한 가구만 두었는데, 온통 삐쭉삐쭉 구불구불 괴상한 의자와 테이블뿐이다. 금속으로 만든 가구여서 더 차가워 보인다.
바닥에 카펫이나 매트도 없고, 벽지는 쌀쌀맞은 회색이어서 왠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따스함이라곤 전혀 없는 방이다. 이런 방에서 십 년이나 살아왔다니, 사나는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금속 가구나 회색 벽지는 사나의 취향이 아니다.
사나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좋아한다. 물방울무늬 커튼과 폭신폭신한 카펫을 좋아한다. 커다란 책장에 좋아하는 책을 가득 꽂고, 테이블 위에 꽃을 장식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 생활을 지금까지 참아왔다. 왜냐하면, 연인인 가로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가로와는 미술 대학에서 만났다. 사나는 가로의 자신감 넘치고 예술가다운 면에 끌려서 좋아하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는,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가로와 함께하는 생활은 몹시 힘들었다.
가로는 제멋대로여서 조금만 성에 안 차는 일이 있으면 유치하게 삐쳤다. 변덕스럽기도 해서, 훌쩍 집을 나가 며칠이나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자주 있었다.
가로가 집을 나간 동안, 사나는 불안에 떨었다.
‘어쩌면 좋아, 내가 나빴어. 돌아와 줄까? 돌아와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가로가 나를 좋아하도록 노력할 테야.’
사나는 연인의 눈치만 살폈다.
어떻게든 가로를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벽지 색을 바꾸고 가로가 좋아하는 금속 가구를 갖췄다. 요리는 가로가 좋아하는 음식만 만들었다.
사나는 그렇게 좋아했던 그림도 차츰 그리지 않았다.
“네 그림은 유치해. 폭발적인 힘이 담기지 않았어. 취미로 하는 건 괜찮지만, 예술가를 꿈꾼다면 포기하는 게 좋겠어.”
가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슈퍼마켓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살고 있다.
가로의 그림 도구를 살 때도 사나의 돈을 썼다.
“예술가는 작품에 몰두해야 돼. 시시한 일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
이렇게 말하는 가로를 위해, 사나는 값비싼 그림 도구와 캔버스를 부지런히 사 줘야 했다. 힘들었지만, 가로가 “고마워, 사나. 날 이해해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라고 말해 주면 만족했다.
언젠가부터 가로가 사나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날이 점점 늘었다. 사나가 걱정하면 할수록, 가로는 쌀쌀맞고 무심해졌다.
사나는 가로의 기분에 휘둘리느라 자꾸만 늙어서 머리카락까지 하얘졌다.
게다가 오늘, 가로는 편지 한 통을 사나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아주 차가운 말이 적혔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 두 번 다시 사나와는 만나기 싫고 만날 생각도 없다. 그 아파트에 있는 물건은 전부 버려도 상관없다.
따뜻한 감정이라곤 한 조각도 담기지 않은 문장이었다.
‘지금까지 고마웠어.’라든가 ‘즐거웠어.’ 같은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무엇보다 ‘앞으로는 내게 달라붙지 말아 줬으면 해.’라는 말에 사나의 심장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렇게 차가운 말을 하다니. 그런가, 가로는 정말로 내가 싫어진 거구나. 하지만 나는 지금껏 가로만을 위해서 살았어. 가로가 없으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갑자기 닥친 차가운 현실에 몸도 마음도 텅 비어 버린 기분이었다. 비틀비틀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벽에 걸어 둔 그림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가로가 그린 사나의 초상화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피부와 머리카락을 진녹색으로 칠했고, 눈에는 분홍색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차가운 회색 벽에 걸린 탓인지 소름 끼칠 정도로 어둡고 쓸쓸해 보였다.
그래도 사나는 그 그림을 계속 벽에 걸어 두었다. 왜냐하면 가로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특별히 너를 그렸어.”
아, 그 당시 가로는 꿀처럼 달콤한 말을 사나에게 끝없이 속삭여 줬는데.
문득 사나는 생각했다.
“이 그림을…… 가로에게 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