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찬란한 어둠 - 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 첫 번째 에세이

이토록 찬란한 어둠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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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본문 중 뮤지컬 작품은 국내에서 사용되는 제목으로 《 》 처리하여 표기하였고, 노래는 원문 제목을 〈 〉으로 표기하였다. 영화, TV 방송 프로그램도 〈 〉로, 도서 및 잡지 제목은 『 』으로 표기하였다.

• 본문에 사용된 공연 사진은 각 공연 제작사로부터 제공받았으며 그 외의 사진은 THE PIT와 저자에게서 받은 사진이다.

incover

Overture_ 이야기의 막을 열며

Overture

 

 

이야기의 막을 열며

 

 

 

 

 

 

지금쯤이면 꺼내놓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보았다. 음악감독으로서 처음 지휘봉을 잡았던 날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50편이 넘는 작품을 만났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작품들을 만나고 있다. 그 사이 종합 예술의 꽃인 뮤지컬은 대중화되고 산업화되어 왔으나 변하지 않는 것은 이 무대를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화려한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지 무대 위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 얼마나 많은 스태프들이 뛰고 있는지를,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자리에서도 얼마나 많은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지를, 모두가 황홀해하는 찬란한 무대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현장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이 무대를 꿈꾸고 갈망하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한 해 한 해 선배라는 이름의 무게가 더해가는 나이도 지금 시점이라고 등 떠밀기도 했으리라.

이 책에는 지금까지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걸어온 여정의 일부와 그 과정에서 만난 작품들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뮤지컬 업계에서 부끄럽지 않은 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 고민하는 지점들을 담았다. 나의 이야기가 읽는 이들에게 늘 아름다운 ‘무대 위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무대 밖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모두의 진심과 열정으로 만들어지는 뮤지컬에 한층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때에도 굳건하게 버티며 좋은 공연들을 무대에 올릴 수 있도록 애쓰는 여러 제작사들과 완벽한 공연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배우들, 무대 밖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땀 흘리는 모든 스태프에게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전한다. 잊지 않고 극장을 찾아와 힘을 더해주는 관객에게도 깊은 감사를 보낸다. 무엇보다 언제나 함께해주는 THE PIT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앞으로도 모두가 어둠 속에서 찬란한 무대를, 내일을 함께 꿈꾸고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이 글을 함께 정리해준 이재영 작가와 김수진 편집자의 노고에도 감사드린다.

 

2021년 12월, 김문정

Opening Number ◆ 나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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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꿈을 꾸다

 

 

 

 

 

 

음악을 하면서 알게 된 선배로부터 뮤지컬 《명성황후》 오케스트라의 건반 연주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7년이었고 첫째 아이의 백일이 좀 지났을 때였다. 아이가 아직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겠다고 했다. 6년 전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참여했던 뮤지컬 《코러스 라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대중음악 위주의 건반 세션(사전적 의미보다 록밴드나 스쿨밴드 연주자를 칭할 때 쓰는 말)으로 활동할 때였는데, 뮤지컬은 그 작품이 처음이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공연하는 일주일 내내 무척 즐거웠다. 국내에 뮤지컬이 보편화되기 전이었고 《코러스 라인》 같은 큰 작품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다만 오케스트라에 연주자로 참여했던 연주자들이 모두 학생이었고 정식 음악감독이 없었던 터라 준비가 완벽하게 이뤄지진 않았다. 악기 편성도 허술했는데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친구들도 있어서 브라스brass(금관악기) 연주자가 건반 악기로, 스트링string instrument(현악기)으로 옮겨 다니는 통에 뒤죽박죽이었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긴 스토리를 따라 음악을 연주하는 일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뮤지컬 오케스트라 연주에 참여하는 것은 《명성황후》가 처음이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연습실에 도착해 연습을 시작하는데 꿈인가 싶을 만큼 그곳에 앉아 있는 내가 낯설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미디MIDI 작업을 했으므로 작은 모니터 안에서 기계로 각 악기의 소리를 만들어냈는데 실제로 그 악기들이 눈앞에 놓여 있다는 게 몹시 신기했다. 미디로 만들어낸 소리도 좋았지만 현장에서 진짜 악기가 뿜어내는 소리의 매력은 생각 이상이었다. 각 악기마다 전담 연주자가 있고 스트링부터 브라스에 퍼커션Percussion(타악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소리를 낸다는 게 무척 좋았다. 다양한 소리 사이에서 나도 내가 맡은 건반을 열심히 잘 연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정식 뮤지컬 오케스트라 세션은 처음이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늘 만지던 건반이었고 음악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악보대로’ 별일 없이 잘 따라가고 있을 때 음악감독이 건반의 박자가 빠르다고 지적했다. 순간 당황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래 봬도 내가 대중음악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톱가수들의 무대에서 연주하던 사람인데 내 박자가 빠르다고? 자존심이 확 상했지만 일단 음악감독의 설명을 들었다. 문제는 엇박자였다. 그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대중음악 밴드와 오케스트라에서 하는 연주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때는 ‘시간차’를 확실히 염두에 둬야 했다. 전자 악기와 클래식 현악기의 차이였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과 같은 정통 클래식 현악기는 소리를 낼 때 활이 현을 긋는 찰나의 시간이 필요했다. 음악감독은 그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지휘하고 있는데 감독의 지휘봉보다 악보를 보고 있던 나는 그걸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케스트라에서 건반 연주자는 그 찰나의 시간차를 염두에 두고 감독의 지휘를 보며 박자를 맞춰 연주해야 했다.

문제의 원인을 금방 이해하고 바로잡았지만 여전히 자존심은 상했다. 이대로 그냥 ‘몰랐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지지 않았다. 평소에는 한없이 순한 것 같아도 목표가 생기면 돌진해버리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첫 연습 이후 이를 악물고 며칠에 걸쳐 《명성황후》의 54곡 넘버number(뮤지컬에서 사용되는 노래나 음악)를 모두 외워버렸고, 악보를 보는 대신 음악감독의 지휘봉만 보며 연주했다. 그 같은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었다. 그 당시 《명성황후》 오케스트라에는 건반이 메인과 서브, 두 대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중요한 연주 대부분을 내가 맡을 정도가 됐다.

《명성황후》 본 공연을 앞두고 어둡고 좁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들어섰던 첫 순간을 기억한다. 본 무대에서 한참 아래의 깊숙한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 서로 방해받지 않을, 딱 그만큼만 떨어져 앉을 수 있는 정도의 공간. 작은 상자 속 같았다고 해야 할까? 대중음악 공연 무대에서 세션의 자리는 무대 위, 유일하게 조명을 받는 뮤지션을 향해 연주하는 자리였다. 조명 밖에서 연주하는 대신 세션의 연주 위에서 그 별이 어떻게 노래하고 어떤 몸짓을 하는지 볼 수 있었고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뮤지컬 오케스트라의 피트는 달랐다. 무대와 분리된 피트라는 공간은 연주자들만의 우주였다. 연주자들이 그 우주의 별이었고, 서로의 반짝임이 어우러지며 무대 위와는 별개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만들어냈다. 그 공간이 정말 좋았다. 그곳에 내 운명이 있으리라는 걸 어슴푸레 짐작했다. 50여 회의 공연이 막바지를 향해 갈수록 내 삶을 화려한 무대 위가 아닌 좁고 어두운 이 우주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대 위를 ‘보는 것’만큼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이 흐를 때 무대 위의 배우들은 어떻게 노래하고 어떤 춤을 추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장면이 바뀔 때마다 세트는 어떻게 달라지고 조명은 누구를 비추는지 보고 싶고 알고 싶었다. 깊숙한 피트 안에서 건반 연주자로 공연을 하면 할수록 무대 위에 대한 호기심, 무대 위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 무대 위를 알면 공연에 더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트 안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리는 딱 한 곳, 지휘봉을 잡고 서는 음악감독의 자리였다.

《명성황후》 오케스트라의 건반 연주자로 공연을 마칠 때쯤 진심으로 뮤지컬 음악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직책’이나 ‘지위’가 아니라 단지 뮤지컬이라는 세계에 좀 더 깊이 들어가고 싶었다. 가는 지휘봉으로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 음악이라는 집을 짓고 싶다고 생각했다. 연주자와 배우, 스태프와 관객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을.

그러나 당시에도 뮤지컬 음악감독을 양성하는 전문기관이나 수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고 어떻게 해야 뮤지컬 음악감독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앞의 음악감독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그가 뮤지컬 음악감독으로서 공연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작품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 중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음악감독의 역할인지 현장에 갈 때마다 눈여겨봤다. 지휘를 공부하고 가창과 작곡도 계속 공부했다. 극을 이해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했다. 전문적으로 뮤지컬 음악감독 일을 배울 수 있는 기관은 찾을 수 없었지만 뮤지컬 음악감독이 갖춰야 할 소양을 어떤 방식으로든 쌓기로 했다.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도전하자, 그게 나의 결심이자 출발이었다.

그 같은 결심이 확고히 섰을 때는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시기였다. 갓난아기 엄마에게 꿈은 사치 같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갓 잉태된 꿈을 잘 키우기 위해서 갓 태어난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결국 친정 엄마와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1년만 시간을 줘. 1년이면 돼. 최선을 다해보고 싶어.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

두 사람에게 일주일에 두 번 외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틀만이라도 내게는 꼭 필요했다. 기한은 말 그대로 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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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시작

 

 

 

 

 

 

가정을 잘 하지 않지만 생각해본다. 만약 그날 엄마를 따라 그 집에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내가 어린 시절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직장 동료들과 정기적인 가족 동반 모임을 가지시곤 했다. 모임은 한집에서 주최하는 게 아니라 각 집이 돌아가며 서로를 초대하는 식이었다. 그날은 아버지의 상사 댁에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는데, 그 사람은 아버지보다 직급이 높아서 형편이 조금 더 나았던 걸까?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였지만 처음 가본 그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를 가정집에서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항상 유치원이나 교회에 가야 볼 수 있던, 거대한 덩치로 곱고 신비로운 소리를 내던, 그러나 나와는 무관한 아름다운 악기. 그런 피아노가 내 눈앞에 내 손이 닿는 곳에 등장한 것이다.

그 집에 모인 어른들에게 인사한 뒤, 나처럼 부모님을 따라온 또래 아이들과 쭈뼛쭈뼛 몇 마디를 나누고는 슬그머니 피아노 앞에 다가섰다. 너비는 두 팔을 펼친 것보다도 길고 키는 나보다도 더 컸다. 슬쩍 건반 뚜껑을 들어 올리니 그 무게가 고스란히 작은 손으로 전해져왔다. 뚜껑을 열어젖히고 곱게 덮인 붉은색 천을 걷어 내리자 가지런히 열 맞춰 늘어선 희고 검은 건반이 드러났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손가락 하나에 힘을 실어 건반 하나를 조심스럽게 지그시 눌렀다.

띵—.

소리, 진짜 피아노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흥분해서 그곳이 남의 집, 낯선 곳이라는 것도, 그 피아노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이것저것 함부로 만지지 말라던 엄마의 당부는 피아노 소리에 묻혀 잊혔다. 무아지경으로 나만의 연주에 빠져 있을 때 그 집 안주인인 아주머니가 다가와 나와 아이들을 피아노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이제 그만.”

그 말과 함께 피아노 뚜껑이 탁하고 닫혔다.

그 이후의 상황은 흐릿하지만 분명히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금세 다른 놀이를 찾았을 것이고 거기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살면서 몇 번이고 그날을 복기했다고 했다. 안주인이 우리를 피아노에서 떼어내던 그 순간 많이 무안하고 속상했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좋아하던 우리가 눈에 너무 밟혔다면서.

놀랍게도 그 모임이 있은 다음 날, 우리 집은 피아노가 있는 집이 됐다. 당시로서는 거금을 들여야 했음에도 엄마는 두 번도 고민하지 않고 덜컥 피아노를 사들였다.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 나중을 위해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적금을 깬 것이다. 엄마의 결단으로 나와 동생들은 마음껏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 피아노는 그 동네에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 하던 아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자식 키우는 마음이 다 같을 거라는 엄마의 배려였다.

피아노는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좋은 장난감이었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으므로 억지로 연습할 필요도 없었고 원대한 목표 같은 것도 없었다. 그 희고 검은 건반은 어린 내게 단순한 즐거움이자 기쁨, 위로가 되었다. 큰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동요 500곡집』 속 노래들이 얼마나 많은 추억을 만들어줬는지 모른다. 생일이면 친구들을 초대해 그동안 연습해뒀던 곡들로 나만의 콘서트를 열기도 했는데, 주최한 나도 관객이 된 친구들도 제법 진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음악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더 즐겁다는 걸 알았다. 훗날 학교에서 고적대 활동도 하고 합창단 활동도 했던 것은 아마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초·중·고등학교 졸업식마다 교가 지휘를 도맡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휘봉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십 대 시절에는 거창하게 음악으로 먹고산다거나 세상이 알아주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바람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삶 속에 음악이 머무는, 그런 삶을 꿈꿨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지휘를 했고, 동네 친구들과 모여 동아리처럼 밴드 활동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 정도로 만족했고 부모님에게 선뜻 음악을 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부모님은 늘 “우리 집에 (대입) 재수란 없다. 네가 가장 큰 언니이니 본을 보여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으니까. 그 시절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레퍼토리였으므로 나 역시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그 당시 동네 친구들과 결성해서 활동했던 밴드 이름은 ‘푸른 돛’이었는데, 흠모하던 뮤지션 하덕규와 함춘호가 만든 듀오 ‘시인과 촌장’ 2집의 이름이자 수록곡의 제목을 따서 지은 것이었다. 희망을 가져보자는 〈푸른 돛〉의 가사를 흥얼거리는, 아직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고등학생의 마음으로 이름 붙였던 것 같다. 멤버들과 나는 자주 모여 ‘시인과 촌장’ ‘들국화’ ‘한영애’ ‘어떤 날’ ‘김현식’과 같은 뮤지션의 노래를 카피해 연주했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변변한 악보도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각 앨범의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각자 맡은 파트의 멜로디를 따서 종이에 옮겼고, 개별적으로 연습하고 함께 모여서 합주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가시나무〉 〈푸른 돛〉 〈누구 없소〉 〈비처럼 음악처럼〉 〈매일 그대와〉 〈풍경〉 〈행진〉 등, 당대 유명한 뮤지션들이 만들어낸 음악 위에서 신나게 항해했던, 넘실대는 푸른 바다처럼 거침없고 발랄했던 젊은 날이었다.

그리고 열여덟의 겨울, 대학입시를 앞두고 이전처럼 밴드 활동을 하기는 어려웠던 시기에 멤버 중 한 명이었던 희열이(맞다. 그 유희열이다)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문정아, 작곡 공부하지 않을래?”

그 느닷없고 짧은 제안 뒤에 희열이는 선언하듯 말했다.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음악대학에 진학하겠다고. 예상하지 못한 친구의 결심은 모르는 척 눌러놓았던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밴드 활동은 학업 중 잠시 숨 돌리는 취미 활동일 뿐이라고 치부했었는데,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나 역시 열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음악을 업으로 삼기를, 그것이 나의 전부가 되기를.

푸른 돛은 바람을 타고
어디로 갈까?

 

 

 

 

 

 

내 인생이 청춘 영화였다면 순조롭게 희열이와 함께 음악대학에 합격하는 아름다운 엔딩이었을까? 그때 나는 끝내 음악을 선택하지 못했다. 음악과 관련된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인문계 고등학교 문과 학생으로 남아 어문계열 학과로 대입 시험을 치렀다. 부모님이 반대해서 음악을 공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 시기에 갑자기 진로를 바꿀 용기도 없었고 꿈을 생각하기 전에 눈앞에 닥친 대학 입시부터 잘 치르는 게 첫 번째 과제였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길을 선택했던 결과는 실패였다. 전기에 이어 후기 대학까지 줄줄이 낙방하고야 말았다. 푸른 돛에서 희망을 노래하던 나는 사라지고 없고 길을 잃은 채 매섭고 혹독한 겨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살아보니 그 시절 잠깐의 실패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인문계 고등학생에게 대학은 전부였으니까.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망연자실해 있을 때 다시 한번 등을 떠밀어준 건 엄마였다.

“서울예전에 실용음악과가 있으니 한번 응시해보는 건 어때?”

우리 집에서 재수는 불가능하지만 일단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학)에 합격하면 재수를 허락해주겠다는 게 엄마의 조건이었다. 실용음악과 커리큘럼을 보니 나쁘지 않았고, 음악을 하고 싶어 했으니 다음 해에 4년제 음대를 다시 지원하더라도 일단 붙고 나서 생각하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서울예술전문대학은 전문대학이라고 해도 예체능계 쪽에서 경쟁률 높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실용음악과 입시를 준비해온 학생들과 경쟁이 안 될 것 같았다. 친구들과 밴드를 하고 학교에서 지휘도 했었지만 그건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한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남은 시간은 딱 한 달 반. 급하게 실용음악과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엄마는 실용음악과에 1기로 입학한 학생을 수소문해 과외를 부탁했다. 내가 과외 선생님과 공부한 것은 악보를 보고 부르는 ‘시창’, 음악을 듣고 악보를 그리는 ‘청음’과 ‘화성학’이었다. 피아노 연주도 해야 했는데 지정곡과 자유곡은 따로 연습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앉아서 음악 공부만 하고 피아노만 쳤다. 살면서 그렇게 뭔가 한 가지에 깊이 몰두한 적이 있었나 싶다.

나중에 과외 선생님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대충 시간이나 때울 생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입시를 한 달 반 남겨놓고 음악을 처음 공부하는 학생에게 큰 기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며 제대로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피아노로 음을 눌러주면 악보를 그려야 하는 청음 공부를 할 때였는데, 기준점을 잡아 주기 위해 (음악을 처음 공부하는 나에 대한 배려였다) ‘도’를 먼저 쳐주자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단다.

“선생님, 왜 자꾸 도를 먼저 눌러주세요?”

“도를 쳐줘야 네가 음 계산을 하니까.”

“저 도 안 쳐주셔도 다 들리는데요?”

실제로 그랬다. 어려서부터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그 소리의 음이 떠올랐는데 그게 절대음감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선생님은 그날 이후 정말 본격적으로 내게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덕에 빠듯한 실기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죽기 살기로 준비해 실기 시험을 치르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합격자 발표 날 아침, 떨리는 마음에 내 방 침대에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방문 너머 거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에 오늘 네 언니가 붙으면 그건 진짜 이상한 거야. 비정상이라고.”

긴장된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고요한 겨울의 공기 때문인지 엄마의 말은 유독 크게 들렸다.

“생각해봐. 네 언니가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한 건 한 달 반 아니니? 그 정도 준비해서 붙는 게 이상한 거지. 오늘 붙으면 너희 언니는 천재야.”

엄마는 혹여 큰딸이 낙방하면 동생들 앞에서 기 죽을까 싶어서 아침 내내 동생들을 미리 단속하고 있었다. 조금은 비장했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웃음이 났지만 금세 다시 긴장됐다.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울 때까지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있기도 없기도 했다. 열심히 했지만 ‘열심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게 될 무렵이었다. 머릿속에는 답 없는 물음이 넘실거렸다. 과연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로 흘러갈까?

그 다음 순간들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합격자 명단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김문정’이라는 세 글자를 찾았던 순간. (그 시절에는 대학별로 건물 앞 대자보를 통해 합격 여부를 알 수 있었다.) 합격자 명단을 거듭 훑을 때 터져 나갈 것처럼 두근거렸던 심장과 마침내 내 이름을 찾고 벅차올랐던 마음. 이름 한쪽 귀퉁이에 누군가가 그려놓은 동그라미를 보고 정말 합격이라는 걸 확인했던 순간.

인파에서 빠져나왔을 때 엄마와 바로 아래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나보다 먼저 와서 결과를 확인한 뒤에 나를 기다렸던 거였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서 합격자 명단 속 내 이름 끝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추위와 기쁨으로 붉어진 얼굴로 달려와 “축하해”라고 말해주던 엄마와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로부터 서른 해 가까이 흘렀다. 열아홉, 스물 그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면 그때가 살면서 모든 걸 쏟아 부었던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런 경험이 인생에 아주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어떤 목표를 향해서 최선을 다해 달려본 경험, 끈질기게 시도해본 경험이 성공 여부를 떠나 삶의 태도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일을 하면서 웬만한 일에 크게 겁먹지 않았던 건 아마도 그런 경험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음악감독이 된 이후 지금까지 정말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았다. 20년 전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일했을 때나 지금이나 참여하는 공연이 하나이지 않았고 여러 가지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음악감독이라는 본업을 바탕으로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다. 새로운 작품을 분석하고 며칠에 걸쳐 수백 명의 오디션을 보며 창작자로서 곡을 만들기도 한다. 방송에 출연하고 대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친다. 항상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나가며 숨이 턱 끝까지 차도록 달린다. 이렇게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건 뭔가 하나를 미친 듯이 해봤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생각으로 분초를 아끼며 공부했던 시간과 그 경험은 지금까지도 나를 펄펄 날게 해준다.

그래서 그럴까? 음악감독으로서, 심사자로서 스무 살의 나와 같은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볍게 보게 되지 않는다. 음악 하나에 절실하게 몰입했던 나를, 추운 겨울 합격자 발표 날의 두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 간절한 마음을 잘 알기에 더 집중해서 듣고 세심하게 보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 앞에 선 모두가 꿈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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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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