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도서명은 『 』, 단편은 「 」, 잡지와 신문은 《 》, 그 외 작품명이나 영화는 〈 〉으로 표기했습니다.
• 인명과 지명은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되 일부는 통용되는 발음으로 표기했습니다.
• 사진 출처: 저자 제공 및 위키피디아, 한국관광공사
차례
들어가는 말
1부
유럽·미국 인문 기행
비틀스의 영혼이 머무는 리버풀
잉글랜드 코츠월드, 인간을 초대한 신의 영지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더블린을 세계에 알린 제임스 조이스
폐허의 미학, 리즈 커크스톨 수도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리스본 베르트랑
바다로 간 엔히크 왕자, 포르투갈 제국을 일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친 남자, 돈키호테
곡선이 흐르는 집, 훈데르트바서
대지의 노래, 구스타프 말러
장미의 이름, 멜크 수도원 가는 길
당신은 ‘조르바’인가 ‘나’인가
보헤미아의 하늘
율 브린너와 조선의 인연
놀라운 뮤지컬 ‘해밀턴’의 세계
공공미술의 천국, 시카고
18세기를 고집하는 사람들, 아미시
포용정치의 성인 링컨
2부
일본 인문 기행
금각사, 너무 소란스러운 고독
칼의 기억, 히젠토
철학자의 길 위에서
윤동주, 얼음 속의 잉어
지식의 제국, 다케오 도서관
츠타야 서점의 유쾌한 반란
만들어진 영웅, 사카모토 료마
공익자본주의의 모델, 나오시마
교토 료안지의 침묵
도쿠가와의 세 마리 원숭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설국
가나자와를 맴도는 윤봉길의 혼
영혼을 품은 후지산 백경
오키나와로 튀어
3부
중국 인문 기행
계림산수, 또 다른 행성의 조각품
시안 실크로드 출발지
상하이 루쉰 공원의 구혼전쟁
베이징 798에서 만난 쩡판즈
내 안의 빛을 영접하라, 제임스 터렐
열하일기 기착지, 베이징
하늘의 선물, 시후 롱징차
보물 병마용의 낮은 자세
루쉰의 길
쑤저우 은이 세운 제국
4부
아시아 인문 기행
히말라야에서 만나는 다르마타
자바의 신화, 보로부두르
키나발루의 시간
중동의 걸작, 아부다비 루브르
늑대토템, 탱그리 정신
카트만두의 동전 한 닢
호치민과 이승만
맥아더 장군과 두 개의 동상
아라비아 사막에 뜨는 별
5부
한국 인문 기행
남한산성의 겨울
월정사 선재길, 또 하나의 시간
서도역에서 타오르는 혼불
동학사의 봄, 길 없는 길
고창에서 만난 인촌과 미당
이중섭과 소와 서귀포
단종유배 700리길
하멜 14년 애덤스 20년
울진 보부상 옛길은 살아있다
불로초로 맺은 서귀포 우정 2천 년
해남 미황사 천 년의 기원
추천사
들어가는 말
카이로스의 시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사이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 속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는 주체적 시간(카이로스)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시간 속에 던져진 나는 늘 걱정과 스트레스의 중압감에 시달렸다. 누구나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낼 것이다. 전형적인 크로노스식 삶의 모습이다. 치유 방법은 가끔 루틴에서 벗어나 보는 것이다. 머리가 아플 때 힐링 대상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존재의 이유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기도 해보는 거다. 주체적으로 자신을 다스리면서 나의 길을 찾아가는 카이로스의 삶이다. 생각이 떠미는 대로 가다 보면 그곳에 등대 불빛처럼 잔잔한 사유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장소를 찾아가고 정제된 사유를 통해 아름답게 살다 가는 것.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일상의 경계 밖으로 끝없이 나를 몰아세우는 일을 채무처럼 안고 지내왔다.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는 경이로운 감동에 어쩔 줄 몰랐다. 그곳에서 지나간 시간을 역사라는 이름으로 들여다보면 회한과 연민이 일렁였다. 먼저 살다 간 사람들의 발자취 앞에서는 깊은 영감이 서성거렸다.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문화를 가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 그 땅을 관찰하면 현실의 고단한 나를 잊어버릴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속세의 상처를 치유 받았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곤 했다.
여행은 사유에 양념을 풍성하게 뿌려주는 기막힌 발명품이다. 낯선 곳과 마주하면 그곳의 이야기들이 또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이런 횡재는 당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하여 이 책에서 유럽, 미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그리고 우리나라 여행지에 대해 풀어낼 수 있었다. 일본은 언론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관심을 가졌던 테마였다. 자주 접하다 보니 언어와 역사, 관계에 대한 생각이 확장되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전후사는 주요 관심 분야였다. 중국은 대륙의 풍취와 기상이 심정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주는 곳이어서 매력적이었다. 미국과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모두 그곳만의 특색을 지닌 스토리가 가득했다.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은 인터넷 경제신문 《컨슈머타임스》에 인문학 칼럼으로 선보인 적이 있다. 또한 네이버와 카카오다음을 통해 <김경한의 세상이야기>로 공유되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올린다. 여행과 사유의 고리를 의미 있게 평가해주신 한국경제신문 고두현 논설위원과 정법안 시인에게 먼저 고마움을 드린다. 여행의 동반자로 때로는 사유의 물길을 퍼 올려주신 구자준 회장(전 LIG손해보험)과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늘 따뜻하게 격려해주신 유진그룹 유경선 회장, 세아그룹 이순형 회장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변함없이 마음을 주신 신한금융지주 조용병 회장, AJ 문덕영 회장, 팬텍C&I 박병엽 회장, 한국금융지주 김남구 회장, 김앤장 목영준 변호사와 장태평 전 농림수산부 장관께도 머리 숙여 인사를 올린다.
인생은 긴 항해의 길이다. 로마신화 속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키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방해로 온갖 고난 속에 저승까지 경험했다. 결국 살아 돌아와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고 장엄한 생애를 장식했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그려내고 있다. 누구나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시각으로 경험하는 ‘인생 여행’은 달콤한 축복과 같다. 모든 순간이 정제된 사유를 길어 올리는 작업일 것이다.
비틀스의
영혼이 머무는 리버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간이 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제법 굵게 쏟아졌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가는 ‘아이리시 레인’이다. 리버풀 시내의 매튜 스트리트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붐볐다. ‘비틀스 신화’에 끌려 온 이들이다. 60년 전 첫 공연으로 전설이 탄생한 비틀스 성지에 도착했다. 그 현장의 중년들은 이미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잠깐의 비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캐번 클럽Cavern Club은 그렇게 세월을 거슬러 찬란한 과거를 지키고 있었다. 존 레논의 귀여운 동상이 입구에 서 있고 옆으로 이어지는 벽에는 지구상의 모든 언어로 휘갈긴 찬사 메모들이 가득했다. 말 그대로 동굴 같은 지하 펍에 있던 반항적인 10대 소년 4명은 운명처럼 20세기 중반을 두드렸다. 로큰롤 역사를 다시 쓰게 했고 그 중심에 우뚝 섰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룻밤 단돈 5파운드를 받고 무대에 섰던 소년들은 2년이 지나고 300파운드의 출연료를 받았다. 몸값은 60배가 뛰었고 대우가 달라졌으니 ‘예술벤처 스타트업’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런던과 미국 진출로 3년 만에 연간 천 만 장씩의 노래집을 팔아 치웠다. 그룹 해체까지 8년 동안 만든 곡들은 12장의 디스크에 담겼고 5억 장이 나갔다. 수수께끼 같은 기록이다. 빌보드 차트 역사상 1위 곡 20개를 제조해낸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1999년 《타임스》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피카소와 비틀스를 선정하고 새로운 세기를 알렸다.
“존 레논은 비틀스의 영혼이었고 조지 해리슨은 비틀스의 정신이었으며 폴 매카트니는 비틀스의 심장이었고 링고 스타는 비틀스의 드러머였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나오는 말이다. 1970년에 그룹이 해체하고 1980년에는 천상의 싱어 존 레논의 암살 사건으로 4인조 비틀스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노래는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다. 나는 레논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미발표 곡 〈새처럼 자유롭게Free as a bird〉를 좋아한다. 하늘을 훨훨 끝없이 새가 되어 날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겠지. 레논은 그래서 세상을 일찍 떠났는지도 모른다.
리버풀은 영국 대표 항구다. 아이리시해에 인접한 머지강변을 중심으로 비상했다. 노예무역의 중심지로, 인류 산업혁명의 거점으로 근대를 관통해온 도시는 이제 비틀스의 잔영만이 짙게 남아있었다.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매년 1,500만 명을 이 도시로 불러들인다. 18세기 대항해 시대, 태양의 제국을 거치고 아일랜드와의 연락 거점일 때가 전성기였다. 오후의 석양처럼 스러져 가는 역사 속으로 광장을 건너는 늙은 바람만이 흘러간 추억을 속삭이듯 머뭇거렸다. 강변에서 너무도 익숙한 4명의 얼굴을 만났다.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 같다. 허기를 참지 못해 앨버트 독(빅토리아 여왕 남편의 이름을 딴 조선소)의 조그만 카페에 들렀다. 조선소의 영광은 무너지고 고요한 바다만이 주머니 같은 수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1,700명이 희생된 비극의 타이타닉호가 만들어지고 출항했던 장소다. 상상했던 폐허는 없었다. 대신 완전히 다른 콘셉트로 디자인된 예술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피시 앤 칩스를 시키는 동안 그레고리안 성가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소리의 방향을 찾아 귀가 움직였다. 비틀스의 레퍼토리들이 수도원 수사들의 합창으로 리메이크되어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가벼운 낮술은 오후의 바람을 행복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였다. 앨버트 독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 머지강 강가에서 올라오는 해풍에 몸을 맡겼다. 아직 폴 매카트니가 이 도시에 남아 성모마리아의 품속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렛 잇 비Let it be〉 의 가사처럼. 아련한 선율을 떠올리게 하는 시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폴 매카트니만이 옛 둥지를 맴돌고 있는 셈이다. 밥 딜런과 함께 공연을 준비한다는 풍문도 들렸다. 그들은 나이 70을 넘긴 노인들이다. 생전에 한 무대에서 두 거장을 볼 수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발명품’ 비틀스는 곧바로 21세기의 전설이 되었다. 어떤 찬사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한다. 이제는 ‘시대’라는 관객만이 남았다. 지나간 생명보다 흘러가는 세월이 그들 앞에 서 있다. 까닭도 없이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 〈오블라디 오블라다(인생은 흘러간다라는 뜻의 아프리카 말)〉처럼 말이다. 비틀스는 잠깐 동안 만나 불처럼 타오른 뒤 긴 이별로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인생의 모든 인연이 그렇듯이. 맥주 한잔을 들고 부두를 서성거리며 비틀스가 출연한 영화 〈HELP!〉1965를 떠올렸다. 심장을 재물로 바쳐야 하는 성스러운 곳에서 마법의 반지가 우연히 폴 매카트니의 수중에 들어가고 동양의 성자 카일리가 반지의 주인공 심장을 꺼내 신을 달래려고 머나먼 리버풀까지 찾아가는 스토리다. 영화는 실패했지만 삽입곡 〈예스터데이〉는 전 세계 청춘들의 가슴을 태워 재로 묻었다. “Why she had to go I don’t know she wouldn’t say.” 청년 시절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묻고 싶은 때가 되었다. “인생이 왜 그냥 허무하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아무런 말도 없이.”
잉글랜드 코츠월드.
인간을 초대한 신의 영지
바람이 불고 음산한 안개가 뒤덮여 있으리라는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공해나 미세먼지 때문에 생긴 선입견을 가지고 걱정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황홀한 푸른 하늘과 대칭으로 깔린 녹색의 평원, 여기에 간간이 뿌려지는 빗줄기가 연주해내는 교향곡은 대지의 위대한 서사시였다. 영원을 알지 못하고 생을 마쳐야 하는 미천한 내가 신의 초대장을 받은 느낌이었다. 실눈을 뜨고도 한참을 보아야 그 끝이 윤곽으로 어른거리는 지평선은 언어의 표현을 거절하는 경외감이었다. 잉글랜드의 보물이라고 자랑할만도 했다. 600년 전 중세 영국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세계적 명소, 코츠월드Cotswolds는 시작부터 가슴을 뛰게 했다. 잔잔한 구릉 지대에 펼쳐진 그린의 향연은 이곳이 인간세계와 가깝되 결코 인간의 땅이 아닌, 신의 영지임을 실감하게 했다. 고도 300미터 높이에서 생성되는 최적의 공기 속에 목장과 마을과 초원이 빚어내는 이상향이었다.
코츠월드의 석회암 지붕은 시간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쪼갠 돌을 다듬어 가지런히 얹고 정성스럽게 이어 만든 박공지붕은 이끼가 피어올라 지나온 날들의 기억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담장도 벽도, 지붕도 모두 석회암 풍경이다. 대문과 골목마다 예외 없이 내걸린 꽃 화분은 얕은 시냇물 소리를 타고 정경의 세계로 흘러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 고향인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부터 남쪽 옥스퍼드까지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초지는 애초 양들이 뛰어놀던 목장으로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로마 시대의 도시 배스와 세번강 상류를 지나 템스강 하류로 연결되는 비옥한 트라이앵글이다. 글로스터셔, 옥스퍼드셔, 워릭셔, 윌셔, 우스터셔 등 6개 카운티 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바이버리 마을이었다. 크림색 돌들이 잘 다듬어진 마을을 수놓고 있었다. 건너편에는 벌꿀 색깔로 변해가는 돌조각 벽채 사이로 육중한 문양이 새겨진 클래식 철제문들이 조화롭다. 누구나 한번쯤 머물고 싶어 하는 스완 호텔 앞 시내를 건넜더니 삼각지붕 물결이 중세의 골목길로 나를 이끌었다. 타운하우스 분위기의 알링턴 로우Arlington Row 마을의 길이 코츠월드의 심볼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면서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근처에는 로마 유적지가 산재해 있었다.
현대 정원의 개념을 만든 시인이자 건축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그의 책 『지상의 낙원』에서 바이버리 마을을 “가장 아름다운 잉글랜드의 상징”이라고 극찬했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코츠월드를 통째로 사들이고 싶어서 5번이나 왔다 갔는지 짐작할만하다. 모리스는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바이버리 마을에서 하염없이 걷고 서성거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아무런 개성도 없는 단순한 건축물에서 살고 또 일하는 것은 아닌가. 크기에 따라 위치에 따라 돈으로 평가받는 그것들은 너무도 천편일률적이다. 아름다운 집, 멋진 생활은 더는 없지 않은가. 그곳에 아름다운 마음도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과연 우리는 즐겁게 일하는가. 우리의 노동은 정말 가치 있고 보람되며 즐거운가. 휴식은 그것을 누리기 위해, 돈을 벌고자 일하는 과정뿐이어서 과연 즐겁다고 할 수 있을까. 마지못해서 하는 고역은 아닌가. 우리의 삶 자체가 그런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사는 것이 고행이 아닌가?”
자연에서 진정한 삶의 에너지를 찾고자 했던 모리스의 고민은 우리 모두의 명제이기도 하다. 코츠월드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영국의 모든 건축물을 보존하자는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을 전개했고 오늘날 역사적 유산을 온전하게 남기는 데 빛나는 공헌을 했다. 근대 공예운동과 아름다운 책 만들기로 영국 사회 뒤집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세계를 휩쓴 유토피아 디자인과 생활예술은 코츠월드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아름다운 서머 그린은 갈등의 바다를 떠돌다 만난 해안선 같았다. 병든 일상의 나를 소독하고 일으켜 세우는 특효약처럼 여겨졌다. 노동과 이재에 찌든 속세와 절연하는 평화의 치료제로 이만한 처방전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오랜 기다림 위에 올라탄 듯 눈이 아플 때까지 색다른 대지의 장엄함을 담아내던 나의 시선은 돌멩이가 물속에 가라앉는 속도로 급속히 평온해졌다. 바이버리 둘레 길의 끝은 들판 가득 ‘라벤더 팜’이었다. 보랏빛 꽃들이 지천에 널려 하늘과 수직의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이 오솔길이 메마른 감성에 소나기를 퍼부었다. 오래된 돌담을 돌며 철학과 문학과 인간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그들 사이에 걸쳐져 있던 수수께끼 같은 길들을 찾고자 갈망했다.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주면서 우주 속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어떻게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는지 조금씩이라도 알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끌어내는 힘으로 잠겨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마자랭 추기경Le cardinal Mazarin의 첩보원이 날짜 변경선을 어떻게 밝혀내고 ‘전날’을 회복했는지에 대한 물음(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전날의 섬』)과 멜크의 수도사 아드소(소설 『장미의 이름』 주인공)의 한탄이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곳은 들판이 보이면서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라고 했던가. 단순한 인간의 말들이 이곳에서는 진리의 로고스理性가 되어 공중으로 떠다니는 듯했다. 코츠월드의 사색은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앞서간 영국의 비결이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위대한 예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뉴턴과 아인슈타인, 찰스 다윈이 공부했던 옥스퍼드의 영재들에게 이상의 날개를 달아준 벌판이었다. 옥스퍼드의 캠퍼스 교회 크라이스트 처치에 앉아 두 손을 모으면 생각의 점들이 코츠월드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섭리의 구조였다. 그들이 가장 가치 있는 에너지를 창조하도록 영감을 준 디딤돌이었다. 인간을 압도하는 위대한 자연은 노동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비타민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더블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
아일랜드의 초원을 바라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성한 푸르름이 그랬고 텅 빈 쓸쓸함이 그랬다. 그 들판은 천하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가는 비바람을 견디며 풀들은 이리 눕고 저리 누웠다. 초원은 마치 바닷물결 같았다. 나를 태운 자동차는 푸른 지평선을 가로지르듯 나아갔다. 한 자락도 대지의 맨살이 드러난 곳은 없었다. 경이로운 녹색의 향연이다. 풍경이 흘러와 마음에 스며든 한나절, 낯선 자연은 그렇게 내 몸속에 가두어졌다. 길은 본래 주인이 없는 것, 내가 그 길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 지나온 모든 위치가 무효인 듯 황홀했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연극이었다. 이 작품연출가 임영웅(극단 산울림)은 베케트가 노벨상을 받은 1969년에 국내 공연을 시작했다. 무려 40년 동안 2,000회를 넘겼으니 베케트의 고향 아일랜드 초청공연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연극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30년 전 대학로에서 봤던 기억이 아스라해질 무렵 홍대 앞에서 다시 만났다. 임영웅. 그도 어느덧 80대를 넘겼다. 베케트가 그랬던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며 오늘도 달리고 있다. 두 사람은 더블린에서 내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 밑에서 늙은 두 방랑자(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가 ‘고도godot’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그들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고도가 누구인지, 어디로 온다는 것인지, 왜 기다리는 것인지도 잊었다. 그저 습관처럼 지루한 기다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다. 지독한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 서로에게 욕하고 질문하고, 회상하고, 싸우고, 장난하고, 춤추고, 운동한다. 그렇지만 고도가 오면 이 지루함이 끝난다는 희망 속에 둘은 끊임없이 말을 이어간다. 그들의 상황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것은 고도가 아니라 그가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갖고 오는 소년이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아무것도 일어난 게 없었고 아무도 오지 않았고 아무도 가지 않았다. 기나긴 공연만이 막을 내렸다. 공연이 진행되는 3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끝난 뒤로는 다른 이들처럼 얼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다만 그 순간 내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고도라는 낯설지 않은 한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의 절망을 고백하는 모습을 골똘히 지켜본 묘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은 시간이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이미 약속은 수없이 지켜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미 와있는 고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영원히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늙고 가난한 두 광대는 서로를 껴안다가 이내 밀치며 상대의 악몽을 깨워주면서도 그 꿈 이야기만은 듣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처연하다. 이제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니 그만 헤어지자고 돌아서지만 서로가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늙어가고 있다. 시간처럼 무겁고 시간처럼 손쓸 수 없이 흩어지고 마는 모래를 가방 가득 들고서 황량한 언덕을 헤맨다.
잉글랜드의 오랜 압제에 대항하며 꿈을 키웠던 더블린 시내 리피 강변을 돌아 600년의 역사를 가진 트리니티 대학으로 들어섰다. 베케트가 고뇌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던 현장이다. 롱 룸Long Room 도서관은 영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도 아닌 아일랜드 모국어(게일어) 저작들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더블린 문학관과 베케트 다리를 오가며 석양을 보냈다.
수없는 사람이 살아생전 “고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베케트에게 던졌다. 그는 끝내 함구했고, 이승을 떠나기 전 이렇게 이야기했다. “좀 모자랄 때 나는 만족한다. 충분히 이해는 안 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모른다. 등장인물이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 그들에게 물어보라.” 이에 나는 자문했다. ‘고도를 왜 기다리는가?’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기다리는 것 아닐까.
다음 날 새벽 다시 가본 베케트 다리 아래는 어제처럼 강물이 느리게 흐르고 어제와 같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1930년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베케트는 청년시절 고국을 떠나 파리에서 살았고 레지스탕스에도 참여했다. 프랑스어로 작품을 집필하면서도 게일어를 잊지 않았다. 고도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아름답게 들여다보고자 했다. 은둔, 죽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종착역의 사람들을 그렸다. 되는 게 없는 주인공Noting to be done들을 사랑했다.
인생에서 고도는 누구인가. 보통 신이라든가 희망, 자유, 미래, 죽음 등으로 해석하기는 하지만 정답은 없다. 삶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고 막연히 그려볼 뿐이다. “내 인생이 낯선 곳을 향해 저물고 있구나. 잘못되어가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누더기를 걸치고 이 희곡의 텅 빈 무대 위로 던져진다. 고도가 오지 않는 대신 여름날 홍수처럼 어둠이 덮칠 것이다. 죽음 같은 침묵 속에 쌓여 움직이려 해도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내일을 맞을 것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줄거리도 없고, 해결할 것도 없는 일상을 위하여. 이것이 인생일지니. 미국 생퀸 교도소의 무기수들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이 공연을 했고 특사로 풀려난 뒤에도 그들은 전국을 유랑하며 공연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예술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베케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처절한 논리의 실종을 맛보아야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 연극이다. 허무, 절망, 결여, 부정, 실패, 상실, 망명, 추방과 같은 언어의 뒷마당에 던져진 술병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 그런 인간들을 그린 그림이다. 예술은 인간의 결핍을 노래하는 것이다. 못 보는 것을 꺼내어 듣고 보고 소통하게 한다. “이 작품은 빈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기쁨을 준다. 기다림이라는 미학으로(노벨상 결정 이유).” 정신적 빈곤 시대에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게 베케트는 위대한 선물 ‘고도’를 주고 떠났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 내 삶에 소홀해질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때 당황하게 되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세계가 감옥이란 것을 알았다”라는 것이 베케트의 고백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연극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고 더 나은 실패를 하라.” 이러한 그의 유언까지도 의미 있게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더블린 뒷골목의 템플 바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 한잔을 걸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영화처럼 잠깐 떴다가 사라지지 않고 오래된 연극처럼 내일도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계속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그치지 않고 가는 것이 아니던가.
더블린을 세계에 알린
제임스 조이스
타협되지 않는 도시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지나가는 바람과 빗줄기는 일상이고 우울한 거리의 분위기는 용납할 수 없는 장막이었다. 아무것도 알아주지 않는 이 골목에서 젊은 날을 몽땅 다 날리기엔 너무나 억울했을 법하다. 하지만 한 번의 결별은 그를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지 못하게 했다. 수평적으로 보는 세계지도의 맨 왼쪽 끝 섬나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은 그렇게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더블린을 떠난 것은 22살 청년 때였다. 그는 이 도시가 죽도록 싫었다. 그의 유년은 예수회 기숙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최연소 입학에 모두가 알아주는 우등생이었지만 학교가 지겨웠다. 거친 동급생들과 선생님의 회초리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집안의 몰락으로 시작된 사춘기는 무능한 아버지를 미워한 기억들로 가득했다. 새로 옮긴 학교 역시 욕망과 이단의 기억뿐이었다. 이 무렵 사창가에서 버린 동정으로 지옥 같은 죄의식에 빠져들고 더러워진 영혼을 구원받고자 종교에도 매달려봤지만 그가 채우고자 했던 진실은 종교가 아닌 삶이었다. 작가를 꿈꾼 청년 조이스에게 종교와 가족은 자유와 예술을 갈구하는 인생 항로의 숨 막히는 허들이었다. 척박한 조국 아일랜드는 영혼을 가두는 그물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접고 떠나는 이유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이겨내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길. 후회하면서 돌아보지 않을 선택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이 극적인 방황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를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모두 쏟아냈다.
그는 더블린과의 이별 후 37년간 망명객으로 살았고 인생의 황혼과 죽음을 결국 유랑 길에서 맞았다. 방랑은 빈곤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작은 안경 너머 가느다란 눈은 평생을 눈병에 시달렸고 허름한 중절모, 초췌한 얼굴과 시선은 늘 허공을 맴돌았다. 호텔에서 일하던 하녀 노라와 만나 평생을 함께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가 남긴 더블린 3부작 『더블린 사람들』1914,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율리시스』1922는 잊고 싶은 고향과 그 사람들의 심리가 배경으로 진하게 녹아있다. 떠났으되 떠나지 못했고 끝냈으되 끝내지 못한 인연의 끈이 세계적 문학으로 승화되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뒷골목의 성지 ‘템플 바’ 근처 얼 스트리트 입구에 동상으로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지적인 준비 자세로 말이다. 말이라도 걸면 인생의 어떤 질문에도 해답을 줄 것 같았다. 그는 20세기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답게 고통받는 더블린 하층민들의 삶을 추적했고 그들의 관습과 행동, 사상들을 심미적으로 꿰뚫어내고자 했다. 마비된 영혼들의 도시 더블린에 대한 묘사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독특함으로 아직도 빛나고 있다. 헤밍웨이와 존 스타인벡, 움베르토 에코, 살만 루슈디까지 수많은 문호들의 모더니즘 등불이 되었다. 강인한 자아의식과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실 자기 자신이었다. 등장인물들이 경험하는 시간의 과정을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기법으로 담금질했다. 내면을 집요하게 추적해가는 심리묘사나 무의식 세계의 서술은 독자들에게 책 읽기를 포기시키는 양면의 동전이지만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스타일은 그 시대를 달궜다.
“나는 항상 더블린에 대해 쓴다. 내가 더블린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것은 세계 모든 도시의 심장에 다가간다는 말이다. 그 세부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 이러한 제임스 조이스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문장들 사이에는 1900년대 초반의 더블린이 현장에 있는 듯 들여다보인다. 세인트 스테판스 그린, 그래프턴 스트리트, 템플 바, 오코넬 스트리트, 트리니티 대학 등. 내가 이 도시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발자국을 따라가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임스 조이스 센터’에서 이 위대한 작가를 기리는 강의와 워크숍도 만날 수 있었다.
첫 작품 『더블린 사람들』은 18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조이스 루트를 돌면서 중간마다 들여다보기에 알맞은 글들이다. 이 가운데 으뜸은 ‘은총’이 아닌가 싶다. 다섯 술꾼이 크게 다친 친구의 병상 주변에 둘러앉아 술을 마셔가며 소위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는 장면은 압권이다. 영국의 지배에 신음하는 더블린의 치부를 이야기로 세상에 알리고 폭로함으로써 조국의 발전을 염원했던 것 같다. 시내 북쪽의 ‘더블린 문학관’ 2층에는 아일랜드를 빛낸 작가 사뮈엘 베케트와 나란히 제임스 조이스 룸이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청동 흉상 옆에 새겨진 짧은 문장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더블린은 우리 안의 수많은 우리가 좌절하고 소리 지르고, 술 마시고, 번민하고, 주저하고, 질투하고, 자책하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부르는 지명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때 우리는 더블린이 무겁다고 말하는 것이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공통의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예술의 신神 다이달로스의 현대판 분신이다. 미노스 왕의 왕비가 근육질의 황소를 사모하자 나무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암소를 만들어 왕비를 그 속에 들여앉히고 황소의 씨를 받게 하였다. 이 사실을 알아버린 왕의 노여움으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나올 수 없도록 크레타의 미궁 ‘라비린토스’에 버려졌다. 미로를 헤매던 부자는 새의 깃털을 주워 모아 그 유명한 이카로스의 날개를 만들어 달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태양 가까이 오르면 밀랍이 녹아 위험하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고공비행을 고집하던 아들 이카로스는 에게해에 떨어져 죽고 만다.
『율리시스』는 스티븐 디덜러스가 음탕한 여인 마리언 블룸을 만난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내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당시 출판은 파리에서 극적으로 이뤄졌다.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패러디한 걸작이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고전을 1922년 그 시대 ‘율리시스(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로 부활시켰다. 구성 역시 똑같다. 두 남녀는 아침 8시부터 더블린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친구를 만나고, 식사하고, 고양이 밥 주고, 장례식 가고, 일하고, 식당과 술집에 들르는 단조로운 일상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음하고, 성적 쾌락을 찾고, 사창가를 어슬렁거리고, 지쳐서 잠자리에 돌아오는 부질없고 부도덕하고 가련한 일상을 반복한다. 두 사람이 겪는 하루 18시간의 방황은 삶의 소외와 고독에 빠진 우리 모두의 육체와 정신, 욕망의 결핍을 은유하는 현대인의 ‘오디세이아’다. 율리시스는 읽을 때마다 어렵고 애매한 문장에 두통이 오는 불가침적 난문이다. 난해한 문장이 미안했던지 “이 소설 속에는 너무나 많은 불가사의한 수수께끼가 감춰져 있기 때문에 아마 학자들은 앞으로 몇 세기에 걸쳐 내 의도를 알아내는 데 바쁠 것이다”라는 경고를 남겼다. 현재까지 학위논문을 가장 많이 배출한 소설이 되었으니 예언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인간의 심리와 허세, 가능한 모든 영역의 미추를 들춰내고자 했다.
아일랜드는 600년 영국의 압제를 딛고 일어서 비상했다. 영국보다 소득을 앞질렀다는 기개는 더블린 시내 하늘을 찌르는 스파이어(오코넬 거리의 첨탑)의 위용에 담겨있었다. 영어와 게일어가 공항에서 동시에 들려오고 있었다. 말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영국 최고의 작가로 기억되는 조이스는 실상 더블린과 아일랜드의 자랑이다. 죽어서야 고향의 평가와 귀향이 허락되었다. 시대의 자화상과 아일랜드의 고독을 그려낸 조이스의 문체는 당시 유럽 문단의 혁명이었다. 조이스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를 정처 없이 떠돌면서 “나는 세상의 함정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며 다른 사람의 지혜를 배우도록 운명 지어졌다”라고 토로했다. 사뮈엘 베케트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조이스의 작품에서 형식은 곧 내용이며 내용이 곧 형식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것에 대하여 쓴 글이 아니라 그 어떤 것 바로 그 자체다.” 맞는 말이다. 문학의 새로운 창조와 탄생의 희열을 맛보게 했으니 어떤 수사인들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아일랜드 일주는 마치 침묵과 유배의 틈바구니를 오가는 고독한 방랑자의 행로 같았다. 거친 자연과 슬픈 역사, 기근과 고통에 일그러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짙게 밴 땅이었기 때문일까. 그때마다 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디덜러스가 던진 수많은 질문을 꺼내보곤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폐허의 미학,
리즈 커크스톨 수도원
가을 벌판의 낡은 수도원은 황량한 시간의 역사 속에 그대로 갇혀있었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과 아주 가끔 날아오르는 까마귀 몇 마리만이 오랜 적막을 휘젓고 지나갔다. 런던으로 떠나는 기차는 서쪽에서 다가왔다가 동쪽으로 이내 멀어져 갔다. 자그마한 강물이 흐르고 반복되는 계절에 나이테만 두꺼워진 나무들은 쉬지 않고 마른 잎들을 지상으로 내려보내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나 건물의 사체가 먼지를 머금고 아직 직립해 있을 때 나는 항상 깊은 수심 속으로 내려가는 죽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사색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형해화된 자취로 남아 쓸쓸했다. 모든 폐허는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전에 그곳은 집이거나 수도원이거나 인간의 냄새로 가득한 영역이었을 테니까. 영국의 북부 요크와 맨체스터를 사이에 두고 트라이앵글을 이루는 도시 리즈는 낡은 수도원을 끌어안고 석양을 맞이하고 있었다.
결혼과 이혼으로 얼룩진 사생활의 주인공 헨리8세(튜더왕가의 강력한 군주)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가톨릭 수도원들을 모두 폐쇄했다. 시시콜콜 전통과 규범을 간섭하는 교황청의 끄나풀들이 눈엣가시였다. 여섯 번의 결혼으로 유명한 그는 엄격한 중세교회의 율령들에 숨이 막혔다. 문을 닫은 수도원 대신 만들어진 성공회는 오늘날까지 영국의 정교회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의 커크스톨 애비 수도원은 한때 수백 명의 수사들이 경건한 신앙의 깊이에 빠져들었던 성소다. 리즈가 도시로 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수도사들은 하루 8번 예배를 드리고 남는 시간은 명상하거나 서적을 읽으면서 신의 진리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쳤다. 기도하는 이들의 생은 잔혹하리만큼 엄격했다. 인간의 본능을 헌납한 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삶이었다. 평신도들은 수도원 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양 떼를 돌보며 중세를 살았다. 지금은 마른 잎이 뒹굴고 새의 깃털만이 바람에 날리는 폐허지만 이 수도원은 고대에 세워진 유럽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스칸디나비아의 무자비한 바이킹족 침략으로 성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오랜 세월 후 윌리엄 드 퍼시의 재건으로 빛을 보았지만 헨리 8세의 도그마에 무릎을 꿇고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남자 수도원은 그렇게 역사의 그림자만이 남게 되었다. 마른 잎이 지듯이 까닭 없이 숱하게 떠나버린 목숨들과 엷은 썰매 소리 같은 회한을 반추하며 석양의 끝자락까지 하염없이 수도원 들판을 바라보았다.
1300년을 버텨온 돌기둥들은 파르테논의 열주처럼 서있지만 이끼에 견디다 못해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