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엔진을 달다
모빌리티인문학 Mobility Humanities
모빌리티인문학은 기차,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모바일 기기 등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인간, 사물, 관계의 실재적·가상적 이동을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공-진화co-evolution라는 관점에서 사유하고, 모빌리티가 고도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현재와 미래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제안함으로써 생명, 사유, 문화가 생동하는 인문-모빌리티 사회 형성에 기여하는 학문이다.
모빌리티는 기차, 자동차, 비행기, 인터넷, 모바일 기기 같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사람, 사물, 정보의 이동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에 수반하는 것으로서 공간(도시) 구성과 인구 배치의 변화, 노동과 자본의 변형, 권력 또는 통치성의 변용 등을 통칭하는 사회적 관계의 이동까지도 포함한다.
오늘날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는 인간, 사물, 관계의 이동에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거의 남겨 두지 않을 정도로 발전해 왔다. 개별 국가와 지역을 연결하는 항공로와 무선통신망의 구축은 사람, 물류, 데이터의 무제약적 이동 가능성을 증명하는 물질적 지표들이다. 특히 전 세계에 무료 인터넷을 보급하겠다는 구글Google의 프로젝트 룬Project Loon이 현실화되고 우주 유영과 화성 식민지 건설이 본격화될 경우 모빌리티는 지구라는 행성의 경계까지도 초월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오늘날은 모빌리티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삶을 위한 단순한 조건이나 수단이 아닌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 된 시대, 즉 고-모빌리티high-mobilities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간과 테크놀로지의 상호보완적·상호구성적 공-진화가 고도화된 시대인 것이다.
고-모빌리티 시대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 ‘영토’와 ‘정주’ 중심 사유의 극복이 필요하다. 지난 시기 글로컬화, 탈중심화, 혼종화, 탈영토화, 액체화에 대한 주장은 글로벌과 로컬, 중심과 주변, 동질성과 이질성, 질서와 혼돈 같은 이분법에 기초한 영토주의 또는 정주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와 동시에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단순한 수단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고-모빌리티 시대를 사유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글로컬화, 탈중심화, 혼종화, 탈영토화, 액체화를 추동하는 실재적·물질적 행위자agency로서의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첨단 웨어러블 기기에 의한 인간의 능력 향상과 인간과 기계의 경계 소멸을 추구하는 포스트-휴먼 프로젝트, 또한 사물인터넷과 사이버 물리 시스템 같은 첨단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스마트시티 건설은 오늘날 모빌리티 테크놀로지를 인간과 사회, 심지어는 자연의 본질적 요소로 만들고 있다. 이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에 건국대학교 모빌리티인문학 연구원은 ‘모빌리티’ 개념으로 ‘영토’와 ‘정주’를 대체하는 동시에, 인간과 모빌리티 테크놀로지의 공-진화라는 관점에서 미래 세계를 설계할 사유 패러다임을 정립하려고 한다.
머리말
“역마가 들었다더라.”
가끔 사주를 보고 오신 어머니께서 전해 주시던 말씀이다. 그 탓이었을까. 고등학교 기숙사 입소를 시작으로 일찌감치 집을 떠나 서울로 파리로 많이도, 오래도 돌았다.
“요새는 사주에 역마가 좀 들어야 좋지.”
당신 옆에 끼고 살지 못하는 큰딸에 대한 걱정과 염려, 서운함을 털어내기 위해 저런 말도 잊지 않고 덧붙이셨던 것 같다.
역마의 기본 의미는 변화와 변동을 향한 강한 힘이다. 정착과 정주가 생존의 기본 조건이었던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역마는 살煞로 불렸다. 변화와 변동, 이주와 개척은 곧 불안정과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내 땅을 확보하고, 지키고, 일구는 것이 중요했던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땅을 버리고 돌아다니던 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객사라는 단어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보고자 했던 자들은 그러한 욕망을 지녔다는 사실만으로도 버거운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빌리티적인 삶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되었고, 역마는 살이 아닌 운으로 바뀌었다. 미술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특정 시점을 고정시켜 제작된 근대 이전 재현적 미술representationalart은 사진기와 활동사진, 영화 등의 기술 발전을 활용하며 새로운 시간성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대상의 움직임을 화면에 지속시키는 비재현적 미술nonrepresentationalarts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책은 모빌리티라는 열쇳말로 풀어 본 근현대 미술사이자, 시각예술 작품을 매개로 모빌리티의 역사를 추적하는 작업이다. 미술과 모빌리티의 상보적이고 흥미로운 결합을 위해 윌리엄 터너부터 소수빈까지, 200년이 조금 안 되는 시기에 걸쳐 스무 명의 아티스트를 꼽았다. 단순히 모빌리티를 소재로 해서 작업을 한 작가들을 추려서 소개하기보다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해석한 모빌리티가 어떻게 근현대 사회 변화와 촘촘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보여 주고자 했다.
증기기관차가 뿜어 대는 검은 연기로 시작하는 전반부에서는 산업혁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형성된 근대적 모빌리티가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정신세계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피고자 했으며, 후반부에서는 근대화라는 미명 하에 그간 당연하게 이루어져 온 일방적인 모빌리티 확장에 대한 비판적이고 자성적인 작업들을 분석했다. 무엇보다 그간 대부분의 미술사 담론이 기본값으로 여겨 왔던 ‘서구 백인 남성 작가들의 미술사’를 보완하여 젠더와 인종, 문화권과 지역 차원의 빈틈을 메우는 데 신경을 썼다. 앞서 다룬 작가들에 비해 다소 낯설게 여겨지는 수보드 굽타, 할릴 알틴데레, 아델 압데세메드, 에스더 마흘랑구, 오스본 마차리아 등의 이름은 좀 더 균형 잡힌 미술사 서술을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직업적인 관심으로 남을 뻔했던 작은 이야기들을 엮어 한 권의 책으로 선보일 수 있게 해 주신 건국대학교 모빌리티 인문학 연구원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갑자기 다가온 전례 없는 부동성의 시대, 모빌리티와 예술에 대한 스무 개의 사유를 담은 이 책이 ‘이동하는 인간’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신선한 자극이 되기를 바라며, 《미술, 엔진을 달다》의 출발 신호를 보낸다.
2021년 1월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영국, 1775~1851),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 Great Western Railway〉(1844), 91×121.8, National Gallery, London.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증기기관차가 매이든헤드Maidenhead 철교를 건너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런던 외곽 서부 태플로Taplow에서 매이든헤드 사이 템스강을 건너는 이 다리는 이점바드 킹덤 브뤼넬IsambardKingdomBrunel(1806~1859)이 설계한 것으로, 1838년에 개통되었다. 다리의 모습은 과장된 단축법으로 묘사되어 기차의 빠른 속도감을 강조한다.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기차는 짙은 안개와 폭풍우 탓에 머리 부분만 드러날 뿐 전체 모습은 뿌연 대기에 가려져 있다. 추상적으로 그려진 작품임에도 증기를 뿜으며 빗속을 질주하는 증기기관차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화가는 흰색 물감으로 안개와 증기를 어우러지게 그려 몽환적인 느낌을 주면서 기차의 속도감을 강조한다. 열차에 대한 세부 묘사를 생략한 것이 오히려 빠르게 움직이는 새로운 교통수단의 이미지를 더욱 환상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림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그레이트 웨스턴 레일웨이GreatWesternRailway’, 줄여서 GWR은 런던에서 브리스톨로 가는 노선의 이름이고, 그림 속의 기차는 당시 최신 기차 모델이었던 파이어플라이 클래스FireflyClass다. 폭풍우 치던 1884년 어느 날, 일흔에 가까운 노인이 달리는 기차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비가 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10분 넘게 비를 맞으며 기차의 속도를 느꼈다. 이 노인이 바로 영국의 국민화가, 윌리엄 터너다. 1775년 런던의 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터너는 영국 근대 미술의 포문을 연 풍경화가로, 영국 왕립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GWR Firefly class ‘Tiger’ 모델, 1840년 제작, Roberts Sharp 설계, ⓒWikipedia.
터너는 빛과 빛에 의한 색채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낸 화가다. 그는 빛의 변화로 드러나는 순수한 자연의 실재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변화무쌍한 날씨에 따라 변하는 풍경에 매료되어 여행을 통해 마주한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초창기 수채화 작업을 많이 하던 터너는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작품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이어 갔다. 그는 어두운 색을 칠하고 건조시킨 후 밝은 색을 올려 쌓아 가면서 표현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이를 통해 수채화 기법에서 보여 줬던 색의 미묘한 변화를 유화에서도 구현할 수 있었다.
터너는 불길이나 폭풍우, 눈보라같이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극적인 주제를 좋아했는데, 풍경을 자세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대신 추상적인 색채로 채워 생생한 감정과 느낌을 전달코자 했다. 그의 기차 그림에서 우리는 색채의 소용돌이만으로도 빛과 대기, 폭풍우 치는 날씨, 그리고 증기기관차의 속도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요란스럽게 기차를 두드리는 폭우, 폭우가 내리는 바깥세상을 단절시킬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기차. 굉음이 천지를 진동시키고 철마가 내뿜는 연기는 비와 뒤섞여 근대적 장관을 연출한다. 제목에 들어 있는 비, 증기, 속도는 모두 이전 시대에는 미술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터너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기차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기차의 ‘속도’와 ‘증기’라는 근대적인 현상이었다.1
영화 〈미스터 터너Mr.Turner〉(2014) ⓒIMDb.
터너는 동시대 생활 장면을 자주 그렸으며, 특히 당시 눈부시게 발전하던 산업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증기기관차를 포함한 새로운 형태의 교통수단도 자주 이용했다. 그림 속의 기차는 터너에게 신기하면서도 친숙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터너는 왜 기차 창문 밖으로 몸을 뻗었을까? 철도의 빠른 속도를 직접 몸으로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상업용 열차 운행을 시작한 이래, 철도는 당시 영국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철도가 처음 개통되자 영국 사람들은 이 새로운 교통수단이 보여 주는 힘과 속도, 그리고 그것이 제공하는 신기한 경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매료되었다.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도 철도 건설사업이 시작되어 1830년대가 되자 전 유럽이 철도망으로 연결되었다. 지금까지 체험해 보지 못한 빠른 속도가 등장한 것이다. 1837년에는 미국의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하여 정보 전달 속도가 이전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이 빨라졌다. 빠른 속도의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2
이동과 정박이 급변하던 시대, 모빌리티 혁명과 함께 점차 도시화·세계화되는 공동체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와 무역이 크게 발전하면서 항구도시들의 성격도 크게 변화했다. 1809~1849년 40년 사이에 영국의 수입은 3배, 수출은 5배 증가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이 야기한 산업혁명과 이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터너를 비롯한 당대 유럽인들은 시커먼 증기기관차의 빠른 속도에 경외감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난 수세기 동안 고수해 오던 삶의 양태가 급변하는 것에 혼미함을 느꼈다.
영국인들이 가장 간직하고 싶은 그림 1위로 꼽히는 〈전함 테메레르〉는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시대적 전환을 겪던 당대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을 잘 담아낸 작품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전함 테메레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무적함대로 불리던 스페인 함대와 나폴레옹 군대 연합군에 맞서 넬슨 제독이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한 전설적인 배로,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국민영웅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배의 수명인 30년이 지나고 증기선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림이 제작된 1838년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보통 해체되는 배에는 돛을 달지 않는데, 터너는 테메레르호에 3개의 돛을 달아 마지막 예우를 다하고 있다.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 tugged to her last Berth to be broken up〉, 1838, 91×121.8, National Gallery, London.
수평선 위로 기울어진 태양은 전함의 쇠락을 대변하고, 증기선이 뿜어내는 붉은 연기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린다. 화폭을 절반 이상 메운 석양은 상실과 향수의 이미지로,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서글프게 사라져 가는 지난 시대의 종언을 잘 드러낸다. 잔잔한 수면과 흐릿하게 표현된 색감이 보여 주는 쓸쓸함은 지기 전 마지막으로 작렬하는 태양이 만들어 내는 붉은 노을과 대비되어 지나가 버린 명예의 뒷모습을 강조한다. 산업혁명 이후 이루어진 수많은 기술혁신 중에서도 증기선은 새로운 근대문명 시대를 예고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터너는 옛것과 새로운 것이 교체되는 광경, 목선木船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한 시대가 마감하고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풍경을 담아낸 것이다.
영화 〈007 스카이폴〉(2012) ⓒIMDb.
영화 〈007 스카이폴007Skyfall〉(2012)에는 007 시리즈 중 가장 나약한 제임스 본드가 등장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캐릭터인 제임스 본드가 이 영화에서는 쇠약해진 체력과 정신력을 드러내는 ‘한물간’ 영웅으로 그려진다. 오랜 공백기 끝에 다시 부름을 받은 제임스 본드에게, 젊고 패기 넘치는 인물Q는 “시간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법”이라는 대사를 건넨다. “빌어먹을 그냥 큰 배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지만, 사실 본드 역시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 앞에서 자신 역시 무력한 존재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의미심장한 조우가 이루어진 장소가 터너의 그림 〈전함 테메레르〉와 〈비, 증기, 속도〉 앞이라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 세부.
터너는 산업의 발전 및 기계의 발달을 무작정 두려워하거나 경이로워하는 대신, 그러한 신진 기계문명과 자연의 모습,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던 과거의 생활을 함께 암시한다. 〈비, 증기, 속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레일 트랙을 따라 달리는 토끼가 가벼운 터치로 그려져 있다. 엔진의 기계화 속도와 대조적인 자연 세계의 속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한, 시커먼 증기기관차 양옆으로 밭을 가는 농부와 신화적이고 전원적인 분위기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산업혁명의 어두운 면모를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환경오염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공장 오수로 오염된 템스강의 검은 빛깔은 흰 배경으로 인해 더욱 도드라지고, 해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의 런던 하늘은 스모그 때문에 더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거대하고 숭고한 자연과 그러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의 기술이 대결하는 시대의 풍경을 평생에 걸쳐서 화폭에 담아낸 터너는, 말년에 이르러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속도에 대해 진지하게 반추한다. 한평생 혁신과 변혁을 경험한 터너는 인생이라는 추상적인 시간이 어쩌면 과거와 현재의 무수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들의 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감정과 기억. 순간적인 동시에 연속적인 것들을 즉각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터너의 그림 속, 모빌리티는 속도다.
각주
클로드 모네Claude Monet(프랑스, 1840~1926),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 1877, 75×104, Musée d’Orsay, Paris.
기차역 가득히 연기를 뿜어 대는 기차의 기세가 당장이라도 그림을 뚫고 나올 듯하다. 기차는 세상의 주인공이고, 주변을 서성이는 몇 명의 인물들은 그림의 일부로 느껴진다. 견고한 철골 구조물은 증기 속으로 해체된다. 이 그림의 작가 모네는 빛과 움직임을 묘사하는 데 각별한 의미를 두었고, 빠른 묘사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생 라자르 역〉에서도 빠르고 거친 붓의 움직임이 보이는 듯하다. 그림 속에서 빛은 사방으로 맹렬하게 퍼지면서 모든 것을 비물질적으로 만든다. 19세기 후반에 기차역은 단순히 기차를 타고 내리는 장소를 넘어 과학 문명과 진보를 상징하는 장소였다. 모네는 기차역을 자세히 관찰하고자 기차역 인근에 작업실을 얻어 10여 점에 달하는 역 그림을 제작했다.
이 연작은 모네가 증기의 효과가 대기에 미치는 영향을 포착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생 라자르 기차역에 관한 많은 작품들이 단편적이고 습작인 데 반해, 이 작품은 가장 완벽한 형태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7년 4 월에 열린 세 번째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여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모네는 기차의 속도감이 자기의 그림과 잘 들어맞는다고 여겼을 법하다. 철도가 모더니즘을 상징하고, 모더니즘과 모빌리티의 관계를 드러내는 시대였다. 1840년 이후 한 세기는 아마도 사람들의 이동 방식이 가장 빠르게 변화한 시기일 것이다. 비교적 소규모였던 운하여객 교통은 쇠퇴했고, 철도는 빠르게 확장했다. 날로 뻗어 가는 철도 확장을 수용하기 위해 역, 터널, 다수의 측선側線들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새로운 교통기술의 발전은 종종 직간접적으로 도시 공간 근대화와 연계되었으며, 자전거나 보행과 같이 기술적으로 단순한 구식 교통수단들을 점차 도로 공간 주변으로 밀어냈다.1
편리해진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모네와 친구들은 부지런히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1870년 모네는 프로이센 전쟁 징집을 피해 아내 카미유와 함께 런던으로 건너갔고, 1871년까지 영국에서 바람, 비, 구름, 햇빛 등의 대기현상을 담은 터너와 콘스터블JohnConstable(1776~1837)등의 영국 풍경 화가들의 그림을 관찰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모네는 근대성의 표상인 기차를 주제로 여러 점의 그림을 남겼다. 1871년 아르장퇴유Argenteuil에 정착한 모네는 1878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무려 200여 점의 그림을 남김으로써 ‘인상주의 회화의 화려한 탄생’을 알렸다.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의 철교Le Pont du chemin de fer à Argenteuil〉, 1873, 54×71, Musée d’Orsay, Paris.
증기를 내뿜으며 철교 위를 달리는 기차, 청명한 하늘에 뜬 구름, 햇빛으로 반짝거리는 수면이 조화를 이루는 〈아르장퇴유의 철교〉(1873)에서 볼 수 있듯이, 모네는 철도교를 모티프로 한 근대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19세기 들어 철도교를 비롯한 근대식 다리가 회화의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 것은 교통 발달과 건설공법의 발전으로 다리가 많이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산업화된 근대 파리의 모습과 인상주의 원리의 결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소재였던 만큼, 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속에는 기차와 철교가 자주 등장한다. 1870년대 모네와 어울렸던 주요 인상주의자 동료들, 카유보트, 피사로, 르누아르, 드가, 기요맹, 라파엘리, 심지어는 마네조차도 철도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며 근대 풍경화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근대사회의 역동성을 포착하고자 했던 인상주의가 발휘하는 강력한 힘은 주제의 근대성과 회화 매체를 솔직하고 자유롭게 드러내는 독창성에 기인한다.2
인상주의자들은 다른 어떤 화가들보다도 산업화의 수혜를 입은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생산된 튜브에 담긴 질 좋은 물감을 사용할 수 있었고, 간편한 화구를 가지고 야외로 나가 순간순간 변화하는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이 다른 어느 시대의 화가들보다 쉽게 여러 곳을 여행하고 다양한 풍경을 그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발달이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꼽힌다. 동시대의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EmileZola(1840~1902)는 “이전의 화가들이 숲과 강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시정詩情을 표현했다면 오늘날의 화가들은 기차역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철도는 사람들이 지나치는 공간과 이동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인상주의자들은 이러한 근대 산업문명에 기대어 시각혁명을 도모했다.
문명과 합리적 사고를 상징하는 철골과 유리가 사실적으로 표현된 생 라자르 역 지붕 아래 기차가 들어오고, 기차가 내뿜는 푸른색 증기 뒤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파리의 건물들은 마치 신비에 휩싸인 양 형체가 희미하다. 역 안쪽의 인물들은 작고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물에 대한 분석적 접근과 몽환적 분위기는 모네 자신의 갈등을 잘 드러내 준다. 과학 문명과 감성적 표현예술의 대립이라는 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진 각자의 사색을 통해,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렸다.
1867년 모네와 바지유FrédéricBazille(1841~1870)를 비롯한 몇몇 화가들이 그룹전을 구상했다가 경제적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1873년 다시 그 안이 제기되었다.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그룹전에 찬성하였고, 카유보트와 세잔 등도 관심을 보였다. 모네를 중심으로 협회 설립정관을 몇 차례에 걸쳐 수정한 후, 1874년 1월 17일 서른 명 정도가 모여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가 탄생하였다. 이들은 협회 명칭을 ‘무명 화가, 조각가, 판화가 협회SociétéAnonymedesartistespe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