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재 / 뽀사장
평범한 월급쟁이로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의 생활을 중 시한다. 고단한 인생에 있어 오아시스 같은 요행이란 애초부터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며, 모든 사람 은 저마다 불평등해질 권리를 갖는다고 믿는다. 생각을 모아 글을 쓰고, 끼적인 글들로 말하는 걸 즐긴다. 부동 산은 그 주제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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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부자가 되기보단 내 삶을 지키고 싶었다
뼈 때리는 부동산
초판 1쇄 발행 2022년 12월 5일
지은이 이희재
펴낸곳 크레파스북 펴낸이 장미옥
편집 정미현, 이상우, 김용연
디자인 김지우 마케팅 김주희
출판등록 2017년 8월 23일 제2017-000292호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성지길 25-11 오구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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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ISBN 979-11-89586-52-2(03320) 정가 18,000원
전자책 ISBN 979-11-89586-54-6(05320) 정가 12,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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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원정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보상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자.
등산이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 대장의 대사 中
그래, 인생이란 말이다. 우리가 인생이란 원정길 위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어쩌면 지금의 나를 정상에 올리기 위함이 아니라 지켜야 할 사람을 위해,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 어딘가에 가지런히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결정은 때론 무겁고 두렵지만, 그 자체로 소중하고 존엄한 것이다. 설령 어떤 명예도 보상도 돌아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혹여 가다 길이 좀 끊기면 또 어떠랴. 그렇다고 이제 와 처음으로 되돌아 갈 수도 없는 여정인데 말이다. 그저 봇짐 한 번 고쳐 메고,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의 손 한 번 꽉 붙들고, 그렇게 가다 보면 더러는 또 없던 길도 새로이 나타나는 법이다. 살다보면 말이다.
내 삶을 바꾼 결단
군가 ‘청룡은 간다’의 가사 그대로,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소속 청룡부대가 얼룩무늬 번쩍이며 월남의 정글로 향했던 1965년 가을, 한 중년 부부도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이삿짐 가득한 용달차 2대에 몸을 실었다. 영동고속도로도 뚫리기 전인 그 시절, 비포장 국도를 위태롭게 내달리는 용달차 안, 부부의 옆자리와 무릎 위에는 고등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서너 살 터울의 아이 넷도 함께였다. 지천명을 넘긴 남성이 처자식과 함께 반평생 살던 고향을 등지고 새로이 둥지를 튼 곳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254-160번지 솔샘길 골목, 높은 담장이며 정원까지 딸린 제법 모양을 갖춘 양옥집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처분한 전 재산 가운데 집 한 채를 사고 남은 돈으로 8대의 중고 버스를 매입해 당시 청수장에 종점을 둔 동양운수 3번 노선을 창업했다고 한다. 아들이며 딸자식 시집, 장가갈 때 고생 안 하게 버스 한 대씩 팔아 살림 밑천 삼아주겠노라며 말이다. 60년이 다 된 내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70년대 후반, 막내를 뺀 자식 셋이 모두 혼인하자 할아버지는 홀연 운수업을 정리하고 관악구 신림동 신대방역 앞 단독주택으로 이사하셨다고 한다. 이유는 몰라도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기기로 하신 마당에 이왕이면 관악구 말고 강남구나 서초구였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 원주에서 서울로 이사하던 1965년도에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막내는 그즈음 군대를 막 다녀와 첫 눈에 반한 동갑내기 여인과 결혼했고, 1979년 겨울, 젊은 부부는 신림동 어딘가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외동아들을 얻었다. 임춘애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라면만 먹고도 3관왕을 차지했던 1986년,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이를 데리고 분가한 부부가 자리 잡은 곳은 강서구 신월동 곰달래길 사잇골목 어딘가에 있는 3층짜리 연립주택이었다. 2년이 지나 마침 위층 살던 재구 엄마의 간곡한 권유를 들은 젊은 아내는 남편과 상의 끝에 당시 프리미엄 800만 원을 더해 3,0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난생 처음 27평짜리 아파트를 사기로 결정했다. 한창 신축이었던 목동 7단지였다. 30년도 넘은 내 부모님의 이야기다.
올림픽이 열리고 양천구가 강서구에서 분리되던 1988년 그해 여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난, 그렇게 용달차 2대를 앞세우고 결혼 전까지 이후 무려 25년을 살게 될 목동 7단지에 입성한다. 그건 한창 ‘손에 손잡고’ 가사를 외우고, 강시 부적을 그리는 데 재미를 들였던 초등학교 3학년 철부지가 난생처음 엘리베이터가 달린 아파트를 경험했던 일생일대의 사변이자, 결과론적으로 이후의 내 삶을 바꾸어 놓은 분기점이었다.
난 말이다. 이따금 그런 상상을 한다.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가 60년 전, 전 재산을 처분해 이촌향도를 감행하지 않고 강원도 원주에 주저앉으셨다면, 35년 전 내 부모님이 목동 아파트가 아닌 조금 다른 선택을 하셨더라면, 그렇다면 아마 나 자신은 그대로이되, 지금의 나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아찔하고도 부질없는 상상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난, 뒤에서 잠시 얘기하게 될 신혼시절 내 선택까지 더해 우리 삼대(三代)가 저마다 각자의 인생길 위에서 내렸던 그 세 가지 결단이, 세월과 세대를 이어 결국 지금의 내 두 딸아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인생까지도 어느 정도는 결정지었다고 믿는다. 60년 전 할아버지의 선택이 아버지에게, 그리고 35년 전 아버지의 선택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말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더없이 퍽퍽하고 촘촘한 격동의 세월을 오롯이 견뎌냈다고 해서, 그들이 인생의 갈림길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건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난 5년 동안 벼락거지와 벼락부자 가운데 양자택일을 끊임없이 강요당한 우리네 삶보다 더한 질곡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면한 격동의 세월을 회피하기보단 정면으로 맞섰고, 그런 선택 덕분에 아이러니하지만 풍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어쩌면 앞으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아챈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이 나라 20, 30대 하위 20% 평균 자산이 2,473만 원으로 전년 대비 64만 원 증가에 그치는 동안, 상위 20%의 평균 자산은 8억 744만 원으로 같은 기간 7,031만 원 늘어났다. 110배의 차이다. 이제 어지간한 서울, 경기도의 살 만한 아파트 입장권이 10억 원을 넘긴 상황에서 이 땅의 20, 30대들은 근로소득으로 집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었다. 이제 그런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눈알 시뻘게질 때까지 들여다보는 주식이나 코인, 아니면 여행과 맛집 투어 정도다. 이제 어디에 집을 사느냐 마느냐, 새로이 짓느냐 마느냐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던 세상은 강제로 끝이 났다. 지금은 사퇴한 어느 국회의원의 말마따나 임대인에게는 목돈과 이자 활용의 기회를, 임차인에게는 저축을 통해 내 집 마련의 기회를 제공했던 전세 또한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렇다. 내 집도 없고, 전세도 없으니 갈 곳이라곤 월세 집뿐이요, 매달 벌어 매달 빠져나간 뒤 그깟 푼돈으로 주식이며 코인 좀 사본들 결과는 뻔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어디서 어떤 투자를 해 얼마의 수익을 올렸단 도장깨기 식의 화려한 무용담도 아니요, 일타 강사가 수능 문제를 찍어주듯 청약 전략이나 경매 낙찰 노하우를 알려주는 족집게 지침서도 아니다.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는 저평가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서둘러 사놓으면 훗날 돈 좀 될 거란, 아니면 말고 식의 사이비 천기누설은 더더욱 아니다. 나 스스로조차 그런 유망한 투자는 일찍이 배우지도 해보지도 못했거니와, 원래가 고단한 인생에 있어 달콤한 오아시스 같은 요행이란 없다고 믿는 까닭이다.
그저, 말하자면 그냥 이런 거다.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와 내 식구들이 어떻게 하면 부침 없이 평범하고 사납지 않게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일상의 이야기, 화려하지만 결국은 남의 집 빌려 쓰는 그런 빛 좋은 개살구보단 남루할지언정 어디든 내 집 하나 장만하고 사는 편이 낫다는, 그간 스스로 질문했던 고민의 편린 같은 거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네 삶의 궤적이 크게 다르지 않은 탓에 특수한 상황의 소수를 제외하곤 동시대를 공유하는 많은 이들의 고민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 두서없는 끼적임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무언가 공감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또는 그녀의 삶이 단 1㎝라도 나아지는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내겐 더 없는 기쁨이겠다.
Part 01
우리가 세상과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예요.
영화 <도가니>에서 유진이 인호에게 보낸 편지글 中
나약한 우리가 끊임없이 이 세상과 싸우고 있는 이유는 사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나와 내 소중한 가족을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난 지금껏 그래왔듯 내가 선 자리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계속해 세상과 싸워 나갈 것이다. 이깟 세상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깟 세상이 나와 내 식구들을 제 맘대로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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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궤도를 바꾼 나의 첫 부동산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3년 가을, 결혼할 당시 아내와 내가 가진 자산은 1억 3천이 전부였다. 처음부터 받고자 했다면 양가 모두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도움을 주실 경제적 여력은 됐었고, 굳이 그게 싫었다면 그저 눈 한 번 질끈 감고 본가나 처가에 들어가 급한 대로 주거문제부터 한 수 접고 시작했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아내와 난 그때까지 모아둔 각자의 돈 8천씩을 합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홀로서기를 택했다. 이제 와 난 그때 우리의 선택을 두고서 치기 어린 오기였다 애써 폄훼하고픈 마음도, 개념 있는 호기였다 굳이 추켜세우고픈 마음도 없다. 누구나 그렇듯 당시 우리는, 각자의 인생길 위에서 그저 나름의 치열한 고민과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한데 모은 1억 6천 가운데 결혼식에 필요한 ‘스드메’며 신혼여행 비용으로 3천을 미리 제하고 남은 1억 3천에다 전세 대출 4천을 더해 우리가 얻은 첫 신혼집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있는 21평짜리 낡은 복도식 아파트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2013년은 2, 3차 뉴타운 대부분이 첫 삽도 뜨기 전으로, 은평과 왕십리 정도만이 겨우 뉴타운 딱지를 붙이고 있을 때였다. 강남을 뺀 어지간한 서울 역세권 대단지 매매가가 59㎡는 4억, 84㎡는 5억대 중반으로 현재 같은 면적 전셋값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2000년대 후반 불어닥친 금융위기로 서울 아파트값 대부분이 전고점에도 이르지 못해 하우스 푸어를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나라에선 경제부총리까지 나서 원하는 만큼 기꺼이 돈을 빌려줄 테니 빚내서 제발 집 좀 사라고 간곡히 부추기기까지 했던 터에, 맞벌이로 각자 직장도 제법 탄탄했으니 집값의 70~80%를 당겨 내질러도 그만이었지만, 매사 성격이 사납지 않은 아내의 간곡한 만류로 타협을 본 게 대출 4천 낀 전세였다.
그리고 전세 한 바퀴가 돌아 2015년이 됐다. 2015년은 지금보다 청약과 전매가 느슨해 여기저기서 ‘묻지마 청약’과 ‘소액 P팔이’가 들불처럼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이즈음 첫째 아이 출산과 맞물려 거주공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던 난, 아내를 설득해 눈여겨보던 서울 뉴타운 한 곳의 특별 공급 물량에 청약했고, 운 좋게 당첨됐다. 다시 2년이 흘러 2017년 둘째가 태어났고, 그즈음 대통령이 바뀌었다. 지금 이 모든 불행의 서막이었던, 그해 8월 2일 발표된 일련의 대책들을 보고 겪으며, 이듬해 2018년 나는 서울 어느 뉴타운에 있는 아파트 하나를 추가로 매입했고, 그렇게 다시 4년이 지났다.
적어도 부동산에 관해 내가 지난 9년 동안 한 건 고작 그게 다였다. 부동산 이견으로 부부간에 칼부림까지 나는 세상, 지금 기준에서 매매가 아닌 전세를 택했던 9년 전 우리의 선택을 반추하면 분명 최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7년 전 선택과 5년 전 결단의 밑거름이 돼주었다는 점에서 또한 최악도 아니었으니, 인생이란 역시 아이러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올해 결혼한 어떤 부부가 9년 전 우리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2년 뒤, 그리고 4년 후 지금의 우리와 같은 수준의 궤도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 말이다. 9년 전, 우리 부부가 집을 사지 않고 신혼 첫 집으로 전세를 택했던 것이 우리가 동년배들에 비해 대단히 멍청해서가 아니었듯이, 이후 집을 산 것 또한 우리가 그 시점의 그들에 비해 대단히 똑똑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판단이요 자유의 영역일 뿐, 옳고 그름의 잣대로써 재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명색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한 개인이 어떠한 판단 착오를 했더라도 본인이 이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경우 늦게나마 다시 보통의 궤도로 재진입할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생태계가 항시 작동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9년 전 결혼 이래 조우했던 그 몇 번의 길목에서 그때의 내가 만일 조금 결이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그리고 아내가 그때의 내 결단과 제안을 그처럼 지지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아마 우리 가족은 지금쯤 굉장히 다른 궤도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강남이야 좀 제쳐두더라도 지금 어지간한 뉴타운에서 재산세와 종부세로 앓는 소리 꽤나 낸다는 사람들 대부분은 실상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리 대단한 재력가들이 아니었다. 9년 전 우리 부부처럼 당시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었던 그들이 결혼과 출산을 전후해 기껏 한 것이라곤 박근혜 정부에서 서류 몇 장과 맞바꾼 대출로 아파트 한두 채 산 게 전부였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에 와 가족 전체의 인생이 바뀐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재밌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광명시 철산동 언덕배기 21평에 전세로 들어가던 2013년, 인근에서 제일 비쌌던 아파트는 ‘철산푸르지오하늘채’와 ‘철산래미안자이’였고, 84㎡ 가격이 막 5억을 넘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근처 5억짜리 자가에 살던 어느 40대 중반의 부부가 중학교 진학을 앞둔 자식 교육을 위해 살던 집을 팔고서 그 돈으로 학군지를 찾아 서울 어디 목동쯤에 있는 비슷한 평수 아파트에 5억짜리 전세로 들어갔다고 치자. 당시 목동 대장 7단지 36평 매매가가 9억 언저리였으니 이 부부야말로 마음만 먹었다면 대출 좀 끼고 목동 7단지를 샀어도 그만이었던 상황이었고, 하다못해 정히 목동에 전세로 가려거든 철산동 자가는 세를 놓고 가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들은 기어이 살던 내 집을 팔고 남의 집에 전세 들어가기를 택했고, 그러는 사이 정권이 바뀌었다.
일상에 치이고 관성에 이끌려 살다 보니 중학교 진학을 앞뒀던 아이는 어느새 대학에 들어가 군대까지 갔는데, 그 세월 전세 서너 바퀴를 돌고 나니 9억 언저리에 살 수 있었던 목동은 25억이 됐고, 5억에 팔았던 철산동은 11억이 됐다. 깨알 같은 임대차 3법 덕분으로 깔고 앉은 보증금 5억에 그간 주식이며 적금으로 알뜰살뜰 모아둔 돈 몇 푼 보태본들 이제 와 목동은 고사하고 철산동 25평 전세도 빠듯한 형편이니, 그저 애 하나 키우며 숨만 쉬고 살았을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그야말로 오도 가도 못 하는 ‘벼락거지’가 됐다. 우린 지금 그깟 전세와 매매를 선택하는 것에 가족 전체의 인생을 걸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벼락부자와 벼락거지 중 어디에 속할지 인생의 아이러니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시차만큼 매매가와 전세가 모두 지금보단 무척 저렴했고 원하는 만큼 대출도 받을 수 있었다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수중에 있는 1억 3천으로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 들어가기란 9년 전 그때도 결코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차도 있고 여차하면 몸으로 때울 수 있는 내 출퇴근이야 아무래도 그만이었지만, 강남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아내를 위해 집 주변의 지하철역이 간절했고, 한평생 고생시키지 않겠노라 데려와 놓고 아내에게 볕도 잘 들지 않는 허름한 빌라에다 신혼살림을 풀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확한 날짜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이 한 웨딩 박람회에 다녀왔던 날이란 것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무척이나 추웠다는 건 또렷이 기억한다. 어지간히 늦은 밤, 미리 알아놓은 5호선 우장산역 근처 한 신축 빌라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아내와 난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서로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문득 아내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오빠, 지하철역도 가깝고, 저런 아파트는 들어가려면 많이 비싸겠지?”
아내는 아마도 그날 일을 기억조차 못 하겠지만, 그때 아내가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우장산아이파크이편한세상’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였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머지않은 훗날 만나게 될 아이를 위해,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을 위해, 꼭 아늑한 아파트 한 칸은 마련해 주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순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그때, 2,500세대가 넘는 ‘우아이’는 바로 옆 2,600세대 ‘강힐’과 겹쳐지며 반평생 아파트에 살아왔던 내 눈에도 유난히 높고 화려하게 보였더랬다. 그리고 한편으론 일순간 무력감이 몰려왔다. 우리 앞에 펼쳐진 그 아파트들이 마치 가난한 소시민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너무도 공고한 중세 시대 영주의 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살짝 접어두는 페이지요.
책 읽을 때 그러잖아요?!
열심히 잘 읽어가다가 잠시 멈출 때,
언젠가 다시 그 책을 집어 들 순간을 위해서
다시 찾기 쉽게 페이지를 접어두잖아요.”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
서준이 단이에게 했던 대사 中
9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그날은 여전히 내게 있어 마치 책을 읽다가 살짝 접어둔 페이지와 같다. 부동산에 있어서만큼은 몇 년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돼버린 탓에 한동안 한 발짝 떨어져 지냈지만, 언젠가 스스로의 집 문제로 다시 고민할 순간이 왔을 때, 망각하고 있던 집에 대한 생각과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킬 수 있도록 살짝 접어둔 페이지 말이다. 내게 평생을 두고 쓸 그런 소중한 책갈피를 선사해 준 아내에게 뒤늦은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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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벼락거지들에게 건네는 레퀴엠
기다림이란 그런 것이다. 고사리손으로 꼼꼼히 그려낸 그림 한 장을 자랑하고 싶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퇴근이 늦어지는 아빠를 기다리는 5살 아이의 마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자책하며 그 미안한 마음을 오롯이 담아 자식에게 먹일 한 끼 밥의 지루한 뜸을 기다리는 엄마의 마음, 그런 거 말이다. 그래서 기다림이란 어쩌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설렘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도, 선택의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우린 늘 가슴 설레는 상상에 빠지곤 한다. 소신 있게 지원한 대학의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을 때도, 간절했던 회사에 면접을 보고 났던 후에도, 고민 끝에 고른 첫 차의 인수를 기다렸을 때도, 아내의 결혼 승낙을 기다렸을 때도, 그리고 알량한 전 재산을 걸고 일생의 승부수를 던졌던 아파트 청약의 당첨자 발표를 기다렸을 때도, 지난 20여 년간 내 인생을 스쳤던 수많은 기다림은 늘 아찔하고 힘겨웠지만 역설적으로 내게는 삶을 지탱해준 설렘이기도 했다.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우리네 삶은 너 나 할 것 없이 닮아 있는 까닭에 아마 많은 이들이 살아가며 겪었을 저마다의 기다림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나브로 세상엔 더 이상 기다림이 없어졌고, 어쩌다 생겨난 드문 기다림은 설렘이 아닌 고통과 절망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단군 이래 단 한 순간도 녹록한 적 없었던 세상살이라지만, 그래도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렵사리 취직해서 적으나마 월급 차곡차곡 모아 월세에서 전세로 갈아타고, 그렇게 다시 몇 년 구르다 모아둔 전세 보증금에 은행 대출 좀 보태면 내 집 마련할 날이 언젠가 올 거라 믿고 살았더랬다. 하지만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게 더 많은 규제 일변도의 부동산 정책이 시작된 어느 시점부터, 집값은 더 이상 근로소득만으론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저 멀리 달음질쳤고, 그 간극을 메워 줄 대출은 오히려 줄어들다 못해 불가능해졌다. 대출을 옥죄니 이리저리 다른 경로로 돈을 끌어모아 집 사느라 ‘영끌’이란 신조어가 생겨났고, 그 영끌조차 힘든 이 땅의 2030들은 스스로를 ‘벼락거지’라 칭하며 자조하기에 이르렀다.
넘쳐나는 유동성에 정권의 무능함까지 더해져 집값은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전의 전고점을 넘어 몇 년째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는데, 평온한 주말 댓바람부터 청와대 비서관이 강남에 있는 집 대신 세종시에 있는 집을 팔았다는 게 주요 포털의 속보로 뜨고, 공무원 신분으로 세종시에 특별 공급을 받았음에도 실제로는 한 번도 거주하지 않고 매각하는 ‘튀튀’가 여기저기 성행하는가 하면, 집을 파느니 아예 승진을 포기하겠다는 공무원들이 생겨나는, 부동산 광기의 시대를 우리 모두는 지나왔다.
업무상 알게 된 정보를 도둑질해 개발 예정 구역 필지를 잘게 쪼개 부모, 배우자, 자식 명의까지 들이대며 거액의 대출을 받아 100억 원대 땅을 매입한 LH 직원들, 자신이 그곳 사장으로 있을 때 벌어진 직원들의 범죄행위를 두고서 개발 정보를 알고 투자한 건 아닌 것 같다고 두둔하는 장관, 투기는 투기이고 공급대책에 대한 신뢰가 흔들려서는 안 되니 오히려 더 속도감 있게 추진돼야 한다는 대통령, 그리고 내부 게시판에 LH 직원이라고 부동산 투자하지 말란 법이 있느냐고 도리어 따져 물은 그들, 이쯤 되면 부동산을 논하기에 앞서 이미 이 나라는 정의와 상식이 집단으로 마비된 광란의 도가니와 다름없었다. 영끌로 코딱지만한 집 하나 겨우 장만한 탓에 그 잘난 취미는 고사하고 삼시 세끼 맨밥만 먹으며 몸테크하거나, 그나마 영끌할 지푸라기조차 없어 욜로나 외치며 월세방을 전전하는 이 땅의 벼락거지들에게 과연 저 LH 사태는 무슨 의미요, 어떤 메시지였단 말인가?
서울 어지간한 동네와 좀 잘 나가는 경기도는 이미 4~5년 전 같은 면적의 강남 집값을 넘어섰고, 같은 아파트 안에서도 지금의 전셋값은 그때의 매매가보다 비싸졌다. 그렇게 나라 전체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어 올리는 통에 그저 하염없이 떠밀려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압구정, 반포는 40억, 대치와 개포는 30억, 마·용·성 20억에, 이하 나머지 뉴타운들도 15억을 전후해서 네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저마다 키를 맞춘다. 그 틈에 동남쪽에선 분당을 중심으로 판교가 20억에 광교도 15억인데, 서쪽에선 저 아래 있던 김포와 파주까지 1~2년 새 몇억이 뛰어버리니 이런저런 이유로 잠시 거래가 정체된 서울 어디쯤보다 비싸거나 거의 근접해서 실거래가가 등재되기도 했다. 그래도 명색이 서울인데 경기도에 역전될 수는 없다며 다시 호가를 높이지만, 15억 대출 상한선을 중심으로 헤쳐 모인 촘촘한 그물 탓에 사방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니 누구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마음만 답답했었다.
근데 말이다. 뻔질나게 호갱노노에 들어가 하루 사이 1~2억이 올랐다가 떨어졌다 하는 그깟 ‘부루마불’ 호가를 살피는 것보다, 지금 시점에서 실상 우리가 경계하고 고민해야 할 것은 정작 이런 것들이다. 시절 하나 잘 타고난 덕분에 지금 세대보다 분명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걸 움켜쥔 채 세상 고상한 척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헛소리나 해대는 기득권 세대를 2000년대 들어 줄곧 욕했던 우리가, 지금에 와 적어도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저 기득권 세대보다 나을 건 또 무엇인가 하는 뼈아픈 지점 말이다.
건물은 감가돼 언젠가 사라질지언정 그걸 떠받치고 있는 땅은 영원하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부동산은 종류를 불문하고 훗날 내 물건을 내가 매입했던 가격보다 비싸거나 최소한 물가상승률이 반영된 수준에서 받아 줄 매수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숙명을 지녔다. 그래야 비로소 소유의 이유가 생기게 되는 까닭이다.
대출과 구매의 요건까지 완벽히 통제된 지금의 비정상적 상황이야 언젠간 원상 복구될 거라지만, 그래도 가슴 한구석 갑갑함은 여전히 남는다. 타고난 금수저가 아닌 바에야 어지간한 근로소득으로 단돈 1억 모으기도 녹록지 않은 게 또 세상살이인데, 정책이 바뀌어 예전처럼 계약금 10%만 있으면 집을 살 수 있거나, 가파르게 오르는 금리 탓에 그야말로 4~5억씩 ‘하락’해 ‘줍줍’할 수 있는 호시절이 다시 온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이미 집값의 스펙트럼 자체가 닿을 수 없는 범위까지 멀어진 마당에 과연 다음 세대의 근로소득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본질적 의구심 말이다. 다시 말해, 어지간한 뉴타운 84㎡가 폭락해 대충 10억이 됐다 치고, 계약금과 부수비용 2억은 모아둔 내 종잣돈으로 어찌 충당한다고 쳐도 나머지 8억을 30년 상환으로 대출받으면 시중금리를 4.5%만 적용해도 당장 갚아야 할 원리금이 매달 4백을 넘기는 마당에 대출이 된다 한들 어차피 집 못 사는 건 매한가지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 내 집을 받아 줄 다음 세대가 없으니 무한정 자녀와 또 그 자녀들에게 대물림을 할 것인가? 그렇게 증여를 통해 이어간다고 쳐도 최소 한 세대에 한 번꼴로는 재건축을 해야 할 텐데, 지금과 같은 도시개발 프로세스로 내 손자, 손녀 세대에 가서는 도대체 용적률은 몇 퍼센트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때 서울의 집값은 또 얼마가 돼 있어야 그 시점의 그들에게 손익계산이 맞다는 것인가? 이왕지사 이 급류에 발을 담갔으니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떠밀어도 이제 와 발을 뺄 순 없는 노릇이다. 기다림이 없어진 세상, 지금 우리 모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머니의 등쌀에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나니
꿀맛 같던 신혼도 잠시 아이를 낳고 나니
더욱 무거워진 아버지란 위치는 돌덩이를 지고 사는 자리
때 이른 퇴근길 천 원짜리 과자를 사 들고 집 들어서니
못난 애비를 반기는 토끼 같은 자식
호두과자를 어찌나 맛나게 먹던지
이놈들을 보니 더욱 빨리 뛰어야지
쑥쑥 커나가는 나만의 공주님
집을 마련하고 이제는 허리 좀 필까 했더니만
결혼 자금에 또 등이 휜다
평생 번 돈을 다 내주고 보니
내 마누라 머리 위에 내린 하얀 서리
이제는 좀 마누라랑 살갑게 살려 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쑤시고
자식 놈들 찾지 않는 썰렁한 이 내 맘도
손주 녀석 재롱 보니 다 풀리고
용돈을 주는 재미에 하루 이틀 살다 보니
관 속에서 누우라고 손짓하고
아버지와 내 어머니도 이렇게 살았구나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 흐르고
꽃 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갈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MC 스나이퍼 정규 6집 <Full Time> 7번 Track
<인생, Feat. 웅산> 가사 中
스스로를 자조하고 있을 이 땅의 2030과 잘못한 거 없이 어느 날 벼락거지가 되어버린 모두에게, 구태여 고상한 척 미사여구 가득한 위로를 건네고픈 마음은 일절 없다. 내가 잘난 것도, 네가 못난 것도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냥 말이다. 그저 뭐가 됐든 지금 위치에서 기다림 하나 정도는 저마다 가슴 한편에 품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나 꽃 지듯 살다 갈 인생, 그래도 돌아볼 때 아름다운 인생이었노라 미련 없이 말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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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의 집 한 채를 갖는다는 것
그 썩어빠진 아파트가 18억이라는 거 자체가 이해가 안 됨. 무슨 40년 된 주공아파트처럼 생겨서는… ㅉㅉㅉ
다 무너져가는 아파트를 15억 넘게 주고 사느니 그 돈 갖고 깔끔한 신도시에 좋은 거 하나 사겠다. ㅋㅋ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무너져가는 아파트를 그 가격 주고 사겠냐? 어차피 그들만의 폭탄 돌리기지!!!
그 돈 주고 그 썩은 아파트를? 한 3~4억 안쪽이 적당함~ ”
4년 전 겨울, 3기 신도시 예정지는 후끈한 반면, 은마아파트는 호가가 3억이 내렸는 데도 관심이 없다는 한 포털 기사에 달린 댓글 중 추천 수가 가장 많았던 것들이다. 혹시 훗날 곱씹어볼 일이 있을까 싶어 어딘가에 고이 저장해 뒀더랬다. 정확히는 2018년 12월 26일 오전 10시경에 나왔던 기사였다.
부동산에 대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자, 논쟁의 8할은 결국 그것의 가격으로 수렴한다. 자가든 전·월세든 어쨌든 부동산에 가격이 개입되는 건 필연적인 것이고, 집은 사는(Buy) 게 아니라 사는(Live) 거란 이야기를 제아무리 해본들 현실로 돌아오면 돈 주고 사거나(Buy), 아니면 하다못해 전세나 월세 보증금이라도 있어야 비로소 들어가 사는(Live) 것도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니 이제 제발 그 어떤 감흥도 재미도 없는 말장난은 그만 접어두길 바란다. 문명사회에서 정당한 대가 없이 목적물을 취하겠다는 건 언어유희에 앞서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니까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같이 쏟아졌던 무수히 많은 부동산 관련 기사와 각종 칼럼에는 그저 작성자와 어투 정도만 다를 뿐, 매번 어김없이 등장하는 댓글들이 있다. 바로 지금의 집값, 더 구체적으로는 서울의 아파트값은 비정상적인 거품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벌이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수준이니, 지금 가격에서 반 토막 내지는 반의반 토막은 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간혹 어느 지역의 아파트값이 3억 남짓 하락했다는 대목에서는 또한 여지없이 가진 자를 몰아세운다. 그간 10억, 20억이 올랐는데, 그깟 3~4억쯤 떨어진들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는 논리다. 얼핏 들으면 일리가 있는 듯하다.
딴은 그렇다. 아파트와 더불어 비교적 비싼 가격표를 붙이고 있는 재화 가운데 대표적 공산품인 자동차는 공장에서 출고되는 순간부터 감가가 시작되는데, 저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가치의 효용은 유한하니 아무리 수억 원을 넘나드는 슈퍼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폐차장에서 고철로 돌아가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공산품은 아니지만 집도 사람이 살고 시간이 흐르면 낡기 마련이다. 너무 오래 쓰면 불편해지고, 불편하니 허물고 다시 짓는다.
자동차는 3년을 타고 폐차한 슈퍼카든, 20년을 타고 폐차한 경차든 폐차 후에는 고철값 몇십만 원을 손에 쥐지만, 집은 허물어버려도 자신이 버티고 섰던 터가 남는다. 차를 폐차하고 새 차를 사려면 폐차 후 받는 고철값 몇십만 원을 뺀 나머지 값을 온전히 내가 부담해야 하지만, 기존의 공동주택이나 단독주택을 허물고 그 터에 새 아파트를 지으면 새롭게 책정된 아파트 가격의 몇 분의 일만 부담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40년이 다 된 썩은 아파트를 주고 최신식 아파트에 들어가면서도 도리어 상당한 돈을 조합으로부터 돌려받는 요지경을 경험하기도 한다.
초졸 학력의 정태수가 세무 공무원을 그만두고 1974년 창업한 한보그룹은 시대를 잘 만난 탓에 한때 재계 서열 14위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지만, IMF 직전인 1997년 이른바 한보사태로 일순간 사라졌다. 훗날 세상은 그 사건을 가리켜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 부정 사건으로 기록했다. 정태수와 한보는 그렇게 사라졌지만, 그가 1979년 대치동 터에 지은 저층 아파트는 43년째 그 자리에 있으니, 바로 농사짓던 저지대 땅 7만 3천 평에 올려진 14층짜리 26개 동, 마래푸도 울고 갈 단일 4,424세대 은마아파트다. 당시 은마 분양가는 평당 68만 원이었는데, 마침 같은 해 신진자동차에서 출시한 소형 지프 ‘훼미리’의 판매가는 680만 원이었고, 그 해 휘발유값은 1ℓ에 434원이었다. 찻값이 비쌌던 건지, 집값이 쌌던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70년대의 기술과 생활 풍습을 기준으로 지어진 아파트가 40년이 다 됐으니 분명 겉보기에는 다 무너져가고 썩어빠지고 불편해 보일는지는 몰라도, 은마가 들어선 곳에 한 번이라도 가봤거나 하다못해 그 흔한 로드뷰라도 봤다면 앞의 댓글들과 같은 반응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부동산이라는 대상물을 마치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중고차처럼 낡았으니 싸져야 한다며 날을 세우는 그 논리의 해맑음을 구태여 따질 마음은 없고, 한편으로는 아무 걱정 없이 한세상 참 쉽게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견 부럽기도 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말이다. 그저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그들의 바람대로 한 3~4억에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을 그리려거든, 어딘지 몰라도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은 그때 도대체 얼마가 될 것이며, 그때 이 나라의 경제는 온전할지에 대한 고민과 상상도 부디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균형 잡힌 고민이요, 공평한 일일 테니 말이다.
사전에 쓰여 있듯 집이란 본디 추위와 더위, 비바람 등을 막고 그 안에 들어가 살기 위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하니 그 본연의 정의 앞에서 집의 형태나 거주의 형식 따위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꼭 아파트가 아닌 빌라나 다가구도 추위와 더위쯤은 거뜬히 막아줄 수 있고, 내 소유든 전·월세든 집이 비바람을 막아주는 데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니 또 생각이 많아진다. 어차피 대출 길도 막힌 터에 영끌로 20평 조금 넘는 아파트 하나 붙잡고서 매달 받는 월급을 원리금 갚는 데 넣어봤자 서울 변두리 아니면 빨간 버스 타야 하는 경기도 어디쯤인데, 차라리 똑같은 돈으로 아파트 전세나 자가로 빌라에 살면 서울 안에서도 제법 상급지에 전입신고를 할 수 있으니, 이 대목에서 사람 마음이 간사해진다.
기껏 모은 쌈짓돈을 롤러코스터 같은 주식에 태울 배짱은 없고, 빤한 월급으로 할 수 있는 옵션이라고 해봐야 시중 은행 정기적금 금리 비교인데, 어디가 소수점 밑 숫자 몇 개 더 준다고 해봐야 도긴개긴이요, 월 기백만 원짜리 1년 만기 정기적금에 묵힌들 365일 꼬박 붙은 이자로는 그럴듯한 곳에서 우리 식구 저녁 외식 한 끼 값으로도 마뜩잖다.
월급쟁이 근로소득으로 모을 수 있는 돈은 빤하고 갈 길은 멀기만 한데, 간사한 내 눈은 강남 3구나 ‘마·용·성’ 정도가 아니면 성에 차지 않으니 생기는 건 이유 없는 짜증이요 원인 모를 조급함이다. 그래, 내가 아주 많이 양보해 현실과 타협한 지역도 엔트리가 이미 10억을 넘어가고, 호주머니에 모아둔 쌈짓돈 3억 언더로 최대한 ‘땡겨’ 봐야 내가 건드려 볼 수 있는 건 기껏 5억 언저리다. 빌어먹을 세상, 정부의 말마따나 내가 집이 없는 건 싸가지 없는 다주택자들 때문이라 자위하며 또다시 전셋집을 기웃거리니 믿을 거라곤 역시 임대차 3법뿐이란 현실이 그저 웃프기만 하다.
서울 변두리나 빨간 버스로 1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려 당도할 경기도에 살 비용으로 어지간한 서울 뉴타운에 살 수 있으니 가성비와 편익으로 따지자면야 아파트 전세만한 것도 없겠는데, 나라에서 같은 값으로 2년을 더 살 수 있는 계약갱신청구권까지 손에 쥐여줬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 수 접고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아파트 전셋값으로 매입 가능한 빌라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냥 빌라도 아닌 65인치 TV는 기본이요, 냉장고·건조기·식기세척기에 스타일러까지 빌트인(Built-in)으로 제공하는데, 거실 바닥 타일은 이탈리아제, 주방 싱크대 상판은 일제라는 고급 빌라다. 나름 역세권에 입지가 나쁘지 않고, 심지어 구조도 아파트에 견줄 만큼 제법 그럴싸하다. 아파트도 아닌 것이 무인 택배함에 공동현관 도어록은 기본이며, 고작 4층짜리 필로티 빌라에 번쩍이는 금칠 두른 엘리베이터까지 달렸다니 뭔가 득템한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그래봤자 현관 밖은 차 한 대도 겨우 지나는 골목길 밀집촌이요, 뒤에 있는 내 차는 앞에 있는 윗집 차 안 빼주면 꼼짝도 못 하는 ‘친목도모형’ 주차장이 뼈를 아프게 때리는데, 재개발이 느리다는 빌라촌에서 3년 뒤, 5년 뒤에 내가 실컷 써 낡을 대로 낡아진 65인치 TV와 식기세척기 딸린 이 대책 없는 물건은 도대체 누가, 얼마에 받아 줄 것인가 말이다.
“제발 현실 좀 봐! 네가 맨날 말하는 소확행…
그거 다 자기기만이고, 자기합리화야.
당장 힘드니까 사탕 하나 물고 행복하다는 거잖아?!
뭐 하나 제 손으로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하찮은 행복에 정신승리 하는 거라고!!”
드라마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에서
경혜의 대사 中
이왕에 태어난 인생, 잘나게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그건 내 의지로 되는 영역이 아니니 그냥 어쩔 수 없는, 말하자면 디폴트값인 것이다. 하지만 전세에 안주하며 일평생 ‘욜로’를 목놓아 외치든, 당장 ‘그럴싸한’ 전셋집보단 좀 볼품없어 보여도 자기 이름으로 된 아파트 하나 마련해 악착같이 대출 원리금을 갚아 나가든, 그건 순전히 본인 판단과 자유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알고 지내야 말하는 쪽이든 듣는 쪽이든 피차 피곤하지 않을 게다. 내가 전세로 살고 있는 이 집값도 오르고, 내가 전세 사느라 안 샀던 저 집값도 오를 때, 내가 깔고 앉은 전셋값도 같이 오른다는 사실 말이다.
당장은 인스타에 올려진 때깔 좋은 음식과 풍경 사진이 좀 힙해 보일지는 몰라도, 세월이 좀 흐르면 말이다, 낼 땐 배가 아파도 때 되면 알아서 내 집 우편함으로 날아드는 재산세와 종부세 고지서가, 또 그렇게 유지하고 있는 집에서 먼저 누워 잠든 아내의 부은 얼굴과 잔망스러운 아이들이, 더 반갑고 의미 있게 다가올 때가 있을 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아, 나도 이제 철이 들었나보다’ 생각하면 대충 맞을 거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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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안정을 위해 살던 집에서 나가라고?
집에서 사무실까지 차를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있다. 더러는 출퇴근길 교통체증 속에서 운전하기가 싫어서, 또 더러는 주말에 애써 세차해 놓은 차에 비나 눈을 맞히기 싫어서, 이유야 그때마다 내 멋대로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다. 지하철을 타보면 서 있는 사람이나 앉아 있는 사람이나, 애나 어른이나 그저 휴대전화 삼매경이고, 그중 대개는 게임 아니면 동영상이다. 나도 요새 구독을 걸어둔 몇 가지 채널엔 제법 진심인 편인데, 짧은 이동 시간 동안 서거나 앉은 상태로 한 편에 30분 가까운 영상을 보려니 자동차 리뷰나 예능 하이라이트처럼 가벼운 내용은 그저 1.5배속이나 2배속으로 돌려봐도 그만이다. 태생이 성격 급한 한국인인지라 일단 적응되니 빨리 돌려보는 편이 오히려 답답하지 않아 좋을 지경이다.
하지만 아껴보는 채널 가운데 유독 80~90년대 생활 모습이 나오는 영상은 일찍부터 0.5배속으로 느리게 돌려보는 재미를 들였다. 80년대 서울 거리의 간판과 자동차들, 90년대 사람들의 옷차림은 마치 숨은 그림을 찾아내듯 레트로 감성을 사랑하는 내겐 꽤 소중하고도 쏠쏠한 재미다. 똑같은 길이라도 빨리 뛰면 운동이 되지만, 천천히 걸으면 풍경이 보인다. 빠르게 읽으면 다독할 수 있고, 느리게 읽으면 정독할 수 있다. 살아가는 데 운동과 다독도 필요하겠지만, 주변의 여러 현상들을 살필 땐 나무보다 숲을 볼 수 있는 통찰력과 깊이 읽을 수 있는 정독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시답잖은 사설이 쓸데없이 길었는데, 어쨌든 한없이 복잡하게만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의외로 간단해지고,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는 거다. 본래 뒤가 구리고 떳떳하지 못한 수작일수록 마치 숙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처럼 스스로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복잡하게 위장하고 감추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5년, 시절을 안 가리고 참 쓸데없이 바지런히도 나오는 부동산 대책들을 지켜보며 어느 틈엔가 나는 정부에 더 이상 기대할 것도, 나아질 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더랬다. 적어도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말이다.
지난 5년여간 벌여온 이 지루한 싸움의 본질은 결국 좋은 주거환경에서 살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과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막고자 하는 정부의 아집 사이의 격돌이었다. 그리고 정권의 갈라치기 속에서 당연한 국민의 소망은 투기꾼의 탐욕으로 매도되었고, 정부의 아집은 서민을 위한 깊은 고뇌로 포장되었다. 분양가 상한제는 건설 회사의 이익을 당첨자에게 몰아주면서 부의 이전 효과만 있었을 뿐, 결국 ‘로또 청약’이란 신조어를 만들며 투기 심리만 자극해 오히려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무지막지한 양도세 중과는 매도자의 매물 회수로 이어져 가뜩이나 부족한 시장의 공급을 줄였고, 양도세의 상승분을 가격에 녹여 집값 상승이란 부작용을 낳았다.
아니, 공부를 안 하겠단 것도 아니고, 학생과 학부모가 기꺼이 내 품 팔아 어떻게든 좋은 환경에서 미래를 위해 공부 좀 열심히 해보겠다는데도 불평등한 우등생보단 다 같이 평등한 열등생이 낫다며 멀쩡한 특목고와 자사고를 폐지하니, 너도나도 학군 좋은 강남으로 몰리며 안 그래도 비싼 강남 수요를 자극했다. 사려 깊지 못한 무차별적 지역 규제는 풍선효과로 인해 규제되지 않은 지역의 집값을 폭등시키며 규제지역의 집값을 더 밀어 올리는 부작용을 불렀고, 언제나 시장보다 한발 늦은 땜질식 추가 지역 규제는 이미 재미 볼 거 다 보고 떠난 자리에 울려 퍼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
집값 폭등으로 매매가 대비 전세가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며 마침 정부가 그렇게도 혐오하던 갭 투자에 불리한 상황이 조성됐을 때, 하필 임대차 3법을 만들어 전세가를 폭등시키며 다시 갭 투자에 유리한 멍석을 깔아준 것은 또 누구인가? 재산권 침해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알아서 제 갈 길 가고 있는 재건축과 재개발에 한껏 분탕질을 놓아 시장의 공급은 꽉꽉 틀어막고선 뒤늦게 교도소와 군부대 터에 공공임대 몇 세대 짓는 걸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오니, 하다 하다 이제는 비좁은 호텔 방을 개조해 전세로 주겠다는, 이런 자들이 세상 어디 있느냔 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릇 부동산 정책의 제1 목표는 주거의 안정이다. 그렇기에 그 어느 정부가 내놓는 그 어떤 부동산 대책도 이 대명제를 훼손해선 안 되는 것이고, 집값의 안정화도 결국엔 주거안정이란 목표를 위해 설정된 하위 어젠다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당장 반포자이 30평대에 붙는 보유세만 1,500만 원이 넘고, 공시가 현실화로 3년 뒤엔 3,200만 원으로 오르는데, 매월 금액으로 환산하면 대강 잡아 270만 원이다. 내 돈으로 내가 산 내 집에 살며 나라에 매월 270만 원씩 월세를 내는 셈인데, 1년에 3,200만 원이면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도 세후 실수령액의 거의 넉 달 치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천하의 강남 주민이라도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꼭 강남에 살 필요도, 꼭 서울에 살 필요도 없다며 ‘집을 파시라’는 얘기만 되풀이했다. 아니, 도대체 세계 그 어떤 나라가, 그 어느 정부가 ‘살던 집에서 나가라’는 부동산 정책을 시행하는가 말이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강제로 퇴거당하는 것보다 주거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경우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대한민국 주택 시장에 있어 국민 모두에게는 자가, 전세, 월세라는 세 가지 선택지가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리고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바에야 월세보단 전세가, 전세보단 자가가 계약 주체에게 더 유리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보편타당한 팩트다. 명색이 주거의 안정과 서민의 행복을 통해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부라면, 그렇다면 어떡하든 월세보단 전세를, 다시 전세보단 자가에 거주하는 국민의 비중을 높여 시장 테두리 안에서 국민들 스스로가 각자의 능력에 맞게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야 옳았다. 그 이외의 것들, 이를테면 대출 한도와 금리를 조절한다거나 보유세나 거래세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정책들은, 그러한 보편타당한 절대가치를 실현시키고 사다리를 오르는 데 좀 힘들어하는 국민이 있다면 그 장애물을 치워주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써 아주 제한된 수준에서 매우 신중하고도 정교하게 작동됐어야 했다.
집을 허물지도, 새로 짓지도, 사고팔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놓고선 어지간한 직장인 연봉에 맞먹는 보유세를 부과해버리니 이건 전·월세 살던 사람이 자가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자가에 살던 사람도 멀쩡히 살던 집을 팔고 전·월세로 내려앉을 판이다. 어디 그뿐인가? 2년 주기로 집주인을 사이에 두고서 전세 시장에 진입하는 쪽과 이탈하는 쪽이 벌이는 온순한 화학작용을 통해 꽤 합리적으로 굴러가던 한국의 전세 시장, 여기에 느닷없이 임대차 3법을 끼워넣으니 반평생 월세방만 전전하다 이제 겨우 전세 보증금 정도 마련한 사람이 전세로 옮기는 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간 전세 살던 사람도 실거주하겠단 집주인 등쌀에 쫓겨나 월세로 내려앉을 판이다.
합리적인 상식에 기대어 생각했을 때, 중개보조원도 알 수 있는 이러한 단순하고 당연한 메커니즘을 과연 저들이 몰라 우리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는 난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분노는 지겹고, 비난은 지쳤다. 그래서 난,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우리 모두는 참 불행한 시절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모래허고 비율 잘 맞춘 거여?
이런 거 잘못해서
성수대교고 삼풍이고 자빠지는 거여.
××놈들이 책임감이 없어서 그랴.
아니, 어떻게 그래, 자기희생도 없이 그래,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그라는 겨 그래?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
영화 <짝패>에서 필호의 대사 中
온 국민이 적폐로 내몰려 각자 부동산 열병을 앓고 있던 사이, 이 나라 전직 청와대 대변인은 16억을 대출받아 25억 7,000만 원짜리 뉴타운 재개발 상가주택을 사는가 하면 대통령은 취임 전 거주했던 지방 어디의 사저를 26억에 팔아 17억의 차익을 거뒀다는, 그런 세상을 우리 모두는 살아 냈다. 책임감도 자기희생도 없이 그저 타인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나라, 이리 생각해 보고 저리 생각해 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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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이 내 집 한 채 살 수 없는 세상
매봉산 자락에 자리 잡은 ‘한남더힐’은 최고가 82억 원, 전체 거래액이 2조 1,500억 원에 이르는, 부동산으로서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원탑이다. 이 아파트 32개 동, 600세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3명 중 1명은 80억이 넘는 집값을 대출 없이 현찰로 샀다. 그러니 나라에서 서른 번 가까운 대책을 내놓든 말든, 신박한 규제를 하든 말든 이들에겐 애초부터 아무런 영향이 없다. 그저 집값 82억을 계좌이체 할 때 몇 번에 나눠 보내야 할지, 1일 이체 한도가 차라리 실제로 체감되는 장애물일 뿐이다.
그럼, 나머지 3분의 2는 현찰 박치기가 어려운 사람들인가? 아니다. 남은 대부분은 현존하는 거의 모든 부동산 규제들로부터 자유로운 법인 거래라고 보면 된다. 이러나저러나 어쨌든 그곳에 살거나, 그곳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정부의 부동산 대책들은 그저 찻잔 속 태풍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도 또한 그럴 것이다.
이쯤에서 이런 논리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대기업 총수와 A급 연예인,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수많은 법인 소유자들이 한남더힐을 우표 모으듯 수집했다면, 그렇다면 ‘압구정현대’와 ‘아리팍’과 ‘래대팰’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를까? 한 채에 80억, 100억 하는 한남더힐이나 저택은 좀 별개로 치더라도 30~40억 언저리 강남 아파트들을 현금으로 살 수 있는 부자의 수는 이 대한민국에서 거의 무한대에 가깝다.
누구는 2세나 3세를 통한 증여로, 또 누구는 임대차나 명의신탁으로 그 형태만 달리할 뿐, 시중에서 거래가 가능한 강남 아파트들과 강남을 능가하는 극소수의 고급 주상복합들은 리치들의 자산 증식 또는 자산 은닉용 수단으로 거의 소진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결국, 우리 자신 또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중장년의 평범한 중산층이나 젊은 고소득 실수요자들이 실질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앞선 리치들이 소진하고 남은 강남의 일부, 그리고 뉴타운을 중심으로 한 서울 비강남 상급지들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따져봐야 할 게 있다. 서울 아파트 중위값이 10억을 넘기면서 이제 적어도 서울에서 10억 미만 아파트라면 평형을 불문하고 성에 차지 않는 세상이 됐는데, 2021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3분위에 해당하는 중위 소득은 월 520만 원이다.
월 520을 버는 사람이 10억짜리 아파트를 대출 없이 현찰 박치기로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16년을 모아야 한다. 그래서 82억짜리 한남더힐을 현금으로 살 수 있을 정도의 부자가 아닌 바에야 평범한 사람이 집을 살 땐 필연적으로 대출이 필요한 것이고, 사려는 집이 비싼 집일수록, 그리고 사려는 사람의 수입이 적을수록 대출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대로 집값이 비쌀수록, 그리고 소득이 적을수록 대출을 꽉꽉 조여 놓으니 명목상 중산층에 해당하는 월 520만 원을 버는 사람이 근로소득에만 의지해 서울에서 영끌로 살 수 있는 집의 가격은 고작 4억 6,000만 원이 최대다. 중위값이 10억을 넘긴 지금 4억 6천 수준의 아파트는 서울 아파트 전체 재고량 139만 8천 호 가운데 10% 수준인 14만 5천 호뿐이고, 물량을 떠나 지금의 서울에서 4억 6천짜리 아파트가 어떤 상태일지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할 수 없는 모순이 생긴다. 월 520만 원을 버는 중산층이 영끌을 해도 서울에서 중간값 하는 아파트 하나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중산층이 맞는 것인가? 한 채에 80억, 100억 하는 호화 주택도 아니고, 평당 1억 언저리의 강남 아파트도 아니고, 그저 국평 15~17억 부근의 뉴타운 신축에 살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중산층인가? 아니면 부유층인가?
중소형주로 벌었으면 그다음은 우량주로 갈아타야 하는데, 돈이 많거나 돈을 번 국민 모두를 적폐라 조리돌림을 하니 그저 머리에 이고 살 뿐 오도 가도 못 하는 사회가 됐고, 그 피해는 오롯이 집 없는 이들에게 전가됐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중산층이 무너져 하층민이 많아질수록 기본소득과 공짜는 더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지독한 마약과 같이 말이다. 도대체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을 계속해서 조장하고, 용인하고, 방조하는 것인가?
“사회주의자들이 아무리 호도해도
그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같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불평등해질 권리를 갖는다고 믿는다.”
1975년 영국 의회 연설에서 마가렛 대처의 발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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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대영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보수당 대표가 되었던 마가렛 대처가 당시 의회 연설에서 했던 말이다. 대처는 1979년 총선에서 총리가 된 후 내리 3기를 연임했다. 그녀는 그즈음 끊임없이 왼쪽으로 기울며 파탄으로 치닫던 영국을 오른쪽으로 돌려세움으로써 나라를 구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 하원은 통상 당사자가 사망하고 최소 5년 뒤부터 동상을 건립한다는 관례를 깨면서까지 2002년 생존 인물로는 역사상 최초로 그녀의 동상을 윈스턴 처칠 동상과 마주 보는 자리에 세웠다.
총리 취임 후 경제적 자유주의를 실천하고 법과 원칙을 세운 그녀의 업적 가운데 단연 백미는, 당시 영국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광산 노조를 와해시키고 인쇄공 노조를 패퇴시킨 것이었다. 무수히 많은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당시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던 방만한 영국 공기업들을 끝내 민영화함으로써 경쟁을 도입했고, 해당 기업들을 흑자구조로 바꾸면서 국민들의 조세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었는데, 그녀는 늘 자신이 믿는 건 허황된 ‘이론’이 아닌 만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