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김재용
에세이스트. 마흔을 바라보는 연년생 남매, 은퇴한 남편을 매니저로 두고 사는 결혼 40년 차 주부. 자연과 사람 풍경, 초록을 좋아한다. 제주로 이주해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 ‘그녀들의 글 수다’ 프로그램과 글 쓰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 ‘글스테이’를 운영 중이다.
저서로 《오드리 헵번이 하는 말》, 《그나저나 나는 지금 과도기인 것 같아요.》, 《엄마, 나 결혼해도 괜찮을까》, 《마흔, 시간은 갈수록 내 편이다》(공저), 《행복의 민낯》(공저)이 있다.
사진소보로
10년간의 웹 디자이너 생활을 접고 제주로 이주.
소소해 보이지만 로맨틱한 제주의 일상을 찍고, 그리고, 쓰며 살고 있다.
1인 출판사, 에어비앤비,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본업은 주부.
슬프게 살기 싫어 제주로 와서는 웃프게 살고 있으며, 그러한 삶에 대략 만족하는 중.
* 이 책은 《엄마의 주례사》(시루, 2014)의 개정판입니다.
contents
prologue
언제 어디서든 네 편이 되어줄게
개정판prologue
결혼의 행복은 네가 만들어가는 거야
theme1
커피보다 더 깊고 향기로워지는 사랑법
너의 인생을 남편에게 맡기지 마
1 둘이 있으면 외로움도 두 배가 된다
2 인생의 짐은 내려놓는 게 아니야
3 결혼은 서로 익숙해지는 것
4 해피 버스데이 투 미
5 혼자 놀 줄 아는 여자가 행복하다
6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르다
7 보통의 존재가 특별해지는 순간
theme2
내 마음과 달라도 너무 다른 ‘남’편 사용법
퍽퍽한 관계도 치즈케이크처럼 촉촉하게
8 결혼할 남자, 이것만은 포기하지 마
9 때론 과감히 떠나보내라
10 ‘남’편을 ‘내’편으로 만들기에도 노하우가 있다
11 시월드에 대한 흔한 착각
12 남편도, 아이도 아닌 너의 삶을 살아라
13 결혼식이 다가 아니야
14 남편도 아내도 아프기는 매한가지
15 엄마도 여자다
theme3
아이도 부모도 행복한 태평농법
자식은 믿고 지켜보는 존재야
16 육아는 희망이지 고문이 아니야
17 엄마를 춤추게 하는 한마디
18 좋았던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하려면
19 운동을 꼭 해야 하는 이유
20 아이는 물고 핥고 빨며 키워라
21 점집도 아이의 미래는 맞추지 못한다
22 집착과 사랑은 한 걸음 차이
theme4
복잡한 생각을 잠재우는 휴심법
가끔은 영화처럼 즐겨봐
23 결혼의 환상과 현실 사이
24 일상을 여행처럼 사는 법
25 애인 같은 친구가 필요해
26 마법의 주문, 아브라카다브라
27 힘들면 쉬어가고, 가끔 하늘을 봐
28 비교하면 진다
29 하늘, 바다, 숲, 길. 너 다 가져
theme5
어설퍼도 신나는 삶의 요령들
혼자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봐
30 설레는 것만 남겨라
31 너무 늦은 때란 없다
32 살림이스트와 귀차니스트의 차이
33 오늘 하루가 모여 내 인생이 된다
34 피부는 젊었을 때부터 가꿔야 후회가 없다
35 서른 즈음에 꼭 해야 할 공부
36 나만의 스타일을 찾자
37 오래돼서 좋은 것들
38 꿈은 선명하게 꿔야 이루어진다
epilogue
너의 결혼을 무조건 응원한다
개정판epilogue
우리, 행복하자
prologue
언제 어디서든 네 편이 되어줄게
나는 쉰 중반의 평범한 엄마입니다. 번듯하게 내놓을 만한 명함도, 근사한 프로필도 없습니다. 다만 좋은 엄마보다 행복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살아왔지요. 언젠가 딸아이가 무심코 말하더군요.
“엄마는 정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나도 결혼하면 엄마처럼 살 거야.”
얼마나 좋던지요!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내가 엄마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우리 딸이 나처럼 살고 싶다니 이보다 더 행복한 엄마가 어디 있을까요. 그날 이후 블로그를 만들어 남편 얘기며 아이들 얘기, 시집살이에 관한 얘기 등을 써나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이 서툴고 결혼이 낯선 딸에게 결혼 이야기를 해주는 책을 내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때마침 딸은 자주 소개팅을 하더군요. 이러다 덜컥 신랑감을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면 나는 과연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금쪽같이 귀한 딸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딱 두 마음이 들었어요. 기쁨 반, 걱정 반. 아직도 내 눈에는 아이로만 보이는 딸이 어엿한 여자로 성장했다는 대견함과 혹시 환상만 갖고 결혼해서 힘들어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지요. 결혼이란 게 행복하기만 하면 좋겠지만 고달프기도 하니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결혼한 여자의 삶이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바로 한 여자로서의 자유는 없어지고, 남편이나 시부모님과의 갈등에 괴로워하고, 아이를 낳고 나면 육아에 지쳐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나 역시 결혼 초 ‘결혼이 이런 거였어?’ 하며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나는 스물다섯 해 동안 시집살이를 했지요. 누군가가 결혼은 한 사람과 하는 게 아니라 서른 명과 하는 거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렇더군요. 남편 하나만 믿고 결혼했는데 시어머니와 시동생, 시누이와 함께 살면서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속절없이 기다리며 겉도는 게 얼마나 멋쩍던지요. 하지만 서른 해 넘게 살아보니 결혼생활은 누구를 만났느냐보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가느냐가 더 중요하더군요.
이 책에는 딸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행복하고, 멋진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까에 집중해서요. 결혼생활에 정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먼저 살아본 엄마의 생생한 얘기를 듣고 나면 결혼으로 힘들어하는 일은 조금 줄어들 테지요. 그렇다고 딸에게 ‘나는 이렇게 살았다. 그러니 너도 이렇게 살아’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세대와 가치관이 다른데 가르친다고 되는 일인가요. 다만 내가 삶의 순간순간마다 책을 통해 힌트를 얻었듯이, 딸도 힘든 순간을 마주했을 때 이 책에서 힘을 낼 수 있는 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또 어려운 고비가 닥쳐올 때마다 엄마에게 기대듯 책 속에서 희망의 빛 한 올을 길어 올린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겨울을 견디고 봄처럼 태어난 나의 첫 책. 방금 끓인 보리차 한 잔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내놓습니다. 내게 손을 내밀어준 가디언 출판사 식구들, 글쓰기를 가르쳐주신 한명석 선생님과 정수환 사진작가, 그리고 나의 소중한 가족, 친구들과 함께 첫 책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kerith brook coffee, 네모난 테이블에서
김재용
개정판 prologue
결혼의 행복은 네가 만들어가는 거야
이 책을 출간한 지 딱 8년이 흘렀습니다. 30대 초반이었던 딸은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내 나이의 앞자리도 6이라는 숫자로 바뀌었습니다. 세월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것 같네요. 사실 나는 이 책이 출간된 후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게 많은 책을 세상에 내놓고 보니 발가벗은 것처럼 너무 부끄러워서였죠. 개정판을 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서야 다시 펼쳐봤더니 첫 장에 편집자가 써주었던 메모가 있네요.
“작가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좋아서 한참을 넋 놓고 있었던 걸 아실까요? 작가님의 글은 제게 늘 위로가 되었어요. 연애도 결혼도 ‘억지로’ ‘아등바등’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사는 게 서툰 저를 다독여주셨죠. 작가님의 고마운 말들을 책에 담으며 참 행복했습니다. 책을 늘 곁에 두고 닮아갈게요, 나의 작가님.”
그랬지요! 딸 같은 30대 초반 편집자와 엄마 같은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책을 내놓을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댔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된 딸들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지에 대해서요. 편집자는 초보 저자인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고, 나는 편집자가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쓰고 고치고 또 쓰기를 반복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독자들로부터 “결혼생활이 힘들 때마다 펼쳐봤더니 힘이 났다”, “엄마가 옆에서 토닥여주는 것 같다”, “결혼 선물로 주기 딱 좋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덕분에 평생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지금은 글이라는 도구로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려주는 멘토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지요.
책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니 마치 빛바랜 옛날 사진을 보는 것처럼 아련했습니다. 친정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시간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지요. 지나고 보니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순간도 다 인생 공부였네요. 결혼이 나를 더 성장하게 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요. 결혼생활이 힘들 때 ‘난 지금 인생 공부 중이다’라고 생각하면 훨씬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 마음 그대로 가져가고 싶어서 웬만한 건 그대로 두었습니다. 내 생각과 사회의 가치관이 달라진 부분만 조금 수정했지요.
결혼이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이 책이, 결혼생활이 힘든 누군가에게 빛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삶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중이지만, 거저 나이 든 건 아닐 테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매만졌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마음에 가닿아 꽃이 될 수 있기를⋯⋯.
한라산이 바라다보이는 작업실에서
김재용
‘부부 일심동체’란
말이 난 틀렸다고 생각해.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니까
내 마음과 같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소유하려 들기 때문에
더 큰 외로움 속에 빠지지.
1
둘이 있으면 외로움도 두 배가 된다
결혼,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어. 일찍 퇴근한 네 아빠와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신혼 초부터 깨졌지. 아빠는 허구한 날 밤 12시가 넘어야 들어왔어. 그것도 고주망태가 되어서. 저녁을 먹고 치운 뒤 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할머니와 삼촌, 고모와 거실에 함께 앉아 있는 게 얼마나 낯설던지. 눈은 TV에 고정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네 아빠에게 가 있었고, 거실 소파는 송곳을 박아놓은 듯 불편했어. 그나마 우리 방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했지. 침대에 누워 현관 문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이제나저제나 아빠를 기다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고 눈물도 나더라.
“결혼하자고 그렇게 조르더니 맨날 늦게 들어오고. 이럴 거면 왜 결혼하자고 했어?”
외로움을 하소연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 네 아빠 나이 고작 스물여덟이었으니 집보다 밖에 재미나는 일이 더 많았겠지. 서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빠 하나만 믿고 결혼했는데 얼굴 보는 시간은 짧고, 하루아침에 꽃띠 처녀에서 아줌마가 되고, 친구들과 놀 수 없다는 것도 억울했지. 어쩌다 친구들이 바깥세상의 상큼한 향기를 묻히고 우리 집에 왔다 갈 때의 우울함이라니! 한숨과 눈물도 하루 이틀이지,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빠에게 이혼하자고 했을까? 아니, 책상 하나 사달라고 졸랐어. 지독한 구두쇠였던 아빠는 8자 장롱과 침대가 겨우 들어간 방에 무슨 책상이냐며 못마땅해했지. 이렇게 살기는 싫다, 내 책상이라도 있어야 책이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펑펑 울었어. 사면 되지 그게 뭐 울 일이냐며 내 손을 잡고 신촌 굴레방다리 밑 가구점에 가서 책꽂이가 달린 책상을 사주더라. 우리 방에 가져다 놓으니 방문이 반쯤만 여닫혔어. 몸을 옆으로 틀어야 겨우 드나들 수 있었지.
‘눈물로 얻어낸 책상.’
난 그 책상에 앉아서 책 보고 일기도 쓰면서 시간을 보냈어. 오매불망, 오지 않는 아빠만 기다리다 눈이 빠지고 목이 늘어나는 일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됐지. 나만의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다 보니 시간은 빠르게 갔고, 눈물 대신 작은 충족감 같은 게 솟더라. 내가 없어져버린 느낌이었는데 다시 찾은 것 같다고나 할까. 외롭고 텅 빈 것 같았던 마음에 뭔가가 조금씩 채워지니까 자연스럽게 아빠의 귀가 시간에 대해서도 체념하게 되더라. 체념은 포기와 달라. 포기란 관계를 내던져버린 것이지만 체념은 더는 매달리지 않는다는 뜻이지.
혼자여서 외로울 때는 결혼하고 싶어지지? 결혼만 하면 외롭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건 착각이야. 둘이 있는데 외로우면 혼자 있을 때 외로운 것보다 배가 되거든. 결혼하면 외롭지 않은 게 아니라 더 외롭고 괴로울 때도 많아. 외로움을 스스로 극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결혼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해. 외로움은 남이 채워주는 게 아니라 내가 채워야 견딜 수 있는 거니까.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부부 일심동체’란 말이 있지? 그런데 난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해. ‘부부 일심동체’라고 하니까 내 마음과 같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소유하려 들기 때문에 더 큰 외로움 속에 빠지지. 부부는 이심이체二心異體여야 해. 반쪽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선대칭도형처럼 각자 독립적인 상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거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다고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은 말했지. 그러니 외로움에 대처할 수 있는 너만의 방법을 찾아봐.
나는 눈물로 얻어낸 책상이 있어서 지금의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해. 그 책상은 책상이 아니라 나의 작은 세상이었지. 결혼한 후에도 나를 잃지 않고 살아야 가족을 희생이 아닌 사랑으로 감쌀 수 있어. 가족을 사랑한다면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마음의 힘을 키워. 남편은 기대는 대상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가는 동행자일 뿐이니까. 그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거야.
외로움 대처법
일단 몸을 움직여줘야 해. 난 사우나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따뜻한 물이 ‘괜찮다, 괜찮다’ 하고 내 몸을 어루만지며 위로해주는 것 같아. 어떤 사람은 빵을 만든다고 하더라.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고, 발효시키고, 익기를 기다리며 몰두하다 보면 외로움은 금세 잊게 된대. 바느질을 하거나 산책을 해도 좋아. 아무튼, 가만히 있으면 외로움은 몇 배로 더 커지는 법이야.
짐이란 무겁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더 힘들게 느껴져.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게 바로 진통제야.
2
인생의 짐은 내려놓는 게 아니야
스물세 살, 결혼 약속을 하고 나서 어느 날 네 아빠가 물었어.
“난 둘째 아들인데 우리 엄마가 나랑 살고 싶어 하셔. 같이 살면 어떨까?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형님이 있으니까.”
“아니, 좋아요. 난 엄마가 없으니까 엄마라고 생각하며 살면 되지 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좋다고 했어. 그때는 몰랐지. 네 할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은 결혼하지 않은 네 삼촌과 고모도 함께 살고, 집안의 대소사도 모두 내 몫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선택한 시집살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건 할머니가 허리를 다치시고부터였어. 걸으실 수가 없으니 앉은 채로 엉덩이를 밀면서 거실과 방을 오가며 한탄하셨지.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사는 게 너무 지겹다!”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한탄을 듣는 게 괴로웠어. 그렇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게 있었지. 할머니가 거실과 방을 오가실 때마다 싸락눈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살비듬. 체리색 원목 마루에 허옇게 떨어져 있는 살비듬을 보면 절로 고개가 돌려졌지. 수시로 청소기를 돌려 빨아들이면서 내 마음도 자작나무 껍질처럼 말라갔어. 목욕을 시켜드리고 바디 크림을 발라도 그때뿐이어서,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암울하고 또 암울했지.
그러던 어느 날,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는 친구를 만났어. 친구는 내가 한마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과 시집 식구에 대한 원망을 토해냈지. 보기 흉하더라. 내 꼴도 저렇겠다고 생각하니 이런 마음이 들었어. ‘그래, 어차피 지고 가야 할 짐이라면 조용히 지고 가자.’ 우연이었을까. 마침 카페에서는 변진섭의 노래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가 흘러나왔지.
내가 울 때 그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그때, 나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지. 할머니는 자식에게 미안해하며 아픈 몸을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짐, 네 아빠는 처자식에 어머니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는 짐, 너희들은 엄마 아빠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짐.
따지고 보면 사람 사는 일이란 다 짐이더라. 사람 관계의 책임과 의무는 물론 돈벌이도 짐, 건강에 대한 염려도 짐, 하물며 행복에의 욕구까지도 다 짐이었지. 나만 힘든 건 아니니까 무겁다고 징징대지는 말자고 마음먹었어. 참 신기하더라.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짐이 견딜 만한 거야.
짐이라고 하면 흔히 내려놓고 싶다거나, 내려놓으라고 하지. 하지만 무조건 내려놓는 게 능사는 아니야. 오히려 짐을 무겁지 않게 지고 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