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바일을 위해
1940~2012
1944년 8월 프랑스, 브르타뉴의 에메랄드해안의 가장 빛나는 보석, 생말로. 그 역사적인 성벽 도시가 화재로 전소되다시피 했다……. 성벽 내 건물 865채 중 182채만이 간신히 서 있었고, 모든 건물이 어느 정도 손상되었다.
— 필립 벡
라디오가 없었다면 우리가 행해온 대로 권력을 취하거나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요제프 괴벨스
전단
땅거미가 지자 그것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그것들은 바람에 날려 성벽을 가로지르고, 옥상에서 옆으로 재주를 넘고, 펄럭거리며 집들 사이로 나부끼며 들어간다. 자갈과 대비되어 희게 번뜩이며 온 거리마다 소용돌이친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주민에게 긴급히 전합니다. 지금 즉시 공터로 가십시오.
파도가 엉금엉금 밀려온다. 작고 노란 달이 볼록하게 차올라 걸린다. 동쪽 해변 호텔 옥상과 호텔 뒤 정원에서 미국의 여섯 포병단이 박격포 주둥이에 소이탄을 떨어뜨려 넣는다.
폭격기
자정, 그것들이 해협을 건넌다. 모두 열두 대로, 이름은 노래에서 따왔다. 스타더스트. 스토미 웨더. 인 더 무드. 피스톨 패킨 마마. 아득한 아래, 바다가 산 모양의 흰 파도를 무수히 튀기며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얼마 안 돼서 조종사들은 수평선을 따라 놓인, 달빛 어린 섬들이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프랑스.
인터콤이 치직 소리를 낸다. 폭격기들이 찬찬히 고도를 낮춘다. 붉은 빛줄기들이 해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대공 포좌에서 떠오른다. 거무스름한, 거무스름한 폐선들이 구멍이 나 가라앉거나 파괴된 모습을 드러내는데, 한 척은 이물이 부서져 있고, 다른 한 척은 불에 타며 깜박깜박거린다. 가장 바깥쪽 섬에선 공포에 휩싸인 양들이 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한 대에 한 명씩 탄 폭격수는 조준창을 들여다보며 스물까지 센다. 넷, 다섯, 여섯, 일곱. 폭격수들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화강암 곶 위 성벽 도시는 불경한 이빨, 검고 위험한 것, 자르고 짜내야 할 마지막 종기처럼 보인다.
소녀
그 도시 구석, 보보렐 거리 4번지의 높고도 좁다란 집 맨 위 층인 6층에, 앞을 못 보는 열여섯 살 소녀, 마리로르 르블랑이 모형 하나로 꽉 찬 낮은 테이블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 모형은 그녀가 그 안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도시의 축소판으로, 성벽 안에는 집과 가게, 호텔 수백 채가 들어 있다. 구멍이 숭숭 난 첨탑이 솟은 성당, 육중하고 오래된 생말로1) 성, 해안을 따라 줄줄이 늘어선 굴뚝 달린 저택들. 몰(Môle)이라는 해변에 가느다란 나무 방파제 하나가 활처럼 비어져 나와 있다. 촘촘한 그물 같은 아트리움이 어시장 위로 둥근 지붕을 드리웠다. 극미한, 사과 씨앗 크기도 되지 않을 정도로 조그만 벤치들이 앙증맞은 광장에 점점이 놓였다.
마리로르의 손가락 끝은 성곽 꼭대기의 몇 센티미터짜리 난간을 훑으면서, 모형 가장자리를 따라 울퉁불퉁한 별을 그린다. 그녀는 트인 성벽 꼭대기에 바다를 향해 놓인 의식용 대포 네 개를 발견한다.
“네덜란드 요새.” 그녀는 속삭이듯 말하고, 손가락으로 작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코르디에 거리. 자크카르티에 거리.”
방 한쪽 구석엔 가장자리까지 물이 가득 찬 아연 도금이 된 양동이가 두 개 놓여 있다. 물을 가득 채워 놓으렴, 할 수 있을 때마다. 그녀의 작은할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3층 욕조에도 채워 둬. 물이 또 없어질지 누가 아니.
그녀의 손가락은 다시 성당 첨탑으로 올라간다. 남쪽 디낭 성문으로 간다. 이 집 주인이자 전날 밤 그녀가 자는 동안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을 기다리며 그날 저녁 내내 그녀는 손가락으로 행군하듯 모형 여기저기를 쓸고 있다. 이제 다시 밤이 되었고, 시계는 또 한 번 한 바퀴를 돌았으며, 온 거리가 고요한데,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다.
폭격기가 5킬로미터 정도 가까이 오자, 그녀 귀에도 소리가 들린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잡음. 조개껍데기에서 웅웅 울려 나오는 소리.
그녀가 침실 창문을 열자 비행기 소리는 더 커진다. 그 소리만 아니면 밤은 몹시도 고요하다. 엔진도, 목소리도, 털커덕거리는 소리도 전혀 나지 않는다. 사이렌 소리도 없다. 자갈길을 내딛는 발소리도 없다. 갈매기조차 울지 않는다. 여섯 층을 내려가 한 구역 떨어진 곳, 도시 성벽 밑에서 높게 찰싹이는 바닷물 소리뿐.
그리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가만히 달가닥거리는 어떤 것. 그녀는 왼쪽 덧문을 느슨하게 열고 오른쪽 널 위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쓸어 본다. 종이 한 장이 꽂혀 있다.
그녀는 종이를 코에 갖다 댄다. 갓 마른 잉크 냄새가 난다. 휘발유일지도 모른다. 종이가 빳빳한 것을 보니 밖에 놓인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리로르는 스타킹을 신은 채, 창가에서 머뭇거린다. 그녀 뒤로는 침실이, 장식장 맨 위에 가지런히 올려진 조개껍데기들이, 벽 아래 나란히 놓인 조약돌들이 있다. 그녀의 지팡이는 구석에 서 있다. 커다란 점자 소설책은 침대에 얼굴을 묻고 그녀를 기다린다. 우르릉거리는 비행기 소리가 점점 커진다.
소년
그곳으로부터 북쪽 다섯 번째 거리, 열여덟 살의 흰머리 독일군 이등병, 베르너 페닝이 고양이가 가르랑대는 소리보다는 조금 큰, 희미하게 스타카토로 끊어지며 웅웅 울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멀리서 창유리에 몸을 부딪는 파리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총에 바르는 기름에서 들큼히, 은은히 풍기는 화학 약품 같은 냄새. 생나무로 새로 만든 포탄 상자. 오래된 침대보에서 나는 고약한 좀약 냄새. 그는 호텔에 있다. 당연하다. 아베유 호텔, 꿀벌 호텔.2)
아직 밤이다. 아직 이른 시각이다.
바다 쪽에서 호루라기를 불어 대는 소리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대공포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하사 한 명이 복도를 따라 급히 내려가 층계참을 향한다. “지하실로 가.” 그는 어깨 너머로 소리치고, 베르너는 손전등을 켜고 담요를 말아 더플백에 넣은 후 현관으로 가기 시작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예전에, 꿀벌 호텔은 정면에 선명한 파란색 덧문이 달려 있고, 안쪽 카페에선 얼음에 얹은 굴을 팔며, 바 뒤에선 브르타뉴 출신 웨이터가 보타이를 두르고 유리잔을 닦는 흥겨운 곳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객실이 스물한 개 있었고, 로비에는 트럭만 한 벽난로가 있었다. 주말을 맞이한 파리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아페리티프를 마셨고, 그들 이전에는 공화국의 특사 — 장관, 차관, 수도원장, 제독 — 들이 이따금씩 찾았으며, 그들보다 몇 세기 전에는, 바람에 피부가 거칠어진 해적들, 즉 살인자, 약탈자, 침입자, 뱃사람 들이 왔었다.
그전에는, 호텔 같은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던 무려 5세기 전에는, 사나포선3)을 갖고 있는 어떤 부유한 사람의 집이었다. 그는 다른 배를 공격하는 짓을 그만둔 후, 생말로 외곽 초원의 꿀벌들을 연구하느라 공책에 글을 휘갈겨 쓰면서 벌집에서 딴 꿀을 그 자리에서 먹었다. 문의 상인방 위 문장에는 아직도 오크나무에 새겨진 호박벌들이 보인다. 안뜰,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분수대는 벌집 모양이다. 베르너가 가장 좋아하는 건 웅장하기 그지없는 위층 방들 천장에 그려진 희미한 프레스코화 다섯 점으로, 푸른 바탕에 어린아이만 한 꿀벌과 날개가 투명한 크고 게으른 수벌과 일벌 들이 떠다닌다. 육각형 욕조 위 천장에는, 눈이 여러 개에 배에는 황금 털이 난 3미터는 될 법한 여왕벌이 둥글게 걸쳐져 있다.
지난 넉 주 동안 이 호텔은 다른 곳으로 변했다. 이제는 요새다. 오스트리아 대공 부대원들이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판자로 막았고, 침대들도 전부 뒤집어 놓았다. 그들은 입구를 보강했고, 층계참엔 포탄 상자를 가득 쌓아 놓았다. 성벽과 마주한, 정원 쪽으로 정원 방이 있는 발코니가 난 호텔 4층 바닥은 10킬로그램짜리 포탄을 15킬로미터 밖까지 발포할 수 있는 88이라는 고속 대공포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여왕 폐하. 오스트리아 군인들은 대포를 이렇게 불렀다. 지난 한 주 동안 이 사내들은 일벌이 여왕벌을 돌봤음 직한 방식대로 대포를 관리했다. 기름을 먹이고, 포신을 새로 칠했으며, 바퀴에 기름을 쳤다. 그리고 발치에는 공물을 바치듯 모래주머니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여왕의 아흐트 아흐트4),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군주는 그들 모두를 수호할 것이었다.
베르너가 층계참에서 1층까지 반쯤 내려갈 즈음, 88 대공포가 연달아 두 번 발포한다. 그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대포 소리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 소리는 호텔 위 반이 뜯겨 날아갔나 싶을 정도로 크다. 그는 발을 헛디디고 두 팔을 내뻗어 귀를 감싼다. 성벽 전체가 쩌렁쩌렁 분수까지 울려 대다가 잠시 후 그 울림이 다시 올라온다.
두 층 위에서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신속히 움직이며 재장전하는 소리와 포탄 두 개가 바다를 향해, 이미 4~5킬로미터 밖까지 돌진하면서 멀어지는 굉음이 베르너의 귀에 들린다. 군인 중 하나가 노래하고 있음을 그는 알아차린다. 아니 한 명 이상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덟 명의 루프트바페5)는 그들의 여왕에게 바치는 연가를 부르고 있지만 바로 그 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살아남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베르너는 손전등 빛줄기를 좇아 현관 끝까지 간다. 거대한 대공포가 세 번째로 발사되자 근처 어딘가에서 유리가 깨지고, 검댕이 굴뚝을 따라 쿨럭쿨럭 내려가며, 호텔 벽은 종처럼 울린다. 베르너는 그 소리에 자기 이가 부러져 잇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그는 지하실 문을 끌어당겨 열고, 그곳에서 유영하고 있는 것에 눈길이 잠시 멈춘다.
“끝인가?” 그가 묻는다. “정말 그들이 오고 있는 건가?”
그러나 거기 있는 어느 누가 대답해 줄 것인가.
생말로
길 아래위에서, 대피하지 못한 마지막 주민들이 잠에서 깨고 신음하며 한숨을 내쉰다. 노처녀, 창녀, 예순 넘은 사람. 방관자, 부역자, 의심 가득한 사람, 술꾼. 모든 수도회의 수녀. 가난한 사람. 고집 센 사람. 장님.
몇몇은 급히 방공호로 간다. 몇몇은 이건 그냥 훈련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몇몇은 꾸물거리며 담요나 기도서나 트럼프를 움켜쥔다.
공격은 두 달 전 시작되었다. 셰르부르가 해방되었고, 캉이 해방되었으며, 렌6)도 그러했다. 서프랑스 반은 자유다. 동쪽에선 소비에트 군이 민스크를 재탈환했다. 폴란드 국방군은 바르샤바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몇몇 신문은 정세가 바뀌었다는 뜻을 비칠 정도로 대담해졌다.
그러나 이곳은 그렇지 않다. 대륙 가장자리에 놓인 여기, 이 최후의 성채, 브르타뉴 해안에 있는 독일 최후의 방위 거점은 사정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사람들이 속닥이길, 독일군이 중세 성벽 아래 2킬로미터에 달하는 지하 복도를 보수했다고 한다. 독일군은 새로운 방어 시설, 새로운 전선관, 새로운 탈출로,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복잡한 지하 단지를 지었다고 한다. 시테 요새 아래, 구시가에서 강을 건너면, 붕대를 쌓아 놓은 방, 탄약을 쌓아 놓은 방이 여러 개 있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지하 병원까지 있다고 한다. 아니, 그렇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에어컨이 가동되고, 20만 리터짜리 물탱크, 베를린 직결선도 있다고 한다. 불길을 내뿜는 위장 폭탄이 숨겨져 있고, 사방 시야를 확보한 사격 진지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하루 종일, 매일, 일 년 내내 바닷속으로 포탄을 퍼뜨릴 수 있는 대포를 다량 비축해 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1000명의 독일군은 죽을 각오라고 사람들은 속닥거린다. 5000명일지도 모른다. 아니, 더 될지도 모른다.
생말로. 물이 이 도시를 에워싸고 있다. 도시와 프랑스 전역을 잇는 것은 보잘것없는 둑길 하나, 다리 하나, 사취 하나다. 무엇보다 우린 말루앵7)이라고, 생말로 사람들은 말한다. 그다음으로는 브르타뉴 사람이라고 한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뭔가 하나라도 건질 만한 것이 있을 때뿐이다.
폭풍우 속에서 스며나오는 빛, 생말로의 화강암이 파르스름하게 빛난다. 조수가 가장 높을 때 바다는 도시 바로 한가운데 지하까지 밀려들어 온다. 조수가 가장 낮을 때면, 1000척은 되는 난파선 골조들이 따개비가 붙은 채 바다 위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삼천 년을 거치면서, 이 아담한 곶은 포위에 대해서라면 익숙해졌다.
그러나 지금 같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할머니가 마구 보채는 아기를 안는다. 그로부터 1.6킬로미터 떨어진 생세르방 바깥 골목에서 한 취객이 오줌을 누다가 생울타리에서 종이 한 장을 뽑아 든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모든 주민에게 긴급히 전합니다. 지금 즉시 공터로 가십시오.
바깥 섬들마다에서 대공포대가 번뜩이고, 구시가 안 커다란 독일 대포들이 또 한 차례 쏘아 대며 바다 위에서 울부짖고, 해변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 나시오날이라는 요새 섬에 수감되어 있는 프랑스인 380명이 위쪽을 응시하며 달빛 어린 안뜰로 서둘러 모인다.
사 년이라는 점령 기간 동안, 폭격기들이 다가오며 내는 괴성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구조? 절멸?
휴대용 병기가 짤깍대며 발포된다. 걸걸하게 드럼처럼 두들겨 대는 대공포. 성당 첨탑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 열두 마리가 일제히 아래로 쏜살같이 치달았다가 방향을 바꿔 바다로 날아간다.
보보렐 거리 4번지
마리로르 르블랑은 침실에 혼자 서서 그녀는 읽을 수 없는 전단의 냄새를 맡는다. 사이렌이 울부짖는다. 그녀는 덧문들을 닫고 창문 걸쇠를 다시 잠근다. 비행기들이 촌각을 다투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촌각을 다투며 그만큼의 촌각이 허비된다. 그녀는 당장 아래층으로 달려가야만 한다. 그녀는 부엌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난 작은 문을 열고, 생쥐가 쏠다 만 깔개와 오랫동안 연 적 없는 옛 트렁크와 먼지로 가득한 지하실로 가야만 한다.
대신 그녀는 침대 발치 테이블로 돌아가 도시 모형 옆에 무릎을 꿇는다.
또다시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깥 성벽을 더듬어 네덜란드 요새를, 아래로 인도하는 작은 층계참을 찾아낸다. 이 창문에서, 바로 여기에서, 진짜 도시에서, 한 여자가 일요일마다 깔개를 두드려 턴다. 한번은 여기 이 창문에서, 한 소년이 이렇게 소리쳤었다. 길 좀 보고 다녀, 너 장님이냐?
그들의 집마다 창유리가 덜커덕거린다. 대공포가 또 한 차례 일제 사격을 시작한다. 지구가 약간 더 앞으로 회전한다. 손가락 아래에서 축소판 에스트레 거리와 축소판 보보렐 거리가 만난다. 손가락들이 오른쪽으로 돌아서 출입구들을 스치듯 지나간다. 하나, 둘, 셋까지. 넷. 지금껏 이런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4번지. 그녀의 작은할아버지, 에티엔의 저택에 있는 드높은, 이제는 버려진 새들의 둥지. 이곳에서 그녀는 사 년을 살았다. 6층에서 혼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녀를 향해서 미군 폭격기 열두 대가 포효하며 날아온다.
그녀가 앙증맞은 정문을 안쪽으로 밀자, 숨어 있던 걸쇠가 풀리더니 그 작은 집이 위로 들려 모형에서 떨어져 나온다. 그녀의 두 손 안에 든 집은 그녀 아버지의 담뱃갑만 하다.
이제 폭격기는 아주 가까워서 그녀 무릎 밑 바닥이 고동치듯 울리기 시작한다. 바깥 홀에서, 층계참 위 샹들리에에 걸린 크리스털 펜던트가 종처럼 울린다. 마리로르는 모형 집 굴뚝을 90도로 비튼다. 그런 후 지붕인 나무판 세 개를 밀어 떨어뜨린 다음 거꾸로 뒤집는다.
손바닥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다.
차갑다. 비둘기 알만 하다. 눈물방울 모양이다.
마리로르는 한 손으로 앙증맞은 그 집을, 다른 손으로는 돌멩이를 움켜잡는다. 방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고,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거대한 손가락 끝이 지금이라도 벽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다.
“아빠?” 그녀는 속삭인다.
지하실
꿀벌 호텔 현관 아래에는 기반암을 깎아 내어 만든, 해적의 지하실이 있다. 나무 상자와 서랍장과 공구를 보관하는 나무 걸판 뒤 벽은 그대로 노출된 화강암이다. 손으로 깎은 거대한 세 기둥은, 그 옛날 브르타뉴 숲에서 여기까지 끌어온 것으로, 수세기 전에 말 여러 무리를 동원해 들어 올려져 이곳에 왔고, 천장을 떠받치게 되었다.
하나뿐인 전구가 저장고 안 모든 것에 흔들리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베르너 페닝은 작업대 앞에 놓인 접의자에 앉아서, 배터리 용량을 확인하고선 헤드폰을 머리에 쓴다. 철제 케이스에 담긴 1.6미터 대역 안테나가 달린 트랜스시버. 이것으로 그는 채널이 맞는 위층 무전기, 도시 성벽 안에 있는 다른 대공포 부대 둘, 하구 건너편 지하에 주둔한 수비대와 소통할 수 있다.
트랜스시버가 따뜻해지면서 윙윙거린다. 한 관측병이 헤드폰에 대고 좌표들을 읽어 주자, 이를 포병이 다시 읽어 준다. 베르너는 두 눈을 비빈다.
그의 뒤로 몰수한 보물들이 천장까지 재여 있다. 둘둘 말린 태피스트리, 대형 괘종시계, 장식장, 사방팔방에 금이 좍좍 간 거대한 풍경화. 베르너의 맞은편 선반에는 석고 두상(頭像)이 여덟아홉 개 놓여 있는데, 그로선 용도를 짐작할 수 없다.
덩치가 큰 프랑크 폴크하이머 중사가 비좁은 나무 계단을 내려오더니 나무 기둥 밑으로 머리를 쑥 수그린다. 그가 베르너에게 다정하게 미소 짓고는 등받이가 높고 황금빛 비단 덮개를 씌운 안락의자에 앉아 그 거대한 허벅지에 자기 라이플총을 가로놓자 크기가 지휘봉만 해 보인다.
베르너가 말한다. “시작인가요?”
폴크하이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자기 손전등을 끄고 어둠침침한 가운데 묘하게 섬세한 속눈썹을 깜박인다.
“얼마나 오래갈까요?”
“얼마 안 가. 여기 있으면 우린 안전해.”
엔지니어 베른트가 마지막으로 내려온다. 그는 체구가 작고, 칙칙한 갈색 머리에 동공이 서로 어긋나 있다. 그는 뒤쪽 지하실 문을 닫고선 빗장을 가로지른 다음 얼굴에 두려움인지 투지인지 분간하기 힘든 눅눅한 표정을 담은 채 나무 층계참에서 반쯤 내려간 자리에 앉는다.
문이 닫히자 사이렌 소리가 먹먹해진다. 그들 위 천장의 전구가 깜빡거린다.
물, 베르너는 생각한다. 물 챙기는 걸 잊었어.
도시의 멀리 떨어진 어느 모퉁이에서 두 번째 대공포가 발사되더니 이윽고 위층에서 88이 또 한 차례 우렁차고 무시무시하게 발포된다. 베르너는 포탄이 굉음을 내며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천장에서 먼지가 쉭쉭 소리를 내며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헤드폰을 쓴 베르너의 귀에 위층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아직도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 아우프 드불다, 아우프 드불다, 다 샤인트 드준 아 조 굴다…….8)
폴크하이머가 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