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RY SQUIRES, FULL TILT
Copyright © 2020 by Heather Smith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Transatlantic Literary Agency Inc.,
through Danny Hong Agency, Seoul.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2 by Bluemoosebooks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대니홍 에이전시를 통한 저작권사와의 독점 계약으로 블루무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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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나아가라고 가르쳐 준 현실 속의 어른 고드에게,
그리고 언제나처럼 롭에게 이 책을 바친다.
프롤로그
이 책이 내 회고록이라면 첫 문장은 이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일은 빙고 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책 표지는 발꿈치를 딸깍 맞붙인 채 공중으로 날아오른 내 사진이 장식한다. 뒤표지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호평이 실린다. ‘성경 다음으로 기똥차게 좋은 최고의 책이다.’ 책 제목은 모두 신나게 두드려》, 그 아래에는 ‘핀바 T. 스콰이어스가 열정을 다해 지음’이라고 찍혀 나온다. 할머니가 열혈 팬이라서 할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도 넣는다.
하지만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다. 회고록은 놀랍도록 멋진 인생을 살아오고 영감 넘치는 이야기를 풀어 내는 사람들이 쓰는 것이다. 나는 단지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되겠다는 꿈을 좇았을 뿐이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 꿈도 끝장나 버렸다.
오플래허티 신부님이 운영하는 풀 틸트 댄스팀 공연은 천 번도 넘게 봤다. 하지만 프랭키 아저씨의 빙고 홀(여러 사람이 모여서 빙고 게임을 하는 실내 장소)에서 봤던 오프닝 공연만은 달랐다. 그때 처음으로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되고 싶었다.
타탄체크 무늬 댄스복이 네온사인 불빛을 받아 현란하게 반짝거려서? 프랭키 아저씨가 깔아 놓은 커다란 합판에 따닥따닥 부딪치는 댄스화 소리에 홀려서? 다 아니다. 작년에 동호회란 동호회에서 다 쫓겨나고 특별 활동부에도 못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놈의 성질을 죽이지 못하면 스무 살에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할머니의 악담도 한몫했다.
공연 장소인 빙고 홀 앞쪽 주차장은 출입 금지 줄이 쳐져 있었다. 엄마는 내 양쪽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고 내 뒤에 섰고, 아빠는 효자답게 할머니를 앞쪽 의자로 모셨다.
갓난아이 동생 고드도 같이 왔다면 좋았을 텐데. 뉴펀들랜드(캐나다 남동부에 있는 주) 전통 음악을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실라 누나와 집에 있다. 누나는 거하게 먹은 일요일 점심 뒷정리를 하겠다고 자진해서 남았다. 피우스 형은 누나의 헌신적 행동에도 툴툴거렸다.
“착한 척 그만해! 너 때문에 우리가 다 나쁜 놈들이 되잖아.”
피우스 형은 말투가 거칠었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항상 그 모양인데도 엄마는 16세(한국식 나이로는 17~18세) 성년의 날 이후로 피우스 형을 스위트 식스틴이라고 불렀다. 스위트 식스틴 피우스 형은 풀 틸트 댄스 공연을 보러 간다는 소리에 이렇게 말했다.
“아일랜드 댄스 구경? 그건 얼간이나 하는 짓이야.”
복잡한 주차장에서 미친 듯 움직이는 댄서들을 바라보자 400와트짜리 속도 조절 실톱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 댄스 구경이 얼간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럼 내가 제일 멍청한 얼간이다.
프랭키 아저씨는 밝은 네온사인 아래 서서 발을 구르고 손뼉을 쳤다.
“저 사람 좀 봐. 꼭 카나리아를 삼킨 고양이 같아.” 엄마가 말했다.
풀 틸트 댄스팀 공연은 원래 ‘주님께 더 가까이’ 양로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프랭키 아저씨가 한 사람당 빙고 게임 다섯 번 무료라는 미끼를 내걸고 낚아채 왔다. 오플래허티 신부님의 풀 틸트 댄스팀은 우리 동네에서 인기 최고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상대는 백파이프 연주자 앨피 브래그와 그의 백파이프뿐이었다.
항구 도시 세인트존스(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동남부에 있는 항구 도시)의 빙고 게임 광신도들은 프랭키 아저씨가 빙고 홀을 새로 짓는다는 소식에 열광했다. 원래 빙고 게임장이었던 성당 홀은 쥐가 들끓어 문제였다. 할머니는 매점에서 파는 치즈 과자 때문이라고 했다.
“고놈의 치즈 과자 하나만 바닥에 떨어져 봐. 우리가 반짝이는 금 조각을 보고 달려들 듯 생쥐가 들끓지.” 할머니 말씀이었다. 내 생각도 그랬다. 나도 바닥에 떨어진 치즈 과자 몇 개를 집어 먹었으니까.
성당 빙고 게임장을 찾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수다쟁이 버나데토 아주머니가 라디오 방송국의 전화 토크 쇼에 전화를 했다. 그러고는 하는 소리가 99세 증조할머니가 빙고 광신도라 성당 빙고 게임장에 다니는데 콧물이 줄줄 흐르고 쉽게 지치고 몸도 약해지는 게 전염병 증상 같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성당 게임장에 안 가려고 한다나. 당시 몰리 신부님이 두 번씩이나 소독을 한다고 말했지만 버나데토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런던 대역병(1600년대 런던에서 유행한 전염병) 때는 이불과 베개, 옷까지 전부 다 불태웠다면서 소독만 해서는 안 되고 쥐가 들끓는 성당 게임장을 싹 태워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때 프랭키 아저씨가 끼어들어서 빙고 홀을 새로 짓겠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바로 그날 몰리 신부님이 프랭키 아저씨에게 전화를 해서 ‘훌륭한 자선가’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자선가는 무슨 바람둥이겠지.”
내가 그게 무슨 말인지 묻자 엄마는 틸리 고모(덜렁거리는 노처녀라는 뜻)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내가 알기로 틸리 고모라는 사람은 우리 집 가계도에 없었다.
오프닝 공연이 끝난 후, 프랭키 아저씨가 이중문을 몸짓으로 가리켰다. 이중문은 노란색 출입 금지 줄에 가로막혀 있었다.
“동네 멍청이한테 개관식을 맡기면 저렇게 된다니까.” 프랭키 아저씨가 말했다.
‘동네 멍청이’는 프랭키 아저씨의 94세 엄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는 프랭키 아저씨 엄마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진짜 못 말리는 아들자식이네요.”
“걱정 마렴. 뿌린 대로 거둘 테니.”
프랭키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자르는 시늉을 했다.
“가위가 어디 있지?”
그때 동네 멍청이가 분홍색 플라스틱 안전 가위를 건네주었다. 나는 배꼽 빠지게 웃어 젖히며 말했다.
“할머니 최고!”
프랭키 아저씨는 안전 가위로 리본을 자르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마침내 리본이 싹둑 끊어졌을 때 풀 틸트 댄스팀이 축하 공연을 선보였다. 춤은 괜찮았지만 <난 소년이야> 선곡은 별로였다. 나라면 빙고 동요를 이렇게 바꿔 불렀을 텐데.
빙고 홀 새 주인은 프랭키 맥콜, 빙고는 게임 이름. 비 아이 엔 지오.
풀 틸트 댄스팀에게는 나의 기발한 아이디가 꼭 필요해 보였다. 박수 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난 부모님에게 새로운 인생 목표가 생겼다고 말씀 드렸다.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되겠다고.
“절대 안 돼. 너무 시끄러워서 미쳐 버릴 거야.” 아빠가 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아랫도리가 찌릿한 게 필이 온단 말야.”
“배리, 제발 말조심해. 성당 근처에서는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엄마가 속삭였다.
“아, 뭐래? 성경에도 항상 나오는 얘긴데.”
아빠가 빙고 홀로 앞장서 갔다.
“어서 와. 빙고 게임 시작해.”
“빙고는 됐고. 지금 내 꿈을 얘기하고 있잖아.”
“무조건 안 돼. 겨우 몇 주 하다가 그만둘 거잖아.” 엄마가 찬물을 끼얹었다.
“네가 동네 멍청이처럼 온 집 안을 딸깍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꼴은 못 봐 준다.” 아빠도 거들었다.
나는 돌멩이를 집어 들어 번쩍이는 간판을 향해 던졌다.
“에이 씨, 다 필요 없어!”
돌멩이는 목표물 몇 센티미터 앞에서 뚝 떨어졌다.
“빗나간 게 다행인 줄 알아. 안 그랬으면 네 가족 모두가 평생 동안 빙고 홀에 발도 들이지 못할 테니까.” 프랭키 아저씨가 말했다.
“정말 다행이구나, 아들. 너 때문에 여기 못 온다면 너랑 연을 끊을 거거든.” 엄마의 매정하기 짝이 없는 선언이었다.
엄마는 정말 빙고 게임을 좋아했다. 가족들과 함께 빙고 홀로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내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너 대체 왜 그래, 배리? 저번에 고드가 태어나고 엄마가 집을 나갔을 때는 반기독교를 외치더니.”
나는 팔꿈치를 잡아 뺐다.
“짜증 나게 왜 이래. 난 하느님 열혈 팬이야. 하느님 추종자에 광팬이라고, 꼰대 아저씨.”
“그렇게 부르지 마, 배리. 하느님 맙소사, 난 네 아빠라고.”
“하느님을 아무 데나 막 들먹이네. 그러면서 누구보고 반기독교주의자래?”
나는 스낵바에서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할머니는 매주 간식을 사 주셨다. 물론 그 대가로 할머니의 빙고 카드 20장을 채워 드려야 했지만.
“먹고 싶은 거 골라 봐.”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뭘 먹을지 쓱 보는데 배 속이 요동쳤다.
“치즈 과자 빼고. 그거 때문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는 거 알지?” 할머니가 조건을 걸었다.
프랭키 빙고 홀에 새로 들어선 스낵바는 갖가지 상품을 다 갖춰놓고 있었다. 고를 게 너무 많아 죽을 판이었다!
“할머니, 저기 봐요. 메이웨스트 파이(초코파이 모양의 디저트)도 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관심도 없었다. 반짝거리는 새 카운터에 넋이 나가 있었다.
“코멧 세제로 닦아야 윤기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는 짭조름한 감자칩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부모님이 있는 복잡한 테이블로 다가갔다.
“카드가 왜 이래?”
빙고 카드가 항상 하던 것과 달랐다. 카드 위쪽에 빙고라는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프랭키가 90볼 빙고를 해 보고 싶다는구나.” 할머니가 설명했다.
“영국에 여행 갔다가 해 봤대.” 엄마가 말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봐, 핀바 배리. 글자도 없고 숫자뿐이야.” 할머니가 경고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완전 정신 나간 짓이라고.” 아빠가 불평했다.
우리 네 사람은 매직펜을 든 채 무슨 숫자가 나올지 기다렸다.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며 살아났다.
“대박이 62.”
“이게 무슨 소리야?” 아빠가 물었다.
“숫자에 별명을 붙이는 영국식이죠. 색다른 재미가 있지 않나요?” 가까이 서 있던 프랭키 아저씨가 설명했다.
“차 한 잔 32.”
이번에는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도심지 붙박이요,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인 절름발이 영국인 스티븐이었다.
“더러운 옷 30.”
“죄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잖아.” 엄마가 투덜댔다.
“댄싱 퀸 17.”
아빠가 팔꿈치로 내 갈비뼈를 찔렀다.
“댄싱퀸이래, 배리. 널 위한 행운의 숫자야.”
다들 웃음을 터트리자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성질 죽여, 핀바 배리.” 엄마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매직펜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그 바람에 잉크가 흘러나와 할머니 빙고 카드가 잉크 범벅이 됐다.
“배리, 이게 무슨 짓이냐! 모서리 숫자 하나만 채우면 되는데!” 할머니가 외쳤다.
“예술가들이란 참 괴팍하다니까.” 아빠가 빈정거렸다.
나는 감자칩 봉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감자칩 45.”
급기야는 밖으로 냅다 뛰쳐나가 돌멩이를 하나 더 주워서 간판을 향해 던졌다.
“야, 조심해!”
빌리 월쉬가 콘크리트 담벼락에 앉아 생선튀김과 감자칩을 먹고 있었다. 작년에 나랑 좀 어울려 다니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녀석이었다.
“맞을 뻔했잖아.” 빌리가 짜증을 냈다.
빌리는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지만 덩치가 내 두 배였다. 미안하다고 하려는데 난데없는 빛줄기에 앞이 안 보였다. 따뜻하고 강렬한 빛에 온몸이 따끔거렸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빛줄기의 진원지를 노려보았다. 빌리의 탭댄스화 은색 바닥 쇠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었다.
“그 얘기 들었어?” 내가 운을 띄웠다.
“무슨 얘기?”
나는 미소 지었다. 할렐루야를 합창하는 천사들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다. 나, 배리 스콰이어스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탭댄스를 출 운명이었다.
나는 콘크리트 담벼락 위로 뛰어 올라갔다.
“썰 좀 풀어 봐.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빌리가 감자칩 하나를 입에 튕겨 넣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거 괜찮네. 또 없어?”
빌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디션에 지원하는 거지.”
“오디션이 언제인데?”
“9월.”
“6개월이나 남았잖아. 그렇게 오래 못 기다려.”
“인내가 미덕이야, 친구.”
“댄스복은 어떻게 구해?”
“오플래허티가 팔아. 125달러.”
댄스복은 뉴펀들랜드 타탄체크 무늬 디자인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빨간색, 노란색, 하얀색 줄무늬가 있었다. 할머니가 애국자처럼 보인다고 칭찬한 댄스복이었다. 피우스 형은 코흘리개나 입는 옷 같다고 했다.
“125달러? 완전 바가지 아냐?”
내가 묻자 빌리가 자기 조끼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아주 질이 좋다고. 100퍼센트 폴리에스테르야.”
“100퍼센트?” 내가 놀라서 외쳤다. 교복은 겨우 60퍼센트가 폴리에스테르였다. 나머지는 면이고.
빌리가 생선튀김을 케첩에 찍었다.
“미리 말해 두는데 댄서 인생이 온통 장밋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건 아냐. 이 바닥은 편견이 심해. 남자 댄서는 더 힘들지. 색안경 쓰고 보는 사람이 많거든.”
내가 손을 뻗어 감자칩 하나를 집었다.
“그런 얼간이들 잡소리에 주눅 들지 마, 빌리.”
내가 스카우트에서 쫓겨났을 때 할머니가 해 준 말이었다. 빌리라는 이름만 빼면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나는 담벼락에서 뛰어내렸다.
“야, 네가 고해실 가림막에 구멍 냈어?” 내가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빌리가 물었다.
“몰리 신부님이 나한테 너무 심했단 말야. 크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성모송(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기도)을 열 번 암송하라니 말이 돼?”
“뭘 잘못했는데?”
“교실 문에 구멍을 냈거든.”
나는 길을 걸으면서 운동화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입으로 딸깍딸깍 소리를 냈다. 집 안에 들어가자 누나가 고드를 안겨 주었다.
“네 차례야. 피우스는 하키 하러 갔고, 난 메모리얼대에 공부하러 갈 거야.”
실라 누나는 메모리얼 대학교 입학 허가서를 받은 후로 벌써 대학생이 된 것처럼 캠퍼스를 드나들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누나. 못생긴 얼굴 자꾸 들이대다가는 학기 시작도 하기 전에 쫓겨날지도 몰라.”
“6월에 우등생으로 졸업할 거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이 못생긴 면상을 아주 환영할걸.”
나도 6월에 졸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내 못생긴 면상을 환영해 줄지는 모르겠다.
고드가 통통한 작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빙고 홀 개관식 내내 보고 싶었던 고드였다.
“고드, 그거 알아? 이 형이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될 거야.” 내가 속삭였다.
*
뉴펀들랜드에서는 가끔씩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있다. 봄이 와야 하는 3월 말에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나는 고드에게 방한복을 입혔다. 빙고 게임 후 오후 산책을 나가려면 따뜻하게 입어야 했다. 나는 항상 그랬듯이 집주인 이름과 집 색깔을 읊으면서 동네 산책을 시작했다.
“머천트, 빨간색. 코디, 하얀색. 월링, 검정색.”
고드를 데리고 요크 대로를 벗어날 수 없었을 때 좀 재밌게 산책해 보려고 짜낸 생각이었다. 이제는 좀 더 멀리까지 갈 수 있는데도 그 전통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안 그러면 고드가 소리를 질렀다. 가끔은 고드가 고집부리지 말고 좀 유연하게 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엉덩이에 입을 맞출 정도로 유연한 녀석이 고집은 얼마나 센지.
“한라한, 초록색, 오브라이언, 파란색.”
“아바바, 아다다, 아파파.” 생후 6개월밖에 안 된 녀석이 유창하게 말도 잘한다. 이러니 내가 틈만 나면 동생 자랑을 할 수밖에 없지. 고드는 진짜 신동이다.
식당 겸 잡화 매장인 케인스도 산책 코스에 들어 있었다. 부 아저씨가 담배를 팔거나 뉴펀들랜드 전통 음식을 나눠 주느라 바쁘지 않다면 유령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부 아저씨는 시그널 언덕에서 머리 없는 유령을 봤다고 했다. 폭풍 치는 어두운 날 밤에 유령과 눈이 딱 마주쳤다나. 눈이 마주치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끔씩 고드는 부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하지만 가게를 떠나자마자 정신을 번쩍 차렸다. 공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콧속으로 밀려드는 소금기 섞인 공기가 상큼했다. 항구에 도착하면 고드는 더욱 생생해졌다.
“네가 수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드!”
나는 바다에 빠뜨릴 것처럼 고드의 유모차를 앞으로 기울였다. 고드가 좋아하는 놀이였다. 한번은 지나가던 할머니가 위험하다고 소리쳐서 내가 건들건들 말했다.
“할매, 진정제나 드시죠. 안전벨트 맸다고요.”
오늘은 케인스 가게에 가지 않고 빙고 홀로 돌아갔다. 합판은 아직 빙고 홀 바깥에 깔려 있었다.
“잘 봐, 고드!”
나는 오전에 봤던 풀 틸트 댄스팀의 춤을 따라했다. 소리는 조금 시끄러웠지만 아름답게 울렸다. 배경 음악이 없어서 내가 노래를 불렀다.
패디 머피가 죽던 날 밤
그 밤은 절대 잊지 못해.
만취했던 남자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모르는 가사는 ‘다다다’로 대충 넘기고 생각나는 가사만 불렀다.
머피 부인이 구석에 앉아
슬픔을 토해 내네.
켈리가 패거리를 끌고
거리를 달려 내려가
텅 빈 방으로 들어가네.
훔친 위스키 한 병
그 옆에 시체 한 구
위스키를 차갑게 식혀 주네.
“시체는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야, 고드. 남자들이 진짜로 패디 머피의 삶을 기리려고 술을 마셨던 건 아냐. 그냥 어떻게든 파티를 즐기고 싶었던 거지. 내 생각은 그래. 사실 가사는 좀 별로야. 멜로디가 좋지. 넌 어때, 고드? 노래 마음에 들어? 내 춤은 어때? 꽤 괜찮지? 너 표정 왜 그래? 똥 싸는 거 아니지? 여기서 똥 싸면 바로 집에 가야 해.”
고드가 사랑스럽게 까르르 웃었다. 두 달 전, 내가 고드의 유아 의자에 발가락을 부딪쳤을 때 처음 들었던 그 웃음이었다. 나는 “아야, 아야, 아야!” 하며 한 발로 뛰어다녔고, 고드는 “꺄르르, 까르르” 하고 신나게 웃었다. 그때 눈물로 눈이 따끔거렸다. 발이 아파서가 아니라 행복이 내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서 눈물이 났다.
나는 기저귀 위로 고드의 엉덩이를 만져 봤다. 똥을 싸지는 않은 것 같아서 배너먼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서 유아용 그네에 고드를 앉히려고 애썼다.
“좀 통통하구나, 고드. 하지만 걱정하지 마. 걸음마를 시작하면 바로 날씬해질 거야. 하지만 볼살은 빼면 안 돼, 알겠지? 볼살이 통통해야 귀엽거든. 볼이 홀쭉한 아기는 아무도 안 좋아해.”
나는 그네를 높이 밀어 올렸다.
“꽉 잡아, 고드. 네가 떨어져서 죽으면 엄마가 날 죽일 거야.”
엄마의 기분을 망치는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던 엄마가 마침내 기분이 좀 좋아졌다.
*
오늘은 아직 정오도 안 됐는데 일어난 엄마를 보고 다들 깜짝 놀랐다. 우리가 탁자에 앉아 할머니표 팬케이크를 먹을 때 엄마가 나타났다.
“같이 성당에 갈 거야?” 내가 물었다.
엄마가 내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엄마는 그냥 집에서 조용히 기도할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
엄마는 아빠의 접시에서 베이컨 한 조각을 훔쳐 갔다.
“아니, 이 사람이!” 아빠가 소리쳤다. 엄마는 허리를 숙여 아빠의 입술에 뽀뽀했다. 아빠의 얼굴이 환해졌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 엄마. 그 모습에 다들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가 금방 세탁한 빨래를 한 바구니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모두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엄마에게는 빨래가 전부였다. 빨랫감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늠했다.
“배리의 속옷 사이즈 좀 봐. 어린 우리 아들이 어른이 되어 가는구나. 실라 몸매도 점점 예뻐지고. 내가 실라 나이였을 때도 사이즈가 80D였지. 지금은 좀 줄어들었지만. 고드의 옷 사이즈도 한 치수 올려야겠어. 원숭이 그림 있는 게 좋겠는데. 내가 원숭이를 좋아하거든.”
차가운 공기가 집 안으로 밀려들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말없이 무릎 담요를 끌어당겨 올렸고, 실라 누나는 가운을 걸쳐 입었다. 아빠는 차가운 바람을 피하려고 고드의 유아 의자를 끌어당겼다. 피우스 형만 팬티 바람으로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뉴펀들랜드 사람이면 이 정도는 돼야지.”
엄마는 빨래 바구니에 손에 넣어 조심스럽게 빨래를 꺼내 빨랫줄에 널었다. 열린 문 사이로 우리를 쳐다보고는 미소 지었다.
“빨래 널기 좋은 날이야.”
햇살이 바위를 쪼갤 정도로 뜨거운 날에나 어울리는 대사였다. 하지만 엄마는 일 년 내내 빨래를 널었다. 가끔씩 빨래가 나무판처럼 뻣뻣해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엄마는 빨래 널 때 행복했으니까. 엄마가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했다.
엄마가 도르래 빨랫줄을 잡아당기자 끼익 소리가 났다.
“기름칠을 좀 해야겠구나.” 할머니가 말했다.
아빠가 창밖을 내다봤다.
“제 귀에는 음악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나는 추워서 닭살 돋은 양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나도 그래.”
*
고드를 데리고 배너먼 공원을 나와 빙고 홀로 돌아갔다. 나는 빙고 홀 탁자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에게 고드 자랑을 늘어놓았다. 할머니들은 담배를 입에 물고도 “축복받은 아이야”라고 용케 말했다. 다들 재주가 뛰어났다.
엄마가 날 발견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가 고등학생이 되면 고드를 더 멀리 데리고 다닐 수 있어. 그 전까지는 집 근처로만 다녀.”
“새로 생긴 빙고 홀을 보여 주고 싶었어. 보통은 케인스 가게까지만 간다고.” 물론 거짓말이었다. 나는 어디든 고드를 데리고 다녔다. 한번은 젤러스 쇼핑몰에 갔다. 거기서 15분 동안 말도 탔다. 물론 진짜 말은 아니었다. 진짜 말은 ‘히이’ 하고 울지만 쇼핑몰 말은
<윌리엄 텔> 서곡을 불렀다.
집에 돌아가서는 고드와 함께 만화 <러그래츠>를 봤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 고드는 낮잠을 자야 했다. 아빠와 할머니는 차를 한 잔 마시러 주방으로 갔다. 나는 비디오플레이어에 뮤지컬 <리버 댄스> 비디오테이프를 넣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비디오테이프였다. 엄마가 메인 댄서 마이클 플래틀리(아일랜드 탭댄스의 대부)를 좋아해서 사 준 선물이었다. 마이클 플래틀리는 맨 가슴에 볼레로 재킷을 걸쳤고 이마에 얇은 머리띠를 했다. 피우스 형은 그 꼴이 얼간이 같다고 했다. 엄마는 그 모습이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다고 했다.
“‘나 좀 봐. 나 얼간이야’라고 말이지?” 피우스 형이 빈정거렸다.
나는 <리버 댄스>를 두 번이나 보면서 아일랜드 댄스 기술을 익혔다. 양손을 옆구리에 올린 채 상당히 괜찮다 싶은 동작을 연습했다. 가끔씩 한 발을 빠르게 공중으로 차올렸다. <리버 댄스>의 대표적인 춤동작과 비슷해 보였다. 거기다 윙크를 추가해 나만의 춤동작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방 이쪽저쪽을 누비며 춤을 췄다. 풀 틸트 댄스팀 오디션이 열리는 9월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러기엔 내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천부적인 재능을 어떻게 썩힌단 말인가? 그건 나처럼 공정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할머니가 만든 일요일 특제 고기찜을 먹고 나서 거실의 잡동사니를 싹 치우고 가족들을 거실로 불러 모았다. 엄마와 아빠가 앙코르 공연에 오플래허티 신부님을 초대할 경우를 대비해서 주방 의자를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오플래허티 신부님은 몰리 신부님 뒤를 이어서 새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몰리 신부님은 풀 틸트 댄스팀이 경연 대회에서 번 돈으로 토끼털 중절모를 샀다는 비난을 사고 마을을 떠났다. 엄마와 아빠는 아직 오플래허티 신부님을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풀 틸트 댄스 단원이 되면 내 꿈도 이루고, 사람들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모두가 착석했을 때 나는 뒷문으로 나가 신발 바닥에 동전을 붙였다.
“빨리 좀 해. 화학 숙제해야 한다고.” 실라 누나가 재촉했다.
“나도 할 일 있어.” 피우스 형이 덩달아 말했다.
나는 충동적으로 셔츠를 벗어 던지고, 외투 걸이에 걸린 가짜 모피 재킷을 걸쳤다. 그러고는 신발 끈을 이마에 묶었다. 내 안에 잠든 플래틀리를 성공적으로 불러내고는 고개를 치켜든 채 딸깍거리면서 거실로 들어갔다.
“맙소사, 하느님, 성모 마리아님.” 엄마가 탄식했다.
“축복받은 아이야.”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무척 슬퍼 보였다.
“완전 얼간이 뺨치는 꼴이군.” 피우스 형이 말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문간에서 투우사 포즈를 취했다.
거실이 고요해졌다. 너무 조용했다. 젠장! 음악을 까먹고 안 틀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스럽게 CD 플레이어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 발가락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주 자연스러운데.” 피우스 형이 칭찬했다.
스피커에서 켈트 춤곡이 흘러나왔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춤출 거니 말거니?” 아빠가 다그쳤다.
아니, 그것도 모른단 말인가? 플래틀리는 음악이 중반에 진입하고 나서야 등장했다.
실라 누나는 씩씩대지, 엄마는 쯧쯧 혀를 차지, 피우스 형은 작지만 다 들리게 욕설을 내뱉지. 도무지 투우사 자세를 유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들 나중에 후회할걸. 내가 소파 위로 날아오르는 광경에 차갑게 죽어 있던 심장이 살아나는 것 같을 테니까.
“왜 그냥 거기 서 있는 거야?” 실라 누나가 물었다.
“얼간이니까 그러지.” 피우스 형이 대꾸했다.
배 속에서 뭔가가 으르렁대며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그 무언가를 잠재우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씩씩거리는 거 보니까 천식에 걸린 얼간인가 봐.” 실라 누나가 비꼬았다.
“시작하긴 할 거니?” 아빠가 재촉했다.
“아직 내 차례 아냐. 다른 댄서들이 무대를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다른 댄서가 어디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