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thias Nöllke, Understatement. Vom Vergnügen, unterschätzt zu werden © 2016 Verlag Herder GmbH, Freiburg im Breisg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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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겸손은 내가 경험한 모든 가치 중에 가장 세심하며 현명한 태도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공손함,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예의를 잃지 않는 정중함, 상황을 경솔하게 판단하지 않고 담담하고 점잖게 대할 줄 아는 신중함. 겸손은 이 모든 마음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태도.’ 이게 바로 겸손함이다.
그렇다 보니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이 겸손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 물론 겸손이 모두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선두로 나설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뒤에 물러나 있는 상황을 결코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사실만은 분명하다. 거만하게 굴고 오만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얘기하면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시끄러운 세상에서는 절제된 말과 행동이 오히려 더 강력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모든 게 큰 소리로 터져 나오는 세상에서는 고요함, 소박함, 평온함이 그리워지기 마련이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한껏 과장해서 떠드느라 바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비로소 실감한다. 겸손의 미덕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가치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태도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경제 매거진 《브랜드 아인스(Brand Eins)》는 소비 상품에 관한 내용을 다루면서 “거창하게 떠벌리는 것은 유행이 지났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요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으며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것은 ‘강제성이 없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소중한 것’이다. 브랜드의 로고(Logo)도 절대 거창하지 않다. 눈에 띄지 않거나 아예 없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렇다. 겸손은 고상함과 품위를 지니고 있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그로 말미암아 과소평가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겸손이란 바로 그 과소평가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과소평가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약점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과소평가에는 언제나 반전의 묘미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평소 나서지 않고 늘 소박하고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할 일이 끝나면 ‘별것 아닙니다’라는 말을 붙이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가 어떤 재능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한 일이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의 성과로 나타났다.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진짜 대단한데!”, “아니, 이런 능력자를 우리가 몰라봤다니!” 단 한순간에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인상적이고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이 책은 이처럼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태도에 관해 다방면에서 톺아보는 책이다. 시대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 태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짚어보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소크라테스와 루이 14세, 중세의 기사와 기사도, 영국의 젠틀맨과 매너 등 문화사적인 관점에서도 살펴본 후 심리학, 인간관계, 더 나은 삶과 성공의 관점에서도 하나씩 적용해 보려고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제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태도다. 조용하고 소박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이 태도는 스스로의 가치를 가장 현명하게 높이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약해 빠진 태도로는 손해 보기 십상이다”는 말은 이제 접어두시라. 대신에 ‘겸손한 그 태도가 좋아서 결국 더 멋진 결과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자기도취에 빠져 허우적대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반대편에서,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빛내며 능력을 발휘하고 신뢰를 얻는 사람들.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현명함이 말로만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의 허울보다 더 필요하고 또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쪼록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란다.
마티아스 뇔케
1
때는 1990년대, 주제넘게 굴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들이 사람들을 함부로 밀어서 쓰러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자들과 대응하는 걸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부류는 그저 내버려두고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어느 정도 잘 통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주제넘게 구는 사람들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 연대해 이렇게 외쳤다. “겸손은 무슨, 그냥 내 방식대로 산다!” 과하게 포장된 자랑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고, 무례함이 솔직함으로 둔갑해서 장악하는 세상이 되었다. 쌀 한 톨도 손해 안 보려고 가장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런 사람들이 주목받는 세상 말이다.
모든 게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며 거대한 변혁이 밀려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혁명과 조금은 덜 평화로운 혁명이 일어났고, 장벽과 국경이 무너졌으며, 인터넷이 대중화됐다. 세상은 숨이 막힐 만큼 놀라운 속도로 돌아갔다.
주식시장은 더 극적이었다. 주가는 하늘 높이 솟았고, 수수께끼 같은 사업 아이디어를 가진 특이한 기업들이 주식시장으로 가서 먹어 치우듯 돈을 빨아들였다. 그 기업들의 실적은 형편없었지만 주가는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그 가치가 공중에서 분해될 때까지. 누구도 이런 비참한 결과를 예견하지 못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변화는 도처에서 떠들썩했다. ‘시대의 정점에 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변화’라는 단어를 꺼내들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 옛것을 지키려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변화의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이 땅에 사는 인구수보다 더 많은 수의 휴대폰이 생겨났고, 공중전화 부스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는 말했다. 근사한 스마트폰이 생겼지만, 그걸로 나누는 대화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고.
당시 분위기가 그랬다. 모든 변화가 신나고 여유로운 파티를 열어주진 못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느꼈고 직장, 돈, 인간관계를 걱정했다. 주가가 오른 만큼 실업률과 국가 부채도 치솟았다. 의료보험, 연금, 사회 복지 등 여러 사회적 장치는 그전보다 더 위태위태했다. 사회가 제공하는 최소한의 보장 장치는 더 비싸졌고, 사회 복지라는 안락의자는 딱딱한 의자로 대체되었다. 심지어 입석도 생겼다.
이런 차가운 시대를, 뽐내고 자랑하기 바쁜 이들이 점령한 것이다. 그들은 무섭도록 단순한 그들만의 해법을 떠벌렸고, 변화의 시대에 치여 혼란에 빠진 사람들은 모든 걸 단순화해 버린 그들의 시나리오에 휩쓸렸다.
“돈 걱정이 많다고요? 그럼 부동산, 원자재, 유가증권 을 사세요. 백만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프다고요? 그럼 식습관을 바꾸고, 하루에 물 3리터를 마시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세요!”
“아직 결혼 상대를 못 찾았다고요? 그럼 마법 같은 이 문장들만 외우세요. 반드시 결혼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이성이 균형을 잃게 되면,
인간은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_ 푸블리우스 타키투스(Publius Tacitus), 로마의 역사가
1990년대는 ‘긍정적인 사고’가 우리를 덮쳤던 시대다. 사실 긍정이란 개념은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약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긍정’을 ‘마인드 치료 운동’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이를 믿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해악(害惡)과 질병의 원인은 정신적인 문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사고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곧 죄악이라고 여겼고, 반대로 항상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는 사람은 편안해질 수 있고,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진다고 믿었다.
이런 태도에 대해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건강, 권력, 성공 등 무엇이든 그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그 책임은 곧 당신에게 부여된다.” 이 말대로라면 아픈 것은 그 사람 잘못이 된다. 어떤 일에 실패한 사람은, 그 일이 성공하리라 확고하게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상당히 위험한 구석이 많았음에도, 1990년대에는 인기가 있었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퍼져 나갔다. 의심은 피해야 하는 태도였고, 무조건적 희망은 불가침의 의무가 되었다. 오로지 긍정적인 사고만 허락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긍정적 미래가 온다고 믿었다. 긍정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으며, 심지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주체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불가능’이란 단어를 당신의 사전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라고 미국의 목회자이자 저술가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는 청중들에게 외쳤다. “당신의 삶에서 그 말을 지우십시오! 영원히 불가능이라는 말을 지우세요!”
독일에서는 ‘안 된다는 말은 없다’라는 구호가 통용되었고, ‘숙고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비꼬는 말이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동기부여 전문가인 에밀 라텔반트(Emile Ratelband)는 강연 도중 “차카카”를 외쳐댔다. 부정적인 마음과 에너지를 방출하게 해주는 구호라면서! 그는 청충을 불러내 불타는 석탄이나 유리 조각 위를 걷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아프다고 하지 않았다. 화상을 입고 수포가 생기고 유리 조각에 찔려 피가 흘러도 말이다.
어쨌거나 청중은 잘 해냈고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다음에는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까. 달로 날아갈까? 독일 총리가 될까? 아니면 많은 이의 꿈인 탈모를 해결하게 해줄까?
그러는 사이, 긍정적 사고의 평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들은 추락하고 있었다.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그들은 비로소 알아차렸다. 계획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비상구를 스스로 폐쇄한 채 불타는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긍정적 사고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제동 장치 없는 긍정적 사고의 추락은 당연해 보였다. “너는 모든 걸 할 수 있어”라고 외쳐댄 유명 인사의 성공이 사실은 정신적인 힘이 아니라 탈법적인 수단이 동원된 결과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차지하고 있든 우주의 질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이 원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그리 끔찍한 일도 아니다. 긍정적 사고는 단지 성공을 위한 방식 중 하나다. 문제는 이 사고가 영혼 없는 성공지향형 로봇으로 탈바꿈될 때 불거진다. 융통성이 사라진 성공지향형 로봇은 모든 일이 얼마나 멋지게 돌아가고 있으며, 얼마나 환상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는지, 다음에는 어떤 대단한 일이 일어날지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아야 한다.
그렇다. 성공지향형 사람들은 거창하게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야 한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이야기에도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떠들어댄다. 그런 과장된 행동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독일의 팝 밴드 비어 진트 헬덴(Wir sind Helden, ‘우리는 영웅이다’라는 뜻)은 성공에 대한 강박적인 입장을 다음의 노래 가사에 정확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훈련받은 멋진 원숭이처럼.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되지. 우리는 오로지 원하기만 하면 돼. 우리는 오로지 원해야만 해. 우리는 오로지 해야만 해. 오로지 해야만 해. 우리는 오로지.”
훈련받은 원숭이처럼 오로지 원하기만 하면 된다니, 그게 정말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마음’일까?
성공한 사람들이 다 자신의 성취를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성공을 이룬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성공할 수 있는 비밀을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물론 그게 진심인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 이면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성공이 알려지는 순간, 그들의 성공 노하우를 궁금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생긴다. 성공을 떠벌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들이다.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말이다. 만일 따르는 이도 없는데 성공법에 대해 떠든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욕구만 거대한 수다쟁이에 불과할 테니까. 따라서 그들은 진짜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 따라 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들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게임에서 승자가 되기를 원한다. 자신을 ‘최고’ 혹은 ‘최고 중 최고’라고 부르고, 자신을 따라 하지 않는 사람들을 패자라고 부른다. 불안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너무 소심하다고, 비관적이라고, 적응하지 못한다고, 나태하다고, 불평이 많다고, 돈을 못 다룬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자신과 같은 승자의 유형은 스스로를 믿고,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며, 자연스레 돈도 따른다고 강조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 기업가 게랄트 회르한(Gerald Hörhan)은 상당히 특이한 유형의 사람이다. 처음 그를 본다거나 강연을 들으면, 독특한 용모와 언행에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가 성공에 관해 쓴 책의 부제는 이러하다. ‘왜 너희들은 뼈 빠지게 일하고 우리는 부자가 되는가.’
그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떠넘겨져서, 소비만 하는 바보들”에 불과하고, 개미투자자들은 “기꺼이 사기를 당하는 멍청이들”이다. 터무니없는 선동처럼 들리지만, 정작 그는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성공한 투자자이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이 남자는 앞머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펑크족같이 보이는 요란한 옷을 입고 대중들 앞에 등장한다.
펑크족이라고? 사회활동을 거부하고 공원이나 기차역 같은 곳에서 싸구려 맥주를 마시며 이상을 좇던, 그 소박한 젊은이들? 구걸할지언정 잘난 척은 결코 하지 않는 그들? 절대 아니다. 게랄트 회르한 같은 ‘투자 펑크족’은 그들과 전혀 다르다. 투자 펑크족은 현재의 행복만을 누리려는 삶이 아니라 ‘미래 연맹’에 몰입해 있는 약삭빠른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와 금융 시스템에 우롱당해서는 안 된다”며 연대감을 표시하듯 말하지만 과연 이 말을 믿고 희망을 품어도 될까?
‘성공을 전파하는 대부’라 불리는 위르겐 횔러(Jürgen Höller)는 독자들에게 매주 ‘성공과 동기부여에 관련한 뉴스레터’를 몇 번씩 보내곤 하는데, 한번은 프랑스의 억만장자 장 폴 고티에(Jean Paul Gottier)가 했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이 억만장자는 “만일 내가 낙하산에 실려 외로운 섬에 던져질지라도, 나는 그곳에서 돈과 성공을 쌓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혹시 고티에라는 이름을 가진 억만장자를 아는가? 디자이너 고티에(Jean Paul Gaultier)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횔러가 인용한 ‘낙하산 어록’은 찾을 수 없었다.
투자 펑크족이나 횔러 같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과장된 행동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나를 보시오.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이고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차를 몰고 다닙니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우리가 자신들처럼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그건 우리의 책임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쓴 책에서 이런 약속을 한다. “여러분들은 이 책에서 어떻게 승자에 속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겁니다.”
성공 전파자들이 이용하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에 속지 말자. 우리 삶은 그렇게 간단한 대립 구도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모순투성이기도 하며, 그래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생은 승패를 나누는 경쟁이 아니다. 그건 성공을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들먹이는 불손한 말이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명함을 금박으로 치장하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미국의 한 명문 대학교 강당에서 강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날의 강연자는 경영컨설턴트인 제프리 크라이슬러(Jeffrey Kreisler)였고, 강당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는 청중들에게 “만일 250만 달러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지 상상해 보라”고 했다. 당신이라면 이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집이나 비싼 자동차를 살 것인가? 아니면 여행을 떠날 것인가?
크라이슬러는 “그렇게 많은 돈을 갖고 싶다면, 먼저 생각부터 바꿀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적으로 비용 효율성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원칙도 예외가 아니다. 정직해서 얼마를 손해 볼 것인가? 정직하지 않았다면 이익이 얼마나 됐을까? 만일 누군가를 속이면 득과 실은 어떻게 되지? 이건 범죄가 아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방식이다.” 크라이슬러는 장담하듯 말했다. “금융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해서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가장 끔찍한 경우라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조금 당할 뿐이다.” 일이 잘못되면 벌금형을 받을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쯤은 미미하다는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한들 어떠냐고 그는 반문한다. “리스크가 없으면, 큰돈을 갖겠다는 꿈은 결코 실현할 수 없다.”
예감했겠지만, 제프리 크라이슬러는 진정한 의미의 경영컨설턴트가 아니라 강연을 하면서 속임수를 쓰는 ‘꾼’일 뿐이다. 그는 꽤 진지하지만 청중들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크라이슬러 자신도 이 웃음에 양면성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 듯하다. “나를 비웃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나와 함께 웃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항상 예의를 잃지 않고, 마음속에 윤리적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인정사정없이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 이분법 역시 승자와 패자의 구도를 ‘윤리’의 관점으로 바꾼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가 언제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언제 속임수를 쓰는지를 알기 위해 광범위하게 진행된 심리학 연구가 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자신에게 득이 되면 아무 고민 없이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예의 바르고 공정한 행동을 보였다.
물론 어떤 조건에서는 자신의 윤리적 원칙을 더 유연하게 적용하거나 혹은 그냥 무시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다른 사람들도 다 자신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믿을 때, 그리고 오직 돈에 대해서만 모든 관심이 향할 때.
미국의 팝가수 신디 로퍼(Cyndi Lauper)는 “돈이 모든 것을 바꾼다(Money changes everything)”라고 노래했다. 이와 동일한 제목으로 심리학자 데이비드 데스테노(David DeSteno)는 충격적인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돈 문제가 걸려 있으면 사람들은 평상시에 비해 덜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제프리 크라이슬러가 강연을 시작할 때 엄청난 돈을 상상해 보라고 말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게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면, 원래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과대 포장이 넘치는 세상에서 만족은 금물이다. 처음 성공이란 걸 이루면 스스로 놀랍기도 하고, 승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진다. 하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이제 이런 슬로건들이 등장한다.
“계속 노력하라. 끊임없이 배워라. 매일 더 나아가고, 더 성장하고, 또 더 발전해라. 좋은 수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탁월해야 한다. 최상급이 새로운 기준이며, 세계 최고가 목표다. 우리는 이미 앞서 나가고 있지만, 우리 자신을 앞지르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려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발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더 큰 성공을 재촉하고 내모는 것이 새로움에 대한 열린 자세나 혹은 자기 성찰 때문일까? 아니다. 계속 더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다. 승자의 자세를 계속 취하고 싶은 욕망.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되면 모두를 미치게 만든다. 다른 사람들도 그 욕망에 끌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1등이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의지박약으로 간주되고 출발부터 실패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모두가 최고가 되기를 원해야 한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세계 최고가 있다.
“최고만 앉는 자리가 더 늘어났다.”
_ 베르티 포크츠(Berti Vogts), 독일 출신의 감독
그들은 현실적 목표가 아니라 과도한 목표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목표를 높게 세울수록 더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명백한 착각이다. 우리의 뇌는 과도한 목표를 자극이 아니라 지나친 요구로 받아들인다. 비현실적인 목표는 말 그대로 현실화시킬 수 없는 이상이 되어버린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부과되는 과도한 요구를 ‘동기부여’라고 외친다면? 모두가 세계 기록을 세우거나 스티브 잡스가 돼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컨설턴트들은 결코 소박한 삶을 살지 않았던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 시대의 투사가 했던 이런 말을 인용하면 왠지 더 자유롭고, 모험적이고, 속박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은 일꾼들이 짊어진 고된 노동의 굴레에는 눈을 감은 채 ‘당신들 안에 잠들어 있는 거인을 깨우라’고 끈질기게 요구한다.
따라서 성공한 이들의 불만족은 진정한 의미의 불만족과는 차이가 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고통스럽게 느낄 때 생기는 진짜 불만족은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감정이다. 그건 ‘다음 성공, 또 그다음 성공’을 부르짖는 이들의 피상적인 불만족과 같을 수가 없다.
성공과 행운에 대해 충고하는 컨설턴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근면과 실력, 내적인 가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어쩌면 그게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으며, 진짜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고. 남들보다 앞서갈지 아닐지는 스스로를 얼마나 잘 팔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다. “첫 시작부터 잘해야 한다. 첫인상을 보완해 줄 두 번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까”라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