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각주에서 저자의 주는 ‘원주’라고 표기했고 그 외는 모두 옮긴이 주다.
사랑의 형이상학ㆍ1
Metaphysik der Geschlechtsliebe
시인들은 즐겨 사랑을 묘사한다. 사랑은 비극이건 희극이건, 낭만적이건 고전적이건, 인도에서건 유럽에서건 모든 희곡에서 흔히 다루는 주제며, 서정시나 서사시에도 곧잘 등장하는 주제다. 특히 유럽의 많은 문명국가에서 몇 세기 동안, 마치 해마다 생산되는 농산물처럼 규칙적으로 출판하는 소설에서도 사랑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러한 모든 작품의 주요 내용을 보면 결국 사랑을 간단하게 혹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예를 들면 불멸의 명작으로 일컫는 《로미오와 줄리엣》, 《신新 엘로이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과 같은 작품이 그러하다.
라로슈푸코는 정열적인 사랑은 마치 유령과 같아서 사람들이 여러 모습으로 이야기하지만 누구도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또한 리히텐베르크
는 〈사랑의 힘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러한 현실성과 자연성을 부정하고 공박하는데 이는 큰 오류다. 사랑이 인간의 천성과 관계없거나 모순된다면, 즉 단지 상상으로 만들어내어 희화한 거라면 모든 시대의 천재적 시인들이 끊임없이 묘사하지도 않았을 테고 사람들이 변함없는 흥밋거리로 환영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또한 진리가 들어 있지 않은 작품에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존재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 프랑스의 모럴리스트다.
Georg Christoph Lichtenberg, 1742~1799.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풍자학자다.
진리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고
진리만이 사랑의 대상이다.
/부알로
Nicolas Boileau, 1636~1711. 프랑스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고전주의 문학 이론의 대표자다.
사랑은 일상적으로 매일 되풀이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뜨겁지만 통제할 수 있는 사랑도 어떤 상황에서는 급속도로 증폭되어 그 강렬한 불길이 다른 모든 정열을 뛰어넘고, 모든 사념을 물리치며 큰 위력을 발휘한다. 모든 장애를 물리치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그래도 채워지지 않으면 자살까지 결행하기도 한다.
베르테르나 야코프 오르티스 같은 이들이 소설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실제 이런 이유로 자살하는 사람이 해마다 네다섯 명은 나온다. 남모르게 죽어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이들이 고뇌한 흔적은 고작 신문이나 잡지에 자그맣게 보도되고, 그 죽음은 호적계 관리자의 손에서 습관적으로 처리될 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신문을 읽는 사람들은 내 말이 옳다고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러한 정열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을 드나든다.
이탈리아 작가 우고 포스콜로의 작품 《야코프 오르티스의 마지막 편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그리고 해마다 여러 쌍의 연인이 사랑 때문에 죽는다. 외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 나머지 죽음을 택해서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며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을 텐데, 어떻게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의 큰 행복을 잡으려 하지 않고 왜 생명을 쉽게 포기해버리는지 나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특별한 예일 뿐이고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잔잔한 사랑의 불꽃을 보고 들으며 아주 늙지 않은 이상 대개는 가슴속에 그런 불꽃을 지니고 있다.
아무튼 사랑이 인생에서 중대한 사건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시인들이 늘 다뤄온 이 주제를 철학자가 다룬다고 해서 그리 괴이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생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문제를 지금까지 철학자가 전혀 고찰하지 않았고, 또 다루지 않은 소재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문제(사랑)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플라톤이다. 특히 《향연》과 《파이드로스》에서 사랑에 대해 많이 다루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신화나 우화, 비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고 대부분 그리스인의 남색男色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짧게 이 주제를 다룬 부분이 있는데 내용도 불충분하고 잘못되었다. 칸트도 논문 〈미와 숭고한 감정에 대하여〉 3장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는데, 이 또한 부분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전문적 지식이 없는 피상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트너가 《인류학》에서 이 문제를 논한 것도 천박하고 평범한 견해다. 이와 반대로 스피노자의 정의는 극히 소박해서 기분 전환 삼아 인용해볼 만하다.
Karl Friedrich Plattner, 1800~1858. 독일의 화학자이자 철학자다.
연애는 외부적인 원인에서 오는 관념에 따르는 일종의 쾌락이다.
/《에티카》 4부 정리定理 44의 증명
내게는 이들을 인용하거나 논박할 근거가 없다. 즉,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나의 가슴에 밀려와서 저절로 나의 세계 고찰의 맥락 속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정열에 지배당해 자신의 넘치는 감정을 가장 숭고하고 영묘한 형태로 표현하려는 사람들의 동의나 찬양을 기대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내 견해가 너무나 물질적이거나 형이하학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아주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이다.
다만 다음 하나만은 꼭 생각해주기 바란다. 오늘날 그들에게 마드리갈이나 소네트를 만들게 할 정도의 감격을 안겨준 대상도, 그들이 18년 전에 태어났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연애는 아무리 영묘한 외관으로 포장하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에 기인하며 성욕이 특수화 또는 개체화된 것이다. 성애性愛는 희곡이나 소설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모든 단계와 배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모든 충동 중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 다음으로 가장 강하고 활동적이다. 그래서 언제나 젊은이들의 힘과 사상의 절반을 차지한다.
목가와 연애시에 곡을 붙인 무반주 합창곡이다.
유럽 서정시의 한 형식이다.
또한 성애는 뭇사람들이 하는 노력의 최후 목표며 가장 중대한 사건에 악영향을 끼치고 가장 진지한 일을 수시로 중단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가장 위대한 지성에도 한동안 혼란을 주어 정치가가 회담할 때나 학자들이 연구 중일 때도 누더기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 방해한다.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장관의 서류함이나 철학자의 원고 속에 밀어 넣는가 하면 교묘하게 매일 가장 분규가 심하고 나쁜 사건을 계획하며, 가장 중요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가장 견고한 유대도 단절시킨다. 때로는 생명이나 건강 혹은 재산과 지위와 행복까지도 희생시킬 뿐 아니라 정직한 사람들을 부정직하게, 지금까지 성실하던 사람을 불성실하게 만드는 등 모든 것을 전도시키고, 혼란을 주며 전복하는 악마가 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볼 때 무엇 때문에 우리는 소란과 혼잡, 싸움, 근심, 궁핍에 빠지는 거냐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저마다 상대를 찾기 위해서다. 지극히 단순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소한 일이 왜 그처럼 큰 풍파를 일으키고 질서 있는 인생에 끊임없이 소란과 혼란을 가져올까?
방해와 혼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철학자라면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그 중대성이 결코 하나의 작은 일과 관련된 게 아니고 당사자들의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과 맞먹는다는 사실이다.
비극으로 연출되든 희극으로 연출되든, 모든 연애의 목적은 인생의 여러 목적보다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연애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게 당연하다. 거기서 다음 세대의 구성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실제로 이뤄진다. 우리가 무대에서 퇴장한 뒤에 새로 등장할 인물의 생존과 성질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남녀의 정사情事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간 존재, 즉 실존이 우리의 성욕을 절대 조건으로 삼고 있듯이 성격적인 특질인 본성도 성애에서 개체의 선택이 절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이 사랑을 통해 모든 부분이 돌이킬 수 없게 확정된다. 이 점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아주 가벼운 호감에서 격렬한 격정으로까지 흐르는 연애의 정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를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나타나는 여러 연애의 형태는 이성을 선택하는 개별화 정도에 따라 차이가 발생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모든 연애 사건은 전 인류의 다가올 세대의 구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며, 그 이후의 무수한 세대를 배려하는 진지한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랑은 다른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이 아니라 미래의 인류 생존과 특수한 성질에 대한 문제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는 강화되어 종족의 의지로 나타나는데, 연애 사건의 극한 슬픔과 숭고함, 그 환희와 고뇌의 초월성도 연애의 중요성에 기인한다. 시인들이 수천 년 동안 무수한 실례를 들며 사랑을 묘사했지만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 이유는 흥미 면에서 어떤 주제도 이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종족의 행복과 불행과 관련이 있어서, 개인의 행복과 관련된 다른 모든 것과 사랑의 관계는 마치 평면과 입체의 관계와 같다.
사랑 이야기가 없는 희곡이 흥미를 자아내기 어려운데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는 오랜 옛날부터 다뤄온 주제인데도 결코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 남자와 여자라는 어느 특정한 개인에게 향하지 못하고 개인의 의식 속에서 희미한 성욕으로 나타나는 것은 모든 현상 밖에 존재하는, 살고자 하는 절대적 의지 때문이다. 반면에 의식 속에서 특정한 대상을 향한 성욕도 나타나는데, 이는 자신이 하나의 개체로서 살려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미래의 후계자라는 명백히 한정된 생물체 안에서 살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경우 성욕은 그 자체로 주관적 욕구이지만 교묘하게 객관적인 감탄과 찬미라는 가면을 쓰고 의식을 기만하는 술책을 쓴다.
자연은 목적을 위해 이러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감탄과 찬미가 아무리 객관적이고 숭고한 색채를 띠는 듯 보여도 그 최종 목적은 일정한 특성을 가진 개체의 생산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애할 때 서로에 대한 애정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애정이 확실하다 해도 육체적 관계가 빠지면 아무런 위안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상태에서 자살해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강한 애정을 품은 사람이 그 사랑에 보답받지 못하면 상대방을 소유하는 것, 즉 육체관계만으로도 만족하는 경우가 있다. 여자가 싫어하는데도 많은 선물이나 그 밖의 재물을 미끼로 육체관계라는 목적을 달성하거나 강간 등을 저지르는 것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정사는 설령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결국 아이를 낳는 것이 참되고 유일한 목적이다.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은 부차적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고상하고 다감한 사람들, 특히 현재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내 견해가 지나친 현실론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다음 세대의 개성을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그들의 과장된 감정이나 초감각적인 비눗방울 같은 것보다 훨씬 높고 가치 있지 않겠는가? 인간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이 목적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열렬한 사랑도 이해할 수 없다. 이 목적이 사랑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며, 그 동기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사랑의 이러한 목적과 연결되면 곧 중대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랑하는 상대를 얻기 위해서 하는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이나 한없는 노력과 노고가 결과와 맞지 않는 듯도 보이지만, 이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앞에서 말한 참된 목적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행동과 노력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바로 완전한 개체로 확정된 미래의 세대이기 때문이다. 아니, 미래 세대 자신도 우리가 연애라고 부르는 성욕을 위해 극히 신중하고도 확실하며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선택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깊어지는 애정은 필경 그들이 낳을 수 있거나 낳으려고 하는 새로운 개체의 생존 의지다. 다시 말하면 서로 반한 두 남녀가 주고받는 갈망으로 가득한 눈빛에서 벌써 새로운 개체의 생명이 싹터 미래의 개체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참다운 하나로 결합하고 융화되어 하나로서만 평생을 살아가고 싶은 갈망을 느낀다. 이러한 갈망은 그들이 낳은 개체 속에서 실현되는데, 두 사람의 유전적 특성이 융합되고 결합하고 합쳐져서 하나의 존재로 생존해간다.
반대로 남자와 여자가 집요하게 확실히 서로를 싫어한다면, 그들 사이에서 태어날 아기는 나쁜, 부조화한, 불행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징후다. 그러므로 칼데론이 대기의 딸이라고 부르는 무서운 세미라미스(강간으로 태어난 딸)를 나중에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한 데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Pedro Calderon de la Berca, 1600~1681. 스페인의 극작가다.
마지막으로 이성의 두 개체가 강력하게 서로 자신의 상대만을 끌어당기는 것은 모든 종족에게 나타나는 생존 의지며, 이 의지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자식이 자신을 실현해주기를 바란다. 자식은 대개 아버지에게서 의지, 즉 성격을 물려받고 어머니에게서 지성을 이어받으며 이 두 사람 모두에게서 체질을 계승받는다.
그러나 대개 용모는 아버지를 많이 닮고 체격은 오히려 어머니를 닮는다. 이 법칙은 동물의 잡종을 만들 때 나타나는데, 주로 태아의 크기가 자궁의 크기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각 개체의 아주 특별하고 고유한 개성을 쉽게 설명할 수 없듯이 두 연인의 아주 특별하고 개별적인 정열 또한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둘 다 그 뿌리는 동일하며, 후자에 포함된 것이 전자로 드러난 것이다.
새로운 개체의 출현, 그 생명의 참된 발생점은 사실 부모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영어로는 ‘서로 좋아하다to fancy each other’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의 갈망하는 시선이 서로 마주쳤을 때 새로운 존재가 싹튼다.
이 존재도 물론 다른 모든 존재처럼 짓밟히기도 한다. 이 새로운 개체는 어느 의미에서 새로운 플라톤적인 이념이다. 모든 이념이 현상계에 나타나려는 줄기찬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인과법칙이 그들의 입속에 넣어주는 물질을 삼키려고 하듯이 인간 개체인 이 특수한 이념도 최대의 탐욕과 격정으로 현상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이 탐욕과 격정이야말로 미래의 부모가 될 두 사람 사이의 정열이다.
격정에는 무수한 단계가 있는데, 그 양극단을 ‘평범한 사랑’과 ‘천상의 사랑’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본질은 동일하다. 다만 그 정도의 측면에서 정열이 개체화하면 할수록, 즉 사랑받는 개체의 모든 부분과 성질이 사랑하는 개체의 소망이나 자신의 개성으로 확립된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가장 적합하면 할수록,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이때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점차 명료해진다.
애욕적인 사랑은 첫째로 본질상 건강, 힘, 아름다움, 청춘을 향한다. 의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개성의 밑바탕인 인류의 종족적 성격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랑은 이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다음으로 더 구체적인 요구가 여기에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서 이를 계속해서 자세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 요구가 충족될 가망이 있을 때 정열도 함께 높아진다.
그런데 두 개체가 서로 잘 어울릴 때 정열이 최고에 다다른다. 이를 통해 아버지의 의지, 즉 성격과 어머니의 지성이 결합하여 목적하는 개체가 완성된다. 보통 모든 종족에게서 나타나는 개체에 대한 생존 의지는 그 크기에 알맞은, 인간 마음의 한계를 넘어선 갈망을 느낀다. 이 갈망의 동기 또한 마찬가지로 개인 지성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정열의 영혼이다.
다음으로 고찰해볼 점은 두 개체가 상호 간에 화합하는 정도가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상호 간의 정열은 더욱 강렬해진다는 것이다. 완전히 동일한 두 개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특정한 남성은 언제나 태어날 아이를 고려하여 특정한 여성과 가장 완벽하게 짝을 이뤄야 한다. 이러한 남녀가 서로 만나는 일이 매우 드물듯이, 정열적인 연애 또한 참으로 드물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이러한 연애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가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열적인 사랑의 핵심은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기대감과 그 본성에 달려 있기에, 두 사람의 이성과 교양, 성향과 성격, 지적 경향이 일치할 경우 성애가 전혀 섞이지 않는 우정이 성립할 수도 있는데 더욱이 이 점에서 서로에게 일종의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원인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부조화한 특성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것, 즉 아이의 생존과 특성이 종족에게 나타나는 생존 의지라는 목적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성향, 성격, 지적 경향의 질이 달라서 서로에게 혐오감을 느낄 뿐 아니라 적의마저 품고 있는데도 성애가 생길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사랑이 서로를 맹목적으로 만들어 그 부조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일 여기에 현혹되어 결혼에까지 이른다면 그들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이제부터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보자. 이기주의는 일반적으로 모든 개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그 개체가 활동하려면 이기적인 목적을 보이는 것보다 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 사실 종족은 사멸해야 할 개체 그 자체보다도 더 빠르고 직접적인 큰 권리를 개체에 가지고 있지만, 개체가 종족의 존속이나 성질을 위해 활동하고 또 희생해야만 할 때 개체에게 그러한 희생의 필요성을 이해시키고 개체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자연이 다음의 수단을 취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자연이 개체에게 일종의 환영을 심어, 사실은 종족을 위해서인데 개체 자신을 위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 거기에 진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개체는 훗날에 결국 스러져버릴 단순한 환영을 개체에게서 추구하게 된다. 이 환영이 바로 본능이다. 이 본능은 대개 종족의 감각으로 여겨지며, 종족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의지의 면전에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 의지는 개체적이라서 이 본능에 기만당하여, 종족의 감각이 내보이는 것을 개체의 감각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본능은 동물에게 가장 큰 역할을 하며 외부로 나타난 모습은 정밀하게 관찰할 수 있으나, 내부 활동은 다른 모든 내면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로 오직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만 알 수 있다. 흔히 인간에게는 본능이란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더듬는 정도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아주 명확하고 복잡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성욕의 만족을 위해 다른 개체를 교묘하고 진지하게 자의적으로 선택하는 것 또한 본능이다.
만약 이 성욕에 대한 만족감이 개체의 절실한 욕구에서 기인한 관능적인 향락에만 머무른다면 상대 이성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아름다움과 추함을 두고 열심히 고려하고 신중하게 선택한다. 이는 선택하는 개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개체는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이 행동의 진정한 목표는 태어날 아이와 관련이 있으며, 가능한 한 종족의 전형을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려는 방편이다.
많은 육체적인 사건이나 도덕적인 부정으로 인간 형태에 실로 다양한 변종이 생기지만 순수한 전형은 그 모든 부분에서 끊임없이 회복 중이다. 이러한 회복은 미적 감정에 이끌려 행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성욕에 앞서는 이 미적 감정이 없으면 성욕은 구토를 유발할 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개체, 즉 종족의 성격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 있는 개체를 결정적으로 좋아하며 또한 열렬히 그런 완벽함을 원한다.
누구든 다른 개체에서 자신에게 없는 아름다움을 특히 더 원한다. 그뿐만 아니라 결점이라 하더라도 자신과 반대되는 거라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키가 작은 남자는 키가 큰 여자를, 금발을 가진 사람은 흑발의 사람을 좋아한다.
남자는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을 때 현혹되어 환희에 사로잡히며 그 여자와 결합하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이 환희가 바로 종족의 의지다. 그녀를 통해 자기 종족을 영속시키려는 것이다. 종족 전형의 유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강한 애착에 기인해서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은 매우 큰 힘으로 작용한다. 이 애착에 따른 고려 사항은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런데 인간을 이끄는 것은 실상 종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능이지만 인간은 단지 자신이 커다란 향락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모든 본능의 내면적인 본질에 대한 많은 교훈을 얻은 셈인데, 본능의 역할은 거의 언제나 종족의 행복을 위해 개체를 움직이는 데 있다.
한 마리의 곤충이 알을 낳기 위해 꽃이나 과실, 오물이나 짐승 고기 혹은 여왕벌처럼 다른 곤충을 찾아 헤매며 어떠한 고생이나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마치 남자가 성욕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의 개체로서 자신에게 맞는 한 여자를 바라는 것과 흡사하다. 때로는 모든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 여자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어리석은 결혼으로, 혹은 재산이나 명예, 생명까지도 앗아가는 연애 사건으로, 나아가 간통이나 강간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
이는 모든 곳에서 주권을 쥐고 있는 자연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개체를 희생하더라도 가장 효과적으로 종족에게 봉사하기 위해서다. 언뜻 보면 때때로 본능은 일정한 목적이라는 개념에 종사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은 행동하는 개인이 목적을 이해할 능력이 없거나 목적을 추구하기 싫어할 때 본능을 발동한다.
대개 본능은 동물, 주로 지능이 가장 낮은 하급 동물에게만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살펴본 내용으로 보면 인간에게도 본능이 있다. 인간에게 본능이 주어진 이유는 자연의 목적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목적을 위해 자기 행복을 희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본능과 마찬가지로 의지에 따라 작용하게 하려고 진리가 환영의 형태를 취한다. 남자를 기만하는 것은 음탕한 망상이라서, 남자는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여자의 팔에 안기면 다른 여자의 팔에 안길 때보다 더 만족스러우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그 본능이 오직 하나의 개체만을 향하면 이 개체의 소유를 통해 자신이 무한한 행복을 얻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남자는 자신이 쾌락을 위해 노고와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종족의 올바른 전형을 유지하기 위해 또한 부모에게서만 물려받을 수 있는 아주 특정한 개체를 출생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본능에는 인간이 그 목적을 위해 힘쓰도록 하는 특성이 있어서 때때로 인간은 자신의 환영에 이끌린다. 그리고 이렇게 했다가 앞으로 새 생명이 탄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싫으면 여기에 반항하기도 한다. 대부분 간통의 경우에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본능의 특성에 따라서 향락을 끝낸 후에는 이상한 실망을 경험하며, 그렇게까지 열망했지만 다른 모든 성적 만족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러면 남자는 향락에 별 이익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즉, 이 욕망과 다른 모든 욕망의 관계는 종족과 개체, 즉 무한無限이 유한有限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해 만족은 본래 종족에게 이익이기 때문에 개체의 의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개체의 의식은 종족 의지에 격려받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봉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애인은 이 위대한 작업을 완성한 후에야 비로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환영이 사라지면 개체가 종족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 상황을 아주 적절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쾌락에 버금갈 최대의 사기꾼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동물의 본능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을 설명하는 데 빛을 던져준다. 틀림없이 동물도 일종의 환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쾌락을 추구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아주 열심히 종족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다.
새는 둥지를 틀고, 곤충은 알을 낳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거나 자신은 먹을 수 없어도 태어날 유충에게 주기 위해 먹이를 찾아 헤매고, 꿀벌이나 호리병벌이나 개미는 교묘하게 둥지를 틀고 아주 복잡한 경제 체계에서 일에 전념한다. 이 동물들은 모두 틀림없이 종족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의 가면을 쓴 환영에 이끌리고 있다. 이는 본능을 발현시키는 기본 단계인 주관적인 진행 과정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본능이 지배하는 동물, 특히 곤충은 신경 계통, 즉 주관적인 신경 계통이 뇌신경 계통보다 우수한 듯하다. 이로 미뤄볼 때 곤충들은 객관적으로 정당한 이해를 좇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경 계통이 두뇌에 미치는 작용으로 생기는 주관적이고도 욕망을 자극하는 표상, 그러니까 일종의 환영에 이끌린다. 이는 모든 본능의 생리적인 진행 과정이다.
좀 미약하지만 인간의 본능을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임신부의 엄청난 식욕을 예로 들어보겠다. 여기에는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해줘야 하는 혈액이 특별한 또는 일정한 변화를 자주 요구하는 데 원인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임신부가 그러한 변화를 만드는 음식물을 홀연히 갈망하게 되고 여기서도 음식물이라는 하나의 환영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자보다 본능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또 신경 계통은 여자가 훨씬 더 발달해 있다.
인간이 동물보다도 약한 본능을 가졌고, 이 약한 본능조차도 잘못 인도되기 쉽다는 것은 사람의 두뇌가 그만큼 뛰어나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성적 만족을 위한 선택을 본능적으로 이끄는 미적 감정이 남색의 경향으로 타락한다면 잘못 인도된 것이다. 쉬파리가 그 본능에 따라서 썩은 고깃덩어리 속에 알을 낳는 대신 썩은 고기 냄새와 같은 천남성 향기에 현혹되어 그 꽃 위에 알을 낳는 것과 흡사하다.
천남성과에 속하는 냄새가 유독한 다년초 식물이다.
모든 성애의 근저에는 전적으로 새로 태어날 존재를 향한 본능이 깔려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층 더 세밀히 분석해보면 이 진리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천성이 남자는 사랑이 쉽게 변하고 여자는 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남자는 만족을 얻은 순간부터 사랑이 현저히 줄어든다. 또 자신이 이미 소유한 여자보다는 다른 여자에게 더 이끌린다. 남자만 변화를 갈망한다. 반대로 여자는 만족을 얻은 순간부터 사랑이 커진다.
자연의 목적에 따라 생겨나는 필연적인 결과다. 자연은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증식을 많이 한다. 남자가 100명 이상의 여자를 상대한다면 아마 일 년에 100명 이상의 아이를 쉽사리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리 많은 남자를 상대한다 해도 쌍둥이를 낳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 년에 1명의 아이밖에 낳지 못한다. 그래서 남자는 항시 다른 여자를 구하지만 여자는 꼭 한 명의 남자만 지킨다. 자연은 으레 여자를 본능적으로 태어날 아이의 양육자이자 보호자로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간통은 객관적으로는 그 결과 때문에, 주관적으로는 자연을 위반하기 때문에 남자의 간통보다도 더욱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성을 향한 희열은 가령 그것이 객관적으로 보이더라도 사실은 가면을 쓴 본능, 즉 자신의 타입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의지인데, 이 희열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고 충분한 확신을 얻으려면 더욱 자세히 탐구하고 그 세목까지도 꼭 논해야 할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다. 이 사항은 직접적인 종족의 전형, 즉 아름다움에 관한 것과 정신적인 성질에 관한 것 그리고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즉 두 개체의 편파와 변태에 필요한 교정 혹은 서로 중화할 수 있는 데서 생겨나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상세히 조사해보자.
선택과 희열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은 나이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월경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를 그 기간으로 보는데, 그중에서도 열여덟 살부터 서른여덟 살까지의 시기를 특히 좋아한다. 이 나이를 벗어난 다른 여자는 관심을 끌지 못한다. 나이를 먹은 여자, 즉 월경이 끝난 여자는 혐오감을 일으킨다. 젊은 여자는 미인이 아니더라도 매력이 있지만 젊음이 없는 아름다움은 전혀 매력이 없다. 이때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이끄는 목적은 대개 명백히 생식 가능성이어서, 어느 개체든 생식이나 수태受胎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성으로서 매력이 사라진다.
둘째 고려 사항은 건강이다. 급성 질병이라면 일시적인 장애일 뿐이지만 만성병 혹은 악성 질병은 공포를 느끼게 한다. 아이들에게까지 옮아가기 때문이다.
셋째 고려 사항은 골격이다. 골격은 종족 전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늙음과 질병을 제외하면 기형적인 모습만큼 혐오감을 일으키는 대상은 없다. 아무리 얼굴이 아름다워도 기형을 바로잡을 수는 없는 반면, 비록 얼굴은 미워도 정상적인 모습이라면 호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골격의 모든 불균형을 극히 예민하게 느낀다. 이를테면 키가 작고 땅딸하고 하체가 짧은 모습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절름발이인 경우가 전자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현저하게 아름다운 자태는 모든 결점을 보완하고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또한 작은 발이 중요하다. 발의 크기는 종족의 중요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족근과 중족골이 인간만큼 작은 동물이 없는데, 이는 척추동물인 인간이 직립 보행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에 대해 성경 외경의 〈전도서〉에서도 “자태가 똑바르고 아름다운 발을 가진 여자는 은박 위에 세운 황금 기둥과 같다”라고 찬양했다. 치아 또한 중요하다. 치아는 영양 섭취에 근본적으로 필요하며, 특히 유전되기 쉽기 때문이다.
넷째는 적당한 정도의 살 붙임, 다시 말하면 식물성 기능과 형성 작용이 왕성하고 충분해야 한다. 태아에게 풍부한 영양을 줄 수 있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몹시 여윈 여자는 성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역시 무의식중에 태아의 영양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만한 여자의 앞가슴은 여자의 생식 작용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태어날 아기에게 풍족한 영양을 약속하기 때문에 남자에게 대단히 매력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지나치게 비대한 여자는 불쾌감을 주는데, 그런 체질은 병적이고 자궁이 위축되었다는 징후이며 불임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모두를 지각하는 것은 뇌가 아닌 본능이다.
마지막 고려 사항은 얼굴의 아름다움이다. 이 경우에도 제일 먼저 골격이 문제인데, 그중에서도 코가 가장 중요하다. 짧고 위로 치켜 올라간 코는 얼굴 전체를 망쳐놓는다. 코가 낮으냐 높으냐 하는 조그만 차이는 예부터 무수한 처녀의 일생을 결정해왔다. 종족의 전형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작은 턱과 입은 동물과는 달리 인간 얼굴의 고유한 특징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뒤로 밀린, 깎아버린 듯한 턱을 특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동그스름한 턱이 인간의 특징 중 하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눈과 넓은 이마를 중요시하는 것은 심적 특질, 특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 지성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때 무의식적으로 염두에 두는 고려 사항은 위에서 논한 만큼 상세하게는 들 수가 없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할 수 있다.
우선 여자는 서른 살에서 서른다섯 살 사이의 남자를 좋아한다. 원래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가 청년기인데도 여자는 그 이상의 나이를 좋아한다. 취향이 아니라 본능에 이끌려서인데 본능은 이러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생식 능력이 절정에 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아름다움, 특히 남자 얼굴의 아름다움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아름다움을 물려주는 일은 여자 측에서 도맡는다고 보는 듯하다. 주로 남자의 힘과 용기가 여자의 마음을 이끈다. 이 두 가지는 강한 아이를 출산할 가능성과 동시에 남자가 아이의 든든한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육체적인 결점이 있다든가 외형이 비정상적이라 할지라도 여자가 이런 부분에 결점이 없거나 오히려 반대로 더 뛰어나면 아이들에게 남자의 그런 부분이 유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남성만 가진, 여자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남자만의 고유한 여러 가지 특질은 여기에서 제외된다. 즉, 남자다운 골격 조직, 벌어진 어깨, 가는 허리, 곧게 뻗은 다리, 근육의 힘, 용기 혹은 수염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여자가 때로 못생긴 남성을 사랑하는 일은 있어도 남자답지 않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결코 없다. 여자가 이 결점을 중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원천이 되는 두 번째 고려 사항은 심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이 점에서는 여자가 전적으로 남자의 마음, 즉 성격 특성에 이끌린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부친에게서 유전된다. 강인한 의지, 결단, 용기 및 정직, 친절 등이 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반면, 지성적인 면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또는 본능적인 힘조차도 미치지 못한다. 지성은 부친에게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이해력 결핍은 여자에게 별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남자의 탁월한 정신력이나 천재성은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추하고 우둔하고 거친 남자가 교양 있고 총명하고 훌륭한 남자보다 여자의 사랑을 얻는 수가 허다하다.
또 정신적으로 기질이 아주 다른 남녀가 연애 끝에 결혼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예를 들면 남자는 거칠고 힘이 세고 식견이 좁은데 여자는 감정이 섬세하고 생각이 깊고 교양이 있다든가, 남자는 천재고 학문적인데 여자는 아주 우둔하다든가 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는 냉혹한 희롱으로
몸도 마음도 아주 다른 두 사람을
구리줄 고삐로 한데 묶어놓나니
/호라티우스
Horatius, BC. 65~BC. 8. 고대 로마의 시인이다.
이 경우에는 고려 조건이 지성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 즉 본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목적은 부부가 재치 있는 담화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고 아이들을 만드는 데 있다. 또한 결혼은 마음의 결합이지 두뇌의 결합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의 지성에 반했다고 말한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반면에 남자의 본능적인 사랑은 여자의 성격적 특질로 결정되지 않는다. 수많은 소크라테스가 저마다의 크산티페를 찾아낸 것도 이 때문이고 셰익스피어, 뒤러, 바이런 등도 같은 경우다.
Albrecht Dürer, 1471~1528. 독일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정점을 이뤘다.
그러나 지성적 성질은 어머니에게서 유전되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 영향력은 본질적인 점에서 더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쉽사리 압도당한다. 그러나 지성적인 성질의 작용을 직접 경험했거나 혹은 느낀 어머니들은 자기 딸이 남자의 마음을 끌 수 있도록 미술이나 여러 언어를 가르친다. 마치 필요한 경우에 허리나 가슴에 장식물을 달듯이, 인공적인 수단으로 지성을 보완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사랑을 일깨우는 아주 직접적이고 본능적인 매력만을 논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기 바란다. 교양이 있는 총명한 여자가 남자의 이해력과 정신을 존중한다든가, 남자가 이성적으로 숙고한 후에 약혼자의 성격을 시험하고 고려하는 일은 여기에서 다루는 주제와는 관계가 없다. 이러한 일은 결혼에서 이성적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가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격정적인 연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금까지 나는 다만 절대적인, 즉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고려 사항만을 관찰했다. 이제부터는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고려 사항을 생각해보려 한다. 이러한 고려 사항은 이미 불완전한 면이 있는 종족의 전형을 개량하고, 선택자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자태를 정정하여 전형의 순수한 표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각자 자신에게 없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적인 고려에 기초한 선택은 개인의 소질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고려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고 명백하며 배타적으로 성립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격정적인 연애의 근원은 대개 이 상대적인 고려에 존재하고, 비교적 가벼운 애착만이 절대적인 고려에 포함된다.
꼭 균형 잡힌 완전한 아름다움만이 강한 격정의 불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이러한 참된 격정적인 사랑이 성립하려면 화학적 비유로만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즉, 산과 알칼리가 섞여 중성염이 되듯이 두 사람이 서로를 중화시켜야만 한다. 이에 필요한 조건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모든 성은 편향적이다. 이러한 편향은 다른 사람보다 한 사람에게서 더 확실하게 드러나며 수준도 더 높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는 자신이 속한 한쪽 성보다도 다른 이성으로 더욱 잘 보완하고 중화할 수가 있다. 새로 태어날 개체에 인류의 전형을 완전하게 부여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반대의 편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새로운 개체를 목표로 행해진다.
생리학자는 성적인 특징이 남녀를 막론하고 무수한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인정하고, 남자나 여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양상은 남녀의 성향을 반반씩 띠고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양성의 중간을 지키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은 전혀 생식할 수가 없다. 두 개체가 서로 중화하기 위해서는 남자의 성적 성질과 여자의 성적 성질이 정확하게 서로 적응해야 한다. 이것으로 양쪽의 편향을 서로 상쇄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남성다운 남자는 가장 여성스러운 여자를 구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역시 같다. 이처럼 모든 개체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에게 적합한 것을 구한다. 이때 두 사람 사이에 필요한 비례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들 스스로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이는 다른 상대적인 고려 사항과 함께 연애의 수위를 높이는 기초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감동적으로 말하지만 대개는 태어날 아이와 그 완전성에 관한 조화가 핵심이고, 이것이 그들 마음의 조화보다도 분명히 중요하다.
정신의 조화는 결혼 후 즉시 심한 부조화로 변하기 쉽다. 그렇기에 또 다른 상대적 고려가 따르기 마련이다. 즉, 각 개체는 자신의 약점이나 결함, 전형에서 벗어난 특질이 태어날 아이에게 유전되어 영구화되거나 완전한 변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른 개체로 이를 상쇄하려고 노력한다. 남자는 근육의 힘이 약하면 그만큼 더 강한 여자를 구할 것이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힘이 약한 것이 자연적이며 보편적이기 때문에 보통 힘이 강한 남자를 구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고려는 신장 문제다. 키가 작은 남자는 키 큰 여자를 좋아하며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큰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키가 작은 남자라면 큰 여자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혈관 계통과 그 에너지를 물려받아서 큰 체구에 혈액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아버지, 할아버지도 키가 작다면 이러한 경향은 그렇게 현저하지 않을 것이다. 큰 여자가 큰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피하려는 자연의 의도에 기인한다. 만약 이들이 결합한다면 어머니에게서 유전되는 2세의 체격이 지나치게 커서 오히려 살아가기가 불편할 테고, 따라서 오래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런 여자가 여러 가지 동기와 일종의 허영심에서 큰 남자를 선택한다면 자손이 그 어리석은 행동의 값을 대신 치르게 된다.
다음으로 매우 중요한 고려 사항은 빛깔이다. 금발인 사람은 검거나 갈색인 사람을 찾지만 후자가 전자를 찾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금발과 파란 눈은 전형에서 벗어난 흰쥐 또는 백마처럼 변종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럽 이외의 어느 대륙에서도, 심지어 극지방 근처에서조차 살지 않았다. 분명히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내 의견을 첨부하면 하얀 피부색은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은 본래 우리의 조상인 인도인처럼 검든가 혹은 갈색 피부를 가졌으며, 따라서 피부가 하얀 인간은 원래가 자연의 품에서 나온 인종이 아니다. 백인종이라는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지만 실은 이런 인종은 없다. 피부가 하얀 백색인은 표백된 인종을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척박한 북쪽 땅으로 내쫓겨 외래 식물처럼 근근이 생존하며 수천 년이 지나면서 점점 하얀색으로 변한 것이다. 약 400년 전에 유럽으로 이동해온 집시는 인도 인종이었지만 그 피부 빛은 인도인에서 유럽인으로 변하는 과도기적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자연은 성애를 통해 원형인 흑발과 갈색 눈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얀 피부가 제2의 자연이 되어버렸다. 물론 인도인의 갈색 피부가 우리에게 혐오스러운 감정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누구든 각각의 신체 부분에서 자신의 결점과 특이 사항을 교정하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부분일수록 그 욕구는 강해진다. 그러므로 들창코를 가진 사람이 매부리코나 앵무새와 같은 얼굴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가냘프고 큰 키에 긴 팔다리를 가진 사람은 지나칠 만큼 똥똥하고 작은 신체조차도 아름답다고 본다. 기질에 대한 부분도 이와 비슷하게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각자 자신과 반대되는 기질을 좋아하는데 자신의 기질이 명확하게 결정된 한에서 그러하다.
물론 완전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불완전성을 구하거나 좋아하는 일은 없겠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쉽게 불완전성과 화해한다. 자신이 그 부분에서 완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피부가 매우 하얀 사람은 노란 피부의 얼굴을 봐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부가 노란 사람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얼굴을 보면 신성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다.
남자가 아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수가 흔히 있는데,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의 성 적합 정도가 정확하게 조화를 이루고 여자의 변태성 전체가 남자의 변태성과 정반대여서 교정할 수 있을 때다. 이런 경우에는 연애가 높은 수준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의 신체 각 부분을 검사하고 관찰하는 경우나 여자가 남자에게 같은 일을 할 때의 진지함, 남자가 마음에 들기 시작한 여자를 음미할 때의 비평적 세심함, 우리의 자의적인 선택, 신랑이 신부를 관찰하는 면밀한 주의, 어떠한 점에도 속지 않겠다는 용의주도, 중요한 부분의 모자람에 큰 가치를 두는 일, 이 모두는 그 중대한 목적과 서로 상응한다. 이러한 일이 새로 태어날 자식을 그다지 불완전하지 않도록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실을 의식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누구라도 다만 자신의 쾌락(사실 쾌락은 여기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을 위해 저 어려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의 체질을 전제로 하고 그 체질이 종족의 이익에 꼭 알맞게 적응하도록 선택하는 것이다. 종족의 전형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 은밀한 사명이다. 이때 개체는 부지불식간에 더욱 높은 것, 즉 종족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한다. 그러므로 개체 자체에는 무관한 것, 아니 무심해도 좋은 것을 중요시한다.
처음으로 만난 젊은 남녀가 서로를 관찰할 때 보이는 무의식적인 깊은 진지함이나, 서로를 향한 탐구적인 날카로운 시선이나, 상대의 용모나 부분 부분을 검사하는 세심한 주의 등에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이 탐구와 검토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날 개체와 특성의 조합에 대한 종족 수호신의 명상이다. 이 명상의 결과에 따라 서로에 대한 호감과 욕망의 정도가 결정된다. 서로에게 호감도가 상당히 높아진 후에라도 이전에 눈치채지 못한 뭔가가 발견되면 둘의 관계는 갑자기 벌어질 수도 있다.
이리하여 종족의 수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