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욱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서울신문,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 언론계 최일선에서 일했다. 안정된 노후가 보장된 그였지만, 퇴직 후 잘못된 투자로 전 재산을 잃었다.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번역 일을 시작했고, 이참에 평생 한으로 남았던 꿈까지 이뤄보자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것 같은 그때 인생 2막이 시작되었다. 남들은 손에서 일을 놓는 나이 일흔에 시작한 번역본이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인도에 살 수도 없고』, 『약간의 거리를 둔다』, 『황홀한 사람』, 『지적 생활의 즐거움』, 『지식생산의 기술』 등 200여 권이 넘는다.
늘 문학과 철학을 가까이했던 그는 일생에 큰 영향을 준 철학자를 깊이 있게 공부했다. 그 결과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니체 아포리즘 『혼자일 수 없다면 나아 갈 수 없다』를 집필했다. 번역의 영역을 넘어서 기획하고, 전문 영역을 넘어서 폭넓게 글을 썼기에, 아흔의 나이에도 현역 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프롤로그
오래된 육신의 낡은 생각들을 정리하며
오래 사는 게 자랑이 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노화로 인한 육신의 절망쯤은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니 충분히 수긍하리라는 다짐을 반복한다. 그러나 내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그럭저럭 살아가게 해준 인생다움이라는 가치가 눈앞에서 훼손되어가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경험은, 악착같이 살아낸 지난 세월을 자꾸만 후회와 번민으로 점철시킨다.
날로 비루해지는 육신에서 후회와 절망이 싹트는 경험은 늙어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 최대의 공포다. 지금 거울 속 내 모습은 나의 기억 속 그 어떤 얼굴과도 닮지 않았다. 내가 이런 얼굴과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원하던 삶의 근처를 배회하며 상처받았고, 그에 대한 보상처럼 기대하지 못했던 삶과 사람들을 선물 받았다. 인생은 극단의 좌표들만 골라 나를 인도했다. 새로운 시대는 늘 낯설었고, 나는 끝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지지 못했다. 삶의 모든 순간에 ‘계획’이라든지, ‘순리’라는 자연발생적 법칙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생존과 종말이 찰나를 기회로 교차하는 치열한 긴장,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 다음 단계로 한발 나아갈 때면 어김없이 나의 얼굴은 타고난 표정 하나를 잃었다.
누군가의 흉터에서 위로를 찾는다는 것은 잔인무도하다. 누군가의 절망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는 환호는, 그 누군가에겐 지워지지 않는 수치가 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순간,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에 잔인한 수치를 또박또박 새겨나가고 있다. 여기 담아낸 글들이 내 인생의 마지막 수치이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밝히면서 말이다.
특정 신을 섬기지는 않지만, 신에 버금가는 인간의 지성과 오감의 무한한 부활과 윤회를 믿기에, 그 믿음에 기대어 내가 사라진 이후를 근심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롯이 내가 머물렀던 시간만을 성찰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종말을 코앞에 둔 육신에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만큼이나 부끄러움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이 들어 좋았던 것은 오직 그 한 가지뿐이다. 나이가 들어서야 쓸 수 있는 글이 있음에 감사한다. 자연사를 지척에 둔 인간에게 지금 심경이 어떠한지를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오늘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이 글에 감히 가르침을 담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선악을 판별하고 결과를 예단하는 인간의 교만이 뼈아픈 무지로 허망하게 돌아오더라는 것만 살갗이 에이도록 체험했다는 것이, 지나온 삶을 반추했을 때 내가 주억거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조언의 전부다.
모든 경험이 정답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경험만 숱하게 겪어본 자로서 내가 확신하는 유일한 정답은, 나를 따라다닌 그 많은 수치와 절망이 모든 이의 시간 속에서 불멸의 질서처럼 되풀이될 거라는 즐거운 기대뿐이다. 당신의 절망을 즐기겠다는 뜻이 아니다. 당신이 겪는 절망은 내가 이미 지겹도록 겪어본 것들이니, 만약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절망이 인간을 찾아다니는 한, 어쩌면 나의 이야기는 불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 욕망이 늙고 병든 한 인간을 살아남게 만드는 생명의 근원임을 이해해주시길. 이 욕망의 제물이 된 데에, 나는 일말의 후회가 없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올해 여든여덟 살이 되었다. 여든여덟 살이 부끄러운 연유는 사소하다. 열여덟의 나, 스물여덟의 내가 원했던 여든여덟의 모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원하고 기대했던 팔십팔 년의 삶이 아니었던 탓이다. 나는 그저 이끌리듯 한세상을 살았다. 백년에 가까운 시절을 나는 그저 먹기 위해, 배설하기 위해 살아온 것만 같아 지나온 삶 앞에서 처연해진다. 만약에 내 모습이 제대로 씻지도 못한 노인네처럼 애처롭고 초라하다면 이유는 단 하나, 산다는 것이 내 뜻대로, 나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까닭이 크다.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 태우고 날마다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셔도 강건하기만 했던 찬란한 시절은 잠시 스치고 지나간 꿈만 같다. 삶에 연연했던 시간이 축적될수록, 내가 개입한 세상사 향방이 다양해질수록, 지켜야 할 소중한 인연이 더욱 귀하게 여겨질수록, 이 몸뚱이는 점점 더 나약해지고 내 뜻과 다르게 아파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의 말년이 다가오니 이 아픔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다. 하루하루 죽지 않고 눈이 떠졌구나, 죽지 않고 잠이 드는구나 탄식하며 삶이 내게 주는 허망한 고독에 눈물 흘리는 법까지 망각한 채 새벽녘에 습관처럼 잠이 깨는 날들이 반복된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가 아름다울 리 없다.
부끄럽고 더러운 이야기지만, 이 나이 먹고 창피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는 쓸데없는 자부심에 내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한 가지 상실해버렸다. 내 몸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혈액과 모든 노폐물을 담아가는 수분을 외부로 꺼내놓지 못한다. 아직 남아 있는 일말의 자존심 때문에 설명이 난해해졌는데, 손주뻘 담당 의사 말로는 방광 기능을 상실했단다. 그래서 자발적으로는 소변을 보지 못한다.
치료를 받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준비를 하며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의 대답이 나를 아프게 했다. “늙음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테죠.”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는 정말 늙어버렸구나.
병실로 옮기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그곳에는 나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늙은 육신들, 젊어서 조국에 모든 삶을 빼앗긴 가엾은 노인들, 생때같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휘어 곯아버린 불쌍한 아비들 천지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착각이었다. 육인실 병실에는 새파랗게 어린 친구가 둘이나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들은 나와 같은 병명으로 이곳에 누워 있을까. 그중에서도 내 바로 옆자리에 누운 청년은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죽을 때까지 스스로 요도에 소변줄을 넣어 강제 배설을 해야 하는 ‘자가도뇨’ 상태였다.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병원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자가도뇨를 배운 이 청년은 매일 밤 팔굽혀펴기를 했다. 설기만 한 잠자리에서 비굴해진 운명을 저주하며 잠을 청하려 들 때면 신경을 긁어대는 삐거덕거리는 쇳소리에 눈이 떠졌다.
퇴원하는 날 아침에 물어보았다. 팔굽혀펴기는 무엇 때문에 하느냐고. 내가 던진 질문의 의미는 병실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렸을 것이다. 왜 팔굽혀펴기를 하는 건지 궁금한 게 아니라 단지 너의 행동에 잠을 설쳤으니 이쯤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자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의 반응은 나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는 씩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면 휠체어를 타고 국토종단을 해보는 게 꿈이에요.” 그러고는 또다시 아침밥이 나오기 전까지 침대에 엎드려 몸뚱이의 절반을 반복해서 일으켰다.
나는 그가 부러워졌다. 절망과 공포 앞에서도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내일이 궁금해지는 그 막연한 희망. 우리는 모두 이래야만 돼, 라고 지적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안 그래도 돼, 라고 외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삶을 향한 충동이 청년의 목소리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한때가 있었음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이오 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에 나는 단편소설 하나를 완성해서 잡지에 응모했다. 심사위원은 당대 최고의 문학인 김동리 선생이었다. 일차 예심에 합격하고 이차로 소설 한 편을 더 제출해서 합격하면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소설가로 등단하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대학에서 국문과를 전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차 본심을 보름 앞두고 전쟁이 터졌다.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가는 것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다시는 못 뵐지도 모른다는 슬픔보다,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소설가로 살아갈 나의 미래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전쟁은 삼 년 만에 끝이 났고 나는 살아서 군복을 벗었다. 대학도 졸업했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몸서리치게 잔인했던 현실이 나에게서 소설이라느니, 문학이라고 하는 허울 좋은 꿈을 빼앗아 갔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건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나이까지 살면서 눈만 뜨면 목격했다.
물론 현실이 참혹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시절에도 소설을 썼으며, 부산으로 피난 내려간 이중섭은 쓰레기통에서 껌 종이를 주워다가 미쳐 날뛰는 황소를 그렸다. 나는 꿈을 좇는 이들을 비웃으며 휠체어에 올라타듯 직장을 구했다. 꿀꿀이죽은 흰쌀밥이 되었으며, 나는 모래밭 대신 잔디밭이 깔린 내 집을 갖게 되었다. 그 대가로 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의 손으로 일군 모든 것을 잃는다.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까지도 잃어야만 한다. 아마도 머잖아 나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의 의미는 꿈을 꾸는 것이라고. 꿈꾸는 법을 망각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 거라고…….
늙은 몸뚱이에서 강제로 소변을 끄집어내는 현실 속에서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희망은 그래도 아직 글을 쓸 수 있고, 나의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걸음이라는 인간의 기본권을 상실한 청년에게 휠체어를 밀어주는 유일한 희망이 이 가느다란 팔뚝인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처참한 현실에서도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생존을 거듭하는 의미다. 그런 의미를 찾게 해준 불행마저도 소중하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삶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누구의 삶이든 어느 위인보다 거창하고, 그 어느 유명인만큼이나 잠재력을 타고났다. 꿈을 잃고 살아온 나는 모든 것을 상실한 일흔 살이 넘어서야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내 손으로 쌓아 올린 재산과 명예와 사회인으로서의 자격마저 상실했을 때, 그런 내 곁에 남아 있었던 것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꿈, 그것 하나였다. 어리석게도 나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스무 살 시절로부터 반백 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였다.
일흔의 나이에 글을 쓰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은 스무 살에 겪었던 전쟁보다 더 전쟁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매일 밤 나는 후회에 몸부림을 친다. 왜 나는 그때 소설을 쓰지 않았던가. 왜 일흔 살이 되어서야 다시 펜을 쥐었을까. 포탄에 맞아 무너져버린 강의실 뒤편에 천막을 치고 치렀던 졸업식이 끝난 다음 날, 왜 나는 원고지에 나의 꿈을 싣지 못했을까. 내 두 발로 걸어갈 수 있었음에도 왜 자신을 믿지 못했던가. 병실에서 만난 청년처럼 자신의 팔을 믿고 그 믿음에 인생을 던져보지 않았던 걸까…….
일흔 살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을 스무 살의 내가 하지 못했을 리 없다. 단지 나는 비겁했을 뿐이다. 스무 살에 이루지 못한 꿈을 서른에, 마흔에, 쉰에, 예순에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후회하고 아파하며 삶의 끝자락에서 떠나버린 꿈이라도 되돌려볼까, 앙상한 고목 나뭇가지 같은 팔꿈치를 휘두르며 아직 내 손이 닿지 않은 흰 종이 한 장을 찾아 헤매는 중이다.
살아 있어도 되는
이유
“그 나이 먹고도 왜 결혼을 안 하는 거냐?”
요즘 들어 내가 아들 녀석에게 제일 많이 하는 잔소리이다. 그때마다 녀석은 고추냉이라도 잔뜩 씹은 표정이다. 그 당혹스럽고도 꺼림칙한 표정이 대답을 대신해주는 듯싶어 미안해지는 한편으로 마음이 급해진다. 결혼에도 적당한 나이가 있다는 세상 사람들 기준에 내 자식이 혹시 미달되는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다. 자존심이 상한 아들은 무뚝뚝하게 방어벽을 쳐버린다.
“결혼이 뭐 쉬운 줄 아세요…….”
그렇다. 결혼은 쉽지 않다. 나라고 그걸 모를 리 없다. 결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삶에서 절대로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도 한 여자와 오십 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경력자다. 결혼은 끝이 아닌 고통의 시작, 부담의 시작, 새로운 억압의 시작임을 뼈저리게 맛보았다.
나는 젊은 시절 여러 여자를 사귀었다. 그런데 사랑이 깊어지고 서로의 미래가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상황이 올 때마다 겁이 났다. 내가 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이 여자와의 결혼생활에 만족할 수 있을지, 둘이 함께하는 미래가 과연 내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지 고민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나의 고민은 주로 혼자 벌어 둘의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살 수 있을지, 결혼으로 내가 즐겼던 소소한 일상과 습관을 포기해야 한다면 어쩌나 하는 것들이었다. 여자들은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며 비난했다.
이기심은 인간을 이끄는 엔진이나 다름없다. 나는 인간의 희생과 헌신에는 순수함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양보하는 인간이 되었다는 자각으로 기뻐하거나, 타인을 돕는 것으로 정신적인 평화를 얻는다. 희생과 헌신이 본인에게 기쁨과 만족을 안겨주었다면 과연 그것을 순수한 희생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나는 솔직히 부정적이다.
육 남매 중 장남이었던 나는 집안의 지지를 받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다섯 동생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부모님은 나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얻어 동생들의 삶을 돌보라고 끊임없이 강요했다. 미래에 자신의 현재를 몽땅 갖다 바치는 부모의 무절제한 희생과 베풂이 나는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이 어려운 살림에 각자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보라고 방생해주지는 못할망정 장남의 등허리에 수저를 꽂고 그가 쓰러져 죽을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겠다는 선포인가. 문제는 뻔한 살림에 자식을 여섯이나 낳은 부모에게 있는 거 아닐까. 한데 나더러 그들과 같은 삶을 살라니, 그 무책임한 관습에 질려버렸다.
나는 동생들에게 용돈을 준 기억이 없다. 다 큰 성인에게 용돈을 준다는 발상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그에 합당한 대가는 언제나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돈으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유지되고 재산상의 수치로 형제간에 연락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차라리 시대적 부조리에 분노하는 동료들과 새벽이 올 때까지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푼돈을 쓰는 게 위로가 되었다.
내가 저주받은 가난의 굴레를 끊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가난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탄생을 포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나처럼 방황하고 나만큼 외로워질 게 뻔한 새 생명의 출현을 사전에 차단하는 비혼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이 태어났다. 내 나이 오십에, 친구들이 손주를 보는 나이에 나는 결혼에 대한 그간의 허황된 착각을 징계받듯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아주 못된 이야기지만 임신한 아내에게 포기하자고 권했었다. 자신이 없다는 말도 했다. 내 인생을 망치게 될 것 같아 겁이 난다는 비겁한 소리도 참지 않았다.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되면 나는 일흔 살이 된다.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기는 할까. 젊고 건강한 아버지를 저 아이는 평생토록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게 부끄럽고 가슴 아팠다. 아내에게는 털어놓지 못했던 진심이다.
실제로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다. 운동회 날 젊은 아버지들 사이에서 나는 할아버지 취급을 받았다. 아들의 친구들은 왜 너는 할아버지랑 이인삼각을 뛰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열 살 되던 해에 나는 입에 틀니를 해 넣었다. 그간 늙은 애비의 허룩한 입 안이 불쌍했던 아들은 빼곡하게 들어선 인조 이에 감명을 받아 소중히 품에 안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마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난데없이 구강에서 튀어나온 적나라한 치아의 형태를 목격하게 된 아이들은 골목이 떠나가라 울어댔고, 나는 졸지에 동네 꼬마들에게 악몽을 선사한 국내판 홍콩할배가 되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들의 숙제를 봐준다던가, 책을 사준 적이 없다. 도리어 그 아이의 삶에 적잖은 피해를 주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의 교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육 남매가 뒤엉켜 뒹굴던 허름한 단칸방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죽기 전에 돈을 물려주는 것 말고는 없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나는 퇴직금과 아들 대학입학금으로 아내가 모아둔 보험과 적금을 깨서 제주도에 새로 짓는 백화점에 투자했다. 그리고 곧 IMF가 찾아왔다.
돈을 잃었다는 절망보다도 아들 눈에 비치는 나란 인간의 모습이 빈껍데기인 것만 같아 술로 밤낮을 지샜다. 결국 아들은 대학 입시를 포기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상근예비역에 배치되어 낮에는 예비군 조교로, 밤에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충격에 빠져 대상포진을 앓게 된 제 어미의 약값을 벌었다.
나는 일흔 살이 넘어서도 이기적인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 이대로 삶이 마련한 낭떠러지에 몸을 던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글을 쓰고 번역을 하고, 불러주는 출판사 하나 없이 시간을 허비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아직 두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아파트 경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아들 보기 부끄럽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못 들은 척했다. 아들에게만은 돼먹지 않은 글 한 편이라도 써보는 척하다가 죽은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 아이가 힘겹게 세상의 무게를 지고 자신의 걸음을 포기하지 않는 고된 현장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모든 걸 잃었지만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해보지 않은 빈손이었다. 그 손에 무엇인가 쥐어질 때까지 옆에서 발버둥 치는 철없는 아버지, 헛된 꿈에 목말라 정신 못 차리는 불쌍한 아버지로 남고 싶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겪었던 절망과 내가 품었던 질투와 나를 일깨웠던 가능성을 나의 아들이 그의 아들에게서 찾아내기를 소망한다. 내가 그러했듯이 나의 아들 또한 이 저주받은 세월에서 자신을 초월하는 생명의 힘찬 약동을 경험하며 겁에 질리기를 소원한다.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 특별한 생의 굴레를 이겨내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내 아들이 결혼하고 가정을 이뤄 자녀를 얻게 되기를 바란다. 그 고통스러운 만남과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나처럼 살아 있어도 되는 이유를 찾고 눈물 흘리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은 두려움의 연속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은 두려움의 연속이다. 아니, 전보다 더 두려워졌다. 세상과 마주하며 무자비하게 통치당했던 시간에 비례해 생의 공포는 이제 나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려 들기에 이르렀다.
삶을 지배하는 공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성공이라는 두 글자에 담긴 그림자 따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겉보기에 화려한 사람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생각나는 대로 함부로 말해도 되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나는 그 당당한 자신감 이면에 감춰져 있는 공포를 바라본다. 나 또한 그 공포를 감추며 살아왔고, 그것이 드러났을 때 맹수로 돌변하여 얼마 남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먼저 세상을 떠난 후배 생각이 자주 난다. 그가 신문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그의 사수 기자로 임명받았다. 지나치게 밝고 들뜬 모습이 가식처럼 느껴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그를 싫어했을까. 인간이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게 없는 표정을 그가 지을 줄 알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그는 스스럼없이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그를 질투했으리라. 사람 비위를 상하지 않게 만드는 능글능글한 궤변, 상대가 감추고 있는 능력과 재능을 판단하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드러난 표정에서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줄 아는 처세를 시기했는지도 모른다.
제 잘난 맛에 사는 나 같은 부류가 집단에서 침범당하지 않는 영역을 구축하려면 남보다 배 이상의 노력과 투쟁심이 필요하다. 나는 누구든지 내 기사를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편집부장이든, 데스크든 내가 발품을 팔아 입수한 현실의 단면에 구체적인 채색을 입혀 진실로 거듭나게 만든 기사에서 ‘이 문장을 빼라’, ‘이런 논조는 위험하다’는 식의 참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충고와 강압에 머리를 숙이게 되면 조직에서 나만의 정체성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숱하게 목격해왔다. 집단의 기조에 순응하는 개인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말이다. 처음에는 그들 말을 잘 따른다는 이유로 일말의 특권을 누리는 동료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나 얄궂은 일인지, 문제가 발생하여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시키는 대로 복종한 사람이 제일 먼저 옷을 벗거나 좌천하거나 뜬금없이 사태의 책임자가 되어 처벌받았다. 어찌 보면 그동안 누렸던 특권의 대가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복종의 무의미함을 깨닫게 되었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 속에서 홀로 튀는 짓을 서슴지 않아 왕따를 당하거나 아웃사이더로 분류되든 말든 오로지 능력 하나로 내가 필요할 수밖에 없게끔 스스로 갈고닦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가 실수만 하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절차를 무시해가며 나를 쫓아내지는 못하겠지, 라는 꾸며낸 당당함 속에서 혼자 안도했다고 봐야겠다.
후배는 그런 나를 ‘똥차’라고 불렀다. 물론 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똥차라고 지목한 이유를 짐작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그 많은 잘나가는 선배 중에 하필이면 나처럼 처세와 대접에 무능한 인간을 사수로 두게 되어 상사들이 자신을 나만큼이나 말 안 듣고 제멋대로인 시건방진 놈으로 보게 될까 봐 두렵다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성공의 길목에서 나란 존재는 냄새나 풍기며 앞길을 가로막는 똥차였다. 속으로는 기가 막혔다. 그래도 내가 저한테 아주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기자로서 갖춰야 할 세상에 대한 예절부터 기사 한 줄에 드러나는 낱말의 품격까지 나름대로 챙겨줬건만 뒤에서 나를 두고 폄훼한 말을 들으니 어찌 저럴 수 있나 싶어 큰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나는 자발적 아웃사이더라는 나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서는 안 되었다. 나는 억울하고 화가 나는 속마음을 야비하게 숨기며 이것을 똥차라는 비하마저도 초월한 인간임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았다. 사수 기간이 끝나고, 후배가 다른 부서로 발령받게 된 그날 저녁 환송회에서 나는 그간의 소회로 ‘이제 똥차는 떠나가니 쓸 만한 세단을 뽑아서 잘해보라’고 술김에 넋두리를 내뱉었다.
후배가 내게 기대한 것은 그를 구원해줄 동아줄이었던 것 같다. 이십 대 중반의 젊은 기자가 삭풍이 휘몰아치는 독재정권 아래서 기사 한 줄 잘못 썼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반신불수가 되는 선배들을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용감한 자들을 보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길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연줄은 철저하게 선택의 문제다. 어느 라인에 설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그에 따른 보상은 달콤하기 그지없겠으나,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는 자기 몫을 강탈당했다는 수치와 서운함이 되기도 한다.
나를 똥차로 불렀던 후배는 나와 다른 길을 걸어갔다. 그에게는 야심이 있었고, 성공에의 갈망이 넘쳐났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가 생각하는 최선에는 사내 정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상사들은 그를 좋아했다. 후배들은 그를 동경했다. 승진도 원하는 대로 빨랐다. 내가 어렵사리 데스크 한자리를 차지하고 지방 주재 기자들을 관할하는 관리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부장급이었다.
그러나 공고할 것만 같았던 우리의 격차는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가 머잖아 여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 때였다. 오랜 세월 우리를 지배하던 정권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군사정권이 차지했다. 신문사에서 나의 후배는 숙청대상 1호가 되었다. 보복은 차디차고 잔인했다. 권고사직을 거부하는 후배가 비상 출입구 옆에 책상을 가져다 놓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후배는 복도를 지나가는 우리의 발소리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미색으로 칠해진 벽만 바라보았다.
어느 날 책상이 사라졌다. 모진 박해와 창피에 결국 백기를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살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후배가 겪었을 공포와 두려움이 내 뱃속까지 얼어붙게 했다. 수십 년을 함께 일해온 동료들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가 이 직업을 마지막까지 버텨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그 후배처럼 열정적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사랑한다고 비난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낸다며 질투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잠시 누렸던 성공과 명예와 부는 전혀 손쓸 수 없는 곳에서부터 균열을 일으켰다. 이것을 누가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을까. 단지 최선을 다했다는 이유로 나의 후배는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이층 양옥집 거실에서 계단 난간에 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