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스
A. H. Almaas
세계적인 영적 교사이자 자기실현을 위한 ‘다이아몬드 어프로치(the Diamond Approach®)’의 창시자이며, 영성 발달을 위한 ‘리드완 스쿨’의 설립자.
1944년 쿠웨이트 태생으로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UC 버클리에서 물리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임사체험 등 다양한 영적 체험을 거치면서 물리학 박사 과정 도중 심리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대 심리학과 과학을 동서양의 오래된 영적 전통과 연관시켜 통합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내고 있다.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불교, 플라톤주의, 구르지예프의 네 번째 길 등 다양한 영적 체계를 섭렵하였다.
세계적인 통합사상가 켄 윌버(Ken Wilber)도 알마스의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정신세계·영성·종교 및 여러 사상들의 통합을 다루는 분야에서는 알마스를 켄 윌버와 대등하게 평가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1980년대부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저술을 펴내고 강연을 시작하여 서구에서는 널리 이름이 알려진 영성 마스터이다. 본명은 A. 하미드 알리(A. Hameed Ali)이며, 아랍어로 알마스(Almaas)는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 알마스 홈페이지 www.ahalmaas.com
● 리드완 스쿨 www.ridhwan.org
옮긴이박인수
서울대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후 러시아로 건너가 국제학교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대학시절 임사체험을 하면서 의식의 빛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마음공부에 입문했다. 마인드컨트롤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TM-싯디코스, 카발라, 기공, 참선, 아봐타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거치면서 명상학습법 개발과 영적 치유에 열정을 쏟아왔다. 화제작 《리얼리티 트랜서핑》 시리즈를 잇달아 번역 소개한 후, 현실창조기법을 전하는 한국트랜서핑센터를 운영 중이다.
일찍이 A. H. 알마스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최근 몇 년간 관련 자료의 번역과 온라인 강좌를 이끌어왔다. 꾸준히 그 가르침을 현실에 접목하면서 ‘늘 펼쳐지는’ 새로운 영성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잉글리쉬 마인드 트레이닝》 《한국어 꺼라, 영어가 켜진다》 《나는 트랜서퍼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치유, 아름다운 모험》 《리얼리티 트랜서핑》(전3권) 《트랜서핑 타로카드》 《트랜서핑의 비밀》 《눈사태 그리고 깨어남》(전2권) 《미래 모델링》 등이 있다.
● 네이버 카페 <늘 펼쳐지는 지금> cafe.naver.com/almaas
옮긴이의 글1만 년의 전통이 부활하다
주요 등장 용어
이 책의 활용법
chapter1
실제를 사랑하기
실제로 존재하기의 본질
실제로 존재하기를 향한 열망
실제로 존재하기를 향한 사랑
탐험 세션 | 실제로 존재하기와 당신의 관계
chapter2
실제로 존재하기를 배우기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참본성
있는 그 자리를 자각하기
참본성의 빛
탐험 세션 | 있는 그 자리를 자각하기
chapter3
경험에서 손 떼기
참본성은 “손을 떼라!”고 말한다
참본성은 자각하며 조율한다
참본성에는 좋고 싫음이 없다
참본성은 행위 없음과 내맡김을 의미한다
참본성은 심지어 우리의 간섭에도 응답한다
탐험 세션 | 자신의 간섭을 인식하기
chapter4
모든 것에 열린 공간 만들기
참본성 그리고 간섭하지 않기
나눌 수 없는 참본성
경험의 단일성
분리를 만드는 간섭
저항의 본질
저항을 다루기
참본성은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나눔을 허용한다
저항을 허용함으로써 시작하기
탐험 세션 | 지금 이 순간 속으로 허용을 초대하기
chapter5
자신을 향해 열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의 친밀함
방어-내면의 경직
인간의 자기보호 욕구
방어와 열려 있음
상처받기 쉬운 상태-참본성을 향한 문
에고의 경계가 되는 방어
탐험 세션 | 지금 이 순간에 열려 있음을 탐험하기
chapter6
대담한 수용성을 기르기
영적 여정에서 구성요소를 바꾸기
공격성이라는 장애물
슈퍼에고 다루기
자비심이 필요하다
용기가 중요하다
균형을 유지하기
탐험 세션 | 탐구를 심화하기
chapter7
진리를 따라 의미와 조화로
참본성을 향해 펼쳐지는 여정
의미를 갖는다는 것
이음매 없는 조화를 발견하기
상호연결성으로서의 조화
대조와 비교를 통한 상호연관
비교하는 판단에서 도덕적인 판단으로 변질되는 것
경험을 선물로 인식하기
탐험 세션 | 당신 안에서 비교하는 판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발견하기
chapter8
진실한 받아들임을 발견하기
경험의 거부는 곧 자기 거부이다
체념으로서의 받아들임
집착으로서의 받아들임
진실한 받아들임
탐험 세션 | 진실한 받아들임을 식별하기
chapter9
증오 그리고 존재하기 위한 힘
내적 행위의 덫
강박적 행동 배후의 힘을 찾아내기
증오를 인식하기
증오가 무엇인지 식별하기
에고 죽이기라는 신화
증오를 발견하기
증오의 원인
탐험 세션 | 자기 증오를 확인하기
chapter10
무지와 직접적인 앎
후천적 무지
선천적 무지
분별력을 발달시키기
참본성을 이해하기
무지를 통과해 참본성으로 들어가기
직접적인 앎
탐험 세션 | 후천적 무지와 직접적인 앎을 인식하기
chapter11
마음의 필터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과거의 베일들
직접성의 결핍을 드러내기
경험의 구상화
탐험 세션 | 무엇이 경험의 직접성을 증대시키거나 제한하는지를 관찰하기
chapter12
동일시의 덫
동일시가 방해물이다
모든 에고의 경험은 동일시이다
실시간 활동으로서의 동일시
몸과의 동일시
감정과의 동일시
현재 순간과의 동일시
동일시는 거짓 아이덴티티를 지지한다
만일 그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그것을 잃을 수 없다
동일시를 해체하기
동일시는 당신의 적이 아니다
동일시와 탐구
탐험 세션 | 경험 속에서 동일시를 인식하기
chapter13
지금 이 순간에 빛을 켜기
빛과 시간의 흐름
빛과 영원한 지금
미래가 없는 지금
지금 이 순간에 살기
현재성을 경험하기
현재에서 현재성을 놓치는 것
시간의 흐름 속에 갇히는 것
과거, 미래, 그리고 현존
탐험 세션 | 미래지향성이 경험에 미치는 영향
chapter14
수은처럼 유동적인 자아감각
변화에 대한 저항
보존하려는 시도
아이덴티티를 보존하려는 것
집착
시간개념을 보존하려는 것
탐험 세션 | 변화 없음에 관한 신념들을 탐험하기
chapter15
의미로 이어진 인연의 끈
경험의 흐름
발달단계마다 계속되는 지속성
개인적인 인연의 끈
인생의 선
삶의 의미
탐험 세션 | 자기 인생의 끈을 고찰하기
chapter16
생각하는 마음 없이 존재하기
지각하는 자각과 인지하는 자각
분별을 넘어서
순수자각
식별하는 마음을 넘어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
앎을 넘어가기
모름 그리고 앎 없음
탐험 세션 | 앎과 모름
chapter17
존재와 비존재
견고한 것을 찾기
입장에 대한 집착
블랙홀에 대한 두려움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탐험 세션 | 경험 안에서 유동성과 견고함을 탐험하기
chapter18
매 순간의 소중함
원인 없이 존재하는 가치
모든 가치의 원천
가치를 경험하는 것의 어려움
본래의 가치를 드러내는 탐구
탐험 세션 | 당신이 현재 경험의 가치를 어떻게 느끼는지 발견하기
맺음말
영문판 편집자의 글
부록
│일러두기│
1.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주석’과 <주요 등장 용어>를 새로 덧붙였습니다. 특히 책 앞부분의 <주요 등장 용어>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알마스의 독특한 가르침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자가 다양한 알마스 관련 자료를 통해 정리한 내용입니다.
2. 구분이 필요한 용어에는 영문 또는 한문을 연달아 함께 표기했습니다. 앞에서 이미 표기한 경우라도, 문맥상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추가로 병기한 경우가 있습니다.
3. 우리말로 옮겼을 때 의미가 제한되거나 원어 그대로 이해가 쉬울 경우에는 외국어 표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4. 외래어는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옮긴이의 글
1만 년의 전통이 부활하다
알마스의 삶과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의 탄생
A. H. 알마스는 쿠웨이트 출신으로,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교the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사과정 도중에 과학도로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심리학을 향해 삶의 여정을 바꾼 계기가 된 사건이 발생한다.
알마스는 교통사고로 임사체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 죽었는지 아니면 임사체험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고 당시 잠시 몸 밖으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위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밝게 빛나는 순수한 빛의 몸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 몸은 물질적인 육체 안에 있을 때와는 다른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알마스는 몸이 있는 물질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다른 방향은 완전히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절대적인 지복bliss의 상태였다.
빛의 몸은 사랑과 빛을 방사하면서, 육체로, 세상으로 곧장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힘들긴 하겠지만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으로 돌아오는 선택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난 움직임이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임사체험을 계기로 알마스는 자신의 가슴이 진정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임사체험 이후에 그때의 순수한 의식을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해에 걸친 많은 수행과 영적인 작업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작업의 과정을 통해 ‘다이아몬드 어프로치the Diamond Approach®’의 기초를 이루는 많은 가르침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마스는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초기에 알마스에게는 많은 스승들이 있었다. 클라우디오 나란호Claudio Naranjo의 심리치유 그룹을 시작으로, 타르탕 툴쿠 린포체에게서 티베트 불교 수행법을, 또 수피즘, 구르지예프의 ‘제4의 길’과 위빠사나 명상 등을 배운다.
그러던 중, 16대 까르마파의 전수식에서 그는 에센스Essence[1]†의 현존과 함께 자신이 인류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현존presence†은 참나이자 스스로 자각하는 존재감이었고 생명의 근원이었으며 또 모든 것의 근원이었다. 이 에센스 체험을 계기로 그에게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바로 새로운 영적체계인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의 열림이 시작된 것이다.
에센스의 현존은 점차 스스로를 드러내어 사랑과 평화, 기쁨과 명료함, 비어 있음, 진리 등의 측면으로 현현되었고, 마침내 그 현존은 온 우주 만물의 본질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중 가장 특별한 깨달음은 진정한 개인성인 ‘개인 에센스the Personal Essence†’의 자각이라 할 수 있다.
‘현존’은 다른 여러 특질로도 발현되지만 또한 개인성으로도 현현한다. 개인 에센스는 전체성인 현존이 한 사람으로 개인화된 것인데, 이를 ‘참사람true person†’이라 말할 수 있다. 수피즘에서는 개인 에센스를 ‘고귀한 진주, 무한한 가치의 진주the pearl beyond price’라고 부르며 이는 완벽한 인간을 의미한다. 도교 전통에서는 빛나는 진주 형상의 도태道胎를 잉태하는 내용으로, 그리고 티베트 불교 전통에서는 둥근 진주 모양의 상징들로 나타난다. 알마스의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에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개인 에센스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현대의 다른 영적 가르침에서는 개인 에센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알마스는 에센스의 여러 특질 중에서 ‘개인성’이 강조되는 이유를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중시되는 현대의 시대적 요구 때문이라 말한다. 물론 서양 문화는 지금까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발달시켜왔지만, 영적인 수준에서는 아직 개인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제 영적인 수준에서도 개인성이 깨어날 차례인 것이다. 지금은 에고에서 참사람으로 나아갈 때이다.
심리학은 지난 100년간 자아를 연구해왔다. 알마스의 길은 심리학의 발견들을 적극 활용해서 에센스를 깨우려 한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내용들을 소화하고 통합하여 마침내 ‘개인 에센스’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때 심리학에서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로 여기는 ‘삶의 이슈issue’들이 곧바로 우리의 본성인 에센스에 도달하는 문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심리학과 영성의 결합인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개념은 영적인 전통마다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심지어는 같은 전통 안에서도 분파나 학파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알마스의 길에서 깨달음enlightenment이란 말은 ‘특별한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순수의식으로 존재한다든가, 늘 순수한 지복의 상태에 있다든가, 베단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 너머에서 지켜보는 브라만으로 있다든가 하는 특별한 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의 깨달음은,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펼쳐지면서 비밀을 드러내는 의식의 자유로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 진리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여러 상태들로 현현될 수 있다. 니르바나涅槃로도 나타날 수 있고, 브라만으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신을 자각하거나 또는 이 모든 상태가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다.
알마스가 말하는 깨달음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가 말하는 깨달음은 의식이 자신의 제한으로부터 풀려나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으로도 현현할 수 있다. 알마스는 거기에 뚜껑을 덮거나 마지막 지점을 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흘러나오고 열려 가는 자유가 있다. 다음에 어떤 것이 펼쳐질지 알지 못하며, 여전히 새로운 것이 펼쳐지고 있다. 그는 결코 어떤 상태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마스는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느낌을 가진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계속해서 차례차례 여러 가르침의 궁극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때마다 그 깨달음은 아름답고 놀라웠으며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알게 되었다. 자유라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뭔가 특별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과 지성에 참여하여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는 의식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마스의 내적 탐험은 ‘에센스’의 이해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선천적인 본성의 핵심을 우리가 생후에 얻은 특성들과 구별하기 위해 ‘에센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발달에 대한 그의 모델에 따르면, 우리의 에센스는 점차적으로 퍼스낼리티personality 혹은 에고라고 부르는 구조물에 의해 덮여버린다. 우리의 본성인 에센스를 지지하지 않고 심지어 인식조차 하지 않는 세상에서, 에센스를 보호하기 위해 에고가 발달하는 것이다.
에고의 층들이 하나하나 발달하면서 에센스의 본성은 더욱더 감추어진다. 참 자기를 자각하는 깨달음, 해방의 과정을 위해서는 에고를 흔들어 무너뜨리는 것이 필요하다. 한 번에 하나씩 그 구조물의 층을 무너뜨려 에센스의 핵심에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에서는 이 전통적이고 신비적인 목표를 현대 심리학의 많은 이론과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성취한다. 어느 시점에서 심리학적 작업을 끝내고 영적인 이슈들로 옮겨간다고 하면서 개인과정과 초개인transpersonal과정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켄 윌버Ken Wilber와는 달리, 알마스는 의식의 가장 높은 상태들에 이르기까지 개인과정과 초개인과정이 계속해서 서로 엮여 있다고 본다. 심리적-영적 탐구를 시작할 때에는 현재 맞부딪치고 있는 문제들부터 다루게 되지만,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우리가 발달 초기에 얻게 된 습관들과 신념들까지도 파헤치고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는 나의 탐구를 심리학적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깊이 탐구해갈수록 영적인 본질, 에센스의 특성이 더 많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심리학적 내용물이 아주 깊어지면 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깊은 곳에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구는 자신을 알려고 하는 아주 개인적인, 진심 어린 시도가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실재의 본성은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마스
영적인 전통들 가운데에는 다양한 전통들에게서 영향을 받거나 혹은 그들 사이의 통합을 통해 일어나는 가르침이 존재한다. 그중의 한 예가 바로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이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 속에서, 대부분의 전통에서 온 많은 영성의 흐름을 가까이 접촉하면서 나타난 가르침이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잘 확립된 고대 가르침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적어도 그 가르침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다. 알마스는 “만 년 전의 고대 전통이 부활하는 것”이라고도 표현한다.
이 가르침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알마스는 자신의 자각이 인류의 중요한 영적 전통들의 깨달음과 하나하나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각의 깨달음은 그 이전의 자각을 하나의 부분집합으로 포함시키면서 매번 궁극의 것이 되었다. 각 단계마다 영적인 추구가 멈추면서, 그 깨달음 혹은 깨어남은 더욱더 깊고 완벽한 추구의 끝에 도달했다. 이런 여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실재reality†’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특정한 하나의 궁극으로서 자신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재는 이런 혹은 저런 궁극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 각각은 절대적인 진리이며 해방이지만, 실재는 하나의 궁극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드러낼 필요가 없다. 누구나 이 궁극들 중 하나에 정착하여 자신의 성취로 삼을 수 있고, 또 자유롭고 행복하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
그의 여정에서는 많은 깨달음이 일어났으며 또한 이 모두를 통합하는 일이 일어났다. 《The Inner Journey Home》이라는 책에서 이런 일을 ‘동시발생적 비이원성’이라고 불렀다. 그가 몇 번이나 궁극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비이원성을 넘어 계속되었다. 그 모든 깨달음들은 실재의 비이원적 경험의 다양한 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그가 ‘한곳uni-local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인 자각이 일어났다. 때때로 알마스가 ‘급진적 비국소성’이라 부르는 것이다. 실재는 하나의 통일성이지만, ‘비이원성의 깨달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는 깨달음이다. 실재는 단일성이다. 실재 안에서 각각의 형태는 ‘모든 형태’와 ‘형상의 본질을 형성하는 궁극’을 품고 있다. 그러한 깨달음은 ‘궁극을 바탕으로 보는’ 방식을 무효화시킨다. ‘바탕’이란 결국 인간이 만든 하나의 개념인 것이다. 형상들 사이에 어떠한 시간적·공간적 거리도 없기 때문에 절대적인 친밀함이 되는 이 통일성은 그에게 더욱 새롭고 놀라운 차원들을 향해 사랑을 열어주었다.
이 혁신적인 도약은 더 깊이, 더 높게, 혹은 더 미묘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의미에서 나머지 것들과 달랐다. 이는 ‘실재가 궁극의 바탕을 갖고 있다’는 관점 모두에서 벗어나고, 그 모든 관점 상호간의 관계를 조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이원성’이 각 형태들을 ‘동일한 실재를 표현하는 동등한 형태들’로 보는 반면, 이 깨달음은 각 형태들의 독특한 특수성을 부각시켰다. 특히 깨달음을 위해서는 개별영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과, 개별영혼이 없이는 어떠한 경험이나 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주었다.
여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깨달음은 계속되었다. 이원성과 비이원성이 개념적 이분법의 양극이라는 것을 아는 깨달음이 하나의 예이다. ‘이원성’과 ‘비이원성’은 둘 다 실재의 표현이지만, 이원성은 ‘분리’의 개념을 갖고 있고 비이원성은 ‘하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분리도 하나됨도 없는 실재를 자각하는 단순한 깨달음이 일어났다. 실재reality는 아무런 말도 붙일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실재는 물질적인 것도 영적인 것도 아니다. 그 둘은 개념의 범주일 뿐이다. 실재는 단순하며, 모든 개념을 수용하면서도 거기에 전혀 물들지 않는다.
이러한 깨달음의 흐름 안에서, 이 궁극적인 것들 중 어떠한 것에도 속할 필요는 없으나, 그들 중 어떠한 것으로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관점이 생겨났다. 알마스는 그것을 ‘총체관(전체성의 관점)’이라고 부른다. 어떠한 깨달음의 관점도 수용할 수 있고, 그중 어떠한 것에도 결정적으로 고착되지 않고서 그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 있거나 동시에 여러 개를 수용할 수 있는 깨달음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실재에 관한 가능한 모든 참 관점들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판단하거나 등급을 매겨 평가하지 않는 관점이다.
이 깨달음은 궁극의 관점 혹은 인간의 완벽함이라는 관점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두를 ‘실재를 경험하는 참되고 유용한 방식’으로 수용한다. 총체관은 새로운 자유를 표현한다. 그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순수의식 또는 순수자각으로 존재하는 자유도 아니며, 성숙과 완벽함의 자유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자유이다. 그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이다. 여기서 ‘어떠한 것’이라는 말은 형태 없음과 모든 가능한 형태를 포함한다.
삶은 매 순간을 가장 적절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궁극이든 완벽함이든 그 어떠한 깨달음이라도 현현할 수 있는, 참존재의 자유가 된다. 삶은 실재와 실재의 비밀들을 끊임없이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삶은 뭔가를 추구하거나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창조적인 역동이 온전히 해방되어, 참존재가 무한한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자유롭게 현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종파적이며 또한 모든 것을 완전히 포용한다. 이 깨달음은 각 전통과 가르침들 사이의 차이들을 축복한다. 그 모두가 순수하게 그리고 진짜로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역자 또한 1988년에 임사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시작된 나의 여정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던 이유는 방향을 정확히 찾지 못해서였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영적 전통이 서로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혼란 가운데서 길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할 때가 많았다. 가야 할 길을 모른 채 어쨌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몇 년 전 알마스를 만나면서 나는 풍랑 가운데 등대와도 같은 한 줄기 빛을 찾았다. 그는 모든 옛 가르침들을 용해시켜 하나로 녹여낸 다음, 그마저도 넘어 더 멀리까지 새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알마스는 농담처럼 ‘이것은 아직 지구인들에게는 낯선 은하계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나는 알마스의 《늘 펼쳐지는 지금》이 새 시대를 위해 내려온 우주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알마스의 접근법이 많은 독자들에게 밝게 빛나는 새벽별이 되어주기를 기원하며,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참으로 감사함이 충만한 날에
박인수
주요 등장 용어
에센스Essence
이 책에서 말하는 ‘에센스’는 거짓 자아인 ‘퍼스낼리티’와 구별되는 우리의 참본성true nature이다. 에센스라는 용어는 수피즘sufism에서 차용해온 것이라고 한다. 에센스는 살아 있는 순수현존이며, 스스로를 자각하는 생생한 감각을 지닌다. 에센스는 실제적이고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되는 것이며 뭔가 추상적인 것도, 다른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에센스는 모든 것의 본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에센스는 단 하나의 유일한 현존이며, 이 단일성은 그 자체로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에센스는 실체다. 직접적으로 경험될 때 에센스는 물이나 황금과 같이 일종의 물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센스는 물이나 금과 같은 물질적인 질료는 아니다. 이 점이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에센스는 물질처럼 경험되면 밀도, 점성, 질감, 맛 등과 같은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와 동시에 물질적인 질료가 아닌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지각과 경험은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일 때이다. 그때는 지각이 너무나 ‘곧바로’여서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이 동일한 하나다. 이것이 바로 에센스의 경험이다. 여기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는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분리가 없다. 주체와 대상 모두 동일한 에센스이다.
눈이 대상을 볼 때는 빛이 매개체이다. 그러나 에센스가 스스로 자신을 인식할 때 거기에는 매개물이 없다. 주체, 대상 그리고 지각의 매개물 모두가 동일한 에센스다. 또한 지각하는 감각기관도 에센스 그 자체다. 그 경험에는 오직 에센스만 존재한다. 그 경험이 바로 에센스다.
에센스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음 그 자체다. 에센스는 자각하는 게 아니라 자각 그 자체다. 에센스는 존재의 특질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에센스는 사랑하지 않는다. 에센스가 사랑 그 자체다. 에센스는 기뻐하지 않는다. 에센스가 기쁨 그 자체다. 에센스는 진실하지 않다. 에센스가 진리 그 자체다.
개인 에센스Personal Essence(개체의식Personal Consciousness)
현재는 거의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만의 독특한 개념이지만, 과거의 영적 전통들에서는 분명히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알마스는 현대의 네오-아드바이타Neo-Advaita 교사들이 개인 에센스를 ‘에고ego’와 혼동하며 무시한다는 점에서 특히 이 지식을 차별화하여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교에서 무아無我라고 말하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께서 아상이 소멸되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고, 그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는 개체의식이었기 때문에 그런 각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알마스는 개체의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그릇이자, 인식이 일어나는 ‘장소’라고 말한다. 무한한 의식의 바다에 떠 있는 한 점 파도인 셈이다. 만일 개체의식, 개인 에센스가 없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알마스는 모든 인식이 합쳐져버리면 ‘노이즈’가 될 것이라고 표현한다. 만일 개체성이 없다면 모든 인식이 동시에 일어나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소리가 합쳐지면 무슨 소리가 들릴까?
알마스에 따르면, ‘참사람true person’이라고도 표현되는 개인 에센스는 에센스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가르침이 현대에 와서 잊혀져버렸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요즘 미국과 유럽에서 아드바이타의 가르침을 펴는 이들이 개체의식을 에고와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체의식의 성장과 완성을 말하는 영적 전통의 가장 깊은 수준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개별영혼이 없다면 누가 성장하고 완성되는가?
에센스를 자각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개체성의 환상이 사라져서, 더 이상 개체성에 대한 집착이 없지만, 그 개인 영혼은 삶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 성숙하고 발달한다. 영혼의 성숙 과정을 통해, 수피즘에서 ‘무한 가치의 진주’라 부르는 개인 에센스가 깨어나는 것이다. 에고 대신 참사람이 현현하는 것이다.
참사람이 있다. 참사람은 현존의 개체적 현현이며 현존의 사람이다. 그러나 참사람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신비다.
참사람true person
‘참사람’은 에센스의 여러 측면(특질)들 중 하나인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보통 사람들은 참사람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짓사람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퍼스낼리티personality’라 부르는 것이다. 참사람의 다른 이름은 ‘개인 에센스the Personal Essence’이다. 개인 에센스는 참본성의 현현이자 표현이다. 참사람은 우리의 본성이 이 땅에 현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몸에 있는 머리, 가슴, 배의 세 센터들이 완성이 될 때 머리 위에서 넷째 센터가 열린다고 하는데, 그 센터를 신성 에센스와 개인 에센스의 접점이라고 볼 수 있으며, 넷째 센터에 빛이 켜져서 신성 에센스와 연결될 때, 한 개인인 그 사람은 신성 에센스의 현현이 된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에고라는 분리된 자아와 동일시하고 있을 때는 잠재적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에고의 구조물이 용해되면서 에고와의 동일시가 해체될 때, 자신이 본래 신성 에센스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삶은 곧 신성 에센스의 펼쳐짐이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성의 현신이 되는 것이다. 에센스의 현현으로서 개인성을 완성해가는 것이 참사람이 되는 과정이다. 이는 기독교의 신비전통에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선사들은 ‘자신에게서 찾을 것이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현존Presence
현존은 모든 존재의 바탕에 있는 토대이며, 알마스의 표현으로는 경계가 없고 온전히 투명한 매질medium이다. 현존은 또한 부재absence의 반대이기도 하다.
‘직면’이라고도 부르는 영적인 작업work에서 현존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업에서 현존의 의미는 모든 경험과 온전히 하나 되어 함께 있음을 뜻한다. 영적인 수행에서는 자각과 알아차림을 주로 강조한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알마스의 견해다. 삶 속에서 이슈의 직면을 통해 장애들이 용해되기 위해서는, 자각과 함께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존하기란, 의식이 경험에 모든 각도와 방향으로 촉수를 뻗어 거기에 완전히 밀착되어서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자각’의 경우처럼 떨어져서 보는 게 아니라 완전히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이슈가 용해되면서 에센스의 특질들이 드러난다.
자각은 처음에 알아차림의 상태에 있다. 그러다가 직면이 일어나는 순간에 자각은 현존과 합쳐져서 ‘현존하는 자각’이 된다. 우리가 이슈를 직면할 때는 현존하는 자각, 즉 자각과 현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비이원성Nonduality(네오-아드바이타의 비이원성과 차별되는 진정한 비이원성)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불이不二)’이라고 번역되는 아드바이타advaita의 상태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실재의 깨달음이 있다. 비이원성의 무한한 바다에서 한 점 파도가 일어나듯, 우리는 깨달음이 일어나는 한 점으로서 참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더 깊은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현존함으로써 비이원성의 진리를 자각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아드바이타의 자각(‘둘이 아니다’)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사람, 개인 에센스의 깨어남이 그 다음 과정인데, 비이원성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경우 이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다.
실재reality
이 책에서 ‘실재實在’란 존재의 참본성을 말한다. 텅 빈 실재의 경험은 아주 평범하다.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이다. 어떠한 관점에도 고정되거나 묶이지 않는다. 이원성이나 비이원성에도 매이지 않는다.
실재는 궁극적으로 어떠한 특징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특징으로 경험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시간/무시간, 혹은 공간/비공간이라는 개념으로 패턴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실재의 경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텅 빈 참본성은 스스로를 의식하지만 의식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고 정의되지 않는 의식이다. 그것은 ‘현존’이라고조차 부를 수 없다.
우리가 보통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바탕에 놓여 있는 토대와 실체를 가리는, 베일을 통해 바라보는 실재다. 통상적인 세계는 다름 아닌 참본성을 빼앗긴 실재다. 실재는 고정된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 획일적이고 정체된 진리가 아니다. 실재는 훨씬 더 살아 있고 신비로운 것이다.
모든 영적인 전통과 체계들은 하나로 만나야 한다. 그것들은 개념을 넘어선 실재의 경험에서 하나로 만난다. 그 경험은 진리의 경험, 하나의 실재의 경험, 알라Allah, 법신法身(Dharmakaya), 절대the Absolute의 경험이다. 경험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그 경험에서 모든 개념은 떨어져 나가고, 진리는 아무런 필터도 거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그대로 직접 드러난다. 그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특성인 ‘하나’이다.
탐구(다이아몬드 인쿼리Diamond Inquiry)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에서, 영혼이 자아와 자아의 경험을 탐험하는 ‘탐구’는 심층심리학의 통찰들과 관련이 있다. 현대의 심리학적 지식은 에고 자아의 이해와 그것을 초월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초개인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영역은 영적인 여정에서 심리학적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켄 윌버는 내적 여정의 특별한 단계들에서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의 통찰과 방법론이 유용하다고 지적했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의 방법론은 이 시각을 공유하면서도, 그것을 다른 방향들로 더욱더 특별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대상관계이론의 통찰을 사용하여, 과거 경험의 일반적 조건화를 통해 볼 뿐 아니라, 특정한 에고 구조들을 특별히 이해하고 꿰뚫어 본다.
에고 구조들은 연관된 에센스의 측면과 정확히 연결되어 있다. 이 방법은 궁극적으로 본성의 구조를 반영하는 경험구조들 안으로 탐구해 들어간다. 더 나아가, 깨달음의 주요한 장벽이 이원론적인 정신적 경향성이기 때문에, 이 방법은 그 아래 놓여 있는 에고 구조들 안으로 탐구함으로써 그 장벽들을 직접적으로 탐험해 들어간다. 그래서 심리학의 지식은 내적 깨달음의 과정을 지원하는 데 유용하다.
다이아몬드 어프로치의 방법은 전체로서의 실재의 구조, 에고 구조, 에센스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들을 탐구한다. 참본성의 한계 없는 차원들 안으로 들어갈 때, 그 구조들은 참된 탐구의 기초로서 드러난다. 그것은 지각의 패턴과 구조들과 존재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꿰뚫어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 탐구는 현대의 심리학 지식과 명상 수행을 통합한다. 이 탐구를 안내하는 순수지성이 시간의 지식과 시간 없는 차원의 지식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가이던스The Diamond Guidance
영적인 탐구 과정을 안내하는 고차원의 지성으로서, 탐구를 향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있을 때 찾아온다고 한다. 알마스의 경우, 이 가이던스[2]가 스필버그의 영화에 나오는 우주선처럼 장엄하게 빛나며 하강해서 착륙했다고 한다.
탐구inquiry가 영혼을 열고 가이던스를 수용하도록 이끌면, 우리는 현존의 강림으로서 가이던스가 일어남을 경험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 가이던스가 내려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 막 착륙한 우주선과 같다. 그 웅장함과 파워는 영화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우주선 모선이 착륙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공기는 전기 같은 에너지로 충전되고 모든 것이 고요해지면서도 춤추는 빛들의 광휘로 맥동한다. 어떤 사람은 우주선의 엔진이 강력하게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섬세하고 우아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때, 의식은 정확함의 특성을 얻고 광휘와 예리한 명료함과 절묘한 우아함의 특질을 갖는다. 그것은 더 이상 탐구하는 평범한 의식이 아니며, 다이아몬드 가이던스의 순수한 빛에 의해 변형된 정밀한, 다이아몬드 같은 광휘가 된다.
알마스
알마스에 따르면, 영적인 진화의 여정에서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지성인 ‘가이던스’와 가슴의 특성인 ‘사랑’이다. 사랑은 탐구 여정의 추진력이 되고, 분별하는 순수지성인 가이던스의 지혜는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다이아몬드 가이던스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깨어나 개인의 분별능력이 되는 신의 마음의 특별한 현현이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게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알고,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을 부여해준다.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그 경험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직접 느끼며, 그 느낌 안으로 통찰해 들어가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가이던스가 신의 마음의 반영, 방사, 혹은 특별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경험을 드러내줄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험의 불투명하고 모호한 것을 꿰뚫어 명료함과 진리에 이르게 해준다.
알마스는 다이아몬드 가이던스가 불교의 반야지혜와 같다고 말한다. 가이던스는 영혼이 자신을 알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면 자신의 근원을 알게 된다. 그 근원이 당신의 궁극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한곳 깨달음Uni-local realization
실재Reality는 단 하나인 단일성이며, 그 안에서 각각의 형상이 다른 모든 형상을 내포한다. 그리고 모든 형상의 본질을 형성하는 궁극을 또한 포함한다. 이 관점은 《화엄경》에 나오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나 홀로그램 우주관과 유사하다. 홀로그램에서는 작은 한 조각이 전체 그림을 포함한다. 알마스는 모든 시간상의 점과 모든 공간상의 점이 모두 단 하나의 장소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곳 깨달음’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모든 대상 사이에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전혀 없으므로 절대적인 친밀함과 사랑의 힘이 있다. 나는 모든 대상과 시간-공간적으로 하나이며, 내가 온 우주를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간-공간상의 점 하나하나가 온 우주를 내포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시공간의 경계들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있는 그 자리에서 투명하게 하나로 겹쳐진다고 상상해보라.
이 책의 활용법
《늘 펼쳐지는 지금》은 친밀함과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에 ‘현존’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영적인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 방법은 경험에 대해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단순히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초연해지는 것만도 아니다.
자신의 경험에 현존presence하기, 즉 경험과 함께 있기를 도와주는 영적인 수행을 우리는 ‘탐구inquiry’라고 부른다. 탐구는 경험 속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자 하는, 열려 있고 호기심 가득한 열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진리는 매 순간 당신의 경험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당신이 그것을 발견하려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때 스스로를 드러낸다.
알마스가 이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 그 자체가 바로 당신을 탐구로 초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책을 내려놓고 그가 말하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써 탐험해보라.
각 장의 끝부분에 나오는 [탐험 세션]은 해당 주제와 관련된 탐구의 영역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당신의 탐험을 안내하고, 수행의 역량을 계발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기록하며 혼자 탐구할 수도 있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탐험할 수도 있다.
혼자 탐험하기
연습마다 15~30분 정도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잠시 질문을 숙고하고 나서,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 대신 더 깊은 의식 속에서 응답이 올라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맞춤법이나 좋은 표현에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느낌과 자각awareness이 흘러나와 명확히 표현되도록 허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당신의 기록에 대한 통찰과 인식이 떠오르고, 경험이 계속해서 펼쳐질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함께 탐험하기
다른 사람과 함께 연습할 때는 보통 한 시간 정도 탐험할 시간을 갖는 것이 좋지만, 필요에 따라 더 짧게 시간을 정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각자 15~20분 정도 탐험시간을 가진다. 한 사람이 탐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열려 있는 호기심을 가지고 그 탐구 과정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경험에 현존하는 연습을 하는 고요한 목격자가 된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탐험할 때 얻게 되는 특별한 유익함이다. 다른 사람의 탐험과정을 지켜봄으로써 당신 자신의 탐구 과정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또한 탐구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이 책에서 전해주는 연습을 넘어서 특히 탐구 수행 자체에 관심이 생긴다면, 알마스의 다른 책 《Spacecruiser Inquiry: True Guidance for the Inner Journey》를 읽어보길 권한다.
탐구는 영적인 수행이며, 다른 모든 수행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깊어진다. 당신 내면의 삶이 하나하나 펼쳐짐에 따라 이 책을 읽고 또 읽는다면, 당신의 내면 여행은 점점 더 미묘해지고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열려 가는 발걸음을 자신에게 맞추라. 그렇게 할 때 탐구를 통해 당신 참존재의 감춰져 있던 풍요가 드러날 것이다.
가슴이 뜨겁지 않다면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으로 가슴이 충만하지 않을 때, 진실로 깊이 만족스러운 인간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fulfillment을 위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영적인 길을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영적인 길에서 이런 충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깊은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왜 영적인 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영적인 여정을 시작할 때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눈에 띄는 새로운 의식 상태를 경험하고자 했는가? 일상세계를 넘어선 특별한 영역을 여행하고자 했는가? 세상의 어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가? 혹은 인생의 의미를 더 풍부하고 깊게 만들고 싶었는가? 만약 우리의 목표가 이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작업을 통해 삶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라면, 실제로 삶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거대한 세계에 살고 있다. 가슴속 깊이 들여다볼 때,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뭔가 아주 단순한 것임을 발견한다. 평화peace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휴식과 편안함, 고요를 원하고, 끊임없이 도는 쳇바퀴를 멈추고 싶어 한다. 투쟁, 갈등, 욕망, 두려움, 증오로부터 벗어난 공간을 찾는다.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에게 끌리고, 평화와 고요를 찾을 수 있는 상황에 끌린다. 스트레스 없는 단순함. 평온에 머물기. 아주 깊은 의미에서 이 열망은 기쁨, 행복, 자유보다 더 큰 충만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단순히 존재하는 평온함 없이는 우리가 추구하는 다른 어떠한 것도 참으로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물리적인 환경을 바꿈으로써 고요를 찾으려 한다. 우리는 평화와 평온을 얻기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지속적인 행위는 대부분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고속도로와 슈퍼마켓, TV와 전화에서 벗어나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하더라도, 심지어 자신의 방에 고요히 앉아 있다 하더라도 내면의 시끄러움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소음과 활동이 일어날까? 물론 그 대답은 머릿속의 더 많은 시끄러움, 더 많은 행위로 찾아온다. 당신이 이미 알고 있듯, 내면의 분주함은 왜 그렇게 바쁜지를 설명하고, 분석하고, 토론하면서 점점 커지기만 한다.
우리의 마음과 머릿속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분주하고 시끄럽다. 너무나 많은 소음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 우리에게는 단순하고도 직접적으로 자신을 느끼고,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이 쓸모없는 것들이 모두 우리의 주의를 뺏기 위해 경쟁하는 것만 같다. 자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때 우리가 내면에서 발견하는 것이란 대부분 분주함일 뿐이다.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은 터무니없는 몽상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 우리의 삶과 머릿속이 돌아가는 모습이다. 우리는 그 모습에 의문조차 품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며,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시끄러운 게 당연하며, 우리는 그저 거기에 적응하기를 배우고 있을 뿐이다.
죽을 준비를 하기 전에는 고요해질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죽음의 과정이 느리게 진행된다면, 마침내 세상을 떠날 때쯤에야 그들의 내면은 고요해져 있을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주변의 누군가를 통해 이런 과정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고요해지기 위해서는 종종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에 죽음의 과정을 통해 고요해지는 법을 배울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닿기 전에, 소음 한가운데에서 고요히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세상과 머릿속에서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극장 안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 편안히 영화를 즐기고 있을 동안 때때로 시끄러운 소리가 우리를 엄습해온다. 폭발하고 깨지는 소리, 비명과 고함 소리, 시끄러운 액션과 강렬한 서스펜스 때문에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제대로 느낄 여유조차 없다. 마치 전쟁터에 있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절정을 향해 내달려간다.
머릿속에서 산다는 것이 꼭 그렇다. 이 글을 읽는 동안에도 당신의 마음이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눈치챘는가? 판단, 반응, 질문, 연상, 욕망과 태도들이 항상 우리 마음과 머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소음에 익숙해져 있는 철부지 십대들과 같다. 우리는 그 소음이 현실이라고 생각해서 정말로 ‘참’인 것이 뭔지 더 이상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는 단순하고 친밀하고 이완된 느낌을 좋아하면서도, 그런 게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서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단순하고 친밀한 느낌이란 영화관에 편안히 앉아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의 바로 그 느낌인데도.
현대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잔잔하고 조용한 음향 속에 줄거리가 천천히 전개되는 구식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렇게 영화를 볼 때에는 스스로 느끼는 바를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스스로 있는 그 자리를 알아차리면서 자기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고,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실재reality[3]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식의 단순한 고요함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각awareness을 잃어버린다.
그런 식의 단순한 고요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직접적인 경험과 완전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 우리는 메아리를 듣고 환영을 볼 뿐이다. 우리의 이상과 관념, 투사, 걱정, 두려움 그 모두는 소음이 되어 즉각적인 경험과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묘한 감각을 덮어버린다. 지금 이 순간에 단순히 존재하는 고귀함은 혼란과 소음 속에서 잊혀진다.
영적인 여정이란 뭔가를 경험하고 재미있는 통찰을 얻으며 비범한 감각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들은 영적인 여정의 한 부분으로 일어날 뿐이다. 그런 체험이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내적인 여정의 핵심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면의 수행은 기본적으로 고요로 안착하는 길이며,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참모습을 느끼는 단순함 안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실재의 메아리 대신 실재 안에 존재하기를 말한다.
실제로 존재하기의 본질
실재reality는 일반적으로 우리 마음에 비치는 반영이 아니다. 실재는 훨씬 더 깨끗하고 단순하며, 시끄러운 일상적인 경험과는 반대로 훨씬 더 편안히 안정되어 있다. 자신을 느끼고 자기로 존재하는 것 안에는 매우 아름다운 친밀함이 있다. 그렇게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 우리는 단순히 실제the real[4]를 느낀다. 우리는 존재와 자각의 실제성realness을 알아차린다.
소음이 가라앉고 복잡함이 용해되어 진정한 모습으로 자신을 경험할 때 우리는 실제로 존재being real하게 된다. 반영이나 이미지가 아닌, 메아리나 기억이 아닌, 생각이나 반응이 아닌 그것 자체. 보통 우리는 실재reality가 온갖 소리와 소음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가정하면서, 듣는 그대로 대부분을 믿어버린다. 우리는 소음에 초점을 맞추거나 거기에 반응하느라 바쁘다. 방어하고 합리화하며, 반응하고 설명·판단·계획·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들은 실재의 반영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함being real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는 실제를 매 순간 경험한다. 또한 실제로 존재함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보다는 오히려 어떻게 존재하는가와 관계 있다. 그것은 천 개의 시끄러운 소음을 듣는 것과 하나의 단일한 음을 듣는 것만큼 차이가 있다. 그 유일한 음은 단순하고 부드러우며, 우리가 본성에 더욱 가까워진 느낌을 갖게 해준다. 가슴에 더욱 가까워지는 순간 우리는 심장이 살아 있고 부드럽다고 느낀다. 우리가 자신을 느낄 때 가슴은 부드러워지고 다정해진다. 우리는 그 가슴의 부드러움과 함께 실제에 가까워지면서 자기 자신을 알아차린다.
소음과 드라마, 밀고 당기기, 조작과 투쟁, 그리고 영적인 수행과 작업을 수년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단순히 실제로 존재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기를 원하며, 인간존재, 자각하고 깨어 있는 존재의 실제를 기억해내거나 알고 싶어 한다. 그런 다음에는 이 존재를 의식적으로 경험하기를 원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본래 모습은 실재reality에 관한 것이며 실제로 존재하기에 관한 것이다. 어딘가 특별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참된 방식으로 이곳에 존재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한다. 어떡하면 완전히 여기에, 완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흩어진 채 진동하며, 미친 듯 흔들리는 나의 원자들이 어떻게 느긋해지고 모여서 여기에, 나로서 안착할 것인가?
실제로 존재하기를 향한 열망
책을 읽어나가면서 당신은 실제로 존재하기를 배울 수 있고, 실제성realness과 연결되어 그것을 자각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당신을 끌어당기는 어떤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being real하는 상태에 끌려든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기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기와 보통의 경험 사이의 차이점을 알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경험은 대부분 실제가 아니다. 그 경험은 그저 실제의 반영이자 왜곡일 뿐이다.
영적인 경험과 지각, 그리고 온갖 흥미롭고 이상야릇한 체험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체험들은 우리를 흥분시키고 고양시킬 수는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 자신으로 있는being oneself 단순함이 없다. 자기 자신에 안착하고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것,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하는 것, 그 본성의 친밀함, 실제의 느낌이 그 안에는 없다. 내적인 여정, 영적인 수행은 모두 궁극적으로 여기에 도달한다. 진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말이다. 어떤 초능력을 개발하고 차원이동을 하거나 유별난 경험을 하기 위해서 내적 수행을 하려 한다면 당신은 진실한 영적 작업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아직 실재가 무엇인지, 실제로 존재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내적 작업을 진정으로 그것 자체로서 원한다면, 당신은 이미 실제로 존재하기를 알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함은 홀로 고요히 있을 때 당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나임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지를 알며, 그것으로 존재함이 편안하다. 나는 거기에 아무 갈등이 없으며, 내가 누군가와 교류할 때 그것은 나의 본성이 하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을 때, 혹은 실제로 존재함이 뭔가 좋은 것, 자신이 원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때에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