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찾기 20
2006년 10월 16일 초판 1쇄 찍음
2006년 10월 25일 초판 1쇄 펴냄
지은이|이원규
펴낸이|김영현
편집|박문수, 정은영, 김혜선, 박유진
디자인|여현미, 이선화
관리·영업|김경배, 김태일, 이용희, 정재영
펴낸곳 | (주)실천문학
등록 | 10—1221호(1995.10.26.)
주소 | (121 —820) 서울시 마포구 망원1동 377—1 601호
전화 | 322—2161~5 팩스 | 322—2166
홈페이지 | www.silcheon.com
ⓒ이원규, 2006
ISBN 89-392-0554-5 03990
본 전자책은 한국이퍼브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시에는 형사/민사상의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본 컨텐츠는 은글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운의 독립투사 김산!
그는 허무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50년간이나 잊혀져왔지만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만큼 주목받고 사랑받는 독립투사도 없다.
그리나 우리에게는 김산의 등 뒤에 서 있는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김산들이 있다.
제이 제삼의 김산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뜨거운 조국애와생애 전체를 관통했던 투지로 인하여,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오늘의 시간을 살고 있다.
1930년의 김산.
중국 공안국에 체포되어 일본 측에 넘겨진 뒤 천진 주재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의 본명이‘장지학’ 이고, 주소가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이었음을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산의 모교인 평양 숭실학교의 당시 모습.
김산은 선교사들이 세운 이 학교에 1918년에 입학해다니다가 다음해 기미년 3·1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북경 협화의학원.
김산은 1921년 이 학교에 다니면서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학생 논객으로 활약했으며, 조국 독립을 위한 한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중국 광주의 중산대학.
국공합작을 결정한 손문이 중국의 미래를 위해 황포군관학교와 함께 설립한국립광동대학의 후신이다.
김산과 김성숙, 그리고 의열단 동지들이 특대장학생으로 공부했다. 김산은 의학과에 편입했다가 법학과로 옮겼다.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에 대해서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승리했다. ”
— 김산
이청천.
일본 육사를 나와 대위로 복무하다가탈출해 서간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일할 때 김산을 가르쳤다.
그 뒤 광복군 사령관을 지냈다.
이동휘.
원로 사회주의 독립투사로 김산이『독립신문』에서 일할 때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었다.
김산과 그의 친구들에게 자주 교훈이 되는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약산 김원봉.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조직하고단장이 된 독립투사로 김산을 의열단에 가입시켰다.
뒷날 조선의용대 대장과 민족혁명당 당수,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되었다.
한위건.
기미년에 학생 대표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일하고 뒷날『동아일보』기자를 하며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검거를 피해 망명했으나 김산과 서로 앞길을 막는 악연으로 이어졌다. 연안에서 김산과 화해한 뒤 죽었다.
유자명.
아나키스트이자 의열단 고문으로 김산에게 정신적 바탕을 마련해준 지도자였다.
박진.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 출신으로 김산의동지였다.
광주 코뮌 당시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산이 투옥되었던 신의주형무소의 당시 전경.
신의주경찰서.
김산은 1931년 북경에서 체포된 뒤 이곳으로 끌려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30년대 초반의 김산.
신의주형무소에서 갇혔다가 강제 귀향했으나 다시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해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동지 김영호의 부친이자 독립투사인 김기창선생이 집에 묵게 했으며, 이때 찍은 사진이다.
김성숙.
경기도 양주 봉선사 월초화상 밑에서 공부했으며, 3·1만세운동으로 복역한 뒤 중국으로망명해 김산의 평생 동지가 되었다.
김산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넣어준 중도좌파 독립투사였다.
김성숙의 중국 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 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김산이 교사로 일한 보정사범학교.
1932년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되어 불우했던 시절에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지하조직을 만들었다.
연안의 노신예술학원.
연안 교외 교아구에 있으며, 김산은 이곳 도서관에서 영문 소설들을 빌려다읽었고 그의 대출카드를 본 헬렌 포스터 스노가 면담을 요청했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
아버지가 죽은 뒤 모친과 중국인 계부 밑에서 훌륭하게 성장한 그는 중국 정부의 관료가 되었고,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나는 여기서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노예의 땅에서 죽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지만 여기가 우리의 빛나는 혁명투쟁과 같이
자유로운 조선 땅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 김산
1930년경 김산이 살던 집.
북경 경산동가 위치. 그는 여기서 시「동지여 싸우자」와 소설『기묘한무기』를 썼으며 치열하게 공산주의 활동을 펼쳤다.
1924년 북경 거주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파악해 보고한 일본 관헌 자료. 장지락이 주소불명에 소속이 없고 도산 안창호와 연락이 닿아 있다고 기록했다.
김산이 1930년 북경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작성한 육필 자술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김산에 씌워진 간첩 누명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김산을 복권했다.
1983년 김산의 복권을 결정하는 공식 문건.
소설『기묘한 무기』첫 장.
김산이1930년에 쓴 첫 소설로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의 상해 황포탄 의거를 내용으로 삼았다.
김산이 번역한『무신론』. 장북성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김산이 번역한『포이어 바흐, 마르크스, 레닌의 인생관』.
김산이 직접 장정을 맡았으며 역시‘장북성’이라는 필명으로 1932년에 출간했다.
북경 곤륜서점과 복화서사를 발매소로 표시했고 책값은 6각(角)이다.
헬렌 포스터 스노.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자 에드거 스노의 아내였던 그녀는‘님 웨일스’라는 필명으로 홍군 지역을 취재하러 연안으로 들어갔다가 김산을 만났으며 뒷날 Song of Ariran(한국어제목『아리랑』)이라는 훌륭한 전기를 남겼다.
1941년 발간된『아리랑의 노래』초간본.
발간 직후 매카시 광풍이 불었고, 미국정부는공산주의자들과 진보적 성향의진영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미국 경찰들이 서점에 깔린 이 책들을 압수하고소장자들을 추적했다.
이 책을 가지고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 표지를 없애거나 또는 책을 버렸고, 드물게도 표지까지 완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책을 국내 아리랑협회가 소장하고 있다.
“김산은 동시대 조선인들에게 영명한 지도자요, 사상가였다.무엇보다 그는 뜨거운 영혼과 가슴을 지닌 순수한 인도주의자요,더없이 고귀한 사람이었다. ”
— 헬렌 포스터 스노
1937년 연안에서의 김산.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가 여름 내내 그를 인터뷰할 때 찍은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고 1년 뒤 김산은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살아 있는 한은
혁명의 길을 걸어
이 세상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총칼을 손에 들고
빛나는 내일의 세계를 위해
자, 붉은 홍기를 높이 들고 힘차게 춤추는 것이다!
강철 같은 견고함은
우리의 진영.
갖풀 같은 단결은
우리의 대오.
아무리 쓰러져도 이어지는 돌격은
우리의 방법.
12억 5천만의 피압박 인민들은
우리의 벗!
결코 다 벨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목이다!
흘러도 흘러도 다함이 없는 우리의 피다!
싸우자! 싸우자!
내일이야말로 인터내셔널이다.
일제 치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한 연안 황토고원
| 김산의 활동 지역 |
비운의 독립투사 김산. 그의 탄생 101주년이 되는 해에 그의 전기를 내놓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을 상재하고 한 해 만의 일이다. 김 약산 전기를 읽은 주변의 문우들이 이 책의 집필을 권유했을 때 한참 망설였다. 그들의 말대로 내가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투쟁현장을 밟아보았고 한국 독립운동사나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사를 조금 공부했다고는 하나 김산의 전기소설 『아리랑』이 이미 있기 때문이었다. 김산의 비장한 조국애와 생애 전체를 일관한 불굴의 투지, 그리고 헬렌 포스터 스노의 열정과 역량이 결합된 그 책은 내 가슴속에 여전히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역사 속의 거물이 아니라 신념을 실천하고 간 소영웅이어서 전기를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우선 1984년에 읽었던 『아리랑』의 한국어 초판과 2005년 발행 개정판을 나란히 놓고 다시 읽었다. 스무 해 전과 다름없이 전율과도 같은 감동이 몸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그 책이 김산 한 사람의 구술을 받아 한 사람의 작가가 바라본 눈으로 쓴 까닭에 상당 부분 지평을 넓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헬렌 포스터 스노가 가보지 않고 김산에게서 들은 것만으로 기술한 관련 현장들을 거의 밟아본 터였고, 연구가들에 의해 발굴된 무수한 자료와 연구 성과를 대부분 알고 있었다. 현장감과 자료들로 『아리랑』의 빈 곳을 채운다면 김산의 생애를 복원할 수 있고 그의 영혼도 기뻐할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지난날 어떤 소설을 쓸 때보다도 강렬한 열광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 열광은 이 책의 집필을 마치 숙명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우리 독립운동사 그 너머에 그만큼의 역사가 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때문이었다. 분단 모순은 우리의 허리를 갈라놓은 외에 사회주의 항일투사들의 투쟁을 외면함으로써 독립운동사마저도 분단시켜놓았다는 자각, 그 때문에 그 뒤 그쪽 자료를 찾아 읽고 기회 있을 때마다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외람된 말이지만 나는 집필을 결심하는 순간 이미 이 책을 쓸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집필을 숙명으로 생각했으며, 그로 인해 나의 열광은 한껏 상승되었다. 나는 소설을 쓸 때 늘 그러듯이 자기암시를 통해 주인공인 김산과 심리적 동일시에 빠져갔다. 게다가 그것은 이즈음 안고 있던 개인적인 사정, 책 쓰기에 매달려 무엇을 극복해야 한다는 희망과 맞물려 상상하지 못했던 에너지를 갖게 해주었다. 그래서 강의가 없는 겨울방학 석 달에 초고를 탈고할 수 있었다.
내가 아무리 이 책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숙명이라는 자의적 인식으로 열광에 빠져 매달렸다 하더라도, 이 책이 완성된 것은 여러 연구가와 출판가들의 노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내내 그분들의 공을 생각했다.
1980년대 초반,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의 전기 출간은 일신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었는데도 『아리랑』의 출간을 감행한 도서출판 동녘의 이건복 사장, 1987년 헬렌 포스터 스노를 찾아가 인터뷰해 『아리랑』에 쓰지 못한 것들을 세상에 펼쳐놓고 교토대학의 미즈노 나오키 교수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각서』를 공동 저술해 충실한 해제를 이뤄낸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 선생,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해 잡지에 기고함으로써 김산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게 해준 재일동포 논픽션 작가인 김찬정 선생.
최용수·박창욱·최봉춘·한준광·김양·김성룡 선생 등 중국의 동포 연구가들의 노력도 컸다. 특히 북경 중국 중앙공산당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최용수 선생은 김산 관련 비밀자료들을 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김산에 대한 1차 자료 태반은 선생에 의해 발굴되었다.
국내 연구가들은 자료들을 체계 있게 정리하고 분석했다. 홍정선 교수는 상해, 연안, 남경, 광주 등을 찾아가 김산의 행적을 취재했으며, 중국으로부터 받은 귀중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문 잡지에 기고하고 연보를 완성했다. 김영범·장세윤·한홍구 선생은 역사학자로서 중국공산당사와 조선공산당사, 그리고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서 김산의 투쟁 의미를 되살려냈다. 이 책을 쓰는 바탕을 마련해준 모든 분들에게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김산은 허무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50년간이나 잊혀졌었지만 지금 그만큼 모국 연구가들의 주목을 받고 동포의 사랑을 받은 독립투사는 없다.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훈장도 받았다. 지금 그의 영혼은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김산의 등 뒤에 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김산들이 어른거린다. 나는 십여 차례의 현지 답사와 자료 탐색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다른 김산들을 보았으며, 집필하는 동안에도 그랬던 것이다. 이 책이 김산과 그들의 영혼 앞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부분적으로 상상력에 의한 소설적 시퀀스들이 들어 있다. 김산이 광동에서 중국혁명의 바람에 휘말렸을 때 사랑했던 여자 병사는 그 존재만 김산의 고백과 풍문으로 알려졌을 뿐 이름이 기록에 없다. 등채영이라고 이름 붙인 그녀 하나를 빼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명은 실존 인명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기록과 사실에 충실하기를 절대 우선으로 삼았고 허용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상상력을 덧붙였음도 밝혀둔다. 김산의 출생 환경이나 죽음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얻지 못한 채 써나간 것이 아쉽다. 언제고 더 분명한 자료를 얻으면 보완할 생각이다.
김산의 전기를 쓰라고 격려하며 소장 자료를 내준 홍정선 형, 10여 년간 수집하고 연구한 성과를 선뜻 내준 고구려재단의 장세윤 형과 독립기념관의 이동언 형, 중요한 자료와 증언을 주신 북경의 최용수 선생, 여러 차례의 현지 답사를 도와준 분들, 멀리 중국과 일본과 미국에서 자료를 보내준 분들, 그리고 변변치 않은 원고를 좋은 책으로 꾸며준 실천문학사에 감사한다.
2006년 가을
이원규
러일전쟁의 포성 속에 태어나다
을사년(乙巳年, 1905년) 5월 12일, 음력으로는 3월 12일로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과 여름의 중간쯤 되는 날이었다. 평안북도 용천군의 덕봉산德奉山 골짜기, 어른 손바닥처럼 커진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떡갈나무 사이로 움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난해 이맘때 불이 붙었다가 딴 곳으로 옮겨갔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마지막 결판을 내기 위해 다시 용천 땅으로 밀려오자 집을 버리고 피난한 민초들의 움막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5리쯤 떨어진 곳에 있던 하장동下長洞 인동仁同 장씨張氏 집안 사람들의 거처도 있었다. 용천 땅은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최단거리 길목에 위치해 옛날부터 전쟁터가 된 적이 많았다. 사람들은 전란이 날 때마다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산속으로 피해 반 길쯤 깊게 땅을 팠다. 그 위에 나무를 잘라다가 삼각 지붕의 틀을 만들어 얹고 거기에다 풀잎으로 이엉을 엮어 덮었다. 그리고 바닥에다 왕골이나 부들로 만든 돗자리를 깔면 대여섯 식구는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덕봉산은 크지 않은 산이지만 숲이 우거졌으며 골짜기가 깊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었다.
마흔이 조금 넘은 장 주부主簿. 그는 쿵 하는 발사 폭음에 이어 하늘을 찢어발기고 날아가는 포탄의 비행음에 귀를 기울이며 이마에 내 천川 자 주름이 만들어지도록 낯을 찡그렸다. 성깔 있는 그의 얼굴이 더 사나워졌다. 젊은 날에 용천 관아 이방吏房 밑에서 장부 적는 일을 한두 해 맡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주부라는 호칭이 붙었다.
“제기랄, 왜 이런 때 애를 낳는 거야. 망할 놈의 여편네.”
그는 중얼거리며 골짜기 입구에 세워둔 수레를 바라보았다. 수레가 선 오솔길 위쪽 둔덕에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포탄은 근처 어딘가에서 발사되어 용골산龍骨山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여차하면 움막도 버리고 수레에 살림살이와 식구들을 싣고 꽁무니에 불이 붙은 듯 달아나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대에 걸리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놈들은 바람보다 더 빨리 달리며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움막의 거적문이 열리고 산파를 맡은 재당숙모가 삿대질하듯이 팔을 뻗치며 소리쳤다.
“또 아들이네. 무 뽑듯이 쉽게 쑥 낳았구먼. 어서 화덕에 물을 데우게.”
재당숙모의 말소리 끝에 아기 울음소리가 묻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포탄이 하늘을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아갔기 때문에 그 소리에 묻혀버렸다.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근처에 쪼그려 앉아 끊어진 미투리 끈을 고치고 있던 열다섯 살짜리 장남과 열 살짜리 차남이 산파 할머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장 주부는 손가락을 까딱까딱해 아이들을 불렀다. 두 아들이 걸어오자 움막 앞에 진흙을 이겨 만들어놓은 화덕을 가리켰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제물포 세창양행世昌洋行에서 만들었다는 성냥을 꺼내 주었다. 또 아들을 낳았지만 썩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놈의 포성이 신경을 곤두서게 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자란 두 아들은 이미 오전에 화덕의 무쇠 솥에 물을 길어다 부은 터였고, 아비의 뜻을 척척 헤아려 솔잎 쏘시개와 소나무 삭정이를 적당히 아궁이에 넣었다. 장남이 황홍색의 마른 솔잎에 성냥불을 붙였고, 차남은 그것을 화목 밑에 넣은 뒤 무릎을 꿇고 눈이 토끼처럼 빨개지도록 후후 불었다.
불길이 아궁이 밖으로까지 춤추듯이 활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장 주부는 다시 포성에 귀를 기울였다. 작년 이맘때 일이 떠올랐다. 생각하기도 싫은 기억, 그런데 그런 기억은 왜 잊혀지지 않고 새록새록 살아오는 것일까.
지난해 5월, 조선반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북상하면서 하장동을 거쳐 올라갔다. 용암포龍巖浦 주둔 러시아군이 어딘가로 빠져나가 진을 치고 있다더니 그들과 한판 붙기 위해 이동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 길이 질척질척했는데 일본군은 마을 사람들을 사냥하듯이 붙잡아 포차와 치중輜重 마차를 밀게 했다. 그는 내일 모내기를 하려고 무논 못자리에서 모를 뽑다가 끌려갔다. 포차 바퀴가 진창에 빠지자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에게 발길질하고 총 개머리판으로 찍어댔다. 그도 정강이를 군홧발에 찍혔는데 퉁퉁 부어, 일본군에서 풀려난 뒤에도 몇 달을 고생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용천에서 싸움이 붙은 것이다.
화덕에서 데운 물을 큰 바가지에 담아 산모가 있는 움막 안으로 들여보낸 뒤에도 포성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포성은 더 커지고 많아졌다. 장 주부는 재당숙모가 작은 바가지에 담아 주는 태胎를 받아 들었다. 사위에서 어둠이 포위하듯 다가오고 있었다. 나흘 전 피난 떠나오며 짐 속에 넣어온 자루 짧은 괭이로 땅을 파고 태를 묻었다.
냉기와 비와 이슬을 겨우 피하게 만든 움막. 움막 안이 이미 어두워 그는 토벽의 움푹 팬 자리에 놓인 고콜불(관솔불을 놓을 수 있게 방 안 벽에 낸 구멍을 고콜이라 한다, 그 속의 불) 빛 속에 드러난 아기의 얼굴을 보았다. 마흔이 넘은 어미에게서 나온 아기인데도 몸이 컸다. 우는 소리도 우렁찼다.
“딸년 하나 바랐더니 또 아들이 나왔네. 그런데 고놈 기골이 참 크군.”
그는 까부라진 모습으로 누워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날 포성은 그쳤고 무사히 사나흘이 지나갔다. 오일장이 열리는 열나흗날, 용암포 장터에 나갔던 사람들이 듣고 온 소식에 의하면 전쟁은 결국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했다.
“아라사 군은 수천 명이 죽어 형편없이 박살나버렸고 용암포의 아라사 군대 기지도 왜놈들이 차지해버렸대.”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러시아 군이 용암포를 점령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만주의 마적馬賊들을 매수해 앞장세우고 쳐들어왔는데 닥치는 대로 민가를 습격해 약탈하고 여자들을 겁탈했다. 그는 용암포의 저자에 갔다가 보았다. 말을 탄 러시아 코사크 기병대 병사들이 처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헛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그리고 딸을 구하려고 달려들던 어떤 처녀의 아버지가 가슴 한복판에 코사크 병정이 쏜 총탄을 맞고 죽는 것을. 이제는 그 역할을 왜놈들이 할 것이었다. 그런 불안한 예감에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산골짜기 움막에서 이레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기와 산모는 술독을 싸듯 솜이불로 둘둘 싸서 수레에 싣고 갔다. 이 아기가 바로 뒷날 민족의 운명을 가슴에 안고 투쟁한 독립투사이자 혁명가, 본명보다는 ‘김산金山’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진 장지락張志樂이다.
장지락이 출생한 1905년은 조선인들에게 가장 불운한 해였다. 이미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었고 결국은 일본의 침탈 야욕 앞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이 나라가 이미 자기들의 것인 양 더 당당하고 교만해졌다. 고종황제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밀사를 보내 독립 청원을 전달했으나 외면당했으며, 친일파 모임인 일진회一進會로부터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라는 협박을 받았다. 11월 7일, 마침내 제2차 한일협상조약이 체결되니 그것이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 조약의 폐기를 상소했으나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일으켰고,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과 전 의정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자결했으나 모두 덧없는 일이었다.
한반도 서북단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용천군은 국경이 지척이라 늘 변경邊境으로 남아 있었다. 평안도 땅이 대개 그렇듯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을 갖고 있었다. 인접한 의주군에서 강남산맥江南山脈의 한 활기가 다리를 뻗듯이 뻗쳐와 표고 477m의 용골산을 만들었지만 높은 산은 군 전체에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서북 사람들은 강인하고 드세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달리 용천 사람들은 인심이 순후한 편이었다. 특히 서해에서 가까운 곳, 곡창지대 사람들은 더욱 그러했다.
용천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은 용암포였다. 압록강 하구에 있는 이 포구는 군郡 소재지에서 30리쯤 떨어져 있으나 러시아의 불법 점령 이후 크게 번창했다. 이곳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날카로워지고 러일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쟁은 제물포 항구의 해전과 여순항의 전투로 시작되었지만 평안북도, 특히 용천군 일대가 승패를 가르는 전쟁터로 바뀌었다.
왕조시대에는 서북 출신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고 차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로 인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차별은 더 강화되었지만 나라가 일본의 위협을 받으며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서북인들은 조상들이 그랬듯이 분연히 일어나 구국의 횃불을 들었다. 그것 중 하나가 옥산재玉山齋였다. 을미년(1895년)에 일본 무뢰배들의 왕비 시해가 일어나자 토왜보국討倭保國을 외치며 의병을 일으켰던 유림의 거두 유인석柳麟錫이 힘이 다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간 것은 1896년이었고 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00년이었다. 이 무렵에 용천의 선각자들은 옥산재를 만들어 그를 초빙하고 이곳을 중요한 의병투쟁의 근거지로 만들어갔다. 이런 과정에서 옥산재에서 의병장 전덕원全德元이 배출되었다. 그는 유인석의 명을 받들어 각 나라 공사公使에게 격문을 보냈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황주黃州에 유배되었으나 탈출해 만주로 망명했다. 용천 사람들은 변경인邊境人으로서 차별을 받아왔지만 그렇게 조국이 위기에 처하면 애국혼을 불태웠다.
장지락의 집은 평안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289번지에 있었다. 『아리랑의 노래』 1) 에서는 그의 고향을 평양 교외 차산리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1930년 북경北京2)에서 중국 국민당 공안국에 일차로 체포되어 일본인들에게 넘겨진 뒤 천진天津 일본 영사관에서 찍은 사진의 앞가슴에 걸고 있는 널빤지에 이 주소가 적혀 있다.3) 탁월한 전기이자 기록인 『아리랑의 노래』에 왜 그의 고향마을이 잘못 기입돼 있을까. 『아리랑의 노래』는 지금의 중국 근대사 연표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저자인 헬렌 포스터 스노4)는 장지락 개인 신상에 대한 중요한 것들을 일부러 틀리게 기술했다. 원고가 국민당 공안국이나 일본군에 넘어갈 경우 그에게 닥칠 위험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녀는 초고에 그의 모국을 몽골이라고 썼었다. 뒷날(1981년) 그의 아들 고영광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1) 님 웨일스의 『아리랑』 의 원서 제목은 Song of Ariran:The LifeStory of a Korean Rebel(New York: John Day Company,1941)이다. 신재돈이 1946년 『신천지』 에 번역 연재할 때는 「아리랑—조선인 반항자의 일대기」 라고 제목을 붙였고, 1984년 동녘출판사에서 발간한 한국어판 제목은 『아리랑』 이다. 1986년 서울의 언어출판사에서도이태규 번역판으로 이 책을 발간한 적이 있는데, 제목은 역시 『아리랑』 이었다. 본 책에서 주요 텍스트로 참고한 것은 동녘 판 『아리랑』 이며, 원서를 지시할 때는 이하 『아리랑의 노래』 로 표기한다.
2) 김산 생존 시 지명은 북평(北平)이었으나 이 책에서는 모두 북경(北京)으로 표기한다.
3) 백선기∙홍정선, 「한 장의 사진과 김산의 생애」, 『문학과 사회』1998년 겨울호, 1516쪽.
4) 헬렌 포스터 스노(Helen Foster Snow)는『아리랑의 노래』를 쓴 님웨일스(Nym Wales)의 본명이다.
서북의 곡창이라는 용천평야의 한가운데 위치한 하장동. 70여 가구의 집들이 남향으로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사방을 휘휘 둘러보아도 벌판이었다. 산이라고는 북동쪽 10리의 덕봉산, 남쪽 30리에 용골산이 보일 뿐이었다. 마을 안에는 겨우 어른 키로 두 길쯤 되는 둔덕, 소나무 가득한 구릉이 있을 뿐이었다. 마을 앞으로 나서면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용골산까지는 거침없이 펼쳐진 들판. 그 가운데로 장천長川이라고 부르는, 강보다는 작고 시내라고 부르기에는 큰 하천이 뱀처럼 구불구불 지나갔다. 가뭄에는 걸핏하면 말라버려 사람들의 애를 태우게 하지만 농사짓기에는 그런 대로 좋았다. 마을 뒤편에는 뽕나무밭이 있었다. 토질이 좋아 잎사귀에 윤기가 났으며, 그래서 누에치기가 알맞은 부업이 되었다. 마을의 모습은 인근 마을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대개 밥을 굶지 않았으며 몸에 궁기가 들지 않았다.5)
5) 2005년 12월 21일 인천 부평구 산곡동의 장원준 선생 증언. 장 선생은 1929년 김산의 고향인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의 같은 인동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1947년에 월남했다. 선생은 하장동이 늘 쌀밥을 먹는 부자 동네였으며 전체 70여 가구 중 타성은 한두 가구밖에 없는 인동 장씨 집성촌이었다고 증언했다.
『용천군지龍川郡誌』는 하장동의 저명한 지형지물로 마을 앞에 펼쳐진 무논지대를 관통해 나가는 ‘대정大正수리조합’ 수로를 지적하고, 그로 인해 땅이 비옥해 마을의 경제 형편이 넉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정수리조합 수로가 완성된 것은 1918년이므로 그가 태어났을 때는 벌판이 장천에 흐르는 물에 의지하는 천수답이었을 것이다.
하장동에서는 용암포가 10리쯤 거리에 있었으며 4일과 9일에 장이 열렸다. 하장동 마을의 물산은 거의 쌀뿐인지라 마을 사람들은 생활필수품을 사기 위해 한 해 72회 열리는 용암포 5일장에 수십 명이 나가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거기 있는 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용암포가 개항한 뒤에는 저절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빠르게 마을에 전해졌다.
동녘 판 『아리랑』은 장지락이 러일전쟁을 피해 산속에 있을 때 태어났다고 기술했으나 지명은 안 나와 있다. 그곳은 덕봉산이 거의 확실하다. 용천군 북중면은 용천평야 가운데 위치한다. 사방이 지평선만 보이는 평지여서 산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다. 하장동에서 살다가 월남한 분들은 하장동에서는 도무지 전란을 피할 곳이라고는 이 산밖에 없다고 말한다.6)
6) 같은 날, 장원준 선생의 증언.
그의 본명은 오랫동안 장지락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1998년, 그가 1931년에 천진의 일본 영사관에서 죄수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 발굴 공개되었다.7) 거기에 이름이 장지학張志鶴으로 씌어져 있었다. 가명들도 여러 개 적혀 있는데 그 중에 ‘장지락’도 있어 그것도 가명 중 하나였을 것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진 자료를 공개한 백선기와 홍정선은 덧붙인 글에서 “고향 가까운 경찰서에서 조만간 심문을 받게 될 그가, 금방 들통날 일인데도 장지학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을까? 『아리랑의 노래』에는 일본영사관에서, 조선총독부에서 보내온 기록을 포함해서 수많은 서류를 펼쳐놓고 그의 이름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가 이름을 속일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보다는 고향에서 사용한 본명은 장지학이고 중국에서 사용한 모든 이름이 가명인 것은 아닐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 견해처럼 그의 호적상 이름은 ‘장지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7) 백선기∙홍정선, 앞의 책, 1516쪽.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북경 살인사건’에 대한 해명으로 조선일보사를 통해 진상조사위원회에 보낸 자필 편지8)에 ‘장지락’이라고 썼고, 일본 관헌 자료들과 헬렌 포스터 스노의 인터뷰 노트, 형제처럼 가까웠던 동지 김성숙金星淑이 회고록9)에서 아무 다른 언급 없이 그 이름을 사용했으며, 그와 정식 결혼한 중국인 아내 조아평趙亞平이 그의 이름을 끝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랑』 출간 이후 우리에게 그것이 친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의 이름이 비록 호적명과 다를지라도 ‘장지락’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하다.
8) 『조선일보』1929년 11월 6일자 2면.
9) 김성숙 회고록(이정식 대담), 「한국현대사, 중도좌파의 비극적 종말」,『신동아』1988년 8월호.
장지락은 지하활동을 하면서 열 개가 넘는 많은 가명을 썼다. 장북성張北星, 장북신張北辰, 장명張明, 유청화劉淸華, 유금명劉錦明, 유금한劉錦漢, 유한산劉寒山, 유한평劉漢平, 한국유韓國劉, 유자재柳子才, 이철암李鐵庵, 우치화于致和, 손명구孫明九, 김산 등이었다. 그리고 북성北星, 염광炎光, 황야荒野 등의 필명도 사용했다. 이 가명과 필명들은 그가 마르크스시스트이며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김산이라는 마지막 가명은 1937년 헬렌 포스터 스노와 인터뷰하며 만든 것이다. 많은 가명들 중 중국공산당 조직에서의 대표적인 이름은 장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쉽지만 그의 부모 형제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다. 4남 1녀였으며 넷째 이름이 장지홍張志洪이었다는 사실만이 그의 아내 조아평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조아평은 뒷날 1932년 그가 고향집으로 편지를 보냈고, 그 답장이 넷째인 장지홍의 이름으로 왔음을 회상하였다.10) 『아리랑』에 형제들의 이름이 없는 것 역시 그의 신분을 숨기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10) 李恢成∙水野直樹, 『「アリラソの歌」覺書』(岩波書店, 1991), 443쪽. (이 책은『아리랑 그 후』라는 제목으로 동녘에서 1993년에 출간됨)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시기에 월남한 용천 출신 인사들은 1968년에 『용천지』를, 1998년에는 『용천군지』를 발간했다. 그러나 두 책에는 독립투사 장지락에 대한 단 하나의 정보도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동 장씨 용천파들은 월남한 뒤에 족보를 부활시켰는데, 아쉽게도 월남한 가계만 넣고 북한에 남은 가계는 빼버렸다. 거기에는 장지락도 장지학도 장지홍도 없다.
오랫동안 장지락에 관련된 비밀자료를 발굴해온 북경 중국 중앙공산당학교의 최용수 교수는 그가 중국 경찰에 체포당해 작성한 자술서를 입수 공개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아리랑』에는 그가 신의주 경찰서로 넘겨져 심문을 받으며 부모 형제 이름, 그동안 만난 사람들, 보통학교 선생님들까지 샅샅이 물어 대답해야 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 심문 조서를 찾거나 용천군의 옛 호적부를 열람할 수 있다면 그의 가계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가출한 수재
장지락은 별 탈 없이 자랐다. 그가 아직 어렸을 때 큰형이 결혼해 아이들을 낳으면서 식구가 늘어났다. 형수는 기독교 신자였는데 시집와서도 예배당에 다녔다. 며느리의 영향을 받아선지 어머니도 예배당에 다녔다. 인근 마을 추정동秋亭洞에 초가집으로 된 작은 교회가 있었다.11)
11) 같은 날, 장원준 선생의 증언.
집은 방 두 개와 광 셋, 그리고 헛간이 있는, 당시로서는 보통 규모의 북방식 초가집이었다. 큰형네 식구가 늘어나면서 늘 복작거렸다. 그래서 작은형은 여름이면 누에를 치는 헛간에서 잠을 잤다. 큰형은 마을의 서당을 다녔고, 작은형은 1906년에 개교한 용암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큰형이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데 비해 작은형은 성정이 부드럽고 착했다. 늘 어린 동생과 놀아주기를 좋아했으며, 동무들과 놀 때도 함께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동생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심심풀이로 숫자와 셈을 가르쳤다. 어린 동생이 셈을 척척 해내자 한글과 자신이 아는 한자들을 가르쳤다.
“얘는 수재예요. 뭐든지 금방 알아들어요.”
작은형은 부모와 큰형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막내의 총명함에 크게 기뻐하였지만 아버지와 큰형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버지는 농토 1정보를 가진 자작농이었고 누에도 쳤지만 항상 빚에 허덕거렸다.12) 큰형은 제 처자식이 여럿 달린데다가 사업을 일으켜보려는 야심이 커서, 어린 막내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는 마을 앞 드넓은 들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정수리조합 수로 공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 뒤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신작로를 놓으려고 측량 기사들이 다녀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을 앞 들판이 장차 수리안전답으로 바뀔 때에 대비해 기계방아를 사서 정미업을 해보자는 계산을 갖고 있었다.
12) 『아리랑』에는 농토가 1정보밖에 안 되었고 누에를 쳐서 60~80원의 수입을 올리는 매우 곤궁한 형편이다고 기술돼 있다. 그 정도라면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빈농은 아니었다. 헬렌 포스터 스노가 광대한 경작지에서 농사를 짓는 미국을 염두에 두고 그런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지락은 어머니 손을 잡고 추정동 교회에 나갔다. 성경책을 척척 읽었다. 목사가 놀라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보통아이들과 다른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이입니다.”
그는 가족과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총명하다는 평을 받으면서 자랐다.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1910년 8월 29일, 온 마을 사람들이 대성통곡했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박이는 지락에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해주었다.
“나라가 망했단다. 일본에 우리나라를 빼앗겼단다.”
지락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엉엉 울었다. 그러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이 매우 슬픈 일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 무렵,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거국가去國歌〉가 떠돌고 있었다. 도산이 강제합병 직전 체포를 피해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소금 배를 타고 청나라로 탈출하며 남긴 노래였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쏘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13)
13) 이광수, 「도산 안창호」, 『이광수전집 13』(삼중당, 1962), 46쪽.
어린 지락은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과 놀았다.
나라가 망한 것이 슬픈 일이라는 사실을 그가 눈으로 확인한 건 다음해 봄에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어느 날, 허리에 칼을 찬 일본인 순사들이 대문을 걷어차 열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주먹으로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어린 지락은 울부짖으며 순사들에게 달려들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다. 어머니가 맞은 것은 예방주사를 맞으라는 명령이 있었는데도 맞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락은 그때 일본 사람을 처음 보았는데, 어머니에게 주먹질하는 모습은 잊지 못할 유년의 기억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지락은 다음해 여덟 살이 되었고, 봄에 용암포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 하장동에서 학교까지는 10리가 조금 넘는 거리였다. 또래 아이들은 매일 걸어 다니기가 힘에 부쳤지만 지락은 거뜬하게 걸어 다녔고 다리가 튼튼해졌다.
어느 날, 지락은 학교가 파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 5일장이 열리고 있던 용암포의 저자로 갔다. 장 구경도 하고, 장을 본 뒤 마을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우마차나 달구지를 얻어 타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가득한 저자의 한복판, 남사당패가 연희演戱를 하고 있었다. 지락은 마을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 옆구리 사이로 머리를 디밀고 구경했다. 그때 갑자기 이마에 붉은색 헝겊 띠를 맨 남자 하나가 우마차 위에 서서 두툼한 전단 뭉치를 허공을 향해 던져 흩뿌렸다. 그러고는 두꺼운 기름종이로 만든 나팔통을 입에 대고 벽력같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서간도에서 온 의병입니다! 나라 잃은 백성보다 불쌍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섬 오랑캐의 노예로, 종으로 사는 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서북인의 정신은 꺾일지언정 구부러들지 않습니다. 나라 찾는 일에 분연히 일어서십시오!”
그러고는 흰 광목을 펴놓고 무명지를 깨물어 ‘조선독립만세’라는 여섯 글자를 혈서로 썼다.
“언제 일어서야 한단 말이오?” 하고 장꾼 한 사람이 물었다.
“곧 때가 옵니다. 그때는 민족 전부가 일어서야 합니다.”
청년이 혈서 쓴 광목 양끝을 잡아 머리 위에 올리며 외쳤다.
“당신은 어느 의병단에 속해 있소이까?”
다른 장꾼이 물었다.
“나는 이동휘李東輝 장군 부하로 강화 진위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군을 모시고 간도에서 독립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동휘 장군에 대해 아시지요? 아전의 몸으로서 탐횡을 일삼는 군수에게 화로를 뒤집어씌우고 탈출하신 분, 이용익 어른의 천거로 무관학교를 나왔고 암행어사가 되어 부패한 군수 열넷을 파직시킨 분, 그리고 조국 독립에 일신을 바친 분입니다.”
그때 어디선가 휘익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동패 하나가 숨어 있다가 위험신호를 한 것이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조국 독립만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동휘 장군의 이름을!”
간도에서 온 남자는 붉은 헝겊 띠를 풀고 민첩하게 사람들 속으로 묻혀버렸다. 저자를 순찰하던 헌병 경찰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달려와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거렸지만 이때는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은 어린 장지락에게 인상 깊은 장면으로 기억되었다. 지난해 예방주사를 맞지 않았다고 거의 죽도록 어머니가 일본 관리에게 매를 맞은 장면처럼. 그리고 그는 붉은 헝겊의 이마 띠를 맨 남자가 잊지 말라고 말한 이동휘 장군의 이름을 저절로 외게 되었다.
이 무렵, 집안에 변화가 생겼다. 큰형이 농사일도 하면서 작은 정미소를 만들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인근 마을에 첩을 두었고 자신의 처자식은 집에 팽개쳐두고 첩의 집에 가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빚에 몰리면서도 술을 많이 마셨다. 집에 들어와서는 트집을 잡아 차남과 지락에게 매질을 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차남과 지락의 머리를 주먹으로 툭 쥐어박으면서 소리쳤다.
“웬수 같은 놈들아, 꼴도 보기 싫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 화나셨다. 맞지 말고 도망가라.”
작은형은 얼른 도망쳤지만 지락은 꼿꼿이 서서 맞으며 저항했다.
“아버지가 낳아놓고 왜 때려요?”
그래서 더 얻어맞았다.
작은형은 보통학교 졸업 후 집에서 농사를 거들고 누에를 쳤으나 끝내는 아버지와 큰형에 반발해 돈을 훔쳐 가출해 경성까지 걸어서 갔다.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이제부터 그놈 이름을 입 밖에 내지도 마라.”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여 소리쳤다.
작은형은 이를 악물고 자신의 길을 열어나갔다. 상업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인 양화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도제徒弟가 되었다. 구두 재봉틀 기술을 익히려고 밤잠을 안 자며 애를 썼다.
1916년, 장지락은 열두 살로 보통학교 졸업반이 되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생활은 성실하지 못했다. 아이들과 자주 싸움을 벌였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텃세를 하는 용암포 아이들을 상대로 악착같이 싸워 이겼다.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은 옆에 작은형이 없고 아버지와 큰형이 만날 때마다 야단만 치고 매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중 국경이 가까운 터라 이따금 독립투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돌았다. 어느 날 어떤 아이가 소곤소곤 말했다.
“이틀 전 독립군 열 명이 쳐들어와서 일본 놈 여섯을 죽였대. 독립군은 하나만 죽었고 나머지는 압록강을 건너 사라졌대.”
다른 아이가 비밀을 지키라고 다짐하고 독립군인 자기 형 이야기를 했다.
“그저께 형이 집에 와서 묵었어. 군자금을 모금하러 왔대. 다섯 명의 동지들과 함께 평양 근처까지 가서 보초 놈들을 쏴 죽였대. 논 속에 숨어버려 왜놈 수색대가 찾지 못했대.”
또 다른 아이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촌형은 서간도 신흥학교에 들어갔대. 학비 도 안 받고, 왜놈들하고 싸울 군사교육을 시켜주는데 압록강 건너면 멀지 않은 곳에 있대.”
장지락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언젠가 용암포 저자에서 본 의병대원의 날카로운 눈빛과 그의 대장이라는 이동휘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었다. 그럴 때에 아이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 어깨동무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락은 한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이틀 전 깊은 밤에 아버지가 누구를 만난 일 때문이었다. 전날 덜 익은 참외를 먹고 배탈이 나서 뒷간에 다녀올 때였다. 아버지가 어두운 담벼락 앞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 푼도 못 내놓겠다는 거군요.”
“그렇소.”
“좋소이다. 대신 비밀은 지키시오. 발설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거요.”
그리고 잠시 후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가 휙 그의 앞을 지나 고샅으로 사라져버렸다.
말소리만 불확실하게 들었지만 이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독립군의 군자금 요청을 거부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이해에 작은형이 구두 만드는 기술을 익혀가지고 경성에서 돌아왔다. 평양에 들러 재봉틀과 가죽을 사서 용암포로 돌아와 양화점을 열었다. 용암포에서는 재봉틀을 이용한 맞춤구두 제조가 처음이었으므로 사업은 번창했다.
그런데 그 무렵에 지락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일본 헌병 보조원의 아들이 으스대는 것을 보다 못해 주먹질을 하며 싸웠다. 그 아이의 코뼈를 분질렀는데 콧날이 주저앉을 정도였다. 그 바람에 헌병대에 불려가 혼이 나고 많은 돈을 물어준 아버지가 화를 내며 몽둥이를 들었다.
“이놈,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 거냐!”
매를 피하지 않고 대들던 지락은 소리쳤다.
“왜놈들을 때려잡는 독립군이 될 거예요.”
“뭣이라구! 이놈이 집안 망해먹을 놈이구나!”
아버지는 심하게 매질을 했고 지락은 매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
용암포의 작은형 가게로 가자 작은형은 호통을 쳤다.
“이 녀석아, 내년 봄이 졸업인데 학교를 관둘 거냐?”
장지락은 머리를 끄덕였다.
“죽어도 집엔 안 들어가요. 아버지는 독립군 군자금은 안 내고 술만 마시잖아요.”
아우로부터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은 작은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압록강 건너에 있는 신흥학교, 사실 나도 거기 가고 싶었는데 포기했단다. 독립운동을 해도 일본을 꺾지는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본은 청나라를 이기고 아라사를 이긴 나라다. 이 이야긴 다시 입 밖에 내지 마라. 우리 식구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 다 붙잡혀 간다. 알았느냐?”
지락은 비밀을 지킨다는 뜻으로 형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작은형은 그의 마음을 아는 듯 허리의 전대를 풀어 돈 8원을 쥐어주었다.
“제발 부탁이니 이 돈 다 쓰거든 집으로 들어가거라. 열흘 지나 들어가면 아버지도 화가 풀리시겠지.”
그러나 지락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해질 무렵 동급생을 만났다. 그가 가출한 것을 알고 친구는 자기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주었다. 다음날 부자로 사는 친구의 친척이 그 집에 들렀고, 지락이 학교 성적이 우수하나 처지가 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우리 집은 아내와 어린아이 하나뿐이니 적적하지. 우리 집에서 중학 입시 공부를 해라.”
지락은 평양에 있는 중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했으나 입학시험에는 떨어졌다. 그는 그 집에서 넉 달 동안 허드렛일을 했다. 어느 날 그 집의 안주인과 저자에 갔다가 작은형과 마주쳤다. 그 순간 저자 골목으로 숨었으나 형은 쫓아와 손을 잡았다.
“어머니가 슬퍼하신단다. 하지만 들어가기 싫거든 내 집에 들어앉아 공부를 해라.”
지락은 작은형 집으로 갔다. 형의 구둣가게 일도 보고, 어린 조카 공부도 가르치며 중학 입시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봄 평양의 숭실중학에 입학했다.14)
14) 『아리랑』에는 김산이 학생수 3백 명 정도인 평양의 기독교계 중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했다. 신분이 드러날 것을 염려해 학교명을 숨긴 것으로 보이는데, 숭실중학교가 확실하다. 역시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인 광성학교는 고등보통학교라는 명칭을 썼다. 숭실학교는 그가 입학한 1918년에 2백70명, 다음해에는 3백2명이 재학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입학동기였고, 역시 3∙1만세시위로 제적당했다.
3·1만세운동과 일본 유학
장지락은 공부에 열중했다. 숭실중학은 기독교 북감리회 선교사들이 1897년에 세운 학교로서 경성의 배재학교, 이화학교와 더불어 가장 명예로운 전통을 쌓아가고 있는 명문학교였다. 민족정기도 드높아 이미 을사보호조약반대운동, 105인사건15), 그리고 조선국민회사건 등의 중심에 이 학교의 교사와 졸업생, 재학생 들이 들어 있었다. 졸업생엔 편강렬片康烈과 차이석車利錫과 조만식曺晩植, 교사인 안세환安世桓 등이 있었다.
15) 1911년 일제가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민족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 조작해 우국지사 105명을 투옥한 사건.
편강렬은 소년 시절에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여 재기병한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에 들어가 선봉장을 지내고 부상당했다. 부상을 치료한 뒤 뒤늦은 나이로 숭실학교에 입학했고, 재학 중 105인사건에 가담해 옥고를 치렀다. 차이석은 숭실학교를 나와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도산 안창호와 더불어 대성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과 애국사상 고취에 진력하고 있었다. 조만식은 청년기에 포목상을 열어 거부가 되었으나 23세에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도쿄東京의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와 메이지明治대학에 유학했고, 이승훈이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 교장을 맡고 있었다. 안세환은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숭실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평양의 기독교 청년들과 이 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 조선국민회를 조직하는 데 큰 몫을 했다. 장지락은 선배들이 자랑스러웠으며, 마음속에서 그들의 이름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중에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춘원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과 『개척자』도 있었고, 세계문학 대문호들의 소설들도 있었다. 그는 특히 톨스토이의 『부활』을 감명 깊게 읽었다.
귀족 청년과 그에게서 버림받아 창녀가 된 여인의 영혼이 부활하는 내용으로 작가의 정신세계와 사상이 웅장하게 펼쳐지는 이 소설에 매료된 지락은,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특히 제3부에서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카튜샤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관의 폭이 사뭇 넓어졌으며, 그 뒤 톨스토이에 빠져들었다. 톨스토이가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이면서 인류의 이상에 대해 등불을 든 사상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책에 묻혀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 그 덕분에 그의 독서 대출카드 기록은 한 해 동안 백 권을 넘어섰다. 책들은 대부분 일본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일본어 독해에 능숙해졌다. 그리고 시도 몇 편 써보았다.
그런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숭실중학 학생들의 애국정신은 마침내 3·1만세시위를 통해 불타올랐다. 당시 중학교는 오늘날의 고등학교 과정까지 합해진 편제를 갖고 있었다. 고급 학년 학생들은 대부분 스무 살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결혼하여 자녀를 둔 학생들도 있었다. 스승 한 분이 말했다. “오늘은 우리 조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날이다. 평화적 시위가 이뤄진다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베르사유 강화회의 참석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교정에 태극기를 드높이 게양했다. 청천 하늘에 휘날리는 빼앗긴 조국의 국기.16) 그것은 장엄하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젊은 학생들은 그것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철철 흘렸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앞장서자고 다짐하며 교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16) 일설에 의하면 숭실학교의 대선배인 조만식이 연설을 하며 태극기 게양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 후 이 태극기는 모펫 교장에 의해 은밀히 미국으로 보내졌으며, 1974년 한국으로 돌아와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서울보다 한 시간 빨리 오후 1시부터 시작되었다. 수천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 군중을 앞에서 끄는 것은 청년학도들이었다. 숭실중학과 광성고보光成高普17) 고급 학년 학생들이 이 일을 맡았고, 2학년 진급을 앞둔 장지락도 만세시위에 끼어들었다. 학생들 대부분이 극성스럽게 시위에 나선 숭실중학은 3월 말까지 휴교에 들어갔다.
17) 1894년에 미국의 기독교 북감리회가 세웠으며 숭실학교와 함께 서북지방의 명문학교였다. 독립투사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3월 11일까지 평양의 만세시위로 구속된 사람들 4백71명 중 이 학교 재학생은 30여 명에 달했다. 장지락은 3월 7일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다가 구속되어 사흘간 구류를 살았다.
유치장에서 콧수염이 거뭇한 고급 학년 선배들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말했다.
“왜놈들이 서약서를 쓰라면 쓰고 어서 유치장을 나가자. 숭실학교 다니기도 틀렸으니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자. 신흥무관학교로 가자.”
“그래, 그 학교는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선생 6형제가 6천 석이나 되는 토지, 돈으로 따지면 40만 원18)이나 되는 전 재산을 팔아서 세웠대. 거긴 독립전쟁론의 실현 장소야.”
“나도 거기 갈 생각이었어. 신흥무관학교는 우리들을 부르고 있어. 그 학교는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라는 데 있대.”
그런 말을 들으며 지락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18) 연구가들은 2000년대 화폐가치로 비교하면 대략 600억 원에 이른다고 환산한다.
다른 학생들처럼 장지락은 서약을 했고, 급히 달려온 작은형이 보증서를 쓴 뒤 석방되었다. 총독부 요구로 학교에서 강제 제적이 된 상태라 용천의 집으로 가서 책을 읽으며 지냈다.
고향집의 사정은 나아져 있었다. 일본인들이 앞장서 여러 해 동안 공사를 벌여온 대정수리조합 수로가 개통되어, 하장동 마을 앞의 끝이 안 보이도록 드넓은 벌판이 수리안전답으로 바뀌었다. 마을 뒤로 신작로가 뚫려, 용천역이나 용암포까지 농업 생산물을 자동차에 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일이 한결 쉬워졌으며, 큰형의 정미소 일도 번창하고 있었다.
고향집에서 한 달을 보낸 장지락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학을 하며 대학입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도쿄가 적의 수도이긴 하지만 거기 가서 공부해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조만식 선생의 영향이었다. 선생은 일본의 명문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조국 독립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으며, 3·1만세시위 당일 모교인 숭실학교에 나타나 후배들을 격려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그의 말은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락이 유학을 가려 하자 아버지가 반대했다.
“이놈아, 동경 유학은 고관대작이나 대지주의 아들이 하는 거다. 그리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고 엉뚱하게 독립운동에 빠지면 신세 망친다, 이놈아.”
그러나 작은형이 그의 편을 들었다.
“나는 찬성한다. 넌 머리가 좋으니까 내가 하지 못한 공부를 대신해다오. 동경으로 가거라.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어서 돌아오너라.”
그러면서 백 원이라는 큰돈을 내놓았다.19) 일본에서 5개월쯤 견딜 만한 학비였다. 아버지와 큰형이 반대했지만 작은형은 아우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19) 『동아일보』1920년 4월 24일자 3면에 실린 공설시장 물가 시세는 쌀 한 말이 4원 50전이었다.
“고마워, 형. 의사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형의 뜻 잊지 않고 꼭 열심히 공부할게요.”
지락은 그렇게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
도쿄에 도착한 그는 두 친구와 함께 사글세방을 얻었다. 도쿄는 물가가 비싸서 작은형에게서 받은 돈이 곧 바닥이 날 것이었으므로 신문배달 일자리를 얻었다. 아침마다 80부의 신문을 배달하면 월 10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일하며 대학생에게서 화학과 수학을 배워, 아시아권 최고의 대학이라는 도쿄제국대학 입시준비에 들어갔다.
도쿄에는 처지가 비슷한 조선인 고학생들이 수백 명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일본인 고학생들도 있었고 중국인 고학생도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절반쯤을 해결하고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 벌어서 마련했다. 조선인 고학생들이 가장 빈곤했다. 빈털터리이면서도 악착같이 공부하려고 버티는 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지락은 조선인 고학생 중 막내 꼴이었다. 그래서 늘 대여섯 살 더 먹은 선배들과 어울려야 했다. 선배들은 어린 나이에 객지에 던져져 고생하는 그를 딱하게 여겼고, 두툼한 참고서 한 권을 열흘 안에 소화해버리는 것을 알고 기특히 여겨 한껏 보호해주려 했다.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 일거리가 생기면 그에게 주려고 했다.
지락은 객지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객지란 같은 종種의 동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군생하는 초원과도 같아서 서로 의지해야 이겨나갈 수 있는 곳이었다. 대여섯 살 이상 더 먹은 고학생들과의 교유는 그를 빨리 성숙하게 만들었다. 그의 정신세계도 그렇게 나이보다 앞서갔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부유한 계층의 자제들, 또 하나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공부하는 고학생들이었다. 부유층은 고학생들을 ‘룸펜 프롤레타리아’라 불렀다. 고학생들은 부유층을 ‘달걀 껍질’이라고 부르고 자기들을 ‘룸펜 인텔리겐치아’라고 불렀다. 달걀 껍질이란, 그들 부유층 자제들이 좋은 하숙에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하여 겉은 희고 깨끗하지만 깨지기 쉽고 속이 허약하다는 뜻이었다.
도쿄에 있는 수백 명의 ‘룸펜 인텔리겐치아’ 중 하나인 장지락은 같은 부류 고학생들과 함께 ‘달걀 껍질’들을 경멸하며 지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녀석들을 혼내는 건 주먹 한 방이면 충분해.”
부유층 자제들과 논쟁을 할 때는 그들 룸펜 그룹이 늘 우위에 섰다. 부유층 자제들은 아무래도 일제와 타협한 부형의 지원을 받는다는 약점이 있었고, 룸펜들은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지락이 속한 룸펜 인텔리겐치아는 당시 서서히 일본 지식층 속으로 파고들던 신사상에 젖어 들어갔다. 1917년 시작된 러시아의 10월혁명이 거의 성공을 거둔 터라 마르크시즘이 새로운 물결로 밀려들고 있었고,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의 아나키즘 사상이 신선한 바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장지락은 그 두 개의 물결과 바람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속한 룸펜 그룹은 아직 이론적 소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그것을 민족운동의 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장지락은 나이 많은 룸펜 동지들보다 독서를 많이 했기에 그들과의 논쟁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나 장지락은 도쿄의 룸펜 생활을 걷어치우기로 결심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와 이것저것 허드렛일을 구하기 어렵다고 명분을 내걸었지만, 크로포트킨의 고향 모스크바,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고 있는 러시아로 가고 싶어서였다. 그 나이 소년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갑자기 다가온 경이로운 것에 매혹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되기는커녕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몇 달 만에 그만두니 작은형의 돈과 세월을 허비한 셈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유학 생활을 3~4년 해온 학생처럼 더 능숙해진 일본어 독해와 회화 실력이었다.
두번째 가출, 압록강을 건너다
장지락이 고향집에 돌아오자 가족들은 겨울이 다가와 귀향한 것으로 믿어주었다. 그는 속마음을 숨겼다. 봄이 오면 다시 공부하러 갈 것이라고 말하고 천연스럽게 책 읽기에 열중했다. 작은형이 자기 집에 와서 머물라고 했고, 그는 형을 따라 용암포로 갔다.
그가 일본에 머물던 1년 사이 용암포는 일본군의 군항으로 자리 잡아 더 커졌다. 항구에는 군함이 많아졌고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군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시가지에는 일본식 간판을 단 점포들이 늘어났고, 일본인 거류민들도 많아져 있었다. 형의 구두가게에는 일본인 손님들도 많이 왔다.
일본인 구두 기술자의 도제 노릇을 한 덕에 겨우 장사에 필요한 일본어 회화 몇 마디를 구사하던 작은형은 아우가 나서서 능숙하게 일본인들과 대화를 하자 입이 벌어졌다.
“용암포에 너처럼 일본말을 잘하는 조선 사람은 없을 게야.”
어느 날, 작은형이 2백 원을 주며 말했다.
“아버지가 급전이 필요하신 모양이다. 네가 하장동 집에 다녀오너라.”
장지락은 작은형 집을 나서는 길로 곧장 고향집으로 가지 않고 이리저리 걸었다. 갈등에 휩싸였다.
‘저절로 기회가 왔으니 이 돈을 갖고 도망치자. 돈을 훔치는 것은 죄이지만 나라의 장래를 위해 쓴다면 의로운 일이다. 군자금을 거부하는 아버지와 큰형, 그리고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작은형을 대신해서 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용암포 쪽으로 나가 압록강 하구를 어슬렁거렸다. 12월 중순, 국경의 날씨는 귀가 얼어 떨어질 듯 추웠다. 그러다가 작은 포구에서 대하大蝦를 팔러 압록강 건너편 안동安東1)으로 가는 밀매선을 만나,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고 둘러댔다.
1) 안동(安東), 압록강에 연한 만주의 국경도시. 지금은 단동(丹東)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콧수염을 기른 사람 좋은 도사공이 그의 말을 믿고 배에 태워주었다.
“서간도 땅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고? 악질 점산호나 얼주둥이놈2)에게 착취당하며 머슴살이나 하구 있을 텐데 찾아간들 뭐 하느냐.”
장지락은 안동에서 봉천奉天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운임은 한 단계 오를 때마다 두 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는 최종 목표를 모스크바에 두고 있었다. 거기 가기 위해서는 만주에서 기차를 두 번 갈아타고 하얼빈合爾濱까지 간 다음, 거기서 러시아령 연해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고, 거기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돈을 아끼기 위해 3등칸을 탔다. 경부선 열차의 3등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도쿄까지 가면서 갈아타보았던 일본 기차의 3등칸과는 비교할 수가 없이 지저분했다. 추운 겨울인데도 오줌 지린내가 나고 바닥은 오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목욕을 안 한 듯 지저분한 사람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2) 占産戶∙二租東, 만주 지역에서 중국인 지주와 마름을 가리키던 말.
안봉선安奉線 철도 7백 리를 그는 변소 옆 바닥에 웅크려 앉은 채 참으며 갔다. 중국말을 거의 한 마디도 하지 못했으므로 벙어리처럼 머리를 끄덕이고 내저어 의사소통을 하며 갔다. 음식은 조粟와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이나 만두, 그리고 절인 오이를 먹었다.
봉천역에서 기차를 갈아탔다. 기차는 이틀 동안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다. 그는 딱딱한 나무 좌석에 등을 기댄 채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광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역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기차가 하얼빈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낙심하여 한숨을 쉬어야 했다. 기차가 러시아 땅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동시베리아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어지러운 정황에 빠져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황제파인 백군白軍과 볼셰비키파인 적군赤軍은 내전에 돌입한 상태였고, 동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도 격전이 벌어졌다. 게다가 1918년부터는 국제간섭군이라 하여 러시아혁명을 방해하려고 미국, 프랑스, 일본군이 대규모로 출병하고 있었다.
목표를 잃은 장지락은 갈 곳이 없었다. 여진 말로 ‘그물 말리는 곳’을 뜻한다는 하얼빈. 이곳에서 기차를 타면 한나절 만에 러시아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발목이 묶인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풍 건물들이 즐비해 이국 정취를 느끼게 하는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역 구내도 돌아보았으며,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만주 땅을 적시고 흐른다는 송화강松花江에도 가보았다.
송화강은 두껍게 얼어 있었다. 얼음낚시가 한창이었는데, 둑을 따라 걷다가 우연히 조선 동포들이 화톳불을 놓고 어한禦寒을 하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두툼한 개가죽 외투를 입은 중년사내가 가랑이를 벌리고 서서 불을 쬐며 말하고 있었다.
“나는 소금 밀매상일 뿐이지만 홍범도 장군이 지금 연추延秋3)에서 최돌쏘오 어른의 지원을 받아 독립단이라는 병대를 꾸리고 있는 걸 알고 있소. 피 끓는 젊은이라면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바치는 것이 마땅한 일이오.”
지락은 이 사내를 붙잡으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3) 러시아 연해주 한러 국경에 인접한 포시에트 지역에 있던 옛 한인 집단거주 지역. 최재형과 안중근 등의 항일투쟁 거점이었으며 1937년 한인 강제이주 후 크라스키노로 지명이 바뀌었다.
“최돌쏘오가 누구요?” 하고 어떤 낚시꾼이 물었다.
“연해주에서 가까운 하얼빈에 살면서 최돌쏘오 어른을 모른다면 조선 사람이 아니지. 어디서 왔소?”
“장춘長春에서 왔소.”
개가죽 외투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홍범도 장군도 모르겠군. 홍 장군은 총바치(사냥꾼) 출신 의병장이오. 삼수갑산에서 왜놈들을 족치며 싸우다가 힘이 다해 아라사 땅으로 넘어갔소. 지난 10년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광산에서도 일하고 철도 노동도 했소. 최돌쏘오 어른은 조선식 이름이 최재형崔在亨이오. 러시아 군대에서 통역장교와 군납업으로 거부가 된 뒤 조국의 독립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소. 의병대를 조직해 안중근 선생에게 지휘권을 주어 고국 땅으로 쳐들어가게 했소. 안중근 선생은 일본군 포로를 살려주는 바람에 패전을 하고 말았는데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서 이토 히로부미를 쐈던 거지. 최돌쏘오 어른은 그때 그 많던 재산을 탕진했는데 3·1만세운동으로 이제 독립운동 기운이 돌게 되자 예순 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군대를 만들었소. 홍범도 장군에게 대장 자리를 맡겨 왜놈들과 한판 붙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소.”
이야기를 듣던 청년 하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독립군 부대는 아무나 받아주나요?”
소금 밀매상은 화톳불이 뜨거운지 불 곁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몸 날래고 총 잘 쏘는 사람이면 받아주겠지. 하지만 지금은 국제간섭군 때문에 갈 수 없으니 기다려야 할 거네.”
밀매상은 장지락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장지락은 고개를 똑바로 들고 그를 응시했다.
“평안도 용천에서 왔습니다.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가던 중에 길이 막혔습니다.”
밀매상은 찬찬한 시선으로 지락을 바라보았다.
“허우대는 크지만 겨우 솜털 같은 콧수염 몇 개 난 걸 보니 나이는 어리구먼. 연해주로 데리고 가서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모스크바로 보내주고 싶지만 나 역시 발이 묶여 있어. 그리고 기차가 제대로 다닌다 해도 무사히 모스크바로 가기는 어려워. 목숨을 내놓고 가야 할 것이야. 가는 곳마다 전쟁터일 테니까.”
장지락은 그곳을 떠나 하얼빈 역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격살한 자리에 서 있었다. 러시아군 의장대원들 틈으로 의연히 걸어 들어가, 막 기차에서 내리는 조국 침략의 원흉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안중근. 그는 그 순간의 광경을 상상하다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유치장에서 숭실학교 고급 학년 선배들이 속삭인 말들이 고스란히 되살아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서간도에 있다는 신흥관무관학교로 가자. 가서 일본과 싸울 방책을 배우자. 일단 그렇게 마음을 굳히자 그것은 오랫동안 염원해온 것처럼 강렬해졌다. 그는 그 학교가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1백50원쯤 남은 일본 돈을 중국 돈으로 바꾸었다.
겨울 7백 리를 혼자 걷다
수중에 돈이 두둑하게 남아 있었지만 장지락은 신흥무관학교가 있는 통화현까지 7백 리를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작은형에게서 훔친 돈이니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만주 땅은 동포들이 적지 않게 살아 침식을 제공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겁 없고 무모한 계획이었으나 그는 든든히 준비를 했다. 저자로 가 몽골인 가게에서 모피로 만든 모자와 장화와 외투와 장갑을 샀다. 충분한 양의 성냥과 부싯돌, 돼지기름, 미숫가루, 압축한 육포肉脯, 그리고 길이가 한 자尺쯤 되는 칼과 나침반 등을 사서 륙색을 채웠다. 압축 육포는 양고기를 몇 달 말려 실처럼 가늘게 찢어내고 다시 말려 수분을 완전히 없애고 방망이로 두드려 부피를 줄인 뒤 양 오줌통에 단단히 다져 넣은 것이었다. 크기와 무게는 아이들 베개만 한데 양 한 마리 분량의 고기가 들어 있다고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장지락은 만주 땅의 혹독한 추위를 참으며 걸었다. 온몸을 모피로 둘둘 감았으나 북풍이 회초리처럼 날카롭게 그의 몸을 후려갈겼다. 나는 걸어야 해. 나의 인내를 시험해볼 거야. 지금까지 늘 참지 못하고 중단하곤 했어. 이번에는 끝까지 해내고 말 거야.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걸었다. 늘 압축 육포를 씹으며 걸었다.
하루 20~30리 길을 걷고 중국식 여관에서 잠을 잤다. 중국식 온돌 캉4)에서 잘 때도 있었지만 그 아래 맨바닥에서 잘 때도 있었다. 그곳은 매우 지저분했으며 좁은 방에 한꺼번에 여러 손님을 집어넣어 이가 끓었다. 장지락이나 중국인 투숙자들은 이를 잡는 데 크게 애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옷을 벗어 밖에다 널어놓으면 한두 시간 안에 모두 얼어 죽기 때문이었다. 수수로 지은 밥이나 두부는 값이 아주 싸서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었다.
4) 坑, 중국식 온돌 침상. 대개 집을 지을 때 벽돌 따위로 미리 만드는데 높이는 70cm쯤 된다. 한국식과 달리 골이 없고 침상을 덥혀 방 전체를 훈훈하게 하고 신을 신은 채 걸터앉을 수 있다.
대개는 큰길에 난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 걷다가 해가 어스름해지면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면 여관을 찾거나 돈 몇 푼을 주고 방 윗목에 끼여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빗나가 한둔을 할 때도 있었다.
천막도 두꺼운 이불도 없었지만 바람 안 부는 아늑한 곳에 우둥불을 피우고 바위에 등을 기대고 잤다. 그럴 때면 늑대나 스라소니로 보이는 짐승들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퍼런 눈만 보였다. 두려움에 등판에 소름이 소르륵 솟아올랐다. “이놈들아, 덤벼봐라!” 그는 벽력같이 소리치며 불붙은 화목과 칼을 휘둘렀다.
그는 낯선 이방에서 매섭게 추운 겨울 길을 걸으며 지혜롭게 적응해갔다. 밀려오는 고독도 이겨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몸을 던질 각오를 갖고 있는가.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조선인의 진정한 자유와 정의는 독립에 있고 그것을 위해 한 몸 던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산짐승과 만주 땅의 혹독한 추위와 고독도 아니고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아직 마을을 찾지 못한 터라 부지런히 걷고 있는데 급히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위험이 닥쳤다는 육감에 그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려 산기슭으로 달라붙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말발굽으로 그를 밟아버릴 듯 달려왔고, 괴한 하나가 총을 겨누며 말에서 내렸다.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씨부렁거리더니 모피 외투와 모자와 장화, 그리고 륙색을 빼앗았다.
목숨을 건지기가 다행이었다. 혼자 활동하는 도둑으로 보이는 그자는 눈이 충혈되고 지쳐 보였다. 지락은 그자가 빼앗은 륙색과 모피를 말 잔등에 묶는 순간 민첩하게 기슭을 달려 올라가 바위 뒤로 몸을 붙였다. 피융 날카로운 소리가 귓결을 스치고 날아갔다. 그것이 총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악물어 배를 땅에 붙이고 애벌레처럼 기어갔다. 그리고 작은 벼랑 아래로 굴러 내렸다. 총탄 한 발이 더 날아왔고 바로 눈앞 둔덕에서 들이박혀 풀썩 흙가루가 솟아올랐다. 도둑놈은 단념한 듯 더 쫓아오지 않았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그가 돈을 발싸개 속에 숨겨두고 있어 빼앗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 반대편으로 산을 내려갔다. 고맙게도 민가가 보였다. 중년의 부부가 아이들 서넛을 데리고 사는 외딴 집이었는데 순박해 보였다. 그는 그 집에 잠자리를 부탁하고 두툼한 솜옷과 신발을 돈과 바꾸었다.
중국인 행색으로 바뀐 그는 액목현額穆縣, 돈화현敦化縣, 화전현樺田縣을 거쳐 몽강현될江縣까지 갔다. 어느 날, 중국인 여관에서 동포 청년을 만났다. 눈썹이 짙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 청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이도 어린데 고생하는군. 어디까지 가는가?”
“통화현 합니하로 갑니다.”
장지락은 청년의 정체를 몰라, 자신이 무관학교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음, 나하고 방향이 비슷하군. 이제부터는 우리 동포들 마을이 많아지지. 내일은 동포 마을에서 자게 될 거야.”
그 청년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청년의 존재는 큰 위안이 되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조선인 농가를 찾아들었다.
“이 추운 겨울날에 젊은이들이 고생을 하는군. 내 집에서 자게.”
농부는 두 사람을 선선히 맞아들였다. 식구는 많고 방이 두 개밖에 없었으나 자기 아이들 방에서 자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오랜만에 된장국으로 먹을 수 있었다.
이틀 뒤에는 조선인 학교를 찾아갔다. 교사가 학교에 딸린 방에 불을 때 주었다. 이불을 들고 와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며칠 안에 학교 문을 닫아야 합니다. 관청에서 폐교 지시와 함께 아이들을 중국 학교에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두 사람이 며칠만 기다려준다면 나도 같이 떠나겠습니다. 나는 여기 있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락은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동행 청년은 혼자 가버렸다.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마을 어른들도 학교에 왔다. 그들은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위는 이러했다.
며칠 전에 마적들이 군대에 쫓기다가 이 마을을 거쳐 식량을 징발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오후에 군대가 와서 교사에게 마적이 이동한 방향을 물었다. 길이 두 갈래였는데 교사는 일부러 틀린 길을 가르쳐주었다. 군대가 기강이 해이해져서, 마적과 조우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었다. 방향을 일러주면 그쪽을 피해 딴 곳으로 추격하곤 했다. 교사의 희망은 군대가 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