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낭송Q’시리즈의 ‘낭송Q’는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의 약자입니다. ‘큐라스’(curas)는 ‘케어’(care)의 어원인 라틴어로 배려, 보살핌, 관리, 집필, 치유 등의 뜻이 있습니다. ‘호모 큐라스’는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만든 조어로, 자기배려를 하는 사람, 즉 자신의 욕망과 호흡의 불균형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뜻하며, 낭송의 달인이 호모 큐라스인 까닭은 고전을 낭송함으로써 내 몸과 우주가 감응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양생법이자, 자기배려이기 때문입니다(낭송의 인문학적 배경에 대해 더 궁금하신 분들은 고미숙이 쓴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를 참고해 주십시오).
2. 낭송Q시리즈는 ‘낭송’을 위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꼭 소리 내어 읽어 주시고, 나아가 짧은 구절이라도 암송해 보실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머리와 입이 하나가 되어 책이 없어도 내 몸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낭송입니다. 이를 위해 낭송Q시리즈의 책들은 모두 수십 개의 짧은 장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암송에 도전해 볼 수 있는 분량들로 나누어 각 고전의 맛을 머리로,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각 책의 ‘풀어 읽은이’들이 고심했습니다.
3. 낭송Q시리즈 아래로는 동청룡, 남주작, 서백호, 북현무라는 작은 묶음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동양 별자리 28수(宿)에서 빌려 온 것으로 각각 사계절과 음양오행의 기운을 품은 고전들을 배치했습니다. 또 각 별자리의 서두에는 판소리계 소설을, 마무리에는 『동의보감』을 네 편으로 나누어 하나씩 넣었고, 그 사이에는 유교와 불교의 경전, 그리고 동아시아 최고의 명문장들을 배열했습니다. 낭송Q시리즈를 통해 우리 안의 사계를 일깨우고, 유(儒)·불(佛)·도(道) 삼교회통의 비전을 구현하고자 한 까닭입니다. 아래의 설명을 참조하셔서 먼저 낭송해 볼 고전을 골라 보시기 바랍니다.
▹ 동청룡:『낭송 춘향전』, 『낭송 논어/맹자』, 『낭송 아함경』, 『낭송 열자』, 『낭송 열하일기』, 『낭송 전습록』, 『낭송 동의보감 내경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쪽은 오행상으로 목(木)의 기운에 해당하며, 목은 색으로는 푸른색, 계절상으로는 봄에 해당합니다. 하여 푸른 봄, 청춘(靑春)의 기운이 가득한 작품들을 선별했습니다. 또한 목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청춘의 열정으로 새로운 비전을 탐구하고 싶다면 동청룡의 고전과 만나 보세요.
▹ 남주작 :『낭송 변강쇠가 / 적벽가』, 『낭송 금강경 외』, 『낭송 삼국지』, 『낭송 장자』, 『낭송 주자어류』, 『낭송 홍루몽』, 『낭송 동의보감 외형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남쪽은 오행상 화(火)의 기운에 속합니다. 화는 색으로는 붉은색, 계절상으로는 여름입니다. 하여, 화기의 특징은 발산력과 표현력입니다. 자신감이 부족해지거나 자꾸 움츠러들 때 남주작의 고전들을 큰소리로 낭송해 보세요.
▹ 서백호 :『낭송 흥보전』, 『낭송 서유기』, 『낭송 선어록』, 『낭송 손자병법 / 오자병법』, 『낭송 이옥』, 『낭송 한비자』, 『낭송 동의보감 잡병편 (1)』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쪽은 오행상 금(金)의 기운에 속합니다. 금은 색으로는 흰색, 계절상으로는 가을입니다. 가을은 심판의 계절, 열매를 맺기 위해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떨궈 내는 기운이 가득한 때입니다. 그러니 생활이 늘 산만하고 분주한 분들에게 제격입니다. 서백호 고전들의 울림이 냉철한 결단력을 만들어 줄 테니까요.
▹ 북현무 :『낭송 토끼전 / 심청전』, 『낭송 노자』, 『낭송 대승기신론』, 『낭송 동의수세보원』, 『낭송 사기열전』, 『낭송 18세기 소품문』, 『낭송 동의보감 잡병편 (2)』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북쪽은 오행상 수(水)의 기운에 속합니다. 수는 색으로는 검은색, 계절상으로는 겨울입니다. 수는 우리 몸에서 신장의 기운과 통합니다. 신장이 튼튼하면 청력이 좋고 유머감각이 탁월합니다. 하여 수는 지혜와 상상력, 예지력과도 연결됩니다. 물처럼 ‘유동하는 지성’을 갖추고 싶다면 북현무의 고전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4. 이 책 『낭송 손자병법/오자병법』은 『무경칠서본』(武經七書本; 中華書局, 1961)을 저본으로 완역한 것입니다. 원본의 편제를 그대로 따르되, 단락 구분은 일부 변경하였습니다.
싸움의 달인 되기 — 두 권의 병서가 전하는 삶의 기예
1. 전쟁과 지혜의 기묘한 동거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은 병가 兵家의 대표적인 텍스트이다. 두 텍스트 모두 치열한 전란의 시대였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때 탄생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전쟁이 일어났다던 춘추전국시대. 병가들의 사유 안에는 이 참혹한 시대를 통과하며 얻은 전쟁의 노하우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아군의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것인가’, ‘어떻게 적의 식량과 자원을 노략질할 것인가’, ‘어떻게 적을 기만하여 방심하게 할 것인가’ 등등. 대놓고 주장한다. 속이고, 이용하며, 약탈하라고. 놀라운 건 기만과 약탈과 권모술수를 장려하는 이 살벌한 논설들이 하나의 ‘학문’으로 공인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책을 ‘학문’으로, ‘고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누구나 생각한다. 전쟁은 반인륜적인 폭력 행위라고. 그래서 전쟁을 비난한다. 도의의 이름으로, 인륜의 이름으로. 하지만 이런 비난은 무용했다. 역사 이래 인간이 전쟁을 그친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오히려 그 잔혹함만 가중됐을 뿐이다. 병가들은 차라리 다른 길로 나아갔다. 섣부른 비판도 맹목적인 예찬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전쟁 안으로 깊이 들어가 전쟁 속에서 사유하고 성찰했다. 그리하여 한 가지 낚아 올린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지혜’였다.
전쟁과 지혜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냐고?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 여신을 보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육중한 무구로 완전무장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혜의 여신’이기도 했다. 전쟁과 지혜의 이 아이러니한 공존! 이 신화는 인류가 가진 값진 지혜는 상아탑의 고담준론 속에서가 아니라 전장의 치열함과 고통 속에서 일궈진 것임을 보여 준다.
전쟁 속에서 어떻게 지혜가 탄생할 수 있나? 전쟁은 파괴를 담당한다. 익숙한 것들, 당연시되는 것들을 깨고 공격한다. 안락한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습관대로 살던 삶에 제동을 건다. 화염이 훑고 지나간 잿더미 위에서 인간은 삶의 허무함을 자각한다. 권력의 무상함을, 부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천지간의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음을, 인간이 부여잡으려 하는 삶의 의지처 중 그 어느 것도 영속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안일하게 무언가에 의탁하려 하는가?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인간이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만물유전의 법칙일 것이다. 변화에 부합하는 삶, 그것만이 우리가 붙들 의지처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어딘가에 안주하려 할 때, 그것은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전쟁을 업으로 삼는 병가들은 이런 변화의 원리에 정통해야 했다. 흐름에 부합해 나를 강하게 하고, 적의 정체된 지점을 공격의 타깃으로 삼는 것. 병가들의 사유는 결국 이 원리의 변용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란 흐름에 의탁해 흐르지 않음을 공격하고, 이로써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병가들은 전쟁에 수반하는 파괴의 힘을 창조와 변혁의 힘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2. 잘 싸운다는 것
병가들은 잘 싸우는 법을 고민했다.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왜 싸우는가? 강해지기 위해 싸운다. 이로움을 얻어 나의 세를 불리기 위해 싸운다. 파괴와 죽음은 전쟁에 수반되는 것이지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싸움을 하다 보면 본말이 전도된다. 분노에 사로잡혀서, 원한의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분노를 주체 못하고 무모하게 싸움에 나섰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기도 한다. 싸움에 이겨 적대자를 없애 버렸다 치자. 그럼 그 다음은? 이런 전쟁에서 결국 얻는 건 없다.
병가들은 싸움의 근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잘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다. 잘 싸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을 먼저 말하자면, 싸움을 통해 내가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적과 싸우느라 나를 해치면 안 된다. 나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싸움을 통해 이로움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의미 있는 싸움이며 승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잘 싸울 수 있을까? 『손자병법』에서는 ‘속전속결’速戰速決을 강조한다. 손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전쟁은 간단하고 빠르게[拙速] 끝내야지, 기교를 부리며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
손자에게 ‘졸속’拙速이란 ‘허술한 일처리’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간단하고 빠르게 실행하라는 의미다. 쓸데없는 기교를 부리느라 일을 오래 끌지 말라는 얘기다. 여기서도 요지는 나를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전쟁에 소모되는 쓸데없는 출혈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아껴야 할 것은 비단 나의 힘만이 아니다. 아군의 피해뿐 아니라 적의 피해까지 최소화해야 한다.
“군사를 쓰는 법에 있어 적국을 온전하게 두고 이기는 것이 가장 좋고, 적국을 격파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적을 파괴하지 않고 온전히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서 손자는 포로를 우대하여 나의 군사로 삼고, 적의 식량과 무기를 포획하여 나의 물자로 삼으라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전쟁은 섬멸전이다. 무차별한 파괴로 적을 소멸시켜 버린다. 적의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한다. 이런 전쟁에서 이긴다고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나를 강하게 하지 않는 승리는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를 보존하고 적도 보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경지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흔히들 알고 있는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란 말은 『손자병법』의 경구를 차용한 나관중의 말이다. 손자는 오히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은 아니라고 얘기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百戰百勝]이 최선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는 철저히 계산해야 했다. 전쟁의 손익을 따져 면밀히 계산하고, 확실히 이길 싸움에만 나서며, 이기지 못할 상대라면 과감히 도망친다. 전장에서 명망과 체면 따위는 의지할 것이 못 된다.
모든 계산이 완벽히 끝났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철저한 준비는 오직 패배하지 않게 도울 뿐이지, 반드시 승리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승리를 좌우하는 것은 ‘적의 실수’이다. 승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내가 실수하지 않게 철저히 준비하면서, 적이 실수하고 방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적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대의명분에 구애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속임수를 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실수를 막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내부의 적’을 단속해야 한다. 병가들은 적을 단일 존재로 고정시켜 놓지 않는다. 아무리 적군이라도 사로잡아 포섭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