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시인의 말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 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2003년 10월 화성에서
이덕규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올린다.
개정판 시인의 말
다 잊었다는데, 모두 다 지난 일이라는데도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슬프고 여린 것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많아서
무작정 미안하고 송구한 사람.
세상 춥고 성한 곳이라곤 없어 보였던 그때, 눈보라치는 내 눈동자에게도
나는 일생 순정을 다해 원금과 이자를 무는 사람.
묵은 빚 갚느라고, 찬바람 무서리 맞으며 철 늦은 꽃을 매단 질경이처럼
입동 근처, 빈들에 파랗게 서 있는 사람.
2022년 화성 들녘에서
이덕규
들판에서 일을 할 때,
어느 순간 힘의 한계에 이르러 미세하게 떨리는 손목관절이나 장딴지 근육쯤에서
꽃 멍울 터지는 소리가 난다.
(몸을 아껴 쓰는 것은 生을 낭비하는 것)
척박한 몸속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 힘겨운 감탄사가
정녕 시의 향기로운 입김이라면……, 나는 여전히 꽃다운 시절이다. ('시인의 말'에서)
당신이 곤고했던 농부의 몸에서 내린 밤
집 앞 텃논에 평생 새긴 별보다 많은 발자국이 한순간 환하게 하늘로 올라가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이제 저 어둑해진 텃논의 유업을 밝히기 위해
날마다 맨발로 소를 몰고 나가
캄캄한 무논을 갈아엎는 심정으로 당신의 빛나는 발자국을 따라가겠습니다.
2023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