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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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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영적 대화, 하느님의 위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영적 대화, 하느님의 위로

진정한 신비주의는 신비가가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고, 그 전까지 붙들려 살던 감각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정신적으로 더욱더 성숙하고 발달된 삶을 사는 과정을 말한다. 신비가들은 수행을 통하여 신적 현존을 체험하고 그 전과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심리학에서는 신비주의를 엑스타시와 같은 현상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신비주의는 인간의 정신발달에서 제일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신적 발달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본다. 그런 생각에서 희랍의 교부들은 신비가들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신적으로 되는 신화(deification)를 지향한다고 하였고, 라틴의 교부들은 신비주의의 목표는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표현을 완화시켰는데 그것들은 같은 말이다. 그들은 모두 신비주의에는 신비가들이 신적 존재를 체험하면서 그 전까지 감각적인 세계에 몰두했던 삶에서 벗어나 초감각적 세계의 현존 속에서 살게 되는 특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신비주의는 생명이 진화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이 물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정체되었던 지점을 뚫고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였다: “신비주의의 궁극적인 결말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영혼에 생명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거대한 약동(躍動)이며 ... 영혼을 더 광대한 모험으로 던지는 거역할 수 없는 충동(poussee)이다”(H.Bergson,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in Oeuvres, Paris : PUF, 1959. 1172).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14세기 독일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인류 문명이 더 높은 단계로 발달하기 전에 정체되어 있는 듯한 막힌 지점을 뚫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상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신비주의는 현대 기독교가 봉착한 많은 문제들, 즉 본질과 존재가 통합되지 못하고, 믿음과 행동이 통합되지 못하여 분열적인 삶을 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이나 도구적인 지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삶을 변화시키고 본질에서 나온 참된 인식인 “체험적 깨달음”(gnose)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깊은 관상을 통하여 “체험적 깨달음”을 얻을 때, 이제 더 이상 감각적인 세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본질로 돌아가 그 전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가 살았던 14세기의 유럽은 근대 세계를 준비하는 격동기였다. 그 당시 유럽 사회에는 십자군 원정이 끝나면서 이슬람 사회에서 발달한 문물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사고가 동시에 유입되었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세속성이 밀려와 교회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하려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서 곳곳에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풍조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 핵심은 교회와 세속사회라는 대극(對極)의 갈등이었다(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현상은 교황과 황제, 플라톤-어거스틴-둔스 스코투스로 이어지는 전통적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아벨라르-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의 갈등, 그것이 표상적으로 드러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회 수도회 사이의 갈등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도미니크회의 신비가 에크하르트는 그 자신이 갈등의 희생자가 되어 나중에 이단 선고를 받았지만, 이 두 가지 풍조를 통합하여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을 구축하는 한편 그 다음에 오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플라톤-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의 사상을 종합하여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자연히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창조론과 그리스철학에서 말하는 유출론(流出論)을 종합하면서 그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갔는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꿰뚫고 있는 유출적 창조 사상이다. 그는 신은 피조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였는데, 그때 신의 본질이 피조물들에게 나누어져서 신과 피조물은 서로 다르게 존재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1260년 경 라인 강 연안의 호흐하임에서 태어났다. 그 시대에는 전환기적 현상으로서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고행자들이 진리를 찾으면서 이탈리아, 남부 독일, 보헤미아 지방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특이한 것은 수도원에 속하지 않았지만 경건한 태도로 자선사업을 하는 베긴이라고 불리는 평신도 공동체와 소위 자유사상가(Free Spirit)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서 에크하르트는 1276년 에어푸르트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쾰른과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공부를 하다가 1311년부터 1313년까지 빠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나중에 교수가 되어 강의도 하였다. 그 무렵 빠리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단 심판에 회부되는 등 커다란 신학적 논쟁에 휩싸였는데, 그 이유는 아퀴나스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전통적인 신학 사상과 잘 맞지 않았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플라톤의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즉 관념론과 경험론을 종합하려고 하였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원천이 되는 이성(raison)을 존중하면서,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 통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한 전통주의자들은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퀴나스 사상과 극단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모두 정죄하려고 하였고, 그 결과 아퀴나스의 사상을 잇던 에크하르트 역시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학문에만 전념하지 않고 교구의 일을 돌보았고,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수많은 설교를 하였다. 이런 그의 사상은 성서를 바탕으로 해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으며, 그밖에도 희랍철학자, 아랍철학자, 유태 철학자는 물론 라틴 교부 등의 사상까지 광범위하게 아우르고 있다. 그의 중요한 저작은 본서에 수록된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 『고귀한 사람』, 『초탈』, 『명제집』 및 창세기 주석, 출애굽기 주석, 요한복음 주석, 설교집 등이 있는데, 그는 이 저작들에서 존재와 무, 일치와 다양성, 선과 악, 자비와 죄, 본질과 존재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언제나 일관된 생각은 그것들은 일자(Un)인 하느님 안에서 하나(un)라는 것이었다. 그는 1326년 쾰른의 대주교 하인리히로부터 이단 조사를 받으면서 이단 심판을 준비하다가, 1328년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죽었는데, 그의 죄목은 그가 신과 인간의 차이를 부정하였고,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였으며, 자선, 기도, 선행과 같은 외적 행동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등 기존의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게 설교하였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그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해서 항변하였지만, 교황 요한22세는 1329년 3월27일 그의 주장 가운데서 28개조가 문제될 수 있다고 최종적으로 선고하였다. 그런데 교황의 칙서 가운데서 흥미 있는 것은 그가 에크하르트를 가리켜서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알고자 하여 신앙의 기준과 깊이 있는 숙고에 상응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평생 동안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뛰어넘어서 이성을 통하여 참다운 인식을 추구했던 그의 행적을 가장 잘 말해 주는 말이다. 이 책은 에크하르트의 글 가운데서 그가 본격적인 저작으로 쓴 것들인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초탈』,『고귀한 사람』과 그 밖에 그가 쓴 글들 가운데서 몇 가지 주제들을 골라서 번역하였고, “초탈”이라는 주제와 관계되는 세 편의 설교를 같이 묶어서 편집하였다. 역자가 이렇게 한 이유는 현대 사회에서 기존의 종교와 교회가 외면 받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참다운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에크하르트의 글들이 그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서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현대인들이 내면에서 찾는 하느님, 특히 내면에서 태어나는 “하느님”(Dieu) 자신인 “하느님의 아들”(Fils de Dieu)을 찾아서 평생 동안 살았고, 그 때문에 박해를 받았는데, 에크하르트처럼 현대 사회에서 똑같은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쪼록 그런 사람들이 에크하르트의 글들을 통하여 그 자신의 “하느님”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은 커다란 하나에서는 같지만,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책의 부록에는 에크하르트의 사상적 특징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역자의 논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와 분석심리학”(『기독교영성의 추구와 분석심리학』, 달을 긷는 우물, 2020)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서 “에크하르트의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이 책의 제목에는 이 책에 포함된 모든 논문들의 제목을 넣지 못하였고, 대표적인 것 두 가지 『영적대화』, 『하느님의 위로』를 넣어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영적 대화, 하느님의 위로』라고 하였다. 2024. 9. 12. 월정(月汀).

분석심리학과 희생제의 : 개성화와 문명의 설립자

희생제의의 역사는 인류의 종교사와 궤적을 같이 한다. 태초부터(in illo tempore) 사람들은 자연의 가공할 만한 세력 앞에서 신적인 능력을 신(또는 무의식)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하여 희생제물을 죽이거나 불에 태우면서 신적인 존재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종교들에는 그 종교의 특성에 따라서 서로 다른 매우 정교한 희생제의 절차가 있었다. 그 종교에서 신봉하는 신이 부성신이냐 아니면 모성신이냐 하는 것에 따라서 희생제물을 불에 태워서 연기를 신에게 올리느냐 아니면 다 먹느냐 하는 것이 달랐고, 시대에 따라서도 희생제물이 동족내 사람, 타부족 사람, 동물 등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희생당한 신”이라고 하면서 이제 더 이상 희생제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만, 인도나 네팔 같은 곳에서는 아직도 갠지스 강가에서 크고 작은 동물들의 희생제의가 행해지며, 현대인들도 여전히 커다란 문제 앞에서 자기가 매우 아끼던 것을 신에게 바치면서 그 나름대로 상징적인 희생제의를 드린다.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히틀러가 아리안 신에게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한 바친 것이나 폴 포트가 크메르족의 신에게 수많은 사람들을 번제(燔祭)로 드린 것도 일종의 희생제의였을 것이다. 희생제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원형(原型)처럼 남아 있는 듯하다. 이 책의 저자 쏠리에(P. Solie)는 세계 곳곳에서 드려졌던 희생제의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희생제의에서 두 가지 의미를 추출하였다. 첫째로 희생제의는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우주의 쇠퇴(衰退)와 싸우려는 제의였고, 둘째로 희생제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짐승을 변환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먼저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엔트로피(entropie, 무질서한 정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쇠퇴하는데, 희생제의는 네겐트로피(n?guentropie, 엔트로피의 반대 개념)를 증가시켜서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려고 시행했던 작업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는 무엇인가 귀중한 것을 신에게 바치면서 희생제를 드림으로써 신과 하나가 되고, 신적 능력을 이 세상에 다시 끌어들여서 우주를 다시 거룩하게 만들면서 새롭게 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새로운 우주도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가 다시 증가돼서 희생제의는 언제나 주기적으로 다시 드려져야 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인류가 본래 신적인 존재?그 존재를 일자(One, Un)라고 부르든지, 상제라고 부르든지, 야훼라고 부르든지 상관없이?와 살다가 그 세계에서 추방되어 쇠약해져가는 속된 사회에 살면서 고통 받다가 희생제의를 통하여 우주를 새롭게 하려고 하는 종교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유대-기독교에서는 사람들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같이 살았었는데, 죄를 짓고 쫓겨나서 이 세상에서 살지만 다시 구원자의 도움으로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살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 신화와 후대 철학에서는 사람들은 본래 올림포스에서 신들과 같이 살면서 어려움을 몰랐는데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 사이의 불화 때문에 황금기에서 쫓겨나 고통 받지만 다시 플레로마(pl?roma)로 복귀하기를 꿈꾼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먼 옛날에 완전하고, 풍요한 세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그 세계를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것은 중국에서도 요순시대를 이상적인 시대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것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의식이 깨어나기 전, 어머니와 미분화된 통합성 속에서 살다가 의식이 생기면서 선과 악, 정(淨)과 부정(不淨), 밝음과 어둠 때문에 대극의 갈등(conflit d’opposite)에 빠져서 고통을 겪지만, 다시 그것들을 새롭게 통합한 상태(열반, 하느님의 나라,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성화 단계)에 도달하려는 것과 같은 구도이다. 그것을 쏠리에는 이 책에서 인류는?계통발생적으로 볼 때?세 가지 의식 단계를 거쳐서 발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희생제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맨 처음에 사람들은 반성-이전(pr?r?flexif)의 상태(네안데르탈인의 호모-싸피엔스)에서 본능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다가, 의식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반성한다는 것까지 의식하는 이중적인 반성(bir?flexif) 상태(호모-싸피엔스 싸피엔스)에서 갈등을 겪으면서 살았고, 결국에는 그 반성까지 넘어서는 반성-너머(trans-r?flexive)의 상태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그가 반성-이전의 인류와 이중적인 반성의 인류를 서로 다른 종(種)으로 본다는 사실이다(그러나 그는 이 책에서는 그 주제에 관해서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쏠리에가 더 강조하는 것은 희생제의에 있는 두 번째 의미, 즉 희생제의가 사람들 속에 있는 짐승을 변환시키려는 제의였다는 점이다. 희생제의는 사람들 속에 있는 본능, 즉 동물적 충동을 변화시켜서 천사로 만들려는 작업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먼저 쏠리에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신적 실재(r?alit? psychique)와 물리적 실재(r?alit? physique)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세상에는 물리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가 있는데, 물리적 실재는 사람, 독수리, 황소 등 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실재(實在)이고, 정신적 실재는 신, 천사, 악마 등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의미화 작업을 하는 실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성-이전의 상태에서는 정신적 실재(쏠리에는 O라고 하였다)와 물리적 실재(쏠리에는 O‘라고 하였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같은 것으로 본다. 미분화된 통합성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시대에 사람들은 황소를 정말 신으로 보면서 믿었다. 마치 정신질환자들이 환상, 환각, 망상 등을 실제적인 것으로 보거나 생각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것은 미숙한 종교인들의 문자주의나 우상숭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적 실재로서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주는 물리적 실재로서의 신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반성적 사고가 가능하여 물리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를 구분할 수 있으며, 황소와 무관하게 신을 믿을 수 있다. 황소는 황소이고, 신은 신이지만 황소 같은 신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쏠리에는 정신적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가치의 세계인 정신적 실재가 필요하며, 거기에서는 반성-너머의 새로운 미분화된 통합성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쏠리에는 정신적 실재의 세계와 병리상태의 중요한 차이점은 주체(sujet)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반성-이전의 상태에서는 주체가 아직 발달하지 못해서 그 정신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지만, 반성-너머의 의식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 두 실재를 구분할 수 있고, 그것들을 상징 안에서 통합할 수도 있다. 그는 이중적 반성 단계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황소-같은-신을 체험할 수 있고, 태초의 에덴동산에서도 살 수 있다. 물론 그 세계에서 계속해서 살려면 그들은 인류가 희생제의를 언제나 주기적으로 드렸듯이, 희생제의를 주기적으로 드려야 한다. 쏠리에는 이런 전제를 가지고 희생제의를 프로이드가 주장한 인간의 초기 정신발달 단계인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 개념을 가지고 살펴보았다. 그는 인류의 희생제의는 처음에는 야만적인 식인풍습 아래서 행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때 사람들에게는 구강충동의 고삐가 풀리면서 희생제물을 죽인 다음 날고기를 먹고, 더운 피를 마시면서 구강적 성애르 충족시키면서 제의적 황홀(orgiasme)에 빠졌다. 그리고 그 쾌락은 나중에 성기기적 수준으로 이어지면서 성적 희열(orgasme)로 고조되어 통음난교가 이루어졌다. 그때 그들은 날고기를 먹고, 더운 피를 마시면서 생리적 욕구만 채운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 제물에 있는 정신적 속성, 즉 그의 생명력과 용감성을 같이 먹었다. 그들에게는 정신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가 혼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황홀경(orgie)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쏠리에는 이런 희생제의들을 살펴보면서, 희생제의에는 절대시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듯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는 희생제물의 변화이다. 희생제물은 처음에는 사람이었다가 그 다음에 동물이 되고, 마지막에는 외적-희생(exo-sacrifice) 없이 자기-희생이 이루어지면서 희생제의는 점차 내면적, 정신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았을 때도 처음에는 희생제물이 동족내의 존재였다가, 타종족의 인물로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살해한 것이나 아가베가 그의 아들 펜테우스를 디오니소스제에서 살해한 것이나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으려고 한 것도 인신공양의 흔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신의 계시를 통해서 이삭 대신 숫양을 제물로 삼고, 할례 의식을 제장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희생제의가 인간 희생?동물 희생?자기 희생으로 이행(移行)하는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희생의 방식이다. 쏠리에는 희생제의가 처음에는 사람들이 희생제물로 살해한 것을 다 먹었다가, 그 다음에는 희생제물을 불에 태우는 형식이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반은 태우고, 반은 먹는 방식이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 희생에서 동물 희생으로 순차적으로 넘어가지도 않았고, 전자가 반드시 후자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지만, 모성여신이 지배하는 종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다 잡아먹는 것이 일반적이고, 부성신이 지배하는 종교에서는 희생제물을 불에 태우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 언제나 시작하는 것은 어머니이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희생제의도 점차 날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다가 사람들에게 의식이 생기고, 반성 능력이 생기면서 정신적, 문화적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의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어떤 공식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면화-정신화되고, 상징화되는 방식으로 변화되었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쏠리에는 인간의 발달단계인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의 특성들은 희생제의 안에서 정신적 개념인 아가페, 카리타스, 에로스로 전화(轉化)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원시인들이 날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는 구강기의 식인풍습은 나중에 기독교인들이 성례전을 통하여 몸과 피의 상징인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아가페(“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로 전화될 수 있고, 항문기에서 배변 충동이 처음에는 본능의 충동적 예속상태에서 행해지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것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카리타스로 전화될 수 있으며, 성기기의 대상에 대한 독점욕은 나중에 그것을 극복하면서 대상을 존중하고, 상호적인 사랑을 나누는 에로스로 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구강기, 항문기, 성기기의 물리적 실재계는 의식의 반성-너머 단계에서 정신적 실재계의 아가페, 카리타스, 에로스로 영화(靈化)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괴물(구강성, 항문성, 성기성)로 될 수 있는 것들이 천사(아가페, 카리타스, 에로스)라는 대응 짝으로 정신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희생제의에서 적(敵)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그와 동화되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화시키면서 형이상학적 가치를 실현시키려고 한다. 그런데 쏠리에는 이렇게 정신화 하는데 중요한 주체(sujet)는 에로스-성기성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성기기에는 자아가 발달하면서 이성 부모에게 집착하고, 이성 부모를 독점하려고 하는데, 거세(去勢) 불안 때문에 주체가 주도적으로 근친상간을 부모에 대한 사랑으로 전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리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를 구분하는 주체를 가지고, 상상계에서 벗어나 상징을 통해서 정신적 발달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쏠리에는 그 작업은 그렇게 쉽지 않아서 인류에게는 언제나 퇴행과 발전이 교대로 이루어졌으며, 상징적 희생제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쏠리에는 고대 그리스, 히브리, 아즈텍, 인도 및 통가족, 이집트, 모로코의 희생제의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인간의 정신발달과 희생제의에 대한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보았다. 역자는 쏠리에의 책을 읽으면서 가끔 설명이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폭넓은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의 해박한 종교학적, 인류학적, 심리학적 지식을 종횡무진으로 활용하면서 그의 논지를 입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아즈텍 신화, 인도 신화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소개했는데, 특히 유대교와 기독교의 발달을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연장선에서 고찰하면서 기독교의 마리아-예수가 여러 신화에서 어머니-연인인 이집트의 이시스-호루스, 프리지아의 키벨레-아티스와 같은 계열에 있으며, 유대교가 그렇게 멸절시키려고 했던 아세라-바알의 짝패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여 흥미를 더한다. 종교적으로 볼 때 기독교와 유대교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발달하면서 그보다 먼저 있었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모성신 체계에서 부성신 체계로 이행한 종교이고, 기독교는 예수의 자기-희생으로 더 정신화 된 종교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모성신을 억압하면 모성신이 무의식에 있다가 의식이 약화될 때 무의식의 지층을 뚫고 다시 나와서 집단적 희생제의로 분출된다고 덧붙이면서, 그것들이 히틀러, 스탈린, 폴 포트의 학살이라고 주장하였다. 무의식의 메카니즘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2020. 8. 1.

섭식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

현대 사회에서 비만증, 폭식증, 거식증 등 섭식장애가 매우 심각한 질병 가운데 하나로 출현한 지 오래 되었지만, 그것들은 치료하기가 가장 까다로운 질병들에 속한다. 그 질병들이 몸과 관계된 것이지만, 원인은 몸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여성들은 몸이 날씬해지면 좀 더 그럴 듯해지고, 멋진 남성들로부터 선망의 눈길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다이어트를 하고, 밥을 굶다가 영양실조에 걸리며, 심지어 죽기까지 하지만 수만 명의 소녀들은 오늘도 다이어트를 하고 거식증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 노심초사한다. 그녀들은 지금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체중이라는 괴물과 싸우면서 몸무게에 온 신경을 쓰며 파괴의 늪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마리온 우드만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융 학파 정신분석가로 활동하면서 이 책 이외에도 『여성의 완벽주의와 치료』, 『의식과 여성성』, 『처녀와 임신』 등 주로 여성의 개성화와 여성의 정신적 발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저술하였는데, 현대 사회에서 여성들을 괴롭히는 섭식장애는 19세기 성욕을 억압해서 생긴 여러 가지 형태의 신경증들이나 20세기 초반 히스테리아 등으로 나타났던 질병이 20세기 중후반에 모습을 바꿔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고 진단한다. 섭식장애는 모든 정신질환이 언제나 그렇듯이 여성들이 그녀의 자아가 그녀들 속에서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외부에서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들만 쫓아가다가 현대 사회의 외향적인 문화적 패턴을 따라서 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지금 그녀들이 되지 못하고, 날씬한 몸이라는 덫에 걸려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나 여성들 모두 외모를 중시하고, 학벌이나 겉치레를 중시하는 것은 가히 병적인 현상이다. 더구나 현대 사회에서 매스컴과 인터넷,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차분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생각과 품성을 가꾸기보다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자극들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려고 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 가지고 판단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그런 풍조를 따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런 도도한 물결 앞에서 자기의 생각을 확립하지 못하고, 거기에 사로잡히면 문제는심각해진다. 그래서 섭식장애에 걸린 여성들은 폭식하면서 그녀들의 몸을 괴물처럼 만들고, 거식증에 걸린 여성들은 먹은 것들을 다 토하면서 고통을 당한다. 우드만은 섭식장애의 치료에서 명심할 것은 두 가지라고 강조한다. 먼저 섭식장애에 걸린 여성들의 문제는 그녀들이 여성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대부분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그녀의 여성성을 거부하고, 여성적인 것이 가진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들은 여성원리를 거부하고, 여성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 그녀들은 무엇인가를 품고, 거두고, 자라게 하기보다는 과제중심적이고, 성취중심적이며, 감정적인 것보다 지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 그녀 자신의 본질적인 여성성과 멀어진다. 그래서 그런 여성들에게는 여성적인 따스함이 없고, 수용적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따라서 그녀들에게 몸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몸(body)은 영(spirit)과 달리 여성에게 속한 것인데, 그녀들이 몸을 무시하고, 홀대하니까 몸이 반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드만은 섭식장애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녀들이 먼저 여성원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음으로 섭식장애에 걸린 여성들은 그녀 자신이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은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 특히 남성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그녀 자신이 되어서 다른 남성들 섭식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성들이나 사회가 만든 틀 안에 자신들을 넣어서 선택 받으려는 것이다. 그녀 자신은 없이 그저 그럴듯한 여성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드만은 “한 여성이 ‘남자의 여자’에 머무는데 만족하는 한,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개인이 되지 못한다. 그녀는 비어있고, 단지 ... 남성의 투사를 받으려는 그릇”이 되고 만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그녀가 날씬한 몸매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욕망의 밑바닥에는 그녀 자신이 그렇게 아름다운 인간, 즉 그녀 자신으로 된 인격체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겉모습만 날씬해지려고 하지 말고, 그녀 속에 그녀 자신을 채워서 그녀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더 아름다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모든 신경을 몸무게에 쏟지 않게 되고, 스트레스만 받으면 단 음식과 곡물과 유제품(乳製品)을 찾지 않고, 삶의 더 근본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이 데메테르-페르세포네 신화이다. 이 신화에서페르세포네는 어머니 데메테르의 곁을 떠나 수선화(나르시서스의 꽃)를 꺾다가 지하계의 신이며 작은 아버지인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에 떨어졌다. 그녀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퍼하는데, 어머니 데메테르는 잃어버린 딸을 찾다가 식음을 전폐해서 지상에서는 곡식들이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 그러다가 제우스의 주선으로 지하세계에 가서 딸을 데려오는데 페르세포네는 하데스가 준 석류를 먹어서 일 년 가운데 2/3은 지상에서 살지만, 1/3은 다시 지하계에 내려가서 살아야 하게 되었다.우리는 이 신화에서 섭식장애의 증상과 치료법이 모두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들은 시간이 되면 어머니를 떠나서 스스로 하나의 여성과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보통 사춘기 무렵이 되면 어머니를 거부하고 아버지를 동경하다가 남성원리에게 겁탈당하면 사회적으로는 유능하게 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섭식장애나 우울증이나 정신-신체적 역자 질병으로 고통을 받지만, 결국 어머니의 도움(모성원리, 여성원리)으로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신화에서는 페르세포네에 대한 하데스의 납치와 데메테르의 지하행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재미있는 것은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서 나올 때 하데스가 준 석류를 먹어서 일 년의 1/3은 지하계에서 여왕으로 살고, 2/3는 지상에서 사는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그 전에 하데스에게 납치당할 때 그녀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남성원리를 취해서 사느라고 어둠 속에서 고통당했지만, 이제는 그녀 스스로 하데스가 준 여성의 열매 석류를 먹어서 지하세계의 여왕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는 어머니와 딸이 아니라 사실은 여성의 두 면을 나타낼 것이다. 여성들이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서 스스로어머니가 되는 발달 과정을 그리는 신화인 것이다. 그때 여성은 처음에는 남성성의 공격을 받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지하세계, 즉 모든 것을 잉태하게 하고, 어둠 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며, 새로운 창조를 모색하는 아픔을 품고 싹트게 하는 그릇으로 재탄생하면서 임무를 완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식물을 먹이는 어머니가 될뿐만 아니라 어둠속에서 잉태되고, 드디어 열매를 맺는 모든 창조성과영감(靈感)의 근원으로 된다. 이것이 섭식장애 증상에 담긴 진정한 의미이다. 2020. 11.20. 月汀.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

자기에 대한 사랑과 대상에 대한 사랑 사이의 주제는 여태까지 도덕적, 철학적 관점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져 왔지만 아직까지 거기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상가들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펼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혼돈스러워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면서 자기애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여 자기애에 긍정하는 듯한 입장을 취한 듯하다. 그런데 프로이드는 성숙한 인간으로의 발달은 자가성애에서 자기애를 거쳐서 대상애로 나아간다고 하지만, 정신분석학자이며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고 하면서자기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면서 엇갈린다. 더 이상한 것은 분석심리학자 C. G. 융이 자기애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역시 정신치료를 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소위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치료했지만 프로이드가 말한 자기애(narcissism)라는 단어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프랑스의 융학파 분석가 윔베르(Humbert)는 “자기애”는 제3자가 바깥에서 관찰했을 때 그렇게 부를 수 있는 현상이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역동을 가리키기에 적합한 말이 아니라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융은 치료를 위해서는 “자기애”라는 단어보다 “자아-몰두” 또는 “자아-점유”를 의미하는 Ichhaftigkeit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하였다. “자기애” 현상은 정신에너지적 관점에서 볼 때, 환자가 자아-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정신에너지를 그의 자아(Ich)에 집중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융은 자기애는 특별히 자기애성 성격장애에서만 발견되는 현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역동이고, 모든 정신질환자들은 병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하여 정신에너지가 더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현대 정신의학에 자기애성 성격장애 치료에 돌파구를 마련한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자기애는 리비도가 자기에게 집중되는 현상으로 병리적인 것이나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추구하는 정신 작용 이며, 자기는 사람들에게 이상(理想)과 포부를 가지게 하는 정신발달의 핵(核)이라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기애가 잘 발달할 때 자기애는 성숙한 인격적 특성인 창조성, 공감, 유머, 지혜 등을 가능하게 하고, 유한성을 수용하게 하는 요소라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격 발달 과정에서 아동들이 부모의 관심 철회, 부재, 질병 등으로 인한 방치 등 정신적 외상을 받으면, 자기애가 정체되어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자기애와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구분한 것이다. 자기애는 프로이드가 주장하듯이 발달하지 못한 정신상태나 질병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태이고,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문제라는 것이다.이렇게 볼 때, 그 동안 있었던 ‘자기애’에 대한 오해와 혼동은 각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기’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전제를 가진 개념이고, 자기애와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구분되지 않으면서 같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코헛은 프로이드가 잘 사용하지 않았던 단어인 ‘자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기 심리학(Psychology of the Self)을 창안하였고, 환자와의 전이 형성이 어려워서 치료가 곤란하였던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프로이드가 주장한 전이신경증과 전혀 다른 바탕에서 생기고, 기제와 증상 역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거울전이와 이상화전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치료법을 고안하였던 것이다. 물론 코헛이 사용한 ‘자기’(self)와 융이 말하는 자기(Self)도 개념이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코헛 역시 다른 정신분석학자들과 달리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정체된 정신발달을 회복하려는 무 의식적인 동기가 담긴 병이라고 목적적인 입장에서 보았던 점에서는 융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 역시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증상은 없애버려야 하는 병소(病巢)만이 아니라 치료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점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슈바르츠-살란트는 쮜리히 융연구원에서 융 학파 분석가 과정을 마치고, 뉴욕에서 융분석가로 활동하는 한편 New York C. G. Jung Training Center에서 교수로 활동하는데, 이 책에서 코헛을 비롯한 위니캇, 컨버그, 건트립 등 후기-프로이드학파 정신분석가들의 이론들을 참고하면서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고찰하고, 그 자신의 치료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살펴보고 있다. 그에게서 재미있는 점은 그가 자기애성 성격치료를 말하면서 코헛 등 정신분석학자들의 개념들과 언어들을 참고하면서도 나르시서스 신화, 데메테르-페르세포네 신화, 디오니소스 신화, 헤르메스 신화 등을 동원하여 자기애성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고, 치료에서는 더욱더 신화적 상상력과 영적 차원 이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원인과 진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학파의 분석이 도움을 주지만, 치료에서는 융의 원형적이고 목적론적 접근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슈바르츠-살란트에 의하면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분석심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정체성의 문제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사람들이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면서 자아를 확립하고, 자아가 자기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여러 가지 병리현상을 보이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은 오이디푸스기 전후 부모와의 그들의 내면에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과 어느 정도 과대한 자기의 핵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신적 외상 때문에 그것이 형성되지 않아서 자기를 더 과장되게 병리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질병이다. 그들은 내면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그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매우 강하고, 그럴 듯하게 과시하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슈바르츠-살란트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의 특성은 첫째로 방어가 너무 심해서 뚫고 들어갈 수 없고, 둘째로 치료자의 해석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셋째로 다른 사람의 비판을 참지 못하고, 넷째로 사물에 대해서 종합적 접근을 하지 못하며, 다섯째로 공감능력이 부족하고, 여섯째로 자부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일곱째로 삶의 이야기나 과정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고, 여덟째로 남성적 기능과 여성적 기능이 모두 저하되어 있으며, 아홉째로 긍정적인 원형적 배열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이것들이 그들의 삶을 전반적으로 파괴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탁월한 능력을 타고났지만 그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를 위해서는 정신분석학파의 방법론인 전이-역전이 해석만으로는 부족하고, 좀 더 심층적이고, 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자기애성 성격장애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은 환자의 개인적인 부모와 아동의 개인적인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역동보다 훨씬 더 깊은 누멘적인 층과 역동이 있으며, 그들이 정말 확립하려는 자기 역시 사회 적응을 위한 자기만이 아니라 영적 차원을 가진 자기(Self)이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발달을 위해서는 코헛이 말한 정신분석학 개념에서의 자기보다 더 깊은 의미에서의 자기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에는 원형적 차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에는 디오니소스적 통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환자들이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보이는 것은 유아시절의 정신적 외상으로 발달이 정체된 원초적 자기가 아폴로적인 가치들과 목표-지향적 정신들이 두드러지게 하면서 시기심, 격노, 과시주의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그것은 그들에게 디오니소스적 전일성이 깨졌기 때문이므로 다시 전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애적 성격장애자들의 문제는 코헛이 지적한 대로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으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치료의 과정은 길고, 어려울지라도 원리는 단순해진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은 디오니소스가 타이탄에게 잡아먹혔다가 다시 태어나듯이 그들도 그들 자신이 어떤 점에서는 타이탄에게 잡혀 먹어서 괴물적으로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상태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데메테르-페르세포네 신화가 말하듯이 하데스(강력한 남성적 요소)에게 겁탈 당했던 코레(Kore, 본래 처녀라는 의미가 있다)가 지하ㅇ세계에 갇여 있다가 어머니 데메테르의 도움으로 지하세계에서 주기적으로 지상에 나왔다가 다시 지하세계로 들어가 지하계의 여왕 페르세포네(Persephone)로 되듯이 재탄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은 남성이나 여성 모두 너무 남성적인 경직된 태도에서 벗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합된 전체 인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역자 서문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은 자신의 중요성에 대해서 과도한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를 대단하게 생각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할 줄 모르며, 대인관계에서도 착취적이고, 오만한 태도로 임해서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문제에 빠진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고통을 당한다.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정신질환의 분류 체계인 DSM 체계와 ICD 체계에서는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장애로 취급하지만,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모든 정신질환에서 그 편린(片鱗)들이 나타나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서도 그런 모습들을 작으나마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특별한 정신질환으로만 취급할 것이 아니라 정신의 어떤 상태, 즉 융이 말한 자아-점유(Ichhaftigkeit)인 “정신에너지가 온통 자아에게 점유되어 있는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슈바르츠-살란트는 융의 그런 이론적 토대에서 융 학파 정신분석가인 마이클 포댐과 후기 프로이드 학파 하인츠 코헛의 이론을 참고하면서, 자기애적 성격은 유아시절의 정신적 외상 때문에 원초적 자기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미분화된 전체성의 부정적 경향들을 나타내는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자기애적 성격은 사람들이 아동기로부터 청소년기로 넘어가면서 자아를 확립하고,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정신에너지가 자신을 방어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자아는 원초적 자기에 압도돼서 내면에 있는 영적 차원을 가진 자기(Self)를 실현시키지 못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강하고, 그럴 듯하게 과시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발달하지 못한 자기이다(코헛은 자기를 긍정적으로만 보았던 융과 달리 자기 역시 발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바르츠-살란트가 자기애적 성격인 결국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증상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다. 자아는 사람들이 타고나는 자기를 실현시켜서 정신을 구성하는 대극적 요소들인 남성성-여성성, 외향성-내향성, 사고-감정, 개인성-집단성 등에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져서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데, 자기애적 성격은 원초적 자기가 그대로 나와서 괴물처럼 사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저자는 이 책에서 자기애성 성격장애의 치료법을 두 가지 신화들을 소개하면서 제시한다.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있는 상태는 디오니소스가 괴물인 타이탄에게 잡아먹힌 상태인데,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에 의하여 그 심장이 세멜레 안에서 보존되어 다시 태어났듯이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든지, 하데스에게 겁탈 당했던 페르세포네가 데메테르의 도움으로 지하세계에서 나왔듯이 여성성을 되찾아서 자신의 본래적인 남성성과 통합되어야 한다. 그때 디오니소스가 타이탄에게 잡아먹힌 상태나 데메테르가 하데스의 남성적 영향력 아래 있는 상태는 자이애성 성격이 아들러(Adler)가 말한 남성적 항의(masculine protest)와 같은데, 자기애성 성격장애자들이 여성성을 되찾는 것이 치료의 관건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런 내용들을 융은 물론 후기 프로이드 학파와 신화 이야기를 곁들여서 심도 있게 고찰하여 흥미롭다.

전이·역전이와 분석심리학

전이와 역전이는 정신치료의 실제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이지만, 중요한 것만큼 많이 다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용이라서 그 작용이 이루어지는 순간 분석가나 분석자가 알아채지 못하거나, 그들것이 정신분석의 이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에 관한 것이라서 분석가 자신이 스스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이와 역전이는 많은 경우, 시간이 지난 다음에나 그것들이 전이나 역전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도 전이보다는 분석가 자신의 역전이를 깨닫는 것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분석가들은 분석 시간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환상을 자연스러운 생각이나 감정으로 인식하고, 그 뒤에 있는 무의식의 역동이 그와 분석자 사이에서 생긴 것이라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전이의 경우는 분석자(본서에서는 analysand를 피분석자라고 번역하지 않고, 분석자라고 번역할 것이다. 현대 정신분석에서는 분석과정에서 그의 능동성을 더 많이 촉구하기 때문이다. 영어의 analysand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analysant에서 ant는 영어로 ing로서 analysand은 analysing으로서 ‘지금 분석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 즉 분석자이다. 내담자는 분석 받는 사람이 아니라, 분석하는 사람인 것이다—역자 주)의 태도, 옷차림, 분석자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분석실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에서 느껴지고, 그것들은 종종 분석자가 가져오는 꿈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되지만, 역전이는 분석가의 무의식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역전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더구나 프로이드가 역전이를 병리적인 것으로서 분석가 자신의 문제라고 주장해서 분석가 자신이 역전이에 대하여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 있다. 그러나 융이 말했듯이, 모든 정신분석적 치료는 분석가와 분석자의 의식과 무의식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화학적 작용이고, 그것을 통하여 제3의 새로운 화합물이 나오고, 그것이 분석자는 물론 분석가에게도 어떤 변환(transformation)올 가져오기 때문에 전이와 역전이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융은 프로이드와 달리, 전이와 역전이에는 개인적인 수준, 즉 분석자가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있었던 정신적 내용을 분석가와의 관계에서 재연(再演)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에서 나오는 원형적 수준이 있고, 그것은 개성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즉 전이와 역전이 역시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하려는 자기-조절(self-regulating) 작용이라고 하면서, 전이와 역전이에 담긴 보상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가는 분석자의 전이와 자신의 역전이가 나타나면, 방어적인 태도로 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꿈처럼, 꿈의 내용과 함께 관심을 기울이면서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융이 전이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치료는 가능하고, 전이가 이루어지지 않는 치료가 더 다행스럽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가 무의식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지, 전이와 무의식은 바람처럼 자기가 불고 싶은 대로 불어서 그것들이 나타날 경우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거기에 목적적 의미가 들어있다면, 전이와 역전이의 활용은 정신분석 치료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전이와 역전이를 많은 각도에서 다루며, 특히 역전이를 성애적 역전이와 공격적 역전이로 나누어서 그것들이 어떤 경우에 생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그의 임상경험의 예를 들면서 소개한다. 성애적 역전이나 공격적 역전이는 분석가들이 때때로 분석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환상인데, 그것을 프로이드의 이론으로 보면 병리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 목적적 의미가 담긴 원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해석은 분석가의 방어를 풀어주고, 치료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그의 치료 사례 가운데서 성애적 역전이와 공격적 역전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잘못 파악했을 때 생겼던 치료적 혼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전이와 역전이의 주제에 대해서 깊이 다루어, 정신분석적 치료를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본서는 미국 뉴욕에서 융 분석가로 활동하는 스타인버그의 Circle of Care: Clinical Issues in Jungian Therapy(1990)를 번역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가 분석했거나, 그가 뉴욕의 융분석가 수련생들에 대한 지도분석 과정에서 다루었던 많은 사례들을 주로 전이와 역전이의 주제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먼저 그는 전이와 역전이에 대한 융의 생각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 융의 생각이 왜 그렇게 변화되었으며, 전이와 역전이에 대한 융의 기본적인 생각은 어떠했는지 하는 점 및 후기 융학파 분석가들의 전이와 역전이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발달했는지 살펴보면서 융학파 분석가들이 전이와 역전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는 전이와 역전이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적 치료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주제들, 즉 우울증, 자기애성 성격장애, 경계선성 성격장애, 분리불안, 시기심, 이상화 등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특히 그는 우울증에 대한 융의 이론을 여러 각도에서 다루어서 우울등에 대한 이해를 깊이할 수 있게 하였다. 역자는 우리 말 책 제목을 『전이∙역전이와 분석심리학: 정신치료의 중요 주제들』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정신치료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주로 전이와 역전이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전이와 역전이에 대한 융의 이론을 이렇게 자세하게 다룬 것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분석심리학 이론을 중심으로 정신치료를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상담이나 미술치료, 모래놀이치료, 음악치료 현장에 있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모든 치료에서는 전이와 역전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그 의미를 모르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당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치료와 입문의례: 정신치료의 원천

이 책의 저자 삐에르 쏠리에(Pierre Soli?0는 본래 정신과의사가 아니라 내과 의사였다. 그 러나 그는 많은 내과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그들의 질병에는 생리적 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원인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심층심리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프로이드, 융, 라깡 등의 책들을 보다가 결국 융의 분석심리학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이 책에서 많이 언급하듯이, 인간은 사유인(homo sapiens)일뿐만 아니라,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이며, 시적 인간(homo poetica)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사유인과 종교인과 시인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시부족의 마을에는 마을 한 가운데 하늘로 통하는 토템 기둥이 있고, 그 주위에 마술사의 오두막과 추장의 오두막 등이 있고, 그 뒤로 일반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있으며, 그 뒤에 월경 등으로 더럽혀진 여성들과 금기 등을 어긴 사람들이 마을로 다시 복귀하기 전에 잠시 거처하고 속죄하는 곳과 이방인이 머무는 곳이 있으며, 그 뒤로 넓은 미개간지가 있다고 하였는데, 미개간지는 사람들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무서운 곳이다. 나쁜 영들과 악마들이 사는 곳으로 그것들은 끊임없이 인간 세계를 노리고 있으며, 인간의 삶에 수많은 문제들과 불행을 가져오는 곳이다.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것도 그들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건강과 병, 밝음과 어둠, 길과 흉, 창조와 파괴 등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삶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결국 정(淨)과 부정(不淨)이라는 큰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런데 정은 사람들이 신의 질서 안에서 신과 조화로운 관계에 있을 때의 상태를 말하고, 부정은 사람들이 신의 질서 바깥에서 신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때 사람들의 존재는 미개간지에 있는 알지 못하는 영의 공격을 받아서 화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게 된다. 따라서 치료도 사람들이 부정을 씻고, 다시 정하게 돼서 다시 신의 질서에서 신들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행해진다. 그래서 원시사회에서는 수많은 의식과 의례들을 통해서 정화시키고, 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으며, 그 의례들은 지금도 주술의학의 형태로 부분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말하는 신화는 여전히 많으며, 프로이드와 융이 탐구한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은 신화를 가지고 보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쏠리에는 이 책에서 현대에서 사는 1930년대 미국 원주민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 민들의 의례 등을 살펴보는 한편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의 신화와 의례를 살펴보면서 고대인들이 어떻게 치료를 했는지 살펴보고, 그 흔적들이 현대 의학에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파헤치고 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이 걸렸던 병과 그들이 행했던 치료법은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고, 현대인들의 삶은 지금 입고 있는 옷만 다르지 그들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으로서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거룩한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 질서와 금기를 깨트리면 병이 들고, 다시 그 거룩한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꾸는 꿈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우리의 꿈은 등장인물과 현장의 모습만 달라졌을 뿐, 원형적인 구조는 똑같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원시인들을 쫓아왔던 멧돼지가 자동차로 바뀌고, 적이 들고 있던 창이 악당의 흉기로 바뀌었을 뿐 상징적으로는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현대 심층심리학, 특히 융의 분석심리학과 현대의 인문학은 그 체계를 현대화시킨 것인데, 앞에서 말했던 원시부족의 마을의 구조는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정신구조와 매우 흡사하다. 마을의 중심부의 토템 기둥은 인간 정신의 중심인 자기(自己)에 해당되고, 남성들의 오두막과 있는 일반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자아에 해당되며, 그 뒤에 있는 부정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미개간지는 개인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룩한 것을 훼손하지 않고, 질서 안에서 원시를 극복하고, 문명을 이룩하고,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더 높은 단계의 의식을 수립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원시부족에서 사춘기 무렵의 청소년들에게, 특히 남자 아이들에게 입문의례를 혹독하게 행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무의식의 거대한 영역을 뚫고 막 생기기 시작한 의식이 무의식에 다시 잠겨서 원시성에 떨어져 근친상간과 식인풍습을 다시 하려는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과거의 그를 거의 죽게 하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하려고 그렇게 혹독하게 입문의례를 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샤만들의 입문의례이다. 샤만들은 대부분 이미 입문의례를 거친 성인 들이지만 치료자가 되려면 입문의례를 한 번 더 거치는데, 그들의 입문의례도 일반인들의 입문의례 못지않게 혹독하다. 그들은 입문의례를 하기 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서 몹시 고통을 받는데, 그때는 다른 치료법이 없고, 스승이 되는 샤만을 만나서 그들이 걸렸던 병에 맞는 보호령(保護靈)을 모셔야만 나을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한 소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때 샤만 후보자들도 사춘기 소년들이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해체와 재통합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치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이 악령과 맞서고, 악령들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병에 걸리게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금기를 어겼을 수도 있고, 아니면 타고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여간 그들은 그 병에 걸려서 원인도 모르는 동안 몹시 고통을 받다가 입문의례를 통하여 치료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구조는 악령의 침입?병과 고통?해체, 죽음?입문의례, 재통합가 되는데, 쏠리에는 그것이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서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죽이고 세계를 건설한 것이나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가 세트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이시스의 도움으로 다시 통합되고, 호루스를 낳은 것과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계에 있다가 데메테르의 도움으로 다시 지상으로 왔다가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동시에 다스리게 된 엘레우시스 신화 사이에 근본적으로 같은 구조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치료의 신화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신에는 몇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구조 속에서 살고, 병들고, 치유 받고, 죽 으며 다시 산다는 것이다. 다만 달라진 것은 과거에는 그것들이 집단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지만, 현대에 들어올수록 개인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지고, 개인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병과 고통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문화를 향해서 나가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쏠리에는 거룩한 것은 언제나 인간 세계로 내려오려고 하는 듯하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 혁명이고 프랑스에서 1968년에 일어났던 혁명이다. 그때 프랑스 인민들은 늙은 악령에 사로잡혔던 것 같은 과거의 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웠는데, 그것을 하게 한 것은 각 개인들만이 아니라, 거룩한 힘에 사로잡혔던 개인들이다. 인간을 더 각성된 상태로 나아가게 하려는 거룩한 것이 과거의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로 거듭나게 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프랑스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 것의 출현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루르드의 성모의 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와 전혀 다른 영역에서도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만 불기 때문에 거룩한 것만이 알 수 있다. 인간은 다만 거룩한 것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지, 주의 깊고, 신중하게 살펴보아야(융이 종교적인 태도라고 말한 것) 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찬 바람에 떠날려 갈 수도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와 우리는 그 거룩한 것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쏠리에는 그의 관심 분야인 정신치료를 하다가 범위를 인류학적, 문화학적, 종교적 고찰로까지 넓혔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사유인이며, 종교인이고, 시인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 책이 분석심리학과 정신치료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읽혀졌으면 한다. 본사에서는 다음에 쏠리에의 <<분석심리학과 희생제의: 개성화와 인류문명의 토대>>를 출간하여 독자들과 더 갚은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2019. 9. 20. 月汀.

통과의례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그 중요성이나 숫자들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예식들과 의례들을 행한다. 아이의 돌잔치, 결혼식, 장례식은 사람들이 제일 많이 행하는 예식들이고, 그밖에도 사람들에 따라서 취임식, 개업식, 세례식, 성직 수임식 등을 행한다. 그러나 과거 사회에서는 그런 의례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고, 훨씬 더 번거롭게 치러졌다. 그러면 과거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번거로운 절차들을 행하였고, 현대인들은 왜 그런 것들을 행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렇게 된 결과 현대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답변을 먼저 하자면, 과거에 사람들이 그런 의례를 행했던 것은 그들이 인간의 삶에는 여러 가지 단계와 상황들이 존재하는데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단계나 하나의 사회적 상황에서 다른 사회적 상황으로 넘어가려면 그냥 넘어갈 수 없고 반드시 일정한 예식과 의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나 상황 사이에 악한 세력이 작용하여 해를 끼쳐서 사람들이 달라진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의례들을 거행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아놀드 반 제넵은 통과의례(rite de passage)라고 이름붙였다. 우리는 옛날 사람들의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서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세상의 모든 것들 속에서 신적인 것(또는 영적인 것)이 작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동물—인간—신은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개인—사회—우주 역시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이어져 있고, 삶과 죽음, 대지와 인간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 어디에서나 작용하는 신적인 힘의 작용을 믿으면서 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려고 하였다.그러나 현대인들은 지성이 발달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적인 것들의 개입을 불편하게 생각하면서 거부하였다. 탈-성화(脫聖化)시킨 것이다. 그 결과 물질적으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궁핍해졌다. 사람들은 그 전까지 그들의 실존에 영속성을 느끼게 해주었던 사회, 세계, 우주와의 연결이 끊어져서 파편화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의 기반이었던 대지와의 관계가 단절돼서 불안해졌고, 죽음이라는 필연적 종말 앞에서 분쇄될 수밖에 없었다. 고대인들은 저녁에 해가 지지만 아침에 다시 뜨는 것을 보거나 달이 기울었다가 차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삶에도 그렇게 주기적으로 기울었다가 차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무리 어렵고, 혹독한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재탄생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의 취약한 힘만 가지고 맞서느라고 당황해하는 것이다. 삶의 거룩함과 그 거룩함을 확인시켜주는 의례를 상실한 결과 삶이 궁핍해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아놀드 반 제넵(Arnold van Gennep)은 프랑스의 민속학자, 민족지학자로 동양어학교(Ecole pratique des langues orientales) 등에서 이집트학, 원시종교, 이슬람문화 등을 공부하였고, 스위스 뇌샤텔 대학교에서 민속학을 가르쳤고, 프랑스 민속학회를 창립한 민속학, 종교인류학 연구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책은 『현대프랑스 민속학개론』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며, “통과의례”(rites de passage)라는 개념은 그의 대표적인 학설로 인간의 정신에 관한 가장 중요한 통찰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통과의례"라는 용어는 이제 민속학이나 종교인류학 분야 이외에 모든 인문학 연구에서 사용되는 중요한 핵심 용어(key word)가 되었다. 이 책에서 제넵은 사람들은 삶의 중요한 고비마다 입문식, 약혼식, 결혼식, 장례식은 물론 임신과 출산, 이방인을 맞는 의례, 여러 가지 종류의 첫 번째로 행해지는 의례들을 행하면서 사는데, 그 의례들이 서로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형식이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볼 때 똑같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할 때 거행하는 “통과의례”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의례를 거행하지 않으면 사(邪)가 끼기 때문이다. 제넵은 모든 통과의례에는 분리(separation), 전환(marge), 가입(agregation) 등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이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 하나의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넘어갈 때는 그 전 단계와의 분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아서 다소 긴 기간의 전환기를 보내면서 전환의례들을 행하고, 그 다음 단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며, 그 다음의 새로운 단계나 상황에 가입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물론 신입자(nivice)를 맞는 집단의 구성원들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모든 통과의례에는 이 세 가지 의례가 정확하게 구분돼서 치러졌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결혼식을 하기 전에도 오랜 기간 동안의 약혼 기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고, 결혼식도 너무 세속적(世俗的)으로 치러진다. 그래서 이혼이 많은 것인지 모르는데, 그것은 비단 결혼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삶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다. 삶에 거룩한 영역이 없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서 같이 잃어버리는 것이 "의미"인데, 현대인들은 지금 삶은 많은 영역에서 의미도 없이 "소비하듯이" 치르고 있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제넵의 주장 가운데서 재미있는 것은 모든 통과의례는 본래 사회적인 목적에서 치르는데, 거기에 심리적, 상징적 성격이 함께 담겨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넘어갈 때 물질적 “영역의 통과”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어떤 마을이나 집으로 들어가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통과의례에서는 문, 문지방, 주문(柱門)을 넘어가거나 기둥 아래를 통과하는 절차들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상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넘어가는 행동"에 심리적으로 통과하는 것과 물질적으로 통과하는 것이 합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통과의례는 사람들이 그 전 단계에서는 죽고, 새로운 단계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인간은 언제나 상황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면서 우주의 새로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물론 방대한 지료들을 수집해서 인류의 정신 속에 있는 사고체계를 추출해낸 치밀한 성격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넵은 수많은 민족들의 생활사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구조(構造)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현대인들이 마치 우물가에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지금은 많이 잊어버린 옛날의 습속들과 모습들을 떠올리면서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놀라움과 함께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 무의식에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2022. 9. 20. 月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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