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로 쓰면 소설책이 열 권이 넘는다는 말들을 한다. 그렇다. 누구든 살아온 삶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로는 부족하다. 족히 열 권은 되어야 한다. 아니 열 권이 아니라 백 권인들, 그 아픔과 분노를 다 담아 낼 수 있을 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이야기로 드러내는 것보다 삼키고 묵언하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작가는 그리 생각한다. 그런데도 작가는 오십을 훨씬 넘긴 후반에 이르러 처음의 창작집을 낸다. 많은 고민이 있었다. 뒤떨어진 생각으로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다.
소설을 쓰고자 했던 것은 소년 시절부터의 소망이었다. 그런데 현실적인 상황에 시달려 미뤄두었다. 돌아보면 그냥 미뤘던 것만은 아니었다. 해마다 몇 편의 습작과 완성작을 모아 두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마다 깊은 아픔으로 시달렸음을 고백한다. 이제 그 중 몇 편을 묶어 이 책으로 펴낸다.
어릴 적의 기억과 성장기의 흔적들을 챙기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능했던 삶을 늘 반성하면서도, 살아온 삶이 결코 미련하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이다. 중심부에서 주류로 살기보다는, 비주류로 사는 삶이 일상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삶 속에서 가능한 당당하려 했다. 그것이 실제 삶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병행하여 교육운동과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고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많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얻고 들은 것도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얻었고, 이 작품들 속의 인물들로 등장한다. ‘미루’, ‘상길’, ‘한선생’, ‘황치우’ 등이 그러하다. 물론 소설 속의 인물은 실제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작가의 소산일 뿐이다. 그렇다 해도 이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삶이 조금은 더 진정성에 이른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중요성은 입증된다 할 것이다.
‘황대봉’과 ‘연희’, ‘추홍노인’에 이르면 삶의 다양성이 주변인물로 확장된다. 가족들의 삶과 교류하던 이들의 삶을 확장 전이하여, 문득 그들로부터 편안하지 못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쪽수의 제한으로 꼭 포함시켰던 인물을 뒤로 미루었다. 더 소중한 인물로 등장시켜 미뤘던 이야기로 후에 소개할 참이다.
이들의 삶은 어쩌면 나름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치열하게 산다고 해서 사랑에 대해 마음을 닫을 수는 없다. 사랑은 그 어떤 이념이나 투명한 삶의 양상보다 우선이다. 사랑이야말로 평생을 두고 그리움으로 눈물지을 수 있는 순수라고 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러 작가는 그동안 살아온 삶이 어떠했는지 돌아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치열하지 못했던 부끄러움도 앞선다. 문득 쉽지 않았다는 생각뿐이다. 그 상황이 펼쳐질 때마다 고통 받았고, 선택의 기로에서 늘 서성댔던 기억으로 사뭇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누군들 단호하고 분명하여 옳기만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애써 편해지려 한다. 사족으로 덧붙이는 말이다.
또한 충실하고자 했던 삶이 진보적이었는지, 현실적이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느 것이든 실제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 자신의 삶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라면, 충실성이나, 도덕성의 잣대로 가름하는 것도 크게 우선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끝까지 살아갈 일에 대해 고민할 뿐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정리할 것이 있다.
그간 미뤄두었던 글쓰기 작업은 어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 미룰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주변의 선생님들이 하나, 둘 교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을 송별하며 나눈 술잔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교육운동의 주체적 면모도 일신해야 함을 알고 있다. 솔직한 심정으론 글을 위한 시간이 절실히 더 필요하다.
더는 미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선택의 자리에 서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일정 부분 「오늘의 문학사」이헌석 사장님과 편집실 선생님들의 책임이 적지 않을 것이다. 느닷없는 「문학사랑」신인작품상으로 무한한 사랑을 베푼 결과이기 때문이다. 한편 갑작스런 기쁨으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음도 사실이다. 이후 남은 시간들을 소설 쓰기에 전념하여야 하고, 후속 작품의 성과를 스스로 기대한다.
그간 남 모르는 글쓰기 작업을 ‘재미있다’는 말로 부추긴 아내 김혜성 선생님과 막연한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응원한 누이와 동생들, 가족들께 깊은 고마움을 지면으로 전합니다. 또한 많은 일들에서 함께한 공주민협 회원들의 성원과 서투른 문장들을 꼼꼼히 챙겨 읽고 교정해주신 공주여고 류지남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독자님들의 즐거움도 기대합니다.
2014년 새뜸 여항에서
그리스 로도스는 신들의 속삭임이 현실에서 어우러지는 곳이다. 로도스 동남쪽 끝 린도스 성에 기둥과 일부 벽이 남은 아테네 신전 바닥을 뚫고 사는 올리브나무는 작가가 살고 있는 공주 공산성의 느티나무와 다를 게 없다. 느티나무는 금줄을 두른 당산나무의 흔적을 지닌다.
사람들이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은 흔적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흔적이 이야기가 되어 흐를 때 비로소 작가는 눈물로 받아들인다. 작가의 문을 열고 선뜻 들어서는 이들을 사뭇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강을 건너고, 바다로 나가 고독한 그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온 몇 해 동안 공산성을 걸었다. 공산성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들을 보았다. 문득 그림을 글로 쓸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꼬리잡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우리의 삶이 놀이의 연속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 『린도스 성의 올리브나무』를 「도서출판 <등>」 소설선 첫 작품으로 올리게 되어 기쁩니다. 또 걱정이 앞서지요. 늘 마수걸이는 간절합니다. 새 하루를 열기 때문이거든요. 독자들의 관심은 작가의 난전을 여는 마수걸이입니다. 고맙습니다.
어릴 적 시장으로 가는 길 양쪽에 있던 중화요리 집을 기억한다. 짜장면을 볶는 독특한 향 때문에 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각급 학교를 졸업하던 날 으레 그 식당에 들러 짜장면이나 붉은 짬뽕을 먹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도 그곳에서 짬뽕 국물로 술을 마시고 짜장면을 먹고 돌아왔던 것을 기억한다.
오래 전 기억은 흔적으로 남아 가끔 현실 속에서 되살아온다. 흔적 속의 사람들이 불쑥 손을 내밀 때가 있다. 그것이 현실이든 비현실이든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된 일인지 작가의 삶이 경계선에서 머물거나 그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지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글을 쓴다. 가슴이 답답하고 온몸이 뻐근할 때가 많다.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몸을 펴라고 권유한다.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펼치는 대로 따라가 글을 쓴 경험이 있다. 운동선수에나 있을 법한 힘 뺀 글. 절묘한 즐거움이 있다.
<모 주석>은 이미 현실이 아니지만 그를 현실 속에서 종종 만난다. 작은 호주머니에 들어갈 크기의 붉은 비닐 포장 어록, 열두 컷 사진 속의 모 주석은 진지하거나 웃고 있다. 그의 눈빛에서 많은 이야길 들을 수 있다. ‘모 주석의 어록을 공부하여 그의 가르침과 행동을 따르자’라는 린빠오의 말이 새삼 경구로 남는다.
『모 주석은 이렇게 말하였다』는 주인공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으로 읽으면 좋겠다. 특별하지도 않거니와 크나큰 성과를 이룬 사람이 아닐지언정, 아무렇게나 혹은 되는 대로 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서면 그들 이야기가 정겨울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은 좀 참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편집한 유정숙과 도서출판 등 편집진에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