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넘이 무렵, 청회색의 산보다 그림자가 더 큰 어둠을 거느린다.
산과 그림자.
우리네 삶 역시 그림자 속 허깨비 놀음이라는데.
그 그림자 속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존을 위한 삶은 늘 고단하다.
제 영역을 확보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그악스러워지고, 허약한 심신은 그를 좇느라 허덕인다.
그 와중에도 세상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서열이 정해지고 서로의 밥이 되어 먹고 먹힌다. 촘촘하게 엮인 삶의 현장이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집단을 유지하는 데 공이 큰 존재들이 있다. 흔히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한 집단의 평화를 위해 내 주장은 조금 누르고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 그들은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느끼지 않는다. 조직을 위해, 체제유지를위해 만들어 놓은 법과 관습을 홀로 존중한다. 그리고 달게 인내한다. 폭력이라는 의식없이 행해지는 폭력,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면서 아물지 않는 상처를 헤집어 뜯는 원초적 억압을 고스란히 견딘다. 견딘다는 생각도 없이 견딘다. 교육받은 대로. 이런 폭력과억압은 관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무의식적으로 행해진다. 부모라는, 자식이라는, 형제라는, 부부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그렇게 삶을 견디는 우리네 이야기다.
빅토르 위고가 그랬다던가.
‘인정人情이란 한 권의 책 속에 있는 쉼표와 같다’고.
그 인정에 이끌려 누군가의 삶 앞에 쉼표처럼 살아온 약자들의 아픔을 얘기하고 싶었다.
인연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온 나의 분신들의 이야기다. 사사건건 짚고 넘어가자니 번거롭고, 분연히 떨치고 틀을 벗어나자니 많이 아파할 주변이 보여 참는 사람들. 예전의 엄마 같은 사람들 얘기다. 그들에게 당신은 왜 용기가 없느냐고 그냥 분연히 떨쳐버리고 일어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음으로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그럴 용기는 없고 생각은 많은 소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인정이 쉼표라면, 그들의 발화되지 못한 분노는 이 책 전편에 깔려 있는 복선쯤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작품 속의 인물들은 아주 소소하고 약하게, 참으로 침울하게 그 부당함을 고발한다.
낮술로, 헛웃음으로, 그리움으로, 맨발로…….
참으로 착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소심한 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