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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안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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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큰글자책] 원서발췌 가곡원류>

안민영

안민영은 그의 스승인 박효관(朴孝寬, 1800∼1880?)과 더불어 《가곡원류(歌曲源流)》를 편찬한 가집 편찬자이자 가창자(歌唱者)로 활동했다. 그들이 편찬한 《가곡원류》는 조선 시대 시조사를 논함에 있어 핵심적인 자료이기에, 그동안의 연구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안민영은 당시 문화계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기에, 19세기 시조문학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당시 문화계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음에도, 정작 안민영의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그에 관한 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남아 있는 기록은 자신의 작품으로만 엮은 가집 《금옥총부》다.
안민영은 주옹(周翁)과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자(字)는 '성무(聖武)'와 '형보(荊寶)'다. 특히 '구포동인'이라는 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내려 준 것으로, 북악산 기슭의 삼계동에 있는 그의 집 후원에 '구(口)'자 모양의 채마밭이 있어 붙여졌다고 밝히고 있다. 《금옥총부》의 기록을 통해서 안민영의 출생 연도가 1816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70세 되던 해인 1885년에 안경지라는 인물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의 작품이 있어, 적어도 그때까지는 생존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1880년에 세상을 떠난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의 발문(跋文)에 아내와 '함께 따른 지 40년으로 금슬처럼 벗하였다(相隨四十年, 琴瑟友之)'라는 기록으로 보아, 대략 25세(1840) 무렵에 부인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옥총부》의 기록을 통해서, 안민영은 젊어서부터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교류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민영이 66세가 되던 해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지은 작품의 발문에, '내가 젊어서부터 성격이 호탕하고 편안하게 지내며 즐기고 좋아하는 일은 풍류(風流)였으며, 배운 바는 모두 음악이고 가는 곳은 모두 번화한 곳이요 시간이 있으면 또한 세상을 벗어날 생각도 있었다(余自靑春, 豪放自逸, 嗜好風流, 所學皆詞曲, 所處皆繁華, 所交皆富貴, 而有時亦有物外之想)'라고 토로하였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가집의 수록 작품과 발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과의 인연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흥선대원군과 그의 아들인 이재면의 후원으로 비교적 여유로운 조건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수 있었으며,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낭만과 풍류를 즐기는 생활이 가능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흥선대원군과의 만남은 안민영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인데, 1867년부터 '오랫동안 모셨다(長侍)'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심복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하정일과의 인연을 강조한 작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와의 인연을 바탕으로 흥선대원군과 연결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안민영은 당대 최고 권력자의 후원 아래 당대 문화의 중심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왕실 인물들과도 인연을 맺어 그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작품을 짓기도 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과 별장들을 출입하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들의 후원에 대해 《금옥총부》의 작품들과 발문에 상세히 기록을 남긴 것으로 이해된다.
창작 연대가 확인되는 안민영의 마지막 작품은 1885년에 지은 것인데, 이후 창작된 작품의 연대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1880년에 서문을 쓰고도 새롭게 창작한 작품들까지 가집에 추가하여 보완했던 편찬 태도로 보아,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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