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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모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말과 우리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6세에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로 살았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드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를 절대시하지 않고 스승으로 여겼으며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했다. 1910년(20세)에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했다.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등과 문우(文友)로 교유했으며,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으로 1년간 재직했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했다. 류영모는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한 후에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생전에는 함석헌과 김흥호 같은 20세기 한국 기독교를 이끈 ‘지도자들의 스승’으로서 알려졌다. 1981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야 독창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사상가로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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