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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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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신자하 시선>

신위

신위의 시조는 장절공(壯節公) 평산(平山) 신숭겸(申崇謙, 877∼927)이며, 가계는 14세(世) 문희공(文僖公) 신개(申?, 1374∼1446)를 중시조로 하는 문희공파다. 신개는 태조 2년(1393) 식년문과에 급제, 세종 29년(1447)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의 귀족으로 누대에 걸쳐 학자·문인·예술가·장군 등이 배출되었다. 부 신대승(申大升, 1731∼1795) 역시 영조 38년(1762) 진사 급제에 이어 경연시 문과에 장원하고, 영조 52년(1776) 승지, 정조 8년(1784) 가선대부의 가자(加資)를 받았고, 이어 사헌부대사헌,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했다.
자하의 외가는 물론 처가 역시 당대의 명문이었으며, 특히 장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뛰어난 서화(書?)는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자하는 이같이 가규(家規)가 드높은 경화사족의 가문에서 영조 45년(1769) 8월, 한성 장흥방에서 대승의 차남(次男)으로 출생했다. 자를 한수(漢?), 호는 홍전(?田)이라 했다가 후에 자하라 했다. 창강이 찬한 <연보>에 의하면 “그가 어려서 경기 시흥의 자하산 별야에서 수학했으므로 ‘자하’로 자호했다” 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에 산견되는 남다른 가문 의식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취학은 “9세부터 시·서·화를 익히기 시작하여 삼절의 기틀을 잡았다” 한다. 특히 시는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신자하 시초발(申紫霞詩?拔)>에 의하면 “자하의 시는 그 처음은 우리 집안 참봉군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가 옹방강을 흠모해 배우면서 비로소 스스로 유소입두를 주창했다(紫霞之詩 其始盖吾家參奉君, 其後入中國 服事翁覃溪 始自命由蘇入杜)”라 했다. 이건창이 말한 ‘오가참봉(吾家參奉)’은 곧 이광려(李匡呂, 1719∼1782)다. 그는 당시(唐詩)에 매진해 한때 시단의 거벽이었으니, 이만수(李晩秀, 1752∼1820)는 <참봉군제문(參奉君祭文)>에서 “시인으로서의 풍격을 도연명(陶淵明)에 견주었는가” 하며, “국초 3백 년의 문교를 받아서 이광려가 났다”고 극찬했다. 이처럼 그는 문(文)의 박지원과 동격으로 추앙되던 학시(學詩) 스승이었다. 따라서 자하 역시 명민한 학당파(學唐派)였다. 그러나 창강의 <연보>에 따르면 “처음엔 성당의 시를 배웠으나, 연경에 가 옹방강에게 시학을 묻고 돌아와 이전의 작품 일체를 버렸다(始學盛唐 後改學蘇東坡,悉棄前作)” 했고, 자하 스스로도 <후추류시 병서(後秋柳詩 ?序)>에서 <전추류시>를 분고(焚稿) 운운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전 ≪경수당집≫ 소재 4천여 수의 시 작품은 연경으로부터 돌아온 1812년(공 43세) 이후의 작품이란 논법이거니와, 진실로 아쉽긴 그가 이광려에게 익힌 성당시 수용 여하를 가늠해 볼 수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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