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드라마 <안나> 원작소설)의 정한아가 8년 만의 장편 소설로 3월 독자를 만난다.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된 파국이 연쇄적으로 번져나갔던 전작처럼 신작의 주인공 '이마치'도 남을 속이는 인물이다. 전작의 인물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는 속임으로써 인정받는 인물이라는 것. 연기자로 크게 성공한, 개인적인 삶에 모두 실패한 60대 여성 배우 이마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대안적인' 가상현실 치료를 받기로 한다. 과거의 어느 시점의 스스로를 만나, 자기 자신이 출연하는 연극의 무대에 선 이마치는 스스로를 찾기 위해 마지막 연기를 펼친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연기였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 연극은 십대 시절 그녀가 경험한 유일한 환희였다. (28쪽)
동두천 뒷골목의 클럽, 어둠과 자유와 환락이 있던 극장, 아파트 60층을 향해 무한히 뻗은 계단, 디자인 하우스 같은 노란 진료실, 야구공이며 레고 같은 실종된 아이의 물건이 보존된 방 등 무대 장치 같은 공간을 오가며 이마치는 삶의 곡절을 연기한다. 존재감이 대단한 배우는 <모비 딕>의 바다를, <햄릿>의 궁정을 스스로의 연기만으로 눈앞에 그려낼 수 있다. 이야기를 장악한 스토리텔러 정한아는 독자를 '이마치'라는 배우의 삶을 목격하는 관객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아들을 잃은 비통한 여배우,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지 못한 여성, 언니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아이, 모친에게 학대당한 아이를 오가는 강렬한 드라마의 끝에서 독자-관객은 이 불운한 인물의 기억에 자신의 삶을 포개는 경험을 하고, 마침내 대단한 극 한편을 보고 나온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개운한 얼굴로 책장을 덮게 될 것이다.